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혼기

[자하설영]잔향中

보존도서관 by 자연
43
2
0

[잔향上] https://pnxl.me/grtduv


11.

愛라는 글자의 열세 획을 썼다. 평소의 유려한 글씨체는 간데없이 먹물이 번져 형체를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의 사랑마냥 형편 없는 꼴이었다.

12.

사랑은 사람을 죽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사람들은 사랑을 두려워했고,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머저리들이나 할 법한 짓이었다. 자하는 줄곧 그렇게 믿었다.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였으나 자하는 꽤 많은 것들을 보았다. 열병에 시름시름 앓다 견디지 못해 목을 매어 죽은 이도 있었고, 불타 죽은 이도 있었다. 누군가를 진심을 다해 사랑한 이들도, 혹은 두려워하던 이들도 결국 죽었고, 살아남는 이들은 없었다. 결말은 둘 중 하나였다. 미쳐서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죽음이라는 결말을 겸허하게 받아들인 채로 점차 약해져 죽어가거나. 그것들을 지켜본 이가 누구던가? 바로 자신이 아니던가?

가장 간결한 방법은 하나였다. 이 감정을 버리면 되는 일이다. 자하는 그러나 죽어도 이 감정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아버렸다. 정말이지 모순적인 일이다.

“상선, 몸이 좋지 않으시다고요.”

“돌아가.”

“……상선.”

와병을 핑계로 하여 설영을 보지 않은지도 이틀이 되었다. 비천댁의 문을 걸어 잠그고, 어느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자하는 생전 처음 겪는 열병에 한참을 앓았다. 몸보다는 마음의 문제였다. 몸은 놀랍도록 건강했으니.

어느 누구도, 특히 설영이 찾아오지 못하도록 단단히 일러둔 그는, 할 일이 없어 멍하니 천장에 있는 얼룩을 세었다. 두어개밖에 없어 세는 것은 금방 끝났고, 그러면 그는 다시 그 얼룩을 처음부터 세었다. 그러한 의미없는 일을 한지도 벌써 이틀이 흘렀다. 설영을 사랑함을 인정했으나 인정할 수 없었음은,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에 망가졌던 이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영까지 이 진부하고 어처구니 없는 감정에 끌려가게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꿈은 옳았고, 옳지 않았다. 그깟 꿈이 뭐라고. 그깟 감정이 뭐라고. “망할.” 험한 욕이 잇새 사이로 짓이겨진 채로 결국은 튀어나와 뭉뚱그린 형체를 만들었다. 꿈을 꾸지 않았다면, 설영은 끝까지 친애하는 일개 아랫사람 정도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윗사람 된 도리로 조금 총애하기는 했겠지만, 겨우 그뿐이었을 것이다. 꿈은 어느 누구도…심지어는 자하, 자기 자신마저도 볼 수 없게 감춰진 벽을 깎고, 또 깎아서 마침내는 온전한 형태의 감정을 까발려냈다.

꿈은 무의식의 발로다. 자신은 알지 못했는데, 자신의 꿈은 이미 진작부터 자신의 감정을 알고 있던 것이다.

자하는 결국 인정해야했다. 그는 설영에게 입을 맞추고 싶었고, 질펀하게 침대에서 뒹굴고 싶었다. 자신의 것보다 조금 더 높은 체온을 가진, 오래도록 검을 쥐어 굳은살이 박힌 흰 손을 얽고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고 싶기도 했고, 몇 시진이라도 좋으니 그 손을 어루만지며 귓가에 내가 너를 이리 아끼고 있노라고 속삭이고 싶기도 했다. 무뚝뚝한 얼굴이 저를 향해서 미소가 어리는 것을 보고 싶었고, 붉은 입술을 달싹거리면서 자신을 '상선'이라고 부르는 그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가 설영에게 가진 감정은 단순히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귀여워하는 그런 종류가 아니었다. 그것은 노골적으로 성애적인 감정을 담고 있었다.

“상선.”

다시 자신을 불렀다. 끈기 있고, 무례하게도. 자하는 오히려 설영의 그런 점을 좋아했다. 좋아하기에 그래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는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꽤 매몰차게 침상에서 돌아누웠다.

