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혼기

[목윤적련]한날

평생을 함께 살고, 한날한시에 죽자 맹세하고 싶었는데, 그리 하지 않아도 그리 되었구나.

보존도서관 by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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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태어나기는 한 때에 태어나지 못하였으나, 죽음만은 함께할 줄 알았다. 적련은 생각했다.

이 전쟁이 끝나면 혼인해야겠다. 그리고 평생을 함께, 기쁘게 사는 거야.

“아이를 가졌어.”

적련은 그 말에 뺨을 붉히며 기쁘게 웃는 목윤을 보고 저도 남몰래 웃었다. 이 전쟁이 끝나면 그들은 혼인할 것이다. 절대로 변하지 않을, 그런 확실한 미래였다.

우리는 평생 함께할 수 있겠지.

적련은 미래를 그렸다. 목윤을, 혹은 자신을 꼭 닮은 아이를 낳고서 남은 생을 평생 함께 사는 미래였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머리가 하얗게 새고,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은 외모가 되더라도.

적련은 바람에 흩날리는 제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찬바람이 차게 느껴지지 않았다. 들을 빼곡하게 메운 병사들을 바라보며, 적련은 눈이 부셔 눈살을 약간 찌푸린다.

목윤은 그런 적련의 뒤에 서서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정말로 이상적인 그림이었다.

**

“대체 왜 정보가 새어 나가고 있는 거지?”

적련은 기묘한 균열을 느꼈다. 세작이 있으리라 예상했다 한들, 너무나도 내밀한 것을 알고 있다고. 적련은 차분하게 생각했다. 밀정이 생각보다 높은 위치를 차지하는 모양이었다. 목윤에게 말해야할까. 그는 자신의 부제이므로, 그것이 옳으리라.

적련은 언제나 어려운 일들을 목윤과 함께 의논하였으니까.

그러나 무엇인가가 그것을 막는다. 본능과도 같은 무엇.

최근 들어 목윤이 밀담을 나누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적련은 안다. 하지만 그가 그럴 이유는 없지 않은가. 적련은 몸을 뒤로 기대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내밀한 사정을 알 정도로 고위직인 이…….

“…….”

적련은 생각을 멈추고 몸을 일으켰다. 최근 들어서 몸이 조금씩 무거워지고 있었다. 아이를 가졌으니 당연한 일이다. 아이 생각에 반사적으로 손이 배 위로 올라갔다.

그와 자신의 사랑의 증거…….

그는 작게 웃었다. 적련은 이 전쟁을 더욱 빠르게 끝내야할 필요성을 느낀다.

아이를 위해서도, 그들을 위해서도. 그리고, 그리고…. 아이를 가졌다고 말했을 때, 그리도 기쁘게 웃던 목윤의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엄습하는 두통에 미간을 눌렀던 그는, 나직하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적련은 목윤을 믿는다. 왜냐하면 그를 사랑하니까.

그리고 목윤 또한 적련을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도, 이해해주겠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까….

**

적련은 비스듬하게 기대어 누워있었다. 최근 들어 거동이 조금 더 불편해진 차였다. 조급한 마음이 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사하라 명하셨던 일입니다.” 적련의 이리를 닮은 매서운 시선이 화랑을 향한다. 적련은 머뭇거리는 화랑을 보았다.

이윽고 느껴지는 것은 자신이 의심으로만 남겨두었던 것이 현실로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어떤 직감 같은 것이었다.

마치 짐승의 본능과도 같은 것.

“이리로.”

세작으로 의심되는 명단을 낚아채듯 받은 그의 검은 눈이 천천히 그 명단을 훑는다. 이윽고 붉은 입술이 밀려 올라간다. 얼굴을 마주 대한 적이 그리도 적건만, 정말로 익숙하고 익숙한 이름들이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가 있을까?

“…….”

적련은 애정하고 애정하는 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이를 가졌다는 말에 그리도 환하게 웃던 사람이었다.

어느 누구도. 심지어는 부모와, 스승마저도 제대로 다가오려 하지 않았던 자신에게 손 내밀어 주었던 사람이었다. “우리의 아이는 분명 훌륭한 사람이 될 겁니다.” 처음 아이를 가졌다는 말을 듣고, 아직 태동도 느껴지지 않는 배에 귀를 가져다대며 설레어 하던.

“……목윤.”

그렇게, 설레어 하던…….

“목윤랑을 잡아와라! 당장!”

적련은 믿을 수가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목윤이 어째서 자신에게 그리 한단 말인가? 어떻게 그가 자신을 배신할 수가 있는가?

적련은 세작들의 목을 베었다. 저런 것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믿을 수가 없어서.

씨근덕거리는 숨이 목 끝까지 차올라서, 적련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화랑들에게 잡혀 끌려온 목윤을 보면서 적련은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상처투성이가 된 그를 치료해주고 싶었고, 그를 끌어안고 싶었고, 그를…….

