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행자들
After CCA
불길한 예감은 어째 틀리질 않는다더니.
출발할 때부터 엔진 소리가 묘하게 마음에 걸린다 싶긴 했지만 정말로 차가 고장날 줄 누가 알았을까. 심지어는 민가고 뭐고 아무것도 없는, 오로지 광활한 황야를 가로지르는 4차선 도로만이 덩그러니 놓인 이 외진 곳에서. 설마 무슨 일이 생기겠냐고 안일하게 굴며 빨리 출발하자고 보채던 동행인 녀석들의 멱살을 당장이라도 틀어쥐고 싶다는 표정을 한 채로 그들은 힘없이 멈춰 선 자동차를 당혹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너 공학부라고 하지 않았었냐? 내가 전공한 건 유체역학이지 엔진 수리가 아니야. 하등 쓸모도 없는 말싸움이 잠시 오갔다.
아무리 시동을 걸어보아도 찰찰찰찰 소리만 나고, 보닛을 열어봐도 뭐가 문제인지 알 수도 없고. 모처럼 기분 한 번 내겠다고 빌린 클래식카가 괜한 물건이 되어버렸다. 설상가상으로 황야랍시고 위성 권역에서도 벗어나 있는 것인지 통신도 연결이 되지 않았다. 오는 길에 주유소가 하나 있기는 했지만 그것도 벌써 1시간도 전의 일이다. 도로를 전세 낸 기분에 잔뜩 신이 나 시속 100km가 넘게 밟아댔으니 그 1시간 동안 얼마나 멀리 왔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걸어서 돌아가기엔 너무 아득했다. 그야말로 이곳에 손발이 꽁꽁 묶인 셈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꼼짝없이 사막에서 밤을 지새우게 생긴 일행은 점점 서로에게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굳이 이 길을 선택해서 대륙 횡단을 하자던 사람이 누구냐는 불평이 터져나옴과 동시에 한차례 더 격렬한 말싸움이 오갔다. 그러나 아무리 입씨름을 해도 해결책이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으니, 어쩔 수 없이 다시 조용해진 그들은 초조한 얼굴로 차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어이, 잠시만. 저기 뭔가가 오는데?"
누군가가 그렇게 외치며 저 앞쪽을 가리켰다. 남은 세 쌍의 눈동자가 일제히 그쪽으로 향했다. 그 말대로였다. 저 멀리, 지평선 가까이에 무언가 빨간 것이 어른거렸다. 한 명이 잽싸게 가방에서 쌍안경을 가져왔다. 어디 협곡에라도 올라가면 써 보겠다고 챙겨 온 것이 이런 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자동차다! 쌍안경을 눈에 댄 사람이 반색하며 소리쳤다. 반대편 차선에서 빨간 차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됐다, 우리 이제 살았어! 도움을 받을 수 있겠다! 그렇지만 혹시 모르잖아? 그냥 지나칠 수도 있고. 절대 그러지 않게 해야지. 설마 곤경에 빠진 사람을 두고 그렇게 매정하게 굴겠어? 방금 전까지 기운 없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그들은 생기와 희망에 찬 눈으로 반짝이는 시선을 교환헀다.
가장 키가 큰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빨간 차가 자신들을 충분히 발견할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오기를 기다려 팔을 크게 휘저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행히도 빨간 차는 그들을 지나치지 않고 적당한 위치에서 매끄럽게 멈춰섰다. 운전석의 창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고개를 내밀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같은 남성조차 진심으로 감탄할 정도의 미남자였다. 나이는 서른 중후반쯤 될까. 목과 귀를 다 덮도록 길게 기른 금발과 냉철한 연청색 눈에서는 중세 시대의 초상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귀족적인 분위기가 풍겼다. 동시에 어딘지 묘하게 낯익은 느낌도. 어디에서 봤지? 방송이었나? 차량을 멈춰세운 사람이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운전석의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곤란한 상황인가?"
외모에서 유추했던 것과는 달리 제법 낮은 목소리였다. 어조가 평이한데도 묘하게 이목을 휘어잡는 힘이 있었다. 직접적인 질문을 듣고서야 뒤늦게 정신을 차린 사람이 멋쩍게 뺨을 긁적이며 사정을 털어놓았다.
"아, 예. 차가 잘 가다가 갑자기 멈춰버렸습니다. 어디 고장난 것 같은데 알 수가 있어야 말이죠. 혹시 차를 고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저 뒤에 주유소까지만이라도 태워다 주셔도……."
"차가 고장이 났다고?"
