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모든 것을 기억한다. (上)
헥스 헤이와이어 X 시클링
* 헥스 헤이와이어에 대한 개인 해석과 날조가 있습니다.
* Trigger warning :: 우울증, 자살, 자해
그는 모든 것을 기억한다.
희생으로 앗아 온 끔찍한 기억들. 일종의 트라우마. 정신적인 충격, 뇌에 남은 상처. 아물지 못하는 흉터, 절대로 극복할 수 없는 벽.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결핍, 충동, 그로 인한 최악의 결과. 불의의 사고, 재난과 재해, 붕괴. 억지로 끼워 맞추고 일으켜 세워 가까스로 유지한 미소, 무너지기 직전의.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모든 것을 기억한다. 당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모든 것을. 그는 그 자신의 행복을 대가로 타인의 기억을 훔치고 고통 받는다. 그것이 그가 타인을 대하는 방법이고, 치유하는 방법이다. 그는 슬픔과 괴로움, 고통과 충격 속에서 의식을 잃고 방황하고 쓰러진 사람들을 구원한다. 감당할 수 없는 것은, 감당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는 당신으로 하여금 잊게 한다. 절대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던 그 순간을 지우고, 덮고, 훔친다. 당신은 모든 것을 잊고 얼기설기 엉성하게 꿰어 엮은 미소 대신 진짜 미소를 되찾는다. 그리고 그는, 당신의 미소에 마주 미소 지어 주지만, 당신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하여 짙은 비통함을 애써 숨기고 웃는다. 그는 실로 현명하다, 그가 사랑하는 모든 이를 완벽히 치유하는 법을 알고 있으니. 그리고 그는 실로 비통하다, 그 누구도 당신에게 빼앗긴 기억을 되찾으려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잊은 대신 당신에게 남은 깊은 상흔을, 자신의 것과 같은 그 흉터를 알아보지 못하니까. 그는 언제나 외로울 수밖에 없고, 고독할 수밖에 없다. 타인과의 소통.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그 누구도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유일한 기억에 대한 이야기이다.
헥스 헤이와이어의 상담실은 예약제로 운영되고 있었는데 때로 운이 좋게도 쉬는 시간 혹은 예약 사이 빈 시간에 찾아오는 학생을 일부러 내쫓지는 않았다. 다만 상담 시간이 부족할 수 있다는 점, 다음 내담자와의 약속이 있다는 점, 때문에 깊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을 충분히 고지한 뒤 대화를 시작한다. 상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담사와 내담자의 신뢰 구축으로, 내담자가 상담사를 완전히 믿고 자신의 내면을 털어놓아야만 비로소 진정한 상담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헥스 헤이와이어는 그런 번거로운 과정을 생략하고 곧장 당신의 트라우마로 진입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에게도 꽤 부담이 되는 일이고, 이미 타인의 고통으로 잡동사니가 뒤엉켜 폐허처럼 변한 그의 내면에 또 다른 것을 들여 오기에는 지나치게 그가 지쳐 있기에 그는 일반적으로 대화를 선호한다.
그 시간에 찾아올 사람은 없었다. 예약은 비어 있었고, 헥스 헤이와이어는 그의 상담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내용에 좀 집중한 탓에 노크 소리를 늦게 들었던 것도 같다. 하지만 헥스 헤이와이어는 너무 늦지 않게 들어오라는 말을 할 수 있었고, 그래서 부드럽게 문이 열리고 한 학생이 들어올 때 읽던 책에 가름 끈을 끼워 책상 위로 올려 놓을 수도 있었다.
조금은 쭈뼛거리며 긴장한 기색이 완연한 모습으로 들어온 그 학생은 안색이 다소 창백하고 겁에 질린 것처럼 눈이 커다랬다.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며 상담실을 살펴보던 그 학생은 등 뒤로 문을 닫고 헥스 헤이와이어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손을 조금 흔들어 보였다. 헥스 헤이와이어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맞은편 의자를 권하듯 손을 뻗어 가리켰고, 학생은 천천히 걸어 헥스 헤이와이어의 책상 앞에 놓여 있는 푹신한 의자로 다가왔다. 걸음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헥스 헤이와이어가 도로 자리에 앉고, 학생도 자리에 앉았을 때. 약간의 정적이 흘렀고 침묵이 유지되었다. 헥스 헤이와이어는 재촉하지 않고 그가 준비되기를 기다려 주었다. 이곳까지 찾아온 것만 해도 꽤 용기를 낸 결정이었기에 이렇게 와서 입을 열어 자신의 문제를, 고민을, 무언가 내면을 털어놓는 데에는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헥스 헤이와이어의 안경 뒤로 눈꺼풀이 느리게 움직였다. 천천히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뜬 그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고, 마침내 학생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방해한 게 아니라면 좋겠는데요…….”
“상담실은 언제나 모든 학생에게 열려 있어. 예약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
“아, 그럼, 예약이 이미 잡혀 있나요?”
“운이 좋게도 지금은, 아니. 그렇지만 30분 뒤에는 있어. 그러니 우리가 얘기를 나눌 시간은 20분에서 25분 남짓인데, 괜찮겠어?”
“저는…… 괜찮아요. 쉬는 시간을 빼앗아서 미안해요…….”
“전혀 미안해 할 필요 없어.”
