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사랑이 있기를

고죠유지

*종이책 Let there be love로 발행한 전체 분량입니다

*N년후 if, 동거하는 고유

*21년 연말에 썼던 글이니만큼 현재 원작 전개나 캐해석과 맞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감안하고 읽어주세요ㅠㅠㅋㅋㅋ

아마 무슨 스릴러 영화였던 것 같다. 이타도리는 처음엔 웃기도 하고 고죠에게 말을 걸기도 하더니 금세 화면에 빨려 들어가듯 몰입했다. 허벅지를 베고 누운 하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던 손이 천천히 느려졌다. 곱게 감겨있던 흰 속눈썹이 팔랑이고 불만이 차오른 푸른 눈이 영화에 푹 빠진 유지를 올려다보았다. 주인이 쓰다듬기를 소홀히 할 때 항의하는 강아지나 고양이의 눈빛이지만 이타도리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고죠는 커다란 몸을 꾸물거리며 돌아 누워선 이타도리의 배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제야 기계적으로 쓰다듬던 손을 멈춘 이타도리가 이쪽을 내려다보았다.

‘선생님, 졸려? 소리 줄일까?’

‘아니···’

더 쓰다듬어줘. 세 살짜리 어린아이 같은 요구를 정말 입 밖의 언어로 냈는지, 이타도리가 눈치 챈 것인지는 모르겠다. 끝이 동그란 손가락들이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고는 다시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똑같은 36.5도일 텐데 유달리 따뜻한 것 같았다. 그대로 잠이 들어버리도록.

고죠는 번쩍 눈을 떴다.

··· 이게 무슨 꿈이지.

한참 꿈벅이던 푸른 눈이 창 밖을 내다보았다. 새벽과 아침의 경계인 이른 시간, 어제 늦게 잠든 걸 생각하면 더 자야 한다. 머릿속이 어지러웠지만 억지로 다시 눈을 감았다. 그 상태로 버티던 고죠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뒤척였다. 옆으로 누웠다가, 똑바로 누웠다가, 급기야 이불이 몸에 감기는 감각에 짜증이 올라오자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이 머릿속으로 잘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고 후드 모자를 뒤집어쓴 채 고죠는 발소리를 죽이며 거실을 가로질렀다. 거실 건너편 방을 쓰는 동거인은 아직 깨어나지 않은 시간이다. 그는 조용히 신발을 신고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근처 공원. 한 바퀴 뛰기엔 괜찮은 장소였다.

시원한 아침 바람을 맞으며 공원을 돌고 상쾌해진 기분으로 고죠는 집으로 돌아왔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자 따뜻한 백열등 불빛과 달콤한 빵 굽는 냄새가 먼저 그를 반겼다.

“고죠 씨?”

그리고 부지런한 그의 동거인이 주방에서 고개를 쏙 내밀었다. 왜 문 밖에서 들어오냐며 동그래진 호박색 눈이 문 닫힌 고죠의 방과 고죠를 번갈아보았다. 귀여워. 기껏 정리되었던 머릿속이 단번에 어지러워졌다. 고죠는 그에 복수하듯 복슬한 분홍색 머리를 헝클였다.

“오늘은 일찍 깨서 한 바퀴 돌고 왔어.”

“응, 아침으로 팬케이크 했는데 괜찮지?”

“좋아.”

“손 씻고 와.”

시키는 대로 손을 씻고 식탁에 착석하면 고죠의 앞에 팬케이크 접시가 놓였다. 고죠의 취향에 맞춰 달콤한 크림을 가득 얹은 팬케이크. 고죠는 그리 식욕이 없지만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의 동거인, 이타도리 유지는 요리를 잘하는 만큼 남한테 먹이는 걸 좋아한다. 팬케이크를 크게 잘라 한 입에 넣고 씹으며 맛있어, 말해주면 맞은편에 앉은 이타도리가 환하게 웃었다.

두 사람의 아침의 식탁엔 이타도리가 매일 원두를 갈아 내리는 드립 커피 한 주전자가 놓여있다. 고죠가 제 잔에 커피를 따르자 이타도리는 식탁에 늘 상비해두는 통을 열어 각설탕을 넣어주었다. 고죠는 커피를 홀짝여 팬케이크로 막힌 목을 적시고, 메이플 시럽을 뿌린 팬케이크를 부지런히 잘라 먹는 이타도리의 잔에도 커피를 따랐다. 아무것도 넣지 않은 커피만 마시는 이타도리와 커피엔 무조건 설탕을 넣어 마시는 고죠지만 두 사람은 그럭저럭 박자를 맞춰 함께 살고 있다.

식사를 마친 후 정리는 고죠의 몫이다. 그동안 이타도리는 출근 준비를 한다. 오늘 고죠는 느지막이 임무가 있다. 잘 다녀와. 출근하는 이타도리를 배웅해주고 설거지를 한다. 마친 후엔 집안을 둘러보다 청소기를 꺼냈다. 거실, 고죠의 침실, 서재, 창고로 쓰는 방, 부엌을 열심히 청소기로 밀고 고죠는 문이 조금 열려있는 이타도리의 방 문 앞에 멈췄다. 두 사람의 동거는 말하자면 하우스 쉐어에 가까운 형태로, 퍼스널 스페이스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서로의 침실은 암묵적으로 건드리지 않고 있었다. 며칠 전에 한 번 들어가 보긴 했지만.

이타도리는 빵집에서 일한다. 나이 든 사장 부부와 이타도리 셋이서 운영하는 작은 빵집에선 분기 별로 한 번 정도 회식을 하는데, 고죠는 그날 밤 이타도리가 술에 취한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귀가 새빨개졌을 뿐 얼굴은 신기하게 멀쩡해 보이고 몸도 잘 가누더니 소파에 드러눕자마자, 고죠가 술 마셨다더니 멀쩡하네? 유지, 그건 그렇고 저거 봐 웃기지, 하고 텔레비전을 가리키며 고개를 돌린 그 사이에 기절한 듯 잠들어버렸다. 인간이 이렇게 빨리 잘 수 있는 거였나? 고죠는 그 자리에서 기절해 꿈쩍도 하지 않는 이타도리를 깨워보려다 실패하고 결국 안아 올려 침대로 데려갔다. 체온이 올라가 따끈한 데다 축 늘어져 물렁한, 성인 남자 사이즈의 뜨끈하고 묵직한 모찌를 안아 옮기는 기분이었다.

본래 고죠 혼자 살던 적에 손님방이었던, 이젠 이타도리의 방은 성격답게 아늑할 정도로 적당히 어수선했다. 술에 취한 모찌를 침대에 눕혀준 고죠는 기왕 서비스해준 거, 양말도 벗겨주고 이불도 끌어올려 덮어주었다. 혹시 모르니까 꿀물이라도 타두면 좋을까, 생각하면서 뒤돌아 나가려는데 소매를 붙잡는 힘이 느껴졌다. 돌아보자 이타도리였다. 눈을 가물거리면서 미약한 힘으로 소매를 붙잡는데, 이건 뭔 괴상한 술버릇인지 황당하면서도 왠지 웃음이 나왔다. 같이 살게 된 지 반 년쯤 되었나, 알게 된 지는 일 년이 넘은 것 같은데 오늘 새로운 모습을 본다 싶어서. 고죠가 침대에 엉덩이를 붙이자 제대로 뜨지도 못한 눈으로도 뭘 봤는지 이타도리가 배시시 웃었다. 뭐가 그렇게 좋을까.

‘유지, 얼른 잠이나 자.’

‘으응···’

이타도리는 몸을 꼼지락거리더니 손을 뻗었다. 하얀 속눈썹이 놀라 깜박였다. 뜨끈하고 힘없는 손가락들이 침대를 짚은 고죠의 손등을 천천히 매만졌다. 희고 매끈한 피부와 파랗게 솟은 핏줄 따위를 어루만지는 움직임은 목숨보다 귀한 것을 대하는 양 더없이 애틋하고, 동시에··· 

고죠는 침을 삼켰다. 그가 손끝을 움찔거리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동안, 손등을 매만지다 말고 이타도리는 잠들어버렸다. 고죠는 한참 후에야 불을 꺼주고 방에서 나왔다. 벌겋게 달아오른 귀는 도저히 식지를 않는 채였다. 고작 손을 그렇게, 야하게 만질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하지만 그뿐이고, 다음 날 숙취로 얼굴이 허옇게 뜬 이타도리는 집에 들어온 직후 기억이 끊긴 모양이라 고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 날의 기억을 묻어버렸다. 그러는 게 맞았다. 아직도 그 날 손등을 쓰다듬던 손가락을 생각하면 그 감촉까지 떠오를 만큼 생생했지만··· 그렇다고 이상한 꿈까지 꾸게 만들 정도인가? 간밤의 꿈은 내용도 이상했지만 도저히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도 신경을 긁고 있었다. 고죠는 수면 시간이 짧은 만큼 자는 시간만큼은 푹 자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꿈을 꾼다 해도 지난 날 처리한 주령 따위가 혼란스러운 모습으로 뒤섞여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단편적인 이미지들뿐으로, 이렇게 선명하고 현실적인 꿈은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고죠는 청소기를 든 채 멍하니 방문 앞에 서서 스스로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꿈이란 보통 손으로 퍼올린 모래 같아서 기억하려고 하면 할수록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흘러내리듯 잊어버리기 마련이었으나, 간밤의 꿈은 생각할수록 화질이 좋아지는 영상 같았다.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왔던 화면은 영화의 제목이 흐릿하게 떠오를 것처럼 익숙했다. 그 텔레비전도 그래, 분명 내가 사지 않았던가? 지하실에 원래 있던 텔레비전이 너무 낡아서, 마음에 안 들어서, 영화를 봐야 하니까··· 고죠는 스스로가 떠올린 단어에 생소함을 느꼈다. 지하실이라니, 무슨 지하실?

Rrrr···

그때 이지치가 건 전화가 아니었다면 그는 이타도리가 퇴근할 때까지 방문 앞에 서있었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걸 떠올린 것 같은데 흐름을 끊어버린 이지치에게 실컷 짜증을 부리고 나자 고죠는 방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잊어버렸다.

구더기처럼 솟아오른 주령을 퇴치하는 임무가 끝난 뒤, 이지치가 사다 준 카라멜 마끼아또를 쭉 빨며 고죠는 걸음을 옮겼다. 그가 졸업했고 지금은 선생으로서 몸담고 있는 주술고전의 결계를 지나면 친숙한 공기가 몸을 감쌌다. 상당한 넓이의 부지에 자리 잡은 학교지만 고죠는 눈 감고서도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있는 곳이다. 담당하고 있는 학생들이 훈련하는 걸 좀 봐준 뒤, 자습을 시키고 나온 선생이 향한 곳은 보건실이었다. 이에이리의 시선이 시계를 향하자 고죠는 항상 그렇듯 학생들 핑계를 대며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몇 년 전, 절대 깨지지 않는다던 옥문강의 봉인이 해제되며 고죠는 기록 상 최초로 옥문강에서 살아 나온 인간이 되었다. 많은 것이 달라진 상황에 한동안 혼란을 겪었다고는 하나, 얼마 간 시간이 지난 뒤 문제 없이 주술사로 복귀했고 다음 해에는 주술고전의 선생 노릇도 다시 시작했다. 알려진 건 여기까지이고, 봉인이 해제되는 과정에서 심신에, 특히 정신적으로 문제를 보여 한동안 두문불출했던 것은 아는 사람만 아는 이야기다. 고죠가 기억하기로는 머릿속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린 것 같았던 기분으로 지낸 나날이었다. 그 구멍에 살이 차오르는 듯한 회복 기간을 거친 후 고죠는 그 당시를 언급하기도 싫어하게 되었지만, 쭉 그의 주치의였던 이에이리가 주기적으로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부르는 데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내키지 않는다는 표시는 꼭 해야겠는지 고죠는 안 그래도 툭하면 지각하던 습관을 무기 삼아 약속 시간을 한참 넘기고서야 나타나곤 했다. 저 생각해서 하는 건데 뻗대는 꼬라지하고는··· 친구의 뺀질뺀질한 얼굴을 일별하며 이에이리는 차트를 넘겼다.

“아-무 문제 없지?”

“좀 때려주고 싶을 정도네.”

“건강과 키를 줄 수 있었다면 진작에 쇼코한테 나눠줬을텐데, 아쉬워.”

“아쉽지, 나한테는 바늘이 있는데 네 주둥이를 꿰맬 수 없다는 것도.”

평소 같은 대꾸를 흘려들으며 고죠는 쇼코가 내어준 커피에 설탕을 넣었다. 절대 나올 수 없다던 봉인을 해제했으니 반동이 오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그 당시 고죠는 기억에 손상이 가서 직접 가르쳤던 제자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으며 우울증을 앓으며 무기력과 불면에 시달리느라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가 깊은 늪 같던 우울을 헤치고 나올 수 있었던 건 망가진 스스로를 견딜 수 없었던 강한 자존심 덕택이었지만, 그 자존심은 빠져나온 우울의 터널을 부정하고 싶어했다. 고죠는 매번 문제 없이 건강하다는 점을 어필하며 검사를 그만두려 들었지만 이에이리는 코웃음으로 그의 요구를 묵살했다.

어릴 적엔 잘 몰랐지만, 고죠는 이제 자신이 이에이리를 이길 수 없음을 알았다. 솔직히 말하면 평생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을 것이다. 검사에 대한 이야기를 포기한 그는 설탕 맛 커피를 홀짝거리며 수다를 떨었다. 이에이리는 귀찮은 티를 내면서도 툭툭 말을 받아주었다.

