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Heart

그는 모든 것을 기억한다. (下)

헥스 헤이와이어 x 시클링



* 헥스 헤이와이어에 대한 개인 해석과 날조가 있습니다.

* Trigger warning :: 우울증, 자살, 자해







“모든 사람의 슬픔을 끌어안는 사람의 슬픔은 누가 안아주죠?”


그 질문은 이상하게 익숙했다. 헥스 헤이와이어는 잠시 그것을 머릿속에 다시 떠올리며 생각해 보았다. 누군가에게 들은 말인 것 같았다. 그런데 기억이 정확하지 않았다. 누구에게서, 언제, 어떤 상황에 들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담자를 앞에 두고 자기만의 생각에 잠기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헥스 헤이와이어는 잠시 생각했다. 이상하게 잡힐 듯 말 듯한 실마리가, 마치 아지랑이처럼 희미한 실 같은 연기가 피어 올랐다. 쥐려고 손을 뻗으면 흩어져 버리는 그것. 헥스 헤이와이어는 눈썹을 찡그렸고, 시린 시클링은 그것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긴장한 채 숨 죽여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헥스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미안해. 어디까지 말했었지?”


시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마 미안하다는 말에 괜찮다는 뜻으로 한 동작 같았다. 시린은 미소 지었다. 헥스 헤이와이어는 그 미소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헥스는 시린 시클링의 그 무엇도 알고 있지 못했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상한 두통이 밀려왔다. 헥스는 눈썹을 찡그렸고, 시린은 긴 한숨을 뱉었다. 삼킨 말이 너무 많을 때, 안에 쌓인 말이 너무 많아 호흡이 얕아질 때 나오는 긴 호흡은 그 자체로 한숨이 되어 허공을 흐트러뜨린다. 거기에 담겨 있는 희미한 눈물을 헥스는 읽어냈다. 시린은 울고 있었다. 동시에 웃고 있었다. 헥스는 그 얼굴이, 굉장히 익숙했다. 헥스가 그것을 깨닫고 안경을 벗었을 때, 시린은 몸을 일으켜 헥스 헤이와이어의 옆에 서 있었다. 소리도 없는 걸음걸이였다. 마치 유령처럼. 시린은 가엾은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헥스를 내려다보며 그의 머리에 살짝 손을 올렸다. 헥스 헤이와이어는 시린보다 훨씬 키가 컸지만, 지금은 헥스가 자리에 앉아 있고 시린이 그 옆에 서 있어서 그런 것이 얼추 가능했다. 헥스 헤이와이어는 처음 보는 학생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손길은 익숙했다.


“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또 오고 말았어.”


시린의 시선은 허공을 향해 있었다. 헥스 헤이와이어는 그의 손길이 이상하게 친숙하고, 다정하고, 그립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시린은 가만히 그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어깨로 손을 옮겼다. 작고 따뜻한 손이 그의 어깨를 덮었다. 시린은 먼 곳을 향하고 있던 시선을 내려 헥스의 눈을 내려다보았다. 여러 가지 색이 섞여 있는 헥스의 눈이, 시린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시린의 눈 색은…….


그리움?


“내가 여기 오지 않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데 결국 또 오고 말았어.”

“……무슨 뜻이야?”

“…….”


시린의 눈에서 눈물이 주륵 흘러내려 양 뺨을 적셨다. 시린은 환하게 웃으면서 울었다. 헥스는 그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어떤 기억의 편린이, 조각이, 그 단면이 잠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가 사라졌다. 잡아채기에는 지나치게 빠르고, 또 지나치게 날카로운 기억이었다. 손으로 쥐려 하면 손바닥이 온통 베이고 피를 보게 되는 그런 기억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억이 지나갔다는 것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헥스는 입을 조금 벌렸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렇게 되었다. 시린 시클링은 천천히 눈을 감고 눈물이 뺨을 지나 입술을 적시고 턱에 맺혀 바닥으로 떨어지도록 내버려 두었다. 툭, 툭 하고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치 구슬처럼. 이슬처럼.


“왜 나는 최악의 선택인 줄 알면서도 사랑하는 걸 그만 둘 수 없을까.”


시린 시클링이 눈을 떴다. 그의 눈은 푸른색이었다. 잔잔한, 포근한 파란색. 그런 색은 처음 보는 색이었다. 이상하게 탁한 것 같기도 하고, 이상하게 부드러운 것 같기도 한 그 푸른색은 분명 익숙했다. 헥스는 시린이 한 말의 의미를 짐작해보려 했지만 그 다음에 이어진 말 때문에 다시 생각의 가닥을 놓치고 말았다.


“왜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걸 알면서도 포기할 수가 없는 걸까.”

“……내가, 너를?”

“기억하지 못해야 해. 내가 네 기억을 지웠으니까. 그게 당연한 거야. 그러니까 우리는 완전히 바닥에 있는 건데, 나는 굳이 또 무너질 탑을 쌓아 올리려 해. 내 손으로 무너뜨려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슨 뜻이야, 시린?”

