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비노기/톨비쉬

당신이 나를 부르실 때

톨비밀레 드림

꿈꾼 by 보늬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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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게시일: 2021.03.24 (https://posty.pe/rc1t7v), 펜슬 재게시 시 다소 수정을 거침



당부의 말씀

마비노기 메인스트림 C6 신의 기사단 (G19~G21) 스포일러와 드림주의 이름 및 외형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열람 시 주의해주세요!


검푸른 하늘 한 켠에 걸린 이웨카가 휘영청 밝았다.

창을 넘어 쏟아지는 붉은 달빛을 배경으로, 새하얀 침대 위에 앉은 아델레는 손에 든 잔을 비웠다.

"그렇게 기분이 좋으십니까?"

"그으럼요, 우리 제비꽃 보는 게 얼마나 오랜만이었는데."

웃음기 섞인 들뜬 목소리는 마치 노랫소리 같았다. 제비꽃이라 함은 에일리흐 왕국의 왕을 이르는 것이다. 한 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나라의 절대자를 저렇게 격의 없이, 그것도 '제비꽃'이라는 귀여운 애칭으로 호명할 수 있는 존재가 이 에린에 몇이나 존재할까.

비스듬히 턱을 괸 채로 맞은편 의자에 앉아, 술이 들어간 때문인지 평소보다 웃음이 많아진 데다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연인을 바라보며 톨비쉬는 미소 지었다. 테이블 위에 내려둔 와인잔을 손가락을 톡톡 건드리는 그의 눈빛이 어떤 생각을 훑고 지나갔다.

곧 톨비쉬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면, 당신은 항상 아끼는 이들에게 애칭을 지어 부르더군요. 에일리흐의 작은 왕을 제비꽃이라 하는 것도 그렇고."

"그야 눈동자가 제비꽃 색을 쏙 빼닮은 걸요."

"알터는 강아지라고 하시던가요."

"어……. 솔직히 비슷한 구석이 있지 않나요?"

"가만 있자, 르웰린은……두 가지군요. 아기 고양이와 깜찍이소다—."

"……슬슬 민망해지기 시작했지만 그건 사실 적시라고 생각해요."

눈에 띄게 창피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제 할 말은 똑부러지게 하고야 마는 연인을 보며 톨비쉬는 그만 크게 웃어 버렸다. 청량한 웃음소리의 시원한 향이 방 안에 가득해졌다. 아델레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벌떡 일어나 술잔을 쥐지 않은 손으로 톨비쉬의 등을 연신 주먹으로 두들겼다. 뭐가 그리 재미있어요! 그렇게 크게 웃지 말아요! 한술 더 떠서, 톨비쉬는 능청스레 눈가의 눈물을 닦는 시늉까지 했다.

"하하하……. 오늘의 당신은 평소보다 솔직한 모습을 많이 보여 주는 듯합니다."

아델레는 씩씩거리며 힘껏 눈을 흘겼다. 단 한 번도 유효타가 먹히지 않았다는 당연한 사실이 어쩐지 억울하게 느껴졌다. 테이블 위에 빈 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은 뒤 침대 위로 뛰어들어 베개 하나를 끌어안은 채 연인에게 등을 보이고 눕는 것으로, 그녀는 이 상황에 대한 심경을 표명하는 말을 대신했다.

"네에, 그러는 당신은 이 상황이 퍽 즐거워 보이는 기색입니다."

보이지 않아도 볼이 퉁퉁 부어 입술을 삐죽이고 있을 얼굴이 눈앞에 선했다. 톨비쉬는 입가에 걸린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 발치로 자리를 옮겼다. 그의 무게가 더해진 부분의 매트리스가 조금 더 가라앉는 게 느껴졌지만, 아델레는 몸을 더욱 웅크리며 베개에 얼굴을 묻을 뿐이었다.

"토라진 겁니까?"

"몰라요."

"흐응."

그는 토라진 게 분명한 연인을 상대로 부러 능청을 떨어 보기로 했다.

"내가 즐거워 보인다고 했지요."

"……."

"물론이죠, 즐겁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델레는 패배감에 휩싸이고 말았다. 다른 누구 때문도 아니라, 이런 노골적인 도발에 홱 돌아누워 팩 쏘아붙이려 입을 열고 있는 스스로의 탓으로. 그 패배감은 진실된 즐거움으로 충만한 연인의 두 눈과 마주쳤을 때 더욱 짙어졌다.

