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축기행
자하설영
(진혼기 9권까지 스포 있습니다)
고된 넋을 위로하고 그릇 된 신체를 돌려보내니, 흙은 흙으로, 티끌은 티끌으로, 피안의 것은 피안으로 돌아가리라.
설영의 앞을 가로막던 장벽이 흐릿해졌다. 메마른 바람 사이로 모래 알갱이처럼 흩어졌던 마기가 서서히 거두어졌다. 아니, 어떤 방향으로 흐르는 듯했다. 설영은 온 몸의 영맥이 끊어지는 고통을 느끼며 억지로 다리를 움직였다. 눈물 자국이 버석해진 뺨 위로 새로이 선혈이 흘렀다. 지상과 가까운 뼈마디가 자꾸만 삐걱거렸다. 하지만 설영은 포기할 수 없었다. 청예를 지팡이 삼아 기어코 도착한 곳에는 자그마한 균열이 있었다. 그 너머로 금빛 영기가 뇌전처럼 번뜩였다. 설영은 바닥에 주저앉아 청예를 들어 균열 주변을 세게 내리쳤다.
‘설영랑, 뭐 하는 짓이지?’
자하의 힐난이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하지만 제가 언제부터 그의 말에 순순히 따랐던가? 설영은 양 팔쯤이야 잃을 각오로, 커지기 시작한 틈을 강하게 내리쳤다. 챙! 날카로운 파공음이 허공을 갈랐다. 잔류하던 마기와 장벽의 파편이 한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설영이 뻑뻑한 눈동자를 굴렸다. 피로 물든 시야 저편에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천지가 한 번 크게 요동치더니, 온 몸을 억누르던 사특한 기운이 한순간에 약해졌다.
“대재앙신이 사라졌다! 빨리 귀교를 닫아야 해!”
“예!”
멀리서 진림과 수장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그러진 공간이 이쪽 세상의 법칙을 따라 재정립됐다. 허공에서 넘실거리던 수면이 팟!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부옇게 일어났던 먼지가 천천히 가라앉고, 눈가루가 섞인 바람이 다시금 불어왔다. 설영을 속박하던 월계의 기운도 어느 새 사라져 있었다.
“상선…?”
설영은 검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 목구멍에서 뜨겁고 비린 것이 욱 치솟았다. 영맥을 혹사한 탓에 맺힌 사혈이었다. 우욱, 웩…. 설영은 검은 핏덩이를 퉤 뱉어내고는 계속해서 발을 옮겼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거세지기 시작한 눈발 사이로 우두커니 선 인영이 보였다. 손톱이 길어지지도, 머리색이 변하지도 않은 자하가 허공의 한 지점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상선…! 설영의 목소리가 흉하게 갈라졌다. 평소 같았으면 귀곡성인 줄 알았다며 괜스레 타박했을 자하가 불길하게도 조용했다.
설영은 덜컥 겁이 났다.
“상선.”
“…….”
“상선? 상선 맞죠?”
검을 쥔 손에 식은땀이 뱄다. 최악을 가정하는 것은 설영의 해묵은 버릇이다. 적게는 망량화, 크게는 대재앙신의 새로운 그릇. 귀교는 이미 닫혔다. 돌려보낼 수 없다면 끌어안고 죽기라도 해야 했다. ‘진정한 의미의 동생공사로군.’ 설영은 검을 고쳐 쥐었다. 그리고 자하에게 말을 걸었다.
“귀교가 닫혔습니다. 대재앙신은요?”
자하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 설영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내내 등을 보이고 있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헉….”
설영이 헛숨을 삼켰다. 마기에 억눌려 있을 때조차 형형하게 빛나던 금안이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검은 동공 너머로 채 갈무리하지 못한 감정이 거친 해류처럼 넘실거렸다. 상선? 설영이 중얼거리며 한 걸음 더 옮기려 할 때였다. 뒤에서 화랑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설영아! 무사했구나!”
“상선, 어찌 되었습니까?”
백언과 진림이 황급히 뛰어왔다. 백언은 설영을 부축하며 몸을 살폈고, 진림은 그들을 지나쳐 자하의 옆으로 갔다. ‘이런, 저 자는 지금 제정신이 아닌데….’ 설영이 급하게 진림을 불러세웠다.
“국선! 지금 상선께서는…!”
“내가, 뭐?”
언제 그랬냐는 듯, 자하의 눈동자에는 금빛이 완연했다. 설영과 눈이 마주치자 생긋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상선 김자하의 모습이었다.
“설영랑. 상선께서 다치시기라도 했나?”
“아, 아무것도….”
설영이 자하를 힐끗 봤다. 자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쓸데없는 소리를 해 귀찮게 굴지 말라는 뜻이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설영이 고개를 푹 숙였다. 때마침 도착한 송옥과 효월이 피풍의로 설영을 둘둘 감았다. 그들은 자기네 막내를 한참 껴안고 있다가, 뒤늦게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봤다. 효월은 거의 비명을 지르며 설영을 둘러업고 산 아래로 내려갔다. 설영은 내내 뒤쪽을 흘끔거렸다. 자하는 화랑들에게 둘러싸여 이마 정도만 빼꼼 보였다. 남은 일을 처리하려는 듯했다. 청예를 들고 따라가던 송옥이 말했다.
“설영아. 상선이 신경 쓰이냐?”
“…네. 마지막에 대재앙신을 저쪽 세계로 밀어 넣은 건 상선이시니까요. 저보다 많이 다치셨을 텐데…….”
“우리가 약을 보내드릴 테니, 너무 심려치 말아라.”
“형님들…!”
설영은 그제야 효월의 등에 얼굴을 폭 묻을 수 있었다. 차게 얼었던 뺨이 뜨끈해지자 온몸에 힘이 풀렸다. 노곤한 수마가 밀려왔다.
그건 대체 뭐였을까.
혼몽 중에도 자하의 텅 빈 눈이 자꾸만 생각났다. 기시감이 들었다. 설영은 그런 시선을 일전에 마주한 적이 있었다.
누구에게서?
생각은 그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설영의 의식은 다섯 길 물 아래로 천천히 침잠했다.
대재앙신을 원래 세계로 돌려보낸 후에도 남은 일은 수두룩했다. 그간 괴변 탓에 피해를 보았던 양민들을 살피고, 마기가 잔류한 구석구석을 정화하고, 높으신 분들께도 적당히 둘러대야 했다. 다행히도 태천관이 입을 맞춰 준지라 의심이나 오해를 산 일은 없는 듯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설을 앞두고 화랑도 전체가 모여 조촐한 행사를 열게 되었다. 바짝 긴장해 있던 화랑들은 어깨에 힘을 풀었고, 어려서 뭘 잘 모르는 낭도들은 그저 훈련을 빼먹으니 즐거워했다. 몇 주간 청매화가 그려진 방에 감금되어 있던 설영은 뒤늦게 술자리에 합류했다. 무늬 없는 백의 대신 백호영도의 도복을 입은 채였다. 백의화랑으로 지낸 기간이 더 짧았을 텐데도, 다들 설영의 옷차림을 낯설어했다. 자하도 묘한 표정이었다.
‘백의화랑이었을 적 처음 만났으니 더 그럴 테지.’
설영이 오 월의 어느 날을 회상하며 까닥 눈인사를 했을 때였다. 자하가 눈짓으로 제 옆자리를 가리켰다. 설영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반박했다.
‘지금 저더러 상선과 국선 사이를 비집고 앉으란 뜻입니까?’
‘못 할 건 또 뭐지?’
‘싫습니다.’
설영은 보란 듯이 백언과 송옥 사이로 갔다. 둘은 저희 막내를 반기며 깔고 앉았던 방석까지 내주려 했다. 설영은 사양하며 술을 받아 마셨다. 건너편에서 따가운 시선이 콕콕 찔러댔지만 모른 척 했다.
술잔이 몇 번 돌았을 때였다. 어전봉사화랑으로 안면을 튼 연제가 넌지시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설영랑 덕에 백의화랑을 보는 시선이 완전히 바뀌었네요.”
다들 고개를 끄덕거렸다. 화랑의 백색 의복은 모욕의 상징이었으나, 설영의 공이 워낙 컸던 탓에 이제는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크흠…. 백언이 헛기침을 했다. 송옥과 효월도 아닌 척 가슴을 폈다. 우리 막내가 해냈다! 그런 의미인 것 같았다.
“그럼 흑의화랑은 어떻… 아얏!”
“서검랑. 옆을 보도록 해.”
“…….”
단순하기 그지없는 서검의 발언에 화운의 부채가 날아들었다. 서검은 옆자리를 봤다. 그날따라 흑색이 짙은 무복을 입은 무원이 못 들은 척 안주를 집어 들고 있었다.
“그, 그런 뜻이 아니라….”
“…괜찮다.”
서검이 남은 술을 한 번에 털어 마셨다. 제법 부끄러웠던지 귀 끝이 붉었다. ‘서준랑이 있었다면 얼마나 재미있어했을까.’ 수장들의 모습을 구경하던 설영이 생각했다. 대재앙신이 없었더라면 그 사고도 없었겠지만, 지금처럼 어울려 술을 마시는 일 또한 없었을 테다. 끝난 일을 생각해서 뭐 하겠나. 설영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건너편에 앉은 자하는 진림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말이 좋아 이야기지, 사실상 진림을 놀리고 있었다. 하여튼 성격 참…. 작게 혀를 차며 관심을 끄려던 참이었다. 자하에게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뭐지?
설영은 한참이나 자하를 관찰한 끝에 알아차렸다. 언제나 근처에 두던 그의 검, 적멸이 없었다. 설영은 백언을 톡톡 두드리며 작은 소리로 물어봤다.
“대랑. 상선께서 웬일로 적멸을 풀어두고 오셨네요?”
“그걸 이제야 알아채다니. 설영랑, 생사를 함께한 전우에게 너무 관심이 박한 것 아닌가?”
“…윽.”
그걸 또 어떻게 들은 것인지, 자하가 빙글빙글 웃으며 시비를 걸어왔다. 설영은 적당히 대꾸했다.
“풀어 두고 오셨을 리는 없고… 수리라도 맡기셨습니까?”
“잃어버렸어.”
“예?”
예상치 못한 답에 설영이 퍼드득 튀어올랐다. 자하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이어서 말했다.
“‘그것’을 귀교 너머로 내던질 때 딸려가 버렸지 뭐야.”
“하루빨리 새 검을 준비해보겠습니다. 뭐가 됐든 적멸만은 못하겠습니다만….”
순간 자하의 표정이 차가워졌다가,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 짧은 변화를 알아챈 것은 설영 뿐이었다.
“됐어. 이렇게 된 김에 살생을 멀리하고 불자의 삶을 살련다.”
“절에라도 들어가신단 말씀이십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군.”
자하가 느긋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절간에서 악기 소리를 달가워할까? 하루도 못 견디고 쫒아내려 할걸. 나는 역시 내 집에서 거문고나 뜯는 게 성미에 맞아. 그리고 남는 시간에는….”
…바둑이라도 두면서 말이지. 금빛 시선이 설영을 향했다. 자하는 손에 잡히는 잔을 집어 들며 진득하게 설영을 응시했다. 설영은 왠지 모를 긴장감에 발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액체가 넘어갈 때마다 자하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 모습이 유독 느리게 보였다. 빈 잔이 탁자 위에 놓였다. 그것을 본 진림이 미미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그리고 말했다.
”외람되지만, 상선….”
“음?”
“그거 독주입니다.”
으응? 자하가 제 앞에 놓인 잔 두 개를 번갈아 봤다. 비슷하게 생기긴 했으나, 자하가 쓰던 잔은 미미하게 광택이 도는 고급품이었다. 그 안에는 원래 마시던 차가 반절 넘게 찰랑이고 있었다. 탁자 끝에 앉은 화랑 몇이 멋쩍게 웃었다. 저희끼리 돌리던 잔이 어쩌다 멀리까지 와버린 모양이었다. 뒤늦게 취기가 올랐는지 자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눈을 감고 미간을 지긋이 누르더니, 몇 번 헛손질을 하며 겨우 찻잔을 집었다. 그럴 만도 했다. 몇 번에 걸쳐 나눠 마시는 술을 한 번에 해치웠으니.
”설영랑.”
자하가 불렀다. 설영은 못 들은 척 효월의 잔에 술을 채웠다.
자하가 다시 불렀다.
”설영랑.”
“저 백호영돕니다.”
“나 아직 상선이다?”
아오, 저…. 설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하가 앉은 쪽으로 갔다. 앉은키에 맞춰 몸을 숙이자, 자하가 설영의 어깨에 제 팔을 걸쳤다. 그는 양심이 없어 제 무게를 온전히 설영에게 맡겼다. 설영은 비틀거리며 겨우 자하를 부축해 일어섰다. 힘을 줘서 벌게진 목에 핏대가 올랐다.
”상선을 모셔다드리고 오겠습니다.”
“다시 오게?”
“네. 반드시. 기필코.”
큭큭…. 자하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설영은 눈을 흘기며 자하의 피풍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어기적거리는 걸음걸이로 연회장을 나섰다.
초저녁부터 내리던 눈송이가 제법 쌓여 온 세상이 하얬다. 눈 쌓인 지붕 아래로 오색의 등불이 주렁주렁 달렸다. 새해를 맞은 불야성의 왕경은 밤이 늦도록 환하고 북적거렸다. 눈 쌓인 거리 저편으로 털옷을 두른 부인들이 담소를 나누며 걸어가는 모습도 보였다. 설영은 문득 자하의 표정이 궁금해졌으나, 덧대어 입은 짐승 가죽에 가려져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어떤가요, 저주가 사라진 세계는.”
“…평화롭네. 풍족해 보여.”
꿈을 꾸는 것처럼 아득한 대답이 돌아왔다. 설영도 괜히 감상에 젖었다.
”우린 할 수 있을 거라고 했잖아요.”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이번에는 자하가 말했다.
”설영랑. 그 때 설영랑이 물어봤었지.”
“뭘요?”
“대재앙신을 돌려보내는 데 성공한다면 뭘 하고 싶냐고.”
“그랬죠.”
