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염문가

[자하설영] 화랑염문가 1

花郞廉問歌

雪月夜 by 보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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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가신 임을 애타게 부르오.’

요 몇 년간, 신라에 유행하는 사랑가가 있다.

언제 누가 지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온갖 귀신을 부린다는 백의무당과 높으신 진골 귀족의 사랑 이야기였다. 그 구슬픈 곡절에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잔치가 벌어지거든 빠지지 않는 건 물론이거니와 민간에서도 신국의 최신 유행을 좇는 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불러보았을 정도였다.

화랑들 또한 신국의 백성이니 자연히 알았다. 더구나 가사를 잘 들어보면 화랑 사이의 염문을 다루는 노래였다. 자연히 더욱더 솔깃하기 마련이다. 각색이 많이 덧붙어 정확히 어느 선배를 말하는 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화랑과 낭도들이 민간의 속요를 불러선 안 된다는 법도가 없다 보니, 늦은 밤 야행을 나간 화랑들이 재미 삼아 부르기도 했다. 이 노래가 자하와 설영을 모두 아는 이들의 귀에 들어가기까지는 채 일 개월이 걸리지 않았다. 즉시 화랑도 내에서는 그 곡의 가창과 연주가 금지됐다. 하지만, 금지된 것이야말로 더욱 음심을 자극하는 법. 

화랑 사이의 사랑을 다룬 화랑염문가는 선배 화랑로부터 후배화랑으로, 알음알음, 오래도록 전해져 내려왔다.

花郞廉問歌


설영은 작은 아이를 한참을 안고 있었다. 제멋대로인 성질머리를 타고난 그 아이조차 피부로 스며드는 그리움에 발버둥 치지 않고 잠자코 품에 안겨 있었다. 설영은 8년간 지냈던 작은 거처를 정리했다. 옷가지 두어 개 와 책 몇 권. 짧지 않은 세월을 보낸 거처라기엔 단출한 짐을 들고 왕경으로 향했다. 설영이 왕경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은 설영이 오는 속도보다 빠르게 수도를 휩쓸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낭도는 그 ‘초옥인’이 누구인지 잘 몰랐다. 무수한 세월이 흘렀고, 더는 사랑四郞설영을 기억하는 이들은 모두 일선에서 물러나, 노년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각자 사가에 머무르고 있던 백송월은 부리나케 마중을 나갔다. 어렴풋한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한 지 일다경도 지나지 않아 셋은 깜짝 놀라 넘어졌다.

설영은 자하를 꼭 빼닮은 작은 아이와 함께였다.

빛나는 금안의 아이는 눈을 씻고 보아도 그 ‘천랑’이었다.

비천택은 오랜만에 사람으로 북적였다. 천랑을 꼭 닮은 아이를 둘러싸고 두 눈이 휘둥그레진 그때의 화랑들은 이 아이를 어떻게 여겨야 할지 난감해했다. 설영은 ‘영혼은 같지만, 다른 사람’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그런데,

‘그러니까…. 얘가 상선이라는 건가?’

‘상선이 아니라 자하야.’

가령 부부가 가져온 약과를 야무지게 주워 먹는 아이는 또렷한 눈으로 백언을 째렸다. 백언은 놀라 설영을 돌아봤으나 설영은 시선을 모른 척했다. 방금 다른 사람이라고 말은 했지만 사실 오는 길에 이름이 없다는 아이에게 자하紫霞라고 이름한 참이었다.

영계의 시간은 현실과 다르게 흘러간다. 적멸을 빗겨 찔러 살아난 자하는 억겁의 시간을 싸웠다. 설영의 간절한 초혼이 더해져 기어코 이 세계로 다시 태어났다. 하지만 한 번 삼도천을 건넌 몸. 이미 과거의 흔적은 사라진 후다. 설영은 그런 아이에게 다시 자하라는 이름을 주었다. 이름을 준다는 건 인연을 묶는 것이라 한다. 자하의 영혼에 자하라는 이름을 주며 설영의 길었던 반혼의 마침표는 이것으로 찍혔다.

