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의 벼랑 끝
외계소년의 지구 생활기 外
누구에게나 어떤 향수처럼 평생에 걸쳐 줄곧 떠올리게 하는 존재가 있을 것이다. 십 년이 지난 현재. 정성찬은 여전히 누군가의 꿈을 아주 가끔씩 꾸곤, 기묘한 감정을 느꼈다. 처음 불시착으로 만났던 숲은 공사가 진행된 후, 화려한 이름을 가진 아파트 단지가 세워졌다. 이 사실을 쇼타로가 알면 어떤 반응일까. 시원섭섭한 표정을 짓거나, 아님 울창하던 숲에게 심심한 사과를 하겠지. 인간들은 꽤 이기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아님 아무 말 없이 성찬의 손만 붙잡고, 사라진 숲의 흔적을 지켜볼 수도 있었다. 어떠한 환경이 바뀔 때마다 성찬은 답장 없는 편지를 썼다. 보내지 못한 편지는 차곡차곡 쌓였고, 성찬은 일 년에 한 번씩 모아뒀던 편지를 한 번에 태웠다. 발송이 불가능한 편지. 수신자는 확실하지만, 영원한 부재를 알리는 존재. 열 살에 처음 만나고, 열여덟에 두 번째로 만난 후, 열아홉에 헤어지고, 그리고 십 년의 공백이 빠르게 지나간다.
여전히, 정성찬은 외계인 송은석이 운영하는 카페에 일주일에 최소 한 번, 최대 세 번은 방문했다. 사랑에 빠져서 지구에 묶여있는 걸 선택한 외계인. 은석도 처음엔 쇼타로의 부탁으로 성찬의 곁을 지켜줬지만, 점점 더 애틋하고도 귀한 우정이 쌓인다. 자신의 연인을 제외하곤, 지구인처럼 굴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존재였으니까. 성찬의 생일엔 간단하게 케이크도 구워주고, 추억을 회상하기도 하고, 다른 행성과, 외계 종족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 중 새로 알게 된 사실은 몇몇 행성 중, 특정 행성의 생명체들은 가업처럼 잇는 일이 있었는데, 쇼타로의 종족은 우주에 떠도는 전설같은 이야기를 동화로 만드는 일을 맡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날이 밝지만 비가 쏟아지는 경우엔 호랑이가 장가를 간다거나, 여우가 시집을 간다고 표현하지 않는가. 여행을 다니면서 그런 전설같은 이야기를 엮는 존재. 하여튼 낭만과 가장 거리가 멀게 행동했으면서, 낭만적인 업을 잇는 역설도 쇼타로다웠다. 창백한 푸른 눈을 한 소년. 창백하지만 다정하고, 다정하지만 이기적이고, 애정이 반듯하게 잘렸으면서 자신은 만난 이후 애정을 쥐게 된, 가장 역설적인 소년. ... 그러니까, 앞으로 서술될 이야기는, 어떠한 우주의 전설로 남게 될 이야기이다.
영원의 벼랑 끝
The Edge of Forever
열아홉의 정성찬과 스물아홉의 정성찬은 확실히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학문에 집중하느라 시력이 떨어져서 스무 살 기점으로 안경을 쓰기 시작했고, 조금 더 지치고, 삶을 염세적으로 바라보고, 더 무심하고, 누군가를 잃어버린 표정을 종종 짓는. 가방 안엔 각설탕이 담긴 병과, 담배가 항상 들어있었고, 자기 전에 비틀즈의 <I Will>을 꼭 들었으며, 오전엔 아이스 라테, 오후엔 타로 밀크티를 하루도 빠짐없이 마시곤 했다. 만약 쇼타로가 성찬의 곁에 계속 머물렀으면 조금 달랐을까? 덜 지치고, 삶을 덜 염세적으로 바라보며, 잃어버린 표정도 없는, 자주 웃는 그 정성찬으로 지속되었을까?
성찬은 쇼타로와의 이별 후, 최대한 평범한 삶으로 달려가기 위하여 노력했다. 사실 돌아가야 하는 이유를 느끼지도 못했지만, 가장 사랑하던 외계인이 훔쳤던 삶을 돌려주는 게 기회라고 했으니까. 평범한 삶. 평범한 삶은 뭐 어떤 걸까. 그냥 마음 맞는 사람과 적당히 연애도 하고 사랑을 하는 것? 하지만 사랑은 마음이 동해야 하는 거잖아. 성찬은 쇼타로 이후로, 단 한 번도 마음이 흔들린 적 없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면 공허함에 숨이 막혔다. 요즘 만나는 사람은 없고? 은석의 질문에 성찬은 뭐.... 말끝을 흐리며 각설탕을 씹는다. 첫사랑이 너무 커서 다음 사랑을 이어갈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그 첫사랑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겠지만.
대학생 시절, 성찬은 푸른 눈을 가진 여자에게 고백을 받았다. 같은 전공을 가진 미국 출신이었다. 회식에서 술을 왕창 마셨던 날, 그녀는 얼굴을 붉힌 상태로 미국과 한국의 거리는 꽤 멀다고 말했지만, 쇼타로와 자신의 거리가 더 멀었기에 성찬은 쓴 웃음만 지었다.
