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염문가

[자하설영] 화랑염문가 3

花郞廉問歌

雪月夜 by 보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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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는 이 있다 사뢰소서, 원왕생.’

설영이 초옥에서 보내는 시간은 일종의 고행이었다. 끊임없이 자신 속의 화두와 언쟁을 벌이고 기운을 가라앉히며 부적으로 영기를 순환하는 일종의 참회였다. 상선과의 추억을 곱씹었고, 돌이킬 순간이 없었는지, 대재앙신을 제압할 방도는 없었는지 수천번 자신에게 자문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운명에 발을 들였나. 그러나 마냥 비관으로 빠질 수 없었다. 과거를 후회로 채운다면 첫눈 오는 날의 재회가 무척 슬픈 일이 될 테니까. 설영은 이루어지지 않는 모든 일을 달의 탓으로 돌렸다. 좀 더 욱하면 무량수불의 탓을 했다. 자신은 뿌리부터 신실한 화랑은 못 될 인간이었던 것 같다. 

‘햇님 한번, 달님 한번, 겨울에 가장 빛나는 별님을 바라보오’ 

설영은 겨울에 가장 빛나는 별을 바라라봤다. 가장 높은 곳에 푸르게 빛나는 별이 하나 있다. 이름하야 천랑성이라고, 설영이 애타게 부르는 이의 별이었다. 

花郞廉問歌


“지금 너 이상해.

자하의 말에는 조금의 거짓도 없었다. 심지어 지금 자하의 표정은 자신의 손목에 갑자기 사슬 자국이 나타났을 때와 똑같았다. 설영은 당황하여 엉겁결에 항변했다. 

“… 저 멀쩡합니다.”

“ —만, ——.”

“상선. 말을 하시려거든 바른 발음으로 제대로 말씀해주십시오.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못알아듣겠습니다. 혹시 3번째로 다시 살아나셔서 제대로 말할 수 없는 저주라도 걸린겁니까?”

자하는 설영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이 상선은 자신이 아는 상선 만큼이나 제멋대로에 집요했다. 설영은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말도 안 되는 내기를 하자고 한 건 상선 당신입니다. 마지막이라길래 내기에 어울려 드렸더니 이러시기 있으십니까? 답답해서 이제는 말해야겠습니다. 저는 당신을 —.”

연모했다. 

설영의 뒷 말은 자하의 손에 의해 막혔다. 아직 들어선 안 될 걸 말한다는 태도로, 입을 꼭 막아세웠다. 

그들은 지켜야 할 것이 있었다. 신은 가혹하게도 두 사람에게 다시 없을 사랑과, 사사로운 감정으로 대의를 저버릴 수 없는 대쪽같은 성정도 함께 내려주었다. 서로를 지켜야 했고, 가족을 지켜야했으며 신국의 운명을 지켜야 했다. 둘 중 누구라도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 주워담지도 못하게 깨져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신국의 평화가 돌아온 지금에서도 할 수 없는 말이다? 

설영은 머리 끝까지 화가 났다.  

갈갈이 찢겨 적멸에 든 영혼을 이어붙여 삼천세계를 건너 이곳에 오겠다고 약조한 것도 자하였다. 그리고 저가 돌아오는지 돌아오지 못하는지 내기를 건 것도 자하였다. 가장 괘씸한 건 설영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이기는 내기를 걸어놓았단 거다. 내기에서 이기는 거라면 냉큼 받아들일 줄 알았나. 설영이 저를 틀어막은 자하의 손을 깨물까 말까 고민하던 찰나, 자하가 입을 열었다.

“설영랑. 말했지. 한 번 윤회의 바퀴를 넘어온 나로서는 기억이 드문드문해. 네가 그렇게 말해도 정확히 몰라. 아니, 윤회의 바퀴를 넘어왔다고 할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군.”

“…….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고요.”

“설영랑 월성의 팔괴담에 관해 기억해?”

“당연히 기억합니다.” 

“내 생각엔 거기서부터인 것 같아.” 

“예?”

“더 말해주고 싶다만 이제 슬슬 헤어질 시간인 것 같네.”