“설영랑은 앞으로 뭘 하고 살 거야? 과거가 좀, 아니, 아주 많이 구리긴 해도, 일단은 신분이 높잖아? 이번 일로 명성도 얻었으니, 추후 자색 공복을 기대해볼 수 있지 않아?”
자색 공복은 1두품부터 5두품까지의 고위 관리들만이 걸칠 수 있는 것으로, 진골 출신이 아니면 꿈도 꾸지 못했다. 설영은 고개를 모로 저었다.
”관심 없습니다.”
“그렇군. 그럼 뭘 위해서 살 건가?”
“잘 모르겠습니다. 이전처럼 백운선원에 들어가 형님들과 지내고, 낭도들을 가르치고… 그렇게 살겠지요.”
흐음. 자하가 추임새를 길게 뺐다. 거창한 답이 아니어서 재미없다고 생각한 듯했다.
”상선께서는 정말… 불교에 귀의하실 생각이십니까?”
“뭐? 그럴 리가!”
자하가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생선을 물고 지나가던 고양이가 흘끗 쳐다보더니 어둠 속으로 뛰어갔다.
”너도 알잖아. 이런 몸으로는 이레도 못 가서 쫓겨날 걸.”
그냥, 나는…. 자하는 말을 삼켰다.
'나는 산 사람이 아니니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래서 네게 물어본 거야.'
그런 말은 도저히 꺼낼 수 없었다. 자하가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뽀득뽀득 눈 밟는 소리만 들렸다.
”상선, 도착했습니다.”
얼마나 걸었을까, 비천 문양이 새겨진 대문이 눈앞에 보였다. 설영이 문고리를 두어 번 잡고 두드리자, 가령인 비비와 천천이 등불을 들고 두 사람을 맞이했다. 설영은 이제야 술이 좀 깬 듯한 자하를 대문 안으로 밀어넣었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어허. 어딜 가?”
두툼한 천이 설영의 어깨에 얹혔다. 자하가 자기 피풍의를 설영에게 덮어씌운 것이다.
”그거 줄게. 가지 마.”
“분명 돌아가겠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설영랑… 술에 취한 상관을 바래다줬다는 것 자체가 밤을 함께 보내겠다는 은연중의 암시 아닌가? 시서를 배웠다면 당연히 알아야지!”
“예? 무슨 터무니없는 소릴….”
“잔말 말고 들어오기나 해.”
처음 만난 날부터 자하에게 힘으로 이겨본 적 없는 설영은 이번에도 힘없이 문 안쪽으로 끌려들어갔다. 은죽원에 다과상을 펴 줘. 집주인의 지시에 가령들이 부엌으로 총총 걸어갔다. 자하는 버둥거리는 설영을 옆구리에 끼고 창고로 향했다.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흥얼거리기까지 했다.
”설영랑이 좋아하는 바둑이나 둘까나. 새 바둑판이 창고에 몇 개 굴러다닐 텐데.”
“서재에 있던 건 어쨌습니까. 항상 책상 위에 두셨잖아요.”
“그거?”
자하의 눈동자가 도로록 굴러갔다. 그는 잠깐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이내 환하게 웃었다.
”낙서를 해 놔서 못 써!”
일전의 언행와는 달리, 자하는 제법 얌전히 왕경에 붙어 있었다. 아니, 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는 표현이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새해를 맞은 비천택에는 온갖 선물을 실은 수레가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거절해 왔던 고관대작들의 방문도 줄줄이 이어졌다. 어쩌다 시간이 비기라도 하면 태후궁에 불려 가서 공주들이나 태자의 말상대가 되어 줘야 했다. 제 마음대로 비천택을 드나들던 설영조차 자하를 만나려면 예약을 해야 할 정도였다.
무릎을 꿇고 앉은 설영이 말했다.
“인상이 나쁘시네요.”
“왜, 도道라도 권해볼 셈이야?”
자하는 약간 거뭇해진 눈가를 꾹꾹 누르며 대꾸했다. 동이 트자마자 찾아온 탓인지 얇은 침의에 겉옷을 겨우 걸친 차림이었다. 머리를 한 움큼 잡아올린 채 주변을 더듬거리는 자하에게 설영이 얇은 끈을 건넸다.
“그래. 설영랑이 이 시간에 웬일이지? 상선에 대한 마음이 지극하여 아침 문안을 드리러 왔을 리 없고.”
“형님들께 선물을 보내셨다고 들었습니다. 찾아뵈려 했더니 상선께서 거절하셨다고 하여….”
“널 보냈다? 백언랑이 머리를 좀 썼군.”
그 셋의 팔불출은 도저히 감당하기 힘들어서…. 자하가 설영을 흘기며 말끝을 흐렸다.
“잘 됐어. 송옥랑에게는 은죽원의 소나무를 주려 했는데, 내킨다면 와서 파 가라고 해.”
“예? 대랑께 보내신 것만 해도 건물 몇 개는 세울 정도였는데요…”
“고치라고 준 거야. 검소한 것도 좋지만……. 하하… 결국 이 말을 내 입으로 하는군.”
유언일 줄 알고 남긴 것들이 자꾸 발목을 잡았다. 영문 모를 말에 설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하는 손에 턱을 괴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앳된 티가 가득한 얼굴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찻잔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충동적으로 손이 먼저 나갔다. 자하는 설영의 뺨을 두 손 가득 쥐고 양옆으로 쭉 잡아당겼다.
“…뭡니까?”
“어른이 주는 새해 선물이라고 전해.”
“아니, 뭐냐고요 방금.”
“설영랑 건 없어. 하늘 같은 상선께서 옆에 계셔 주는 걸로 만족하도록.”
자하가 옷을 툭툭 털며 일어섰다. 설영도 찻잔을 놓고 굽혔던 무릎을 폈다. ‘영객부령을 뵌다고 했던가.’ 정리한 다기를 든 설영이 꾸벅 목례하고 자리를 떴다. 문득 자하와 함께 떨어졌던 삼천세계가 생각났다. 그곳에서의 진림은 서준과 영객부에서 일했었다. ‘내후년쯤 국선께서 은퇴하실 것 같던데, 뒤를 봐주려고 저러나.’ 설영은 저 나름대로 해석하고는 이내 신경을 껐다.
그리고 반년이 지났다. 왕경에는 여름이 찾아왔다. 설영은 녹음이 가득한 선도산을 타박타박 걸어 내려갔다. 습한 바람이 흑색 무늬가 수놓인 백의를 펄럭이고 지나갔다. 양손에 든 보따리에는 책이 몇 권 들어 있었다. 상선이 찾으셨다며 효월이 챙겨 준 것이었다. 설영이 슬쩍 보기에는 밀교密敎니 항해술이니 토번吐蕃이니 하여 영 관련이 없는 것들 뿐이었다. 새로운 취미라도 생겼나 보지. 설영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비천택의 미로 같은 복도를 지나 서재로 가니, 역시나. 자하가 느슨한 홑겹 침의만 걸친 채 반쯤 누워 있었다. 그는 대나무를 엮어 만든 기다란 통을 손가락으로 툭툭 굴리고 있었다. 원래 품에 끼고 자는 용도인데, 최소한의 품위를 생각한 것인지 옆에 둘 뿐이었다. 접어 올린 중문에는 얇은 비단 장막을 둘러, 햇빛은 가리고 바람은 들게 했다. 더위를 많이 타는 집주인을 배려한 듯했다. 장막을 걷고 들어가자, 나른한 금빛 시선이 설영을 향했다.
“오, 이게 누구신가. 비천택 바깥주인 설영랑이잖아.”
“그 괴상한 호칭은 뭡니까?”
“드나드는 것이 자연스러워 가령들도 막지 않고, 나는 주로 안에 있으니, 설영랑이 바깥주인인 셈이지.”
자하는 찌푸려진 설영의 미간을 보며 큭큭 웃었다. 그는 상체를 일으켜 설영이 들고 온 보따리를 받았다. 매듭을 풀어 확인한 후에는 탁자 위에 올려 뒀다. 설영의 시선은 책들이 쌓인 곳으로 향했다. 토번어역본, 대당서역기, 그리고 새로이 추가된 밀교의 경전까지. 설영은 그 통일성 없는 장서들을 빤히 보다가, 문득 생각난 것을 말했다.
“영객부領客府에 들어가실 겁니까?”
“음?”
다시 벌렁 드러누우려던 자하가 멈칫했다.
“하하… 설영랑. 내가 왜 그런 일을 하겠어.”
“어울리잖아요. 머지않아 국선께서 은퇴하실 모양이던데, 같이 해보심이….”
“그건 진림의 의견도 들어봐야 한다고 본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이리 와. 자하가 옆자리를 팡팡 쳤다. 설영이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며칠 전에도 자하에게 잡혀 대나무 통 대신 끌어안겨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싸늘한데 여름엔 시원해서 좋다나. 한 겹 천 너머로 죽은 남자의 심장 소리를 듣는 기분은 몹시 이상하고도 야릇한 것이었으므로, 설영은 아무래도 거절하고 싶었다.
그러나 자하는 놓아 줄 생각이 없었다.
“어딜 도망가? 이름값을 해, 설영랑.”
“악!”
설영이 질색하며 방 한구석으로 도망쳤다.
“설영랑 주제에 눈치가 빨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자하가 발걸음을 옮겼다. 포식자의 걸음걸이처럼 묵직하고 느긋한 움직임이었다. 곧 의자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대치했다. 설영이 침을 꼴깍 삼켰다. 그 순간 자하의 모습이 사라지며 왼쪽에서 작은 소리가 났다. 설영은 재빨리 오른쪽으로 피했다.
“내가 뭐랬어? 부처님 손바닥 안이랬잖아.”
결과는 처참했다. 설영은 정확히 제가 몸을 날린 방향에서 나타난 자하에게 폭 끌어안기고 말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반대쪽을 보자, 새파란 대나무 이파리가 사각거리며 기묘한 춤을 추고 있었다. 자하가 죽엽군 주술을 써서 설영을 속인 것이다.
“아하하. 귀마왕도 한물갔군그래?”
“치사하게…!”
“오랄 때 오지 그랬어.”
뜨끈한 살갗이 목덜미에 닿았다. 자하가 이마를 설영의 어깨에 파묻었다. 하아아아…. 자하는 만족스러운 듯 긴 숨을 내쉬었다. 그와 닿은 부분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정말 덥긴 했나 보지.’ 설영은 얌전히 끌어안긴 채 생각했다. ‘하긴, 팔 년이나 서늘한 땅 속에 있었으니….’ 설영은 의자 구석에 놓인 부채를 집어 들어 팔랑팔랑 바람을 일으켰다. 자하의 옆머리가 제멋대로 휘날렸다. 그 모습이 우스워 설영은 작게 웃었다. 순간, 자하가 고개를 확 들어서 설영을 째려봤다. 그리고는 반항할 틈도 없이 설영을 고쳐 안더니 긴 의자에 풀썩 쓰러졌다. 엉겁결에 자하의 위에 누운 설영이 큰 눈을 꿈뻑였다.
자하가 설영의 머리통을 제 가슴에 갖다 대며 말했다.
“상선을 베개로 쓰는 영광을 누리게 해 주지. 어때, 은혜가 망극하지 않아?”
“망측하긴 한데요.”
“이런 망나니를 보았나.”
설영은 몇 번 버둥거려 봤으나, 자하가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이내 축 늘어졌다. 그렇게 한참을 누워 있었다. 쿵, 쿵, 쿵……. 일정하게 울리는 박동이 귀를 간지럽혔다. 방 안 공기는 서늘하고, 뺨에 닿은 옷자락은 부드럽고, 등을 쓰다듬는 손길은 다정했다. 요컨대 기분이 좋았다는 것이다. 설영은 주인의 손길을 받는 고양이처럼 꾸벅꾸벅 졸았다. 허? 재울 생각까지는 없었던 자하가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언제는 망측하다며? 왠지 모를 괘씸함에 뺨을 잡아당겨 깨우려던 때였다. 설영이 웅얼거리며 뭐라고 말했다.
“상선…….”
“…?”
“행복해요…?”
자하의 손길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는 둥그렇게 뜬 눈으로 설영을 한 번 보고, 손을 툭 내리더니,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글쎄….”
침의에 휘감긴 손이 의자 밖으로 미끄러졌다.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서책이 손 끝에 닿았다. 대강 집어들어 보니 밀교의 책이었다. 깨어나서 대재앙신의 부활을 확인하자마자 찾아봤던 책이다. 원하는 술법은 적혀 있지 않았지만, 내용이 흥미로워서 태우지 않고 둔 것이었다.
자하는 잠든 이에게 이야기했다.
“나는 일찍이 명예와 긍지를 위해 살았지.”
천랑성의 화신. 가장 높은 곳에서 밝게 빛날 별. 그는 출생부터 세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특별히 부응하고자 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그러지 않을 이유도 없었기에, 자하는 기꺼이 천하 창생을 비추기로 했다.
“하지만 빛은 한 번 꺼졌고.”
죽음. 알아주는 이 없는 비명횡사. 자하는 숨이 끊어지던 순간을 회상하며 가슴 위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설영은 곤히 자고 있었다.
“다시 깨어나 보니 오직 한 가지만을 위해 살아가게 되었더군.”
증오와 복수.
자신을 이렇게 만든 재앙과 결단을 내겠다는 집념. 그것들이 자하를 살게 했다. 께름칙한 기운을 품고도 움직이게 했다. 수없는 고통의 밤을 견디게끔 했다.
지옥의 이정표를 부수려 그는 살았다.
“하지만 그것조차 이제는 끝났어.”
그렇다면 난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해? 자하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목적 잃은 삶에서 기인한 공허함이 정신을 좀먹고 있었다.
“너라면 어떻게 할 테지, 설영랑?”
자하가 설영을 재차 쓰다듬었다. 설영이 알아듣지 못할 잠꼬대를 했다. 그리고 팔을 크게 휘적거리더니, 그대로 자하의 얼굴에 텁 얹었다. 얽! 봉변을 당한 자하가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래. 설영랑에게 물어본 내 잘못이야. 이런 심도 깊은 고민을 할 턱이 있나. 보나 마나 ‘형님들과 있으면 매일매일이 즐거운데요.’ 같은 소리나 하겠지.”