 태천관은 부리나케 달려와 자하를 확인했다. 정확한 사주팔자는 알 수 없었으나, 관상을 슬쩍 살핀 것만으로도 그 망할 천랑성의 기운이 느껴졌다.  검댕이 묻었어도 가만히 있어도 사람이 줄줄 따를 상. 특유의 무신경한 자태는 어떻게 보나 ‘그’ 자하였다. 그녀는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란 눈빛으로 설영을 돌아보았으나 설영은 딱히 대답할 이유를 못 느껴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태천관은 한숨을 길게 쉬며 설영을 다그쳤다.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른다고.”

“보다시피 멀쩡한데요.”

“쯧, 하늘을 배반한 대가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는 게다.”

태천관은 혀를 끌끌 차며 사라졌다. 설영은 개의치 않았다. 영력을 쏟아붓고, 잘 먹지 못해 약간 쇠약해진 것을 빼고 전혀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태천관이 주었던 신물이 없었다면 어떤 경계를 넘어 완전히 인간이 아니게 되었을 것이다. 이 점 만큼은 감사해야겠지. 설영은 마지막 도리로 태천관을 비천택에서 곱게 쫓아냈다. 태천관이 나간 후 각 가문의 옛 수장, 마지막으로 자운까지 ‘자하’를 만나고 갔다. 약간의 슬픔 섞인 얼굴로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자하’의 거취에 관해서는 모든 선문이 선뜻 비천택에 머물러도 좋다고 허가했다. 사유를 꼬치꼬치 물으면 손사래를 치며 대답을 피했다. 당연히 설영이 데려가야 하지 않겠냐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유가 어쨌건 이왕 포기해 준 것, 냉큼 설영은 작은 아이를 데리고 자하의 작은 손을 잡고 나아갔다.

월성에 머무른다고 해서 화랑에 입문시킬 생각은 전혀 없었다. 또다시 화랑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자유롭게 살아가기를 바랐다. 그래서 자하에게 주술을 가르쳤고, 검술 상대가 되어줬다. 원하는 책이 있다면 마음껏 읽도록 했다. 선천적인 영력도 강하고, 재능도 있어 가르치기도 수월했다. 설영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내심 상선 같은 대책없는 망나니를 안 만들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이토록 평화로운 일상이 바스라진 건 그로부터 10년 후의 일이었다. 그 날은 유독 날이 화창했고, 꽃잎이 상쾌한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는 완벽한 날이었다. 설영은 한가롭게 창을 열어 놓고 불경을 읽고 있었다. 

“스승!”

“자하.”

자신을 부르며 뛰어오는 소리에 곧장 설영은 고개를 돌렸다. 손에 들었던 책을 서안에 내려놓았다. 그런데 평소라면 품에 안겼을 자하는 뛰어와 설영 앞에 우뚝 멈춰 섰다. 설영은 의아한 표정으로 자하의 표정을 쳐다봤다.

“안아주게? 아주 자연스럽네! 설영랑.”

키득거리는 익숙한 웃음소리에 놀란 설영은 벌떡 일어났다.

“뭐, 뭐.”

이게 말이 되나.

눈 앞에 펼쳐진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설영은 넋이 나갔다. 자하는 설영의 눈앞에 손을 휙휙 흔들어 보였다.

“여태 날 불러놓고,”

“말도 안 돼!”

“안 보고 싶었어?”

“그, 그건 아니지만….”

“아닌 거 알아. 오, 이 몸에도 자하라는 이름을 붙여줬군?”

자하는 자신의 팔을 들어 보이며 이곳저곳을 살폈다. 설영은 침착하게 소매 속에 넣어두었던 부적 뭉치에 손을 댔다.. 악귀, 도깨비 그게 뭐든 감히 자신의 기억을 엿본 어떤 짓궂은 존재의 장난이다. 자하는 부적을 꺼내 들려는 낌새를 빤히 알면서 놀란 척 폴짝 뒷걸음질 쳤다.

“잠깐! 다짜고짜 요마 취급은 좀 섭섭한데.”

“상선께서는 이미…. 너는…. 너는 누구지?”

자하는 빙그레 웃곤 설영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설영의 품에 엎어져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설영은 가슴이 철렁했다. 닥치는 대로 각종 부적을 가져다 붙였다. 잠든 자하의 등위에 붙은 수십 가지의 부적 중 어느 하나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때 품 안의 자하가 꿈지럭대더니 밭은 숨을 토해냈다.

“…스승. 더워요.”

