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 커미션(승재루나/ㅊㅇ님)
2024년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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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챔피언 S의 결심.
말은 무게를 가졌고, 행동 또한 마찬가지다. 해온 일들이 그 사람을 이루는 내용물이란 말도 있지 않던가. 이는 눈부신 전적을 자랑하던 전직 챔피언인 단델 또한 강조하던 철칙이다.
요약하자면 ‘행동에는 책임이 따르니 그걸 인지해라’ 정도의 말이 되겠다. 박사의 조수답게 잘도 요약한 호브가 따뜻한 허브 티를 맑게 개었다. 아침 해가 쨍쨍하게 스며들고 블라인드 사이로 엿보인 바깥에는 아머까오 택시가 날아간다. 여느 때처럼 평화로운 일상이라면 일상이었다.
“하아아….”
그러니까, 벌써 사흘째 소니아 박사의 연구실에 죽치고 앉은 현 챔피언-승재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호브는 여느 열띤 논문과도 같은 방대한 양을 자랑하듯 구석에 처박힌 종이 뭉치를 발로 치우며 차를 마셨다. 잔뜩 구겨진 편지의 내용물이 새카맣게 타는 것처럼 보였으나 맑은 차 맛은 깔끔해 아이러니했다.
“안 하던 짓을 하니까 그런 거야, 승재.”
“역시 네 생각도 그래…?”
“그래. 너 애초에 그 애한테 별로 생각 없었잖아. 왜 이제 와 구구절절하게 편지를 쓸 맘이 든 거야? 사과는 저번에 실컷 했잖아. 사색이 되어서 뛰어나갔으면서.”
“안 됐거든.”
“됐어.”
“…그래, 호브 말이 맞을지도.”
“엥?”
유치한 말다툼이 이어지나 싶더니 곧 시시하게 전소되었다. 승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호브는 딱 보아도 좋지 않은 그의 상태를 살피며 잔소리를 퍼부었다. 안 그래도 입지가 불안한 입장이다. 괜히 여러 말이 나오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승재. 그렇게 못 잔 티 내다간 분명히 매스컴의 먹이가 되고 말 거야. 찰칵. 하고 찍혀서 온갖 곳에 네 태도가 안이하다고 뿌려질 거라고…그러니까……이봐?”
“응?”
“내 말 듣고 있는 거지?”
“응. 당연히 듣고 있지.”
“아, 그러신가요….”
말을 듣고 있다면서 승재의 눈은 편지지를 떠날 줄을 몰랐다. 고작해야 몇 줄을 적지도 못하고 끊임없이 되풀이할 뿐이면서, 더 진도를 나가지도 못하면서 우직하게 머리를 붙잡고 어떻게든 ‘진심을 잘 전달하려는’ 방법을 찾으려는 노력이 그답다면 그다웠다.
“편지도 교류의 일환이야? 왜, 그. 너 그 애랑 조금 더 솔직히 알아가기로 했다며.”
호브가 승재의 몫까지 차를 타 탁상 위에 얹어주었다.
“음, 교류에 그건 포함되진 않았지만, 그냥. 이번 경우는 내가 할 말이 좀 있거든. 그런데 그게 어떡해야 진지한 마음으로 느껴질지 모르겠어.”
호브는 꽤나 음울하게 가라앉은 승재의 옆모습을 보았다. 평소의 챔피언을, 소년을, 승재를 안다면 지금 그의 발언에 다들 깜짝 놀라며 한 번쯤은 돌아보지 않을까?
“난 언제나 만인한테 공평하게 굴 것 같던 네가 그러는 것 자체로 놀라운데 말이지.”
정성이구나. 호브는 구태여 말로 내뱉지 않았지만,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정성. 그래. 이건 정성이었다. 승재가 상대에게 쏟아붓기 시작한 건 정성 어린 마음이었다.
“그러다가 고백하겠다, 너.”
“이미 한 적 있어.”
“…뭐? 어떻게 됐는데?”
“그런데, 어. 그게. 안 좋은 타이밍도 타이밍이고…내가 예전에 루나의 마음을 잘 몰랐잖아.”
“아, 그 대형 둔감 사고 말이지.”
“…그래, 그거.”
과거의 실수를 짚자 수치스러운 듯 승재의 얼굴이 아주 새빨갛게 익었다.
“에헤헤, 과사삭 벌레 같아.”
“하…너는 좋겠다. 이런 고민 없어서.”
“재미있긴 한데, 솔직히 너의 장기체류가 우리 연구실에 도움이 안 된단 사실은 알아줬으면 해. 슬슬 다시 사람들이 모여서 소니아 누나를 귀찮게 하기 시작했거든.”
“아. 그건 미안.”
“…그래도 친구로선 필요한 고민이라고 생각해. 승재 넌 늘 시원스럽게 달려 나가느라 바빴잖아. 한 번은 돌아보는 시간도 중요하다고 느껴.”
“돌아보는 시간이라. 좋아, 결정했어.”