"지구 안에만 있다면 별로 안 멀어."
아마, 그녀는 그 말에 사랑에 빠졌을 것이다. 장거리 연애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빌어먹게 그녀는 쇼타로와 비슷한 눈동자의 색을 가지고 있었고, 귀엔 꽤나 화려한 피어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쇼타로를 생각나게 하는 사람. 술에 왕창 취한 상태에서 받았던 고백. 성찬 씨가 좋다고 말하는 그 고백에 왜 유독 부재를 띄운 외계인이 생각났는지. 성찬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의 뜻도, 부정의 뜻도 아니었지만 그렇게 짧은 연애가 이어졌다. 푸른 눈과 마주하거나, 피어싱이 화려한 귀를 마주할 때마다 그녀의 이름이 아닌 쇼타로의 이름을 말하고 싶었다. 쇼타로, 타로. 피부에 손바닥이 닿을 때마다 같은 체온이라는 사실까지 불쾌했다. 은석은 성찬에게 그래도 한 번 잘 해보라고 조언을 했지만,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사랑한다는 말을 거짓으로 할 바엔 차라리 혀를 씹고 싶었다. 또한 그녀가 어깨를 끌어안고 키스 해 줘. 라고 속삭일 때, 못 들은 척 넘겼다. 귀엽지 않아서, 사랑하지 않아서, 마음이 동하지 않아서. 고등학교 때 가졌던 그 순정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그녀는 성찬을 놔두고 바람을 피웠고, 그걸 들킨 상태에서도 성찬은 아무렇지 않았다. 그래, 오히려 당연한 거다. 키스와 사랑한다는 말 하나 해 주지 않는 작자를 어떻게 사랑하겠는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그녀의 말에 성찬은 입에 발린 말이라도, 아니라고 답하지 못했다. 가장 사랑하는 건.... '사랑해.' 를 '같이 죽고 싶었다.' 라고 정의를 내린 푸른 눈의 소년이었으니. 미안. 성찬은 하나도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사과를 했고, 그렇게 최악의 전 남자친구 타이틀을 달았다. 그 이후로, 성찬은 연애를 일절 하지 않았고, 그때 한 가지를 확실히 직감했다. 아마도, 두 번 다신 사랑을 하지 못할 것 같다고. 사랑은 저주일까, 축복일까.
"타로 형, 잘 지내고 있겠지."
"그러길 바라야지."
은석은 굳이 먼저 쇼타로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안 그래도 그리움에 잠겨서 허우적거리는 인간의 속을 쑤실 필요는 없었으니까. 연인을 제외하고 가장 친밀한 지구인이었지만, 어디까지 말을 하고, 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은석은 항상 고민에 빠지곤 했다. ... 예를 들면, 쇼타로의 부재가 4년 정도 지났을 때, 지구에 한 번 방문했다는 사실 같은 것 말이다. 여전히 탈색머리에, 푸른 눈이 빛나는 모습으로. 어이, 돌. 안녀엉. 해맑게 웃으며 카페 안으로 들어오더니 익숙하게 의자에 앉아서 각설탕 하나를 오독오독 씹어먹는다. 나, 이게 너무 먹고 싶었어. 우주에 각설탕이 없는 게 말이 돼? 투정이 가득하지만, 반가움에 들뜬 목소리. 오랜만이네. 은석은 아무렇지 않은 척, 커피를 내린다.
"어쩐 일로 왔어."
"너한테 빚 갚으러 왔어."
"무슨 빚?"
"각설탕도 챙겨줬고, 성찬이도 잘 챙겨주니까."
"네가 어떻게 알아."
"그냥, 알아."
너는 꽤 좋은 녀석이니까. 말이 끝남과 동시에, 쇼타로는 주머니에서 투명한 유리병을 꺼내곤, 테이블 위에 탁, 올려둔다. 모든 병을 딱 한 번만 치료할 수 있다는 치료제였다. 지구의 기점으로 동쪽의 끝. 거의 우주의 경계선에서 암암리에 거래되고 있는 나름의 전설과 소문을 가진. 죽기 전까지 곁에 있어 줘. 연인의 부탁에 마법처럼 발이 묶여서 치료제를 구할 힘이 있어도 구하지 못하는 은석에겐 거의 환상과 마찬가지였다. 괜히 이 행성을 떠났다가, 치료제를 들고 돌아왔을 때 이미 연인이 없을 수도 있었으니까. 쇼타로는 킥킥 웃으며, 너도 이제 행복하게 지내. 다정하게 말한다. 은석은 처음으로 느끼는 울컥함에 고개를 숙인 상태로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는다. ...고마워. 떨리는 목소리로 이어지는 짧은 감사 인사에 쇼타로는 별 말씀을. 마찬가지로 짧게 화답한다.
