외계소년의 지구 생활기 結
쇼타로에게 다정함이 본성이라면, 소유욕은 성찬의 본성이었다. 넓게 보면 무심하게 보였지만, 나의 것이라는 바운더리가 만들어지는 순간, 무조건적으로 손에 잡히는 거리에 존재해야만 했으니. 유년시절 가지고 놀던 로보트도, 애착 베개도, 탐험가를 꿈꾸며 오랜 시간 동안 함께했던 망원경과 미니 손전등, 모험가 키트까지. 로보트의 팔이 하나 빠지고, 망원경의 렌즈에 금이 가고, 미니 손전등엔 더 이상 불이 들어오지 않아도 버리지 못하는 미련함까지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아끼고, 사랑해도 헤어져야 하는 순간은 있는 거야.'
부모님은 더 좋은 걸 사주겠다고 망가진 장난감을 보며 성찬을 살살 달래곤 했지만, 성찬은 그 문장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끼고 사랑하는데 왜 굳이 헤어져야 하지? 모험가의 꿈을 접는 한이 있어도,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고 있던 걸 낯설고 새로운 것으로 교체하고 싶지 않았다. 많은 추억을 함께했으니까. 그리고 그 추억엔 웃기게도 쇼타로가 있었다. 미니 손전등의 불빛 속에서 환하게 웃던 그 외계소년. 그러니 쇼타로도 이미 나의 것이라는 사유지 안에 속해져 있었다. 정신과 치료를 긴 시간 동안 받아도, 모든 사람이 꿈이라고 치부를 해도, 손바닥에 알약의 수가 점점 늘어나도. 그 외계소년의 부재가 길어질수록 성찬은 정신적으로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방송에서 외계인은 아마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내용이 흘러나오던 날, 울며 겨자 먹기로 쇼타로의 존재를 그저 꿈이라고 타협하기로 했을 때, 아주 웃기고 황당하고 인생이 망가질 정도로 좋았던 꿈을 꾼 거라고 사유지에서 쇼타로를 지워낼 때, 성찬은 처음으로 무력함을 느꼈다.
하지만 결국 외계소년은 존재의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성찬의 곁으로 돌아왔다. 8년의 시간? 헛수고가 아니었다. 무력함을 느끼게 한 모든 허탈하고 지긋지긋했던 그 순간을 한 방에 지워주는 사건이었다. 외계소년은 성찬에게 최악의 생일과, 최고의 생일을 선물했다. 쇼타로라는 이름도 가지고, 그렇게 5년의 시간을 약속한 순간, 지워냈던 사유지는 더욱더 견고하게 벽이 세워진다. 두 번 다시 보내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정신과 의사가 필요한 순간은 외계소년을 기다리는 어린 정성찬이 아닌, 창백하고도 푸른 눈을 가진, 자신에게 돌아온 외계소년에게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현재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타로를 다시 보내주기로 마음먹었던 이유는, 사랑이라는 빌어먹을 감정 때문이다. 자신은 오래 살지 못하고, 쇼타로는 다른 행성의 여행 이야기를 할 때 가장 밝게 웃었으니까. 결국 자신은 슬픔을 안겨줄 수 있는 존재밖에 될 수 없었다.
'아무리 아끼고, 사랑해도 헤어져야 하는 순간은 있는 거야.'
그렇게 이해하지 못했던 문장이 업보처럼 쌓여서 몰려온다. 일주일의 연애 기간. 끝이 정해진 유통기한 임박의 사랑. 그리고 필연적으로 남겨져야 하는 존재와 떠나야 하는 존재.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부터 연애 시작이야. 성찬의 말에 쇼타로는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사랑한다고 말해 줘.
외계소년의 지구 생활기 結
지구인의 사랑을 미디어에서 나름 배운 쇼타로라고 해도, 현실에서의 사랑엔 영 감각이 없었다. 그래도 일주일의 기한 동안 연애를 하자고 한 건,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욕심이었다. 사랑한다고 말해 줘. 쇼타로의 애원에 성찬은 비로소, 사랑해². 고백할 수 있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 쇼타로의 혀에선 며칠 전 욱여넣었던 사전의 활자 맛이 나는 것 같았다. 잉크와, 특유의 종이의 맛. 그리고 더 이상 식도가 아프지 않았다. 헛구역질도 나지 않았고, 돌연변이처럼 애정이 괴상하게 자라고 있다고 해도, 면역체계가 생기는 것처럼 몸이 적응 과정에 있는 것 같았다.
“일주일 동안 뭐 할까.“
“모든 걸 다 해 보자.“
학교는? 쇼타로의 물음에 성찬은 지금 학교가 중요한가.... 투덜거리며 쇼타로의 입술에 다시 한번 입을 맞춘다. 도톰하고 말랑한 입술. 어떻게 하면 이 입맞춤을 오래 기억할 수 있을까 고뇌하며 쇼타로의 턱을 조심스럽게 쥐자, 입술이 작게 벌어진다. ...타로, 키스는 내가 마지막이면 안 돼? 성찬의 말에 쇼타로는 입술이 벌어진 상태로 두 눈만 깜박이다가 푸하하, 웃음을 터트리며 답한다. 노력해 볼게. 하여튼 이 외계인은 그 어떤 부탁에도 확답하지 않았다. 거짓말을 싫어하는 외계인. 무지하게 솔직한 외계인. 그래서 사랑스러운 외계인.