아델레는 차라리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되었다.

"아아, 그러세요? 그러시겠죠, 놀려먹는 재미가 얼마나 쏠쏠할 — ."

"당신이 이렇게 귀여운 모습을 보여주는데."

불만스럽게 꼼지락대던 몸이 제 말 한 마디에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어가는 모습을 톨비쉬는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그는 짧은 웃음소리를 남기고 여유로운 동작으로 입가에 가져간 술잔을 기울였다. 아델레는 베개에 파묻었던 시선을 빼꼼히 들어, 웃음기가 만연한 연인의 입술 틈으로 붉고 다디단 액체가 흘러 들어가는 모습을, 그것을 삼킬 때마다 상하로 부드럽게 운동하는 목울대의 움직임을 보았다.

왠지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몸이 가볍게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이상하다, 고작 이 정도 마신 걸로 취할 리가 없는데.

느긋하게 잔을 비운 톨비쉬는 눈만 빼꼼 내밀어 그를 쳐다보고 있던 연인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큼직한 베개가 얼굴의 절반 이상을 가리고 있음에도 빨갛게 달아오른 귓바퀴의 색은 베갯잇의 흰색과 대비되어 오히려 선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 그런 말을 잘도 하십니다아……?"

앞으로 그녀 앞에 펼쳐질 상황의 전개를 대충 직감한 아델레의 목소리는 거의 기어들어 갔다.

"내가 말한 적 있던가요? 당신의 그런 모습도 아주 좋아한다는 걸."

톨비쉬는 그저 웃으며 앉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토, 톨비쉬?"

그 얼굴은 어느 새 아델레의 코앞에 바짝 다가와 있었다. 아델레는 순식간에 톨비쉬의 몸과 침대 사이에 꼼짝없이 갇힌 모양이 되었다. 그녀에겐 온 시야를 장악한 연인의 모습을 얼떨떨한 눈으로 쳐다볼 밖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얼굴 가득 웃고 있는 톨비쉬의 얼굴은, 말 그대로 전구라도 켠 것마냥 환했다. 아델레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팔라라의 광휘가 여기에 있네…….

"하하, 이렇게까지 괴롭힐 생각은 아니었는데. 미안합니다."

아뇨, 전혀 미안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데요. 차마 입 밖에 내지 못 하는 말을 눌러 삼키며 아델레는 베개를 끌어안은 자세 그대로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급격하게 말수가 적어진 채 침대에 누워 푸르고 파란 눈으로 그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는 아델레의 모습을, 톨비쉬는 감상하듯 바라보았다. 그는 한 손을 들어 연인의 얼굴에 가져갔다. 아델레는 섬세한 손길이 그녀의 흐트러진 앞머리를 정돈해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그 다정한 손길을 좋아했다. 물론 그것의 주인도.

톨비쉬는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던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아델레의 귀 뒤로 꽂아 넘겼다. 길고도 단단한 손가락은 물결치는 머릿결 속을 유영하며 미끄러져 내려오다가 그 끝자락에 멈추었다. 그 끝을 엄지손가락 끝으로 부드럽게 둥글리던 톨비쉬는 고개를 살짝 숙여 거기에 입 맞추었다. 밤의 너울 같은 머리카락에 작별을 고한 톨비쉬의 입술은 뒤이어 연인의 발그레한 뺨에, 동그란 이마에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 감촉이 간지러운지 베개 밑에서 작게 킥킥대는 소리가 났다. 한결 긴장이 풀어진 듯한 아델레의 모습에 톨비쉬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는 머릿결을 정리해주던 손을 약간 움직여 그 동안 제 연인의 품을 독차지하고 있던 베개를 저 구석으로 밀어냈다. 갑자기 가슴께가 허전해졌다는 생각을 하려던 찰나, 아델레의 귓가에 연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까 하던 이야기를 계속해 보도록 할까요."

목소리는 나직하고, 또 부드러웠다. 둘 곳이 사라진 손을 어정쩡하게 꼼지락대며, 아델레는 톨비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저……문득 궁금해졌을 뿐입니다. 당신만이 날 부르는 이름은 무엇일지."

아델레의 표정이 사뭇 심각해졌다. 기대감인지 장난기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모를 반짝임을 두른 채, 대답을 기다리며 자신만을 바라보는 톨비쉬의 눈동자를 마주한 아델레는 도로록 눈을 굴리며 꽤 진지한 고민을 시작했다.