“물러가라고 했어.”

이윽고 그는 깨달았다. 사람들은 죽는 것이 두렵지 않아 사랑을 한 것이 아니었다. 죽음이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었던 것 뿐이었다. 불가항력적인 일이다. 감정이 향하는 것을 일개 인간이 어떻게 막을 수가 있겠는가. 갑자기 호흡이 가빠져서, 자하는 숨을 몰아쉬었다. "상선?" 이내 불안함을 담은 목소리가 문 너머로 들렸다. 마른 숨을 몰아쉬던 그는, 결국 설영이 자신을 불렀을 때 침상에서 일어나고야 말았다. 아직 날씨는 지독하게도 추웠다. 완연한 겨울이었고, 이러한 추운 날씨에 계속 그를 밖에 세워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결국 설영을 사랑했기에, 그에게 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생각에까지 이르자 참을 수가 없이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결국 그도 일개 인간에 불과했던 것이다.

“……들어와.”

마지못한 허락에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거세게 열렸다. 추운 겨울날에 오래 바깥에 있어서인지, 아니면 놀라서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희게 질린 안색이었다. 자신을 빤히 응시하다가 이윽고 얼굴을 일그러트리는 설영을 보며 자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 눈은 명백하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프다더라니.’ 물론 몸은 멀쩡한 것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억울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기에 자하는 일부러 기침을 하는 채 하며 몸을 숙였다. 콜록거리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우자, 주변을 둘러보고 있던 설영이 특유의 무뚝뚝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상선.”

“콜록, 큼…. …응?”

“원인 모를 병으로 쉰다고 하셨습니다만.”

고뿔이 아니라요. 그 말이 자하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술을 밀어올렸다. 콜록, 하고 가증스레 보란 듯이 기침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기침도 증상에 있었어.”

“없었어요. 아까까진 기침도 하지 않으셨잖습니까?”

“내가 아픈거지 설영랑이 아픈 게 아니야.”

그 뻔뻔한 작태에 설영은 결국 한숨을 쉬었다. 얼굴에서 열이 오르는 기분에, 자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손을 올려 제 얼굴을 툭툭 건드렸다. 적어도 볼썽사나운 표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설영은 나름대로 자연스럽게 행동했다지만 그치고는 너무나 뻣뻣한 그 행동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가, 겁없이 자하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이봐, 설영랑.”

“열이 조금 있으신 것 같기도 한데.”

이윽고 침묵하다가,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이것이 이틀동안이나 요양할 이유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얼굴에 훤히 드러났다. 자신의 부름에도 이유를 모르는 것마냥 구는 그 행동이 퍽 얄미워서, 자하는 한숨을 쉬듯 웃었다. "설영랑."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라 손짓하자, 일말의 의심도 없이 다가온다.

“…….”

속이 뒤집힐 것 같은 심정을 꾹꾹 눌러담으며, 자하는 속이 없는 사람 마냥 무해하게 눈을 휘어접으며 웃었다. 보란듯이 얼굴을 가까이 해도 미동조차 없음이 얄미웠다. 그 행동 하나하나가 마음이 있는 것은 저 하나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 같아서.

“이렇게 쳐들어와서 내 요양을 방해했으니.”

…그래, 생각해보면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자하는 그래도 자신이 그렇게까지 추해지지는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어줍잖은 연정 때문에 설영을, 이제 갓 스무살이 된 이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자하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귓가에 열이 오를 것 같았다. “책임을 져야지.” 속삭임에 설영은 당황한 듯 했다.

“…책임이라 하심은.”

이리 가까이에서 얼굴을 마주보는 것은 처음이라. 자하는 이를 드러내며 아이마냥 천진하게 웃었다. 자신이 그런 웃음을 지었다는 사실은 자각하지 못한 듯 하였지만. 당황한 듯 우물거리는 입술을 삼켜보고 싶다는 퍽 파렴치한 생각이 들었다. 자하는 다시 그 충동을 참았다.

“아픈 사람의 요양을 방해했으니, 간병이라도 하겠어?”

“……이봐요, 상선. 상선께서는….”

