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

미국의 봄

M00


미국의 봄은 낯설다. 케일럽이 가진 봄에 대한 기억은 10살까지의 흐릿한 기억과 지난 미국 순회공연 때 2번 정도 맞이했던 기억뿐이었다. 다 똑같은 봄일 텐데 낯설 것이 뭐냐고 한다면 그도 그렇다 고갤 끄덕이고 말겠지만. 사실 낯선 것은 봄뿐만이 아니었다. 마치 외국에 여행을 나온 듯 조국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것이 낯설었다. 자신을 마중 나온 포드에 몸을 싣고, 케일럽은 달리는 차의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수선하고 복잡한 사람들과 차 사이를 이리저리 지나, 차는 한참만에 저택의 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 도착했습니다. 서글서글하게 웃는 얼굴로 문을 열어주는 기사에게 짧은 인사를 되돌린 케일럽은 고개를 들어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흐릿한 기억에 있는 집이 이런 모양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저택을 올려다보고 있는 사이 문이 열리고, 여성 한 명이 반가움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걸어 나왔다. 케일럽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져내렸다. 

"어머니."

"잘 왔다, 케일럽. 오는데 힘들지는 않았고?"

"힘들게 있나요."

문득 너무 딱딱한 대답을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 케일럽은 무대 위에서나 보이곤 하는 선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어 보였다. 계단을 내려온 여성이 반갑게 포옹하는 사이 미소는 씻은 듯 얼굴에서 사라졌다. 오래 미소를 짓는 것은 무대 위에서 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여성은 케일럽의 표정 변화에도 크게 상관하지 않고 함께 계단을 올랐다. 자신이 지낼 수 있도록 손님방 하나를 치워두었다는 이야기와 모처럼 저녁식사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이야기, 배를 타고 오래도록 오느라 힘들었을 테니 식사 때까지 푹 쉬라는 이야기에 꼬박꼬박 대답한 케일럽의 시선이 저택 안을 한 바퀴 느릿하게 돌았다. 파리에 있는 외조부모의 저택과 비슷한 듯한 구석이 군데군데 보였다. 

"10년만에 집에 오니까 어때? 10년이 넘지, 참."

"…반갑네요. 오랜만에 봐서요."

 

케일럽의 말을 들은 여성의 얼굴에 한껏 웃음이 맺힌다. 기뻐하는 눈치였다. 때문에 케일럽은 하고 싶었던 말을 삼킨다. 기쁨을 느끼고 있는 어머니에게 굳이 찬물을 끼얹을 생각은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케일럽이 마음속에서 고향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외조부모의 저택이었다. 10대를 그곳에서 보냈으니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사교댄스를 가르치던 교사가 발레를 추천하고, 발레를 위해 파리로 가게 된 후 케일럽의 고향은 줄곧 파리였다. 

"아버지는 일때문에 서부에 가 있단다. 네가 온다는 걸 알고 있으니 아마 며칠 내로 돌아올 거야. 동생들은 저녁에 집에 들어올 거고."

"네."

"집 구경 좀 할래? 네가 있던 때랑 크게 달라진 건 없지만."

"아뇨, 괜찮아요. 올라가서 조금 쉬어도 될까요?"

"물론이지. 그러고보니 피곤하겠구나. 신디? 케일럽을 방으로 좀 데려다줘요."

먼지떨이를 들고 옆을 조용히 지나가던 메이드가 그러겠다 대답하곤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는 먼지떨이를 어딘가에 두고 안내를 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지만, 케일럽은 아무래도 상관없었기에 그녀는 결국 두 손으로 먼지떨이를 꼭 붙든 채 어느 방의 문 앞까지 케일럽을 안내했다. 케일럽이 안내받은 곳은 손님방이었다. 자신의 방은 10살 이후 쓸모가 없었을 테니 지금까지 남아있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인사를 하고 멀어지는 메이드를 뒤로하고 케일럽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섰다. 어머니와 이야기를 하는 사이 옮겨진 짐이 가지런히 방 한편에 놓여있었다. 주름 하나 없이 가지런히 정리된 침대 대신 길죽한 소파에 몸을 누인 케일럽이 눈을 깜빡이며 천장을 바라본다. 몸이 노곤했다. 편한 객실을 사용한다 해도 배를 타고 오는 것은 상당히 피곤한 일이었다. 천장에 매달린 작은 샹들리에를 빤히 쳐다보던 케일럽의 눈이 얼마 지나지 않아 천천히 감겼다. 