인간의 삶에서도 일주일은 아주 짧고, 시간이 지나면 가물가물한 추억이 될 텐데, 불로장생과 비슷한 삶을 사는 외계인은 하물며 어떻겠는가. 백 년 뒤, 오백 년 뒤, 자신이 이 세상에서 사라졌을 때, 그러니까, 이 지구라는 행성 속에서 자신을 기억하는 인간이 아무도 없을 때. 그때도 정성찬이라는 이름을 기억할까? 기억하면 좋겠다. 아니, 기억하지 못했으면 좋겠다. 상반된 마음이 뒤죽박죽 엉킨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쇼타로는 작게 속삭인다. 일주일을 영원처럼 지내는 거야.
9월 7일, 9월 8일, 9월 9일, 9월 10일... 학교에 가지 않고 서로 붙어만 있어도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만 갔다. 성찬은 수영을 못한다는 이유로 바다를 썩 좋아하지 않았지만, 함께하면 좋아지지 않을까? 라는 쇼타로의 의견을 수렴하기로 했다. 버스에 내려서 넓은 바다를 마주한 순간, 천둥이 쾅, 울리더니 소나기가 왕창 쏟아졌고, 쇼타로는 으하하, 크게 웃으며 성찬의 손을 붙잡고 바다를 향해 뛰어들었다. 첨벙, 첨벙. 발목에서 종아리 그리고 허벅지까지 파도에 잠기는 순간, 성찬은 절대 자신이 하지 않을 행동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두운 하늘,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 파도 속에 잠긴 몸. 성찬은 젖은 앞머리를 뒤로 넘기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얼굴에 닿는 빗방울이, 꿈이 아닌 현실이라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의 어깨를 부드럽게 끌어안는 쇼타로의 팔까지도. 서늘한 체온, 성찬은 쇼타로의 허리를 감싸안고 목덜미에 입술을 묻는다.
“너 지금 나랑 체온 비슷한 거 알아?“
“추워서 그래.“
“그만 나갈까?“
“조금만 더 있자.“
아, 여기서 죽어도 좋을 것 같다. 성찬은 기묘한 상상에 빠진다. 어떻게 보면 딱 죽기 좋은 장소였다. 파도에 휩쓸려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는 유일한 장소. 왜 죽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걸까. 헤어짐을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아서? 네가 없는 이 행성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분명 열 살에 만났을 땐 어떻게든 꾸역꾸역 잘 살았다. 그땐 왜 견딜 수 있었고, 지금은 왜 견딜 수 없는 걸까. 좋아하는 마음이 커져서? 제 눈 앞의 외계인이 인생의 일부를 이미 크게 차지하고 있으니까?
기묘한 낌새를 느꼈는지, 쇼타로는 성찬의 이마에 딱밤을 가볍게 때린다. 어이, 이상한 생각 하지 마아. 외계인은 독심술도 하나? 뭐라고 변명도 하기 전에 쇼타로의 입술이 닿는다. 우와, 이번 키스는 엄청 짜다. 바보 같은 이 외계인의 감상에 성찬은 결국 웃음을 터트린다. 결국 자신을 웃게 하는 것도, 울게 하는 것도 창백한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었다.
“다음엔 달달한 거 먹고 키스할까?“
“각설탕 먹고 키스해 보고 싶어.“
성찬의 휴대폰 앨범에는 새로운 폴더가 생겼다. 폴더명 [타로]. 사진 찍는 것엔 취미도 없었고, 여행을 가거나, 친구들이 오늘 하늘 예쁘다는 감탄사를 뱉으며 모두 사진을 찍을 때, 성찬은 사진보다는 눈에 담는 걸 선호하는 쪽에 더 가까웠다. 그러나 곧 사라질 소중한 추억이라면 말이 달랐다. 굳이 카메라 렌즈를 보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성찬은 가장 자연스러움을 담고 싶었다. 축축하게 젖은 발, 커다란 수건으로 얼룩덜룩한 탈색 머리를 터는 모습, 그리고 찍는 모습을 발견하면 피하지도 않고 나 찍어? 씨익, 웃는 모습까지. 그럼 쇼타로도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받았던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가방에서 꺼내서 풍경 한 컷과, 성찬을 찍곤 킥킥, 웃었다.
바다를 다녀온 직후, 성찬과 쇼타로는 하루를 꼬박 앓았다. 다른 행성에선 태풍을 겪고, 얼어붙을 추위를 겪어도 멀쩡한 몸뚱어리였는데, 뭐가 이렇게 약해졌는지. 끙끙 앓으며, 은석에게 [ 태어나서 첫 감기에 걸림 ] 메시지를 전송하자, 곧 답장이 도착한다. [ 면역체계가 바뀌면 몸도 바뀌니까 조심해. ] 그리고 한 통 더 도착하는 메시지. [ 나도 지구에 온 이후로 가끔 지독한 감기에 걸려. ] 면역체계가 바뀌고 있다는 건 애초에 없던 감정이 발생하면서 생기는 증상일까? 쇼타로는 메시지를 여러 번 읽는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은석의 메시지는 꼭 사랑에 빠지면 닮는 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알겠다고 답장을 보내려고 할 때, 성찬은 뒤에서 쇼타로의 허리를 끌어안고 나지막이 말한다. 문자 그만하고, 나한테 집중해..... 열감이 오른 목소리에도 소유욕이 다분한 느낌에, 쇼타로는 휴대폰을 협탁 위에 올려두고 몸을 돌려 성찬을 마주 안는다.