불만스레 말하려던 설영은 입을 다물었다. 아까보다도 자하의 안색이 아픈 사람의 그것처럼 희게 질려있던 탓이다. "이봐, 이봐?" 자하가 눈앞에 대고 손을 흔들어도 설영은 골똘히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 했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던 그의 입가에 이윽고 아주 작은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보며 자하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알겠습니다.”

겨우 그 한마디에 왜 심장이 곤두박질치는 것인지. 자하는 멍청하게도 가만히 서있다가, 희미한 짜증이 서린 어투로 대꾸했다.

“알긴 뭘 알아. 역병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설영랑은 조금 몸을 사릴 필요가 있어.”

“그럼 관둘까요?”

“누가 관두랬나? 윗사람의 심기를 헤아릴 줄도 알아야지. 그러니까 설영랑이 자꾸 미움 받는 거야.”

“미움 받는 것과 이 일은 별개 같은데 말이죠.”

“정말 한마디를 안지는 군!”

13.

그날은 피를 토했다. 손에서 빠져나가는 붉은 혈흔에서는 비린 철 냄새 대신 당과의 향이 났다.

14.

설영은 생각했다. 상선이 이상해지셨다. 아, 물론 원래 이상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었다. 원래도 이상한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해진 것 같다는 뜻이지. 그것을 빼고 생각하더라도 자하는 본디 능청스러운 사람이었고, 스스로를 감출 줄 알았다. 그런데 최근의 그는 퍽 여유 없이 굴며 조급함을 드러내고는 했던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비록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현명하고, 지혜롭고…아무튼 좋은 사람인 양 행세하며 자신의 형님들을 속이고 있는 사람이지만, 설영은 자하를 퍽 좋아했다. 나름대로 저를 아끼고 있다는 사실도 마음에 들었고, 틈만 나면 당과를 내미는 것도 사실은 좋아했다. 자하 자신은 아니라고 했지만 그건 눈에 드러날 정도로 노골적인 편애에 가까웠다. 백언과 송옥, 효월이 자신에게 무른 것처럼.

딱 그 정도의 감상이었다. 설영은 자하가 자신을 딱 그 정도의 애정으로 대한다고 생각했다.

“상선.”

어그러짐을 느낀 것은 유독 차가운 눈이 내리고 난 직후였다. “단 것을 조금 줄일 필요가 있겠어.” 필요 이상으로 딱딱한 말이었고, 항상 저의 손에 단 것을 쥐여 주며 어린아이 취급한 것은 그였기에 더욱 당혹스러운 말이었다. 설영은 자하의 눈에서 답지 않은 당혹감을 읽었고, 이어 떠오르는 불신과, 불안을 전부 읽어냈다.

 어째서? 속으로 그 말을 삼켰다. 자하는 그날 이후로 와병을 핑계로 하여 비천댁의 문을 닫았다.

그렇기에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유려한 목소리로 돌아가라고 하는 그의 말이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설영은 기꺼이 그 꾀병에도 어울려주기로 했다. 진짜로 아픈 것은 아니니까, 얼마나 다행인 일이었는지.

“크흡, 콜록…컥!”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가, 다시 새까맣게 암전되었다. 설영은 누군가가 자신을 낭떠러지 아래로 던져버린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간병이나 하라며 장난스레 말하던 것이 불과 일주일 전이었다. 음식을 속에서 받지 않아 토해냈고, 간혹은 열이 올랐다. 갈수록 상태가 나빠지다가 결국 점정을 찍은 것은 어제의 일이었다.

아프다고 하더니 꾀병이었느냐며, 그렇게 불만을 토로하려 했던 저 자신의 머리를 아주 세게 한대만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몸이 좋지 않으면서도 자하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었다. 입가를 가린 손에서 후두둑 추락하는 피가 그렇게 공포스럽게 느껴졌던 적도 없었을 것이다. 속도 모른 채로 웃는 그가 환자가 아니었다면, 설영은 벌써 그의 멱살을 붙잡고 늘어지고도 남았을 것이라. 설영은 멍하니 제 손을 바라보다가, 흐르는 물에 제 손을 닦았다. 아무리 닦아도 그 혈향이 지워지지 않았다.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지독하고, 비렸다.