난 이 무엄한 팔이나 치워야겠다. 자하는 설영의 팔을 붙잡고 휙 들어 올렸다. 그러자 설영이 불편한 듯 앓는 소리를 냈다. 상관의 머릿속은 이렇게나 복잡한데, 한가롭게 잠투정이나 하고 있다니. 시선을 아래로 내려 흘기자 가슴 위에 퍼진 볼살이 보였다. 자하는 그것을 괜히 건드려 봤다. 좁아드는 미간이 유쾌했다.
“바보.”
“…으응…….”
“헉, 혹시 깼어?”
“…….”
“아니네. 설영랑은 역시 바보야.”
자하는 자는 사람을 멋대로 힐난하고서 저 혼자 큭큭 웃었다. 옆으로 미끄러지려는 몸을 받쳐 올리고 다시 등을 쓰다듬어 주자, 설영의 웅얼거림이 멈추고 색색거리는 숨소리만 들렸다.
“너와 있으면 즐거운데.”
“…….”
“네가 계속 내 옆에만 있을 순 없잖아?”
안 그래? 설영의 허리께를 더듬자 손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짤랑거리는 곡옥 장식이다. 험하게 다뤄 상처가 많은 것이 그를 닮았다. 자하는 곡옥을 손에서 굴리더니, 하나를 떼어 가졌다.
“그러니 나도 살길을 찾아야겠다.”
설영랑, 날 너무 미워하진 마.
시간은 흘러 다시 겨울이 왔다. 자하가 자취를 감춘 지 몇 달이 지났다. 전적이 있어서인지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분위기였다. 처음 몇 주는 상석을 비워 두던 진림도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레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안달이 난 것은 자운 정도였다.
설영은 이젠 익숙해진 검은 옷의 무사들과 눈인사를 하며 전각 뒤쪽으로 갔다. 그곳에는 멱리를 쓴 여인 하나가 설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운랑."
설영이 고개를 까닥 숙여 인사를 했다. 자운도 사라천을 걷어 눈을 마주쳤다.
"상선의 소식은 아직인가?"
"몇 번을 말씀드렸습니다만, 예."
"네게도 언질이 없었고?"
"국선도 모르시는 일을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국선이 모르는 일도 자네는 알고 있었잖나."
자하가 한 번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자운은 알고 있었다. ‘언젠가 담판을 지어 놨던 모양이지.’ 귀교를 열기 전부터 눈치채고 있었을 테니,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있었을 것이다.
"…팔 년 전에도 혼자 사라지더니 그렇게 되어 왔지. 아무 말도 없이."
"그건…."
"나도 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이해해."
자운이 뒤돌아서 하늘을 봤다. 길게 드리운 천이 사락거리며 땅에 끌렸다. 설영은 검은 천 속 여인의 얼굴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녀와 그는 아주 닮았으니까.
설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일전에, 그러니까 대재앙신과 결판을 내기 전 말입니다, 상선께 여쭤본 적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나면 무엇을 하고 싶으시냐고."
"…그래서?"
"바둑을 두고, 거문고나 연주하고, 시간이 더 지나면 멀리 훌쩍 떠나고 싶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자운은 다시 하늘을 봤다. 생각에 잠긴 모양이었다. 설영은 더는 할 말이 없어 가벼운 묵례만 하고 뒤돌아섰다.
“설영랑, 오셨어요.”
가령 부부가 설영을 맞이했다. 설영은 다과를 거절하고 곧바로 서재에 들어갔다. 잘 관리된 서재는 주인이 몇 달이나 자리를 비웠음에도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널찍한 책상에는 자하가 그간 모아댔던 서적들이 열 맞춰 정돈돼 있었다. 설영은 그중 한 권을 들고 대강 넘겨 봤다. 처음 보는 문자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범어梵語, 토번어吐蕃語, 당과 그 너머 서역에 대한 것들…. 아무 관련 없다고 생각했던 책들이 한 방향을 가리켰다. 자하는 서방으로 떠났다. 영객부에 드나들던 것도 그것 때문일지 모른다. 아무리 자하라고 해도 타국에 대해서는 잘 모를 테니까, 사신들과 교류하며 정보를 얻었을 수 있다.
“말 한마디 없이….”
설영이 중얼거렸다. 그가 아주 떠났다는 것을 확인하자 기분이 몹시 가라앉았다. 설영은 괜히 곡옥이 달렸던 자리를 만지작거렸다. 어디서 잃어버린 줄 알았더니, 자하가 작별 선물을 받아 간 모양이었다.
“…서방으로 가셨나요?”
문득 벽에 걸린 수월관음도가 눈에 들어왔다. 관음보살의 뒤쪽에 뜬 둥그런 보름달이 그의 눈처럼 금빛이었다. 순간 설영의 눈앞에 하얀 빛이 깜빡거렸다. 설영은 얼른 눈을 비비고 다시 봤다. 흰색에 가까운 은빛 기운이 공중을 부유하고 있었다. 공간에 남은 짙은 사념이 느껴졌다.
- 정말 성공할 줄은 몰랐는데… 곤란하게 됐어. 나는 유언을 제법 열심히 썼거든.
설영은 저도 모르게 대꾸했다.
“그게 할 소립니까?”
- 이 말을 들으면 설영랑이 화내겠지. 그게 할 소리냐고.
뜨끔한 설영이 입을 다물었다.
-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계속 ‘그것’을 없애기 위해 살아왔는데, 정작 그 후는 생각해보지 못했네.
- 뭘 위해 살아야 할까?
- 무엇이 사람을 살게 하나?
- 수천의 밤을 넘어 아침을 맞게 하나?
- 답을 찾지 못하거든…….
가르침을 받은 자들만 볼 수 있는 월계의 영기가 한 곳을 향했다. 설영이 황급히 그것을 쫓았다. 설영은 책상 구석에 있는 바둑판을 뒤집어 봤다. 반짝이는 은빛 글자가 흐릿하게 쓰여 있었다.
‘우리, 내기할래?’
자하가 남겼던 유언 중 하나임이 틀림없었다.
“낙서를 해 놔서 못 쓴다더니….”
바둑판 밑에는 곱게 접은 종이가 한 장 있었다. 당의 수도인 장안을 묘사한 그림이었다. 설영은 어릴 적 백산에게 들었던 것을 떠올렸다. 당의 서쪽에는 엄청나게 넓은 사막이 있어, 색목인들이 그곳을 건너 비단을 사러 온다고. 뿐만 아니라 깨달음을 구하는 승려들이 사막을 건너 천축으로 향하기도 한다고….
자하는 어쩌면 그곳을 통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떠난 지 몇 달이 지났으니, 벌써 도착했을 수도 있다. 설영은 종이를 만지작거렸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면 평생 몰랐을 텐데, 왜 굳이 단서를 남겼을까. 분명 바라는 게 있어서겠지.
그렇다면, 상선.
“…내기를 할까요?”
긴 여행의 끝에서 답을 찾아 돌아온다면 당신의 승리,
먼 세상의 끝에서 당신을 찾아낸다면 나의 승리인 것으로.
天竺紀行
설영랑에게
안녕, 설영랑. 그동안 잘 지냈는지 모르겠네.
지금쯤 내가 떠났다는 사실을 알았으려나?
아무 말 없이 훌쩍 떠나버린 건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당 사신들의 일정이 갑자기 앞당겨졌었거든.
뭐, 그 이유가 아니라도 말 없이 떠났을 거야. 너도 알다시피, 인사란 것이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잖아? 결국 이런저런 명분과 부탁들을 짐처럼 둘러메고 성대한 박수를 받으며 떠나야 했을걸. 그런 건 딱 질색이거든.
설영랑은 천축국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 막연하게 불교의 발상지라거나, 사막이라거나…. 이런 것 말고. 밀교의 근원이라거나, 제 꼬리를 문 뱀이라거나… 이런 것 또한 말고.
무엇이 되었든, 설영랑의 상상과는 아주 다른 풍경일 거야. 자신해.
천축이라 하면 흔히들 사막을 생각하지. 당의 서쪽에 있는 거대한 사막 지대를 지나고, 눈에 덮인 산맥을 굽이굽이 건너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일까. 하지만 그거 알아? 수십 년 전, 고국의 어떤 고승께서 바닷길로 천축엘 갔다고 하더군.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에 부는 어떤 바람을 타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뿐더러, 훨씬 빠르고 안전하다지 뭐야.
그런고로, 설영랑. 난 지금 천축으로 가는 배 위에 있다.
놀랐나? 황당해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군. 직접 보지 못해서 안타까울 따름이야. 출항한 지 꽤 많은 시일이 흘렀어. 나도 이제 항해에 제법 적응하여, 구석에 앉아 붓을 놀릴 정신머리가 생겼지. 그래서 설영랑에게 편지를 쓰기로 한 거야.
뭐, 어차피 전해질 일은 없겠지만…….
텁텁한 공기를 마시고 짙푸른 망망대해를 떠돌며 상념을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종이를 펴자마자 네 생각을 해 버리다니! 앞으로 갈 길이 구만리 같아 암담하기만 하다.
이제 어떻게 될까.
앞서 간 어느 선배님들처럼 나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일체의 고뇌를 내려놓고 진정한 “삶”을 찾아낼 수 있을까?
…이걸 또 설영랑에게 묻고 앉았어. 나도 참 문제라니까.
이만 줄이도록 하지. 몸 건강히 잘 지내.
추신.
온이는 네게 맡기도록 할게.
월계 마지막 후배의 이름과 명예를 걸고 잘 돌봐주도록.
밥을 굶기면 백운선원을 먹어치우려 들지도 모르니까 끼니는 잘 챙겨줘.
…물론 네가 한 밥은 빼고.
“설영아. 정말 갈 거냐?”
“예. 반드시 상선을 찾아뵙고 모셔 오겠습니다.”
설영이 흑색 피풍의를 한껏 여미며 대답했다. 설영의 짐 사이로 금편을 몇 개 더 쑤셔 넣은 효월이 손을 잡아 왔다. 백언 역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설영에게 말했다.
“정말 상선께서 천축으로 가신 게 맞느냐? 괜한 걸음을 하는 게 아니고?”
송옥도 거들었다.
“혹시 자운랑의 부탁 때문이라면 거절해도 좋아. 이 형님이 뒤를 봐주마.”
“형님들……!”
백언, 송옥, 그리고 효월. 소년 시절부터 함께했던 세 사람의 진심 어린 걱정이 느껴졌다. 설영은 저도 모르게 차오른 눈물을 소매로 문질러 닦았다.
“아닙니다. 상선께서 오직 저만 알아볼 수 있는 단서를 남기신 데는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렇더라도 천축국은….”
송옥이 말끝을 흐렸다. 천축국은 너무 멀고, 길 또한 험하니 걱정된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설영은 이미 각오를 다졌다. 다름 아닌 그의 부탁이었으므로.
멀리서 낭도 하나가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당으로 가는 사신단이 출발하려는 모양이다. 설영은 세 형님들에게 절을 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설영은 가벼운 걸음으로 백운선원의 정문을 빠져나갔다. 문득 돌아보니, 하얀 눈을 덮어쓴 나무들 사이로 증축한 건물이 빼꼼 보였다. 작년 초 자하가 보냈던 용돈으로 수리한 건물이다. 설영은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여 왕경으로 향했다.
서라벌을 떠나 북으로 향한 지 몇 날이 지났다. 사신 일행은 당항성黨項城에 도착했다. 당항성은 당으로 향하는 주로 교역로 중 하나로, 교역선들이 오갈 때나 당 사신들이 귀국할 때도 이곳을 거쳐 하남도河南道의 등주登州로 향한다. 신분패를 요구하는 듯한 목소리에 설영은 허리춤에 단 것을 풀어 보였다. 관리는 음양패와 더불어 짤랑거리는 금편을 흘끗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널판을 밟고 배 위에 오르자 선체가 크게 출렁였다. 설영은 잽싸게 몸을 기울여 균형을 맞췄다. 작은 눈송이가 때때로 바람에 날렸다. 첫 일정부터 순탄치 않을 성싶었다.
”어떤 생각으로 먼 길을 떠난 건지 모르겠지만….”
바람이 한 번 크게 불었다. 어깨에 두른 피풍의가 한 차례 펄럭였다. 옅은 백단향이 코끝을 스쳤다.
”당신은 돌아와야 해요.”
출항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잿빛 하늘을 가르고 거친 파도를 넘어, 뱃머리는 만리타향을 향해 갔다.
설영랑에게
안녕, 설영랑. 잘 지내고 있나?
내가 남긴 편지는 읽었는지 모르겠네. 설영랑이라면 알아차릴 거라고 생각했어. 전에 직접 물어보기도 했잖아. 모든 일이 끝나면 뭘 하고 싶냐고. 그때 내가 했던 대답을 기억한다면 금세 이해했겠지.
설마하니 나를 쫓아 천축엘 오진 않을 테고…. 그냥, 나는 잘 있으니 일말의 걱정이나마 접어 두었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설영랑은 어때? 오해를 풀고 복직했으니 아주 날아다니겠지? 그 모습을 못 본다고 생각하니 조금 아쉽기까지 하네.
설영랑. 나는 이제 천축국으로 들어왔어. '천축국'이라고 해도, 하나의 통일된 나라를 의미하는 건 아냐. '천축'이라는 이름 아래 여러 소국들이 자리 잡고 있지. 마치 고대 마한 지역에 여러 소국들이 모여 있었던 것처럼.
광주에서 배를 타고 한참 남쪽으로 내려간 후, 방향을 틀어 서쪽으로 향하니 곧 육지가 보이더군. 항해하는 동안 친해진 사람들 중 대식국의 사람이 있어, 그 일행과 함께 천축을 둘러보기로 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폐사리국吠舍釐國이라는 나라였다. 땅에 발을 딛자마자 더운 기운이 훅 밀려오는 걸 보니, 생각보다 더 힘든 여정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지. 폐사리국은 우리와는 달리 산이 없고 몹시 평평하여 사람들이 모두 농사를 짓는다. 날이 좋고 토지가 비옥하니 거두는 것이 많아 사람들도 제법 풍족하게 살더라. 또한 풍경이 매우 아름다워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 전 이곳을 지나며 감탄했다고도 해.