“너랑 가고 싶은 곳 있어.“
“어디?“
“천문대.“
“내일 갈까?“
“내일 몸 괜찮으면.“
성찬은 대답 대신 쇼타로의 뺨에 입을 맞춘다. 이제 좀, 쇼타로가 인간처럼 느껴졌다. 외계인은 하루를 꼬박 앓아야 체온이 지구인처럼 올라가는구나. 형, 나 지금 아픈데 행복해. 성찬의 고백에 쇼타로는 소리 내어 웃었다. 내가 없어도 행복해야 해. 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삼키기로 한다. 대신, 네가 행복하면 나도 좋아. 라는 말로 화답하며, 곧 새근새근 잠에 드는 성찬을 새벽 내내 지켜볼 뿐이다.
첫 만남이 엊그제 같은데 언제 이렇게 컸담. 미니 손전등을 들고, 외계인과 더 대화하고 싶다고 말하던 맹랑한 소년. '꼬마'라는 호칭에 꼬마 아니라고 투덜거리던 소년. 8년 동안 자신을 잊지 않고 기다려준 바보 같은 소년. 애정이 반듯하게 잘려 나간 행성의 종족들도 성찬을 본다면 모두 돌연변이로 변하지 않을까, 쇼타로는 감히 판단했다. 반듯한 이마부터 높은 콧대, 그리고 입술, 턱까지 손끝으로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며 쇼타로는 펄펄 끓는 열감과, 이 조용하고도 평화로운 행복을 기꺼이 즐기기로 한다. 좋아해. 가장 좋아해. 자고 있는 바보 같은 지구소년에게 고백까지 하며.
우리처럼 작은 존재가 우주의 광대함을 견디는 방법은 오직 사랑뿐이다.
천문대 내부의 벽에 붙어 있는 메모지를 쇼타로가 소리 내어 읽자, 성찬은 굴절망원경으로 관측을 하며, 칼 세이건이라고, 천문학자가 쓴 콘택트라는 소설에 나오는 문장이야. 말을 이어 나간다. '우리'처럼 '작은 존재'라..... 쇼타로는 고개를 기울이며 글씨가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곧 시선을 떼어 내고, 성찬의 곁에서 여기서 서쪽으로 쭈욱, 가면 우리 행성이야. 작게 속삭인다. 무슨 옆 동네 가는 것처럼 쉽게 말하는 쇼타로의 말투에 성찬은 허탈하게 웃을 뿐이다. 옆 동네면 얼마나 좋을까. 서쪽으로 얼마나 가야 해? 성찬의 질문에 쇼타로는 손끝으로 뺨을 긁적이며, 정확한 수치보단 체감의 시간을 알려 주기로 한다. 시간과 공간이 말랑말랑한 공처럼 느껴질 만큼 가야 해.
“타로.“
“응.“
“내가 천문학자가 된다면 어떨 것 같아?“
“네가 아니면 누가 우주와 별을 연구하겠어?“
바아보오. 쇼타로는 말끝을 길게 늘이며 성찬의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는다. 천문학자라는 꿈도 결국 자신이 원인일 것이다. 이것 봐. 결국 한 인간이 초현실적인 무언가를 만나면 인생이 바뀌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성찬, 미안해. 쇼타로의 나지막한 사과에 성찬은 미간을 좁히며, 천문대와 가장 어울리면서도, 가장 어울리지 않는 존재의 뺨을 한 손으로 감싸 쥔다. 말랑한 뺨. 누가 외계인이 이렇게 생겼다고 믿을까. 그것도 외계인이 인간을 닮은 것도 아닌, 인간이 외계인을 닮은 거라고 하면 이 세상이 뒤집힐 것이다. 뺨을 감싸 쥔 손에 힘이 약간 들어가자, 쇼타로의 입술이 오리처럼 튀어나온다. 그냥, 내가 네 인생에 너무 관여한 거 같아서. 오리 입술로 웅얼웅얼, 잘도 말하는 모습에 성찬은, 사랑해. 짧게 대꾸한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마법의 단어라도 되는 양 쇼타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사랑한다고 왜 안 해 줘. 성찬의 재촉에 쇼타로는 한참 동안 망설이더니 하라는 사랑 고백은 하지 않고,
“나 지금 귀엽지.“
서로만 알 수 있는 암호를 보낼 뿐이다.
지구에서 문명적으로 가장 발달한 걸 묻는다면 쇼타로는 망설임 없이 바로 예술이라고 답할 수 있었다. 성찬의 헤드셋을 쓰고 지구의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의 감동을 잊지 못했으니까. 우주에도 물론 음악, 시, 미술, 그 외의 모든 예술이 존재했지만 이렇게까지 감정이 과하게 포함되어 있지는 않았다. 구구절절한 사랑 노래 혹은 애정과 분노, 비통함을 담은 클래식...... 심지어 어떤 노래를 듣고 있으면 알고리즘으로 다른 노래까지 추천을 해 주는 시스템도 있었는데, 그 추천 노래마저도 시대를 불문하고 쇼타로가 가지고 있는 취향과 비슷했다. 무슨 노래 들어? 성찬은 노래를 듣고 있는 쇼타로의 곁에 앉아서 휴대폰 화면을 확인한다.