“왜 힘들다고 하지 않으세요?” 견디다 못해 말했다. 자하는 뜻을 읽어낼 수 없는 눈을 하고 자신을 보고 있었다. 또, 또였다. 그는 의뭉스러운 웃음을 입가에 그리며 웃었다. 입가에는 여전히 피를 토해냈던 흔적이 머물러 있음에도 예상했다는 듯, 그렇게 고고한 태도였다.

“그런다고 무어가 달라지겠어.”

미약하게 체념 섞인 그 말이 잔인했다. 설영은 저도 모르게 제 가슴 한구석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가 떼었다. 그는 끝까지 스스로만 아는 사람이었다.

15.

“이미 많은 것을 서로 공유하고 있는데, 무엇을 숨기고 있는 것인지 하나를 더 드러낸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잖습니까.”

“너 같은 어린아이에게 이런 일을 털어 놓아서 무엇에 쓰려고.”

“…….”

“음, 적어도 설영랑이 내 고민에 도움이 될 것 같진 않네.”

히죽 웃으며 미친놈처럼 말하는 자하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설영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정작 무엇이라도 좋으니 털어놓고 싶어하고 있는 건 당신이면서.

16.

어느 순간부터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자하가 자신에게 쏟아 붓는 감정이 백송월, 그 세 사람이 내보이는 애정과는 결이 다르기 때문에. 설영은 한 번 쯤 묻고 싶었다. ‘상선은 상선이 그런 눈으로 저를 보는 걸 알고 계시나요?’ 그러나 그 말은 끝까지도 하지 못할 말이었다. 자하는 오늘도 제 숨이 담긴 피를 한 움큼이나 쏟아냈으므로.

그 참담한 광경을 앞에 두고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려고. 자하는 설영이 자신의 감정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별다른 변명을 하지 않았다. 설영은 부인했고, 자하는 외면했다. 그저 그렇게 끝날 일이었다. 어차피 설영은 끝까지도 확신을 가지지는 못할 테니까. 기침을 하자 속에서부터 비린 혈향이 느껴졌다. 자하는 그것을 토하지 않고 삼켰다.

“설영아. 당과 먹겠니?”

“어린 아이 취급하지 마시고요.”

“알았어, 설영랑. 당과 먹어.”

아이를 어르는 것처럼 짐짓 다정하게 말하며, 자하는 눈을 휘었다. 설영은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잘만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착하다.” 예전과 별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지만, 자세히 자하를 관찰하던 설영은 알 수 있었다. 준수한 얼굴에 내려앉은 짙은 피로라거나, 예전보다 아주 조금이지만 더 마른 손과 얼굴이라던가, 창백한 안색이라던가…….

“…상선.”

“응?”

“……아닙니다.”

또다. 그의 기저에 짙게 깔린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 속에서 또렷하게 자신을 겨냥한 애정을 발견한 것은. 그럴 때마다 설영은 기분이 이상해지고야 마는 것이다. 그것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모래밭에서 보석을 발견한 기분과도 같을 터였다. 그러니 이것은 정말로 이상했다. 이 상황만큼은 정말로 이상한 것이었다. 자하가, 그가 어째서 그런 눈으로 자신을 본단 말인가? 자하가 한동안 제게 이상하게 굴었던 것이 왜 여기에서 떠오르는 건지 모를 일이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마주칠 때마다 보지 못할 것을 본 사람 마냥 굴었다. 그러더니 어느 날부터인가 다시 다정하게 대하고, 그리고 지금도 이렇게, 죽어가고…….

……이렇게 말하면 마치 나에게 연정이라도 품은 것 같잖아. 속이 울렁거렸다. 정제되지 않은 말이 마구잡이로 튀어나갈까 두려워 입을 틀어막았다.

17.

“설영아.”

“…대랑.”

“상선께서는 아직도 많이 편찮으시더냐.”

피를 토하셨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듯 하셨습니다. 이미 전부 포기하신 듯 합니다. 무슨 병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상선께서는 아무래도, 저를…….

수많은 말들이 입안에서 맴돌다가 사그라진다. 결국 그 수많은 말들 끝으로 함축되는 말. ‘상선께서는, 아무래도 저를.’ 걱정 어린 얼굴을 하고 있는 백언의 시선을 피했다. 함부로 말할 수 없었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설영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렇게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죽음을 입에 담을 수 있나, 당신은.