차 안에서 새로운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자세히 보니 조수석에는 또 다른 사람이 창문에 팔을 걸치고 앉아 있었다. 갈색 곱슬머리에 운전자와 똑같은 선글라스를 쓴 남자가 고개를 쭉 빼더니 뭔가를 가늠하는 것처럼 도로 한가운데에 멈춰 있는 차량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운전자가 조수석을 돌아보며 물었다. 고칠 수 있겠나? 글쎄, 자세한 건 봐야 알지. 일단 트렁크나 좀 열어줘. 갈색 머리의 남자는 그렇게 대답하곤 선글라스를 벗어 셔츠에 끼워 넣으며 차에서 내렸다. 덜컹, 트렁크 뚜껑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런저런 짐가방이 들어 있는 트렁크 가장 안쪽에서 커다란 공구 상자를 꺼낸 남자가 허리를 펴고 그들을 돌아보았다. 고칠 수 있으신 겁니까? 조심스러운 물음에 남자가 빙긋 웃었다.
"큰 문제만 아니라면, 아마도. 상태를 한 번 봐야 확실히 말할 수 있겠지만. 저 차인가?"
"네, 그렇습니다."
"흠, 꽤 좋은 클래식카인걸."
"빌린 겁니다. 여행 기분을 좀 더 내보고 싶었거든요."
갈색 머리의 남자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차량 앞 바닥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작업용 장갑 한 켤레를 꺼내어 끼더니 보닛을 열고 안을 둘러보는 모습이 이런 일에 꽤 익숙한 듯 보였다. 쯧. 엔진 이곳저곳을 만져보던 남자가 눈썹을 찌푸리며 가볍게 혀를 찼다. 심각한가?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언제 내린 것인지, 운전석에 있던 금발 남자가 어깨 너머로 엔진을 같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조수석의 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일단 직접적인 원인은 엔진 과열이야. 아까 이게 빌린 차라고 했던가? 소유주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돌아가면 한 소리 해줘도 되겠어. 정비가 엉망이야. 어떻게 이런 차를 이 지경이 되도록 그냥 둘 수가 있지? 지금까지 몰고 온 게 기적이군."
"오래 걸리겠나?"
"별로. 어차피 지금은 여건이 안 돼서 정밀하게 볼 수도 없어. 급한 부품 몇 개를 교체하고 냉각수를 다시 채워주는 정도밖에 못 하지. 그래도 그 정도면 여행이 끝날 때까지는 문제 없을 거다. 부품도 가지고 있는 걸로 어떻게든 될 것 같고."
"항상 그 공구 상자가 지나치게 크다고 생각했는데 이럴 때는 도움이 되는군."
"뭐든 있으면 없는 것보다 낫다니까 그러네."
"어느 정도 동의는 하네만 그런 것치고도 자네는 짐이 너무 많아."
금발 남자의 핀잔에 공구를 쥔 남자가 소년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시작해 볼까. 어딘가 즐거운 목소리로 중얼거린 남자는 몇 가지 도구를 더 꺼내더니 곧장 엔진을 수리하기 시작했다. 렌치가 제 몸의 일부인 양 막힘없는 손길로 여러 가지 부품을 끼우고 풀고 빼는 걸 경탄에 찬 눈길로 바라보던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능숙하신 걸 보니 차를 잘 아시나 봅니다."
"차를 잘 안다기 보다는, 그냥 기계를 좀 좋아할 뿐이지."
"군 메카닉도 이렇게까지 기계를 잘 다루진 못할 겁니다. 대단하십니다."
"군이라……. 군을 잘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는군."
"아, 예. 잘 안다고 말하기는 사실 부끄럽습니다만……. 저희는 연방군 신병입니다. 2주 뒤면 자대 배치를 받는데 그 전에 훈련소 동기들과 같이 여행을 왔습니다. 그동안 같이 지내며 정이 많이 들었는데 흩어지면 또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연방군 신병. 그 말에 금발 남자의 눈썹이 미미하게 들썩였다. 엔진을 고치던 남자도 손길을 잠시 멈추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단번에 교차했다. 어딘가 긴장감이 감도는 눈이었다. 갈색 머리의 남자가 청년들 쪽을 쳐다보자 금발 남자가 팔짱을 풀었다. 슬그머니 허리 뒤쪽으로 향하는 손길이 심상치가 않았다. 금방이라도 무슨 일을 벌일 것만 같은 모양새였다.
하지만 잔뜩 긴장한 두 남자와 달리 여행자들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자기들끼리 신나게 떠드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다. 자신들이 훈련소에서 어떻게 만났고 어떻게 우정을 지속하게 되었는지를 잔뜩 자랑처럼 늘어놓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 녀석이 저희 대신 다 뒤집어쓰는 걸 보고, '아! 이런 의리라면 정말 평생 갈 놈이겠구나!' 싶었다니까요? 내가 그때부터 블레이크를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선언한 거 아니냐. 웃기시네, 오늘도 나한테 제일 많이 화를 낸 사람이 누군데. 그건 아까 상황이 너무 당황스러워서 그랬던 거고. 다 알면서 이렇게 계속 쪼잔하게 굴기냐?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 모습을 탐색하듯 쳐다보던 금발 남자가 이윽고 엔진 쪽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갈색 머리의 남자가 픽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여행자들이 뭔가를 알아차린 기색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자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친절한 호의를 베푸는 행인의 얼굴로 감쪽같이 되돌아갔다. 금발 남자가 다시 팔짱을 끼자 갈색 머리의 남자가 탕 소리를 내며 보닛을 닫았다.