불현듯 자리에서 일어난 승재가 있다. 그는 생각을 정리한 듯. 펼쳐뒀던 편지지를 고이 접어 정리하기 시작했다. 호브의 파트너들이 그런 승재를 응원하듯 종이를 모아주었다.
“호브, 이거 소각로에 태우는 거 부탁해도 될까?”
“응? 어렵진 않은데. 아깝지 않겠어? 여태 쓰느라 머리 아팠잖아.”
“말로 하려고.”
승재가 겉옷을 집었다. 모자를 털고, 신발 끈을 재정비한다. 스마트 로토무를 통해 분주히 움직이는 손끝이 꼭 무언가를 찾는 사람의 몸짓이다. 호브는 물었다.
“어디에서?”
“글쎄, 느긋한 곳이 좋지 않을까?”
승재가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L양의 우울과 한여름 밤의 빛.
루나. 어떤 곳에선 ‘달’이라고도 읽기도 하는 이름. 그녀는 그것이 퍽 자신의 처지와도 비슷하다고도 느꼈다. 이 세계에선 빛나는 누군가는 따로 있고, 그녀 자신이 빛날 수는 없다. 다만 그 빛을 받아 자신도 그런 것처럼 행동한다.
그런 처지다. 그런 입장이다. 그러니 오롯이 제 몫이 아닌 빌린 얼굴로 만든 책임 따위 적당히 면피하면 된다. 가벼운 감정만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면 된다. 설령 그것이 인간 사회의 표면만을 더듬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좋다. 어차피 모두 연기를 하고서 살아가는 게 아닌가.
[그래도 다행이다.]
그러나, 루나는 만나고 말았다.
[네가 포켓몬을 바로 봐주는 아이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감정을 숨기지도 않고 웃고, 서툴면 서툰 대로 온 힘을 다해 부딪히고, 라이벌이라고 할지언정 정성을 다해 격려하는 따스한 사람을 만나고 만 것이다.
[새로운 챔피언입니다!]
그녀가 만난 특이한 사람이자 특별한 사람-승재는 그랬다. 루나보다 조금 더 커 절로 올려다보게 되는 키. 동경하게 되는 성정으로 마구 사람을 휘두른다.
루나는 결코 같아질 수 없는, 결이 다른 그 찬란함 따위를 알고 있다. ‘나야말로 무대 위의 주인공’이라고 선언하는 듯한 그 눈빛도….
가슴이 울렁거린다. 이건 승부자로서의 수치심일까? 아니면 경쟁자였던 자의 패배감?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 루나는 또래 아이들보다 다소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잘 아는 편이었다. 그를 둘러싼 공기가 확연히 이질적이란 것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으므로, 아마 그런 감정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시선이 간다. 그럼에도 손을 뻗게 된다. 자존심이 긁히는 듯한 일방적인 구애라고 해도 좋아. 해바라기가 목을 빼놓고 태양을 좇는 것처럼 멀고 멀지도 않잖아. 내게도 희망은 있어. 마음을 다잡고 생각한다.
나는 꽃도 아니고 너는 태양도 아니지. 우린 평범한 사람일 뿐이야. 그러니 괜찮아.
“내가 이곳까지 올 수 있던 건 네 덕분이야.”
그래도 만약 내가 달이라면, 눈부신 누군가의 빛을 받아야만 비로소 빛날 수 있는 어떠한 ‘것’이라면.
“그래서 나, 네가 좋아.”
그렇다면 그 ‘누군가’는 차라리 너였으면 좋겠다. 평정을 가장하고서 뺨에 입을 대면서도 사시나무처럼 팔이 떨렸다. 반응을 보기가 두려웠으나 용기를 내어 올려다본다.
“그래?”
그러나 빛은 한점 미동조차 없었기에.
**
갑옷섬의 흰 모래사장이 드넓게 펼쳐진 해안가는 탁 트인 정경과 맞서듯 까마득히 높은 탑이 서 있었다. 낮게 자란 잔디를 밟고 꺼져가며 가느다랗게 깜빡이는 거다이맥스 굴의 붉은 빛을 보고 있자면 새파란 바다는 저무는 날의 하늘처럼 보랏빛으로 보이기도 했다.
초여름날, 해가 저물기 시작한 시각의 갑옷섬. 날씨는 온화하며 작은 빛무리들이 깜빡거리며 스쳤다가 흐트러진다.
“루나, 무슨 생각해?”
“너한테 차였던 날을 떠올렸어.”
“아….”
분위기가 삽시간에 어색해졌다. 아차, 이러려고 했던 건 아닌데! 루나는 지나치게 솔직해지고 만 자신의 입을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승재가 먼저 루나에게 권하지 않았나. 그녀를 더 잘 알고 싶다고. 숨기지 않는 모습이 보고 싶다고.
“미안. 역시 그건 좀 아니었었지….”
“…알긴 아네.”
승재가 아하하 웃었다. 모래알이 샌들에 들어와 버석거렸다. 루나는 승재를 흘깃거리며 대답했다. 또래임에도 그들의 키 차이는 꽤나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승재가 챔피언이 된 이후엔 더 멀어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참아주고 있는 거라면 어쩌지?’