“해명해!”

“…….”

억눌렸던 수천가지의 말들 중 하나가 목을 타고 넘어오며 날카롭게 찢어졌다. 기어이 당신도 내 곁을 떠나려는가? 그 자신도 모르는 두려움이 발밑에서부터 적련을 휘감았다. 그는 그것이 분노라고 생각했다.

아, 배가 아파왔다.

사랑의 증거. 우리가 사랑했다는, 증표…….

“어서 설명해!”

목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가슴 아팠다. 자신이 그려왔던 미래를, 목윤이 직접 찢어 짓밟고 있다는 것이. 왜? 어째서? 적련은 목윤이 무슨 말이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저렇게 시선을 피하는 것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목윤은 어째서,

“말하란 말이다! 첩자가 아니라고!”

아무, 말도…….

“정말로 나를 배신했구나….”

피하려 했던 깨달음이 기어이 적련의 머리를 때리고, 강제로 현실로 눈 돌리게끔 만든다. 아아, 그래. 이것이 진실이로구나. 적련은 자신의 아이를 생각한다. 그들의 사랑의 증표를….

사랑했기에 만들어진 아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훌륭한 사람이 될 겁니다.” 작게 웃으며 속삭이던 그 말이 떠올랐다. 그 기만에 치가 떨린다. 그렇다면 그때의 기쁨은? 내게 보인 그 다정함은? 내게 손 내밀었던 그때는?

전부, 다…….

적련은 목윤에게 혼인하자고 말하고 싶었다. 이 모든 것이 끝나면. 이 전쟁이 끝나고, 공을 세우면, 그는 정말로 목윤과 평생을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처럼 희게 새어, 고운 얼굴에 세월이라는 주름이 자리 잡고, 설령 누군가의 눈에는 추하게 보일지라도…. 적련의 눈에는 그러한 모습마저도 아름다워 보일 테니. 목윤 또한 그리 느낄 것이고, 언제나 제 옆에 서있을 것이라고 믿어서.

자신이 사랑한 그는 그렇게 다정하고도 사랑스러운 사람이라.

적련은 정말로, 목윤을 사랑했다.

적련은 입을 벌려 웃었다. 아아…. 차라리, 사랑을 알려주지 말지. 사랑을 알았기에 행복했던 나날이었다. 배신감이 짙게 드리워 행복으로 물들었던 기억을 산산조각으로 흩어버렸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구나. 아니면 사랑하는 마음이 식어 버렸던가. 그러면서도 날 안아주고, 나를 걱정하는 체 하고,

내게.

나를…….

적련은 목윤의 배신을 통해서 깨닫고야 만다. 그를 절대로 미워할 수 없다고. 지금까지의 감정이 전부 거짓이었대도, 자신을 배신했대도. 그리고 설령, 자신의 배에 자리 잡은 그들의 아이가, 사랑의 증거가 아닌 거짓의 증표였대도….

적련은 웃음을 삼켰다. 희열이, 기쁨이 가득 차올라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적련은 생각할 새도 없이 검으로 그의 가슴을 찔렀다. 자신은 백제를 멸망시킬 것이고, 그리고 목윤의 주검 옆에서 목숨을 끊으리라. 자신이 그를 죽였으니, 이제 그들의 사이에는 크고 큰 업보가 존재할 테니까. 목윤과 적련은, 내세에서마저도 그 업보로 인하여 반드시 만나게 될 테니까.

설령 그 감정이 애정이 아닌, 증오와 경멸이라고 하더라도!

적련은 숨이 끊어진 목윤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눈을 감고, 입술을 굳게 닫고 있는 그를 보았다.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자신을 보며 웃는 것도, 제게 속삭이는 것도, 거짓으로나마 저를 걱정하는 것도…심지어는 죽음마저도. 적련은 목윤의 시체를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너는 정말로 사랑스러운 사람이었어. 사랑해, 목윤.

백제의 군사들이 막사를 밀고 쳐들어오는 것을 보며 적련은 붉어진 눈으로 웃었다. 검은 머리가 희게 새어도, 그 어떤 일이 있어도…심지어는 늙음과 죽음마저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게 하자고 맹세하고 싶었다. 목윤의 사랑한다는 속삭임은 거짓이었고, 비록 자신만이 그를 사랑했지만…. 백제의 군사들이 제 몸에 칼을 꽂고, 머리채를 잡아 뒤로 끌어도, 적련은 웃었다.

평생을 함께 살고, 한날한시에 죽자 맹세하고 싶었는데, 그리 하지 않아도 그리 되었구나.

죽어서도 목윤은 자신의 사랑이었다. 적련은 그 사실이 너무나도 만족스럽고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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