몇 년 전, 할로윈의 시부야에서 아끼는 후배였던 나나미가 숨을 거뒀고, 얼마 후 그들을 가르쳤던 야가 학장 또한 세상을 떠났다. 학창 시절을 공유했던 이들은 고죠와 이에이리, 이지치 밖에 남지 않았다. 어떤 연대감 같은 것이 있는 건 아니고, 편했던 사이에 낯간지럽게 서로가 더 애틋해진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다. 따지자면 A4용지 한 장 정도의 차이로, 의식하지 못하는 새에 이에이리는 조금 더 물러졌고 고죠는 좀 더 솔직해졌다. 요근래 날씨와 정치사회문화연예주술계뉴스, 신변잡기와 주변인들의 근황 따위가 쉴 새 없는 테니스 경기처럼 두 사람 사이를 왔다 갔다 날아다녔다. 연락을 잘 받아주지 않는 제자들의 안부가 화제에 오르자 이에이리는 얼마 전 쿠기사키가 임무에서 부상을 입어 잠시 들렀었단 이야기를 전했다. 고죠는 커피 맛 설탕물을 마시느라 잠시 말이 없었다. 이에이리는 펜을 빙글 돌리며 친구의 동거인을 떠올렸다. 언제나 같은 대화 패턴이었다.

“근데, 나랑 같이 사는 애 있잖아.”

고죠의 주장으로는, 그의 동거인과 자신이 봉인되었던 해 가르쳤던 제자들의 나이가 같기 때문에 연상 작용으로 생각난다던가.

“핑크머리.”

“어어, 핑크머리, 유지. 내가 꿈을 꿨는데··· 되게 이상했거든?”

“얘기를 따라갈 수가 없잖아. 걔랑 꿈이랑 무슨 상관인데.”

“끝까지 좀 들어줄래? 꿈에 유지가 나왔거든. 좀 이상해서 말야.”

아무리 막역한 사이라도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이상한지까지 말할 수는 없었다. 이에이리는 혀를 찼다.

“나도 며칠 전에 꿈을 꿨는데,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가 나오더라. 전화번호를 불러주길래 로또를 샀어.”

“설마 당첨?”

“그 노친네가 무슨 힘이 있다고 당첨 번호를 불러주겠어? 돈만 날렸지.”

“개꿈이라고?”

“남의 꿈 얘기 재미없다고.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집에나 가.”

“안 그래도 슬슬 갈 생각이었어. 쇼코도 일찍 퇴근하지 그래?”

“갑자기 일만 없으면 그러고 싶은데··· 이지치는? 나도 태워줘.”

“이지치 보냈는데?”

“네가 운전을 한다고?”

“유지 데리러 갈 거라서.”

“걔가··· 데리러 와달라고 해?”

“유-지거든? 괜찮다고는 하는데, 가면 반가워하길래. 그럼 난 간다.”

고죠는 얄밉게 눈을 찡긋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에이리는 얼른 꺼지라며 손을 휘휘 저었다. 산만한 덩치가 사라지고 문이 닫히자, 왠지 빈 것처럼 보이는 공간을 휙 둘러본 이에이리는 고죠의 차트를 내려다보았다.

[Amnesia(기억상실증) f/u(경과 관찰 중)]

이 귀찮은 환자가 유일하게 남은 동기라는 게 그렇게 짜증스러울 수가 없었다. 

 

*

 

고죠와 이타도리가 처음 만난 건 이타도리가 일하는 빵집에서다. 단 것을 좋아하는, 주변인들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환장하는 고죠는 인터넷에 시시때때로 맛있다는 디저트 카페와 빵집을 검색하며 북마크해두고는 한다. 그의 길다란 북마크 목록에는 동네 주민들 사이에서 은근히 입소문이 났다는 시로하토 베이커리라는 곳이 있었는데, 고죠가 퇴근하던 길의 동선에 그 빵집이 우연히 걸린 날이 있었다. 아담하다 못해 낡은 느낌마저 풍기는 작은 빵집이었지만 막 빵을 구웠는지 반쯤 열린 문 사이로 흘러나오는 유혹적인 향기에 홀린 듯이 발을 들였던 것을 기억한다. 계산하는 손님에게 감사합니다, 맛있게 드세요, 이야기하는 핑크 머리 직원의 웃는 얼굴이 가게를 가득 채운 갓 구운 빵 냄새 속에서 오븐에서 부풀어 오르는 빵처럼 동그랗게 피어났던 것도.

그게 벌써 일 년 여 전이었다. 고죠는 일찍 퇴근하는 날은 빵집에 들러 이타도리와 함께 귀가하는 게 어느 새 루틴이 되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빵을 굽는 빵집은 문을 열고 들어서면 달콤한 향기를 머금은 공기로 고죠를 맞이했다. 일을 미루고 일찍 퇴근한 대가로 집에서 마저 보고서를 써야겠지만 빵 냄새를 한껏 들이켜면 후회는 들지 않았다. 종이 울린 소리에 안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던 이타도리가 고죠를 알아보고 반색했다. 

“고죠 씨!”

“유지- 같이 가려고 왔어.”

“퇴근 일찍 했나보네?”

“응. 유지는 언제 끝나?”

“미안, 좀 더 기다려야할 것 같은데···”

“천천히 해.”

“금방 할게, 조금만 기다려!”

배고프면 빵이라도 먹어- 당부한 이타도리는 뒷정리를 하려는지 안으로 다시 사라졌다. 고죠보다 열 살은 넘게 어린 주제에 이타도리는 고죠를 못 먹여서 안달 난 할머니처럼 굴 때가 있었다. 고죠는 카운터 안쪽, 주인이 앉는 자리를 자연스레 차지하고는 계산대 옆에 진열된 작은 쿠키를 집어들었다. 이 가게의 모든 빵과 쿠키, 케이크들은 전부 이타도리의 손을 거친 것이다. 고죠와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유지는 일개 직원이었지만 나이 든 사장이 한 번 크게 아프고 난 후, 가게는 점점 이타도리 혼자 꾸려가는 모양새가 되었다. 아무리 작은 가게라도 쉬운 일이 아닐 텐데 고죠는 이타도리가 힘들다는 티를 내거나 불평 한 마디 하는 걸 본 적이 없다. 내 제자였다면 쉬엄쉬엄하라고 한 마디 해줬을 텐데, 다 큰 애한테 뭐라고 하기도 그렇고. 고죠는 쿠키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처음 먹었을 때는 건강한 맛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느 새 달아진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이 집은 무슨 빵이 맛있어?’

이 빵집을 처음 찾은 날 고죠가 둘러보며 묻자 이타도리는 어물거리며 설탕 코팅이 반짝거리는 글레이즈 도넛을 가리켰다.

‘그... 손님은 이런 거... 좋아하실 것 같은데요.’

혀가 녹을 정도로 달콤한 도넛은 예상 가능한 맛 그대로, 고죠의 입에 딱 맞았다. 마침 위치도 고죠가 혼자 사는 빌라에서 그리 멀지 않아서, 생각날 때마다 종종, 나중에 생각해보니 거의 매일 들리게 되었다. 자주 얼굴을 보다 보니 이타도리와 자연히 말을 트게 되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친해지는 것도 금방이었다. 

그러길 반 년 가량, 이타도리가 안색이 영 좋지 않아 보여 사정을 물은 적이 있었다. 망설이던 이타도리가 고죠의 재촉에 못 이겨 털어놓기로는, 이타도리는 옆 동네의 맨션에 월세 방을 얻어 살고 있었는데, 처음 계약할 때만 해도 도쿄에서 손꼽히게 쌌던 곳의 집값이 이 년 사이에 천정 부지로 올랐고, 월세를 이십 퍼센트 이상 올려야 다음 계약 갱신이 가능하단 얘기였다. 저보다 한참 어린 애가 빵집에서 일하면서 벌어야 얼마나 벌까, 뻔한 월급에 월세가 훅 뛰면 부담이 적지 않을 터였다. 그래봐야 남 얘기, 안타까워하며 큰일이네, 해줘야 할 고죠의 입에선 무의식에나 머무르며 명료한 생각이 되지도 못했던 말이 혀를 타고 흘러나왔다.

‘그럼 우리 집으로 들어올래? 방도 남으니까, 월세는 됐고 밥이나 해줬으면 좋겠는데.’

내가 미친 짓을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하면서도 고죠는 한사코 거절하던 이타도리를 결국 집에 들여 방을 내주었다. 반 년이 지난 지금은 꽤 괜찮은 선택이었다고 자평한다. 이타도리가 만들어주는 요리는 맛있었고 두 사람은 전반적인 일상 생활의 결이, 이를테면 집을 어느 정도 어지르고 사는지, 생활 소음은 얼마나 내는지, 그런 것들이 잘 맞았다. 혼자 살 땐 편하지만 묘하게 비어 보이고 을씨년스러웠던 집이 드라마를 틀어 놓고 빨래를 개면서 웃고 있는 이타도리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훨씬 밝아 보이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제일 중요한 건 이타도리가 편하다는 점이다. 고작 손님과 단골 가게 직원 정도의 사이였음에도 어색하지 않다는 것. 고죠는 가끔 이타도리가 한참 알아온 사람 같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처음부터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했지··· 두서없는 상념에 빠진 고죠의 귓가에 다가오는 인기척이 울렸다.

“고죠 씨?”

“끝났어?”

“응, 거의 다 끝났는데··· 이거, 새로 만들어본 메뉴인데 먹어볼래?”

눈앞에 내밀어진 건 작은 컵케이크였다. 시식을 해주는 게 처음도 아닌데 긴장한 얼굴을 한 이타도리를 올려다보며 고죠는 컵케이크를 받아들었다. 상큼한 레몬 향기가 희미하게 풍겼다. 

“레몬 컵케이크야. 위에는 레몬 휘핑크림이구.”

고죠가 컵케이크를 베어 물자 호박색 눈동자가 크림이 묻어 난 입술로 따라붙었다. 평을 들을 때까지 간식을 기다리는 강아지마냥 잔뜩 긴장해서 쳐다보는 게 재미있어서 고죠는 보란 듯이 심각한 표정으로 케이크를 씹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 먹고 말해줘야 진정성이 있지. 고죠가 케이크를 절반 쯤 먹고, 기다리다 못한 이타도리가 재촉할 요량으로 입을 떼려 하던 순간 차임벨이 울렸다. 어서 오세요-! 활기찬 인사와 함께 이타도리는 벌떡 일어섰다.

“저어, 식빵은 이게 단가요?”

“네, 식빵 종류는 우유 식빵, 토스트 식빵, 꿀 식빵 세 가지예요.”

“뭐가 제일 맛있어요?”   

시답잖은 질문을 해오는 손님을 상대하느라 이타도리의 관심이 떨어져 나가자 고죠는 김 빠진 얼굴로 남은 컵케이크를 먹어치웠다. 상큼한 건 별로 취향은 아니지만, 객관적으로는 준수한 맛이었다. 이타도리가 식빵을 계산해주는 동안 손님이 한 명 더 들어와 두리번거리더니 고죠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190센티가 넘는 거구에 백발과 안대를 한 튀는 외모의 남자가 카운터 뒤쪽에 제 집처럼 앉아서 컵케이크를 먹고 있는 광경이 빵집에서 보기엔 드문 모습인 탓에, 그런 시선은 놀랍지도 않았다. 고죠가 심드렁하게 물티슈를 뽑아내 손을 닦고 있자 손님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단팥빵을 고르기 시작했다. 식빵을 구입한 손님이 사라지자 이타도리는 고죠에게 고개를 돌렸다. 컵케이크에 대한 후기를 말하라는 표정이었다.

“유지, 위험한 거 아냐? 이거 팔면 부자될텐데, 유지는 돈방석에 앉아서 나는 고죠 씨랑 더 살기 싫어요, 하고 집 나가고, 나는 슬퍼서 울고···”

“뭐라는 거야. 맛있었단 뜻이지?”

“유지가 만드는 건 다 맛있으니까.”

말은 그렇게 해도 제법 미식 경험을 쌓아온 까다로운 도련님 입맛인지라, 고죠의 평가는 이타도리에게도 상당히 도움이 되는 편이다. 맛이 없으면 냉정하게 말해주기도 하니까. 이타도리는 안심한 웃음을 지으며 계산하러 온 손님의 단팥빵을 봉투에 담았다. 거스름돈을 받은 손님이 등을 돌리는 순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고죠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이타도리가 팔을 뻗어 제지했다. 아까부터 자꾸 이타도리를 흘끗거리거나, 가게 이곳저곳을 돌아보는 행동 따위가 영 수상쩍었던 인간은 가게를 무사히 빠져나갔다. 고죠가 짜증스러운 시선으로 쳐다보자 이타도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하는 거야? 지금이라도 가서 잡아와야지.” 

“손님이잖아, 괜찮아.”

“어디가? 유지 그렇게 눈치 없는 편 아니잖아? 저 사람 이상하다고 못 느꼈어?”

“그래도 손님이라니까? 나 튼튼하니까 무슨 일 생겨도 대처할 수 있고.”

고죠는 한 마디 쏘아붙이려다 입술을 달싹이며 참았다. 일반인에겐 일반인의 감각이 있는 거겠지.

잠시 뒤 가게의 불이 꺼지고, 문에 달린 오픈 팻말이 클로즈 팻말로 바뀐 뒤 두 사람이 뒷문을 잠그고 나왔다. 근처에 주차된 차로 향하면서, 여전히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고죠를 달래듯 이타도리는 집 근처 편의점에서 오뎅을 사가는 게 어떻겠느냐 물었고 고죠는 마지못해 동의했다. 오뎅과 이타도리가 마실 맥주를 고르고 과자 몇 개를 더 끼워 집으로 돌아오는 길, 고죠는 이타도리의 근처에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지켜봐 줄 사람을 붙여두기로 머릿속을 정리했다. 이타도리에겐 말하지 않았다. 주술사에겐 주술사의 방식이 있지 않은가.

