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FXIV(夢)

한밤의 설원은 포근했다

4538자 / 한데 누워 같은 달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이야기

봄은 길다 by 바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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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 : 희등 전에 썼는데 … 홍련 시작한 29일에 완성하다

“⋯자네, 지금 뭐라고⋯.”

“괜찮다고 했어요.”

입가에 특유의 엷은 호를 그리며 흔쾌히 승낙한 모험가를 눈앞에 두고 남자는 심히 당황했다.

아니, 분명 임무에 지친 근육을 풀라는 명분으로 용머리 전진기지에서 하룻밤 보내라는 제안은 그쪽이 하지 않았나?

⋯라는 물음이 튀어나오겠지만, 오르슈팡은 그동안의 거절을 본보기 삼아 이번에도 물 흐르듯이 “아, 바쁘다고? 그렇다면 괜히 붙잡지 않겠어.” 라는 한마디를 덧붙이려 입을 떼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 모험가는 무언가 굳게 결심한 듯 눈을 빤히 응시하며 받아들였다. ⋯자세히 보니 묘하게 뺨도 상기돼있어 보인다. 지금 이곳에 켜둔 촛불 때문에? 그렇기엔 모험가가 늘어뜨린 연분홍빛 머리칼과 비슷한 색감이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그 간결한 대답은 단 세 글자만으로 오르슈팡이 겹쳐 쌓아둔 계획을 껍질부터 벗겨내기에 충분했다. ⋯그래, 계획이 틀어졌다면, 다른 길을 새로 만드는 수밖에. 그 기사는 답지 않게 고민하고 결론을 내린 뒤에야 자신이 모험가를 기다리게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알았어. 그럼 자네의 생각이 변하지 않는다면 20시에 이곳을 다시 찾아와줘.”

오르슈팡은 개인적인 이야기라도 하듯(맞다. 아주 개인적이다.)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는 새로이 짜낸 답을 말하면서도 자신의 얼굴색이 평소와 같았는지, 근육이 제멋대로 움직이지 않았는지 이곳에 있는 아무나에게 던져묻고 싶을 정도였다. 오르슈팡이 이런 생각이란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고개를 끄덕이곤 묘하게 색이 다른 보랏빛 눈을 총명하게 빛내며 뒤돌아 나섰다. 모험가가 눈보라 치는 설원을 향하는 동시에 문이 닫히고, 오르슈팡은 답지 않게 탄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

아무래도, 이 모험가는 만만치 않은 것 같다.

그래, 네가 내 마음을 흔들어놓은 것도 이때부터였던가.


“내가 꺼낸 제안이다만⋯, 편하게 있어.”

다행히 약속한 시간이 되자마자 모험가는 오르슈팡에게로 돌아왔다. 하여 집무와 하루의 마무리까지 모두 마친 그는 모험가를 반기며 자신의 침실로 데려갔다. 사령관실과는 또 다른 분위기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 방은 창밖의 엄동설한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아늑해 보였다. 모험가는 태평하게, 다만 격식을 차리며 방안을 둘러보았다. 침대는 하나였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이후 기지로부터 마물의 침입이 보고되지 않는다면, 오늘 밤은 이대로 평온하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모험가는 안내받은 대로 파트너라 말할 수 있는 창을 걸쳐두고, 그날 몸에 쌓였을 먼지를 모두 씻어낸 뒤 오르슈팡이 준비해준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비에라 중에서도 가장 작은 편인 엘린은 그럼에도 에오르제아에서는 평균을 웃도는 키였다. 오르슈팡은 그가 돌아올 것을 예상이라도 한 건지 엘린의 신체에 꼭 맞으면서 부드러운 재질의 옷을 구해왔다. 이 커르다스의 하얀 풍경이 떠오르면서도 따듯한 안감 소재를 덧대어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웠다. 처음 몸에 닿았는데도 꼭 구름에 감싸인 것 같아 엘린은 괜스레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의 뒤를 따르던 아기 커얼을 쓰담아주고 카펫 위에 눕게 했다. 등을 보이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만⋯. 그러고 보니, 지금 모험가가 무기를 내려놓은 채로 등을 내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오르슈팡은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신뢰를 가졌다고는 해도 너무 긴장을 풀은 것 아닌가? ⋯까지 닿은 그는 앞서나가지 말라며 머릿속의 모든 생각을 끊었다.