상선의 망령— 딱히 붙일 말이 없어 현 상황에서 가장 정확한 표현을 채택하기로 했다. — 은 이미 날아간 것 같았다. 자신이 키운 ‘자하’의 목소리가 웅얼거리듯 들려왔다. 급히 이마를 짚어보자 설영은 다시 한번 기겁했다. 열이 펄펄 끓고 있었다.

“해열 작용이 있는 약초를 몇 처방해드리겠소.”

설영은 급히 의원을 불렀다. 의원이 앓아누운 자하의 맥을 짚었다. 이유를 알 수 없다며 고개를 가로젓고, 당장의 고열을 해결할 약 몇 가지만 건네주고 자리를 떠났다. 자하는 여전히 설영의 옷자락을 꾹 붙잡은 채였다. 설영은 자하의 따끈한 손을 잡았다.

악귀도, 도깨비의 농간도 아니며, 마귀의 작간도 아니라면 가능성은 한가지 뿐이다.

‘신병이로군’

물론 이것도 말이 안 됐다. 원래 자하의 영혼은 이미 윤회의 수레바퀴를 속으로 휘말려 기억을 씻어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이 아이가 되지 않았나.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려다 신병이 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이 괴현상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상선은 화랑들의 신이다, 그런 소리를 하시다가 진짜 신이라도 되신 건가요.’

설영은 입술을 꾹 물었다.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신병은 심하면 죽기도 한다. 

“설영아.”

“아, 대랑.”

문밖에서 저를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골똘히 고민하느라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문밖의 백언이 조심스레 방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뒤따라 효월이 들어왔다.

“우연히 지나가던 길이었는데, 의원이 집에서 나오길래. 자, 자하가 몸이 안 좋다고 들었다. 네가 걱정할까 싶어 찾아왔어.”

세월이 그렇게 흘렀어도, 전대 상선의 존함을 막 부르기는 껄끄러운지 백언은 말을 더듬었다. 효월이 걱정스럽게 덧붙였다.

“딱 보기에도 발간 게 열이 펄펄 끓네요. 뭐 잘못 먹었나….”

백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기질이 세고 튼튼해서 잔병치레 한번 없이 컸지 않느냐. .. 혹, 신종 괴질이라면 큰일인데.”

“괴질은 아닐 겁니다. 질병도 기혈의 뒤틀림의 일종이잖아요. 제가 영맥과 기혈을 확인했습니다. 어디 하나 막힌 곳이 없어요.”

네 형제 중 세 형제가 심각하게 이야기를 하는 동안 둘째 송옥이 물 대야와 헝겊을 들고 들어왔다. 설영과 송옥은 헝겊을 물에 적셔 자하의 몸을 식혔다. 설영이 자하의 팔을 헝겊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제가 보기엔 신병 같아요.”

“신병?”

“예. 무당들이 흔히 겪는 병인데….”

“자하가 신을 받는다고? 어떤 신이기에 이리 아파한단 말이냐.”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들리시겠지만…. 그것도 자하입니다. 정확히는 상선이시죠.”

 “…?”

설영의 충격적인 발언에 다른 형제들이 몰려들어 제각기 팔이며 목이며 귀 뒤의 맥을 짚기 시작했다.

“저 멀쩡합니다….”

자하는 꼬박 사흘을 앓고 깨어났다. 설영은 한숨도 자지 않고 그의 곁을 지켰다. 잠을 자지도, 음식에 손도 대지 않고 꼬박 앉아 문안을 찾아온 자들을 모두 물리쳤다. 당연하게도 난리가 났다. 식읍을 전폐하고 그 애에게 매달려 있다고. 애가 갑자기 상선을 찾지를 않나, 신병이라 질 않나. 백언이 반 시진을 맥을 짚어 몸에 이상이 없다는 걸 밝혀내지 않았다면 설영을 아끼는 이들이 진즉 비천택의 담을 넘어 들어가 강제로 떼어놓았을 것이다.

“….”

“깼어?”

“응…. 나 분명?”

“됐어. 목이 아플 테니 말하지 마.”