그날 밤, 오뎅을 먹고 보고서를 좀 쓰다가 잠든 고죠는 어느 새 지하실 문을 열고 있었다. 어둑한 조명 속에서 영화가 흐르는 텔레비전 스크린이 하얗게 빛났다. 역광에 눈이 적응되면 텔레비전 앞에 놓인 소파와 그 위로 솟아 오른 복슬하고 동그란 분홍색 머리를 볼 수 있었다. 고죠가 걸음을 옮기자 이타도리가 돌아보았다. 고죠 선생님! 음영 진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 잘 있었어, 유지? 고죠가 다가가 몸을 숙이자 이타도리가 어리광 부리듯 팔을 뻗어 고죠의 목을 끌어안고는 입술을 맞붙였다. 고죠 또한 자연스레 이타도리의 얼굴을 붙잡아 키스했다.

현실의 고죠는 바로 그 순간 벌떡 일어났다.

차라리 이타도리와 섹스하는 꿈이었더라면 나았을지도 모른다. 고죠는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고 관대한 편이었으므로, 무의식의 욕망이 꿈의 장면으로 재현되었더라면 내가 유지랑 섹스하고 싶구나, 인정하고 말았을 것 같다. 하지만 이 꿈에서는 그런 욕망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게 제일 기분이 이상했다. 그저 그의 머릿속은 영화관이며, 자신은 영사기를 돌려 흘러나오는 화면을 지켜보는 관객 같다는 점이.

딩, 경쾌한 알람음과 함께 토스트기에서 통 튀어나온 토스트들을 이타도리가 재빨리 그릇에 옮겨담았다. 고죠는 생크림과 딸기잼, 크림 치즈들을 꺼내 놓으며 이타도리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잠에서 깨어난 후 샤워도 하고 옷도 갈아입고 식사 준비도 마쳤는데 꿈이 도저히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하며 식탁 앞에서도 눈을 가물거리던 평소와 달리 또릿한 고죠를 멀거니 바라보던 이타도리가 고개를 기울였다.

“고죠 씨, 어제 잠 못 잤어?”

“응?”

“표정이 안 좋은 것 같아서.”

“별로···”

고죠는 제 몫의 토스트에 생크림과 딸기잼을 바르고 이타도리는 제 토스트에 크림 치즈를 발랐다. 이 식빵도 시로하토 베이커리의 상품, 그러니까 이타도리가 만든 것이다. 고죠는 생크림과 딸기잼을 두껍게 바른 토스트를 한 입 베어 물어 삼키곤 나직하게 말했다.

“··· 꿈을 꿨는데.”

“꿈?”

“강아지랑, 뽀뽀를 했어.”

“그게 뭐야?”

“개꿈이지.”

“그래서 피곤한 거야? 강아지랑 뽀뽀를 해서?”

너랑 했다고 어떻게 말하겠냐고.

“그건 그렇고 유지, 아- 해봐.”

“응?”

이타도리는 뭐가 됐든 시키면 아, 입을 벌린 다음에야 왜 그러냐고 묻는다. 고죠는 벌어진 입술 사이에 숟가락 가득 뜬 생크림을 쏙 집어넣었다. 입 안에서 스르르 녹아내리는 단맛에 이타도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너무 달아.”

“아침에 단 걸 먹어야 머리가 잘 돌아가거든.”

“고죠 씨는 하루 종일 단 것만 먹잖아.”

의료보험 있는 미국인마냥 먹고 살면서 어떻게 저렇게 컸는지, 몸 관리는 어떻게 하는지가 제일 미스테리라고 이타도리는 여러 번 말했다. 유지도 몸 좋잖아, 따로 식단도 안 하면서. 식단은 안 해도 나는 고죠 씨처럼 먹지 않잖아- 탁구의 핑퐁처럼 주고받는 대화 끝에 고죠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있잖아. 우리 역시 전에 어디서 만나지 않았어?”

“또 그러네.”

이타도리는 웃음으로 말 끝을 흐리며 설탕 병의 뚜껑을 열었다. 처음 말을 텄을 무렵부터 수십 번은 들었던 말이다. 왠지 익숙하다고, 어디서 보지 않았냐고. 

“고죠 씨는 내가 그렇게 좋은가봐.”

“그럼.”

유지 없으면 못 살잖아, 나. 중얼거리며 문득 시선을 떨어뜨린 고죠는 그의 커피에 각설탕을 넣어주는,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을 보았으나, 그럼 고죠 씨가 오늘 저녁 사주는걸로? 농담을 건네며 웃는 이타도리의 얼굴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

 

이타도리의 특기를 하나 꼽자면 방송국마다의 드라마, 와이드쇼, 예능 프로그램과 스포츠 경기 중계 방송들의 방영 스케줄을 꿰고 있다는 것이다. 텔레비전은 생활 소음으로만 여기는 고죠로서는 신비해 보이는 능력인 게, 아무 때 아무 채널을 틀어 놓으면 이타도리는 지금 방영하는 프로그램이 뭔지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열심히 보는 것 같지도 않고, 틀어 놓고선 딴 짓을 하거나 집안일을 하고 있을 때도 많다. 하지만 퇴근한 고죠가 소파에 털썩 드러누워 유지, 지금 뭐 봐? 물으면 커다란 맥주 잔을 꺼내던 이타도리는 텔레비전을 쳐다보지도 않고 TBS에서 하는 드래곤 사쿠라라는 드라마인데-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텔레비전 소리보다 이타도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고죠가 걷어 놓은 양말을 개고 나면 이타도리는 굽고 있던 닭 꼬치를 꺼내왔다. 같이 저녁을 먹지 못하면 고죠가 오는 시간에 맞춰 만들어두곤 하는 야식이다.

이타도리의 맥주 잔과 고죠의 사이다 잔이 짠, 부딪쳤다. 특별할 건 없는 평범한 날이라 별다른 건배사는 없다. 이타도리가 직접 만든 닭꼬치가 얼마나 부드럽고 소스는 얼마나 완벽한지에 대한 고죠의 간증이 끝나면 잡다한 수다가 오가기 시작했다.

이타도리는 술을 마시면 귀 끝이 빨개지고 목소리 톤이 조금 높아진다. 주량을 넘기지 않는 이상 딱 그 정도다. 본인은 술을 마시지 않기 때문에 고죠는 멀쩡한 맨정신으로, 드라마에 등장하는 선생이 어떤지에 대해 길고 쓸데없는 감상을 늘어놓는 이타도리를 관찰할 수 있었다. 지금의 이타도리에게선 그 어떤 위화감도 찾을 수 없다. 하루 종일 바쁘게 일하며 눌러 놓았던 의문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만약 정말로 자신이 몰랐던 게 있다면, 그걸 알고 싶은 건가?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생각이다. 고죠는 이타도리와 만난 적이 없었다. 처음 만났을 적부터 호감이 가긴 했지만, 명문가에서 태어나 살벌한 세계에서 자란 고죠는 아무나 덥석덥석 믿지는 않는다. 이타도리는 평범한 빵집 직원이며, 주술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고죠에 대해서는 돈 많은 사업가 정도로 알고 있었다.

“고죠 씨, 사이다 더 줄까?”

“응. 근데 유지, 그만 마시지?”

“한 잔만 더 할래.”

병 맥주 두 병을 혼자서 비워 내놓고는 이타도리는 새 병을 땄다. 말로는 한 잔이지만 다 마실 것이다. 고죠는 말릴까 하다가 내일이 휴일이란 걸 기억해내고 내버려두었다. 잔과 잔이 부딪치는 청량한 소리가 듣기 좋았다.

드라마와 그 다음 드라마와 금요일 밤 특선 영화까지 끝나자 술상이 치워졌다. 이타도리는 세수하러 들어갔고 고죠는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와 영양제 따위를 보관하는 서랍장을 뒤졌다. 봉인이 해제된 후 고죠를 가장 괴롭힌 건 불면증이었다. 아무리 최강이래도 잠을 못 자면 인간 꼴이 아니게 된다. 고죠는 이에이리의 권유로 수면제를 복용했고, 상태가 나아진 후에도 좀 덜 독한 약으로 바꿔 꾸준히 처방받아왔다. 봉인되기 이전의 삶으로 돌아왔다고 느낀 후에도 일주일에 두세 번 가량은 먹었던 것 같은데, 언젠가부터 손대지 않은 지 한참이라 이 약을 마지막으로 처방 받은 게 언제였는지도 가물가물했다. 고죠는 두 알을 꺼내 바로 입에 털어넣었다.

약을 먹는다고 잘 자게 되는 건 아니라는 건 경험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꿈을 꾸기 시작하면서 일상이 흔들리는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수면제를 먹고 잠들면 꿈을 꾼 적은 없으니까, 기대를 걸어볼 수밖에. 물과 함께 약을 털어 넣고 고죠는 거실 소파에 드러누웠다. 바로 약효가 돌지는 않을테니까, 이타도리가 나올 때까지 잠시만 기다릴 요량이었다. 잘 자라는 인사도 없이 들어가 버리면 매정하지 않은가. 푸른 눈이 천장을 맥 없이 올려다보다, 가물가물 감기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수면제를 덜 먹게 되었던 건 이타도리와 같이 살기 시작한 후부터였던 것 같은데···

이타도리가 세수와 양치를 마치고 나왔을 때 고죠는 소파에 구겨져 자고 있었다.

“고죠 씨, 왜 여기서 자고 있어?”

“··· 응···”

“뭐가 응이야··· 들어가서 자.”

이타도리의 달래는 목소리는 마치 물 속에서 듣는 것처럼 먹먹하게 의식을 파고들었다. 고죠는 제 손을 잡아 문지르는 손가락들을 느꼈다. 이타도리는 사람을 깨울 때, 고죠는 이타도리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깨우는 걸 본 적은 없지만, 대부분이 그러듯이 어깨를 흔드는 게 아니라 손을 잡아 꾹꾹 누르고 문지르며 깨운다. 체온을 전달하려는 것처럼. 고죠는 잠들면 더 예민해져서, 흔들어 깨우면 티는 내지 않아도 기분 나빠한다는 걸 아는 것처럼. 

“고죠 씨, 여기서 자면 안 되는데? 일어나-”

고죠는 이타도리의 손을 끌어당겨 그 손으로 제 눈을 덮었다. 방금 뜨거운 물을 맞고 나오면서 조금 식어서, 적절하게 따뜻하고 촉촉한 물기가 남아있는 피부의 촉감이 기분 좋았다. 이타도리는 무릎을 굽혀 고죠가 원하는 대로 높이를 맞춰주었다.

“일어나기 싫어?”

“졸려···”

“자면 되잖아.”

“··· 이상한 꿈을 꾸거든.”

“이상한 꿈?”

강아지가 뽀뽀한다는 꿈? 이타도리가 되묻자 고죠가 고개를 끄덕이는 건지 젓는 건지 알 수 없는 동작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안아 달라고 칭얼거리는 아이처럼.

“자기 싫어···”

“꿈 때문에?”

“응···”

키가 190센티가 넘는 남자가 잠투정을 하는데 싫지 않은 자신도 이상하긴 하다. 이타도리의 눈매에 웃음이 맺혔다. 이렇게 졸려할 때면 다음 날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흉터와 굳은 살이 여기저기 박힌 손가락들 사이에 하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흩어졌다. 고죠의 숨소리가 점점 낮고 규칙적으로 변해가는 한참 동안, 이타도리는 언제까지고 그러고 있을 사람처럼 잠든 사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죠를 안아 들어 침대에 눕히고 나온 이타도리는 영양제 서랍장을 열었다. 챙겨 먹으라고 아무리 권해도 고죠는 자꾸 까먹는 종합 비타민 따위가 가득한 서랍장 안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약병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 싶더라니, 역시 수면제를 먹은 것 같았다. 후시구로에게 듣기로는, 고죠가 한창 상태가 안 좋을 무렵에도 수면제는 꺼림칙하다고 싫어하는 걸 이에이리가 불같이 화를 내서 먹게 했다고 했다. 그래놓고는 수면제를 먹으면 잠들 수 있게 되자 이에이리가 걱정할 정도로 과하게 복용한 적도 있었고, 천천히 줄이는 데도 꽤 시간이 걸렸다고. 하여튼 극단적인 사람이다. 이제는 안 먹는 줄 알았는데. 이타도리는 서랍장을 닫았다. 

*

약을 먹고 자고 나면 머리가 무겁고 잠이 쉽게 깨질 않았다. 고죠는 식탁 앞에 앉아서도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아릿한 두통에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다행이라면 그 신경 쓰이는 꿈은 다시 꾸지 않았고, 평소 그렇듯 혼란스러운 이미지들의 나열이라 금방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고죠 씨, 오늘은 이거 마셔. 커피 마시지 말고.”

커피는 두통에 안 좋단 말이야. 걱정스레 덧붙인 이타도리가 녹차가 가득 담긴 컵을 건네주었다. 고죠는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녹차를 천천히 홀짝였다. 원래 녹차는 씁쓸해서 싫어하지만, 따뜻한 물이 목을 적시는 감각은 나쁘지 않았다. 고죠는 잠이 덜 깬 눈으로 녹차를 마시며 된장국과 밥을 차리는 이타도리의 동선을 좇았다. 정말 두통이 가라앉는 것 같기도 했다.