이 꼬마 친구에게 이곳의 공기를 익숙하게 하려는 듯 쪼그려 앉아 가만히 그것을 쓰다듬던 엘린은 조용히 어르는 소리를 내었다. 작은 생명은 그에 만족했는지 가르릉 소리를 낸 다음 살포시 눈을 감았다. 엘린도 안도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이 방의 주인에게 공손히 감사를 표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르슈팡 님도 지치셨을 텐데⋯.”

접히지 않을 것 같던 기다란 귀를 양손으로 쓸어내리며 답하는 엘린의 모습을 잠시간 바라보며 오르슈팡은 고개를 휘저었다.

“오히려 내 쪽이 더 고맙지. 내 친우의 누명을 벗겨주고, 솔선수범하여 포르탕 가를 도운 자네에게 내가 대접할 기회를 주어서 다행이야.”

사실 이보다 훨씬 더 좋은 침실을 준비해주고 싶었다만⋯. 오르슈팡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더하며 검지로 턱을 쓸었다.

“아니예요. 더없이 과분한 걸요. 침실에 욕실도 쓰게 해주시고, 새 옷까지⋯.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좋은 밤이 될 거라고 믿어요.”

오르슈팡의 덧붙임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엘린은 차분히 고개를 저은 뒤, 기분 탓인지 아까보다 더 환히 웃어보였다. 그 모습에 오르슈팡은 순간 “어, 어어 그래.” 하며 (본인이 생각하기에)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슬슬 잘 시간이 돼가는군. 오늘은 정말로 수고 많았어. 무엇보다 자네의 눈부신 땀방울과 육체를 볼 수 있어서 무척 기뻤다고.”

여기 눕게나. 오르슈팡은 최대한 침대 반쪽에 몸을 구겨 누워서 공간을 만들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그리고 당연하게도 침대는 하나다. ‘오르슈팡의 침실’이니까) 이 모든 동작은 물 흐르듯 흘러갔지만, 동시에 ‘이렇게 해서 잘 수 있을까 모르겠다’는 모순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저 모험가에겐 비밀로 부칠 것이지만.

⋯그런 기대가 무색하게 엘린은 곧바로 침대로 향하지 않고 잠시 멈춰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찰나였지만 그 표정은 오르슈팡을 이유 모를 초조함에 들게 하기 충분했다. 다행히 그는 곧장 미소 지으며 특유의 우아한 발걸음으로 이불 속으로 걸어들어왔다⋯. 오르슈팡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방금 전의 감정은 뭐였지. 오르슈팡은 되새겨보았다. 순간이었지만 엘린의 얼굴은 방안에 켜놓은 최소한의 촛불에 비춰져 푹 가라앉아 보였다. 그것이 자신을 불안하게 만들었던가? 하면⋯. 적어도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확실했다.

“방금의 그 얼굴은 뭐였지? 이대로 자네가 이곳을 떠나버릴까 섭섭해질 뻔했어.”

모험가를 같은 이불 속에 잡아둔 그는 일부러 짗궂은 목소리로 물었다. 둘은 오늘 처음으로 얼굴을 보고, 이름을 안 사이였다. 오르슈팡은 아무리 돕고 도움받은 관계라 했지만, 내심 엘린이 왜 그런 자신과의 동침(더 깊은 의미는⋯ ‘없어졌다.’)을 받아들였는지가 알고 싶었다. 멈춰서서 자신을 바라보던 색이 다른 동그란 보랏빛 눈엔 분명히 ‘당황’이 녹아있었다. 그래도 지금은 체격 좋은 둘이 한 곳에 누워 이 밤을 보낼 것이다. 다음 기회가 있을지는 몰라도(벌써부터 ‘다음’을 생각하고 있던 건가?) 이참에 오르슈팡은 이 베일에 싸인 모험가에 대해 이것저것 캐물을 작정이다.