자하가 이불에 묻혀 고개를 끄덕였다. 설영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난 자리 주변으로 구겨진 괴황지가 후드득 떨어졌다. 신을 물러가게 하려 애쓴 흔적이었다. 설영은 물끄러미 흰 옷에 묻은 붉은 경면주사 자국을 바라보다 손가락 끝으로 문질렀다. 신을 강제로 소멸시키거나 퇴치하는 일은 쉽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만에 하나 진짜 자하라면 곤란했기에.

“스승. 걱정했어?”

“….”

“미안해, 오늘 친우와 마실을 가기로 했는데…. 그 이후로 기억이 잘 안 나.”

“미안할 거 없어. 네 탓이 아니다.”

설영은 다시 쭈그려 앉아 자하의 눈 위에 차가운 손을 얹었다. 피부 위로 전해지는 냉기가 기분 좋은지 은은한 미소가 피었다.

“무슨 꿈을 꾸었는데…. 악몽이었던 것 같아. 아주 오래도록 깜깜한 곳에 갇히는 기분이었어.”

설영의 두 눈이 커졌다. 어떤 도깨비의 헛짓에 놀아나나 싶어 분노가 차올랐다. 하지만 아이 앞에서 동요할 수 없어 담담한 척 다독였다.

“나쁜 꿈일 뿐이다. 잊어버려.”

“꿈이라기엔 지금, 이 순간까지도 너무….”

자하는 무슨 말을 하려다 고개를 저으며 말을 삼켰다. 설영은 그런 아이를 고적한 눈으로 보았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그렇게 보지 않기로 10년전에 약속했잖아 ...한밤만 더 자면 나을 것 같아. 참, 그보다 스승. 나 이렇게 아픈데, 계속 당과 금지 할 거야?”

자하가 제 아픈 모습에 약한 걸 빠르게 간파하고 당돌하게 장난을 쳤다. 은편만 건네주었다 하면 종일 당과만 사서 먹기에 며칠 전 당과를 금지했던 차였다. 설영은 자하의 이마를 아프지 않게 콩 찧곤, 부스스 웃어버렸다.

“이 녀석이, 아픈 척하기는, 다 나았지?

“아야, 너무하네. 아직 덜 나았어.”

“깨끗이 다 나으면 시전에서 사줄게. 대신 한 개만이다.”

설영은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자하가 다시 잠드는 것까지 확인한 후, 방을 나섰다. 눈에 담겨있던 따뜻함은, 방문을 나서자마자 사라졌다. 누가 떠나간 정인의 흉내를 내는가. 범인이 누구던, 자하를 흉내내는 놈은 잡아다 반죽음을 내었던 정도로는 부족했다. 

설영은 주먹을 꾹 쥐고 결의에 찬 표정으로 풍류관을 향해 걸어갔다.

*

꿈을 꾸었다. 

얼굴에 부적이 잔뜩 붙은 어떤 여자와 어둠 속에 빨려드는 꿈이었다.

자하는 식은땀을 흘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위를 휙휙 돌아보았다. 창호 밖이 유난히 깜깜했다. 자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옆 방으로 건너갔다. 옆 방은 사람의 온기 한조각 없이 싸늘했다. 스승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내 스승은 거짓말을 잘 못한다. 스스로는 잘 한다고 생각하나본데. 자하는 한숨을 쉬었다. 

자하는 도로 문을 닫고 비천택의 마당으로 나왔다. 달이 밝고, 바람이 부는 서라벌의 경치가 그런대로 좋았다. 잔흔이 남은 것 처럼 가슴 한 켠이 따끔거렸다. 방향을 알 수 없는 지독한 그리움이 몰려왔다. 

처절한 미움도 시간이 흐르면 풍화되듯, 기뻐서 펄쩍 뛸 것 같았던 기분도 시간에 마모되어버린다. 기억해내고 싶어도 막연히 어둠 속을 더듬는 그리움에 고통마저 느껴졌다. 자하는 심호흡을 하고 다른 심상을 떠올리려 애썼다. 그리움을 걷어내자 강렬한 그리움이 찾아왔다. 새하얀 눈위의 하얀 옷을 입은 사내…. 까만 눈동자와 푸른 빛이 감도는 머리칼을 휘날리는 미인. 이번에는 고개를 세차게 저어 떠오른 생각을 모두 떨쳐냈다. 마구니가 꼈거나 잠이 덜 깬 것이 틀림없다. 그저 악몽을 꾸어 스승이 보고싶었던 것이다. 

