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하설영] 화랑염문가 2
花郞廉問歌
”설영랑은 가만보면 참 거짓말을 못해.”
검은 옷자락을 부드럽게 날리며 앞서가던 자하가 문득 멈추어 섰다. 차가운 바람 위로 자하의 체향이 전해져왔다.
설영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자하를 응시했다.
그 찰나의 가슴 속은 엉망으로 뒤집어지고 있었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손 끝에는 영력을 쓸 때처럼 짜릿한 감각이 맴돌았다. 자하가 씩 웃더니 눈 위를 성큼성큼 걸어 설영의 앞에 바짝 다가와 섰다.
“좋아하지? 나.”
“….”
설영은 눈앞의 인간을 정말 신분과 직위를 떼고 딱 한 대만 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저런 소리나 하는 데도 여전히 좋아서 더 짜증 났다. 뭐가 그리 좋은지 계속 웃고 있는 꼴이 마음에 들어서 더욱. 설영은 한숨을 쉬었다.
”알면 모른 척 좀 해주시죠.”
“그래~ 그래. 우리 설영랑이 지금 부끄럼을 타는 게로군!”
“절대 아니니까 억측하지 마세요.”
“기다리다가 속 터질 것 같아서 그래. 뭐가 어려워서? 하긴, 그 나이대 애들은 보통 그렇긴 해.”
“그럼 잘 하실 줄 아는 상선께서 하시면 될 일을, 마치 제게 맡겨 두신 양….”
설영이 계속 뾰로통해있자, 자하는 먼저 설영의 입술 위에 짧게 입맞춤을 했다. 자하의 돌발행동에 설영이 움찔했다. 짜증 날 정도로 능숙해서 설영은 그만 화가 치밀었다. 이런 한량 같은 태도로 몇이나 홀려 먹었을지 감도 안 잡혔다. 설영은 자하를 노려보듯 올려다보았다. 저 입가에는 얄미운 미소가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튼 지금은 여기까지만 이라는 거—.”
“누구 마음대로요?”
설영은 무례도 잊고 성큼 자하의 두 볼을 잡았다.
그놈의 상선이 너무 얄미운 미소를 지은 탓이라고 합리화 하며.
花郞廉問歌
설영의 두 눈에 파문이 일었다.
기껏해야 그 나이 때 또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왜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는가?
설영은 급히 자하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잔열이 남았거나, 아직 제정신이 아니거나.
“……스승, 나 지극히 멀쩡해.”
이상하다, 열은 없는데. 설영은 우선 손을 뗐다. 자하는 설영이 어떤 찝찝한 오해를 하는 것 같아 곧장 해명했다.
“…내기를 했단 말이야. 그 이야기가 우리 설영랑의 이야기인지 아닌지로!”
해명은 딱히 도움이 안 됐다. 설영은 다시 이마를 짚어야만 했다. 이번에는 자신의 이마를.
‘달님아, 달님아. 내 임을 놓아주시오.’
“그 이야기가……. 화랑염문가라는 어떤 노래 가사였다 이 말인가?”
“그렇다니까. 하얀 옷을 입은 무당, 온갖 귀신과 주술을 부리는 사람, 화랑 출신! 그럼 당연히 스승이잖아? 그 사람하고, 어떤 높은 진골 어르신하고 사랑에 빠져서….”
“그만!”
설영이 손을 번쩍 들어 다음 이어지는 이야기를 제지했다. 아까는 자하가 노래를 불러주겠다는 걸 기겁하며 말린 참이다. 다행히 말단 화랑들이어서인지, 감히 그게 전대 상선이라는 불경한 추측까지는 하지 않은 모양이다. 설영은 휘몰아치는 이야기에 정신이 아득했다.
“…그래서, 자하, 너는 어디에 걸었지?”
자하는 당당하게 가슴팍에 손을 올리며 외쳤다.
“당연히 설영랑이라는 데 걸었지!”
설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이들은?”
“모두 다 설영이라는 데 걸었어.”
서안 위에 올려진 붉은 촛대 빛이 아니었다면, 설영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단 걸 들켰으리라. 내가 떠나신 임을 내놓지 않으면 부처님 멱살 잡겠다고 협박을 한 두 번 했나, 백호영도의 선배들이 자신을 찾아올 때마다 호기심에 눈을 빛내던 어린 화랑들의 짓이 틀림없다고 직감했다.
설영은 얼굴이 화끈해졌다.