I will
- The Beatles
“나중에 이 노래 들어 봐.“
“지금 같이 듣자.“
“아니, 나중에. 나 없을 때.“
한번 꽂힌 노래를 주야장천 한 곡만 반복 재생하는 쇼타로의 습관 덕에, 성찬의 이름으로 가입된 프로필 내 최근 자주 들은 노래 순위 상위권에는 비틀즈의 I will이 순식간에 자리 잡고 있었다. 굳이 같이 듣지 않고 부재를 알릴 때 들어 달라고 요구한 의도를 알 수 없었지만, 성찬은 일단 그 요청에 긍정으로 응답할 뿐이다.
지구 생활을 정리하며, 쇼타로는 마지막으로 은석의 카페에 방문했다. 성찬이 카페 문을 열려고 할 때, 쇼타로가 손목을 잡더니, 외계인끼리 할 이야기가 있어서. 중얼거린다. 질투를 할 상황이 전혀 아닌 건 알고 있었지만, 그 대화에 괜히 자신이 배제되는 느낌이 썩 좋진 않았다.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그들만의 세상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니. 알겠어, 빨리 나와. 성찬은 심드렁한 표정을 짓곤 고개를 끄덕인다. 응, 5분만 기다려. 냉큼 들려오는 대답에 성찬은 5분이라.... 5분에 괜히 포커스를 맞춘다. 지구 생활을 하면서, 쇼타로의 시간 개념은 점점 정확하게 잡히고 있었다. 사실 그 5분이 한 시간이 된다고 해도 성찬은 기다릴 수 있었다. 아니, 두 시간, 다섯 시간, 이틀, 일 년, 십 년이 걸린다고 해도. 다시 돌아온다는 약속만 한다면.
“이별 인사 하러 온 거야?“
“응, 밖에 기다리고 있어서 금방 가야 해.“
“그 애가 잡고 싶은 기회가 너일 수도 있어.“
“…일단 기회부터 주고.“
쇼타로는 익숙하게 각설탕이 채워진 병을 열더니, 각설탕 두 개를 입 속에 넣으며 중얼거린다. 내가 없을 때 더 괜찮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으니까. 그게 운명일 수도 있잖아. 앞니로 각설탕이 오도독, 씹히는 소리가 요란하다.
은석은 병실에 누워 있는 자신의 연인을 생각한다. 내가 죽기 전까지 곁에 있어 줘. 연인의 목소리에 은석은 지구인처럼 살기로 마음먹었다. 사랑하는 이가, 이 행성에서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은석과 연인은 서로에게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을 기회를 주지 않았다. 당연히, 자연스럽게 서로가 기회라고 여겼으니까.
“나도 기회를 줘야 했을까?“
“너, 바보야?“
나름 진지하게 머리를 굴리던 고민을 '바보'라고 딱 잘라서 말하며, 쇼타로는 각설탕 하나를 은석의 입 속에 밀어 넣는다. 달다. 너무 달아서 혀가 마비될 것 같은 맛. 은석은 표정을 약하게 구긴다. 그리고 들리는 쇼타로의 목소리. 아프다며, 아플 땐 곁을 지켜 줘야지.
사랑은 역시 무용하다는 걸 은석은 다시 한번 깨닫는다. 한 명은 각설탕을 여러 개 먹어도 거뜬하다면, 한 명은 각설탕 하나에 혀가 찌릿찌릿 통증을 느끼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서로를 기회라고 생각하는 사랑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게 기회를 주는 사랑. 정말 이 외계인 둘은, 지구라는 행성에 와서 사랑 한번 다양하고도 요란스럽게 하고 있었다. 이별이 두렵지 않아? 은석의 질문에 쇼타로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천천히 말을 고른다. 아마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정성찬의 잠든 모습, 코에 있는 점과 눈 위에 있는 점, 자신의 목덜미와 어깨에 입술을 묻은 상태로 끌어안는 그 온기, 천천히 사랑을 고백하는 그 언어를 가진 목소리까지. 쇼타로는 그 질문에 굳이 대답을 하지 않기로 한다. 대답을 할수록 점점 더 허름해질 것이다. 대신, 어이, 돌. 네 커피 맛 되게 그리울 거야. 쇼타로는 애써 유쾌하게 말했고, 은석은 커피가 아니라 각설탕이겠지. 무심하게 말하며, 각설탕을 가득 채운 병을 건넨다. 잘 가, 이별 선물이야.
4분... 그리고 정확히 5분. 카페 문이 열리더니 각설탕이 채워진 병을 품에 안은 쇼타로가 나온다. 많이 기다렸어? 성찬은 고개를 젓는다. 8년을 기다리게 한 예전과 상황이 분명 달랐다. 정확히 5분이라는 시간을 맞춰서 나오는 푸른 눈의 외계인. 그리고 그 외계인은 집으로 돌아가자 속삭인다.
“저번에 왜 너를 사랑하냐고 물어본 적 있지.“
“응.“
“나 사실 운명을 믿거든.“
고향에서 귀찮다는 이유로 비행체 자격증도 취득하지 않았으면서, 어느 날 문득 천둥이 다섯 번 울리면 돈을 다 털어서 새로 나온 최신식 시계를 구매해야지. 운명을 걸며, 콧노래를 흥얼거린 이야기를, 그리고 정말 마른하늘에 천둥이 정확히 다섯 번 울린 어이없고도 운명적인 사건을 무용담처럼 자랑했다. 천둥이 정확히 다섯 번 울렸다니까! 이게 운명이 아니면 뭐겠어? 킥킥, 웃는 소리에 성찬도 결국 따라 웃는다. 이 대책 없는 외계인이 사랑스럽다. 웃는 소리라고 녹음해 둬야 할까. 보고 싶을 때 들을 수 있게. 이 순간이 꿈이 아니라고 계속 복기할 수 있게. 이 웃음 소리를 영원히 기억할 수 있도록.
