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

Monsieur ravissant

with. 아틸라


파리는 많은 예술가들이 천국으로 여기고 찬양하던 도시였다. 각종 예술이 술과 담배, 낭만 아래 한데 뒤섞여 녹아내리는 그런. 그 가운데에서도 파리에 번성한 재즈는 파리를 천국으로 여기고 건너온 미국의 뮤지션들이 일으킨 파리의 여러 기둥들 중 하나였다. 파리에 있을 때에도 재즈클럽은 동료들과 자주 다녔다. 예술을 하는 사람으로서 재즈는 영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힘을 가진 장르였고, 케일럽은 재즈가 가진 힘과 흐름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것이 이 작은 재즈 클럽의 한켠에 앉아있는 이유일 것이다. 똑같은 재즈클럽일진대 파리의 클럽과는 또 느낌이 달랐다.

케일럽은 익숙하게 귓가로 감겨드는 음악과, 댄스 플로어 위를 누비는 사람들의 춤을 가만히 앉아 감상했다. 사람들의 얼굴에 떠올라있는 즐거움의 색을 눈에 담는다. 재즈 클럽은 케일럽에게 괜찮은 배움의 장소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표현하는 생생한 감정들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곳이었으므로. 백인과 유색인종 구분 없이 뒤섞여 춤을 추는 광경에서 케일럽은 종종 어떠한 해방감 따위의 감정을 읽었다. 읽어냈으나, 이해는 할 수 없었다. 케일럽은 그들이 무엇에서의 해방감을 느끼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하나의 작품을 보는 느낌이었다. 

 

음악 하나가 끝나고, 새로운 음악이 시작하기 전의 짧은 텀에 케일럽은 감싸 쥐고 있던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금주법의 굴레 아래에서 은밀하게 만들어진 네그로니(Negroni, 칵테일)치고는 상당히 괜찮은 맛을 가지고 있었다. 금주법을 시행 중이라곤 하지만 술을 구하는 것이 생각만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케일럽은 며칠 전 동생이 가져왔던 배스텁 진을 한 모금 머금었다 뱉은 일을 떠올렸다. 금주법으로 인해 술을 구하는 게 힘들어지자 집의 욕조를 이용해 만든 술이라고 했던가. 낮은 질의 술이 풍기는 향에 충격받은 저를 두고 킬킬 웃던 꼴이 얼마나 얄밉던지.

집에서라면 얼마든지 멀쩡한 술을 구할 수 있음을 알고도 저를 골탕 먹이기 위해 구해온 술이 틀림없으리라. 케일럽이 술에 대한 감상에 빠져있는 사이 댄스 플로어의 사람들은 새로운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거나, 댄스 플로어를 내려가거나 새로이 올라갔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케일럽은 아몬드 빛의 피부가 돋보이는 사람을 하나 발견했다. 다른 이들 사이에 가려 이목구비를 또렷이 보지 못했다. 흑인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은 듯싶었고, 유럽의 백인도 미국의 백인도 아닌 다른 나라의 사람이거나 인디언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종종 케일럽의 시야에 들어왔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가벼운 움직임으로 춤을 추는 남자는 케일럽의 시선에 상당히 이국적이어서 종종 그에게로 시선이 가 닿았다. 파리에서도 흑인이 아닌 유색인종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친구 혹은 지인 중에서는 손에 꼽을 만큼 드문 존재이긴 했지만 그리 낯설게 볼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눈에 띄는 이유는 글쎄, 주변에 백인들이 있어서 색이 대비되기 때문일까. 혹은 그의 춤 때문이거나. 그 이유에 대해 케일럽은 그다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굳이 이유를 찾아내 알아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다시 또 음악 하나가 끝나고, 이번에는 여성 뮤지션의 짙은 보컬이 새롭게 음악과 어우러지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것이 묘한 규칙성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사이 케일럽은 아까 보았던 아몬드 빛 피부에 흑발을 지닌 남자가 앞을 스쳐 지나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자의 테이블은 제가 앉은 곳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남자가 어딘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 보이는 얼굴로 자리에 앉는 것을 보며 케일럽은 관심을 거두었다. 아니, 거두려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의 테이블이 있는 방향에서 익숙한 타국의 언어가 들려오지 않았더라면 관심을 완전히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반쯤 남은 칵테일을 한 모금 더 넘기는 케일럽의 눈이 다시 그곳으로 향했다. 남자의 옆자리에 새로운 사람이 하나 앉아있었다. 일행인 걸까. 그런 것치고는 둘 사이가 서먹해 보여, 케일럽은 그것이 클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룻밤 구애의 현장이리라 생각했다. 