그 후 며칠 간은 꿈을 꾸지 않았다. 잠들 때마다 또 꿈을 꾸면 어쩌지, 걱정하다가도 일상에 치여 금방 꿈의 존재를 잊어버린 고죠를 비웃듯, 머릿속 영화관은 예기치 못한 타이밍에 다시 상영을 시작했다.

이번의 꿈은 지하실이 아닌, 어느 평범한 집안이었다. 배경은 달라졌으나 연쇄살인범의 또 다른 범행을 확인한 프로파일러처럼 고죠는 이 꿈 또한 예전의 연장선상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관찰자이면서도 절대자적인 시선으로 관망하게 된다는 점이 늘 같기도 했지만, 먼저 느낌이 그랬다. 고죠는 거실에 놓인 소파에 앉아있었고, 그 소파의 색이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소파와 같은 색이라는 걸 문득 깨달았다. 지금의 소파는 봉인이 해제된 후 이사하면서 자신이 골랐다. 뻔한 우연의 일치겠지만. 소파 아래 깔린 러그에 놓인 그의 발이 리듬을 타듯 까닥거렸다. 그는 잡지를 읽고 있었다. 관광 잡지의 기사를 부지런히 훑으며 마음에 드는 곳이 보이면 종이를 접어 체크 표시를 한다. 현실의 고죠는 언제 마지막으로 여행을 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책장을 넘기다 맛집을 죽 랭크한 기사를 발견한 고죠는 이타도리에게 물었다. 이타도리가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잠들어있었던 것이다.

‘유지, 오사카 가본 적 있어?’

이타도리는 잠투정하듯 머리카락을 고죠의 배 쪽에 문지르더니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몰라···’

‘뭘 몰라?’

‘선생님이랑 가면 다 좋아···’

그러고는 다시 고죠 쪽으로 얼굴을 파묻어버렸다. 더 이상 말 시키지 말라는 것 같았다. 고죠는 그 모습에 귀엽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어리광을 받아주는 꿈 속 자신이 웃고 있다는 걸 자각했다. 그 가슴 속에 번져 오르는 분홍색 감정도. 자신은 이 아이를 사랑스러워하고 있었다. 그게 꿈 속의 자신인지, 지켜보고 있는 자신인지, 그 어느 쪽이 진짜 고죠 사토루인지 알지도 못하는 채로.

고죠는 고개 숙여 이타도리의 볼에 입맞췄다. 

‘나도, 유지만 있으면 어디든 좋아.’

그 순간, 고죠는 현실에서 눈을 떴다. 

오늘의 아침 식사는 시리얼과 우유였다. 고죠는 후르츠 시리얼에 우유를 가득 붓고는, 시리얼이 우유에 눅눅해질 때까지 숟가락을 휘적였다. 바삭한 걸 좋아하는 이타도리는 우유를 붓자마자 아몬드 맛 시리얼을 먹기 시작했다. 전날 밤 야식으로 라면을 먹고 잔 탓에 평소보다 얼굴이 조금 부어있었다. 찐빵 같은 얼굴에 볼까지 빵빵해지니 정말 꾹 눌러보고 싶게 생겼다. 이타도리는 시리얼을 씹으며 고죠를 쳐다보았다.

“근데 고죠 씨가 나보다 일찍 일어난 거 신기해. 엄청 오랜만이지 않아?”

“아니, 오랜만은 아니지.”

“맞을걸?”

“아닌데~?”

말끝을 늘리며 반박하면 뭐가 웃긴지 이타도리가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여튼 웃기기도 쉽고 보람도 있다. 고죠는 눅눅해진 시리얼을 떠먹기 시작했다. 웃는 얼굴에 가슴 속이 간질거리는 걸, 뭐라고 하더라.

원래도 그 꿈은 징하게도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지만 오늘은 정도가 심했다. 왜 배경이 바뀐 것인지, 그리고 유지의 선생님이란 호칭은 대체 뭐란 말인가. 선생과 제자 롤플레이 판타지 따위가 있는 것도 아닌데. 고죠가 상념에 골몰하느라 말이 없자 이지치가 운전하는 차 안의 분위기는 더 말할 나위 없이 삭막해졌다. 평소 같잖은 모습에 흘끔흘끔 룸미러로 뒷좌석을 관찰하며 대對 고죠 사토루 대책을 세우고 있는 이지치에 고죠는 툭 시비를 걸었다.

“이지치, 퀴즈 맞춰볼래?”

“네?”

“벽지는 연한 분홍색이고, 거실 한쪽 벽에 텔레비전이 있고 그 아래에 DVD장이 있어. 하늘색 소파가 그 텔레비전을 보는 쪽으로 놓여있고. 소파 아래엔 하얀색 러그가 깔려있고, 그 앞엔 작은 유리 테이블이 있어. 아마 거기에 잡지들을 쌓아 놨을 거야. 관광 잡지 같은 거. 여기가 대체 어디일 것 같아?”

그저 화풀이로 줄줄이 꿈 속의 집을 묘사한 것 뿐이었다. 그런데 이지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기억나신 건가요?”

“··· 뭐?”

이번엔 고죠가 당황할 차례였다.

옥문강의 봉인이 해제된 후, 고죠의 기억에는 여기저기 구멍이 뚫렸다. 하지만 제자였던 쿠기사키까지 기억해낸 후로는 더 이상 잊어버렸지만 생각나지 않는 것을 마주칠 일이 없었으니까, 주변에서도 그렇게 말했으니까, 더 이상 문제될 건 없을 거라고 여겼었다. 이지치는 지금 주저사들 문제로 상층부에서 급하게 찾는다며 울상이었지만 고죠는 당장 아는 걸 불지 않으면 일하지 않겠다며 특기 [땡깡]을 시전했다. 결국 멘탈이 탈탈 털린 이지치는 그 집이 고죠의 것이라는 힌트를 주고 말았다. 그거 하나 알아냈다고 위험한 주저사들의 존재와 그들이 주술계에 미치는 영향이며 기타 하등 쓸데없는 노친네들의 설교를 한나절 동안 들어야 했지만. 주저사들 까짓 거 쓸어버리면 그만인데 유난들도 그런 유난이 없다고 투덜거리며 고죠는 간만에 본가를 찾았다.

주술사는 청소년들에게 유망한 직종은 아니다. 하지만 주술은 세금이 붙지 않고 마음대로 굴릴 수 있는 현금을 잔뜩 물어다 주는 동시에 인력이 부족해 언제나 블루오션인 일거리라, 주술사 가문은 유명인의 은밀한 의뢰며 주구 거래며, 이것저것 목돈을 벌어 들일 구석이 많았다. 때문에 가문의 형태로 움직이는 게 구식으로 보일지라도 혈족 간의 결속을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기껏 모은 재산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는 가장 고전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인 것이다. 명문 고삼가 중 하나인 고죠 가에서는 재무 관리 팀을 따로 꾸려 재정을 관리하는데, 돈이야 원하는 만큼 뽑아 쓰면 그만이라 연말에 올라오는 보고서를 한 번씩 읽어보는 것 말고는 고죠는 재산에 신경 써본 적이 없었다. 그랬던 당주가 갑자기 뒤집어 놓으면 모양새가 좋지도 않고, 남들의 이목을 끌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예감도 들었다. 고죠는 조용히 직원 하나를 불러 가문 사람들이 소유한 부동산 목록을 뽑아오게 했다. 

긴 목록에서 고죠 사토루의 명의로 된 건 많지 않았다. 본가의 저택은 당주가 되면서 상징적으로 자신의 앞으로 명의가 이전되었고, 현재 나와 살고 있는 집 또한 자신의 것이다. 후시구로 남매가 초등학생일 적 살게 했던 집도 제 이름 앞으로 되어있었고. 노친네들이 뭔 놈의 집을 이렇게 많이 갖고 있어, 무덤까지 갖고 들어가실 모양이지. 목록을 넘기던 고죠의 눈에 낯선 이름 하나가 걸렸다. 2018년 여름 구입한 맨션··· 맨션의 이름이 적혀있었지만 집을 샀다는 사실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과자 한 통도 아니고 집을 샀다면 기억이 나지 않을 리가 없는데. 고죠는 몇 번이고 맨션의 이름과 매매한 날짜를 읽었다. 2018년, 그 해의 할로윈 이전에는 워낙 바빴고, 쿠기사키를 데려온 것 정도만 흐릿하게만 떠오를 뿐이었다. 목록엔 맨션의 주소도 적혀 있었다. 가볼까. 그럼 뭐가 더 떠오를까. 고죠는 당장이라도 일어설 듯 고개를 쳐들었다가 멈칫했다.

꿈과 이 집이 대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2018년 여름에 무슨 일이 있었을 리가 없었다. 계산해보면 이타도리는 15살, 고작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게다가 그 애는 센다이 출신이다. 기억하는 사람··· 메구미한테 물어볼까. 고죠는 입술을 깨물었다. 후시구로는 어쩐지 어두운 얼굴로, 굳이 기억을 찾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의 주변인들 대다수가 그런 태도를 취했다. 억지로 기억을 찾을 필요는 없다고, 하나같이 짠 것처럼 그랬다. 누구에게 물어본들 원하는 대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뭔지 고죠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는 거였다.

2018년, 이타도리.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보는 수밖에 없다.

 

*

 

집에도 세탁기가 있지만 커다란 이불은 빨아서 널고 말리는 일이 영 고역이었다. 시간이 남는 휴일 오후면 고죠와 이타도리는 이불 하나씩을 옆구리에 끼고 동네의 코인 세탁소로 갔다. 세탁기에 이불을 넣고 동전을 넣고, 다 돌아가면 건조기에 다시 넣고 동전을 넣으면 끝이라서 간편하다. 이타도리는 이불은 밟아서 빨고 쨍쨍한 햇볕 아래 널어 말리는 게 최고라고 노인네 같은 소리를 하곤 했지만,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건 돈으로 해결하자는 고죠의 주장도 어느 정도는 수용하고 있었다. 근처의 카페에서 고죠는 카라멜 마끼아또를, 이타도리는 아메리카노를 하나씩 사들고서 코인 세탁소의 구석에 마련된 휴식 공간에 앉아 건조기가 다 돌아가기를 기다리는 시간엔 평화로운 침묵이 흘렀다. 이타도리는 멍하니 창 밖에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했고 고죠 또한 부드러운 햇살을 받으며 상념에 잠겼다.

요즈음 고죠는 주술고전에서 보관하는 주술계 공식 기록을 뒤져보고 있었다. 사람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일도 있었지만, 2018년의 기록에서 수상한 흔적을 찾는 일이라면 혼자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며칠이 지나도록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안 그래도 더럽게 일이 많은데 주저사 집단을 추적하는 임무까지 새로 맡아서 시간이 워낙 나지 않으니까, 단순히 아직 찾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성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하지만 성질이 나는 건 어쩔 수 없고, 진도가 나지 않으니 속은 답답한데, 의문은 계속해서 떠올랐다. 만약 유지가 정말 잃어버린 기억의 퍼즐이었다면, 유지는 날 원래 알았다면··· 모르는 척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고죠 씨,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제 생각에 빠졌던 고죠는 자신이 이타도리를 빤히 보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이타도리의 눈동자가 햇빛을 받아 호박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얘는 가끔 눈이··· 목구멍에 필터링이 해제된 고죠의 입에서 생각하던 바가 그대로 튀어나갔다.

“유지 눈동자 색이 예쁘다는 생각이 들어서.”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이타도리는 잠깐 버퍼링이 걸린 것 같았다. 아메리카노를 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더니, 절반쯤 남아있던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당황했네. 이타도리가 민망해 할 것 같아 고죠는 올라가려는 입가에 최대한 힘을 주었다. 잔을 싹 비운 이타도리는 컵을 내려놓더니 벌떡 일어섰다. 빨래가 다 됐다는 거다. 진짜 당황했나봐, 어떡해? 결국 웃음을 참는 데 실패한 고죠가 따라 일어서자 정말 건조기가 완료되었다는 알림음을 삑삑 울리고 있었다. 고죠는 민망해진 뒷목을 쓸며 이불을 꺼냈다.

잘 갠 이불을 옆구리에 끼고 돌아오는 길에는 어느 새 석양이 지고 있었다. 커다란 그림자와 그보다 작은 그림자가 한 쌍처럼 나란히 척척 길을 걸어갔다. 내일 출근하기 싫어. 나도, 대신 저녁은 맛있는 거 먹자. 정말? 유지가 맛있는 거 해줄거야? 뭐 먹고 싶은데? 주고받는 대화에 짝을 맞춘 듯한 발소리가 섞여갔다.

내일은 다시 기록을 뒤져봐야 하나. 그걸 정말 뒤져보는 게 맞나? 그 끝에 뭐가 있을지 모르는데? 고죠는 악마의 유혹인지 천사의 나팔인지 알 수 없는 내면의 소리에 끊임없이 시달리고 있었다. 우스운 일이다. 그는 스스로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통제욕이 강한 자신은 잃은 기억이 주는 위화감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모르는 것, 자신의 손을 떠나 돌아가는 일에 휘말렸다는 것 자체가 불쾌했다. 그러니까 기억을 찾기 위한 노력은 모두 자신을 위한 것이다.

“고죠 씨, 저녁은 야키니쿠 어때?”

“뭐?”

“에, 싫어?”

“너무 좋아···”

“아, 놀랐잖아.”

이타도리는 고죠의 팔을 툭 치며 웃었다. 이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서 전부 넘겨버려야 한다면, 그건 너를 위해서일까. 나는 너를 위해서 그걸 참을 수 있는건가. 고죠는 스스로에게 자문했다. 곧장 그걸 어떻게 참을 거냐는 답이 나오지 않는 스스로가 당황스러웠다.