그럼 슬슬 가야겠다. 쇼타로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익숙하게 각설탕이 채워진 병을 챙겨든다. 이건 내가 가져갈게. 뻔뻔한 표정, 지구에 널린 게 각설탕인데 굳이 여기로 오는 이상한 외계인. 지구인들 눈엔 자신도 이렇게 이상하고 기묘하게 보일까. 작별 인사를 하는 쇼타로에게, 은석은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하나, 고민이 생긴다. 왜 성찬의 안부는 묻지 않는 걸까. 보고 싶지 않은 건지, 아님 굳이 궁금하지 않은 건지. 성찬에겐 먼저 쇼타로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쇼타로는 달랐다. 쇼타로에겐 먼저 이야기를 꺼내도 될 것 같았다. 남겨지는 쪽이 아닌, 떠나는 쪽이니까.
"정성찬 안 보고 가도 돼?"
"아아, 잘 지내고 있어?"
"그런 거 같아."
"만나는 사람은 있고?"
쇼타로는 손목시계를 체크한다. 4년이 지났구나. 여전히 시간의 감각은 잡히지 않았고, 쇼타로는 성찬의 모습을 감히 제멋대로 상상한다. 여전히 감은 두 눈이 사랑스러울까? 그리고, 여전히 나를 .... 기다리고 있을까? 여러가지 궁금증이 생기지만 일부러 묻지 않는다. 괜히 또 다른 미련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만나는 사람이 있냐는 질문에, 은석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너랑 닮았어, 눈이 푸른 색이야. 은석의 말에 쇼타로는 헤에, 그렇구나. 옅게 웃는다. 다행이다. 역시 평범한 삶을 가질 기회를 주길 잘했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이어진다. 쇼타로는 애꿎은 각설탕이 채워진 병을 손에 든 채로 바라보다가,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을 결국 삼킨다. 성찬이 행복하지? 오랜만에 속이 울렁거려서 입을 여는 순간 헛구역질을 할 것 같았다.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또 행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상하게 정성찬이라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나 생각만 하면 여전히 속이 울렁거렸다. 상반된 감정이 계속 불쑥 튀어나오고 있었기에. 질문을 하지 않아도, 그에 대한 답은 은석이 대신 대답한다.
"그 애, 여전히 너를 사랑해."
"슬프다."
"슬프기만 해?"
"...... 으음, 기뻐."
나 최악이지. 쇼타로의 말에 은석은 고개를 저었다. 최악으로 여길 리가. 슬프면서도 기쁜 것. 가장 바닥으로 떨어지면서도 하늘로 솟구치는 감정을 겪는 게 사랑 아니겠는가. 쇼타로는 떠날 때, 한 가지를 부탁했었다. 절대 성찬에게 내가 왔다는 이야기 하지 마. 겨우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고 있는 성찬의 마음을 다시 흔들고 싶지 않았다. 아직도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말이 이렇게 기쁘면서도 슬플 줄이야. 이렇게 다시 한 번 시간이 지난다면 결국엔 자신보다 더 사랑할 인간이 생길 것이다. 빨리 약속해. 쇼타로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은석은 그 속내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새끼 손가락을 건다. 약속.
그때 쇼타로가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은석은 생각에 빠진다. 여전히 정성찬이라는 인간은, 너를 사랑하고 있다고 할 때, 울 것같은 얼굴이면서도, 끝까지 입꼬리를 당겨 웃었던 것 같다. 그 미묘한 표정. 이제 사랑이라는 감정을 모두 다 파악했다는 복합적인 표정. 그 후로 6년, 쇼타로는 지구에 오지 않았다. 아니다. 왔을 수도 있겠지,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좋아하는 사람은 좀 어때. 성찬의 목소리가 다시 현실감을 느끼게 해 준다. 쇼타로가 준 약 덕분에 빠르게 회복세를 타고 있었다. 다만 인간의 몸은 우주를 통틀어서도 유리처럼 꽤 약한 편이었다. 독한 약을 한 번에 먹이면 몸에 무리가 쉽게 갈 테니, 육 개월에 한 번씩 먹여서, 아직까지 병실 신세는 지고 있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올해 안엔 퇴원이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곧 퇴원할 것 같아. 별 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 성찬은 고개를 기울이며, 커피잔을 내려놓는다. 분명, 지구에선 못 고치는 병이라고 했었다. 아무리 강산도 변한다는, 십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그렇게 발전했을 리가. 순간적으로 등골이 서늘해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하나 뿐이었다.
"타로 형, 만났어?"
"...... 응."