“내가 지구에 불시착하고.”
“응. “
“너를 만난 것도 운명이 아닐까.“
“사랑한다는 말을 빙빙 돌려서 말하네.“
“천둥에 운명을 안 걸었으면 우린 만나지 못했을걸.“
그래서 미안하다구. 네 삶을 훔쳐서. 쇼타로는 또 한 번 사과한다. 평범한 삶을 훔친 도둑이 된 느낌을 영 지울 수 없었다. 성찬은 그 사과를 못 들은 척 넘기기로 하곤 대화 주제를 돌린다.
나 어렸을 때, 녹색 보도블록 밟는 게임을 주로 했어. 그 말에 쇼타로는 바닥을 바라보더니 바로 녹색 보도블록만 밟기 시작한다. 깡총, 깡총, 뛰는 폼이 꽤 웃기다고 생각하며, 성찬은 천천히 쇼타로의 보폭에 발걸음을 맞춘다. 쇼타로의 행성에서도 '금 밟지 않기 게임'이 있었다. 지구에서 서쪽으로, 시간과 공간이 공처럼 말랑해질 만큼 먼 거리에 있으면서도 사는 건 다 똑같았다. 쇼타로는 천문대 벽에 붙어 있던 다른 메모지의 내용을 문득 떠올린다.
우리의 DNA를 이루는 질소, 치아를 구성하는 칼슘, 혈액의 주요 성분인 철, 애플파이에 들어 있는 탄소 등의 원자 알갱이 하나하나가 모조리 별의 내부에서 합성됐다. 그러므로 우리는 별의 자녀들이다.
별의 자녀라. 지구인은 종종 가장 옳은 궤적을 용케 찾아냈다. 날카로운 눈썰미, 똑똑한 지능, 주체할 수 없는 낭만. 그래. 외계인이고, 지구인이고, 서로에겐 낯설고 공포스러운 존재일 수도 있겠지만 별의 자녀임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린 이 우주에서 살아가고 있으니까.
생각이 끝날 때쯤 녹색 보도블록이 끊기고 회색 보도블록만 빼곡하게 늘어져 있자, 쇼타로는 다시 바닥을 가만히 바라본다. 성찬과 두 걸음 정도 멀어졌다. 다가갈 수 있는 길이 끊긴 것 같은 기분. 있잖아, 이것도 운명일까? 쇼타로의 목소리에 성찬은 걸음을 멈춘다. 참으로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녹색 보도블록이 끊긴 것에 우리의 운명을 비유하다니. 이런 이상한 메타포가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이게 진짜 운명을 뜻하는 거라면, 성찬은 기꺼이 비극적인 운명을 바꾸고 싶었다. 회색 보도블록을 녹색 페인트로 칠하는 한이 있더라도. 운명은 받아들이는 자와 바꾸는 자로 갈라진다고 하는데, 적어도 정성찬은 바꾸는 자였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성찬은 쇼타로에게 다가간다.
“나 오늘 녹색 운동화 신었어.“
“.....헉.“
“내 발 밟고 올라와.“
“나 무거운데.“
“얼른.“
운명 바꿔 줄게. 성찬의 재촉에 쇼타로는 마지못해 녹색 운동화를 밟고 올라선다. 으아아, 무겁지. 무겁지. 쇼타로의 어쩔 줄 몰라 하는 목소리에 성찬은 결국 크게 웃음이 터진다. 몸이 기우뚱 밀리면서도 성찬은 쇼타로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대답해 봐, 오늘 녹색 운동화를 신은 것도 운명이지? 쇼타로는 성찬의 어깨를 끌어안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녹색 보도블록이 끊겨서 두 걸음 멀어지는 게 꼭 우리의 운명 같다고 생각했더니, 기꺼이 자신의 녹색 운동화를 밟게 해 주는 인간. 운동화 더러워지면 어떡해. 쇼타로는 그 와중에 깔끔했던 성찬의 운동화를 걱정했다. 괜찮아, 이렇게 안을 수 있으면 됐어. 아무것도 아니라는 태연한 말투로 다정하게 말하는 것도 정성찬이 가진 능력이었다. 어떻게 보면 사랑에 빠지지 않는 게 이상하다고 여겨질 만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지구소년. 나만의 소년. 나의 정성찬.
쇼타로의 뺨이 성찬의 뺨에 닿는다. 우리 운명 맞아. 운명론자가 인정한 운명이라.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그럼, 마지막이니까, 정말 마지막이니까 성찬은 한 가지를 더 고백한다.
“내 삶을 훔친 것 같다고 했지.“
“응.“
“나는 네 삶을 훔치고 싶었어.“
내 걸로 만들고 싶었어. 성찬은 입을 열고 고백을 하는 순간마다 흑심을 토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불쾌하고 역한 마음. 삶을 훔치는 것. 얼마나 잔혹하고 이기적인 욕심인가. 우주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쇼타로의 발목을 잡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타로는 전혀 불쾌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관용구의 위력이 점점 더 무서워지기 시작한다.