설영은 퍼뜩 주위를 둘러봤다. 벌써 남시를 한참 벗어나 인적이 드문 오솔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자하는 빙그레 웃더니 눈을 감았다. 설영랑은 시퍼런 안색으로 자하의 옷자락을 덥석 잡았다. 

“잠깐 아직, 하실 말씀이 남았잖아요. 지금 가야합니까?”

“….”

“잠깐만요. 이렇게 멋대로 왔다가 멋대로 갈 거면 오지 말던지…. 저기, 자하!”

설영의 말을 끝으로 자하는 말 없이 그대로 축 늘어졌다. 달싹이는 입 사이로 새어나오는 말은 다시금 ‘스승’이었다. 설영은 고개를 떨구고 잠시 바닥을 보았다. 손바닥에 닿아오는 흙의 까끌함이 오늘따라 서럽다. 잠시후 정신을 차린 설영은 자하를 안아들었다.

비천택으로 돌아온 자하는 또 열에 시달렸다. 설영은 이번 일로 자하의 령이 깃드는 신병과 비슷한 것으로 확신했다. 상선이 언급한 월성의 팔괴담이 신경쓰였으나, 자하를 두고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지금으로서는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설영은 물을 적신 천을 이마에 올리며 긴 한 숨을 내쉬었다. 이번엔 한 시진 가량을 ‘상선’으로 있었던 탓에 열병이 길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자하의 의식이 좀 처럼 돌아오지 않은 탓에 비천택에 종종 드나들던 이들의 입을 타고 자하가 원인 모를 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이 알음알음 퍼졌다. 진림과 자운, 왕의 대리인까지도 남몰래 비천택을 다녀갔다. 상선의 망령이 — 설영은 이쯤되어 망령이라 단정했다 — 든다는 소문은 설영의 철저한 입단속으로 새어나가진 않았지만, 혹여 퍼지기라도 하는 날엔 신국이 발칵 뒤집힐 일이었다. 

영광스럽고 고귀한 상선께서 망령되어 찾아오셨다니!

설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막내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겠구나.”

백언이 입술을 깨물지 말라는 듯 다과그릇을 슬금 들이밀었다. 설영은 고개를 가로저었고, 백언의 입에선 짧은 한숨이 튀어나왔다. 자하의 열병에 정신이 팔렸을 설영을 배려하여 세 명이 우르르 오기보단 백언 혼자 백호영도를 대표하여 오기로 했다. 이런 상태라면 저보단 송옥이 오는 게 나았을지 모르겠다. 설영은  움츠럭 대다가 백언이 가져온 기운을 돋우는 향초에 불을 붙였다.  

“안색이 좋지 않으세요. 저 괜찮습니다, 대랑.”

“누가봐도 파리한 낯이면서 누구보고 좋지 않다는 지 모르겠다.”

“송구합니다.”

“설영아. 10년전에 네가 대재앙신을 진혼하려다 실패했던 날 기억하느냐?”

백언의 서두를 듣자마자 설영은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그 때, 상선께서 네 옆자리를 하루종일 지키셨다.”

“……압니다.”

“네가 하도 상선의 옷깃을 꽉 잡고 있던 탓에 오도가도 못하신 채 꼼짝없이 네 병간호를 도맡아 하셨었지. 그때 효월이 설영은 우리가 돌볼테니 두시라 했는데, 있겠다 하신 건 다름아닌 상선이셨다.”

“그랬군요.”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딱딱한 답이 튀어나왔다. 다 아는 이야기였다. 아니, 알다못해 뼈저리게 후회하는 일 중 하나였다. 만약, 자신이 당신만큼은 살아야 한다며 쓰러지지 않았더라면— 하는 생각을 도무지 지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때의 상선께서도 너와 비슷한 표정이셨으니…….” 

“상선께서요.”

설영은  백언의 말에 기묘한 안도감이 드는 동시에 가슴을 송곳으로 내리 찍는 감각이 몰아쳤다. 설영이 고개를 숙인 동안 백언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설영아, 피안으로 넘어가는 다리 위에서 상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 안식에 드셨다는 네 말을 모든 화랑이 믿었다. 그런데 홀연히 우릴 떠나 초옥에 갇힌 이유를 아직 나는 모른다.