둘쭉날쭉한 마음을 바로잡지 못하는 와중 밝은 달을 보니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다. 자하는 무의식적으로 떠오른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놓았다.  

“천축국에 가보고 싶네.”

“...상선?”

설영은 멍한 얼굴로 자하를 바라보았다. 상선인가, 아니면 내 아이인가. 설영은 빠르게 다가가 자하의 어깨를 잡았다. 

“누구야.”

“스, 스승. 잠깐,”

“상선이세요? 상선께서 또 들어오셨습니까?”

설영은 자하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따박따박 몰아세웠다. 자하는 답지 않게 말을 얼버무리다가 어깨 위에 올려진 설영의 손을 잡아 내리며 말했다. 

“스승, 설영랑! 아니, 아니야!”

“….”

“나한테서 누굴 찾는거야. 그만해.”

“..아, ...미안해.”

말은 투덜거리듯 나왔지만 실제로는 기분나쁘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는 상황을 달갑지 않게 받아들일 것이다. 그런데, 자하는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놓지 않고 불러주었다는 점에 기묘한 안도감과 기쁨이 은은하게 베어났다. 

“밤이 늦었는데, 자지 않고.”

“스승이 들어오지 않으니 기다리고 있었던거야. 뭐하느라 이리 늦어?”

“..일이 바빴다.”

“화랑도의 일에서 손 뗀지 오래됐는데, 일이 있단말이야? 어지간히 화랑도에 인재가 없나봐. 하는 수 없지! 내가….”

“그건 안 된다.”

설영이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자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 

“대체 왜 못 가게 해? 나 정도면 영력도 강하지, 주술도 이제 제법이고. 검술도 닦았는데. 분명 화랑도에 큰 도움이 될 거야.”

자하가 자신의 가슴을 탕탕 두들기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설영도 알았다. 아이는 근거 없는 자만심을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니란 걸. 하지만 화랑이 되어 화랑도를 이끌 인물까지 오를 재목이라 화랑이 되어선 안 되는 것이다. 다시 그에게만 화랑도 전체의 짐을 안게 하는 일은 없어야 했다. 설영은 적당한 말을 찾아 고르다가 말을 꺼냈다. 

“그래서 안 된다. 어떤 일을 해도 말리지 않아. 하지만 화랑이 되는 건…. 안 돼..”

자하는 예상 내의 답변이었다는 표정으로 담담하게 받아쳤다. 

“혹시 그게 스승이 찾는 상선이란 사람 때문이야?”

설영은 침묵했다. 

“뭐 하다가 여기까지 온 건지 기억이 잘 안나. 정신 차려보니 땀 뻘뻘 흘리면서 스승이 물수건을 이마에 대 주고 있었잖아. 오늘따라 왜 이리 설영이 보고 싶은건지, 그러면서도 어디로 훌쩍 가고 싶더라고.”

자하는 밝은 달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반쯤은 침묵하는 설영을 향한 고집이었고, 반쯤은 진심이었다. 설영은 자하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천축국에 가 보고 싶다던가, 자신이 보고 싶다던가. 모두 자하의 사념은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상선의 사념 쪽이 옳겠지. 지금 상선이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상호작용이 있었다는 설이 타당했다. 

설영은 풍류관 안쪽의 서고와 기록을 몽땅 뒤져, 자신이 없언 새 일어났던 기이한 사건을 모조리 훑었다. 주로 죽은 자가 돌아왔다는 삿된 사건을 중심으로 살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두 허탕이었다. 현재 상황에 도움이 될 법한 자료는 없었다. 손이 부족할 땐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하고. 마침 그 고양이 손이 요사스런 일의 당사자이니, 자하와 조사하는 게 가장 빠르다. 

“…. 알겠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해줄게. 괜한 고집 그만 부리고 방으로 들어와.”

“그러니까, 이 몸에 스승이 아는…. 또 다른 ‘자하’가 깃든다는 뜻이야?”