“……열병에 걸리신 듯 했습니다.”

백언의 부드러운 시선이 제게 닿았을 때, 설영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 “열병?” 이내 돌아오는 미묘한 반응에 설영은 마른 입술을 열었다. 그렇게 크게 벌린 것이 아니었음에도, 입술이 갈라지는 것 같았다. 갈라진 입술에서 자하가 토했던 비릿한 혈향의 잔해가 맴도는 듯 했다. 숨겨야한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자하는 그 사실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하는 듯 보였으니까. 열병이다. 그래, 그것은 열병이었다.

“예, 열병이요. 겨울이기에 잠시 스쳐지나가는…….”

겨울이 지나면……. 설영은 그렇게 변명했다. 겨울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그런 불안감에 좀먹히면서도……. ‘겨울이구나.’ 문득 설영에게 말하는 새삼스럽고도 단조로운 중얼거림이 있었다. 눈이 꽃처럼 지는 것을 보며 중얼거렸던. 설영은 그 익숙하고 고아한 목소리 위에 제 목소리를 덧그렸다. “겨울이니까요.”

‘겨울이 왔어.’

“곧 봄이 오겠지요. 그럼 나아지실겁니다.”

설영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가 속삭였다. 백언에게 하는 대답이 아니었으나.

18.

어두운 방 한 켠에서 숨소리가 색색거리며 갈라졌다. 듣기 싫은 것은 아니었다. 설영은 자하가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 소리가 나지 않게 침상의 앞에 걸터앉았다. 어두운 방 안과 검은 머리카락이 어울려 창백한 피부가 더욱 도드라졌다. 설영은 가만가만 손을 뻗어 자하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상선. 속으로만 속삭이며 이름을 불렀다. 선잠만을 청하다가 간만에 깊게 잠들었기에, 깨울 수 없었음이 맞았다.

“…….”

비단결 같다는 건 이럴 때에 쓰는 말이구나. 새삼스럽게 그렇게 생각하던 손이 아주 조금씩, 조심스럽게 밑으로 내려갔다. 깊게 잠들지 못했기에 피부는 기억하던 것보다 조금 더 거친 것도 같았다. 열이 다시 오르는 모양이었다. 생각보다도 더 따뜻한 온기에 설영은 지레 놀라 손을 떼고 멀어졌다. 이윽고 제 손을 잡아채는 장난스러운 손길에 설영은 소스라쳤다가, 불만스레 눈을 치켜떴다.

“상선!”

“왜, 더 만지지 않고.”

“……제가 상선을 희롱한 것처럼 말하지는 마세요.”

“아니었나?”

아까 뺨을 매만질 때에 호흡이 흐트러지기에 잠이 든 체 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다마는, 정말로 그랬을 줄이야. 한숨을 내쉬자, 평소 기억하던 것보다 조금 더 잠기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설영랑.” 하고 이름을 부르며 그는 사람 좋은 척 웃었다. 적어도 잠든 것만은 거짓말이 아니었던 모양이지. 아까전의 열기가 전염이라도 된 듯 했다. 어쩐지 저도 열이 오르는 기분이라, 설영은 입술을 깨물고 등을 돌린 채로 손부채질을 했다.

자하는 그런 모습을 웃으며 지켜보다가, 콜록거리며 밭은 숨을 내뱉는다. 한참을 그렇게 기침을 하던 그의 입에서 기어이 막힌 신음이 새나왔다. 이제는 익숙해진 반복이었다. 그러나 영영 익숙해지지 않을 일이기도 했다. “상선!” 다급한 부름에 소맷자락으로 입가를 문지르며 자하는 손을 내저었다. 붉은 피는 지워지기는 커녕 오히려 소맷자락을 따라 붉게 번져나갔다. 이상하다. 분명히 어두운 방인데, 왜 혈흔과 금안만은 저리 선명할까.