다만, 풍습이 우리와는 아주 달라, 옷 한 자락 걸치지 않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알고 보니 이 지역은 불교와 아주 비슷하지만 성질이 다른 종교를 믿는다더라고. 하늘을 옷으로 삼는다나? 우리와는 다른 독특한 문화이지. 나야 뭐 그러려니 했다 쳐도 설영랑이 봤다면 뒤집어지지 않았을까. 함께 왔다면 아주 재미있었을 텐데. 설영랑의 부재가 정말 아쉬운 순간이었어.
폐사리국의 여관에서 서너 밤을 묵은 후 육로를 따라 북쪽으로 갔다. 세 보지는 않았지만 한 달 가량 걸린 것 같아. 그리고 부처님이 열반에 든 곳, 구시나국拘尸那國에 도착했지. 이곳은 본디 매우 번화하고 사람이 많이 살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황폐해진 지 오래다. 부처님이 열반에 든 곳에 탑을 세워 놓았는데, 그 탑을 관리하는 사찰 하나와 주변의 몇 가구가 전부였을 정도야. 하지만 매년 8월이 되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불공을 드린다고 해. 나도 그 장관을 보고 싶었지만… 그때쯤이면 파사국이나 대식국을 구경하고 있지 않을까?
살아 있다면…. 그래, 살아만 있다면 언젠가는 그 모습을 구경할 수도 있겠지.
원한다면 데리고 가 줄 수도 있어. 아이들은 축제를 좋아한다지 않아. 그러니 설영랑도 분명 좋아하겠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설영랑은 아이잖아?
…이쯤 되면 받아치는 목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들리는 것은 새 울음뿐이니 퍽 지루하네.
설영랑의 장기인 주술이라도 써서 내 꿈에 나와 보는 건 어때?
가능할 리도 없거니와, 해 주지도 않을 테지.
그냥 해 본 말이야.
잘 지내.
험상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항해는 매우 순조로웠다. 교역선은 별 탈 없이 등주에 도착했다. 설영은 신라인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하루를 묵은 후 곧바로 장안長安으로 향했다. 장안은 당의 수도인지라 가는 길은 몹시 평탄했다. 다만 모래 섞인 바람이 때때로 불어와 시야를 가려서 매우 불편했다. 눈은 따갑고 목은 텁텁했지만, 설영은 그 모래바람이 싫지 않았다. 자하 또한 어느 사막을 걷고 있을 것이다. 그곳의 수천수억의 모래알 중 하나가 이 바람에 실려 왔을지도 모르지 않나. 그렇다면 당신과 내가 아주 다른 세계에 있는 것은 아닐 테니까.
”반나절 후면 장안에 도착하오.”
“아, 그렇습니까. 대인과도 헤어질 때가 됐군요.”
“아쉽군그래. 랑처럼 빠르게 백화白話를 익히는 이도 드문데.”
사신 일행을 따르는 역관 하나가 설영에게 말을 붙였다. 그는 심심풀이로 설영에게 당의 언어를 가르쳤는데, 설영이 당어를 빠르게 익힌다며 매번 놀라곤 했다.
”찾는 사람이 있어 장안에 간다고 했나?”
“예. 그 사람이 장안에 들렀던 것 같아, 저도 그곳에 가서 정보를 모으려고 합니다.”
아무쪼록 별 탈 없길 바라네. 요즘 장안도 뒤숭숭해. 역관이 말고삐를 당겨 속도를 냈다. 앞선 행렬이 피워낸 흙먼지가 시야를 뿌옇게 가렸다. 그 틈으로 장안성의 웅장한 형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왕경의 몇 배나 되는 성벽이 큰 도시를 휘감고 있었다. 병졸들의 검문을 지나 쭉 뻗은 대로를 따라가자, 황성의 입구인 주작문朱雀門이 보였다. 설영은 사신 일행에게 눈인사를 하고 말머리를 틀었다. 대로의 양옆으로 바둑판 모양의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설영이 향한 곳은 장안의 시장, 그중에서도 서시西市였다. 역시 왕경의 것보다 규모도 크고 훨씬 더 휘황찬란했다. 서시는 상업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사막을 통과해 서방으로 가는 관문이기도 해서, 장안을 지나 천축으로 가려면 그곳에 반드시 들러야 했다. 당의 서시까지 와 장사를 하려는 신라인들은 그리 많지 않아서, 수소문해 보면 자하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성싶었다. 설영은 역관이 소개해 준 객잔에 들어가 방을 잡았다. 손짓 발짓을 동원하여 식사와 따뜻한 물을 주문하고 짐을 풀자 그간의 긴장이 눈 녹듯 녹아내렸다.
누각의 종소리가 묘시卯時를 알렸다. 설영은 진즉 일어나 이불을 걷고 점원이 가져다준 아침상을 받았다. 희멀건 잣죽과 독특한 향신료로 양념한 채소, 동파육 몇 점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빈말로도 맛있다고 하기는 힘든 음식들이었지만, 설영은 배를 채우는 데 의의를 뒀으므로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접시를 비웠다. 반지를 돌려 온이를 꺼냈더니, 곤히 자고 있어서 다시 집어넣었다.
설영이 향한 곳은 서시의 검역소였다. 외국에서 들어온 상품들을 검사하고 관리하는 곳이다.
”사람을 찾고 있다. 반년쯤 전 이곳을 지나간 신라인이 없는가?”
한가해보이는 하급 관리 하나를 잡고 묻자, 눈을 꿈뻑이며 대강 대답을 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걸 일일이 다 기억하겠수?”
그 말도 맞다. 하지만 이러면 어떨까?
설영은 은편을 하나 꺼내 관리의 소매에 슬쩍 찔러넣었다. 그의 표정이 바뀌었다.
”특징을 말해 주면 기억할 수 있겠나?”
“…어디 한 번 말해 보시오.”
“키가 크고, 얼굴이 준수하며 태도가 오만한 이다.”
“그런 사람은 지금 밖에 나가도 한가득할걸.”
“계속 들어라. 아마도 흑색 의복을 입었을 테고, 선도를 수련하여 눈에서 금빛 광채가 난다. 마치 어둠 속 범처럼. 이곳을 거쳐 천축국으로 향했을 텐데….”
흠…. 관리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눈을 감은 채 수염을 쓰다듬었다. 기억을 더듬는 듯했다. 설영은 얌전히 서서 기다렸다. 몇 분 후, 그가 손뼉을 짝 치며 눈을 떴다.
”아, 기억났네! 어쩐지 발음이 독특하더라니, 외국인이었구먼. 맞아. 눈이 황금처럼 빛나는 남자 하나가 반년쯤 전 이곳을 찾아온 적 있었지.”
“그럼….”
“하지만 서역으로 가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해. 토번의 승려들이니 대식국의 상인이니 하는 자들과 몇 마디 나눈 후 곧장 이곳을 떴네. 그 사람이 머물렀던 객잔의 주인이 내 친구거든. 잘생긴 데다 잘 웃고, 돈도 잘 써서 아가씨들이 참 좋아했다나.”
“객잔의 이름이?”
“하, 그, 뭐더라…. 서역 상인들이 주로 오가는 곳이라, 이름도 범어梵語로 지었는데… 발음이 어려워서 원.”
관리가 괴상한 소리로 혀를 풀었다. 너반아? 닐빈아? 아니, 이게 아니라… 그렇지. 그래.
”니르바나निर्वाण. 그런 이름이었다.”
설영랑에게
설영랑, 잘 지내고 있나? 지금쯤 왕경은 봄의 초입이겠지. 내가 마지막으로 맞이했던 봄은 어땠더라? 산수유, 매화, 목련, 나리꽃…. 그래. 그런 것들이 한창 망울을 터트리는 모습이었어. 다만 그것들을 봤을 때의 심상이란 도무지 기억을 할 수가 없군. 아마도 내가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겠지. 다시 꽃구경을 간다고 해도, 전과 같은 감상을 내놓긴 힘들지 않을까.
뭐, 왕경은 왕경이고. 내가 지금 여행하고 있는 곳은 천축국의 남부다. 편의상 남천축국南天竺國이라고 부를게.
남천축.
무슨 뜻인지 알겠나?
매우 덥다는 뜻이지!
어지간하면 복식을 제대로 하는 나조차 겉옷을 벗어던질 정도로 덥다. 그런 탓인지 천축국의 사람들은 대체로 아주 간소히 옷을 입는다. 천 한 조각을 몸에 대충 두르는 것이 끝이야. 물론 나도 ─어차피 날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으니─ 그런 천 쪼가리나 걸치고 싶지만은… 설영랑도 알다시피 내 몸이 그리 보기 좋은 몰골은 아니잖아? 적게는 화랑 시절의 상처부터 효월랑 대신 화살에 맞았던 상처까지. 흉의 기원을 해명하느니 가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설영랑은 가자, 혹은 가야라는 것을 본 적이 있나? 범어인데, 음을 따서 쓰면 迦耶이고 범어로는 गज라고 써. 가자는 소를 닮았고, 몸은 크고 높으며, 꼬리만 석 자에, 털은 없고 코가 몹시 긴 짐승이다. 그것 참 기이하고 우습게 생겼지. 무슨 일이 있어 남천축국의 왕이 지나가는 모습을 봤는데, 허옇고 덩치 큰 짐승 위에 올라앉아 있더군. 그 뒤로 비슷하게 생긴 작은 놈들이 줄을 지어 따라가는 모습이 장관이었지. 그것들의 이름을 물으니 가자라고 답해주더군. 듣자 하니 이곳 왕은 비슷한 짐승을 팔백 마리나 갖고 있다고 해.
나는 생각했지. 저런 덩치들을 먹이려면 돈이 얼마나 많이 들까? 역시 나는 덩치도 작고 밥도 적당히 먹는 설영랑이나 기르는 편이 좋겠다. 물론 설영랑이 팔백 명이나 있으면 그건 그것대로 참 곤란하겠다만….
일행이 이곳 상인에게 볼일이 있어 며칠간 묵어 가기로 했다. 나는 그 동안 사람들에게 물어 용수보살龍樹菩薩이 창건했다는 절을 구경했어. 과연 사람이 지은 것이 아니라는 말답게, 험한 산을 뚫고 기둥을 세워 만들었더군. 지금은 비록 황폐하여 몇몇 사람만이 오갈 뿐이지만, 한창 때는 삼천 명의 승려들을 공양하고도 남을 정도로 기세가 대단했다고 하더라.
설영랑도 알다시피, 용수보살은 본디 방종한 생활을 하다가 불교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얻었지 않나. 그분이 남긴 깨달음이 바로 공空이지. 너와 나를 비롯한 삼라만상의 전부는 인因과 연緣으로 인해 생겨났고, 다만 그것이 변할 뿐 고정된 실체란 것은 없노라고. 하여 자신만의 성질, 즉 자성自性을 지닌 존재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다른 것들과 의존하여서만 만물은 존재한다고.
어때. 머리로는 누가 모르겠나 싶지만, 마음 깊이 와닿는다고 생각해?
나는 잘 모르겠네. 그러니 아직도 깨달음을 찾아 구천을 떠도는 거겠지.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나?
충직한 신하라면 임금을 위해 살아갈 것이고, 충실한 종교인이라면 신을 위해 살아가겠지.
나는 신하로서도 종교로서도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생멸하며 변화하는 만물의 가운데서
내 홀로 변하지 않는 몸을 이끌고
줄 끊어진 구슬처럼 빛을 잃은 채
야차의 칼날이 스치기만을 기다려야 하나?
아니면…….
종이 위를 오가던 손길이 멈췄다. 모를 적셨던 먹이 뚝뚝 떨어져 흰 종이에 검은 자국을 만들었다. 자하가 작게 침음했다. 문득 어떤 생각이 벼락처럼 내리꽂혔지만, 그것을 차마 종이에라도 쓸 수는 없었다. 자하는 붓을 내려놓고 종이를 아무렇게나 접어 짐 속에 쑤셔 넣었다. 글자가 번지든 말든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보여줄 생각도 없거니와, 다시 만날 수 있을지조차 미지수니까.
투박한 벽돌벽에 난 창 너머로 부연 빛이 쏟아졌다. 만리타향에서도 해는 떠올라, 낯선 여관방의 모습이 차츰차츰 눈에 들어왔다. 한참 전에 태웠던 백단향의 재가 파삭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자하는 손에 쥔 곡옥을 몇 번 굴리며 정신을 가다듬은 후, 다시 붓을 들었다.
아무튼.
나는 지금 이라바티伊羅鉢底라는 강을 따라 올라가고 있다. 천축국의 중앙부를 지나고 있는 셈이지. 일행의 말로는 보름쯤 후에 작은 사막을 통과하게 될 거라고 하더군. 말이 좋아 '작은 사막'이지, 매해 고비와 타커라마간을 오가는 사람들의 기준이니 마음을 단단히 먹을 필요가 있을 것 같아.
그럼 살아서 또 소식 전할게.
잘 지내.
”어서 오세요!”
객잔의 문에 달린 풍경이 딸랑이는 소리를 냈다. 가게 안의 눈들이 전부 문을 향했다. 설영은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며 객잔 안으로 발을 들였다. 종업원 하나가 설영에게 다가왔다.
”식사세요, 숙박이세요?”
“그런 게 아니라, 물어볼 게 있어서….”
“외국에서 오셨나요? 일단 앉으세요.”
수완 좋은 종업원에게 말려든 설영은 아무 의자에나 털썩 주저앉았다. 둥그런 책상 위에 붉은 비단을 씌운 차림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뒤집어 보니 여러 언어로 무언가가 쓰여 있었다. 지렁이처럼 구불거리는 글자들 가운데서 설영이 읽을 수 있는 것은 한자 뿐이었다.
”적멸…?”
가게 이름이었다. 자하가 이곳에 머무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잃어버린 검령의 이름이니 홀리듯 들어왔겠지.
