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상의 온도
톨비밀레 드림
최초게시일: 2021.03.14 (https://posty.pe/bed5hb)
당부의 말씀
마비노기 메인스트림 C6 신의 기사단(G19~G21) 스포일러 및 드림주의 이름과 외형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열람 시 주의해주세요!
속눈썹 위에 맺힌 햇살이 이내 도르륵, 뺨 위로 흘러 내려 번졌다. 그 기척에 잠에서 깬 톨비쉬의 눈꺼풀이 서서히 열렸다. 화창한 하늘 아래 백사장 위를 어루만지듯 찰랑이는 바닷물의 색을 담은 눈동자에 유리창 너머로 펼쳐진 이른 아침의 하늘이 담겼다. 창밖의 먼 곳 어딘가를 일별한 톨비쉬의 시선은 이내 품 안의 연인을 찾았다.
톨비쉬는 새근새근 단잠에 빠진 아델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델레는 어젯밤 그의 가슴에 폭 안겨 잠들었던 모습 그대로였다. 서서히 고도를 높여 가는 태양이 쏟아낸 빛줄기가 그녀의 피부 위로 따스하게 녹아들었다. 고른 숨소리에 맞춰 일정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어깨 위로 잔잔히 굽이치는 검은 머리카락이 몇 가닥 흘러내려 있었다. 새까만 밤의 어둠을 닮은 그 머리칼이 어쩌면 그렇게도 눈부신지 모를 일이라고, 톨비쉬는 종종 생각하곤 했다. 저도 모르는 새 피어난 미소를 머금고, 톨비쉬는 손을 뻗어 연인의 머리카락을 조심조심 빗어 넘겼다. 곧 밤의 베일 같은 머리카락에 숨어 있던 아델레의 얼굴이 아침 햇살 아래에 드러났다.
동그란 이마 아래엔 붓으로 가볍게 그려낸 듯한 눈썹이 자리 잡고 있다. 가볍게 닫힌 눈꺼풀에 드리운 길고도 촘촘한 속눈썹은 날개를 접은 나비 같다. 투명한 우윳빛 두 볼 위로 슬며시 비치는 발그레한 혈색은 수줍게 피어난 탐스러운 꽃송이처럼 보인다. 오뚝하고 매끄러운 콧날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기분 좋은 미소를 띤 분홍빛 입술이 있다. 살짝 벌어진 그 틈새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약간의 온기를 머금은 숨결이 밀려나와 살갗을 간질였다. 톨비쉬는 그저 가만히, 품 안에 자리한 더할 나위 없는 기적을 감상했다.
절대신 아튼 시미니가 창세한 이곳에 아델레가 아로새긴 삶의 궤적은 그녀에게 많은 이름을 붙여 주었다. 별에서 온 여행자, 에린의 영웅, 새롭게 태어난 주신의 검, 낙원의 수호자. 그리고 톨비쉬는 그녀를 다른 이들보다 몇 가지 더 많은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었다. 나의 이해자, 나의 구원, 나의 사람, 나의 연인, 나의 아델레. 나를 완성하는 가장 완벽한 일부. 나의 존재함을 증명하는 존재. 밀레시안 아델레는 주신의 첫 번째 검이 그를 손수 빚어 이름 짓고 숨을 불어넣은 지고한 창조주에게 한량 없는 감사를 바치게 하는 단 하나의 이유였다. 제법 긴 시간과 정성을 들여 제 품에 안겨 잠든 연인의 모습을 구석구석 눈에 담던 톨비쉬의 손가락이 그녀의 흑단 같은 머리칼 끝부분을 부드럽게 쥐었다. 그리고, 무한한 애정과 경외를 담아, 거기에 조심스레 입을 맞추었다.
으음, 작은 소리와 함께 아델레가 몸을 뒤척였다. 손가락 사이로 그녀의 머리카락이 스르륵 빠져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곧 톨비쉬의 눈앞에는 잠든 연인의 뒷모습이 펼쳐졌다. 그녀의 뒷모습을 찬찬히 바라볼 수 있는 기회는 좀처럼 생기지 않는 것이므로, 톨비쉬는 기꺼운 마음으로 그에게 주어진 시간을 만끽하기로 했다. 평소에는 뒤로 늘어뜨리는 머리카락이 흰 베갯잇 위로 어지러이 흐트러져 있어서 목덜미가 훤히 드러났다. 톨비쉬는 귓불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가녀린 곡선 위를 음미하듯 쓸어내렸다. 자신이 그 위에 셀 수 없을 만큼 새긴 입맞춤의 개수를 짐짓 헤아려 보면서. 동그란 어깨 위를 장난스레 노닐던 손가락은 작게 돋아난 날개뼈를 스치듯 지나, 어느 한 곳에서 문득 멈춰 섰다. 멈춘 손끝과 함께 톨비쉬의 시선도 그곳에 고정되었다.