언제?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성찬은 다시 한 번 이 지독한 절망감에 빠진다.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았던 무력함. 그때 네가 만나는 사람이 있었고, 쇼타로가 원하지 않았어. 은석의 말에 성찬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엉망진창인, 완벽하게 어긋난, 이 빌어먹을 타이밍을 원망한다. 6년 동안 비밀을 유지한 은석은 아무런 죄가 없었다. 그저 푸른 눈의 쇼타로의 부탁을 들어줬을 뿐. 그걸 알고 있기에 성찬은 원망의 화살을 자신에게로 돌린다. 만약, 자신이 그때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면 쇼타로는 자신을 찾아왔을까? 불확실한 상황을 확답할 순 없지만, .... 그래도 쇼타로는 자신을 찾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기꺼이 준 기회를 없애버리는 행동일 테니. 성찬은 테이블에 머리를 박는다. 분명 뺨이 닿던 순간에, 우린 운명이라고 했으면서. 왜 그 운명은 점점 멀어지는지. 보고 싶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십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이 삶을 손에 쥐여주고 싶었다. 성찬은 오른쪽 귓불을 만진다. 그토록 사랑하던 외계소년의 증표가 손끝에 걸린다
찰나를 살고, 천 년의 시간을 만난 것처럼. 쇼타로와의 이별 후, 성찬에게 생긴 신조였다. 인간은 찰나를 살았지만, 영원 같은 일주일의 시간을 보냈으니, 거의 천 년의 시간을 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성찬은 종종 쇼타로가 남기고 간 일기를 각설탕을 씹으며 읽곤 했다. 서늘한 체온, 각설탕을 물고 입을 맞췄던 일이 어제처럼 생생하다. 뜨겁다고 끙끙 앓던 모습, 욕조에서 입욕제를 풀고 반신욕을 즐기던 모습, 품 안에서 탄산음료를 마시고 덥다고 축 늘어지던 모습. ...타로, 진짜 이기적인 욕심인데 다시 내 곁에 와주면 안 될까. 나랑 딱 일주일만 다시 연애하면 안 될까. 그땐 내가 미성숙해서, 사랑 고백도 제대로 못 한 것 같아. 사랑한다고 더 말해줄 걸. 그 웃음소리를 그때 녹음할 걸.
Across the Universe
- The Beatles
비틀즈의 <I will> 을 자주 듣다 보니 알고리즘의 영향으로 추천 노래로 종종 뜨곤 했다. 그래, 사실 제목의 영향으로 듣지도 않고 플레이리스트에 추가한 것도 있었다. 심지어 NASA 설립 50주년 기념으로 대형 안테나를 통해 이 곡의 전파를 북극성으로 우주에 쏘아 보냈단다. 우주를 건너서. 과연 그때의 쇼타로는 이 노래를 들었을까? 이 외계소년이 나사에 잡혀가면 안 된다고 악몽을 꾸던 게 엊그제 같은데. Limitless, undying love. Which shines around me like a million suns....
성찬은 일기장을 덮고 침대에 눕는다. 보통 휴일엔 쇼타로와 함께 했던 추억을 곱씹었다. 바다에 가거나, 천문대에 가거나, 아님 쇼타로가 자주 읽던 <원피스> 만화책을 정독하거나,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를 다시 돌려보거나. 간만에 성큼 다가온 휴일에 성찬은 익숙하게 일기예보를 확인한다. 해가 반짝, 웃고 있는 이모티콘이 뜨자 천문대를 가기로 결정한다. 바다는 비가 쏟아져야 했다. 천둥이 울릴 만큼.
"여기서 서쪽으로 쭈욱, 가면 우리 행성이야."
"서쪽으로 얼마나 가야 해?"
"시간과 공간이 말랑말랑한 공처럼 느껴질 만큼."
모든 장소마다 추억이 녹아있었다. '우리처럼 작은 존재가 우주의 광대함을 견디는 방법은 오직 사랑뿐이다.' 천문대 내부의 벽에 붙어 있는 메모까지. 평일의 한적한 시간, 칼 세이건의 콘택트 문장을 또박또박 읽던 쇼타로의 모습. 이 문장을 읽고 쇼타로는 일기장에 '인간들은 왜 스스로를 작은 존재라고 말하는 걸까. 나는 인간이 종종 거대하게 느껴지는데.' 라고 기록했다. 어디서 거대하게 느꼈어? 성찬은 돌아오지 않는 질문을 던진다. 혼잣말처럼 던진 질문에 누군가가 답을 한다. 불확실한 감정으로 여기까지 발전했잖아.
아, 익숙한 목소리. 성찬은 순간적으로 뒤를 돌아본다. 창백한 푸른 눈의 소년, 얼룩덜룩한 탈색 머리를 한, 사랑하고 사랑했던 그 소년이 십 년 만에 성찬의 눈앞에 서 있었다. 비틀즈의 노래처럼, 우주를 건너서. 수줍게 손을 들고, 안녕. 다정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며.