“다신 지구로 돌아오지 마.“
“왜?“
“다시 만나면, 그땐 못 놓아줄 거 같아.....“
내 인간성이 그래. 그땐 시계고 뭐고 다 부수고, 내가 죽어도 나만 그리워하게 만들고 싶으니까. 그러니까 두 번 다신 지구에 돌아오지 마. 성찬은 구질구질한 속내를 고백하면서도 사랑한다는 뜻을 열렬하게 내포하고 있었다. '아무리 아끼고, 사랑해도 헤어져야 하는 순간은 있는 거야.' 그래. 로보트의 팔이 하나 빠지고, 망원경의 렌즈에 금이 가고, 미니 손전등엔 더 이상 불이 들어오지 않아도 버리지 못했지만, 놓아줘야 하는 사랑이 존재했다. 가장 사랑하는 존재라서. 이 외계인 말고 다른 걸 가장 사랑했으면, 계속 손에 쥐고 있어도 괜찮았을까? 성찬은 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가장 사랑하는 존재에게 주고 싶었다. 그러니 기회는 딱 한 번이었다. 혹시나 다음에 만난다면, 다음에 또 불시착을 해서 마주하게 된다면 그땐 기회를 줄 여력도 없을 것이다. 창백한 푸른 눈동자를 가진, 가장 사랑한 존재를 평생 붙잡고, 사랑한다고 고백을 하며, 그렇게 열렬히 삶을 소모하며 살고 싶었다.
지구인이 되면 어떡하지. 쓸모없는 걱정을 하던 순간이 있었다. 그때 성찬은, 그럼 나랑 죽을 때까지 같이 살자. 라고 답을 했었다. 그 고백에 유일하게 유연히 답을 하지 못했지만, 이젠 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음침한 흑심을 입 밖으로 토하는 순간, 그걸 음침하다고 할 수 있을까? 솔직함은 무죄였다. 난폭한 고백을 하면서도 지금은 순순히 보내 주는 바보 같은 지구인. 한결같이 낭만과 애정이 펄펄 끓는 정성찬. 생각해 볼게. 쇼타로는 이번에도 확답하지 않는다.
귀가를 하자마자 각설탕을 입에 물고 입부터 맞추는 어떤 지구소년 덕분에 이별 선물로 받아 온 각설탕이 동난 건 한순간이었다. 저번에 각설탕 먹고 키스하고 싶다며. 나긋한 목소리에 쇼타로는 응, 응.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서 입을 맞출 뿐이다. 서늘하고 말랑한 혀와 뜨겁고 말랑한 혀. 애초에 여기서부터 다른 종족임이 생생했다. 성찬은 아랑곳하지 않고 쇼타로의 셔츠 안으로 손을 밀어 넣어 허리를 천천히 주무른다. 낮은 체온. 인간의 체온은 쇼타로에 비해 꽤 뜨거운 편이라서, 지금처럼 손길이 닿을 때마다 아주 가끔 화상을 입을 것 같았다. 성찬, 너 뜨거워. 짧게 말이 끊어지자, 성찬은 어떻게 해서든 서로의 흔적을 남기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인다. 반지를 하나 맞출 걸 그랬나. 이것조차 너무 지구인 특유의 낭만적 발상일까?
“추억할 게 없어서 슬프다.“
“우리 사진도 많이 찍었잖아.“
“하여튼 애정이 생겨도 낭만은 없네.“
쇼타로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곤 아하하, 크게 웃는다. 애정도 이제 겨우 생겼는데 낭만이 어떻게 바로 생기겠는가. 진도가 너무 빨라요, 선생님. 살살 달래는 말투가 이어지자 성찬은, 인간은 좋아하면 반지도 맞추고 그러거든. 퉁명스러운 대꾸가 돌아온다. 반지 맞추고 싶었구나. 퉁명스러움이 꽤나 사랑스럽다. 우주에도 영원한 사랑을 맹세할 때 반지를 맞추는 종족이 있었다. 아님 송곳니가 날카로운 종족은 목덜미에 잇자국을 내서 서로의 사랑을 맹세한다거나..... 자신의 종족이 낭만 없는 거지, 얼마나 지독한 낭만과 사랑이 존재하는데. 지구도 그중 하나일 것이고.
쇼타로는 그렇게 한참 동안 눈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아! 짧은 감탄사와 함께 귀에 있던 피어싱 하나를 빼낸다. 추억이 주 화폐인 행성에서 무려 백 년의 추억과 교환한 보석이었다. 신의 애정을 유독 많이 받았다는 전설까지 있단다. 보통 여행자들은 보석이나 기념품을 수집하거나 목걸이, 팔찌를 하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지만, 쇼타로는 모든 보석을 피어싱으로 제작하여 달고 다니는 타입이었다. 그냥 순간적으로 살이 뚫리는 기분이 살아 있다는 걸 증명해 주는 것 같았다. 애정과 더불어 파생되는 감정이 부재하는 동안 살아 있음을 증명하려고 발버둥 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감정이 죽어 있다는 건, 살아 있는 시체와 마찬가지였으니. 성찬의 귀는 뚫린 곳 하나 없는 반듯한 귀라서 아쉬웠지만, 자신이 이 지구에 존재했다는, 애정과 파생되는 감정이 생성되고 있다는 증표론 충분할 것이다.