"끝났다."
"벌써 말입니까?"
여행자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15분 정도밖에 안 된 것 같은데! 정말 다 고치신 겁니까? 대단하십니다! 차량 주변으로 와글와글 모여드는 청년들을 바라보며 갈색 머리의 남자가 빙그레 웃었다. 시동을 한 번 걸어보겠어? 이제는 별 문제 없을 것 같지만, 혹시 모르니까. 한 사람이 신이 나서 운전석으로 뛰어 들어갔다. 열쇠를 밀어넣고, 브레이크를 밟은 채, 한 번 돌린다. 부르릉. 엔진이 점화하는 소리에 환호성이 터졌다.
"무사히 시동이 걸려서 다행인걸. 여행이 언제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며칠 정도라면 그럭저럭 버텨줄 거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중간에라도 정비는 한 번 더 받는 게 좋겠어."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차 한 번 봐준 게 뭐가 대수라고."
"아닙니다.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저희는 이 사막에서 조난당했을 겁니다. 여긴 통신 위성도 안 잡혔거든요."
"통신 위성이?"
갈색 머리의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확실히 이런 곳까지 위성을 띄우는 건 자원 낭비지만……. 그래도 라디오를 손볼 수 있다면 최소한 수신 정도는……. 뭘 생각하는지 턱을 매만지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의 어깨에 금발 남자가 손을 얹었다. 늦었어. 우리도 이만 가야 한다. 재촉하는 소리에 뒤를 돌아본 갈색 머리의 남자가 짧은 한숨을 내쉬고 알겠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이제 가시는 겁니까? 차를 둘러싸고 있던 청년들이 일제히 달려나와 남자들에게 다시 한 번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신세를 크게 졌습니다."
"감사합니다."
"동행이 도움이 되어서 다행이군. 남은 여행에서는 큰 일이 없길 바라네. 즐겁게 다니게나."
"예, 선생님들도 즐거운 여행 되십시오."
두 남자는 자신들의 차로 돌아가 처음 앉아 있었던 대로 각자 운전석과 조수석에 올랐다. 시동을 걸고 자리를 떠나며 슬쩍 백미러를 보니 청년들이 손을 흔들어 이쪽을 배웅하고 있었다. 이런 작은 호의가 뭐라고 아무런 경계심도 의심도 없이 친근하게 구는 모양새에 금발 남자가 가소로워하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저 청년들은 차를 고쳐 준 사람이 건담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인물이라는 걸 알는지 모르겠군."
조수석에 앉은 남자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등받이에 몸을 깊숙히 묻었다.
"나보다는 당신 정체가 더 충격일 텐데. 네오 지온의 전 총수가 이런 데서 유유자적하게 여행이나 하고 있을 거라고 누가 감히 상상하겠어."
"그것도 연방의 하얀 악마와 함께 말이지."
"아……. 설마 당신 입에서 그 호칭이 나올 줄이야."
"싫은가? 자네를 향한 존경의 표현이다만."
"당신한테는 듣고 싶지 않아. 존경은 무슨, 놀리는 게 분명하잖아."
동행인의 불만스러운 반응에 운전자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진심으로 불만을 표한 것은 아니었는지 조수석의 남자도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열린 차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체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지는 바람의 소리가 거셌다. 속도가 오르면 오를수록 공기의 마찰이 심해졌다. 눈을 감고 들으면 과거에 지겹게 듣던 폭발과도 닮은 구석이 있는 소리였다.
하지만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오랜 기간 몸담았던 전쟁터가 아니다. 모든 역사의 중심에서 물러난 그들은 더 이상 과거에 잠겨 있을 이유가 없었다. 남자는 눈을 뜨고 창밖으로 팔을 뻗었다. 맨살에 부딪히는 바람이 무거우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위험하다, 아무로. 운전석에서 즉각적인 경고가 흘러나왔지만 그는 태평한 표정으로 가만히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샤아, 액셀을 좀 더 밟는 게 좋겠어. 제 생각에 완전히 반하는 동행인의 주문에 운전자는 잠시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그가 원하는 대로 속도를 조금 더 높여주었다. 고마워. 웃으며 인사를 던진 그는 다시금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갈색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는 강렬한 바람에 가슴 벅찬 해방감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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