“네? 방금....”

백언의 말에 담긴 강조점이 이상했다. 백언은 ‘모른다’는 데 유독 힘을 주어 말했다. 올곧은 성정으로 할 말이 있다면 하는 분이신데, 설영은 고개를 파뜩 들어 백언을 쳐다보았다. 분명 이 사태에 관하여 아는 바가 있음이 틀림없었다. 자신은 모르지만, 백언은 아는 것. 백언은 설영을 말 없이 한참을 바라보다 옷깃을 정리하고 일어섰다.

“자하가 일어나거든 다시 찾아오마. 효월은 네가 식사를 하는지 반드시 보고 오라고 신신당부했다. 나도 그럴 작정으로 왔건만 네 상태를 보아하니 내가 식사하라고 떠밀어도 떠나지 않겠구나. 상선의 가르침인게냐, 아니면 그런 성정이기에 상선께서 특별히 아끼신거냐?”

뒤따라 설영이 배웅하러 일어났으나 백언이 손짓으로 도로 앉혔다. 

백언의 마지막 질문은 답을 바란 질문이 아니었다.

요 몇 년간, 신라에 유행하는 사랑가가 있다.

그 맨 첫구절은 이미 유명한 노래인 원왕생가의 구절로부터 이어진다. 

‘그리는 이 있다 사뢰소서, 원왕생, 원왕생.’

아이들이 경쾌하게 노래를 주거니 받거니, 시장을 쏘다녔다. 

'햇님 한번, 달님 한번, 겨울에 가장 빛나는 별님을 바라보오’

구슬픈 노랫말에 아이들 목소리를 입히니 신나는 노래인 양 탈바꿈 됐다. 그 노래를 잠자코 듣던 석씨 영감은 노래하는 아이들을 불러세웠다. 남시에 유명한 이야기꾼인 석씨 영감은 장터 중앙에 자리잡고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길 즐겼다. 마침 자신있는 이야기의 물꼬를 트기 딱 좋은 노랫말이 들리기도 했다. 석씨 영감은 목을 두어번 가다듬더니 흥미로운 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거참 신통하네. 먼 옛날에 말이다! 화랑 나으리들 보급 행렬에 우연히 쫓아갔었던 날이었지. 사벌주 근처에는 다 허물어져가는 초옥이 하나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그 근처 지나는 사람들이 중얼…. 중얼, 다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지 뭐냐. 고귀하신 낭도, 화랑 나으리들까지도 불러 놓고 화들짝 놀랄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 그래서 그 구절이 뭐였냐 하며는…. 아아아! 그리는 이 있다 사뢰소서, 원왕생, 원왕생.’

석씨 노인은 길고 구슬픈 곡조로 길게 노래를 불렀다. 당의 사신이 다녀가 가뜩이나 사람이 많던 남시의 한 복판에 사람이 모여들었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허연 귀무당이 들어 앉아있다는 내용이잖어. 높으신 진골귀족 나으리가 홀딱 반해 구구절절한 사랑을 했다지. 그런데 귀기와 영기는 상극! 둘이 만나게 된다면 신국에 엄청난 파문이 일게 틀림없었다. 가련한 두 사람의 비밀스런 관계는 결국 들키고 말았는데…’

여기저기서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석씨 영감은 노련하게 좌중의 반응을 살피더니 별안간 박수를 짝 쳤다.

‘진골 화랑님이 모든 죄를 짊어지고 퍼뜩 사랑과 신의를 지키고 죽어버렸다지 뭐냐. 그리고, 애틋하게도 떠나기 전 서한을 남기고 가셨지. 무당은 하염없이 그 편지를 붙들고 초옥에 들어앉아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는게야. 에헴, 떠나가신 임을 애타게 부르오—’  

남시에 별안간 벌어진 이야기판에 집중한 건 지나가던 이 뿐 아니었다. 

당삼채를 구경하던 흑의의 소년도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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