절대 말 못해. 그녀는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몇 개의 단어를 빠르게 흩어냈다. 나도 양심이 있지, 본인 앞에서 자길 선녀라든지 라면 같은 별명으로 부르고 있다는 말은 절대 못해.

물론 톨비쉬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러나 그의 입술은 주인의 참을성을 배반하는 편이었다. 온 얼굴에 시간차로 퍼부어지는 버드 키스 세례를 —엄밀하게는 그것이 동반하는 간질임을— 견디지 못한 아델레는 어쩔 수 없이 고민의 시간을 단축해야 했다. 그녀의 입에서 몇 번이나 항복 선언이 터져 나온 뒤에야 톨비쉬는 뿌듯한 표정으로 윗몸을 일으켰다. 아델레는 상체를 끌어올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 앉으며 웃느라 흐트러졌던 호흡을 정돈했다.

조금 뒤 그녀는 머뭇거리며 입을 뗐다.

"실은 말이죠……. 아, 이런 말 내 입으로 하는 거 너무 민망한데. 아아, 알았어요. 얘기할게요. 혹시라도 너무 실망하면 안 돼요?"

톨비쉬는 착한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을 한 차례 꾹 다무는 시간만큼의 정적.

아델레는 쭈뼛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녀의 시선은 슬슬 눈앞의 연인을 피해 허공을 방황하기 시작했다.

"사실 보통은……당신 이름으로 부르는데요……. 이게 다 이유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아이, 이걸 말로 하려니까 갑자기 창피하네. 딱 한 번만 말할 테니 잘 들어요."

무엇인가 마음의 준비를 마친듯, 아델레는 두 손을 뻗어 톨비쉬의 얼굴을 붙잡고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일생일대의 엄청난 선언이라도 앞둔 사람처럼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고백했다.

"……당신이 정말 좋아서 당신 이름마저도 예쁘고 사랑스럽단 말이에요."

비록 다 기어들어 가는 크기에 아주 빠른 속도였지만, 아델레의 말은 그 어떤 소리보다도 분명하고 또렷하게 톨비쉬에게 전해졌다. 톨비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연인을 쳐다보았다.

아델레는 '에라, 모르겠다!'의 자세를 훌륭히 견지하고 있었다. 민망함의 홍수에 휩쓸려 머릿속에 떠오른 말이란 말은 모두 입 밖으로 내고 보는 것 같았다. 긴장이 풀어져서인지 한 번 쏟아지기 시작한 말의 폭포수는 그칠 줄을 몰랐다.

"……그리고 동물에 빗대어지는 걸 원한다면 햇살 같은 대형견이랑 비슷하다고 종종 생각했어요. 가끔은 나의 팔라라라고도 — 헙."

그녀가 가까스로 이성의 끈을 붙잡은 건 안타깝게도 제법 이러저러한 이야기가 그녀의 입술 틈새에서 줄줄 새어나간 뒤였다. 아델레는 어느 새 연인의 양 볼을 잡고 있던 두 손을 쏙 내려 뒤늦은 자체 입단속을 시행했다.

톨비쉬가 이상하리만치 반응이 없는 점이 되려 불안했다. 바다를 닮은 두 눈은 알 수 없는 일렁임을 담은 채 고요히 그녀를, 아니, 어쩌면 저 너머 어딘가를 향하고 있을 뿐이었다.

결단과 확인의 시간이 닥쳐왔음이 분명해졌다. 아델레는 용기를 내기로 했다. 입을 가렸던 손을 슬쩍 내리며, 그녀는 조심스럽게 연인의 이름을 불렀다.

"저……톨비쉬."

톨비쉬는 눈앞에 대고 손 흔들기를 동반한 아델레의 부름에 겨우 혼자만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왔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인 뒤에야 아델레의 표정이 바로 보였고, 비로소 그녀가 초조해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리고 그 원인이 자신인 것은 꽤나 명백해 보였으므로 상황 파악 이전에 연인을 달래는 게 먼저라는 판단이 서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톨비쉬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예."

"나 무슨 이상한 얘기 안 했죠?"

"아……."