워낙 남이 무어라 떠드는 데 크게 관여하지 않는 성격이라지만 지나치게 무지했다. 상선과 자기 일인데도. 부처님을 시도 때도 없이 모독한 업이 이렇게 돌아온 것이다.
“그래서, 진실은 뭐야? 그래서 그 상대는 누구고. 화랑끼리의 염문廉問이니까, 역시...”
“……대답할 수 없어.”
진심이다. 방금 이야기를 들으면서 상선의 교활한 그 미소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홧김에 이어진 접문까지도, 입술의 감촉까지도 생생하게 살아났다. 설영은 입술을 질끈 감았다. 그때도 하지 못했던 걸 지금이라고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 이후로는 기억이 없다는 말인가?”
설영은 자신이 지독하게 못하는 방법 — 화제 바꾸기 — 으로 회피했다. 자하는 충분한 대답이 됐다는 듯 씩 웃었다.
“가끔은 회피가 대답이 되기도 한다는 거 알지... 뭐, 좋아. 아무튼 그 이후로는 기억이 전혀 없어.”
설영은 선도산과 비천택 사이 그어진 한 일一자 위로 노래 가歌자를 우선 써넣었다.
“단서가 전혀 없어. 네 몸에는 어떤 주술의 흔적도 없었고, 사악한 기운의 침입도 없었다.”
“전에 책에서 들었는데…. 가끔 큰 무당이 될 사람은 자신의 전생을 보기도 한다고 하던 걸. 그런 건 아닐까?”
자하가 불쑥 의견을 내놓았다. 즉시 설영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영기 다루는 것도 완전치 못하잖아? 아직 바둑을 두면 지면서.”
“그건! 스승이 대요마 중에서도 대 요마니까 그렇지. 인간의 범주에선 나를 따라올 자는 없어.”
“……하지만 아예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라고 하긴 어렵군. 우선 고려하지.”
이 땅에 내려올 수 있는 큰 신은 이미 다 없어진 후다. 누리가망, 곡두가망. 토착 신들은 그 일 이후로 할 일을 마쳤다는 듯 자취를 감췄다. 설영은 한 때 누리가망과 접촉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후 쭉 함께 있었기에 그 기운을 절대 모를 수 없었다.
만약 정말 신이라면….
상선의 망령, 아니 화랑도의 신이라도 되어 강림하려는 건가?
말도 안 되는 가정이라 헛웃음이 나왔다.
자하와 이곳에 들어앉아 고민하기 이전에, 풍류관에서 진림을 우연히 마주쳤었다. 진림도 백언에게 대략적인 자초지종을 들었는지, 안부 인사를 해왔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대의 기억을 읽고 작간을 부린다는 쪽이 옳은 판단이야.’
강신, 신병, 혹은 빙의. 그런 가능성을 제시하는 설영에게 진림은 진심 어린 충고를 했다.
하지만 이 부분은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설영의 기억을 더듬어 볼 만한 요마는 이 세상에 별로 남아있지 않다는 건데. 설령 그런 쪽으로 특화된 요마가 있어 설영이 눈치채지 못했더라도 작간을 부리면 반드시 흔적이 남는다. 선문의 방법이든, 주술이든, 민간의 수사든 이 흔적을 쫓아 수사를 한다는 건 당연한 상식이다. 그러나 자하의 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영혼 내부의 문제라면 어떨까.”
설영은 문득 그런 결론을 내렸다. 자하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게 무슨 소리지?”
“……복잡한 이야기야. 영혼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재구성 되는 과정에서 어떤 이물질이 들어갔다던가.”
“알았다, 내 전생의 문제인 거지. 설영이 아까 그렇게 찾아댔던 ‘상선’이라는 사람.”
설영은 침묵했다.
자하는 설영에게 있어 아픈 부분이었다.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아려오는, 복잡하기 짝이 없는 감정의 집합체였다. 설영은 냉큼 아까의 추태가 떠올랐다. 사과는 했지만 어째 또 사과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까는 미안했다. ……이미 너는 다른 사람인데.”
“사과하지 마, 설영랑. 나는 괜찮았어. 아주 먼 이야기라고 느껴지지도 않았고.”
설영의 얼굴에 의아함이 번졌다.
설영은 서안 위에 있던 종이를 밀어내고 새 종이를 꺼내 깔았다. 설영은 그 위에 큰 원 하나를 그렸다.
“보통 윤회의 바퀴로 다시 돌아갈 때, 모든 기억은 씻겨가기 마련이다. 그러니 네가 전생을 네 삶처럼 느끼는 건 생리적으로 옳지 않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 무당이 전생을 들여다 보는 건 어떻게 가능한 거지?”