그리 넓지 않은 등 면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그 한가운데를 길게 가로지르는 커다란 흉터였다.
아델레는 밀레시안이다. 절대신이 창조한 낙원과 투아하 데 다난을 지키기 위해 전쟁의 여신 모리안이 선택한 수단. 한계를 모르고 강해질 수 있는, 그야말로 전투에 최적화된 조건을 갖춘 신체에 소울스트림을 건너 온 영혼이 깃든 자들. 몸의 시간을 되감아 부상을 수복할 뿐만이 아니라 죽음조차도 그들에게는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하는 원점이다. 여느 밀레시안들처럼 아델레의 몸에도 크기와 경중을 달리 하는 상처가 여럿 생겼다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단 하나, 톨비쉬의 대검에 꿰뚫린 상처를 제외하고.
이상한 노릇이죠. 이 말을 하는 그녀의 얼굴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 회복 온천에 가도, 죽었다 살아나도, 환생을 해도 이건 그대로더라구요. 신기하지 않아요?
그러고는 짐짓 고민하는 시늉을 하더니, 곧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 흐음, 이건 혹시 아튼 시미니 님의 뜻이 아닐까요, 당신이 날 마지막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유리알 같은 웃음소리가 낭랑했다. 톨비쉬는 웃었다.
-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나만은 마지막까지 당신을 홀로 되게 하지 않겠다고요.
저는 당신을 지킬 것입니다. 설령 그것이 주신께서 제 앞에 예비하신 길이 아닐지라도. 입 밖에 내지 않고 삼킨 말은 뜨겁게 일렁이는 어떤 것이 되어 그의 흉중에 자리 잡았다.
햇볕 아래에 드러난 아델레의 등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탁한 붉은색 자국이 그녀의 새하얀 살갗 위로 다소 불규칙한 형태의 선분을 그리고 있었다. 톨비쉬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나아가던 방향으로의 계속을 저어하던 그의 손가락은 머뭇거리며 도드라진 연인의 날개뼈 근처를 배회했다.
수 번의 망설임을 매만지던 손끝이 이윽고 조금씩,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와는 상당히 이질적인 감촉이 만져지자 톨비쉬는 저도 모르게 살짝 몸이 굳었다. 주변보다 어둡게 함몰되어 팽팽하게 당겨진 불균일한 표면. 눈밭이 쩍 갈라져 균열이 생긴다면 이런 모양일까? 아델레의 몸의 모든 일부 중 그 부분만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톨비쉬는 별안간 목구멍이 말라붙는 감각을 느꼈다. 왜일까, 그가 연인의 몸에 영구히 새긴 흉이 그의 손이 닿자마자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언젠가 뱉지 않고 가슴 속에 묻어둔 것이 불길이 일듯 거세게 울렁거렸다. 톨비쉬의 눈가가 고통스럽게 이지러졌다.
그의 두 팔이 아델레를 와락 끌어안은 것은 일순이었다.
아차, 하는 후회는, 대개 그렇듯이, 간발의 차를 두고 충동의 뒤를 따랐다.
"......나쁜 꿈이라도 꾸었어요?"
잠이 덜 깨어 웅얼거리는 아델레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그 후회에는 약간의 부끄러움이 첨가되었다. 톨비쉬는 그녀가 부디 돌아눕지 않기를 바라며 자신에게만 들릴 정도로 한숨을 쉬었다.
"아닙니다, 아무것도......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톨비쉬의 손가락이 아델레의 머리카락을 빗어 내렸다. 그는 손가락 사이사이를 물흐르듯 미끄러져 나가는 검은 머리카락의 감촉을, 그것이 그의 손 안에 남기는 잔향을 좋아했다.
"아직 시간이 꽤 이릅니다. 조금 더 자 두세요. 요 며칠 푹 쉴 수 있는 날이 없었지 않습니까."