그는 그제야 마음이 좀 놓인 듯 헤헤 웃었다.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어깨가 약간 힘이 풀리면서 움츠러들었던 몸도 펴졌다. 하지만 곧장 본론을 꺼내지는 못했다. 약간의 정적이 흐른 뒤, 그는 다시 조심스럽게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며 입술을 우물거렸다.
“당신이…… 당신의 상담이 다른 많은 학생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들었어요.”
“그들이 그렇게 여겨 준다면 꽤 감사한 일이지.”
“저도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것 같아서요…….”
말해 봐. 헥스 헤이와이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낮게 속삭였다.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학생은 길고 얕은 한숨을 뱉었다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감은 그대로,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죽을 수가 없어요.”
헥스 헤이와이어는 잠시 침묵했다. 적절한 대답을 떠올리기 위해서였지만, 그 어떤 대답이 적절한지 얼른 결정하기 어려웠다. 질문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우선, 자살 시도를 하였는지. 하였다면, 그것이 실패한 것인지. 혹은 성공했는데 다시 살아난 것인지. 아니면, 성공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왜 그런 시도를 하였는지, 어디에서, 언제, 어떻게, 무엇으로. 아니면 어떤 암시적인 말인지. 죽고 싶은 상황인데 어떤 이유 때문에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할 수 없다는 얘기인지. 헥스 헤이와이어가 잠시 침묵하는 사이, 그 학생은 배시시 웃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맥이 탁 풀려 웃어버리는, 그런 힘없는 미소였다.
그 미소 때문에 헥스 헤이와이어는 자신이 지금까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통째로 잊어버렸다.
“음, 너무 앞뒤 없는 말이었죠.”
“괜찮아. 네가 편한 방식으로 얘기하면 돼.”
“……좋아요.”
그는 천천히 심호흡했다. 다시 눈을 감은 뒤, 입술이 열렸다. 그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어쩌면 예상한 것이었고 혹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아니면, 바라지 않았던 것이거나.
“도와줄래요?”
“…….”
헥스 헤이와이어는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는 이미 자살 사고를 겪고 있는, 자살 시도를 한, 자해 충동을 겪고 있는, 실제로 자해를 하는 내담자들을 만나 왔다. 그리고 헥스 헤이와이어는 그들을 언제나 적절한, 최적의 방식으로, 그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는 방식으로 그들을 구원했다. 깊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직접 물에 들어가는 것은 같이 익사하기에 좋은 행동이지만, 헥스 헤이와이어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깊은 물로 뛰어들어야 했고, 절벽 아래로 뛰어내려야 했으며, 불타는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고 가시 면류관을 써야 했다. 닿아야 했다.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그를 위험에서 구해내기 위해 자신의 무언가를 내어 주고, 희생하고, 건져 내고, 그렇게 모든 문제를 해결해 왔다. 때문에 그는 이런 내담자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프로였다.
하지만 혼자 죽을 수 없으니 타인의 손을 빌려서라도 죽겠다는 사람을, 단순히 십 몇 분만의 상담으로 마음을 돌려 놓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딱 잘라 도와줄 수 없다고 대답하는 것은 최악의 대답이다.
“우선은, 상황을 좀 더 정확히 알고 싶은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음.”
학생은 약간 고민하는 듯 눈썹을 조금 찌푸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천진하고 선량한, 어쩌면 모범적으로까지 보이는 학생 한 명이었다. 헥스 헤이와이어는 겉모습이 사람의 모든 것을 설명해 주지는 않지만, 어떤 것들을 암시하고 상징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죽을 수 없다고 말하는 그는 슬픔에 절규하지도 않고 비명을 지르지도 않고 있다. 그저 차분히 상담실로 찾아와, 노크를 하고, 인사를 하고 안으로 들어와, 지극히 정상적이고 또 고요하게 상담사의 앞에 앉아 ‘죽을 수가 없는데, 도와 줄래요?’ 라고 말하는, 어떻게 보자면 침착하게 미쳐 있는 것 같은 태도. 잘 단속되고 절제된 우울. 헥스 헤이와이어는 지나치게 우울한 나머지 자신의 우울이 타인에게 피해를 입힐까 봐 우울한 내색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감정을 불신하고 의심하고 단속하는 가엾은 자.
“……말하자면 좀 길어질 것 같아요. 혹시, ……예약을 하고 가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야. 이름과 연락처를 알려 줘.”
“이름은…….”
그는 자신을 시린 시클링이라고 소개했다. 이어서 핸드폰 번호를 불러주었고, 자신이 가능한 날과 헥스 헤이와이어의 상담 시간이 비어 있는 날을 골라 적절한 시간을 예약할 수 있었다. 헥스 헤이와이어는 그 예약을 꼼꼼하게 메모했고, 다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시린은 한결 안심한 것처럼 환하게 미소를 짓고는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럼, 다음에 올게요.”
“조심히 가. 다음에 봐.”
시린은 눈을 접어 웃으며 가볍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들어왔던 그 때처럼, 조용히, 거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게 걸어 부드럽게 열리는 문을 연 그가 밖으로 나가고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 헥스 헤이와이어는 문득 어떤 갑갑함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꼈다.
예약을 잡은 그가 다음 예약에 와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꼭 살아서 와 주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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