저답지 않게 고죠는 곧장 결단을 내리지는 못했다. 흘러가는 대로 맡겨본다는 말이 맞겠다. 쏟아지는 임무로 바쁘면서도 고죠는 틈틈이 혼자 2018년의 기록을 뒤져보는 일을 계속했다. 누군가에게 맡기면 훨씬 빠르겠지만,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이런 직감은 대체로 맞는다는 걸 그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특별한 건 없었다. 그게 되려 이상했다. 주술계는 언제나 사건 사고가 터지는 곳이다.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는데. 수 일에 걸쳐 수백 수천 장을 살펴보다 보면, 종종 2018년이 아닌 다른 해의 기록이 끼어들곤 했다. 주의 깊게 읽다 이 서류가 2018년의 것이 아니란 걸 깨달은 고죠가 짜증스레 종이를 구겨버리기 직전, 이질적인 단어가 육안에 걸려들었다.

[스쿠나의 그릇 사건 종결]

스쿠나. 주술의 전성기인 헤이안 시대 최강의 주술사, 명명백백한 저주의 왕. 파괴하지 못한 손가락 스무 개를 특급 주물로 보관하고 있었으나, 봉인이 풀리며 부활한 스쿠나가 시부야 사변에서 대량 살인을 일으켰으며 주술사들이 간신히 힘을 합쳐 물리쳤다는 것까지가 고죠가 아는 전부였다. 그릇이란 건 대체 뭐란 말인가? 하지만 그 해의 서류 수십 개를 더 읽어봐도 더 이상의 언급은 찾을 수 없었다. 인내심이 바닥난 고죠는 서류 뭉치를 던져버렸다.

고죠는 처음 이타도리를 만났을 때 이지치를 시켜 뒷조사를 하게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모든 게 바보같이 느껴졌다. 개인적인 친분 이전에 이지치는 고전의 사람이다. 그는 대충 꾸민 기록을 가져왔고 자신은 거기에 넘어간 거겠지. 얼마 전 고죠는 집안의 힘을 이용해 남몰래 이타도리를 조사하도록 했다. 다시 받아본 이타도리의 보고서에는 고등학교에 다녔을 시절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적혀 있었다. 마치 15살의 이타도리는 존재하지 않았던 건가 싶을 정도로.

 

*

 

주술사라는 직업은 언제나 비일상을 산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의 루틴을 유지하는 일이 더욱 더 중요했다. 아무리 머리가 아파도 냉장고를 채워 넣고 청소기를 돌려 삶에 쌓이는 먼지를 털어내야 했다.

요즘엔 워낙 세상이 좋아서, 고죠 혼자 살 적에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식재료를 주문해 배달시키곤 했었다. 하지만 이타도리는 뭐든지 실제로 보고 구입해야 한다는 방식을 고수했다. 저보다 13살이나 어린 그의 아날로그적인 면모는 고죠에게 의외의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심심해서 따라가보니 장을 보는 데는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사람 구경과 물건 구경도 좋았고, 이것저것 시식해보는 것도 좋았다. 무엇보다 느타리버섯을 신중하게 고르는 이타도리에게 참견을 하는 게 제일 즐거웠다. 물론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이 대부분이라 이타도리는 제대로 듣지 않았고, 귀찮아지면 가서 고구마를 한 봉지 가져오라는 지령을 내렸다.

잠시 후 호박 고구마와 밤 고구마 사이에서 고민하다 둘 다 한 봉지씩 집어들고, 자색 고구마가 신기해 또 한 봉지를 가져온 고죠에게 이타도리는 황당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고구마 파티라도 할 셈인가? 호박 고구마는 제자리로 돌아갔고 자색 고구마가 먹어보고 싶다는 간청에 못 이겨 고구마 두 봉지가 카트에 담겼다. 유지, 고구마 맛탕 해줄거야? 당연하지, 고죠 씨가 책임지고 다 해치워야 돼. 고죠는 고개를 끄덕이며 흘러나오는 마트 CM송을 따라 흥얼거렸다. 채소 야채 코너를 지나 고기 생선 코너에 들어서면 이타도리는 세일하는 품목을 찾아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술사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고죠 씨, 고등어가 좋아, 갈치가 좋아?”

“맛있는 거.”

“진짜 도움도 안 되고 너무 똑똑하다.”

고죠는 카트에 기대 갈치의 신선도를 살펴보는 이타도리를 바라보았다. 내가 아는 너는 지금의 너인데. 하지만 평범한 사람은 과거가 지워져 있을 리가 없다.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지만 이타도리에게는 분명 자신이 모르는 부분이 존재했다. 이타도리를 아예 몰랐다면 알 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죠는 이타도리를 알고, 그와 같은 집에 살며 시간을 공유하고 그의 세상에 일정 부분 발을 들이고 있었다. 푸른 수염의 부인처럼, 살고 있었던 저택에 잠긴 방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더 알고 싶은 호기심이 강렬한 갈증이 되어 목을 태우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서 어떤 악의는 느껴지지 않는다. 사연이 있을 것이다. 자신도 이타도리에게 주술사라는 걸 숨기지 않았던가. 누구에게나 감추고 싶은 게 있다는 건 알고 있다. 아니, 아니, 정말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다. 이타도리가 원한다면 그냥 모르는 척 할까 자신이 고민하고 있다는 게 제일 황당한 일이었다. 네가 감추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어주고 싶은 마음이. 고죠 사토루가 타인에게 기꺼이 휘둘리고 싶어한다는 것 말이다.

고죠는 카트를 끌며 거침없이 마트를 누비는 이타도리를 졸졸 따라갔다. 소스 코너에 들어서면 높다랗게 진열된 각종 양념들이 그들을 반겼다. 이타도리는 한구석에 멈춰 서서 미간에 주름까지 팍 잡고서 간장을 골랐다. 고죠가 떼를 쓰면 들어주기도 하지만 최종 결정은 이타도리가 한다. 고죠는 오십 엔 더 비싼 토마토 파스타 소스에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고민하는 이타도리에게 잘 모르겠을 땐 제일 비싼 걸 사라고 한 마디씩 던지는 역할이었다. 이타도리는 어이없어하면서도 고죠가 가리킨 소스를 카트에 담았다.

고죠가 제일 신날 때는 설탕과 유제품, 과자를 고를 때다. 새로 나온 과자를 발견하고 눈까지 반짝거리는 고죠에 이타도리는 어쩔 수 없이 웃고 말았다. 자기가 사면 그만인데 꼭 카트에 넣기 전에 이타도리에게 허락을 받았다. 뒤에 선 고죠의 긴 손가락이 이거랑, 저거랑, 이것도, 저것도, 정신없이 움직이면 하나만 사자, 하나만, 이타도리는 칼같이 자르며 제일 먼저 고른 과자를 꺼냈다. 자신의 어깨를 짚은 고죠의 손이 신경 쓰였지만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유지 짠돌이.”

“아껴야 잘 살아.”

몰라, 유지 너무해. 투덜거리며 고죠가 이타도리의 어깨에 폭 얼굴을 묻어버린다. 하나만 더 사면 안 돼? 어리광을 부리면 이타도리는 어깨에 볼을 부비는 고죠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달래며 결국 신상 과자를 마저 꺼내 카트에 넣어주고 말았다. 

장을 마저 보고 집으로 돌아와 짐을 정리하고 나면 기력이 다 빠졌다. 이런 날은 으레 시켜 먹게 된다. 몇 마디 회의 끝에 메뉴는 피자로 결정되었다. 해산물과 스테이크를 토핑으로 올렸다며 가격이 두 배쯤 비싼 피자와 치킨 너겟에 콜라까지 고르고 나면 이타도리가 언제 모아뒀는지 피자집의 할인 쿠폰을 꺼내왔다.

주문을 마치고 이타도리가 잠깐 화장실에 간 사이, 탁자에 놓아둔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소파에 드러누워 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고죠는 진동하는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화면을 보니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두 사람은 평소에 서로 핸드폰을 건드리지 않는데, 아무래도 고죠가 주술사이다 보니 은연 중에 정해진 규칙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피자 배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쩍 스쳤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자 상대 쪽에서 작은 숨소리가 들렸다. 그러고는 전화가 끊겼다. 뭐야, 장난 전화? 고죠는 번호가 떴다가 꺼지는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어디서 본 것 같은 번호인데. 

“고죠 씨, 뭐해?”

“장난전화 온 것 같은데?”

때마침 나온 이타도리에게 고죠는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받아 든 이타도리는 화면을 켜보고는 웃는 얼굴로 마른 목소리를 냈다.

“그런가봐··· 아, 전화 왔다. 여보세요?”

이번엔 진짜 피자배달이었다. 

그날 밤, 저녁 식사와 뒷정리를 다 마친 이타도리는 아이스크림을 사오겠다며 신발을 구겨신었다. 나는 하겐다즈 딸기맛, 고죠의 주문에 알겠다며 손을 흔들어주고 문을 닫았다. 근처 편의점으로 향한 이타도리는 한적한 길거리를 둘러보고는 아까 걸려왔던 번호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타도리 군?

“··· 네, 저 맞아요. 이지치 씨.”

주술계를 떠나며 후시구로와 쿠기사키를 제외한 사람들의 번호는 전부 삭제했다. 이지치의 번호를 외우지는 못했지만, 모르는 번호가 화면에 뜬 것 만으로도 가슴이 선득했다. 이지치는 미안하다고, 고죠가 받을 줄 몰랐다고 사과했다. 그럴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이지치 씨의 탓이 아니라고 말은 건넸지만 제 목소리가 진심이 아니라는 건 이타도리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부하 직원 번호까지 외우는 타입 아니니까 괜찮을 거라고 말하면서도 뭐가 괜찮다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몇 년 전, 이타도리가 손가락 스무 개를 다 먹고 난 후 스쿠나는 제 힘을 온전히 되찾았다. 이타도리를 필두로 한 주술사들은 목숨을 걸고 싸웠고 스쿠나를 죽였다. 그 후 스쿠나와 분리된 이타도리는 주술사로서의 힘을 잃었고, 주술계를 떠났다. 스쿠나의 그릇에 대한 기록은 전부 지워졌다고 들었다. 스쿠나의 그릇은 그때 죽었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나는 뭘 두려워하고 있는 건가.

이지치는 머뭇거리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고죠의 기억이 조금 돌아왔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타도리 군과 지냈던 집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지하실에서 지냈던 시절의 막바지, 이타도리를 위해 마련해주었던 집이었다. 그 집을 떠올리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이지치가 그 후로 고죠가 뭘 하는지는 몰라도 수상하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아무것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 도리 군?

“네, 네?”

-이타도리 군, 괜찮은 건가요? 

“네? 아, 아뇨··· 아니, 네···”

-괜한 얘기해서 미안합니다.

달래는 목소리에 안쓰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지치는 좋은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버거웠다. 

“아니, 괜찮아요. 신경 써줘서 고마운데, 저, 이만 들어가 봐야 해서···”

-그럼 이만 끊을게요.

“네, 다음에 연락드릴게요.”

유지는 이지치가 못 볼 걸 알면서도 억지로 웃어 보이곤 전화를 끊었다. 까맣게 꺼진 화면을 내려다보자, 방금 전까진 그렇게 끊고 싶었는데 세상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

스쿠나의 죄는 네 탓이 아니라고 말해준 사람들이 있었다. 그 말들에 구원을 얻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스쿠나의 대량 살인을 막지 못한 건 이타도리의 탓이다. 내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자신도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친구들이 아니었다면 정말 죽었을지도 모른다. 후시구로는 이타도리가 주술계를 떠나도록 도와줬다. 제과제빵을 배워보라 권한 건 쿠기사키였다. 그게 정신 건강에 좋다더라면서. 빵집에 취직해 스스로의 힘으로 입에 풀칠하고 살게 된 후에야 이타도리는 자신 안에 남아있었던, 살고 싶은 욕망을 인정했다. 이제 나는 새로 태어난 이타도리 유지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그는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때 그 어린애라는 걸 깨닫는다. 

속았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의 고죠의 분노도, 혹시 자신을 경멸할지도 모를 그의 차가운 눈빛도 상상만으로도 두렵다. 하지만 이타도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자기 자신이다. 이제야 겨우 쌓은 일상이 과거로 인해 무너지는 것도 결국 그 과거를 쌓아 올린 자신의 탓이니까.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린 이타도리는 황급히 아이스크림을 샀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 치고 스쳐갔다. 한적한 길거리인데, 굳이 시비를 거는 건가 싶어 잠깐 시선을 주었지만 금방 포기하고 걸음을 옮겼다. 너무 늦으면 고죠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부딪친 어깨를 문지르며 멀어지는 그 뒷모습을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지켜보고 있었다.

빌라에 도착할 즈음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나 싶더니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쯤에는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타도리는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이스크림을 크게 퍼서 한 입에 삼킨 고죠가 따라 창 밖을 바라보았다.

“비 와?”

“응.”

“아, 싫은데.”

“비가 와야 풍년이 들지.”

“유지 혹시 농부야?”

“그냥, 할아버지가 자주 그러셨어. 비가 오고 덥고 추운 것도 다 인생이라고.”

“좋은 말인데, 비가 오면 피하기도 해야지.”

“피하잖아?”

“글쎄? 유지는 가끔 우산 씌워줘야 할 것 같은데.”

고죠는 아이스크림의 마지막 한 숟가락을 입에 떠넣었다. 이타도리는 반 쯤 먹은 아이스크림을 괜스레 한 번 휘저었다.

“나 귀하게 컸거든. 더우면 에어컨 틀고 추우면 코타츠 켜야 돼. 유지도 제발 전기세 아낀다고 선풍기로 참지 좀 마. 보는 내가 다 더워.”

“고죠 씨 이제 빌드업을 다 하네.”

