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NDM

중력

After CCA

某日 by 銘


한밤중에 문득 잠에서 깨면 마주하게 되는 것이 있다. 대개는 벽과 파이프를 타고 퍼지는 함선의 엔진 소리라던가, 야간 근무를 하는 승무원의 기척이라던가, 아직 잠들지 않은 옆 방에서 흘러나오는 물 소리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간혹 정말 드물게도 경계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평화로운 운행 중에는 그런 생활 소음조차 없는 조용한 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전자기기의 파워가 낮게 웅웅대는 소리만을 들으며 어둠에 가만히 잠겨 있자면 어느 순간 의식은 아득해지고 신체는 나른해지다가 제 몸이 서서히 떠오르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제가 곧 우주와 한몸이 되어 4광년 거리의 센타우루스자리나 심지어는 250만 광년의 안드로메다 은하까지도 얼마든지 날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잠에서 깬 아무로 레이는 제 허리를 감싼 타인의 팔을 느낀다. 세간의 통념대로라면 무의식 중에도 흘러나오는 동거인의 애정을 뜻하는 몸짓이겠으나 아무로는 그런 일반론이 그들에게 적용되기엔 너무 단순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이 팔은 애정이라기보다는 구속이고 제약이었다.

우주에서는 으레 그런 이야기를 한다. 어스 노이드는 지구의 중력에 영혼을 붙잡힌 존재다. 무수한 환경오염의 근원인 주제에 책임은 회피하고 기득권도 놓지 않으려는 이들을 비판하는 그 문장은 역설적이게도 시적이며 아름다운 데가 있었다. 샤아는 거기에 한 술 더 떠 한층 더 문학적인 비난을 곁들이곤 했다. 그들은 A.D. 시대의 필름 사진이다. 두 발 딛고 설 수 있는 단단한 땅 이외의 것을 상상할 수 없어 지구에 박제당한 것이지. 스스로 자멸을 선택한 주제에 그것이 안정인 줄 알고 만족하는 모습이라니. 아무로는 이 팔이 그들이 신랄하게 언급하던 중력 같다고 느낀다. 그렇다면 그는 이제 샤아 노이드 같은 호칭으로 불려야 할지도 모른다. 아무로 레이의 영혼은 우주도 지구도 아닌, 샤아 아즈나블이라는 한 개인에게 속박되어 있으니까.

열다섯의 그날을 기점으로 아무로의 인생은 180도 바뀌었다. 기계공학에 몰두하던 내성적인 소년은 연방의 하얀 악마이자 모빌슈트대의 백전노장 선봉장으로 변모했다. 반 강제로 올라탔던 모빌슈트의 콕핏이 나중에는 제 침대보다도 친숙하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서른도 안 된 청년의 인생은 절반이 전쟁이었다.

사이드 7의 일개 민간인이던 아무로 레이의 인생을 그렇게 만든 것은 바로 이 옆에 누워 있는 남자, 샤아 아즈나블이었다. 모빌슈트의 기본적인 매뉴얼만 대충 파악한 채 무작정 뛰어들었던 때로부터 비롯된 지긋지긋한 인연은 십 년이 훨씬 넘도록 이어졌다. 진심으로 죽이려 했던 적도 있었고 동지로서 손을 맞잡은 적도 있었으며, 반가움, 기대감, 실망감, 배신감,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을 경험했다. 아무로 레이에게서 샤아 아즈나블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만큼 그들의 운명은 복잡하게 엉겨 있었다. 자르지 않고서는 도저히 매듭을 풀 수 없는 실뭉치 같았다. 액시즈 쇼크라는 전무후무한 사건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극한의 확률을 뚫고 그들은 함께 살아남았다.

액시즈 낙하가 실패했음을 안 샤아는 놀랍도록 고요해졌다. 정기적인 회진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입을 다문 채 하루종일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곤 했다. 그를 여기까지 이끌었던 모든 것이 갈가리 쪼개져 대기권에서 전부 산화한 것만 같았다. 껍데기만 남았어. 아무로는 진통제에 몽롱해진 상태에서도 오른쪽 침대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일생 유일한 지침으로 삼았던 사상의 실현도 실패하고 죽는 것에도 실패했다. 목적과 목표를 잃은 샤아 아즈나블에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지쳤다. 이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는 온몸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맥이 빠졌다.

아니, 고작 이런 다섯 글자로 다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아무로 역시 삶을 통째로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거라면 그 오랜 세월 동안 필사적으로 악을 쓰고 맞부딪혔던 우리의 시간은 무엇이 되는지, 온 인생의 목표였던 남자가 모든 걸 포기한 이상 이제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역사상 최악의 테러리스트를 성공적으로 저지했다는 만족감이나 뿌듯함이 아니라 잿더미 같은 원망과 서러움을 느꼈다. 복잡하고도 무기력한 감정이었다.

네오지온으로 돌아갈 수도, 연방군에게 붙잡혀 줄 수도, 누군가에게 몸을 의탁할 수도 없는 샤아 아즈나블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그와 같은 처지인 아무로 레이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걸 뒤로 하고 함께 떠났다. 지난 십여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복잡하게 얽힌 운명에서 서로를 분리하는 방법은 알지 못했으므로.

아무로는 생각한다. 그 어두운 선실에서 우주를 떠다니는 감각을 느낄 수 있었던 건 이 남자가 우주에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그가 우주로의 확장을 꿈꾸었기 때문에 아무로의 감각도 그를 따라 태양계 바깥으로 날아갈 수 있었던 것이라고. 그러나 목적도 목표도 잃고 새로운 정체성조차 찾지 못하는 지금, 이 남자는 그저 존재할 뿐이다. 죽지 못했기 때문에 삶을 이어가고 신체가 기억하는 대로 그저 숨만 쉴 뿐이다. 우주, 지구, 뉴타입, 올드타입, 연방군, 전쟁, 그런 복잡하고 어려운 것은 모두 희미하게 빛바랜 과거의 일이 되었다. 그러니 남자가 더는 우주를 꿈꾸지 않는 이상 아무로의 감각도 다시는 우주로 떠오를 수 없을 것이다. 아무로 레이의 영혼은 이곳에 붙박인 샤아 아즈나블에게 붙잡혀 있으므로.

아무로는 눈을 감았다. 몰려오는 수마가 다시금 자신을 덮치는 것을 느끼며 그는 남자의 팔에 제 손을 겹쳤다. 낮은 목소리가 잠결에 아무로의 이름을 불렀다. 허리를 감싼 팔이 더 단단해지고, 아무로는 천천히 몸에서 힘을 뺐다. 점점 아득해지는 그의 의식은 하늘로 날아가는 대신 땅으로 침잠했다. 어둡고 무거운 샤아 아즈나블의 중력에 이끌려, 끝을 알 수 없는 우물 같은 아래로.

우울하면서도 배덕한 인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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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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