살짝 잠긴 목소리로 말을 맺은 톨비쉬의 입술이 연인의 정수리에 부드럽게 닿았다, 아쉬운듯 떨어졌다. 그의 연인이 다시 잠을 청하길 —아마도 간절히— 바라며.
애석하게도 톨비쉬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습적으로 휙 돌아 누운 아델레의 두 눈을 정면으로 마주친 톨비쉬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당혹감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아닌 거 아니죠."
"예?"
"내 머리 빗었잖아요."
하루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맞는 두 번째 '아차'였다.
톨비쉬가 아델레의 머리를 빗는 건 주로 생각이 정리되지 않거나 심사가 복잡할 때였다. 이렇게 간단히 들켜 버릴 줄이야. 일취월장하는 학생의 실력에 내심 감탄하면서도 적당히 얼버무릴 말이 떠오르지 않아 말문이 막힌 톨비쉬는 무안함에 그만 웃어 버렸다.
"하하, 당신은 꼭 이럴 때에만 눈치가 빠르군요."
아델레는 톨비쉬의 얼굴을 말끄러미 바라 보았다. 웬만한 일은 여유롭게 웃어 넘기는 그가 이따금 평정을 잃고 당황한 빛을 내비칠 때, 그리고 그 이유가 자기로부터 기인할 때, 그녀는 솔직히 말해서 조금 즐거운 기분이 되었다. 대부분의 경우 당황하게 만드는 쪽은 톨비쉬이고 당황하는 쪽은 그녀이기 때문이다. 어쩐지 달성감 비슷한 것마저 느끼며 아델레는 연인의 팔뚝을 만지작거렸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조각상 같은 단단함이 품은 온기가 기분 좋았다.
그녀는 수호자가 그런 표정을 짓는 이유를 안다. 나의 몸을 관통했던 그의 대검이 남긴 흔적. 죄책감에 젖어드는 톨비쉬의 눈을 발견할 때마다 아델레는 그저 안타까웠다.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는데. 감히 헤아리기도 어려운 시간 위에 쌓인 당신의 고뇌를 송두리째 뒤집은 결심을, 당신이 항상 함께라는 불멸의 증표와 다름 없는 이 사랑스러움을 내가 어찌 미워하겠어. 비 맞은 강아지마냥 축 처진 짙은 눈썹과 살짝 붉게 물든 귓바퀴, 그리고 아닌 척 그녀의 눈을 피하는 맑은 바닷물색 눈동자가 귀엽다는 생각을 하며 아델레는 씩 웃었다. 구태여 묻는다면 훨씬 곤혹스러워 하겠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놀린 것 같군.
그리고 톨비쉬 말대로 좀 더 자야겠어.
몽롱함이 까무룩 찾아 드는 것을 느끼며, 아델레는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불렀다.
"톨비쉬."
나른하고도 달콤한 울림이 공기 중으로 퍼져 나갔다.
톨비쉬의 두 눈이 그제야 아델레를 바라 보았다.
아주 오랜만에 처한 난감한 상황에 신선한 기분을 느끼고 있던 연인을 향해, 아델레는 미소를 지으며 두 팔을 벌렸다.
"이리 와요."
다음 순간 톨비쉬는 두 눈을 껌뻑이며 아델레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녀의 맥이 뛰는 소리와 숨소리만이 귓가에 가득했다. 아델레는 연인의 금빛 머리카락을 천천히,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따뜻하고 자상한 나의 팔라라. 이윽고 따스한 감각과 함께 졸음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뒷머리를 매만지는 손길이 서서히 느려졌다. 톨비쉬는 빼꼼히 고개를 들었다. 다시 꿈나라로 떠난 아델레의 얼굴이 보였다. 문득 가슴 한켠이 뻐근했다. 데일듯 사나웠던 가슴 속 불길이 목구멍이 꽉 막히는 벅차오름으로 바뀌었다. 조각 같은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잠든 연인의 품에서 조용히 빠져나와 다시 한 번 그녀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아델레의 어깨에 얼굴을 묻는 톨비쉬의 눈가에는 꾸밈 없는 웃음이 넘쳐 흘렀다.
내 사람. 당신이 주는 것이라면 고통마저도 사랑스럽습니다. 전하지 않은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톨비쉬는 아델레의 이마에 뜨겁게 입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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