“그런가? 어릴 땐 진짜 싫어했는데, 말 돌리는 거 질색이라서. 나도 나이 들었나.”

“어릴 땐 입으로 총을 쏘기라도 한 거야?”

“그럴리가, 입만 열면 봄바람이었는데.”

“폭탄을 쏘고 다녔나 보네.”

“나 혹시 인간 대포 취급 받고 있어?”

이타도리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키득거렸다. 왜 네가 웃는거야? 황당해하던 고죠도 따라 웃었다. 숟가락을 내려놓고 보니 시간은 이미 자정이었다.

“인간 대포는 이제 잘 시간이네.”

“또 늦게 잘 거면서.”

“나는 이제 잠자는 숲속의 대포··· 아니, 공주 하기로 했어.”

“내일 늦잠 자겠다고 선전포고하는거야?”

“왕자님 여기 있잖아. 깨워줄거지?”

“알겠으니까 얼른 가서 주무세요, 공주님.”

“유지는 안 자?”

“아이스크림만 다 먹고.”

이타도리는 반쯤 남은 아이스크림을 흔들어보였다. 왕자님, 진실한 사랑의 키스로 깨워줘? 고죠는 눈을 찡긋하며 제 침실로 들어가버렸다. 그는 자신의 뒷모습이 사라진 자리를 오랫동안 바라보는 이타도리를 모를 것이다. 이타도리는 그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파악하려 애써본 적도 있었다. 이제는 그냥 웃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기억이 조금은 돌아왔다면서, 이렇게 아무 내색도 하지 않는 걸 보면 대단한 사람이라고도.

일찍 잠들었던 고죠는 새벽녘 부스스 눈을 떴다. 빗소리 때문에 깼나, 싶었는데 목이 말랐다. 머리를 쓸어 넘기며 거실로 나온 그는 불도 켜지 않고 컵을 꺼내며 꿈을 생각했다. 또 지하실 문을 열었으나 중간에 깬 탓에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꿈의 상영은 거기에서 끝나버렸다. 왜 그게 아쉽지? 뇌가 미친 건가? 뇌가 미친 거면 내가 미친건가? 난 미치지 않았는데··· 헛생각을 물과 함께 삼키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려던 고죠는 간만에 놀라 헉, 숨을 들이켰다. 불 꺼진 거실의 소파에 이타도리가 앉아있었다.

“깜짝이야···”

자는 건가? 앉아서? 소파나 탁자 같은 가구마냥 미동도 없이 앉아있던 이타도리는 고죠가 바로 앞에 다가오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거실 창 너머로 스며든 흐릿한 달빛이 이타도리의 멍한 눈을 비췄다. 탁자엔 다 녹은 아이스크림과 숟가락이 놓여있었다.

“유지?”

“··· 고죠 씨.”

“뭐하는 거야?”

“아··· 깜박, 잤나봐.”

“··· 괜찮아?”

이타도리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고죠는 잠이 싹 달아난 눈으로 조금 정신이 돌아온 듯한 이타도리를 살폈다.

“고죠 씨야말로 놀랐겠다. 얼른 들어가.”

“남 걱정할 때야? 일어나, 못 일어나겠으면 안아줄까?”

“아니, 오래 앉아있어서 다리에 쥐가 나서. 좀만 풀고 들어갈게, 먼저 들어가.”

분명 눈 앞에 있는데 낯선 얼굴, 낯선 목소리였다. 그저 같이 있고 싶지 않다는 의사만을 분명히 표시하는 이타도리에게 고죠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문득 죽은 옛 친구가 떠올랐다. 게토도 그랬다. 아무것도 묻지도 바라지도 않고 제멋대로 떠나갔다.

“유지.”

“응.”

“얼른 자고··· 내일 보자.”

이번엔 놓치지 않게, 너는 손에 꽉 쥘 수 있으면 좋으련만. 대신 고죠는 분홍색 머리칼을 부드럽게 헝클였다. 저도 모르게 동그란 뺨도 쓰다듬고는 얼른 손을 뗐다. 한 박자 늦게 얼굴에 닿는 체온을 감각한 이타도리가 눈을 크게 떴을 때 고죠는 재빨리 제 방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이타도리는 멍하니 제 뺨을 감싸쥐었다.

침대에 누워 몇 바퀴를 구른 고죠는 한참이 지나고서야 잠이 오지 않을 것임을 인정하고 타블렛 패드를 집어들었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이타도리에게 붙여두었던 사람에게서 보고가 올라왔었는데, 짬이 나지 않아 미뤄두고 있던 것을 확인해볼 요량이었다. 이타도리가 상당히 기척에 예민한 편이라 걱정했는데 고죠 가에 보관된 은신용 주구를 사용할 수 있게 해준 덕인지 눈치 챈 사람은 없다고 적혀있었다. 고죠가 신경 썼던 수상한 인간은 몇 번 더 기웃거리긴 했으나 별다른 일은 없이 돌아갔다고 했다. 빵집에서 평범하게 일하고 웃고 이야기하는 이타도리를 찍은 사진 몇 장이 첨부되어 있었다. 고죠는 이타도리의 사진을 들여다보다, 계속 지켜보라는 지시를 전달했다.

*

며칠 동안 내리던 비가 그치고, 간만에 맑게 갠 아침이었다. 평소처럼 이타도리는 아침을 준비했고 고죠와 마주 앉아 식사했다. 고죠는 또 강아지한테 뽀뽀받았다는 꿈인지 뭔지를 꿨다는 표정이었지만 더 말하진 않았다. 굳이 캐묻고 싶지 않아 이타도리도 모른 척 베이컨과 계란 프라이를 올린 토스트를 씹었다. 오늘은 고죠가 먼저 집을 나섰다. 아침부터 일이 있다고 했다. 그를 배웅한 이타도리는 잠시 후 집을 나섰다. 이타도리가 향한 곳은 평소 가던 출근길이 아니라 지하철 역이었다. 오늘은 미리 휴가를 냈다.

요시노 준페이는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죽지 못했다. 민간 장례식장에 맡길 수 없었던 시신은 주술고전에서 거둬 화장을 치뤘다. 그 유골함은 한동안 주술고전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이타도리는 빵집에서 처음 받은 보너스로 요시노와 그 모친의 유골함을 납골당으로 옮겼다. 요시노는 말하자면 최초의 상처다. 그 위로 몇 번의 상처가 더 나더라도 처음이란 것만으로 잊어버릴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근처에서 꽃을 산 이타도리는 그 앞에서 한참 머뭇거리다 납골당으로 들어갔다. 그의 뒷모습을 쫓던 이도 그 앞에서 멈추었다.

오늘 고죠의 임무는 한동안 추적해온 주저사 집단의 아지트를 습격하는 것이었다. 혼자였다면 싹 쓸어버리기 더 쉬웠으련만 경험을 쌓게 해주고자 데려온 학생들이 되려 발목을 잡았다. 대부분 생포했지만 수를 세어보니 고죠가 파악했던 숫자보다는 분명 조금 더 적었다. 몇몇이 도망을 친 것이다. 지긋지긋한 업무의 연장선이 뻔히 보여 혀를 찰 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지켜보다 이상한 사람이 접근하거나 수상한 일이 생기면 바로 보고하고 불시에는 이타도리를 지켜야 한다는 게 고죠가 미행자에게 준 지시 사항의 전부였다. 이타도리가 수상하게 굴 때 어떻게 해야 할지는 업무 매뉴얼에 없었다. 미행자는 실수하더라도 보고하고 실수하자는 생각에 낯선 건물의 입구를 찍은 사진을 전송했다. 방금 전 이타도리가 출근하는 대신 찾아온 납골당이었다. 고죠는 이타도리가 누구를 보러 온 건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잠시 후 들어온 보고에 따르면 이타도리가 찾은 사람은 요시노 준페이라고 했다. 요시노 준페이, 요시노... 고죠는 그 이름을 머릿속에서 궁글렸다. 처음 듣는데 왠지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기억에 손상이 간 후 종종 겪는 느낌이었지만 언제나 유쾌하진 않았다. 분명 어디서 들었는데. 머릿속을 뒤적이던 고죠는 알 수 없는 연상 작용으로 나나미를 떠올렸다. 아깝게 죽은, 아끼던 후배. 그 순간 머리가 지끈거렸다.

‘무거운 임무라는 게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언제 이런 말을 했었지?

요시노의 위패 앞에 꽃을 놓은 이타도리는 집으로 돌아갔다. 편의점에 잠깐 들를 생각인지 그 앞에 발길이 멈추자 기척을 죽이고 그를 따르던 발도 멈췄다. 이타도리는 한숨을 들이쉬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를 따르던 발도 다시 움직였다. 대낮의 한적한 빌라 앞, 걸음이 천천히 느려지나 싶더니 이타도리가 번득 시선을 돌렸다. 미행자가 놀라 몸을 피하려 했을 땐 이미 늦었다.

“당신 뭐야?”

저를 몰래 따라오던 이의 멱살을 쥔 이타도리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납골당에서 이상한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대답 안 해?”

묻는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알 수 없는 위압감을 풍겼다. 일반인이라고 했는데···! 미행자는 울상을 지었다.

고전으로 돌아온 고죠는 나나미의 기록, 그 중에서도 2018년의 것을 뒤졌다. 요시노의 이름이 발견된 건 어느 늦여름의 임무보고서였다.

특급 주령과의 대치. 전투 중 사토자쿠라 고등학교 2학년생 요시노 준페이 사망. 1급 주술사 나나미 켄토 부상···

 고죠는 사토자쿠라 고교를 검색했다. 어디서나 볼 법한 일반 고등학교였다. 주령과의 전투에 휘말려 사망한 불운한 고등학생과 나나미, 그리고 이타도리.

 ‘너한테 그 애를 맡기길 정말 잘했어.’

분명 이런 말을-

고죠는 발작처럼 일어난 두통에 인상을 찡그렸다. 두통과 함께 무의식의 표면을 뚫고 올라오려던 목소리는 그때, 고막을 찌르듯 울리기 시작한 핸드폰 벨소리에 뚝 끊겨버렸다. 이타도리에게 붙여둔 미행자였다. 고죠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무슨 일이야?”

상대는 잠시 말이 없었다. 고죠가 화면을 내려다보자, 낯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고죠 씨였어?

이타도리였다.

두통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머릿속도 상황도 엉망진창이었다. 핸드폰 너머에서 고죠 씨 죄송합니다,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주구까지 줬는데 뭘 어쩌다 들킨건지, 말하라고 했다고 홀랑 의뢰인이 누구인지까지 불어버리다니.

“··· 유지, 그게-”

-고죠 씨, 나한테 사람 붙였어?

머리 끝까지 화가 난 듯 야멸찬 목소리가 쏟아졌다. 고죠는 이타도리가 이렇게 화를 내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언제부터 이랬어? 이거 하루 이틀 아니지?

“화났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말 안 한 거 미안해, 근데 나는 걱정돼서···”

-말도 안 되는 변명하지 마.

“유지, 전화로 이러지 말고 얼굴 보고 얘기하자. 어디야? 내가 갈게.”

-난 할 말 없어, 얼굴 보고 싶지도 않고. 끊을게.

“내가 다 설명할 수 있··· 유지?”

전화는 그대로 끊겨버렸다. 다시 전화하자 이번엔 그 번호의 주인, 이타도리에게 멱살을 잡혔던 쓸모없는 쓰레기가 받았다. 이타도리는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고 했다. 좋지 않은 예감은 대체로 맞는다. 고죠는 보던 서류를 던져놓고 고전을 뛰쳐나갔다.

아침에 나올 땐 평소처럼 아늑한 집이었는데, 지금 돌아온 집은 묘하게 서늘한 분위기를 풍겼다. 고죠는 문이 열려있는 이타도리의 방으로 향했다. 이타도리는 캐리어를 펼쳐 놓고 짐을 싸고 있었다. 안대를 끌어내린 고죠는 활짝 열린 옷장과 자신 쪽은 쳐다보지도 않는 이타도리를 번갈아보았다. 관자놀이를 찌르는 듯한 두통이 존재감을 과시했다. 지금, 집을 나가겠단 건가?

“뭐하는 거야.”

“···”

“유지, 화난 건 알겠는데 좀 들어줘. 수상한 놈이 있다고 했었잖아, 맘에 걸려서, 널 보호하려고···”

이타도리는 개던 후드티를 캐리어 안으로 집어던지곤 눈을 치켜떴다. 이렇게 보니까 꽤 무서운 얼굴이라고, 고죠는 상황에 맞지 않는 깨달음을 얻었다. 내 앞에선 항상 웃으니까, 순하게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그 말을 믿으란 거야?”

“왜 못 믿는건데?”

“날 감시한 사람 말을 어떻게 믿어?”

감시라니, 그건 좀 아니지 않나. 고죠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널 감시해서 뭘 하겠어? 해코지라도 할까봐? 내가 너한테?”

“왜 고죠 씨가 화를 내?”

“화내는 게 아니라, 말이 안 되는 소릴···”

“말이 안 되는 상황인 건 나야!”

“말했잖아, 수상한 놈이 있다고. 불안해서 그랬어, 혹시라도 무슨 일 생길까봐. 말 안 한 건 미안한데 또 괜찮다고만 할 거잖아?”

“그거야 진짜 괜찮으니까! 내 한 몸 정돈 내가 알아서 지킬 수 있어. 이해가 안 돼, 고죠 씨는 내가 걱정돼서 날 감시해?!” 

“감시한 거 아니라고 했잖아! 그리고 지금 뭐하는 건데?”