울상이 된 아델레의 물음에 잠시 멍해졌던 톨비쉬의 낯에 이내 다채로운 감정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델레가 그 표정을 채 살피기도 전에 톨비쉬는 두 팔을 뻗어 그의 연인을 품에 안았다. 아델레는 살짝 놀랐지만 안기기 전 마지막으로 보인 톨비쉬의 얼굴에 더없이 해사한 미소가 떠올라 있던 것으로 미루어 그 감정들이 부정적이진 않으리라고 결론 내렸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쉰 그녀는 연인의 너른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그의 등 뒤로 팔을 둘러 안았다. 얇은 옷감 너머에서 일정한 속도로, 그러나 확연히 빠르게 뛰는 심장의 고동이 느껴졌다. 쿵, 쿵, 쿵. 아델레는 가만히 웃으며 톨비쉬의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등 위로 작은 손바닥이 자아내는 안정적인 리듬이 느껴졌다. 톨비쉬는 깊은 숨을 내쉬며 사랑스러운 연인의 머리 위에 짧게 키스했다.

속삭이는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델레."

"네, 톨비쉬."

평범한 부름과 대답이 전혀 평범치 않은 감정의 격류를 만들어내는 이것을 무어라 부르면 좋을까. 톨비쉬는 그녀를 한 번 더 힘주어 안았다. 감쌌던 팔을 풀어내는 그의 눈 속엔 기쁨과 황홀함과 벅참 따위로 이름 붙일 만한 감정의 빛이 무수히 떠다니고 있었다. 아델레는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마주본 연인의 귀밑머리를 매만졌다. 둘은 그렇게 말없이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행복감의 극한이 있다면 지금 내 안에 차오르는 이 감정이리라. 톨비쉬는 생각했다. 그는 심지어 약간의 당혹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제 연인에게 느끼는 감사와 사랑을 논하려 하니 갑자기 그가 아는 어휘의 수가 급격히 줄어든 것 같았다.

주신의 검끝이 경애하여 마지않는 다정한 세계는 그저 그의 눈앞에 있었다. 에린의 수호자라는 지위에 있는 그녀가 이곳에 존재함이 단지 그만을 위함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를 독점하고 있다는 고양감이 전신을 지배했다. 다른 어떤 이도 절대 대신할 수 없는 하나뿐인 연인으로서.

코끝에는 아직 조금 전 마셨던 와인의 향이 감돌았다. 달큰하고도 짜릿하다.

어쩌면 이건 일종의 배덕감일지도 모른다.

톨비쉬의 얼굴에 묘한 웃음기가 스쳤다. 아델레는 불안해졌다.

"그러고보니, 제가 맞게 들었다면 당신이 저에 대해 재미있는 생각을 하나 가지고 있는 듯했는데."

올 것이 왔구나. 아델레는 마음을 정리하기로 했다. 방정맞게 나불댄 업보의 파도가 나를 덮친대도 저항하지 않으리라…….

"자."

그녀의 앞에 성큼 다가온 건 업보의 파도가 아니라 비스듬히 머리를 내민 채눈을 빛내는 톨비쉬였다.

"……네?"

"왜 그런 표정을 짓습니까. 제가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그 발언은 또 그것대로 의미심장한걸요……. 아델레는 애써 위험한 생각을 떨쳐냈다.

톨비쉬는 혼란에 빠진 연인의 이해를 돕기로 했다.

"대형견 같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자."

"아니, 그게 제가 당신을 강아지 다루듯 쓰다듬고 싶다는 의미는……."

아델레가 손사래를 치며 이 터무니없는 오해를 풀 방법을 강구하려던 때에, 그녀의 손바닥에 폭신한 곱슬머리의 감촉이 느껴졌다.

"……아니었는데에에……."

앞으로 내밀어진 아델레의 손에 제 머리를 슬며시 들이댄 톨비쉬가 은근한 미소를 내비쳤다.

"오늘만 특별히입니다."

이 거대한 유혹에 저항하기엔 아델레는 톨비쉬의 머리카락을 만지는 걸 좋아했고, 그의 미소는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아델레의 손이 멈칫거리며 태양을 닮은 금빛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톨비쉬는 눈을 감고 연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때때로 움직임이 멈추면 제 쪽에서 머리를 비벼 오기도 했다. 정말 예쁨 받기 좋아하는 골든 리트리버 같다고 무심결에 생각해 버린 아델레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민망함도 잠시 뿐이었다. 이내 연인을 반려견 취급(!)하는 데 익숙해진 아델레의 손놀림이 꽤 대범해지기 시작했다.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던 손은 얼굴로, 얼굴에서 목덜미로 점점 활동 범위를 넓혀 나갔다.