“귀 뚫어 줘. “
“내가?“
“응.“
이걸론 부족해. 성찬은 단호하게 대꾸한다. 애정의 증표론 상처가 필요했다. 거울을 볼 때마다 기억할 수 있는 상처. 그리고 흉터. 꽤 오랜 시간 남는 것. 외계소년은 그토록 사랑하는 지구소년에게 상처를 입힌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길 바라며, 혹은 어느 순간 지워지길 바라며.
그리고 9월 13일 자정. 생일 축하해. 쇼타로는 성찬의 뺨을 감싸 쥐며 이별의 시간을 알린다. 고마워. 귓불이 얼얼하다. 성찬은 귓불이 아프다는 핑계로 결국 눈물을 쏟는다.
쇼타로는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학교에 다녔던 흔적조차 없었고, 아무도 쇼타로를 기억하지 못했다. 창백한 푸른 눈, 얼룩덜룩한 탈색 머리, 다정한 목소리...... 혹시 또 바보같이 좋은 꿈을 꾼 건 아닐까, 겁이 날 때마다 얼얼한 귓불의 통증이 현실을 열렬히 알리고 있었다. 성찬은 하교 후 급하게 은석의 카페를 찾았고, 은석은 별말 없이 라테 마실래? 태연하게 묻는다.
“왜 아무도 타로 형을 기억 못 해요?“
“외계인이잖아.“
“키스로만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서.“
“행성을 떠날 때 자신과 닿았던 모든 존재의 기억도 지울 수 있어.“
“그럼 나는 왜 기억하는데요.“
“너는 예외니까.“
외계인에게도 예외는 있거든. 은석은 숨을 헐떡이는 성찬에게 아이스 라테를 건넨다. 이 소란스러운 행성에서 분명 돌연변이 같은 사랑을 했다는 흔적과도 같을 것이다. 사실 매뉴얼대로 하자면 모든 기억을 지우는 게 맞았지만, 이기적인 외계인의 욕심을 누가 말리랴. 삶을 훔친 것 같다고 죄책감에 발버둥 치면서도, 자신의 삶을 훔치고 싶었다는 말에 또 한 번 이기적으로 구는 외계인. 성찬은 떨리는 숨을 겨우 참는다. 나, 이제 어떻게 살아...... 절망에 얼룩진 인간을 지켜보는 것도 보통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 모든 생명체는 절망을 느껴야 하는 걸까. 살아 있는 건 결국 죄를 짓는 걸까. 지금 그 벌을 받는 거고. 그래서 망각이 축복이라고 한 걸까? 은석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절망의 공간에 있는 불쌍한 인간의 곁에 있어 주는 일밖에 없었다. 그리고 각설탕을 채운 병을 건네주는 것.
성찬은 며칠 동안 쇼타로의 방에 들어가지 못했다. 방문 앞에 서서 문고리를 잡았다 놓았다를 반복할 뿐. 아직 방 안에는 쇼타로의 향이 남아 있을까?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으면, 향도 완전무결하게 숨겼을까? 그렇게 용기를 내서 들어갔을 땐, 비참하게도 아무런 향이 남아 있지 않았다. 1년 동안 생활했으면서, 이렇게 모든 걸 숨긴다고. 성찬은 찬찬히 방 내부를 둘러본다. 책상 위에 노트 한 권만 유일한 흔적을 빛내고 있었다. 지구 생활을 하면서 쇼타로가 쓰던 일기장이었다. 앞장의 대부분은 뜯겨 있고, 이별을 논할 때부터 빼곡하게 쓰여 있다. 9월 6일, 무섭도록.......
9월 6일
무섭도록 내게는 많은 시간이 남아 있다. 이 무한한 시간이 공포로 느껴진다.
9월 7일
일주일 동안 연애라는 걸 해 보기로 했다. 사실 아직 사랑이 무슨 감정인지 잘 몰라서 나 혼자만 제자리에 멈춰 있는 기분이 든다. 그래도 그냥 곁에 있으면 좋고, 웃음이 나고, 이 시간이 영원히 지속되길 바란다면, 그게 사랑이 아닐까 감히 정의해 보려고.
9월 8일
바다는 여전히 건재했다. 영원한 이별을 겪는다고 해도 절대 잊지 않고 기억한다면 그걸 이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또 다른 유형의 영원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우리는 포옹을 한 상태로 이별하기로 해.
9월 9일
완전 아픔. 네 곁에 있으면 몸이 인간처럼 바뀌는 거 같다. 열도 나고, 기침 증상까지 생겼어. 몸이 약해지는 건 별로인데, 인간의 삶을 사는 듯한 느낌은 나쁘지 않아. 만약 내가 지구에서 태어났다면...... 아니다. 이런 말은 하지 않을래.
9월 10일
'우리처럼 작은 존재가 우주의 광대함을 견디는 방법은 오직 사랑뿐이다.'라는 글을 봤는데, 바보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인간들은 왜 스스로를 작은 존재라고 말하는 걸까. 나는 인간이 종종 거대하게 느껴지는데. 사랑이 과연 모든 걸 이길 수 있을까? 애정으로 멸망한 행성과 우주가 너무 많은데, 또 그걸 극복하고 이겨내는 것도 사랑이 아닐까 생각했어. 내가 처음 겪은 사랑의 감각은 고통이었는데, 살면서 제일 아팠거든.
