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Heart

그는 모든 것을 기억한다. (中)

헥스 헤이와이어 x 시클링





* 헥스 헤이와이어에 대한 개인 해석과 날조가 있습니다.

* Trigger warning :: 우울증, 자살, 자해







예약한 시간이 다 되었을 때, 시린은 나타나지 않았다. 헥스는 상담실에서 그를 기다리며 시간을 확인했고, 그가 오지 않는다는 것에 약간 불안감을 느꼈다. 상담 시간이 너무 늦으면 다음 예약 때문에 상담을 진행할 수 없게 되거나, 진행한다 하더라도 지나치게 짧은 시간밖에 할애할 수 없기 때문에 별 소용이 없다. 예약해 둔 상담 시간은 한 시간 남짓이었기에 헥스 헤이와이어는 10분까지 기다린 다음 그래도 시린이 오지 않으면 적어 준 핸드폰 번호로 연락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시린은 5분 늦게 도착했다. 다급히 상담실 안으로 뛰어 들어온 그는 등 뒤로 쾅 소리가 나도록 상담실 문을 닫았고, 상담실 문을 바라보고 있던 헥스는 약간 놀랐다. 시린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헥스를 바라보다가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그의 이마에서 작은 땀방울 하나가 흘러내렸다. 시린은 손등으로 그것을 훔쳐내며 헥스의 책상 맞은편 자리로 다가왔다. 헥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권한 다음, 다시 자리에 앉았다. 시린은 천천히 호흡을 진정시키며 눈을 내리깔았다. 헥스는 그에게 물 한 잔을 권해 주었고, 시린은 감사히 받아 두 손으로 잔을 쥐고 꿀꺽꿀꺽 마셨다. 이제야 좀 진정한 그는 잠시 멋쩍게 웃고는 잔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늦어서 죄송해요.”

“……괜찮아.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그건 아니지만.”


하지만 분명히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았다. 시린은 불안한 표정으로 상담실 문을 한 번 돌아본 다음, 헥스를 향해 다시 배시시 웃어 보였다. 헥스는 그 미소에 마주하듯 희미한 미소를 지어 주었지만 시린이 꺼내지 않은 화제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무슨 이야기든 해도 좋다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라고 말한 헥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린은 작은 한숨을 쉬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대부분 상담을 처음 시작한 내담자들은 그렇게 시작한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무슨 말로 시작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그게 바로 시작이 된다.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 과거의 슬픔이든,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이든, 방금 전에 일어난 일이든 10년 전에 일어난 일이든 지금 가장 강렬하게 머릿속을 지배하고 가장 큰 비중으로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그것부터 풀어놓게 된다. 헥스는 그래서 기다렸다. 지금 시린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섣불리 짐작하지 않았다. 시린은 머뭇거리다가, 주저하다가, 문득 등이 떠밀린 것처럼 툭 내뱉었다.


“누구나 이런 걸 견디며 사는 걸까요?”

“이런 것이라면, 어떤?”

“이런…… 것. 그러니까, ……어떤 거대한 우울과 슬픔에 짓눌리면서, 살아가는 걸까요?”


헥스는 계속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시린은 시선을 책상 위로 둔 채 약간 중얼거리듯, 어떻게 보면 혼잣말인 것처럼 입술을 작게 움직였다. 하지만 목소리는 또렷했다.


“저는 이런 걸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요. 왜…… 모두 강한데, 모두 꿋꿋하게 살아가는데 저만 왜 이걸 견딜 수 없을까요.”

“글쎄, 다들 각자의 방법이 있는지도 모르지. 아니면 너처럼 간신히 견디고 있거나.”

“그런 걸까요. 당신은 어때요?”


시린의 질문이 헥스에게 향했다. 책상을 향하고 있던 그 시선이 천천히 올라와, 헥스의 눈을 바라보았다. 헥스는 안경 너머 그의 눈이 약간 젖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울음을 참고 있는 걸까. 아니면 원래 그렇게 촉촉한 눈가를 가지고 있는 걸까. 지금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그것은 시린을 고작 두 번 만난 지금에는 판단할 수 없는 것이었다. 헥스는 그의 눈을 마주 바라보며 느릿하게 대답했다.


“나는……그럭저럭 견디고 있다고 생각해.”

“방법이나 요령이 있다면 알려 주실래요?”

“내 방법이 너에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헥스는 잠깐 고민했다. 비통의 현자인 그는 당연히 우울과 슬픔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 자신의 것이 아닌 타인의 우울과 슬픔을 모두 알고 있었고,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때로는 그 모든 기억들이 자신의 안에서 소용돌이치면서 그것이 타인의 것이었는지, 혹은 원래부터 자신의 것이었는지 알 수 없게 되는 때도 있었다. 하지만 헥스 헤이와이어는, 비통의 현자는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고 또 타인에게 돌려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돌려 주는 것은 헥스가 우울과 슬픔을 견디는 방식은 아니었다. 우울에 대해서. 헥스는 할 수 있는 말이 아주 많았다. 그는 기본적으로 삶에 회의적이었고, 세상에 부정적이었으며, 죽음을 예찬하고 비극을 사랑했다. 하지만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온 내담자에게 그 자신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고스란히 들려 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헥스는 좀 더 건전한 방법을 떠올렸다.