이름 외의 것들은 평범했다. 설영은 양고기 만두와 술을 한 병 주문했다. 항상 그렇듯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뭔가 주문을 해야 종업원이나 주인이 말을 들어줄 것 같아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향신료 냄새가 강렬했다. 설영은 코를 몇 번 찡긋거리고는 젓가락을 들어 만두를 입에 넣었다.
“식사는 입에 맞으세요?”
역시나. 반쯤 먹으니 종업원이 주변을 알짱거리기 시작했다. 설영은 술을 한 병 더 주문하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 반년쯤 전 이곳에 묵었던 사람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반년이나요? 어제 일도 오락가락하는 판에, 그렇게 오래된 걸 어떻게 기억하겠어요.”
“정말 모릅니까? 남자이고, 키가 나보다 큰데, 외양이 준수하고 눈에서 금빛이 나는 사람입니다.”
“금빛… 아!”
종업원이 짧은 감탄사를 뱉었다. 뭔가 아는 눈치였다. 뿐만 아니라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손님 몇몇도 대놓고 알은체를 했다. 곧 설영의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뭐야? 당황한 설영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풍채 좋은 서역인들까지 몰려들어 빠져나갈 구석이 보이지 않았다. 그 광인은 대체 뭘 하고 다닌 건지! 설영은 잔뜩 긴장하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혹시, 그, 사람이, 뭔가… 잘못을……?”
설영은 기본적으로 자하의 정신머리를 신뢰하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 어땠나? 자기 주머니에 돈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 채 가게에 들어와서, 결국 설영이 대신 내 주지 않았던가.
…설마 이번에도 무전취식을 한 건 아니겠지.
하지만 설영의 생각과는 달리, 사람들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객잔에 붙어 있던 잡귀를 싹 걷어 줬지!”
“범어에다 토번어까지 아주 잘하더라니까!”
“게다가 생긴 건 또 어떻고요? 떠나지만 않았어도 잘 …해서 아주 눌러앉게 만드는 건데.”
“그럴 재주는 있고?”
뭐라고요? 주인의 핀잔에 종업원이 눈을 흘겼다. 설영은 익숙하지 않은 언어들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말했다.
”어디로 떠났는지는 모르나요.”
“그러게요. 처음에는 사막을 건너 서역으로 간다는 것 같았는데… 상인들과 몇 마디 나누더니 짐을 꾸려서 같이 광주廣州로 떠나던데요.”
“광주?”
설영이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광주는 영남도嶺南道의 남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당의 대표적인 국제 무역항이다. 외국으로 오가는 교역선은 대부분 그곳에 정박한다.
”천축까지 해로로 가는 방법도 있습니까? 보통 이곳을 거쳐 서쪽으로 간다고 들었는데요.”
“저희도 잘 모르죠. 이럴 게 아니라, 그때 그 상인들에게 직접 물어 보면 어때요?”
종업원이 벽에 걸어 둔 책력을 뒤적거렸다. 팔락팔락 몇 장을 앞으로 넘기더니 돌아와서 말했다.
”며칠 후면 장안으로 돌아올 걸요! 그분들은 매번 저희 객잔에 묵으니까, 기다리다 보면 만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난 이미 방을 잡았는데….”
“식사만 하셔도 되니까요!”
설영은 허리춤의 전대를 만지작거렸다. 돈은 많았다. 바로 광주엘 가 볼 것인가, 며칠 기다렸다가 상인들의 말을 들어 보고 움직일 것인가.
고민하던 차에, 건너 건너 테이블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대체로 자하를 주제로 한 대화였다. 그 중 귀에 걸리는 단어들이 있었다.
”왜, 반년쯤 전, 어느 집 노비 하나가 억울하게 죽은 일이 있지 않나. 그 영혼이 귀신이 되어 주인 내외를 진득하게 괴롭혔던 일 말일세. 그때 그 사람이 나서 깔끔하게 해결해 줬지.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야. 귀신이 봉인된 영패를 부숴버린 줄 알았더니, 객잔 뒤뜰로 몰래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공중에 금빛 기운으로 부적을 그려 영패와 함께 태우더군. 제사를 지내 준 거지. 왜 그렇게까지 하나 싶어 넌지시 물어보니 웃으며 말하지 않았겠나.”
“죽음이 있었으면 반드시 진혼을 해야 한다….”
“깜짝이야!”
저도 모르게 끼어든 설영이 깜짝 놀라 어깨를 파드득 떨었다. 얘기를 하던 남자가 '댁은 왜 놀라고 난리?'라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설영은 머쓱해져서 괜히 남은 술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진이란 곧 진정시킨다는 의미지. 영혼을 달래 고이 잠들게 하는 거야….' 분명 그랬을 겁니다.”
“맞긴 한데…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아나?”
“그건….”
설영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새카만 어둠 속에서 그의 금빛 미소가 보이는 듯했다.
”…내가 그 사람에게 했던 말이니까요.”
설영랑에게
안녕, 설영랑. 그간 잘 지냈나?
사막을 건너서야 겨우 붓을 잡을 틈이 나는군. 정말 험한 여정이었어.
전에 말했다시피, 우리 일행은 보름쯤 후 사막의 초입에 들어섰다. 걱정된다고 하긴 했지만, 나는 내심 기대하고 있었거든. 작열하는 태양과 끝없는 모래언덕 같은 것들을. 하지만 우리가 가는 길은 대개 자갈밭이더군. 드문드문 초목도 보이고, 가끔 비도 내렸다. 노숙을 드물게 할 정도로 신세 질 마을도 많았어. 모래틈 사이로 얕은 뿌리를 내린 식물들, 쥐나 토끼나 여우 같은 동물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어.
모래사막은 없느냐고 일행에게 물어보니, 크게 웃으며 '그런' 사막은 이곳보단 타커라마간에서 볼 수 있다고 하더라. 사방이 모래인 만큼 지형도 수시로 바뀌는데다, 온종일 똑같은 풍경뿐이라 방향도 가늠하기 어렵다더군. 그래서 솜씨 좋은 안내인이 꼭 필요하다고 해.
그 말을 듣자마자 왜 네가 떠올랐는지 모르겠어.
아마 귀시에서의 기억 때문이 아닐까. 어린 설영랑 ─춘광이 말이다─ 이 온 힘을 다해 부르자 결국 백송월과 백산 공이 이끌려 오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말이다. 네가 온 힘을 다해 나를 불러 준다면, 광막한 황야의 어딘가에서도, 어느 사구砂丘의 반편에서도, 설사 세상의 저편에서 헤맬지라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고 너를 찾아갈 수 있을 거야.
설영랑에게
잘 지냈나, 설영랑?
먼젓번 네게 썼던 편지를 봤는데, 이것 참 봐줄 구석 없이 가관이더군. 아무래도 사막이란 곳엔 사람을 감상적으로 만드는 뭔가가 있나 봐.
하긴 그렇지. 우리나라에는 산이 매우 많아 어디를 둘러봐도 높고 낮은 언덕배기의 능선이지 않나. 하지만 사막은 그런 것이 없어 어디를 둘러봐도 일자로 뻗은 지평선이 보이지. 그곳에서 뜨고 지는 해를 볼 때면 '내가 아주 다른 세상에 와 버린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들고는 했으니….
사막을 건너서 또 한 달 남짓 북쪽으로 갔다. 이곳은 본디 서천축국西天竺國 왕의 치하에 있었으나, 지금은 대식국大食國이 침략하여 총독을 두고 통치하는 중이라고 한다. 동행인 대식국 사람의 말을 들어 보니, 그들 나라는 서천축을 기점으로 세력을 넓혀가는 중이라고 하더라. 조만간 몇 번의 전쟁이 더 있을지도 모르니 어서 북천축을 건너 토번까지 가는 게 좋겠다는 말을 했지.
시장을 지나는 중 노랫소리가 들리더군. 재주를 팔아 먹고사는 어린아이 하나가 전통가요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었어. 그 꼬질꼬질한 행색을 보니, 맙소사, 또 누군가가 생각나지 않았겠나. 그래서 갖고 있던 은전을 하나 앞에 뒀지. 일행은 다소 못마땅한 눈치였지만 말리지는 않았어.
고향이 다가오니 다들 들뜬 눈치더군. 나는 좀 더 느긋하게 둘러보고 싶었지만, 당분간 그러긴 힘들 것 같네. 토번쯤 가야 한숨 돌릴 수 있을 것 같아.
그럼 또 소식 전할게.
잘 있어, 설영랑.
“그런데 자네는 왜 그 사람을 찾는 건가?”
두 손으로 잔을 감싸 쥐고 술을 홀짝거리던 설영이 주인을 봤다. 뭐 그런 게 궁금하냐는 듯한 눈빛에 주인이 부연 설명을 했다.
”도망친 죄인이라도 되나?”
“그럴 리가요.”
“집 나온 부잣집 아들이라거나?”
“아닙니다.”
“생전 광마로 불렸는데 무림공적이 되어 쫓기다 점소이 시절로 회귀해서….”
“저기요. 맞힐 생각 없죠?”
둘러 앉은 사람들의 추측은 전부 빗나갔다. 설영은 옆자리에서 주절거리는 소리를 대충 흘려들으며 젓가락을 움직였다. 그때, 쟁반을 옆구리에 낀 채 기둥에 기대어 있던 종업원이 말했다.
”혹시… 그렇고 그런 사이라서?”
“헉.”
순간 정적이 흘렀다. 설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뒤늦게 이해하고는 붉어진 얼굴로 소리를 빽 질렀다.
”아닙니다!”
“아니면 아닌 거지 왜 소리를 지른담….”
툴툴거린 종업원이 주방으로 총총 걸어갔다. 설영은 우물거리며 변명을 했다.
”그 사람은… 무언가를 찾으러 천축으로 갔습니다.”
“스님처럼 보이지는 않던데.”
“아니요, 불법이 아니라… 좀 더 근원적인….”
“수행이라도 떠난 건가? 그런 사람을 왜 굳이 찾으려 하나?”
“그야, 다들 기다리니까, 그 사람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러게? 설영은 말을 하면서도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하는 따지자면 수행을 떠났다고 볼 수 있었다. 팔 년, 이제는 십 년 전이 되어버린 그날, 왕경을 떠난 자하를 누가 감히 찾아다녔겠는가.
그렇다면 돌아가야 하나?
아무래도 그럴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기보다도, 그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기보다도,
제가 그를…….
그 때 객점의 문이 열리더니 상인 한 무리가 들어왔다.
”주인장, 우리 왔소! 하, 급히 오다 보니 뱃가죽이 등짝에 붙을 것 같군.”
주인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돌처럼 굳어버린 설영을 쿡쿡 찔렀다.
”마침 잘 됐군. 자네가 기다리던 사람들이 왔네.”
설영랑에게
안녕, 설영랑. 잘 지냈나?
붓을 드는 것도 정말 간만이로군. 거의 석 달만이야. 일행이 길을 재촉하여 바쁘게 이동해야 하기도 했고, 북쪽으로 갈수록 산이 많고 길이 험해져서 짐을 풀기조차 어려웠던 탓도 있어. 나는 지금 토번에 도착했다. 북천축국과 여러 소국들을 지나왔는데, 그 중 절반은 대식에, 절반은 토번에 복속되어 있는 듯하더군. 그 탓인지, 아니면 날씨가 추운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북천축은 여태껏 지나온 나라들과는 풍습 같은 것들이 완전히 달랐다. 언어, 의복, 사는 곳까지 거의 모든 것이. 북천축 사람들은 대개 천막에서 산다. 아마 유목을 하며 짐승을 키우기 때문이겠지. 토번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가옥이 없어져, 왕부터 백성까지 모든 사람들이 천막에서 산다. 나도 천막을 하나 차치하고 있는데, 짐승 가죽을 덧댄 것인지 고지대의 한풍이 들어오지 않아 매우 따뜻하게 지내고 있지. 원래는 바닥에 구덩이를 파고 지푸라기를 깔아서 자지만, 나는 웃돈을 더 얹어서 그럴싸한 침상을 빌렸다. 역시 돈으로 안 되는 건 없는듯해.
설영랑은 내가 준 피풍의를 팔았으려나? 내가 떠날 때까지만 해도 백운선원 거처에 고이 모셔둔 것 같던데. 옷은 시간이 지나면 가치가 떨어지니까 팔 테면 빨리 팔아치우는 편이 좋을걸. 설마하니 걸어 두고 보며 내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 테고….
이제 와서는 무슨 상관인가 싶네. 유품이 될 줄 알고 넘겼는데, 아직도 이렇게 잘 살아 있다니.
다시 여행 이야기를 하자. 나는 이곳에 며칠 더 머무르게 될 것 같아. 토번은 아주 척박한 땅이야.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눈 덮인 산과 얼어붙은 계곡뿐이다. 그래서인지 저장식품이나 향신료, 기름 같은 것들이 좋은 가격에 팔린다더군. 나와 같이 다니는 상인들은 본국으로 들어가기 전 토번에서 남은 물건들을 죄 팔고 갈 모양이야. 오자마자 시장으로 가 물건을 꺼내놓기 시작하더라.
그 동안 마을을 빙 둘러봤지. 나는 대식국의 상인과도 토번의 사람들과도 다르게 생겼으니, 몇몇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더군. 그들과 대화를 좀 해 봤는데, 이 마을에 몹시 신통한 주술사 ─우리네 무당과 비슷한 듯해─ 가 있어 별의 기운을 읽고, 사람의 마음을 꿰뚫으며, 미래를 점칠 수 있다고 하더라.
흥미롭지 않나?
내가 또 이런 건 못 참지.
나는 곧장 사람들에게 안내를 부탁했다. 마침 중요한 의식이 얼마 전에 끝나서 한가하다고 하더군. 그가 사는 천막은 특별히 외진 곳에 있었는데, 어떻게 한 것인지 대낮에도 안이 밤처럼 컴컴하여 불을 밝혀야 형체가 보일 정도였다. 주술사는 얼굴이 까맣고 머리가 하얀 노인이었어. 폭삭 삭은 데다 목소리도 쉬어서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구분하기 어렵더라.
아무튼 그 사람이 나를 빤히 보더니 대뜸 호통을 치지 뭔가. 네가 구하는 것은 동쪽에 있을진대 뭣 하러 이런 곳까지 와서 헤매느냐. 네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다…. 라고.