선잠에서 깬 것은 문득 부스럭 소리가 들려온 탓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피곤한 안색으로 눈을 뜬 케일럽이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리려던 때였다. 무언가가 가슴팍에서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의아한 눈으로 몸을 일으킨 케일럽은 바닥에 떨어진 것이 편지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누군가 잠든 자신의 위에 올려둔 것 같았다. 하지만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는 듣지 못했던 것 같아 케일럽은 의아함을 거둘 수 없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이상해하면서도 케일럽은 편지를 주웠다. 앞뒤를 돌려보고는 편지를 뜯는다. 제 몸 위에 올라와 있던 편지를 그냥 버리는 것도 찝찝했다. 적어도 무슨 내용인지는 확인하고 버려야 하지 않겠나. 

<당신이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대가를 치르라>

단 한 줄이 다였다. 하지만 그 한 줄이 가진 무게는 상당해서, 케일럽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홱 돌려 방 안을 둘러보았다.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이 편지는 자신이 갖게 된 이상한 능력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걸 알수 있었다. 이상했다. 누가, 대체, 어떻게? 발레뤼스의 단원들 가운데서도 케일럽에게 이상한 능력이 생겼다는 걸 알고 있는 이는 한 사람뿐이었다. 그러니 미국의 가족들은 당연히 알 수 없는 사실이다. 능력이 생겼던 때에도 케일럽은 미국에 있을지언정 가족들과 함께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1918년 1월부터 1920년 1월까지 발레뤼스는 미국 순회공연을 했다. 미국 곳곳을 다니며 발레를 선보였다. 하지만 미국은 아직 발레에 대한 인지도가 그리 높지 못하여 순회공연의 성과는 그리 좋지 않았고, 씁쓸함을 안고 돌아가야 했다. 케일럽이 이상한 능력을 갖게 된 것도 이 시기였다. 케일럽은 그날의 고통을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했다. 기회를 준다면 자신을 바칠 수 있냐는 이상한 목소리를 들었고, 그럴 수 있다 생각한 순간 온몸을 뒤흔드는 고통에 집어삼켜졌다.

발레를 하며 어느 정도의 고통에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고통은 끔찍하게 몸 안을 갉아댔고 케일럽은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를 넘는 고통에 그대로 의식을 잃었었다. 당시의 고통을 생각하자 손끝이 싸늘히 식는 것 같아 케일럽은 작게 치를 떨었다. 다시 겪고 싶지는 않은 고통이었다. 그렇게 의식을 잃었다 깨어난 이후 보이지도 않는 이상한 능력을 얻어 지금까지 가능한 감추고 지냈었다. 그런데 대가를 치르라고. 편지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케일럽이 편지를 접어 품 안에 갈무리했다. 

대체 어떻게 대가를 치르라는 건지 의아함을 품었던 케일럽은 두 시간 후 저녁식사 자리에서 대가를 치를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식사의 자리에서 반가움을 나눴던 것도 잠시, 신기한 가십에 흥분한 것 같은 태도의 첫째 동생이 라디오에서 들었다는 말을 줄줄 늘어놓았던 것이다. 코람데오라는 단체에서 거룩한 사명을 위해 대행자를 찾는다고 했다. 겉으로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는 케일럽이 뉴욕의 가십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라 판단한 첫째 동생은 코람데오를 설립한 안젤리카 테일러에 대해서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뉴욕 버전 파티마의 성모니 뭐니 떠드는 동생의 말을 적당히 한 귀로 흘려버리며 케일럽은 편지를 써야겠다 생각했다. 파리로, 장기 휴가를 위한 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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