다신 지구로 돌아오지 마. 다시 만나면, 그땐 못 놓아줄 거 같아..... 쇼타로는 종종 성찬의 말을 곱씹었다. 그 짧은 삶을 사는 동안, 자신을 기억하는 게 좋을까, 잊는 게 좋을까. 여전히 그 답을 찾지 못한 상태로 여행을 다녔다. 그렇게 우주의 경계선에서 은석에게 줄 약을 구하고, 잠깐 지구로 돌아왔을 때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있었다. 성찬은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자신과 닮은 푸른 눈을 가진 지구인. 그렇게 자신의 흔적이 지워지는 느낌을 받는다. 이제 푸른 눈을 볼 때마다 자신이 아닌, 만나는 사람을 생각하겠지. 자신이 어떠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기분. 아니다, 추억을 쌓이고, 쌓이는 것이니 정성찬이라는 동화책이 있다면 아주 잠깐 지나가는 카메오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었다. 그 애, 여전히 너를 사랑해. 은석의 말이 유감스러우면서도 기쁘기도 했다. 정성찬을 만나고 싶었다. 그런데 과연 만나서 무슨 말을 할까. 겨우 잊어가고 평범한 삶의 궤도로 진입하고 있는 애의 삶을 다시 훔칠 수 없었다. 이젠 다시, 다시는 지구에 돌아오지 말아야지. 쇼타로는 속으로 다짐하며 각설탕이 채워진 병을 안고, 은석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고향의 땅을 밟았을 때, 쇼타로는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뚫린 귓불이 아프다는 핑계로 울던 성찬과 달리 자신은 어떠한 핑계를 댈 수도 없었다. 사랑 때문에 우는 거다. 단지 정성찬이 보고 싶어서 우는 거다. 울지 마, 이런 걸로 울지 마..... 각설탕 여러 개를 입 안에 쑤셔 넣고 씹는다. 하나도 달지 않다. 눅눅하다. 그러니까 다신 지구에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입을 맞추며, 평생의 삶을 약속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울면서 각설탕을 씹는 쇼타로를 소꿉친구 A가 발견하고, 급히 달려 나온다. 항상 생글생글 웃으면서 고향에 돌아왔으면서, 세계가 무너진 것 같은 표정으로 울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걱정이 담긴 말에 쇼타로는 예전처럼 다정하고, 장난스럽게 답을 하지 못한다.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울부짖는 목소리가 이어질 뿐이다. 신경 쓰지 마.
"무슨 일 있었어?"
"저리 가. "
"어떻게 안 물을 수 있어?"
"제발, 그냥 묻지 마......"
A는 대답을 거부하는 쇼타로의 뺨을 감싸 쥔다. 말하기 싫으면 기억이라도 보겠다는 심상이었다. ...타로, 키스는 내가 마지막이면 안 돼? 순간적으로 성찬의 목소리가 귀에 울리는 느낌에 쇼타로는 A를 밀어낸다. 힘없이 밀려난 A의 황당한 표정에 쇼타로는 축축한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을 이어 나간다. 나, 저주에 걸렸어. 그러니까 하지 마.
정말로 이상하고, 괴상한 저주에 걸린 게 분명했다. 하루에 한 시간만 자도 괜찮은 육체를 가졌으면서 어느 날은 지구인처럼 곧장 잠만 잤고, 꿈에서는 성찬의 모습이 어렴풋이 나오기도 했다. 기회를 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꿈. 네가 기회를 줘서 평범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는 성찬의 모습에 쇼타로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찬아, 행복해? 쇼타로의 질문에, 성찬은 행복하다고 답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정말 완벽한 꿈인데, 쇼타로는 땀에 젖은 상태로 헉, 숨을 몰아쉬며 일어난다. 빌어먹을 악몽이다. 왜? 당연히 좋은 마음이 되어야 하는데, 전혀 기쁘지 않았다. 꿈 속의 너는 분명 행복한 표정이었는, 왜 나는 행복하지 않지? 애정을 손에 쥔 증표가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었는데, 이상하게 그 기회는 긴 후회가 되어 쇼타로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지구에서 서쪽으로 시간과 공간이 말랑말랑한 공처럼 느껴질 만큼의 거리까지 늘어진 후회. 그림자가 약간 길어진 것 같기도 하다.
쇼타로는 고향에 돌아온 후, 자주 앓았다. 정확한 병명조차 없는 특수 사례였다. 이 우주에 아직 밝혀지지 않은 병이 있다니. 주위는 경악했으나, 쇼타로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잠만 채우면 돼... 말끝을 흐리며 잠을 청했다. A는 그런 쇼타로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짚어보며 열을 체크하곤 했다. 서늘한 체온과 어울리지 않게 뜨겁다. ... 야, 네 손 차가워. 쇼타로의 말에 A는 네가 너무 뜨거운 거야, 이 온도가 정상이고. 나름의 다정한 말투로 쇼타로를 달랬지만, 쇼타로는 미간을 좁히며 몸을 돌릴 뿐이다. 서늘한 체온이 꽤 불쾌했다. 뜨거운 체온이 그리웠다. 성찬의 체온은 가끔 너무 뜨거워서 화상을 입을 것 같았는데, 지금은 또 그게 그립다니. 뭐가 이렇게 변덕스러울까. 스스로 생각해도 황당한 일이었다. 그렇게 겨우 까무룩 잠이 들면 성찬의 목소리가 웅웅, 들리곤 했다.
"타로, 타로 형."
"응, 찬아....."
"사랑한다고 말해 줘."