......그런데 너랑 하는 사랑은 아파도 괜찮은 거 같아. 애정을 쥐면 불행하다고 했는데, 이상하게 불행하지 않아. 태초의 우리도 애정은 있었으니까. 살아남기 위해서 애정이라는 유전자를 없앴으니, 돌연변이가 아니라 다시, 태초의 우리로 돌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9월 11일
성찬아, 나는 사실 은석이가 부러웠어. 애정은 아무 쓸모도 없는 불필요의 감정이라고 생각했는데 기꺼이 그 애정을 쥐고 태어나서 사랑하는 인간의 행성에 머무를 수 있는 그 용기가 질투 났어. 나도 그런 욕심을 가지고 싶었고, 그런 사랑을 탐낸 거 같아.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욕심이 너에게 평범한 삶을 지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거야.
나를 기다려 줘서 고마웠어. 사실 너랑 키스할 때 네 기억을 읽었어. 나를 환상으로 여기는 어른들, 그리고 가엾은 유년 시절의 정성찬. 차곡차곡 쌓여 가는 처방전.
도둑 맞은 네 삶을 다시 돌려주는 게 나의 용기야. 내 손에 애정을 쥐고 있다는 증명이고.
그러니까 상찬아, 이제 네 삶을 살아.
9월 12일
가장 그리운 순간에, 바로 그 순간만 몰래 묻어 둔 기억을 꺼내서 보는 거야. 어느 날 녹색 보도블록만 걷다가 녹색 보도블록이 없어서 슬퍼할 때, 어떤 소년이 자신의 운동화를 밟게 하고, 결국엔 서로를 끌어안았다는 기억이거나, 욕조에서 사전을 찢어서 씹어 먹고 입을 맞췄다거나, 뺨에 닿았던 그 애의 머리카락이 기분 좋았다거나. 그런 사소한 순간들 말이야.
내가 없는 이 행성에서 잘 지내야 해.
이제 타로 밀크티도 다시 마시고, 그 누구보다 행복한 삶을 보내야 해.
나의 운명이 되어 줘서 고마워!
“정성찬, 성인 된 소감은?“
“그냥 그렇지, 뭐.“
“이제 반말도 하네.“
“어차피 쇼타로보다 어리잖아. 동갑 먹자.“
“...어이.“
스무 살, 은석은 쇼타로의 부탁을 잊지 않았다. 이 제멋대로인 지구소년의 곁을 지켜 주는 것. 나중에 가장 큰 걸로 보답받아야지. 퉁명스럽게 생각을 하면서도, 이젠 꽤 친구 같은 이 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정성찬은 여전히 쇼타로를 그리워했다. 티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눈빛엔 그리움이 수반되고 있었다. 외계인과 얽혀서 천문학 전공에 보란 듯이 합격한 인간. 아마 쇼타로가 보면 뭐라고 생각할까. 어울린다고 기뻐하면서도, 또 죄책감에 시달리겠지. 하여튼 쇼타로도 참 이기적이면서도, 마음이 약한 편이었다. 성찬은 각설탕 하나를 오독오독 씹으며 헤드셋을 쓴다. 나, 이제 간다.
I will
- The Beatles
여전히 성찬의 음악 계정 프로필 내 최근 자주 들은 노래 순위엔 비틀즈의 I will이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랑 고백을 이렇게 하는 놈이 어디 있어. 지구인은 쓸데없이 낭만적이라고, 겨우 애정을 배웠는데 낭만의 진도가 빠르다고 투덜거리더니, 지독한 낭만의 후유증은 오히려 성찬이 겪고 있었다. Will I wait a lonely lifetime. If you want me to, I will. (...) Love you whenever we're together. Love you when we're apart. 쇼타로, 너만 원한다면 나는... 평생을 기다릴 수 있었어.
9월 13일
생일 축하해!
일주일의 연애는 어땠어?
나는 이제 사랑의 의미를 알 것 같아.
사랑해.
이 말은 즉, 너랑 같이 죽고 싶다는 뜻이었어.
있잖아, 타로.
가끔은 네 꿈을 꿔. 오렌지색과 푸른색이 오묘하게 섞인 빛이 번쩍인다거나, 아님 네가 나와서 보고 싶었다고 끌어안는 꿈. 그런데 꿈에선 네 체온이 서늘하지 않아서, 꿈이라는 걸 바로 알아버려. 그래도 꿈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네가 미안하다고 사과를 할 것 같으니까. 다신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 그러니까, 앞으로도 기꺼이 속아줄 테니, 종종 나와 줘.
왜 너를 사랑하냐고 물어본 적 있지. 이렇게 말하면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랑에 빠지는데 이유는 없었어. 그냥 너라서 좋아했던 거야. 너라서 불가항력으로 사랑에 빠진 거고.
네가 종종 각설탕을 그리워했으면 좋겠다.
네가 머무르는 모든 행성에 천둥이 다섯 번 울리면 좋겠다.
우주의 어떤 행성에선 비틀즈의 I will이 반복적으로 재생되고 있으면 좋겠다.
너의 가장 좋은 추억과 가장 슬픈 추억으로 남고 싶다.
네가 나를 잊었으면 좋겠다.
네가 나를 영원히 기억하면 좋겠다.
나의 영원한 외계소년,
나의 불가항력,
나의 쇼타로.
사랑해.
이 말은 즉, 네 삶을 훔치고, 내 삶을 주고 싶었다는 뜻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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