손바닥의 남하가 완전히 멈춘 건 단단한 빗장뼈와 그 아래에 적당한 양감으로 자리잡은 대흉근이 만져졌을 때였다. 그리고 톨비쉬는 오늘 아델레의 요구로 앞섶의 여밈이 비교적 덜한 얇은 포엣 셔츠 한 장을 걸친 채였다. 등 뒤로 한 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앞선 입방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대형 사고였다. 아델레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손을 치우려고 했다.

하필 그때였다.

죽 감겨 있던 톨비쉬의 두 눈이 반짝, 뜨였다.

"아, 하하, 하하하……."

조용한 방 안에는 아델레의 멋쩍은 웃음 소리 뿐이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나오야, 보고 싶어.

톨비쉬는 아무런 말도 없이 아델레를 바라보았다. 문자 그대로, 그저 가만히 바라보았다. 덕분에 아델레의 머릿속에서는 소울스트림 방문 계획 수립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거의 까무러칠 지경이 된 연인을 보는 톨비쉬의 입매가 장난스러운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톨비쉬는 가슴팍에 올려진 아델레의 손을 부드럽게 그러쥐었다. 그리고 그의 손안에 잠자코 붙잡힌 연인의 손을 제 얼굴 위로 조심히 갖다 대었다. 볼을 감싸는 보드라운 손바닥에 자신의 얼굴을 천천히 비비며, 톨비쉬는 내리깔았던 시선을 살포시 들어 아델레의 두 눈을 응시했다. 어스름한 밀랍빛 불빛이 풍성한 금빛 속눈썹 위로 산란하며 바다 같은 눈동자에 그림자 져 어지러이 흩어졌다. 그의 조각 같은 입술이 애태우듯 스치는 자리마다 흠칫흠칫 열이 올랐다.

엄지손가락 아래의 볼록한 부분에 그의 입술이 맞닿았을 때, 비로소 톨비쉬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손이 붙잡힌 모양 그대로 옴짝달싹도 하지 못한 채, 아델레의 시선은 제 손바닥에 고정되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윽고 톨비쉬의 입술이 열렸다.

"아델레."

온몸이 오싹하게 전율했다. 듣는 것만으로도 전신이 녹아내리는 듯한 목소리의 열량, 그리고 손바닥의 예민한 살갗 위로 생생히 전해지는 입술의 움직임에 뱃속 깊은 곳이 저릿저릿했다. 내 이름이 이런 울림으로 발음되는 거였던가? 거센 맥박 소리에 귀가 먹먹했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사위가 아찔거린다. 어지럽다.

"……치사해요."

차마 눈을 맞추지 못하고 붉어진 얼굴로 볼멘소리를 중얼거리는 아델레의 귓가에 기분 좋은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그와 동시에 은근히 몸을 기울여 그녀에게 가까이 기대어 오는 연인의 체중이 온몸에 선명하게 느껴졌다. 아아, 이건 정말 반칙이야.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배회하던 시선을 가까스로 가다듬은 아델레가 흘깃 제 쪽으로 눈을 맞춰 오자 톨비쉬는 천진난만하게 눈을 휘며 웃음 지었다. 유리알처럼 맑은 바다색 눈동자를 연인에게서 떼지 않은 채.

"……아델레."

깊게 젖은 목소리와 더운 숨결. 톨비쉬는 아델레의 손가락 사이에 그의 손가락을 얽어 단단히 깍지를 끼었다.

"나의 전부."

그는 깍지 낀 손을 들어 연인의 손등을 제 입가로 가져갔다. 아델레는 가빠지는 호흡을 애써 달래며 그녀의 이름을 속삭이던 입술이 자신의 손등 위 한 점에 짙고 오래 머물다 아쉬운듯 떨어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꼭 그 자리에 화상이라도 입은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어 한없이 부드럽고 달콤하며 경건하기에 위험하고 뜨거우며 유혹적인 속삭임이 들려왔다.

"더 예뻐해 주지 않겠습니까?"

아델레는 이번에도 패배를 직감했다.

그녀는 얕게 한숨을 쉬며 두 팔을 들어올려 톨비쉬의 목을 감쌌다. 그러고는 제 쪽으로 천천히 당기며 눈을 살포시 내리깔았다.

그리고 그녀의 연인에게만 들릴 만큼 작게 속삭였다.

"오늘만, 특별히예요."

곧 두 사람의 숨이 어지럽게 얽혀들었다. 혀끝에 채 가시지 않은 와인의 맛이 느껴졌다.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기까지 남은 밤은 아직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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