“그러니까 사기꾼이지.”
하지만 만약을 위해 설영은 사기꾼 몇을 잡아다 추궁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서안을 정리했다.
자신이 모르는 새로운 방법 따위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설영은 진림을 만난 그날 이후 사흘간 비천택에 틀어박혀 자하와 시간을 보냈다. 자하는 사흘 밤낮 사경을 헤맸던 사람답지 않게 자하는 빠르게 건강을 회복했다. 설영은 강신으로 인한 열병이라 짐작했으나, 열이 깨끗하게 내린 걸 보면 그건 또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그건 됐다. 진짜 문제는 자하는 살만해지자 외출을 허락해달라며 시위를 벌였다는 건데. 이대로 무엇하나 해결되지 않은 채 바깥에 내놓을 수 없었던 설영은 — 길을 걷다가 갑자기 상선이 된다면 어쩐단 말인가? — 바둑에서 자신을 이기는 조건을 걸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하를 얕봤다.
설영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잠시 한눈판 사이에 바둑에서 져버렸다. 진림에게 아직 소식은 없었고, 틈틈이 찾아본 문헌에서도 마땅히 단서가 안 보여 잠시 영기가 흐트러진 게 패인이다. 검은 바둑알을 모조리 판 위에서 떨구자마자 냉큼 놀러 가겠다는 자하를 붙잡아 약속한 당과로 남시로 데리고 나온 게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남시南市는 평소보다 두 배 사람이 많은 듯했다. 며칠 전 당의 사신이 다녀갔다더니, 새로 들어온 물건들이 많아 구경꾼이 몰렸다. 자하는 시장 한쪽에 놓인 진묘수 모양의 당삼채를 구경했다. 설영은 바로 옆 가게에서 당과를 하나 사고 은으로 된 무문전을 하나 냈다.
“여기, 당과.”
자하는 시선을 당삼채에 고정한 채 당과를 한 손으로 받아들였다.
“설영랑, 설영랑. 사람은 시간이 흐르면 나이를 먹지? 그럼 쪼글쪼글 해지고.”
“사람의 몸이란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을 피할 수 없지.”
“저 수레처럼.”
자하가 보고 있던 것은 진묘수가 아니라, 그 뒤편의 낡은 수레였다. 설영도 그곳에 시선이 닿았다. 시장 뒤편에 낡아서 부서진 수레가 여러 대 버려져 있었다.
“그래, 저 수레처럼. 옛날에는 무척 쓸만했겠지만….”
말을 이어가려던 설영이 고개를 휙 돌렸다. 나른하고 태평한 표정이 은근히 웃고 있었다. 설영과 눈이 마주친 자하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받았다.
“이런, 우리 설영랑이 혼란 한 것 같으니 내가 마저 하지. 아난다가 그렇게 묻자,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여래에게도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다고. 여래도 결국 사람이라고 말이야. 그런데 어째 설영랑은 마지막으로 본 이후 변한 게 없네.”
“…!”
자하는 설영의 경악한 표정을 뒤로하고 아무렇지 않게 당과를 먹으며 시장을 천천히 구경했다.
영기를 끌어올려 주위를 경계했음에도, 전혀 낌새를 눈치 못 챘다. 혹시 자신의 영기 운용에 문제가 생겼나 싶어 즉시 광명부도 그려봤다. 빛무리가 손 끝에서 발하는 걸로 보아 이쪽엔 문제가 없었다.
도대체 언제? 그때 입 안으로 단 맛이 훅 끼쳤다. 자하가 먹던 당과를 설영의 입에 ‘넣어줬다.’ 그러니까, 입으로. 달큰함과 말캉한 감촉에 순식간에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순간 아득하게 느껴졌다.
“상…!..!!!”
“설영랑. 너무 생각이 많잖아? 나도 궁금한 건 산더미라고.”
“저.저…! 미쳤습니까?
설영은 아연하여 주위를 빠르게 휙 돌아보았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자하는 남은 당과 꼬치를 휘휘 흔들며 얄밉게 웃었다.
“생각은 정리 됐나?”
설영은 하마터면 현재 몸은 어린 자하라는 걸 망각하고 얼굴을 세게 내리칠 뻔했다. 근 10년간 이렇게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감정 상태를 느껴본 적이 없었기에 더욱 정신이 없었다.
“……상선, 왜 또 돌아오셨습니까?”