“요리를 하는 것도 좋겠지. 무언가에 몰입하면 감정은 잠시 잊게 되니까.”

“그런가요…….”


시린은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표정으로 잠시 고민했다. 헥스는 초조해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것은 첫 상담이었고,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는 있어도 깊은 감정까지 꺼내기는 어려운 법이다. 물론 첫 상담에서 눈물을 보이는 내담자들도 많지만 그것을 언제나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린은 고민을 끝낸 뒤 다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처음 보았던 그 때의, 맥이 풀린 것 같은 미소이기도 했고 무언가 포기하고 내려놓는 것 같은 미소이기도 했다. 헥스는 그가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내려놓았는지 알고 싶었다. 시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벗어날 수는 없는 거군요.”

“벗어나고 싶어?”

“……아마도요.”


아마도, 라는 말은 애매했다. 헥스는 고개를 조금 기울였고, 시린은 설명을 보충해야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시린은 얼른 이야기를 이어 나가지는 않았다. 헥스는 그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만약 비밀 보장이나 전문성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다면, 헥스는 그것에 대해 시원하게 대답해 줄 수 있었다. 비밀은 완벽히 보장될 것이지만 자신이 완벽한 상담사는 아니기에 어쩌면 다른 상담사를 찾아가는 편이 더 좋은 방법일 수도 있다는 류의 대답. 하지만 시린은 그런 것을 궁금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시린은 한 손으로 자신의 뺨을 문지르며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세상에 완벽히 행복한 사람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 완벽히 우울한 사람은 왜 이렇게 많을까요.”

“예를 들면 어떤?”


시린은 작게 웃었다. 헥스는 어쩐지 그 미소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이상한 일이었다. 헥스는 시린 시클링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심지어 그가 몇 학년의 어떤 반인지도 알지 못했다. 헥스가 시린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가 죽을 수 없는, 그래서 도움을 청하러 온 학생이라는 것 뿐이었다. 그 상황에 대한 구체적 이야기는 나중에 더 나눌 수 있을 것이라고, 헥스는 생각하고 있었다. 시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헥스는 잠시 시린을 바라보았다. 이상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분명히…….


어떤 익숙함이 문득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헥스는 그 느낌을 깨닫고는 잠시 당황했다. 시린과 자신은 아는 사이였던가? 하지만 그것을 시린에게 물어볼 수는 없었다. 헥스는 시린이 대답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잠시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그곳에서 시린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 낯익은 느낌은 뭐지? 그때 시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 같은.”

“…….”


헥스는 시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린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상담사였고 눈 앞에 있는 시린은 내담자였는데 지금 당장, 이 상황에서 헥스는 마치 자신이 상담을 받으러 온 사람이라고 느꼈고 시린이 자신을 상담해주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상담사에게 이런 전이는 위험하다. 시린이 헥스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동안, 헥스는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내 어떤 점이 너에게 완벽히 우울한 사람으로 보였던 건지, 말해주겠어?”

“글쎄요……. 그냥, 말투라든가. 눈빛이라든가.”


시린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만, 헥스는 그것이 그냥 둘러대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말하던 태도와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그에게 좀 더 정확히 말해달라고 재촉하는 대신, 헥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지금 나누어야 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시린에 대한 이야기였다. 헥스는 화제를 바꾸고 싶었지만 시린은 다시 헥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모든 사람의 슬픔을 끌어안는 사람의 슬픔은 누가 안아주죠?”

“걱정해 주는 거야?”

“조금 많이요.”

“난 괜찮은데.”


영웅은 세상을 구한다. 하지만 그 영웅은 누가 구해 줄 수 있을까. 그런 류의 질문은 언제나 안타깝다. 모든 것을 떠안은 사람은 필연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고, 그 무너짐은 대부분 외롭다. 모든 것을 떠안았기에 다른 누군가에게 기댈 수 없는 사람은 자신의 붕괴를 타인에게 알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치밀하게 자신을 숨기고, 남들의 시야에서 벗어나고, 걱정하지 않도록 밝은 모습을 꾸며 내면서 괜찮은 척 웃어 보인다. 그런 사람들은 아픈 미소를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반대로 자신의 미소를 완벽하게 꾸며낼 수 있다. 슬픔을 아는 자들은 그렇다. 그들은 그렇게 침몰한다. 헥스는 그런 사람을 잘 알고 있었다. 자기 자신 역시 그런 사람이었다. 타인의 불행을 끌어안는 그것이 그 자신의 불행을 덮어 버리고, 타인의 슬픔을 머금어 지나치게 부풀었기에 그 자신은 반대로 울 수 없다. 헥스 헤이와이어는 자신이 상담사라는 것을 한 번도 불평하거나 불만을 가진 적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슬프거나 우울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시린은 그 말을 믿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헥스는 약간 불편함을 느꼈고, 상담의 흐름을 바로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전에 시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도움을 청하고 싶어요.”

“……어떤 도움인지 말해주겠어?”

“당신의 슬픔을 나누어 주면 좋겠어요.”


헥스는 부정하는 것이 소용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시린이 자신이 모르고 있는 무언가를 잘 알고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시린은 미소 지어 보였다. 슬픈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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