황당하지 않나? 그래서 되물어 봤다. 나는 동에서 온 것이 맞지만, 도무지 내가 원하는 답을 구할 수 없어 이 먼 길을 왔노라고. 당신은 내 질문에 답을 해 줄 수 있느냐고.
그러니 또 화를 내는 것이 아닌가.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주제에 빙빙 돌아 여기까지 도망쳤다나….
아무튼 그렇게 한바탕 혼이 난 후, 천막을 걷고 나오려니까 그 사람이 그러더라.
'척박한 대지에도 싹을 틔우는 식물이 있어, 정성 들여 가꾸면 숲이 되는 법이다.'
이건 또 무슨 뜻인지……. 다시 물어보려 했으나, 그는 이미 눈을 감고 제 세계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그냥 돌아왔지. 마침 일행들이 장사가 잘 됐는지 술판을 벌이고 있더라. 나도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 맥주를 얻어 마셨다. 톡 쏘는 것이 특이했어. 듣기로는 이 곳의 보리가 고지대에서만 자라는 종이라 맛이 달라서 그렇다고 해. 먼 길을 온 김에 한 병 챙겨가고 싶다고 하자, 상인들이 말리더군. 맥주는 쉽게 변질되니 대식국으로 가서 더 좋은 술을 소개해 주겠다는 거야. 나는 그러마고 했다. 사막을 건너는 동안 술병이 살아남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내일은 상인들과 함께 시장엘 나가보기로 했다. 흥정 없이 물건을 파는 비법을 가르쳐 주겠다더군. 신국의 상선으로서 배울 만한 것은 아니지만, 뭐 어떤가? 나는 도굴을 하는 법도 배웠는데….
이런, 시간이 너무 늦었네.
슬슬 불을 끄고 누워야겠다.
편지는 이쯤 줄일게. 잘 지내.
종이를 바른 문틈으로 희뿌연 빛이 새어들었다. 설영은 찌뿌둥한 등허리를 쭉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루종일 말을 타고 이동한데다, 잠자리조차 편하지 않으니 몸이 매우 피곤했다.
상인들이 이동하기를 기다려 합류한 설영은 그대로 몇 주간 이동해서 광주에 도착했다. 상인들과 헤어져 숙소를 잡은 설영은 몸을 씻고 눕자마자 잠들어 방금 일어난 참이었다. 마침 누가 문을 두드리더니 식사를 가져왔다는 말을 했다. 설영은 문 앞에 두고 가면 된다고 답하고는 천천히 옷을 입었다.
가벼운 아침을 들고 나가자 따뜻하고 습기 어린 바람이 불어왔다. 시간이 꽤 흘러 어느새 날이 많이 따뜻해졌다. 광주는 남부에 위치한데다 바다를 끼고 있어 더 그랬다. 설영은 짐을 챙겨 곧바로 항구로 향했다.
당의 대표적인 국제 무역항이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광주의 거리는 매우 화려했다. 장안에 비할 정도였다. 화려하게 칠을 한 건물들이 몇층 높이로 올라가 있었고, 가게마다 등을 달아 낮에도 불을 밝혔다. 설영이 도착했을 즈음에는 단오절 행사가 한창이라, 사람들이 넓은 강에 용머리로 장식한 배를 띄우고 경기를 하는 중이었다. 설영은 물살을 헤치고 나아가는 색색의 배들을 구경하며 서래초지西來初地로 향했다. 서래초지는 삼백여 년 전 달마대사가 광주에 도착했던 지역으로, 현재도 큰 포구였다. 몇 리 밖에서부터 큰 범선들의 웅장한 돛대가 하늘 높이 솟은 모습이 보였다.
포구 주변에는 객잔들과 음식점들이 줄지어 있었다. 설영은 그중 하나의 발을 걷고 얼굴만 들이밀어 물었다.
”실례합니다. 혹시 천축국으로 가는 배가 어디쯤 있는지 아십니까?”
“천축국으로 가는 배? 가는 배는 모르겠지만 오늘 하나가 도착해서 저어기 정박한 건 알지.”
“감사합니다.”
설영은 가게 앞에 놓인 좌판에서 나무로 깎은 불상 하나를 골라 계산했다. 짐 속에 대강 쑤셔 넣은 후 발길을 재촉했다.
얼마 후 설영은 가게 주인이 말했던 곳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막 입항한 듯한 범선 하나에 선원 여럿이 달라붙어 정비를 하고 있었다. 설영은 그들이 일을 마치고 내려오기를 기다렸다가, 한 무리를 붙잡고 물었다. 생긴 것이 다른 걸로 봐서 천축국의 사람들인 듯했다. 설영은 말이 통하든 말든 일단 질문을 했다.
”천축에서 오셨습니까?”
선원들이 저희들끼리 쳐다보며 뭐라 뭐라 말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출항이 언제일지 알 수 있을까요?”
그 말을 들은 상인들은 또 저희끼리 머리를 맞대며 열심히 의논 비슷한 것을 하더니, 설영에게 대답을 해줬다. 하지만 다른 언어인 듯 알아들을 수 없었다. 설영은 굴러다니던 나뭇가지를 주워 흙에 숫자와 월을 써 봤지만, 문자조차 다른지 말이 좀처럼 통하지 않았다.
그러자 먼발치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스님 하나가 다가와 통역을 자처했다.
”…하여, 지금은 뱃길보다 사막을 건너는 편이 더 빠르답니다. 바람의 방향이 반대라네요.”
“그렇습니까?”
“그들도 몇 달씩 머무르다가, 시월쯤 풍향이 바뀔 때 돌아간다고 말하네요. 돈을 내면 그때 자리를 남겨 두겠다고 합니다.”
“저는 지금 출발해야 해서…. 괜찮다고 전해 주십시오.”
설영의 말을 전해 들은 선원들은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다시 가던 길을 갔다. 설영은 소통을 도와준 스님에게 합장하며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자 스님이 익숙한 언어로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설영의 눈이 동그래졌다. 몇 달 만에 들은 고향의 말이었다.
“스님은 신국에서 오셨습니까?”
“어머니께서 신라방新羅坊 출신이십니다. 아버지는 본토 사람이고요.”
신라방은 설영이 당나라 땅에 도착했을 때 처음으로 머물렀던 곳으로, 당과 교역을 하며 먹고사는 상인들이 주로 사는 지역이다. 신라 사람들이 특히 많이 모여 사는 곳을 신라방이라고 부른다. 당의 본토에 위치하니만큼, 신라 사람이 당나라 사람과 혼인하는 일도 드물지 않게 있었다. 이 스님의 부모도 그런 모양이었다.
“아까 듣기로는 천축으로 가신다고요.”
“예. 배편이 있다는 소식을 들어 장안에서부터 내려왔는데, 다시 돌아가야겠네요.”
“이것도 인연이겠지요. 마침 제가 둔황敦煌의 막고굴莫高窟으로 가는 길이니 함께 하시겠습니까? 그곳에서 안내인을 구하거나 상단을 따라 사막을 건너면 될 듯합니다. 다만 장안엘 들러야 하는데….”
“그렇게 하시죠.”
설영은 등에 멘 짐을 추어올리고 앞서가려다가 아, 하며 뒤돌아섰다. 이 스님은 자기를 도와주었거니와, 앞으로도 같이 다녀야 했다. 설영은 스님과 잘 지내고 싶었다. 그래서 물어봤다.
"법명法名이 어떻게 되십니까?"
설영랑에게
안녕, 설영랑. 잘 지내고 있나?
왕경은 지금쯤 초가을이겠지. 세월은 화살과 같고 시간은 물과 같아 멈출 방도 없이 흘러만 가는구나. 나의 여정 또한 그러하여, 눈 덮인 산맥을 지나 드디어 대식국에 도착을 했다. 토번에서 바로 산을 넘고 사막을 건너 안서의 도호부로 갈까 했으나, 어느 새 일행과도 정이 들어 매정하게 홀로 떠나지는 못하겠더군. 무엇보다도, 설영랑 줄 술을 사기로 했으니까, 이 상선께서 굳이 먼 길을 돌아 대식과 파사엘 들르기로 했다, 이 말씀이야. 그러니 취향이 아니어도 감사합니다, 하고 세 번 절한 후 받도록 해. 알겠지?
토번의 경계에 펼쳐진 눈 덮인 산을 넘어 서쪽으로 한참 가니, 여러 소국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더군. 이들 대부분은 돌궐인이거나 호인胡人인데, 독립하여 있는 나라는 적었고 토번이나 당, 대식의 치하에 놓인 곳이 대부분이었다. 대식국에 들어가기 전 들른 파사국波斯國조차 지금은 대식에 먹힌 상태더군. 일행의 말을 들어 보니, 일전에는 파사가 대식을 지배하였으나 혁명─반란이겠지─을 일으켜 지금처럼 되었다고 한다.
이곳의 날씨는 북천축만큼 춥지는 않고, 남천축만큼 덥지도 않다. 하지만 매양 건조하여 숨이 막히는 공기야. 그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파사의 사람들은 예로부터 바다를 좋아했다더군. 그래서 배를 타고 해외로 나가는 사람이 많다고 해. 설영랑도 시장을 다니며 본 적이 있을걸? 눈이 녹색이고 코가 높은 외국인들. 그들이 대부분 파사나 대식의 상인들이거든.
그러다 보니 교역이 발달하여 항구가 무척 큰데, 물어보니까 이곳에서 바로 광주로 가는 배가 있다고 하더라. 하지만 항해는 이미 질리도록 해 봤거든. 돌아올 때는 배를 타지 않을 거야. 처음에 계획했던 대로 사막을 가로질러야 하겠지.
위험할 거라고?
하지만 나는 꽤 기대하고 있어. 황량한 모래와 바위의 세계에 홀로 서면, 무언가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막연히 그런 느낌이 들거든.
파사에서 또 얼마간 이동하여 산을 넘으니 대식국이었다. 이곳은, 뭐라고 할까, 황폐한 곳이다. 왜 그렇게 주변의 나라들을 점령하려 들었는지 알겠어. 그들의 선조가 정착했을 당시에는 초원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텁텁한 모래바람만이 불어올 뿐이다. 여기 사람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코와 입을 덮는 천을 쓰고 다녀. 나 또한 흰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돌아다니고 있지. 아무리 멱을 감아도 아침에 일어나면 이불에 모래가 한 줌씩 쌓여 있어. 아주 잘라 버릴까 싶다가도, 돌아갈 생각을 하면 차마 그럴 순 없더라. 물론 이제는 완전히 적응을 해서 밤낮으로 이부자리를 터는 일도 습관이 다 되었다.
일 년쯤 되는 시간 동안 같이 다녔던 상인들과 어제 작별을 했어. 그들이 말하기를, 나를 처음 봤을 때, 어느 한미한 가문의 공자님이 겁도 없이 가출했다고 생각했다더군. 지금은 어떠냐고 물으니 훌륭한 거렁뱅이 나그네 같다고 하네. 칭찬인지 욕인지 원….
그들에게 주류상을 소개받아 네게 줄 선물을 골랐다. 이곳은 과실주나 탄산이 들어간 발효주를 주로 마셔서, 가지고 사막을 횡단하기엔 적절하지 않다더라. 하여 대불림국大佛臨國에서 수입했다는 호박빛 명주를 하나 샀다. 처음에는 나무의 향이 나고, 끝으로는 부드러운 벌꿀 향이 입 안에 감돈다더군. 나 또한 손톱만큼 맛을 보니 퍽 괜찮은지라 그걸로 샀다. 지금도 몇 겹 종이와 천으로 감싸인 채 짐 한쪽에 잘 들어 있어.
돌아가면 네게 한 잔을 따라 주며 이야기를 해야지. 네가 보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 내가 보고 겪은 것들에 대해서.
그럼 너도 이야기해 줄 테지. 네가 보고 겪은 것들에 대해서. 내가 보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
설영랑.
이제야 말하지만, 나는 네가 두려웠다. 정확히는 너와 함께 있는 그 시간들이.
너는 나를 이상하게 해. 깊은 고뇌조차도 너와 잡담을 하고 나면 한동안은 잊어버리고 말았으니….
그러니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네가 떠오르고 만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테야.
나는 한때 그것이 몹시 두려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서방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더란다.
여전히 삶의 이유도 목적도 나는 구하지 못했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한 것 같네.
아마도 너를, 나는……
설영은 왔던 길을 거슬러 장안에 도착했다. 그래도 한 번 와 본 곳이라고, 황성의 전각이 보이자 반갑기까지 했다.
”아, 아니, 대사님 아니십니까.”
신라의 사신 일행이 통과할 때도 그러거나 말거나 쌀쌀맞던 병사들이 동행한 스님 ─청원 대사라고 하는─ 앞에서 절절맸다. 설영은 그저 이름난 스님인가 보다 하고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으나, 스님이 앞장서 소안탑小雁塔을 지나 천복사荐福寺에 들어갈 때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금빛 가사를 걸친 노승이 버선발로 마중을 나온 탓이다. 알고 보니 그는 당 밀교의 개조, 금강지金剛智의 몇 대 제자 되는 사람으로, 무슨 일이 있어 광주에 들렀다가 둔황의 막고굴로 수행을 떠날 예정이라고 했다.
당 황실의 후원을 업어 기고만장하기 그지없던 천복사의 승려들도 그는 깊이 공경했다. 따라서 그의 손님인 설영 또한 지극한 대접을 받았다. 덕분에 험한 길을 떠나기 전 단단히 채비를 마칠 수 있었다.
”원래는 말을 타지 않지만, 한시가 급하다고 하시니….”
“편의를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설영이 고삐를 쥐며 말했다. 자하가 떠난 지 벌써 한 해하고도 반이 넘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그를 찾아 천축국에 가는 것보다 오는 길목에서 지키고 앉아 기다리는 것이 더 빠를 성싶었다. 그간 설영의 사정을 대충 알게 된 스님도 그렇게 생각한 듯했다.
”차라리 광주에서 기다리는 편이 낫지 않습니까?”
“아니요.”
설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설영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그는 쉽게 질려하고, 새로운 것을 좋아하니까.