“내 이름은 시린 시클링이 아니야. ……하지만 너는 그걸 기억하지 못하지.”


헥스는 이제 이 상황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완벽한 혼돈 속에서, 헥스 헤이와이어는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헥스의 머리가 시린 시클링보다 한참 높아졌는데도 시린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래로 떨군 그의 얼굴에서 눈물이 계속 아래로, 아래로 떨어졌다. 문득, 기시감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이상한 데자뷰. 마치 꿈 속에서 이런 상황이 있었던 것만 같은 느낌. 헥스 헤이와이어는 이 뒤에 이어질 말을 알고 있었다. 헥스는 떠올렸다. ‘너에게 나는 계속…….’


“너에게 나는 계속 시린 시클링이겠지. 내 이름을 알려주고…… 네 기억을 지우는 일을 나는 꽤 많이 해 왔어.”

“……기억을 지웠다고?”


시린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 이상하게 마음을 후벼 팠다. 그 감정이 지나치게 얼얼해서, 헥스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잊어서는 안 될 것을 잊어버린 상실감이, 허전함이 뒤늦게 밀려왔다. 헥스 헤이와이어는 이 순간을 알고 있었다. 기억이 사라져도 감정은 남는다.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기에 되새겨질 수 없는 감정은 기억을 떠올렸을 때 함께 떠올라 추억으로 가슴을 물들인다. 헥스는 자신이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잊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그것을 잊을 수 있었을까? 시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치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처럼.


어쩌면, 아무것도 기억해내지 말라는 것처럼.


“우리는 언제나 비극으로 끝나. 언제나 그랬어.”

“내가…… 우리가.”

“응. 우리는 비극 속에 있어. ……그렇다면, 사랑하는 자기야.”


시린은 아주 오랫동안 헥스를 알아 온 것처럼 다정하게 애칭을 불렀다. 헥스는 그 목소리에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공백에 대해 감정이 살아나고 있었다. 그의 눈. 그의 얼굴. 그의 손길. 그의 입술. 그의 목소리까지. 그 모든 것에 대한 감정이 문득 터진다. 헥스 헤이와이어는 시린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 자신을 보도록 위로 올렸다. 시린은 그 손바닥에 뺨을 기대듯 머리를 움직이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우리가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게 서로에게 가장 행복한 일 아닐까?”

“……하지만 왜 나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거지?”

“네게 부탁할 수는 없었거든.”


시린은 이 모든 것을 몇십 번, 몇백 번 되풀이 해 온 것처럼 익숙하게 대사를 읊었다. 그에게 이것은 연극이었고, 무대였고, 끝나지 않는 비극이었고 한 편의 소설이었다. 끝까지 다 읽은 다음, 책을 덮고, 다시 처음부터 펼치면 등장인물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모든 일은 다시 되풀이된다. 소설 속 등장인물은 소설이 다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없지만, 독자는 알 수 있다. 헥스 헤이와이어는 등장인물이었고, 시린 시클링은 독자였다. 독자는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책을 처음 펼쳐 읽기 시작했을 때의 그 감정을, 되찾지는 못할 테다. 그것은 일종의, 모순된 저주 같았다. 다시 시작되는 것을 알지 못하고 모든 것을 처음부터 전부 다시 시작하는 자와 다시 시작되는 것을 알지만 아무것도 되찾을 수 없는 자. 그들이 닿은 순간, 이야기는 다시 시작되고 무대에는 조명이 들어온다.


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고통을 가져가지만 이건 내게 고통이 아니었으니까 너는 내게서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었어.”


사랑은 고통이지만 고통은 결국 사랑이기에, 사랑하지 않았으면 고통이 없었기에, 고통이 없으면 사랑이 아니기에. 시린 시클링의 고통을 헥스 헤이와이어가 가져가고 모든 것을 없었던 일로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시린 시클링은 노력했다. 헥스 헤이와이어를 도울 수 있도록 무던히 노력하고, 열심히 찾고, 또 찾았다. 그리고 결국 시린 시클링은 찾아냈다. 헥스 헤이와이어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비록 두 사람 모두를 구원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한 사람을 이 고통에서, 비극에서, 이 무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준다면. 시린은 그렇게 했고, 헥스 헤이와이어는 모든 것을 잊었다.


“……그런데 나는 네가 보고 싶어서 또 너를 찾아와 버려. 진짜 바보 같아. 그리고 모든 게 다시 시작돼.”


그러면 너는 슬퍼하고, 아파하고, 괴로워 하고 나는 그런 너를 돕기 위해 다시 모든 것을 지워.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 거야.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나는 생각해. 날 사랑하지 않는 너를 보면서 이제는 정말 그만 해야지, 이제는 진짜 그만 해야지, 생각하지만……. 언제나 생각만 해. 헥스, 이거 진짜 슬픈 말이지만, ……내 사랑이 너에게 저주라는 게 미안하고, 슬퍼.