“나라고 뭐 별 수 있나. 눈 떠보니 여기인데.”
“마침 잘 됐습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상선이 잡귀의 농간인지, 마귀의 작간인지 뭔지 파헤칠 셈이었거든요. 순순히 조사에 협조하세요.”
“어젯밤엔 필요 없다지 않았어? 설영랑은 말을 참 쉽게 바꾸는군!”
설영은 황당한 표정으로 당과 꼬치를 빼앗았다.
“그건 다른 자하에게 한 이야기거든요. 당신이 아닙니다.”
“그래서 당과도 빼앗나? 섭섭하네. 결국 그것도 나고, 이것도 나인데.”
“다릅니다.”
설영은 입을 삐죽이더니 남은 당과를 베어 물고 삼켰다.
“설영랑, 묻고 싶은 게 많은 모양인데 어째 묻지 않고 그렇게 삐딱하게 굴지? 아주 오랜만에 시장에 나왔는데 한가롭게 즐기자고.”
설영은 하고픈 말이 한가득하였지만 참았다.
무슨 일이 있을 지 어떻게 알고?
혹여 마기 따위라서 폭주라도 하다가 제 2의 대재앙신 같은 게 되면 어쩌냔 말이다. 아니지, 대 재앙신이 다시 강림하려 해 부처님께서 신국을 구할 영웅으로....
자하가 겨우 주의를 끌어 멈춰뒀던 생각이 미친 듯이 부풀었다. 빤하지. 자하는 짧게 한숨을 쉬더니 설영랑의 턱을 잡아 끌었다.
“설영랑. 정인을 두고 농땡이를 부리는 건가?”
설영의 사고가 즉시 멈췄다.
“네? 누가 정인입니까? 예?”
머리 속에 자신만이 차올라 있는 걸 확인하고서야 만족스럽게 얼굴에서 손을 떼어냈다.
“상선!!”
설영이 뒤에서 무어라 소리를 질렀지만, 허허실실 웃으며 제 갈 길을 갔다. 아마 자신은 이 재미를 잊지 못해 삼천세계를 떠돌다 이 세계에 또 찾아온 것이 틀림없었다.
자하는 앞장서서 걷다가, 작은 가게에 멈춰서서 이 물건, 저 물건을 구경했다. 설영은 혹여나 놓칠세라, 바로 뒤쫓아갔다. 설영이 자하를 키우면서 느낀 점은, 상선과는 꽤나 취향이 다르다는 점이다. 상선은 화려하면서도 기품있는 고가의 물건을 좋아한다면, 자하는 서민들이 주로 쓸 법한 물건에 관심을 가졌다. 전생의 평범하고 싶었던 욕망이 이렇게 발했나? 설영은 그렇게 여기고 깊게 마음에 두지 않았다.
설영은 반 시진이 지나서야 작금의 상황을 침착하게 다룰 수 있었다. 간질거리는 접문도, 머리 속에 광명부가 터질 뻔한 정인 선언도. 심지어는 자하가 고르는 물건 따위에도 시선을 줄 수 있을 만큼 진정했다.
서론이 길었다. 결론만 밝히자면 상선께서는 지금 '자하'가 좋아할 법한 물건들을 고르고 계시다.
“서역의 팔각술잔을 본떠 만든 나무 술잔에 관심을 갖자 설영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상선. 원래 그런 취향이셨습니까?”
“글쎄... 세 번 즈음 다시 살아났더니 이런 게 호기심이 가네.”
“그렇군요.”
완전히 상선의 영혼이 강신했다면, 저런 사소한 취향 마저 다른 사람 처럼 바뀌었어야 한다. 묘하게 '자하'이면서 '상선'이었다. 아니, '자하'가 '상선'의 흉내를 내는 것인가? 설영은 골몰하며 자하의 한 걸음 뒤에서 그를 살폈다.
“설영랑. 그보다, 내가 한 말에 대답은 안 할 셈인가?”
“무슨 질문이요?'
“왜 백의화랑 혼자 낡지 않는 수레바퀴인지.”
“…그 이야기는 됐습니다.”
태천관의 금척이야기부터, 초혼부를 수십만장 그리며 당신을 그리워했다고 고백하란 말인가? 그리고 당신과 똑 닮은 아이를 데려다 비천택에서 키우고 있다고? 차라리 접시에 코를 박고 죽는 편이 나았다.