사랑한다는 말은 무슨, 이렇게 아파 죽겠는데. 꿈속에서까지 사랑한다는 말에 집착하는 성찬이 아주 조금은 얄미워서, 눈을 흘기자 성찬은 많이 아파? 왜 아파. 나 버리고 떠났으면서.... 뼈가 있는 말과 함께 쇼타로를 끌어안는다. 버린 거라니. 아무리 꿈이라고 해도, 말이 심했다. 아니, 버린 건가? 성찬은 그렇게 느낄 수도 있을까? 쇼타로는 성찬의 허리를 끌어안고 눈을 감는다. 아, 빌어먹을. 꿈속이니까 성찬의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거대한 공기를 끌어안는 기분. ..... 찬아, 있잖아.
네가 평생 나를 못 잊었으면 좋겠어.
애정에 파생되는 또 하나의 감정은 질투였다. 그래, 인정하자. 다른 지구인을 만나고 있다고 할 때,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속이 뒤틀렸던 것도. 기껏 좋은 마음으로 평범한 삶을 돌아갈 기회를 줬으면서 이렇게 후회를 하는 것도.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당장이라도 정성찬에게 뛰어가고 싶었던 것도, 네가 행복하길 바라면서도 나를 영원히 잊지 못하길 바라는 것도. 이런 변덕스러운 심장을 갖게 된 것도 모두 애정이라는 불투명한 감정으로 시작된 일이었다.
"타로."
"응."
"이번에도 운명을 걸어 봐."
"무슨 운명?"
"그건 네가 잘 알잖아."
사랑한다는 말은 나중에 들려 줘. 성찬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든다. 어떻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 너는 꿈인데. 너는 체온조차 없는 무의 영역인데. 쇼타로는 꿈속에서 또 한 번 눈물을 쏟았다. 사랑을 하면 너무 울 일이 많아졌다. 정말 지구인은, 아니, 사랑이 존재하는 생명체들은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희로애락을 겪고 있었다. 왜 모든 노래의 주제가 사랑인지, 왜 모든 미디어의 가장 높은 지분율이 사랑이었는지, 그제야 쇼타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베개가 축축하다. 꿈에서 운 게 아니구나.
Who knows how long I've loved you. You know I love you still. Will I wait a lonely lifetime.....
평생동안 기다려 줘. 다른 사람을 만나도 좋고, 우리에게 운명이 오지 않아서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네 심장에 내 자리 한 칸쯤은 만들어 줘. 귀엽다는 말을 하거나, 다른 사람과 입 맞출 일이 있으면 우선 나부터 생각하고. 별을 보면 내 생각을 하고, 지구에서 서쪽을 관측할 땐 시간과 공간이 공처럼 말랑말랑해 지는 거리를 상상해 줘.
날이 밝지 않은 새벽, 쇼타로는 눈을 떴다. 밖으로 나가자 축축한 냄새가 난다. 운명, 어떤 운명에 걸어볼까. 여행을 시작한 계기처럼, 천둥 다섯 번이 울리면 다시 너한테로 가는 걸로 할까. A는 들판에 누워있다가 쇼타로의 발소리에 몸을 일으킨다. 쇼타로가 A의 곁에 앉자, 이젠 익숙하게 쇼타로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짚는다. 미적지근한 체온. 서늘함이 없는 걸 보니 아직까지 미열이 있는 상태였다. 너, 체온 낮아서 최악이야. 쇼타로의 맹비난에 A는 도대체 여행을 다니던 도중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증이 생기지만 굳이 묻지 않는다. 어쩌다가 뜨거운 체온을 갈구하게 되었을까.
몸을 돌려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쇼타로의 운명이 정해진다. 다섯 번의 천둥 소리. 그리고 쏟아지는 비. 혀 끝에선 짠맛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바다에서 나눴던 입맞춤처럼. 쇼타로에겐 운명론은 태생과도 같았고, 결국 그 운명에 다시 한 번 순응하기로 한다. 지구의 시간은 얼마나 지났을까. 쇼타로는 집 안으로 들어가서 급하게 손목시계를 찾았다. 은석을 만났을 때, 시간을 설정해둔 덕에 시간의 흐름이 희미하지만 어렴풋이 잡힌다. 우당탕 준비하는 소리에, 따라 들어온 A가 쇼타로의 손목을 붙잡는다.
"너 몸도 안 좋잖아."
"가야 해."
"요즘 이상한 거 알아?"
"그 애가 나를 부르는 거 같아."
"무슨 소리야?"
"나, 사랑에 빠졌어."
사랑이라는 단어에 A는 미간을 좁힌다. 그래, 다 저런 반응이겠지. 그 감정조차 없이 태어났으니까. 존재하지 않는 감정에 대해서 이해를 바라고 싶지 않았다. 시계를 손목에 채우고, 지구의 좌표를 입력하면서도 A는 '애정' 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하기 바빴다. 알잖아, 애정이 얼마나 필요 없는 감정인지.... 좌표 입력을 마친 쇼타로는 A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래, 애정. 참 쓸모없는 감정이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해서 애정이라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살 수 있는 선택지가 주어진다면 그걸 선택할 수 있을까? 쇼타로는 그 답을 생각한다. 고작 백 년을 사는 지구인을 영원히 사랑할 수 있을까? 정성찬이 눈을 감는 그 순간을 과연 지켜볼 수 있을까?