다만 사랑하는 것으로는 행복해질 수 없었다. 시린 시클링은 자기 자신을 이 세계에서 지우기 위한 노력도 해 보았다. 자신이 헥스 헤이와이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면, 그래서 결국 그의 상담실로 그를 찾아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자신을 지움으로서 자신이 품고 있는 그의 모든 기억과 함께 사라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그렇게 몇 번이나 사라지려 했던 시린은 자신이 사라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헥스 헤이와이어가 무수히 많은 고통의 기억을 흡수하고 빼앗아 받아들여 삼켰음에도 슬픔에 잠식되어 질식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타인의 기억을 삼킨 그는 그 자신을 구성하는 타인의 기억을 그런 식으로 버릴 수 없었다. 그런 식으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시린의 말은 천천히 이어졌고, 헥스 헤이와이어는 자신이 이 상황을 이미 겪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헥스 헤이와이어는 이 다음에 이어질 일도 알고 있었다. 헥스가 거부하기 위해 뒤로 물러나려 할 때, 시린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작은 손에, 떨쳐내려 하면 얼마든지 떨쳐낼 수 있을 약한 손아귀 힘이었지만 이상하게도 헥스는 그 손을 떼어낼 수 없었다. 헥스는 자신의 심장이 지나치게 빠르게 뛰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혀 끝에서 맴도는 그 기억은 지금 당장 입술 밖으로 뱉어질 것 같으면서도 전혀 구체화되지 않았다. 시린은 헥스의 손목을 붙잡은 채 계속 말했다.


“네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면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 줄 알았어. 그런데 감정은 그런 식으로 꺼지지 않더라.”

“……그러면 기억을 지우지 않으면 되잖아.”

“안 돼, 헥스. 이건 분명 비극이 될 거니까. 나는 알고 있어.”


헥스는 반박하려 했다. 하지만 시린은 단호했다. 어쩔 수 없었다, 헥스에게 이 상황은 처음이 아니었지만 처음이었고, 시린 시클링은 몇 번이나 반복해 온 상황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고, 헥스 헤이와이어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누가 더 설득력을 가지고 있을지는 자명한 일이다. 헥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가 그런 사이였다면, 그런 식으로 서로에게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면 왜 시린은 함께 모든 것을 극복하려 하지 않는 건지. 동시에 헥스 헤이와이어는 알 수 있었다. 동화 속에나 존재하는 아름답고 완벽한 결말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만남에는 마지막이 있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 그 어떤 이별도 아름답지 못하고 그 어떤 결말도 완벽할 수 없기에. 헥스 헤이와이어는 알고 있었다. 사랑은 그저 눈물로 빚어 다져지는 감정이라는 것을.


“잠깐이라도, 너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서 기뻐.”


시린은 크게 숨을 마셨다가 길게 뱉었다.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었다. 헥스 헤이와이어는 달아날까 생각했지만 동시에 그 어디로도 달아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시린 시클링을 설득할 수 없었다. 그의 진짜 이름조차 알지 못하기에. 사라진 기억이 남긴 희미한 감정의 찌꺼기만이 그가 기억하는 것이기에. 헥스가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시린은 그저 웃으며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사랑해. 영원보다 하루 더.”


내 영원은 너보다 하루 더 길 테니까. 시린의 손이 헥스 헤이와이어의 눈을 덮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어두워졌다.




헥스 헤이와이어는 상담사이다. 그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타인의 고통을 흡수한다. 비록 그것이 그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어 침몰하게 만들더라도 헥스 헤이와이어는 타인을 위해 기꺼이 손을 내밀고 그들의 트라우마를 가져온다. 기억이 없으면 고통도 없다.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면 고통은 되살아나지 않는다. 그들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헥스 헤이와이어는 모든 것을 기억한다. 그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그들의 상처와 흉터, 아픔과 슬픔, 비통과 비탄을 기억한다. 그는 잊을 수 없다. 타인의 기억을 함부로 지워버릴 수는 없는 법이다. 자신의 안으로 품었기에 타인의 기억이자 그 자신의 기억이 된 그것들이 헥스 헤이와이어의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어도, 헥스 헤이와이어는 또 다른 사람의 고통을 기꺼이 자신의 것으로 삼킬 테다. 그는 잊지 않고, 모든 것을 기억한다.


이것은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유일한 기억에 대한 이야기이다.


헥스 헤이와이어는 상담실에서 눈을 뜬다. 잠깐 졸았던 모양이다. 부스스 눈을 뜬 헥스는 책상을 잠시 멍하니 내려다본다. 자신이 벗어 두었던 안경이 그 위에 있다. 언제 안경을 벗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잠들기 직전 잠결에 벗어두었던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헥스 헤이와이어는 안경을 도로 얼굴에 걸친다. 그리고 상담 예약을 확인한다. 앞으로 한 시간 동안은 예약이 없으니, 느긋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겠다. 책상 한쪽에 가름 끈이 끼워진 책이 있었다. 아마 그 책을 읽다가 잠든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헥스 헤이와이어는 책을 펼쳤다. 문득, 손목이 갑갑했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소매를 조금 걷어 보았지만 손목은 깨끗했다. 기분 탓이라고 생각하며 헥스는 책 위의 글자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상담실 문이 소리 없이 닫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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