 

"당신의 피부는 정말 초콜릿 같군요. 핥으면 단 맛이 날 것 같아요. 그럴 수 있는 영광을 내게 줄래요?" 

 

아니나 다를까, 음악을 가르고 선명히 들려오는 프랑스어에 케일럽이 미간을 모았다. 쏠린 신경을 거두고 싶었다. 어디서나 흔히 일어나는 구애의 현장이기도 하니까. 

 

"무슈. 눈동자에 바다를 품고 있군요. 아름다워요." 

"아니, 그러니까 프랑스어는 아직 서툰데..."

 

곤란한 듯 쩔쩔매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 케일럽이 이번에는 시선을 주었다. 너무 당연하다는 듯 프랑스어를 쓰기에 서로 의사소통은 되는 줄 알았다. 그게 아니었나? 케일럽은 숫제 팔짱을 끼고 그 광경을 노골적으로 관람했다. 시선을 느낀 남자와 눈이 마주쳤지만 케일럽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남자가 먼저 시선을 돌릴 때까지 빤히 쳐다보았다. 무례하다면 무례한 시선이었다. 조금 지친 듯한 남자의 얼굴 위에 떠오른 것은 곤란의 빛이건만, 초콜릿을 운운한 프랑스인은 그런 사소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기세로 구애를 이어가고 있었다. 검은 머리칼이 비단 같다거나, 깊은 눈이 우수에 차 보인다거나, 태양이 빛을 뿌려놓은 주근깨 같다거나. 듣고 있기가 힘들 정도의 찬양이 줄줄이 뒤를 이었다. 어지간히 남자가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까지 열렬히 매달릴 이유가 있을까. 

 

"애쓰고 있는데 방해해서 미안하지만 저쪽은 당신 말을 반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만." 

 

보다 못한 케일럽이 두 사람의 방향으로 몸을 살짝 기울여 불어로 말을 걸었다. 곤란하던 남자의 얼굴에 살았다는 기색이 어렸다. 온통 영어뿐인 곳에서 들려오는 프랑스어에 반색하며 고개를 돌린 프랑스인이 케일럽을 발견하고는 제 앞의 아름다운 남자에게 말을 해석해줄 것을 부탁했다. 프랑스인에게 지목당한 '아름다운 남자'는 프랑스어를 주고받는 케일럽과 제 옆의 프랑스인을 번갈아보고 있었다. 케일럽은 변화 없는 얼굴로 건조하게 코웃음을 쳤다. 

 

"당신의 추근거림을 전달할만큼 가벼운 입은 아니라서요. 그러니 포기하고 다른 사람에게 가보는 게 좋겠습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말을 해석해달라고 부탁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정말 그런 부탁을 들어줄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케일럽은 프랑스인을 맞닥뜨려 곤란해하던 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당신이 아주 마음에 든 것 같은데, 어울려 줄 의향이 있습니까? 없다면 그 정도는 말해줄 수 있어요."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은 싫다고 전해주실래요?"

 

케일럽은 들은 말은 그대로 프랑스인에게 전달해 주었다. 케일럽의 말이 끝나자 남자는 서툰 불어로 싫다는 뜻을 분명하게 전달했다. 프랑스인은 그것에 크게 낙담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선이 분명한 거절에 더는 추근거리지 않고 남자의 곁에서 멀어졌다. 프랑스인이 사라지자 남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도 되겠냐는 듯한 제스쳐에 케일럽은 선뜻 옆자리를 내주었다.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곤란해 보이길래 말을 전달해준 것 뿐이죠." 