콜록거리는 그 기침소리가 단말마처럼 들려서, 설영은 멍하니 자하를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아. 어처구니없게도 웃음이 먼저 터졌다. 설영은 자하의 형형한 금안에서, 다시 혈흔으로 시선을 두었다. 삶을 어떻게든 연장하려 몸이 발악을 하다 뱉어낸 죽어가는 붉은 숨이었다. “또 이불을 버렸네.” “이불이 문제입니까?” “그럼, 뭐가 문제겠어.” 기가 막혔다. 야속하기도 했다. 환자에게 욕을 할 수도 없는지라, 답답하기 그지없어 입술을 뻐금거리던 설영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고개를 숙였다.

“빨리 나으세요.”

“…….”

“곧 봄이니까요.”

함께 봐야죠.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했잖아요. 속삭거림에 기이한 열감이 묻어났다. 설영은 문득, 백언과의 대화중 자신의 입술에서 느껴졌던 혈향의 잔해를 생각했다. 그 주인은 분명……. 저도 모르게 자하의 입가에 묻어나온 흔적에 시선을 둔 순간, 설영은 문득 그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적인 생각을 했다.

“…….”

이런 상황에, 그런 생각부터 하고 있다니. 당장에 그가 자신을 쫓아내도 이상하지 않았다. 스스로가 역겨워서 몸을 돌려 나가고 싶었다. 동시에 어두운 곳에서도 먹이를 노리는 포식자의 그것처럼 번뜩이는 눈을 보고 있자니, 기묘한 확신이 들었던 것이다. 설영은 곧장 몸을 가까이 하며 자하의 목에 제 팔을 둘렀다.

“…설영랑?”

 그가 저를 내치지 않을 것이라는.

설영을 부르던 그의 숨이 잠시 뚝 멎었다.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놀랄 일인가. 가까이에 있으니 비릿한 혈향 사이로, 그가 늘 건네주고는 했던 당과의 단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설영은 눈가를 찡그리며 아주 작게 웃었다. 아슬아슬하게 온기가 느껴진다. 여기에서 조금만 더 가까워지면. 거기까지 생각하자 설영은 잠깐, 아주 잠깐 이 충동적인 행동을 후회했다.

“방이 더워 열기에 취한 모양이에요.”

“……금주령을 어기고 술을 마시고 온 것은 아니고?”

“그건 분명히 아닙니다. ……아마도요.”

약간 늘어지는 말끝. 조곤조곤하고, 여전히 덤덤한 목소리……아니, 그 뒤로 눌러붙어오는 열기. 자하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유 모를 갈증이 치밀어 올랐다. 사실은 어느 정도 원인을 알고 있기도 했다. 충동이다. 설영이 지금 벌이고 있는 이 행동은, 충동으로 인한 것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대체 어디에서 그런 충동이 일었단 말인지.

…지금이라도 물러서야 할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그것을 욱여넣었다. 자하는 후회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후회 따위, 적성에도 맞지 않았다. 제 주변에 진득하게 눌어붙어있던 혈향이 느껴지지 않는다. 설영이 가까이에 오면 항상 그랬다. 단 냄새 사이로 섞인 향은……. 잠시 그 향을 가늠해보다가, 손을 뻗어 설영의 뺨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열병도 전염되는 모양이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설영의 표정을 살피던 그는 설영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었다가, 자신의 입술을 설영의 것에 겹치며 생각했다. 적어도 이 접문이 한순간의 충동에 불과해서 다행이라고. 설영은 그저 충동을 해소할 뿐이었다. 자신과 같은 전철을 밟지는 않을 것이다. 저 아이는 알까. 자신이 저를 상대로 몇 번이고 이러한 행위를 하는 것을 상상해왔다는 것을. 얽은 혀에서는 단 맛이 났다. 설영의 가쁜 숨을 삼키며 몇 번이고 숨이 질척하게 얽혔다가 떨어져나갔다.

어쩌면 후회할지도. 설영의 눈가를 문지르며 자하는 표정을 보지 못해 눈을 감기를 택했다.

19.

할 수만 있다면 설영의 몸에 자하(紫霞)라는 이름을 정성스럽게 새겨 넣고 싶었다. 어차피 끝이 정해진 결말이라면. 그렇게 제 이름을 정성스레 새기고, 사랑을 속삭이고, 설영과 자하라는 이름이 언제나 함께하도록, 그렇게.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