”한 번 뱃길로 갔으니, 돌아올 때는 사막을 통하겠죠.”
“그렇다면 반드시 악와지渥洼池를 거치게 됩니다. 당으로 들어오는 상인들이 쉬어 가는 곳이거든요.”
중간에 난주蘭州에 들러 말을 낙타로 바꿔야겠습니다. 사막을 쭉 걸어야 하니까요. 스님은 그렇게 말하며 작은 지도를 폈다. 설영이 흘끗 보니 난주까지도 거리가 제법 멀어, 상당한 시일을 길 위에서 보낼 듯했다.
설영은 문득 생각했다. 저 스님이 정말 현명하고 고매하여 불법에 통달한 사람이라면, 자하가 찾지 못했던 답을 알고 있지 않을까.
“대사님.”
설영이 입을 뗐다.
“대사님도 마음이 어지러워 모든 것을 내던지고 떠나고 싶을 때가 있습니까?”
“당연히 있지요. 저 또한 한갓 중생에 지나지 않으니….”
“그럴 때 대사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스님은 생각을 하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한동안 말발굽이 흙을 쳐내는 소리만 들렸다.
“저는… 가만히 앉아 명상을 했었습니다.”
그렇군요. 설영은 그것 참 스님답다는 생각을 하며 시큰둥하게 말고삐를 고쳐 쥐었다. 스님이 계속 말했다.
“눈을 감고 생각하는 겁니다. 아무도 없는 곳에 홀로 서 있는 나를요. 그 곳은 일체가 사멸하여 나조차도 존재하지 않게 되는 공간입니다. 고집도, 번뇌도, 어리석음도. 나를 구성하는 색, 수, 상, 행, 식의 다섯 집합조차 없어져 금방이라도 저쪽 세계로 건너갈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의식 속에서나 그러할 뿐, 결국은 오온의 부대낌에 이기지 못하고 번번이 깨어나지요.”
한때는 그 미혹에서 벗어나려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만…. 설영은 어느샌가 스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들을 미워하여 떨쳐내고자 함도 결국 집착이 아닌가. 하여 마음을 새로이 먹었지요. 나를 미혹하는 것들을 우선 사랑해 보기로요. 그러니까 알게 되더라는 겁니다.”
“무엇을…?”
“그것들이 결국 나를 살게 한다는 사실을요.”
사람을 이승에 메어 두는 것이 있다. 이를테면 집착, 그리고 미련. 그들은 대체로 사람을 괴롭게 하지만, 또한 살게 한다. 무거운 걸음을 내딛게 하고, 수천의 밤을 건너 아침을 맞게 한다.
설영은 이제야 자하가 떠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동시에 궁금해졌다. 자하가 찾아낼 답이 무엇일지. 어떤 것이 그를 이 세상에 잡아둘 이유가 될지.
한참을 생각한 끝에 설영은 결론을 내렸다. 자신의 미혹은 ‘그’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설영랑에게
안녕, 설영랑. 잘 지내고 있나?
다시 볼 날이 머지않았네. 뭐, 머지않았다고 해도 한참 남았겠지만 말이다. 나는 지금 소륵疏勒이라는 나라에 와 있어. 호국에 속한 몇몇 소국들을 지나자 총령진葱嶺鎭에 이르게 되더군. 그곳부터는 완전히 당의 영토인지라 당의 군사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물어보니 이곳 소륵국을 거쳐 구자국龜玆國까지 가면 당의 안서 도호부가 있어, 여러 상인의 무리가 드나든다고 한다. 다만 최근 들어 해로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탓에 위세가 이전만큼은 아닌 것 같더라.
아무튼, 사막의 가장자리를 따라 동쪽으로 걷다 보면 둔황이라는 지역이 나온다. 그곳 역시 사막이지만, 악와지라는 초승달 모양의 호수가 있고, 모래로 된 산이 우뚝 솟은 곳이라고 한다. 장안에서 사막을 건너 서쪽으로 가는 비단길의 시작점이라고도 볼 수 있지. 이곳에서 며칠 묵은 후 난주로 건너가 말을 빌려 장안으로 갈 생각이다. 그리고 등주에서 배를 타고 당항성으로 들어갈 예정이지.
이렇게 글로 써 놓으니 짧고 간단한 여정 같지만, 실제로는 한 달은 더 걸릴 예정이야.
왕경은 이제 겨울이겠지? 얼마 전 호국을 건너오며 첫눈을 봤어. 벌써 십일 월쯤 되었겠다. 아마 다음 동지는 사막에서 맞게 되지 않을까 싶어. 당에서도 동지에 팥죽을 쑤어 먹는다지. 둔황도 그러하다면 내 한 그릇 먹어 보고 네게 감상을 말해 주마.
아, 설영랑은 팥죽을 싫어했던가? 그렇다면 이 상선께서 네 몫까지 먹어주도록 하지.
대재앙신을 처치한 지 벌써 이 년이나 되었구나. 나는 사실 아직도 내가 살아 있다는 게 낯설다. 믿기지 않는다고 할까. 이것 참 명줄도 질긴 녀석일세…. 뭐 그런 생각이 들어.
마지막에 이르러 나는 완전히 죽을 결심을 했었다. 하고 싶은 것도 다 해봤고, 미련을 남길 것도 없으니 팔 년 전 실패했던 수법을 성공시킬 수 있을 줄 알았지.
하지만 그것은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쉽다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겠다만─ 끝나고 말았다.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이 뭔 줄 알아? 바로 상실감이다.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허전했지. 그제야 알게 된 거야. 나는 오롯이 저것을 죽이기 위해 살아온 탓에, 저것이 죽는 순간 내가 살 이유도 없어지고 말았구나.
나를 미혹하는 것에 기대어 나는 살아왔구나.
그리하여 설영랑. 그 후로 나는 줄곧 생각해 왔다. 생에 대해서.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서.
무엇이 우리를 동작하게 하나?
무엇이 우리를 호흡하게 하나?
무엇이 우리를 존재하게 하나?
우리는 대체 무엇으로 하여
고통의 밤을 지새고 또 아침을 맞는가?
우리는 또한 무엇으로 하여
고된 오늘을 지나 다시 내일을 꿈꾸나?
나는 정말이지 답을 찾고 싶었어. 목적이 사라진 삶이란 이다지도 허무하여, 차라리 먼젓번 천랑의 뼈처럼 삭아 없어지길 바라게 된다. 이토록 부대끼는 생을 짐 지고 살아갈 자신이 도무지 나는 없어…….
…차라리 죽음의 땅에 가고자 했다.
숨쉬는 것 없는 적멸의 공간. 작열하는 태양 아래 홀로 서면, 운명처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거든.
하지만 그 또한 쉽지 않을 듯해. 최근 이 근방에서 돌궐족 도적들이 기승을 부린다더군. 앞서 갔던 상단이 변을 당했나 보더라. 아침에 시신이 몇 구나 실려 왔어. 내일모레 출발하고자 했던 상단들도 몸을 사려, 용병들을 고용하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겠다더라.
다행이랄지, 그들은 대형 상단만 노리는 모양이라 나는 내일 혼자 길을 떠날 생각이다. 걱정 마. 지난 1년간 공으로 여행을 다닌 게 아니니까. 지반을 쓰는 방법도 알고, 별을 보고 길을 찾는 법도 알아.
도적이 허름한 옷에 단출한 짐가방을 든 나그네를 습격해 봐야 뭣에 쓰겠어. 게다가 내가 순순히 목을 내줄 위인인가? 아무렴 아니지.
그러니 설영랑은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지루해지면 비천택에 부적을 붙이며 놀아도 좋아….
참, 온이는 잘 키우고 있나? 설마 굶기는 건 아니겠지? 돌아가면 크기를 재 봐야겠다.
…장난이야. 아무려면 하늘 같은 선배님을 굶기려고. 그랬다간 네가 먼저 잡아먹힐걸.
설영랑.
이게 아마 마지막 편지가 될 듯해. 둔황에 도착하면 그간 써왔던 것들을 전부 태울 생각이거든. 구차하게 남겨 가져갔다가 네가 보는 것도 싫고, 혹여 책으로 남긴다 해도 역시 싫기 때문이야.
그러니 네 이름자를 종이에 쓰는 것 또한 당분간은 이것이 마지막이겠지.
설영.
잘 있어.
다시 만나자.
난주에 들른 후 낙타로 갈아타고 당하강을 따라 꼬박 이십여 일을 이동했다. 설영이 딛고 선 땅은 자갈에서 모래로 차츰 변해갔다. 주변의 풍경도 점점 황량해졌다. 민가가 있기는 했지만, 장안이나 광주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설영은 스님의 조언에 따라 장안에서 챙겨 온 천을 코와 입에 둘렀다. 거센 모래바람이 간헐적으로 불어왔다. 그럴 때마다 설영은 사막에 다다랐다는 것을 실감했다. 가끔 넓게 펼쳐진 지평선을 볼 때면, 저 너머 어딘가에 자하가 있겠거니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었다.
완전히 사막 지대에 접어든 지 사흘쯤 지났을 때였다. 모래뿐이던 시야에 푸른 물결이 아른거렸다. 사막 한가운데에 넓은 강이 흐르고 있었다. 스님도 같은 것을 봤는지 기쁨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저 강 너머 산들이 보이십니까? 모래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바위지요. 그 안에 전진前秦 시기부터 오백여 년간 건립된 석굴들이 있습니다.”
“거기서 수행을 하는 겁니까?”
“예.”
두 사람은 지친 낙타를 달래며 강 사이에 놓인 다리를 건넜다. 스님은 석굴 안으로 들어갔고, 낙타 두 마리는 완전히 뻗어버렸다. 스님이야 목적지에 도착했을지 모르겠으나, 설영은 한참을 더 가야 했다. 설영이 낙타 등에 솟은 혹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고 있을 때, 탑 주변을 기웃거리던 남자 하나가 설영에게 다가와 말했다.
“청원 대사님께서 악와지까지 안내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고개를 들어 석굴 쪽을 보니, 꾀죄죄한 가사를 걸친 스님이 설영에게 웃어 보였다. 설영은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했다.
짧은 작별 인사 후, 설영은 낙타를 갈아타고 남자를 따라 사막을 건넜다. 하루 밤낮을 또 지나자, 모래밭 한가운데 선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유려한 곡선의 모래산 아래 초승달 모양의 호수가 있고, 그 주변을 따라 푸르른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반대편 모래언덕에는 둔황으로 들어가려는 상단의 모습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그들이 오가는 길을 따라 모래에 묻힌 나무판자가 깔려 있었다. 말을 데려오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길잡이 남자가 말해줬다.
악와지의 관문을 어렵지 않게 통과한 설영은 곧장 제일 큰 객잔을 찾았다. 숙박과 식사를 부탁하며 자하의 인상착의를 묻자, 그런 사람은 본 적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번에야말로 내가 선수를 쳤다.’ 설영은 흡족한 마음으로 짐을 풀었다.
몸을 씻으며 모래알을 털어낸 설영은 악와지를 천천히 둘러봤다. 과연 교역로의 중간지점답게 번화하였고, 오가는 사람들도 무척 많았다. 땅거미가 내려앉자 거리의 노점상들이 하나둘 등을 밝히기 시작했다. 야시장의 열기는 새벽이 다 되도록 식을 줄을 몰랐다. 체구가 큰 서양 상인들에게 치여 이리저리 휩쓸리던 설영은 겨우 사람들 틈에서 빠져나왔다. 왁자지껄한 소음이 한 뼘 멀어져 있었다. 거리의 뒷골목에 위치한 작은 절의 뒤쪽인 듯했다. ‘그래도 법당이라면 사람도 적고 조용하겠지.’ 설영은 타박타박 걸어 절 안으로 들어갔다. 야심한 시각이라 그런지 나와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인기척은 있는데….”
이상하게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자, 절 옆쪽 구석에 있는 계단이 보였다. 설영은 그것을 밟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아래층과는 달리 불이 환했고, 법당 계단 아래에 신발들이 몇 켤레씩 놓여 있었다. 전부 여인의 것이었다. 이상하게 여긴 설영이 문 앞에 서서 망설이던 참이었다.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부인을 뵈러 오셨습니까?”
“예? 아, 아니요. 그저 지나가다 절이 있기에….”
머리를 파르스름하게 깎은 젊은 여승이 승복을 입고 합장을 했다. 설영도 엉겁결에 따라 했다. 설영이 여인의 신발뿐인 법당을 이상하다는 듯 보자, 그가 설명을 해 줬다.
“지아비의 무사 안전을 기원하러 온 부인들이십니다.”
아…. 설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여인들만 모여 있다 했더니, 상행을 떠난 남편의 건강과 안전을 비는 모양이었다.
“최근 교역로에 도적이 들끓는다는 소문이 있어, 밤중에도 많이 찾아오시지요.”
“도적이요?”
“예. 돌궐인들이 무리를 지어서 큰 상단을 습격하며, 사람을 죽이고 물자를 가져간다고 하더이다.”
여승이 두 손을 맞댄 채 머리를 깊이 숙였다. 귀를 기울이니 어느 여인이 섧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남편을 잃은 부인이 절에서 제사를 지내는 모양이었다.
“도적이 아니더라도, 사막이란 곳이 워낙 험하니까요. 상행 중 목숨을 잃거나 앓아눕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일 없게 부처님께서 보우해 주십사…. 기도를 하는 겁니다.”
“.......”
“기다리는 분이 계십니까.”
“……예.”
살짝 웃는 여승의 눈가에 언뜻 물기가 비쳤다. 그 또한 가족을 잃은 사람이리라. 설영은 두 손을 모아 합장하고 깊이 머리를 숙였다.
“왕생하시기를….”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두 주문이 겹쳤다. 말은 다르지만 뜻은 하나로 통했다. 한참 머리를 숙이고 있던 설영이 고개를 들었다. 아무도 없었다. 문틈으로 새어 나온 향냄새만이 옅게 번졌다. 여승은 법당 안으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설영 역시 발걸음을 돌려 계단을 내려왔다.