“아⋯. 불편하셨다면 죄송해요. 누군가랑 같이 누워본 게 정말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아마도.”

엘린은 똑바로 누운 채 어둠 속에서 눈을 끔뻑이며 조곤조곤 성실히 답했다. 하지만 말끝은 목적지에 위태롭게 도달했다.

“‘아마도’, 말이지⋯. 혹시나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엘린은 잠시 고민하듯 그 큰 눈을 소리라도 날 듯이 좌우로 도로록 도로록 움직였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일 것이다. 숨이 닿을 듯 가까이 있는 상대가 ‘정말로’ 믿을 만한 사람인지 머리를 굴리고 있는 중일 것이라. 이윽고 시선은 오르슈팡을 향해있다.

“⋯조금 길어질 것 같아요. 괜찮을까요?”

“음, 물론이고 말고. 용머리 전진기지를 이끄는 날 믿고 말해보게나.”

그리고 당연하지만, 이곳에서의 대화는 밖으로 새어나갈 일이 없도록 맹세하지. 엘린은 제 생각보다 강건한 태도의 오르슈팡에 떨떠름하게 입만 웃어보이면서도 안심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재해 이전의 기억을 잃었어요. 저는 그 무렵에 이미 성장을 끝마쳐서 가족과는 독립해 있는 상태였고, 그것은 비에라에게 당연한 섭리예요. 사실 모험을 시작한 것도 견문을 넓히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어버이를 찾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네요. 지금의 제 첫 기억은 막 살던 곳을 떠나 이곳저곳 향하던 모습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얼떨떨해요. 제 자신이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이 땅에서 저를 아는 사람은 점점 더 많아지고 있어요. 물론 도움이 되는 일이면 기꺼이 행하겠지만⋯. 실감나지 않네요. 이번 생에 그들을 만날 수 있으련지, 살아는 있는지.”

엘린은 살포시 눈을 감았다 떴다.

“⋯너무 푸념만 늘어놨네요. 이런 얘기를 누구한테 털어놓아본 적이 없어서 그만.”

아직 상황에 대한 진전은 없지만, 모순적이게도 그의 표정은 후련해보였다. 누군가에게 처음 털어놓는 자신의 개인적인 고민. 이 땅의 시련에 가려져 일부러 꺼내지 않으면 남에게 보이지도 않지만, 엘린은 이따금 왜 자신의 과거는 볼 수 없는지 생각하곤 했다. 옆을 살짝 보니 제 일처럼 눈썹을 찡그린 기사의 얼굴이 보여 그만 웃고 말았다.

“⋯스스로 떠나간 어버이의 터를 다시 찾아오는 건 분명 좋은 일이 아니겠죠. 그래도 저는, 가능하다면 그들을 다시 한 번 뵙고 싶어요. 설령 기억을 찾지 못한다 해도 떠올릴 수 있는 고향을 제 마음 속에 두고 싶어요.”

뭐, 이미 지금도 충분히 든든한 동료들을 만났는 걸요. 싱긋 웃던 엘린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떴다 했다. 아마 졸음이 쏟아지고 있는 거겠지.

“말해줘서 고맙네. 자네가 날 이렇게 신뢰해주다니 감개무량할 따름이야.”

머리를 괴어 제 옆에 누워있는 엘린을 보던 오르슈팡은 잘 자. 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똑바로 누웠다. 제 옆에서 귀에 힘을 풀고 규칙적인 숨을 내쉬는 엘린을 보며, 오늘 밤만은 그가 모든 부담을 내려놓고 푹 잘 수 있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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