설영은 멋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하는 혼란스러울 법한 내용을 정리해 냉정하게 파악했다. 설영은 그가 천성만큼은 변하지 않는구나 싶어 안심했다. 서안 하나를 두고 마주 앉은 두 사람은 긴 이야기를 방금 마쳤다. 서안 위에 초 하나를 밝혀 두었으나 방 안은 어둑했다. 설영의 표정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상선의 죽음을 말하는 설영의 무척 참혹한 표정이었을 것이다. 전생의 자하가 어떻게 끝을 맺었는지 구체적으로 숨겼지만 눈치가 빠른 자하라면 어렴풋 알았을 듯 싶었다. 평범한 상사와 부하의 관계로 정의하기 어려운, 깊은 부분까지도 전부.

화끈해진 얼굴을 세찬 고개짓으로 날린 설영은 종이를 하나 가져와 서안에 올리고 붓을 들었다. 사건의 시간선을 되짚어 보려는 듯 곧은 선 하나를 그었다. 

“그래. 전생의 자하…. 그러니까 상선께서는 옛적에 영안永安하셨으니, 깃든다기 보다는 다른 현상으로 보는 게 좋겠지. 자하, 의식을 잃기 직전 무얼 하고 있었어?”

“친우와 마실을 가기로 했었어. 백운선원에서 오늘 단체 훈련이 있다고 해서 마중 겸 선도산 중턱 쯤 까지 올랐었고.”

“그 동안 특별히 한 건?”

“음…. 가는 길에 가게에서 당과를 하나 얻어먹었어.”

“먹지 말라고 했을텐데.”

“지금 그게 중요해? 아무튼 선도산에서 그 친우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그 이후로는 기억이 없어. 전혀.” 

설영은 길게 그어진 선의 앞쪽 어드매에 작은 글씨를 써넣었다. ‘선도산’. 그리고 중간 쯤에 ‘비천택’이라고 적어 넣었다. 선도산과 비천택 사이를 이동하는 동안에는 상선이 들어와있었다고 했을 때, 한 시진 정도 차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설영은 ‘선도산’과 ‘비천택’사이에 한 일一 자를 적었다. 설영을 붓을 벼루에 올린 뒤 다시 자하에게 물었다.

“무슨 대화였는지는 기억이 나?”

“….”

답지 않게 자하가 시선을 피했다. 미묘한 눈빛으로 눈을 맞추지 않고 우물쭈물거리자 설영은 말 하기 어려울 정도로 곤란한 일인가 싶어 더욱 집중했다. 자하는 집요한 시선에 입을 두어번 달싹이다가 결국 작게 중얼거렸다.

“..이야기.”

“뭐라고?”

“사랑 이야기였다고.”

이번에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하를 보았다. 설영의 시선을 휙 피했지만 자하의 귓가는 은은하게 붉었다. 잠시 얼빠져 있던 설영은 이내 담담하게 수긍했다. 열일곱이면 한창 그럴 때 이기도 하고, 좋아하는 낭자라도 생겼나보다 싶었다. 설영이 빠르게 납득하고 다음 화제로 넘어가려 하자 이번엔 자하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변했다. 

“더 안 물어봐?”

“물어볼 필요가 없으니까. 원래 그 나이 때 애들은 그런 내용에 관심이 많은게 정상이니까.”

자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으래….”

설영은 자하의 이상한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골똘히 고민한 다음에 한다는 소리는 자하의 뒷 목을 잡게 만들기 충분했다. 

“미리 말해두지만, 상대등 부인 댁 셋째 딸은 안 된다.”

자하가 기가막혀 벌떡 일어났다. 

“아니, 아니야! 왜 이야기가 그쪽으로 흐르는건데? 내가 여태, 그러니까 그렇게….”

“그렇게 뭐?”

“크흠.” 

 자하는 말 대신 헛기침을 하고 도로 자리에 앉았다. 설영은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전생의 자하던, 지금 제 앞의 자하던 혼자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라 일어났다가 도로 새하얘져서 원위치를 하는 꼴을 처음봤다. 설영은 예민한 주제인가보다 하고 대충 판단을 마치고 다음 말은 좀 조심스럽게 꺼냈다.   

“내가 미안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였는지 말 해줄 생각은?”

안타깝게도 설영은 이런 쪽에 지지리도 재능이 없었다. 제 딴에는 조심스러웠다곤 하지만 별 도움이 안 됐다는 뜻이다. 자하는 결국 체념하고 두 볼을 꾹 눌렀다 뗀 후 심호흡을 했다. 

“스승, 오해하지 말고 잘 들어.”

“..? 그래.”

“스승…. 정인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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