“어떤 영험한 도구를 썼겠지. 태천관에서 빌렸거나, 화랑도의 보물을 슬쩍 했거나. 오, 월계 선배님들의 연구실을 털었을 수도 있겠군. 아무튼. 어느 쪽이든 바람직하지 못해. 부처님의 공간에서 완전히 벗어났잖아? 그 꼴로는 몇 백년이가도 대요마신세를 면하지 못해.”
“상선, 어디까지 기억 하십니까?”
“설영랑이 눈 오는 날, 이젠 그런 거 안 해도 된다고 안아 준 것부터, 어젯밤에 나더러 상선이냐고 추궁한 것까지.”
설영의 걸음이 우뚝 멈추어 섰다.
“저는 당신의 기억을 물었습니다만..”
설영이 쫓아오는 기색이 사라지자, 덩달아 자하도 멈추어 섰다.
“전생의 기억은 잘 안 나는 데? 안개 낀 것처럼.”
“마기의 힘으로 다시 깨어났을 때처럼요?”
“아니, 그냥 다른 사람이 이야기 같아. 다만 딱 한 가지는 아주 선명하군.”
“그러니까, 그걸 말을 좀...”
“설영랑, 설영랑. 맥적구이 먹고 싶지 않나?”
“말을 말죠.”
설영은 그 이후로 묻기를 포기했다. 남시를 돌아다니는 내도록 이 상황은 반복됐다. 무언가 실마리를 잡은 듯 하면 자하는 설렁설렁 맥 빠지는 소리를 하며 피했다. 슬슬 설영이 인내심의 한계에 거의 다다랐을 때, 두 사람은 남시의 가장 마지막 상점까지 도달했다.
자하는 아랑곳 않고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
“여기가 시장의 끝이군요. 더 이상 피할 곳은 없습니다. 무작정 걸어가신다고 해결되지 않아요.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 왜 이러신…….”
“말하면 네가 곤란해질 텐데?”
“상선.”
“그렇게 부르지 마. 어차피 진짜 나라고 생각하지 않잖아.”
설영은 뜨끔하여 멈추어 섰다.
“제가 기억하는 상선은 이미…. 돌아가셨으니까요.”
답하는 설영의 표정이 묘하게 가라앉았다. 피안의 길목에서, 부처를 자칭하며 떠난 자하는 이미 없었다. 눈앞의 상선은 자신의 기억을 읽고 흉내 내는 잡귀일 뿐이다. 머리로는 알았지만, 머리에 부적을 처박고 정체를 드러내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초가에 살던 어느 날, 그리움이 사무치던 날. 차라리 자신의 기억을 읽어 홀리는 요괴를 데려오고 싶단 현혹에 넘어갈 뻔했으니까.
설영은 그때마다 되새겼다.
상선은 돌아가셨다.
신국의 재앙을 안고 피안으로 넘어가셨다.
…나의 부족한 진혼 때문에, 억겁의 시간을 또 다시 고통받게 만들었다.
적멸에 든 부처를 떠나보낸 아난다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의 기억을 수천번이고 수만번이고 곱씹어 후대에 전하는 것 뿐이었다. 설영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얼굴에 표정을 감췄다.
그때 머리 위에서 바짝 다가온 사람의 온기가 느껴졌다. 이윽고 자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영랑. 여기까지 오면서 무언가 특별한 점을 못 느꼈나? 가령 노랫소리라던가.”
“노랫소리요?”
“떠나가신 임을 애타게 부르오.”
자하가 음을 실어 맑은 목소리로 곡조를 읊었다. 설영은 즉시 고개를 들었다.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웅얼거리시면 하나도 안 들려요.”
“아니. 난 제대로 불렀는데.”
자하가 또 자신을 놀리는 건가 싶어 고개를 쳐들었다. 순간 심장이 쿵 떨어지는 듯했다. 설영은 이 표정을 잘 알았다. 지금 자하는 장난치는 게 아니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온 몸을 꿰뚫었다.
“다시…. 다시요.”
자하는 설영의 귓가에 바싹 다가가 속삭였다. 부끄러움이 슬그머니 튀어나왔지만, 지금은 그 감정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달님아, 달님아. 내 임을 놓아주시오.”
“……. 하나도 안 들려요. 무슨 노래를 부르신 겁니까?”
“그래? 그럼…. ‘그리는 이 있다 사뢰소서.’이건 어때.”
설영의 귓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무의식적으로 두 손으로 자하의 얼굴을 밀어냈다.
“원왕생가 아닙니까.”
“설영랑 잘 들어. 지금 너 이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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