지독한 운명론자의 입장이 아닌, 다른 시선으론 고작 우연일 수도 있었다. 다섯 번의 천둥, 쏟아지는 비 말이다. 그래도, 훔쳤던 삶을 다시 돌려주는 기회를 번복하면서까지 다시 지구로 돌아가는 건, 이기적으로 굴고 싶어서. 가서 퇴짜를 맞더라도, 자신이 없는 삶이 행복하다는 말을 두 귀로 듣고 싶어서. 그리고, 만약에.... 아직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면 지구에 정착을 하고, 네 곁에 있고 싶다고 고백하고 싶었다. 영원과도 같은 삶을 살고 있지만, 쇼타로는 영원을 믿지 않았다. 대신 지속적인 가능성을 맹신할 뿐. 영원과 가능성, 이어지는 게 어렵지, 끊어내는 건 가장 쉬운 일 아니겠는가. 정성찬이라는 지구인이 두 눈을 감을 때, 자신도 그냥 목을 매달면 그만이었다. 쇼타로는 A를 바라보며 작별 인사를 한다. 다신 만날 수 없을 거야. 잘 지내.
지구의 시간은 그새 6년이 지나있었다. 열아홉 이후로, 한 번도 만나지 못했으니 총 10년의 시간. 정성찬은 스물아홉, 마지막 이십대를 달리고 있을 시간이었다. 쇼타로는 은석을 찾아갈까, 고민하다가 무작정 천문대로 향했다. 추억의 장소가 여러 곳 떠올랐지만, 바다는 우선 비가 오지 않아서 제외되었고, 처음 불시작했을 때 만났던 숲은 모두 허물어지고 아파트가 들어와서 갈 수 없었다. 성찬에게 업히고, 처음 입을 맞췄던 골목길은 십 년 사이에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모든 세월이 피부에 닿자, 쇼타로는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모든 게 변하는데 인간의 마음은 더 쉽게 변하지 않을까? 이런 불안감에 그나마 위안을 주는 건, 여전히 바뀌지 않은 천문대의 내부였다. 또박또박 소리내어 읽었던 칼 세이건의 문장, 굴절 망원경. 그리고..... 그 메모지를 읽고 있는 정성찬의 뒷모습. 어디서 거대하게 느꼈어? 혼잣말처럼 던진 성찬의 질문에 쇼타로는 일기장의 내용을 토대도 묻는 거라는 것을 직감하며 답을 한다. 불확실한 감정으로 여기까지 발전했잖아. 다시 재회. 십 년만의 재회. 안녕, 쇼타로는 수줍게, 인사를 한다. 이상하게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아, 잠시, 잠시만."
"내가 말했지."
"으응?"
"다신 지구에 돌아오지 말라고."
예전에 살던 집이 아니다. 이제 독립했구나.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고, 자취방에 들어오면서 비밀번호를 친히 알려준다. 비밀번호 1125야. 지구 생활을 할 때, 임시로 정했던 쇼타로의 생일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무작정 잡힌 손목에 잠시만, 잠시만. 겨우 신발을 벗는다. 그리고 쉴 틈 없이 닿는 입술. 아, 뜨거운 체온. 얼마나 그리웠는지. 쇼타로는 팔을 뻗어 성찬의 어깨를 끌어안는다. 묻고 싶은 게 분명 쌓였는데, 질문이 모두 휘발된다. 뜨겁고, 말랑한 혀. 긴 부재의 시간 동안 못 한 키스를 받아내고 싶다는 듯, 끈질기게 입을 맞추는 성찬에 쇼타로는 끙끙, 앓는 소리를 내다가, 결국 혀 끝을 앞니로 아프지 않게 문다. 키가, 더 컸네? 입술이 떨어지고, 예상 외의 첫 안부 질문이 나오자 성찬은 황당한 웃음을 터트리고, 다정하게 대꾸한다. 타로, 너는 여전히 귀여워. 귀엽다는 말에 이번엔 쇼타로가 먼저 입을 맞춘다. 다 기억하고 있구나. 하나도 잊지 않았구나. 뽀뽀는 소중한 상대에게 귀여움을 느낄 때 하는 것. 입술을 맞댄 상태로, 가만히 있던 쇼타로가 작게 속삭인다. 찬아, 또 키스할래. ...그리고 키스는 사랑할 때 하는 것.
"잘 지냈어?"
"못 지냈어."
"왜, 못 지냈어."
"송은석만 만나고, 나는 안 찾아왔더라."
그건 네가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말 끝을 흐리는 모습에 성찬은 쇼타로를 품에 안고 목덜미에 입술을 묻는다. 아, 서늘한 체온. 그래. 지구인에게서 절대 느낄 수 없던 체온. 그리고 쇼타로 특유의 향. 이제 어떻게 쇼타로를 우주에 보낼 수 있겠는가. 분명 자신도 기회를 줬다. 너무 사랑하니까, 원하는 걸 할 수 있는 기회를. 그 기회를 부수고, 나타난 건 쇼타로의 몫이니, 이젠 이 얄팍한 발목을 붙잡고, 평생 자신의 곁에 두고 싶었다. 마음껏 욕심을 내도 괜찮지 않을까. 나, 이제 형 못 놓아 줘..... 성찬의 고백에 쇼타로는 아무 말 하지 않는다. 안경을 쓴 모습이 어색하다고 생각할 뿐. 쇼타로는 친히, 안경을 벗기고, 이마와, 뺨, 콧잔등, 입술에 천천히 입을 맞춘다. 일주일의 짧은 연애를 할 때, 잠든 성찬의 얼굴을 검지로 호선을 그리며 만끽했던 자유를 누렸던 것처럼.