고죠가 더 다가오자 캐리어 위로 길다란 그림자가 졌다. 고개를 더 치켜 든 이타도리 위로도 그림자가 쏟아지듯 늘어졌다. 이타도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나갈거야.”

“··· 어디로?”

“쵸소한테나··· 고죠 씨가 알 바 아니잖아.”

“사람 붙였다고 나가겠다고?”

“고작 그깟 거라는 말투로 말하지 마.”

“그렇게 말한 적 없어.”

“아아, 그래?”

“아니, 그게 아니라··· 미안해, 근데 나는 정말 유지가 걱정돼서 그랬어.”

“걱정의 방법이 감시하는 거야?”

“그러니까 감시한 게 아니라고···!”

“난 이제 고죠 씨 못 믿어.”

이타도리는 서늘하게 가라앉은 푸른 눈을 피해,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어디 가서 기싸움으로 지지 않지만, 위압감에 저절로 몸이 떨렸다.

“유지, 난···”

“소름끼쳐. 정말 날 걱정했으면 최소한 나한테 먼저 얘기라도 했어야지.”

“그건 네가 안 들을 게 뻔하니까···!”

“지금 내 탓이라는 거야?!”

“말 안 한 것 뿐이잖아! 그것도 나만 그래? 유지도 말 안 한 거 많잖아?”

“뭐?”

“요시노 준페이가 누구야?”

끔찍한 침묵이 흘렀다. 이타도리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고, 주인을 대변하듯 분홍색 속눈썹만이 옅게 떨렸다. 고죠는 한숨을 내쉬며 무릎을 굽혀 이타도리와 눈높이를 맞췄다. 이제야 눈을 피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자 조금 안심이 됐다.

“정말 사람 붙인 거 때문에만 화가 난 거야? 지금 납골당이 있는 사람이 누군지 내가 알았을까 봐 겁 먹은 것처럼 굴고 있잖아.”

“···”

“말하기 싫어서 도망가려는 거 아냐? 내가 틀려?”

무의식에서 떠오른 말을 뱉고 나서야 고죠는 이타도리의 표정을, 동공이 확장된 호박 색 눈에서 공포를 읽었다. 그걸 깨닫는 순간 기분이 진창으로 처박혔다. 겁 줄 생각은 정말 없었다. 하지만 나가는 것도 못 봐줄 노릇이고··· 두통이 축제처럼 펼쳐졌다. 고죠는 머리를 깨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고 일어섰다.

“내가 미안해, 미안한데··· 나가지는 마, 당장 갈 데도 없을 거 아냐. 차라리 내가 나갈게.”

그래, 그게 낫겠다. 애한테 윽박 지르기 전에 머리를 식히는 게 맞았다. 진작 좀 이러지. 스스로 욕하며 고죠는 방을 빠져나갔다.

이타도리는 순식간에 비어버린 방에 혼자 남았다. 커다란 사람이라 그런지 고죠가 있다 간 자리는 유독 커보였다. 여기 고죠 씨 집인데 왜 자기가 나가는거야.

 

*

 

두 사람의 싸움은 이지치에게는 그야말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고전으로 돌아온 고죠가 사무 업무를 보고 있던 이지치를 호출한 것이다. 안 그래도 일이 많은데 머리가 아프다고 성질을 부리는 고죠에게 진통제를 사다 먹이고 상사의 연애 상담, 아니지, 연애까지 가지도 못한 동거인과의 싸움 상담을 들어주는 동안 이지치는 불교에서 말하는 108 번뇌를 경험했다. 이걸 해결하면 해탈하는 건가? 들어주는 고통이야 그렇다 치고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는데, 당장 오늘 밤 고죠가 잘 곳이 없었다.

이타도리의 화가 풀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먼저 화해 신청을 하라고 조심스럽게 제안했더니 입을 꾹 다물었고, 그럼 본가로 가라고 하자 노친네들 얼굴 보고 싶지 않다며 단칼에 잘라버렸다. 호텔을 잡아줄 테니 가서 쉬라고 하자 호텔은 심심하다며 징징거린다. 노숙이라도 할 셈인가? 한참 망설이던 이지치가 그럼 우리 집에 오시지 않겠느냐 묻자 고죠는 대번에 인상을 찡그리며 거절했다. 좁고 불편한 집은 싫단다. 잠시 후 고죠의 저녁 식사를 사러 나온 이지치는 먼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서 한 입에 반절을 때려부었다. 속에 천불이 날 때 뿌릴 물로는 이만한 게 없었다.

“그래서, 지하실이 어디야?”

이지치가 사다 준 오야코동 도시락을 먹는 주제에 고죠는 마지막까지 그를 곱게 놔둘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고기만 쏙쏙 골라 먹으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묻는 말에 햄치즈 샌드위치를 깨작거리던 이지치는 그대로 정지했다. 오늘 하루 자주 보는 꼴이었다.

“있는 거 맞잖아, 지하실.”

“그, 그게···”

“솔직하게 말해.”

이지치는 샌드위치를 내려놓았다. 입맛이 뚝 떨어졌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이타도리 군이 부탁했습니다. 말하지 말아달라고.”

“어디가 솔직한데? 지하실이 어디냐고 묻고 있잖아. 이지치 넌 누구 부하야?”

“저도 이게 고죠 씨와 이타도리 군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따귀 맞을래? 나랑 관련된 일에 왜 내 의사가 빠져있는 건데?”

고죠도 젓가락을 집어던지다시피 내려놓았다. 도시락과 샌드위치는 어느 새 뒷전이었다. 이지치는 울상이 됐다.

“고죠 씨는 왜 이타도리 군이 말하지 않고 싶어했는지 모르시잖아요.”

“몰라, 모르니까 싸운 거잖아.”

“아니, 싸운 건 고죠 씨가 몰래 사람을 붙여서···”

“알아야겠으니까 말해.”

말이 안 통한다. 이지치는 눈썹을 문질렀다. 자신 있는 척 이게 고죠와 이타도리를 위한 일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뭐가 맞는 건지 몇 년째 헷갈리고 있었다.

이에이리는 기억상실이 영구적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고죠는 24시간 무하한을 사용하기 위해 끊임없이 반전술식을 돌려 신선한 뇌를 유지시키고 있었다. 반전술식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알 수 없지만 기억을 관장하는 부위는 뇌인 만큼 금방 기억이 돌아올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고죠는 잃은 기억을 조금씩 다시 떠올려내면서도 이타도리에 관해서는 도통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러니 아무것도 말하지 말아 달라는 이타도리의 부탁을 들어줄 수 밖에 없었지만, 한 쪽에게만 초면인 채로 다시 관계를 쌓아가는 모습은 일견 평화로웠지만 마치 얼어붙은 강 위에 집을 짓듯이 위태로워 보이기도 했다. 이제 그 빙판에 금이 가고 있다면, 이타도리에겐 미안하지만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이었다. 강물에 빠진다면 다시 건져다 말려주면 된다. 그건 이지치의 전문이었다.

지하실은 오랫동안 관리가 되지 않아 급하게 대강 청소를 했음에도 여기저기 먼지가 쌓여있었다. 고죠는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에 제자를 앉혀 놓고 영화를 틀어주었던 소파에 드러누워 이지치가 준 보고서를 펼쳤다. 공식 기록에서 삭제된, 스쿠나의 그릇, 이타도리 유지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다.

2018년 6월, 스기사와 고등학교 재학 중 후시구로 메구미와의 조우, 자신의 개입, 그릇으로서의 가능성을 인정 받아 사형 유보···

서술된 문장들은 머릿속 어딘가를 건드리는 것 같았지만 뚜렷한 이미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고죠는 인상을 찌푸리고 이타도리가 한 번 죽었다 살아났고, 자신이 두 달간 지하실, 바로 여기에 그 아이를 숨겨 놓았으며 교토고와의 교류회에서 생존을 알렸다는 사실들을 읽어나갔다. 요시노는 교류회 이전의 임무에서 만난 아이였다. 그 뒤로도 이런저런 임무들이 이어졌다. 그리고 10월 31일, 이타도리는 스쿠나에게 육체의 주도권을 빼앗겼고 스쿠나는 시부야에서 대량 살인을 저질렀다. 그 후 켄쟈쿠, 게토의 시신을 빼앗은 주술사가 벌인 사멸회유에 참가했고, 부활한 스쿠나와 대치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고···

고죠는 읽기를 그만두고 서류를 내던졌다. 여전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고, 알게 된 기록들은 건조한 사실이 되어, 자신이 아는 이타도리에 덧입혀졌다. 그러나 여전히 고죠가 기억하는 이타도리는 달콤한 빵 냄새를 희미하게 풍기며 웃는 얼굴이 밝은 사람이었다. 그가 숨기려 했던 과거를 아무리 읽어도 그가 무슨 생각으로 제 옆에서 웃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밤이 깊어가며 지하실이 싸늘하게 식어갈 즈음, 벽에 걸린 작은 와사등이 반짝 켜졌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작은 발소리가 다가왔다. 소파에 누워 그대로 잠들었던 고죠는 그 소리에 반쯤 깨어났으나, 곧장 익숙한 기척이란 걸 깨달았다. 언제나 그가 먼저 와줘서,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부터 자신은 단단히 버릇이 잘못 들어버린 걸지도 모른다.

이타도리는 몇 년 만에 발 들인 지하실을 담담한 눈길로 둘러보았다. 작은 소파 밖으로 다리를 내놓은 채, 고죠는 팔로 눈을 가리고 움직이지 않고 있었지만 이타도리는 이제 고죠가 정말 자는 건지 아닌 건지 판단할 수 있었다.

이타도리는 조용히 고죠의 곁으로 다가가 테이블에 놓인 리모컨을 집어들었다. 텔레비전은 그대로지만 버튼을 눌러봐도 켜지지 않았다. 텔레비전이 고장 났을 수도 있고 전기에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었다. 지하실은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이타도리는 옆구리에 끼고 온 담요를 펼쳤다. 제가 나가 놓고 쫓아냈다고 시위하는 건지 뭔지, 예민해서 아무데서나 잠들지도 못하는 사람이 이런 데 혼자 있다는 게 걱정해달라는 호소처럼 느껴졌다. 그렇다고 진짜 걱정돼서 찾아와 버린 건, 제가 생각해도 답이 없지만.

담요를 덮어주는데 서늘하게 식은 손등이 스쳤다. 그 온도에 순간적으로 놀라서 멈칫하자 커다란 손이 이타도리의 손을 잡아왔다. 뿌리칠까 했는데, 세게도 잡지 못하는 걸 뿌리치자니 자신이 나쁜 사람 같았다. 이타도리는 한숨을 쉬었다. 그 작은 소리에 움츠러드는 이 커다란 남자를 어째야 할지 모르겠다.

잡은 손을 그대로 둔 채 이타도리는 소파 앞에 쪼그려 앉았다. 흐릿한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파란 눈이 자신을 응시하는 걸 알 수 있었다.

이타도리는 열다섯 살의 자신이 이 소파에 앉아 그 파랑을 응시할 때, 그 파랑 또한 자신을 바라볼 때 전율에 가까운 애정을 느꼈던 걸 기억한다. 이 사람에겐 전부 다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는 나를, 내 공허를 이해해준다고 여겼다. 자신도 그의 등 뒤에 늘어진 그림자를 안아주고 싶었다.

고죠가 조용히 속삭였다.

“미안해, 유지.”

“··· 뭐가, 뭐가 미안한데.”

“사람 붙인 거, 말 안 한 거.”

“···”

“그리고, 화낸 것도.”

“···”

“네가 원하면, 다 모른 척 할게. 아니, 잊어버릴게.”

기록을 건네줬다고 이지치에게 들었다. 하지만 목소리를 들어보면 기억이 다 돌아온 것 같지는 않았다. 이건 이타도리가 바라 마지않던 상황일지도 몰랐다. 게다가 모른 척 해주겠다지 않는가. 어떻게든 지키고 싶었던 우리의 일상이 그에게도 소중했다는 암시가 얼마나 달콤하게 느껴지는지 고죠는 모를 것이다. 어쩌면 정말 그게 맞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원래부터 거짓말엔 자신 없었는데.

“··· 뭘 안다고 모른 척 한다는 거야.”

“···”

“고죠 씨는 아무것도 모르잖아.”

“응, 몰라.”

“···”

“그래서 알고 싶었어.”

“···”

“그게 너한테 상처일 수 있다는 것도 몰랐고.”

이타도리를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맞잡은 두 손을 더 세게 쥔 게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다. 시간이 흘렀고 많은 게 변했다. 당신은 나를 잊었고 이제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미안해.”

나는 또 당신 앞에서 마음이 무너져, 바보같이.

 

*

 

이지치에겐 천만다행으로, 고죠는 다음 날 집으로 돌아갔다. 싸움이 길어지면 어떻게 해야하나, 지하실에 내버려둬도 되나 마음 졸였던 그는 깊이 안도했다. 고죠가 옆구리에 끼고 간 이타도리에겐 조금 미안하기도, 원망스럽기도 한 복잡한 심정이었지만, 두 사람은 금세 예전으로 돌아가는 듯 보였다. 고죠는 출근해 일했고 퇴근하면 시로하토 베이커리에 들렀다.

그가 올 시간이 가까워오면 이타도리는 손을 씻다가도, 케이크 시트를 자르다가도 문득 시계에 눈이 갔다. 그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잠깐 들르는 것 뿐이지만, 마치 데리러 오는 것 같아서 기다리게 되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타도리는 시트에 크림을 바르기 시작했다. 판매용 제품을 준비하는 김에 고죠에게 줄 케이크도 만들 생각이었다. 기념일도 특별한 날도 아니지만, 그냥 그러고 싶은 날이라고 해두자.