 

가까이서 본 남자는 전반적으로 선이 부드러운 느낌을 갖고 있었다. 멀리서 보았을 때 검은가 싶었던 눈은 짙은 청색을 띠고 있어서, 케일럽은 그가 백인과 비백인의 혼혈이겠거니 짐작했다. 오목조목한 이목구비에, 조금 전의 프랑스인이 칭찬해 마지않던 주근깨가 남자의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감사의 의미로 술 한 잔 살게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케일럽이 승낙의 의미로 고개를 까닥였다. 

 

"아틸라에요. 저쪽 대로에 있는 양복점에 다니고 있어요."

"케일럽 록하트에요."

 

자신을 소개하는 남자에 대한 예의로 함께 이름을 밝힌 케일럽은 제 국적이 미국이라는 사족을 대어야 할까, 잠시 싱거운 생각에 사로잡혔다. 물론 이런 식의 우연하고 짧은 만남에 그런 사소한 개인 정보는 필요 없으므로 생각에 그쳤지만 말이다. 술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사이, 자신을 아틸라라고 소개한 남자는 이런 재즈 클럽은 자주 오지만 프랑스 사람에게 플러팅을 받아보기는 처음이라며 프랑스어는 아직 배우는 중이라 능숙하지 못해 곤란하던 참이었다고 덧붙였다. 

 

"케일럽 씨는 프랑스어가 굉장히 능숙하던데요."

"프랑스에서 살아서 그래요. 외가가 거기거든요."

"부럽네요. 전 미국에서 태어나서 자랐는데 어머니 고향인 오스만 제국에는 가본 적이 없거든요."

"어머니가 오스만 제국 분이셨군요."

 

댄스 플로어를 쳐다보던 케일럽의 시선이 어머니의 나라를 말하는 아틸라에게 닿았다. 오스만 제국이라면 가 본 적은 없지만 사진과 그림 등으로 본 적이 있는 곳인데다, 최근의 오스만 제국은 제국을 분리하려는 연합국의 행동에 반발해 독립전쟁이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케일럽은 굳이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그가 알든 모르든 언급을 안한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고, 대화 주제로 삼기엔 좋은 이야기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잠시 대화가 끊어진 사이 음악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지금껏 연주되던 곡들보다 리듬이 강하고 즉흥적인 느낌이 물씬 드는 스트라이드 피아노 곡이 클럽을 울리기 시작했다. 노련한 피아니스트가 아닐까 하고 생각할 만큼 역동적이고 빠른 템포의 음악에 댄스 플로어의 사람들의 얼굴에 좀 더 날것의 즐거움이 스미고 있었다. 그 면면들을 눈에 담느라, 문득 들려온 아틸라의 말을 놓친 케일럽이 그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양해를 구했다. 아틸라의 미소 띤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혹시 불어를 가르쳐주실 수 있나요?"

"불어를요?" 

"요즘 손님들 중에 프랑스 분들이 부쩍 늘어서 불어를 배우던 중이었거든요."

 

케일럽은 아틸라에게 불어를 가르쳐 주는 일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아틸라는 자신에게 도움이 될 존재인가? 그건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당장은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에게 불어를 가르쳐주는 일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일인가를 생각하면, 그것 역시 딱히 그렇지는 않았다. 아무리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고 하지만 케일럽은 누군가를 가르치는 선생이 될 생각이 없었으므로 경험을 쌓는 것에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았고, 누군가를 가르쳐본 적도 없었다. 더군다나 재미라고는 쥐어짜도 나오는 게 없는 자신은 그에게 친절한 선생이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에두른 거절의 말을 건네려던 케일럽이 입을 달싹이다 닫았다. 잠시 고민에 빠졌다. 최근 뉴욕 생활을 시작한 케일럽은 하루 일과가 무료했다. 발레단에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거나 뉴욕의 거리를 관광이라도 하는 마음으로 돌아다녔고, 이제는 그것도 좀 시들시들해져 가던 참이었다. 케일럽은 아틸라에 대한 생각을 고쳤다. 그는 자신의 무료함을 달래줄 수 있는 존재였다. 

 

"나는 좋은 선생이 되지는 못할 거예요. 그래도 상관없다면야, 도와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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