마지막 키스, 여전히 나야? 서늘한 입술의 체온을 가만히 받고 있던 성찬은, 어떻게 보면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진다. 그때도 확답하지 않은 쇼타로 덕에, 성찬은 지구의 삶을 살면서 의미 없는 질투심이 휩싸이곤 했었다. 기억을 주고 받는다고 입 맞추는 것도 별로인데. 또 흑심을 품고, 계속 기억을 공유하자고 하는 외계인은 없었는지. 주변 관계에 대해서 다 묻고 싶었다. 그 질문에 쇼타로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네가 마지막이야. 사랑도 너한테만 느껴. 그리고, 쇼타로도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진다.
"지금은 만나는 사람 없어?"
"응."
"만나는 사람 있다고 들어서."
"나 저주에 걸렸어."
"무슨 저주?"
"사랑도, 키스도 형한테만 하고 싶어."
쇼타로는 그제야, 아하하.... 웃는다. 안도감이 가득한 숨소리에 성찬은 잠시 머리를 굴린다. 타로, 지금 질투하는 거야? '질투'라는 단어에 쇼타로는 못 들은 척, 입을 벌려 성찬의 귀를 아프지 않게 문다. 혀에, 쇼타로가 남기고 간 애정의 증표과 여전한 사랑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기적인 부분은 여전했다. 하고 싶은 말과 행동만 하는 것. 그 점을 그다지도 사랑했었다. 아니, 사랑한다. 사랑할 것이다. 지구에 불시착 이후, 사랑에 빠진 걸 알면서도 우주로 가고 싶어한 이기적인 모습도, 그리고 기회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지구로 돌아와서 자신의 귀를 물고 있는 이기적인 모습까지. 그래도, 혹여나 자신이 사랑하는 외계소년이 오해할까 봐, 말을 덧붙인다. 너밖에 없어. 내 평범한 삶은, 네가 곁에 있는 거야.
왜 오늘 천문대로 온 걸까. 그 많은 시간 중, 하필 딱 그 시간에 마주친 걸까. 휴무가 많은 것도 아니고, 겨우 한 달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그 희박한 날짜와 시간에. 이게 운명이 아니면 뭘까? 온 우주가 우리의 사랑을 응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성찬은 가방에서 각설탕이 채워진 병을 꺼내곤, 쇼타로의 입에 각설탕을 하나 물려준다. 오도독, 씹히는 달달한 맛. 그거 알아? 우주엔 각설탕이 없어. 속삭이는 목소리에 성찬은 조용히 웃을 뿐이다. 없어서 다행이다. 끊임없이 지구를 그리워했을 테니까. 이 달달한 식감을, 그리고 어떻게 보면 자신을 잊지 못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지구에 왜 다시 왔어?"
원하는 답이 정해진 질문일 수도 있지만, 성찬은 이제 확답을 받고 싶었다. 평생 자신의 곁에 있어 주겠다고. 사랑한다고. 그런 절절하고도 확실한 답을 듣는 것을 늦출 수 없었다. 성찬은 쇼타로의 상의 속으로 손을 밀어 넣는다. 아, 뜨거워.... 뜨겁다고 앓는 소리를 내는 쇼타로를 바라보곤, 허리를 세게 움켜쥐면, 자국이 남지 않을까. 질 나쁜 상상을 하며 대답을 다시 한번 재촉한다. 왜 다시 왔어, 타로.
그러자 그토록 사랑하고 그립던 소년의 고백이 시작된다. 네 삶을 훔치고 싶었어.
... 그리고, 너랑 같이 죽고 싶었어.
완전무결한 영원은 결국 벼랑 끝에 맺혀있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지구소년이 두 눈을 감을 때, 언제든지 끊어낼 수 있게 불완전하게 변질된 상태로. 그럼, 영원 같은 사랑을 할까. 성찬의 고백에, 쇼타로는 드디어 확답한다. 사랑해.
성찬은 비틀즈의 <Across the Universe>의 가사를 떠올린다. 우주를 건너서 다시 자신을 찾으러 온 사랑스러운 외계소년. 자신의 삶을 훔치고, 스스로의 삶을 손에 쥐여주러 온 소년. 같이 죽고 싶다고 스스로가 내린 사랑에 대한 정의로 고백을 하는, 푸른 눈의 외계 소년. 부재와 함께 생긴 다정한 기회로, 삶의 세계가 바뀔 수도 있었지만,
Nothing's gonna change my world....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성찬의 세계는 바뀌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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