문득, 닥쳐온 건 그런 두려움이다. 루나는 입을 다물고 그저 걸었다. 자박거리는 작은 보폭을 맞춰 걷는 승재는 여전히 입매에 띄운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알 수 없었다.
‘일방적으로 맞춰주고 있을 뿐이라면 어떡해?’
부상 위험을 줄이기 위해 굽이 없는 편하고 낮은 샌들, 가면처럼 들러붙은 부드러운 미소는 이제 뻣뻣하다. 깔끔하게 정돈한 손도, 옷도, 머리도 승재에게는 큰 의미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안다. 이제는 잘 알았다.
‘나만 전부 보여주는 것 같아.’
어느덧 달이 완전히 떠올랐다. 멀리서 벌레 포켓몬들이 규칙적으로 우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루나는 다시금 불안을 생각한다. 곧 리그전의 시즌이다. 승재는 바빠질 것이고, 그와 이렇다 할 시간을 가지기엔 앞으로 힘들지도 모른다. 완전히 여름이 오거든 아마도 그들은─….
“좋아해.”
“어? 응. 나도…승재를 좋아해.”
“그런 의미가 아니야, 루나.”
느릿하게, 루나가 눈을 깜빡였다. 초조하게 땅바닥을 훑기만 하던 눈이 이제 승재를 향했다.
‘이건 꿈일까.’
소년의 둥근 눈이, 온화한 미소가, 어느새 겹쳐 잡고 있던 손에는 땀이 배어 축축하다. 승재가 드물게 긴장하고 있단 사실을 깨닫고 말아, 루나는 이끌리듯 되묻고 마는 것이다.
“내가 좋아?”
“응.”
“내숭을 떨지 않아도?”
“그래.”
“…난, 너를 곤란하게 할지도 몰라.”
어느덧 시야가 흐렸다. 바람이 불지도 않는데 모래 같은 것이, 빛나는 파편 같은 무언가가 눈에 들어가 눈시울을 따갑고 아프게 만들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그래도 좋아. 지금의 모습도, 내숭도 전부 루나니까.”
“치사해.”
“좋아해, 루나. 그러니까…나와 사귀어 줄래?”
순간, 루나는 승재에게서 떨림을 느꼈다. 그 ‘승재’가 긴장으로 얼어붙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뒤늦은 진심의 무게에 뺨이 홧홧하게 달아오른다.
“…어?”
느긋한 갑옷섬의 해변가. 가히 한여름 밤의 꿈 같은 일이 펼쳐졌다.
외전: 그리고 소년은 어른이 된다.
“…나랑 사귀어 줄래?”
물었다. 묻고 말았다.
손을 잡은 손바닥이 온통 뜨거웠다. 저도 모르게 손아귀에 들어가는 힘을 조절하기 위해 승재는 심호흡했다. 정신을 차리니 끌어안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포옹한 팔목에 힘을 주자 루나의 치맛자락이 바람을 타고 술렁이며 그의 손바닥을 간질인다. 평소와 다를 바가 없으나 마음을 선언했다는 것만으로, 고작 이 정도의 접촉에도 부끄럽다.
“…어?”
소년은 승부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색다른 긴장을 느끼며 얼어붙었다. 입 속이 바짝 마를 만큼 감정들이 뜨겁게 치밀어 올랐다가도 겨우 상대의 침묵 하나에 말라붙고 만다.
수없이 쓴 편지, 수많은 연습에도 막상 순간이 닥치자 바보가 되어버린 것만 같다.
[…그래도 친구로선 필요한 고민이라고 생각해. 승재 넌 늘 시원스럽게 달려 나가느라 바빴잖아. 한 번은 돌아보는 시간도 중요하다고 느껴.]
어쩌면, 승재 자신이 깨닫지 못하고 있던 건 이런 종류의 ‘순간’이 아닐까. 영원하지 않은 찰나들을 눈부시게 바라보며 안타까이 여기는 감정 말이다.
눈부시게 흘러내린 빛이, 감정이 넘치고 넘쳐 결국 영원이 될 것처럼 순간을 가득 메우고 말아 여유 따위는 채울 수 없게 만드는 조급함과도 닮은 마음들을. 줄곧 루나의 몫이었던 이 감각을 말이다.
“좋아해.”
어떤 이름을 붙여야 좋을지는 모르지 않는다. 승재는 그녀를 껴안은 팔목에 힘을 주며 속삭였다.
“좋아해, 루나.”
불꽃 같은 목소리가 뜨겁다. 소원을 빌기 위해 떨어지고 마는 별똥별을 쫓아가듯 소년의 감정은 내달린다.
“…나는.”
루나의 작은 손이 승재의 등을 감쌌다. 그를 올려다보는 시선이 혜성처럼 반짝였다. 날카로운 통증이 스친다. 풀벌레들의 부드러운 음악 소리와는 결코 비견할 수 없는 굉음이 심장을 두드렸다.
“승재를….”
그때에, 소녀가 대답을 내렸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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