시장은 아직도 북적북적했다. 설영은 사람들을 비집고 겨우 숙소에 도착했다. 아래층의 식당 역시 만원이었다. 설영은 배는 고프지 않았으나, 스님과 다니는 동안 꺼내놓지 못했던 온이가 신경쓰였기에 음식을 주문하고 방에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종업원이 문을 두드렸고, 설영은 작은 쟁반을 방 안으로 가져왔다. 반지를 돌리자 힘없이 늘어진 새끼 용이 나타났다. 온이는 콧구멍을 벌렁거리더니 짧은 다리를 움직여 쟁반까지 기어가 그릇째로 삼켜 버렸다. '배상을 해야겠군.' 설영은 생각했다.
설영은 온이를 배 위에 두고 침상에 드러누웠다. 간만에 푹신한 이불 위에 누웠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최근 교역로에 도적이 들끓는다는 소문이……'
'사막이란 곳이 워낙 험하니…….'
여승과의 대화가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물론 설영은 자하를 믿었다. 그가 도적 나부랭이에게 당할 리 없지만, 만에 하나 혼자 사막을 건너다 길이라도 잃는다면….
설영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 위에서 몸을 말고 쉬던 온이가 봉변을 당했다. 새끼 용은 꼬리를 탁탁 치며 항의했으나, 설영은 듣지 못했다. 대신 정좌하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신을 집중하자 이 땅에 흐르는 기운이 느껴졌다. 설영이 그간의 기억을 떠올리며 영력을 돋웠다. 손끝에 푸른 빛이 맺혔다.
"나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어서…."
설영의 움직임을 따라 허공에 궤적이 남았다. 곧게 뜬 두 눈에도 맑은 빛이 넘실거렸다.
"구천지하의 귀신들은 물론이고, 산 사람의 영혼마저 끌어당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
찬란히 빛나는 부적이 손끝에서 태어났다. 설영은 가만히 앉아 그것을 바라봤다.
"당신을 귀신이라 할지 산 사람이라 할지 나는 모르지만…."
내가 부르는 것은 당신의 영혼이기에. 거친 바다를 건너고 광막한 황야를 지나도 결코 빛바래지 않는 찬란함이기에.
혹여 당신이 이 사막의 어딘가에서 길을 잃고 헤맨다면─
─이 부름을 지침으로 삼아 내게 돌아오기를.
”검을 하나 사 올 걸 그랬나….”
자하가 피 묻은 손을 벅벅 문질러 닦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혼자 다니면 이럴 줄 알았지. 그간이 너무 평화로웠던 거야.
”아니, 침반이 왜 이래?”
평화롭게 동쪽을 향해 가던 자하는 별안간 튀어나온 도적들을 때려눕힌 참이었다. 꿈틀거리는 걸로 봐선 살아 있긴 한 듯한데…. 자하가 힐끔 아래를 봤다. 그새 모래가 쌓여 사람들이 반쯤 파묻혀 있었다. 따로 손을 쓰지 않아도 이대로 두면 알아서 죽으리라. 자하는 손 위에 침반을 올렸다. 자철 바늘이 자꾸만 핑그르르 돌았다. 주변을 둘러봐도 온통 똑같은 풍경뿐이라 방위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되는 일이 없네. 춘광이는 또 어딜 간 거야?”
설상가상으로 타고 온 낙타, 춘광이마저 난리통에 도망쳐 버린 듯했다. 허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자하는 얼굴을 가린 천을 다시 묶었다. 그리고 겨우 숨만 붙은 반송장들의 옷을 뒤졌다. 말라비틀어진 건량과 은덩이 몇 개, 물이 반쯤 든 수통이 자하의 손에 들어왔다. 시체 뒤지기를 예습한 보람이 있었다. 어디를 어떻게 뒤져야 효율적으로 털 수 있을지 견적이 딱 나왔다.
자하는 건량 하나를 우물우물 씹으며 머리를 굴렸다. 침반이 맛이 갔으니, 밤이 되기를 기다려 별을 보고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체온을 나눌 낙타도, 불을 피울 나뭇가지도 없었다. 자다가 얼어 죽느니 며칠 밤 정도야 새는 게 나을 것이다.
”설영랑은 뭘 하나. 상선께서 얼어 죽게 생겼는데. 자긴 살 만하다 이거지?”
자하는 걸음을 옮겨 멀리 보이던 큰 바위로 향했다. 거친 바람 탓인지 한 쪽이 둥그렇게 깎여 있었다. 자하는 반대편에 자리를 잡고 짐을 뒤졌다. 대부분을 낙타에 실었던 탓에 몸에 지닌 것이라곤 남은 여비와 지도 몇 장, 종이에 싼 술, 그리고 그간 썼던 편지밖에 없었다. 금편이 많으면 뭘 해. 불을 피울 수도 없는데. 자하는 빠르게 단념하고는 바위그늘 밑에 주저앉았다. 멀리 보이는 모래산이 일렁이는 듯했다.
'정말 죽음의 땅이구나. 아무것도 없어.'
길을 잃었다는 사실이 이제야 피부로 와 닿았다.
”운명처럼 깨달음을 얻는다고…. 나, 참.”
제가 썼던 편지를 상기하며 자하는 코웃음을 쳤다. 당장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불투명한 판국에 깨달음은 무슨. 낙타는 도망가 버렸고, 지반은 고장 났으며, 물과 식량은 턱없이 부족하다. 몇 리나 남았는지 알 방도도 없으며, 지나가는 맘씨 좋은 사람 또한 있을 리 없다. 자하는 아예 모래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잠이나 자두자는 심산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오한이 들어 잠에서 깨니 주위가 온통 어두컴컴했다. 손끝에 영력을 돋워 등불로 삼은 자하가 바위 그늘에서 기어 나왔다. 그는 입 안에 자글자글 씹히는 모래를 몇 번 뱉어내고서 하늘을 봤다. 수많은 별들 중 특별히 밝은 것들이 국자 모양으로 늘어선 쪽이 있다. 그곳이 북녘이다. 그 주위를 잘 어림하여 보면 항상 같은 자리에 붙박여 있는 태을성太乙星이 보인다. 자하는 별빛을 이정표 삼아 어두운 사막을 걸어갔다. 바람이 모래산을 타넘으며 스산한 소리를 냈다.
그렇게, 아마도, 며칠을 감과 별빛에 의지해 걸었을 때였다. 몇 번째인지 모를 새벽이 다시 밝아왔다. 자하는 불현듯 이상한 느낌이 들어 품속을 뒤졌다. 손 끝에 걸리는 것을 끄집어내 보니, 설영의 허리춤에서 뜯어왔던 곡옥이 희미하게 빛나며 웅웅거리고 있었다.
마치 주인의 기운에 반응이라도 하는 것처럼.
사방은 온통 모래뿐이었다. 길게 누운 모래언덕 너머로 희뿌연 빛무리가 보였다. 자하는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양 가파른 사구를 올랐다. 두 걸음을 오르면 한 걸음을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거친 파도를 헤치는 조각배처럼 앞으로 나아갔다.
한참을 올라 드디어 꼭대기에 다다랐다. 반쯤 뜬 태양이 시커먼 사막을 밝히고 있었다. 자하는 두 손 가득 모래를 든 채로 일어서 아래를 봤다. 희뿌연 빛이 삼라만상에 색을 입혔다. 드문드문한 풀밭 너머로 푸른 초원과 초승달 모양 호수가 보였다. 악와지였다. 손가락 사이로 흐른 모래가 바람에 날렸다. 땀에 절고 잔뜩 헤진 터번이 툭 떨어져 바람에 날렸다. 잘 갈무리해 집어넣었던 긴 머리가 비단처럼 펼쳐졌다. 자하는 눈앞을 가린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저 정도 거리라면 밤이 오기 전 도착할 수 있을 듯했다.
"저 방은 뭐 하는 방이길래 백날천날 퍼런 불을 켜 놓고 있다냐?"
"낸들 압니까. 밥을 갖다줘도 먹질 않고. 송장 치우나 싶어 들여다보면 강아지가 문을 막아버리고."
"그거 강아지 맞소? 뿔이 있던데."
"서쪽 강아지는 뿔이 있나 보지."
오늘도 설영의 방 앞은 북적였다. 닫힌 문 사이로 새어 나오는 푸른 기운이 사람들을 잡아끌었기 때문이다. 수상하게 여길 만도 하건만, 그 덕에 매상이 제법 올랐는지라 주인도 종업원도 그냥 내버려 뒀다. 덕분에 설영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자하를 부를 수 있었다.
어느덧 한쪽 벽면이 전부 부적으로 뒤덮였다. 충만한 월계의 기운이 마음에 든 듯, 온이는 그 아래 몸을 말고 누워 있었다. 그러다 누군가 방해할라치면 주둥이로 문을 열고 매앵, 강아지처럼 소리를 내어 쫓아 버렸다.
그렇게, 아마도, 제법 오랜 시간을 앉아 있었을 것이다. 몇 번째인지 모를 부적을 다시 밝히던 때였다. 경계를 넘어 부유하던 의식의 가장자리가 찬찬히 밝아왔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금빛 광채가 태양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그가 돌아왔다. 거친 파도와 험한 사막을 넘어 마침내…….
설영이 반짝 눈을 떴다. 벽을 빼곡히 채웠던 부적들이 일시에 화르륵 타올랐다.
'내가 갑니다.'
겉옷을 어깨에 두르고 신을 신으려는데, 무언가 옷자락에 걸렸다. 온이가 짧은 다리를 버둥대며 설영을 빤히 보고 있었다.
"잊지 않았어요."
설영은 반지를 돌려 온이를 집어넣은 후 밖으로 나갔다. 허연 형체가 복도를 가로지르자 놀란 사람들이 소리를 빽 질렀다. 설영은 개의치 않고 식당을 지나 객잔 마당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다.
악와지의 정문을 나서 한참을 걷는데, 저 멀리에서 시커먼 것이 모래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었다. 주인 없는 낙타였다. 금실로 수를 넣은 흑색 안장이 뛸 때마다 덜걱거렸다. 그 색이 마치 누군가를 닮아 설영은 걸음을 멈췄다. 낙타는 설영에게 달려오더니 야윈 목을 하얀 뺨에 부볐다. 모르는 낙타였지만 어쩐지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자세히 보니 옆구리에 가죽 가방이 매달려 있었다. 설영은 가방을 묶은 끈을 풀었다. 간소하지만 비싸 보이는 옷가지와 종이에 싼 꾸러미가 보였다. 설영은 종이를 살살 풀어헤쳤다. 일전 자하에게 선물했던 백단향이 곱게 포장되어 있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설영이 낙타의 고삐를 쥐었다.
"가자. 네 주인에게로."
”음…?”
초록이 보이는 쪽으로 한참을 걸었을 때였다. 멀리서 어떤 형체가 아른거렸다. 자하는 제가 헛것을 보나 싶었으나, 아무래도 여행자들이 흔히 본다던 신기루와는 다른 듯했다. 그것은 모래와 풀을 헤치며 빠르게 가까워져 왔다. 손으로 햇빛을 가리고 자세히 보니 낙타 하나와 사람 하나였다. 낙타도 뛰고 사람도 뛰었는데, 둘의 속도가 비등비등했다. 팔팔한 모습이 꼭 저를 버리고 간 춘광이를 닮았다. 등에 얹은 흑색 안장도, 옆구리에 매단 가죽 가방도…
”…잠깐, 저거, 설마…?”
자하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이윽고 그는 전속력으로 달음박질을 쳤다. 상대 또한 자하를 알아봤는지 더욱 속력을 내서 달려왔다. 하나로 묶은 머리카락이 마구잡이로 휘날렸다. 딛을 때마다 푹푹 빠지던 땅은 점차 단단하고 푹신해졌다. 어느 새 주위가 온통 파랬다. 자하는 잠깐 멈춰서 숨을 골랐다. 싱그러운 풀내음이 폐부를 가득 채웠다. 자박, 자박, 자박…. 흙을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끝에는 흰 옷을 입은 남자가 있었다.
설영이었다.
한참을 뛰어온 탓에 머리는 거의 풀려 아래만 겨우 묶여 있었고, 겉옷은 입지도 못한 채 어깨에 대충 둘러 놨다. 그는 자하를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잠시 내리깔고는, 울 것처럼 웃어 보였다.
마침내 신발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섰다.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보고만 있었다.
설영이 먼저 말을 꺼냈다.
”답은 찾으셨습니까?”
자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찾지 못했다.”
하지만……. 자하가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설영의 하얀 얼굴 위로 머리카락 몇 올이 아무렇게나 들러붙어 있었다. 자하는 그것들을 거두어 귀 뒤로 넘겨 주며 말을 이었다.
”누군가 그러더군. 척박한 땅에서도 싹을 틔우는 식물이 있어, 정성 들여 가꾸면 숲이 된다고.”
그렇다면, 설영랑….
“폐허 같은 마음에도 싹을 틔운 감정이 있다면, 나는 마땅히 그것을 사랑해야 옳겠지?”
자하가 설영을 내려다봤다. 까만 눈동자 속에서 은청빛 기운이 별처럼 반짝였다. 그간 길을 찾으려 무수히 올려다봤던 밤하늘을 닮았다. 자하는 문득 생각했다. 암흑 속에서 저를 이끌었던 빛은 태을성의 반짝임이 아니라 설영의 부름이었을 것이라고.
설영이 자하를 올려다봤다. 선명한 금빛 눈동자가 온전히 자신만을 담고 있었다. 설영은 제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떨어진 자하의 손을 봤다. 오랫동안 험한 생활을 한 탓에 잔뜩 거칠어져 있었다. 시선을 의식한 자하가 꾸물꾸물 뒷짐을 지려 했다. 설영은 가만히 바라보다 손을 뻗어 자하의 손을 잡았다. 금빛 눈동자가 놀라서 동그래졌다.
”…상선께선 답을 찾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설영은 어색한지 목을 큼큼 가다듬었다. 오랫동안 굳어 있었던 입가가 천천히, 하지만 분명한 미소를 그려냈다.
”이제 그런 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하가 멍한 얼굴로 마주 봤다. 그러다 씩 웃었다.
새벽을 밝히는 태양처럼 아름다운 미소였다.
end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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