지하실에서 돌아온 후로 두 사람은 이타도리에게 사람을 붙이는 건 그만두기로 했을 뿐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저 빵을 좋아하는 동거인과 빵을 만드는 동거인으로 예전처럼 일상을 굴러가게 하는 데 무언의 합의를 봤다.

신중하게 아이싱을 마친 이타도리는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깔끔해진 케이크를 바라보면 역시 조금 뿌듯해진다. 처음엔 신중하게 계량하고 불을 맞추는 일 같은 거 적응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제 손으로 만들어낸,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결과물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빵 학교에 다닐 적 그를 가르쳤던 선생이 좋은 사람이었던 것도 도움이 됐다. 나이 지긋한 선생은 연상의 상대에게 싹싹한 이타도리를 아들처럼 예뻐했다. 딸에게 소개해주고 싶다는 말도 몇 번이나 들었다. 그때마다 웃어넘기다, 한 번은 진지하게 물어보기에 단호하게 거절했다. 여자친구가 있느냐기에 그건 아니지만, 고개를 흔들었더니 혹시 짝사랑? 짓궂게 웃던 얼굴이 떠오른다. 짝사랑 상대를 넘어뜨리는 필살 비법이랍시고 이타도리를 붙잡아 놓고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던 사람이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건 기분 좋은 경험일 수밖에 없어서, 상대에게 오래 기억되고 싶을 때 최선을 다해 요리를 해줬다던가.

그런 말 금방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보다. 난 항상 그 사람에게 맛있는 요리를 해주고 싶었으니까.

데코레이션까지 마친 딸기 초코 생크림 케이크를 박스에 포장하고 있는데 문의 차임벨이 소리를 냈다. 화색이 되어 얼굴을 내민 이타도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타도리, 바쁘냐?”

개선장군마냥 당당하게 빵집으로 쳐들어온 건 한쪽 눈에 안대를 한 쿠기사키였다.

동급생이라곤 셋 밖에 없는데 나이가 들고 나니 모이기가 쉽지 않았다. 아무래도 주술사는 이래저래 바쁘고 긴급 호출도 많은 직업이라, 연락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치면 어쩌냐고 투덜거리면서도 이타도리는 쿠기사키가 끌고 가는 대로 끌려가주었다. 저 케이크는 뭐냐, 먹고 싶다는 쿠기사키의 입에 컵케이크를 물려주고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느라 조금 고생은 했다.

술집에 도착하면 요새 하도 바빠 얼굴 보기 힘들었던 후시구로가 미리 안주를 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쉬는 날이면 진작에 연락 좀 하지, 이타도리가 케이크 박스를 조심히 내려놓고 마지막 불평을 던지자 어차피 퇴근하면 바로 집 갈 거면서, 퉁박이 날아왔다. 그야 그렇긴 하지만··· 이타도리는 구석에 쭈그러들어 핸드폰을 두드렸다.

“이게 감히 내 앞에서 핸드폰을 만지네.”

“어?”

“여자냐? 아니기만 해봐.”

이타도리가 엇, 하는 사이에 쿠기사키가 핸드폰을 빼앗았다. 라인 창에는 고죠 씨 나 오늘 늦어, 먼저 저녁 먹어- 로 시작하는 메시지와 고죠가 보낸 이모티콘들이 주르륵 도배되어 있었다. 십 대도 안 쓸 귀여운 이모티콘을 남발하는 전임 담임을 눈으로 확인한 두 사람의 표정이 순식간에 칙칙해졌다. 귀여운 거 좋아하는 사람이잖아, 너희도 알겠지만··· 괜히 변명해주려던 이타도리는 말끝을 흐리며 후시구로가 내민 생맥주를 받아들었다.

성인이 되어서 처음 같이 술을 마셨을 때 자신만만하던 쿠기사키는 맥주 한 잔을 겨우 비우고 쓰러져버렸고, 스쿠나와 분리되어 독 내성이 사라진 이타도리 또한 평균치의 주량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후시구로는 대작을 신청해오는 사람들에게 단 한 번도 취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전설을 자랑하며 이에이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주술고전 최고의 주당으로 등극했다. 정작 본인은 술을 그리 즐기진 않는다. 맥주 한 모금만 들어가면 텐션이 하늘을 찌르는 쿠기사키와 이타도리 모르게 잔에 물을 채워두는 게 후시구로가 술자리에서 제일 열심히 하는 일이었다. 안주가 떨어지지 않게 틈 날 때마다 주문해두는 것 또한 그의 담당이다. 근처 테이블의 볼륨에 지지 않겠다는 듯 큰 소리로 깔깔거리던 쿠기사키와 이타도리는 어느 새 볼과 귀가 벌게진 채로 다시 잔을 부딪쳤다. 후시구로는 쭉 맥주를 들이키는 쿠기사키를 바라보며 10초를 셌다. 3, 2, 1, 쿠기사키가 스르륵 곁에 앉은 이타도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이타도리가 쳐다보았을 때 쿠기사키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얘는 내가 지 베개인 줄 아나 봐, 황당해하면서도 이타도리는 쿠기사키가 더 편하게 기댈 수 있게 자세를 고쳐주었다. 후시구로는 남은 술을 잠자코 마셨다. 슬슬 자리를 파할 시간이었다.

후시구로와 쿠기사키 또한 이지치에게 고죠가 스쿠나의 그릇에 관한 기록을 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이타도리를 만나면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잘 꺼내지 못할 때가 많았다. 맥주를 비워낸 후시구로가 친구를 불렀다.

“이타도리.”

“···”

“괜찮아?”

이타도리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였다. 대답인지, 졸려서 하는 행동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질문조차 근처의 소음에 묻혀버렸을지도 모른다. 

*

이타도리가 귀가했을 땐 이미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소파에 드러누워 주저사 잔당 추적 임무 진척 상황 보고서를 끄적이던 고죠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 지금 몇 시야? 유지 술 너무 많이 마신 거 아냐? 잔소리를 목 끝까지 장전한 고죠에게 귀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이타도리는 헤실헤실 웃으며 케이크 박스를 내밀었다. 

그리하여 새벽 한 시, 고죠는 이타도리와 식탁에 마주 앉아 케이크를 잘랐다. 아무리 단 걸 좋아해도 이 시간에 굳이 찾아 먹고 싶진 않았지만 내가 고죠 씨 주려고 만들었으니 열어봐야 한다는 취객의 강권에는 방법이 없었다. 잘랐으니까 이제 됐지? 내려놓으려 들면 눈썹을 축 늘어뜨리는데, 고죠는 눈을 꾹 감고 소화기관에게 속으로 사과하며 포크를 들었다. 먹을게, 먹으면 되잖아···

“근데 갑자기 웬 케이크?”

“그냥···”

“그냥?”

“그냐앙··· 그런 게 있어.”

이타도리는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는 취객 특유의 웃음을 흘리며 고죠가 케이크를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얼마나 달게 만들었는지 고죠의 입에도 혀가 녹는 것 같았다. 고죠는 이 새벽에 커피를 내려 마시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끼며 기어코 접시를 비웠고, 취객은 고죠가 포크를 내려놓자마자 그 자리에 엎어졌다. 술주정 한 번 기가 막히게 참신했다. 과거 경험으로 이타도리를 깨우는 건 곧장 포기한 고죠는 축 늘어진 몸을 안아들었다. 

침대에 내려주니 힘이 들어가지도 않는 손이 고죠의 옷자락을 붙잡아왔다. 얼른 놓고 자라고 이불을 덮어주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래봐도 막무가내였다. 뭐 어떻게 하라는 건데? 물어봐도 이미 반쯤 잠들어 술주정만 남은 취객에게 대답이 돌아올 리도 없었다. 결국 옆자리에 누워버리자 그제야 만족한 듯 이타도리는 작은 숨소리를 내쉬며 고죠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나도 모르겠다··· 고죠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렇다고 바로 잠이 올 리가 없었다. 따끈한 이타도리가, 자꾸 제 다리로 고죠의 다리를 휘감고 몸을 붙여오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고죠는 한참을 뒤척거렸고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덕분에 늦잠을 잤다. 깨어보면 이타도리는 없었다. 같이 아침을 먹던 식탁에는 이타도리가 해놓았을 볶음밥에 뚜껑이 덮여 있었다. 고죠는 그릇 옆에 놓여있는 쿠키를 집어들었다. 시로하토 베이커리에서 자주 보던 쿠키였다. 원래 종류는 오트밀과 초콜릿 뿐이었을 텐데, 이 쿠키는 크랜베리가 박혀있는 걸 보니 테스트 용으로 만든 신제품인가 보다. 호랑이가 그려진 쿠키 포장지에는 조그만 메모가 붙어있었다.

[오늘 하루도 화이팅!]

이타도리의 글씨체였다. 휘갈긴 글씨와 평범하게 둥그런 쿠키마저 귀여워 보이는 걸 보니 잠이 덜 깬 것 같았다.

고죠는 볶음밥을 먹고, 메모지가 붙은 그대로의 쿠키를 주머니에 넣고서 출근했다.

평소처럼 임무를 마치고 고전으로 돌아오자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있었다.

“메구미!”

우렁찬 데시벨에 후시구로가 인상을 찡그렸다. 어쩌다 이렇게 시끄러운 인간들이 주변에 많아진 건지 모르겠다. 

고죠는 인사하기가 무섭게 후시구로를 학생들에게 끌고갔다. 실력 있는 선배는 좋은 학습 도구로서 후배들에게 봉사해야 한다는 게 언제나 고죠의 주장이었다. 말수가 적고 인간관계에 적극적이지 않은 후시구로가 후배들과 말도 트고 친해지길 바래서도 있었다. 후시구로는 언제나 질색하면서도 결국 저를 동경의 눈으로 보는 후배들 앞에 서주곤 한다. 

“그 표정 좀 그만둬요.”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이 흩어지고서야 후시구로는 훈련장에서 빠져나왔다. 구석에서 지켜보고 있던 고죠가 건넨 포카리 스웨트를 낚아채 음료를 쭉 들이킨 후시구로가 싱글거리는 얼굴에 쏘아붙였다.

“그 표정이 뭔데?”

“다 큰 자식 보는 아버지 표정이요.”

“비슷하잖아?”

“아닌데요.”

하여간 요즘 애들은 저 혼자 큰 줄 안다. 고죠가 억울해하자 후시구로는 포카리를 마저 마시며 성가셔했다. 항상의 패턴이었다. 요즘 맡은 임무들, 제자들의 이야기와 고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연락을 잘 받아주지 않는 터라 고죠가 늘 궁금해하는 쿠기사키의 안부까지 두 사람의 대화는 툭툭 끊어지는 듯 천천히 이어졌다. 후시구로가 다 비워낸 포카리를 내려놓자 고죠가 페트병을 후시구로의 그림자에 집어넣으려 했고, 옥견까지 나오고서야 장난이 멈췄다. 옥견이 고죠의 주머니 쪽으로 코를 킁킁거렸다.

“똑똑하네.”

“뭐가요?”

고죠는 쿠키를 꺼내보였다. 뭔지 모를 메모가 붙어있다 뿐 특별해 보이는 것 없는 쿠키였다. 후시구로가 의문을 띄우자 유지가 만들어준 건데, 자랑하는 말이 돌아왔다. 후시구로는 해괴한 걸 보는 표정을 지었다. 뭐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우리 이제 사이 좋다고.”

“그래서요.”

“너희 원래 아는 사이였단 거 알았으니까, 나한테 뭐 숨기지 마.”

고죠는 쿠키를 쪼개 옥견에게 한 입 먹이고 남은 걸 깨물어먹었다. 그래봐야 아무것도 모르면서. 후시구로는 미간을 찌푸렸다.

“기억 안 났잖아요.”

“안 났어.”

고죠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갯짓이 후시구로의 어딘가를 쿡 찌르는 듯 했다.

후시구로는 고죠와 오래 알고 지내며 여러모로 정도 들었으나 그의 그런 태도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타도리가 처한 상황이나 주술계에서 그들의 위치에 비해 가볍고 담백하게 구는 게 본인이야 편할지 몰라도 지켜보는 사람으로서는 언제나 마음 한 구석이 불안했다.

“지금까지 기억나지 않았으면 안 돌아오겠죠.”

“그건 모르지? 그러더라도 어쩔 수 없지만.”

“그거 되게 무책임한 발언인 거 알아요?”

“그거 무슨 뜻?”

“말 그대로예요.”

쿠키를 다 먹어 치운 고죠는 물티슈로 손을 닦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뜻하지 않게 굴러가는 대화의 방향에 조금 의아한 것 같았다.

“난 지금에 만족하는데, 유지도 그렇고.”

“둘만 사는 거 아니잖아요. 엮인 사람들도 생각해달라고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게 싫은 거야?”

“기억은 상관없어요. 태도 얘기를 하는 건데··· 아니, 상관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스쿠나의 그릇이 무슨 취급을 받았는지 기억도 못하니까 이러는 거 같은데.”

“메구미, 나도 잊어버리고 싶어서 잊은 건 아닌데? 너는 기억한다고 지금 나한테 시위하는 거?”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이타도리를 여기서 빼내려고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르잖아요. 나는 이타도리가, 제발 이 거지 같은 데랑 그만 엮였으면 좋겠거든요. 그게 선생님한테도 나아요. 이타도리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메구미, 너는 주술사 아냐?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쳐도 내가 유지 곁에 있는 게 더 안전할걸?”

“최강이라도 항상 성공하는 건 아니잖아요.”

“···”

“선생님이 우리 학년에 가르쳐준 게 그거라고요.”

고죠는 후시구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깨달았다. 그가 예시로 드는 건 시부야다. 10월 31일, 고죠가 봉인되었던 그곳. 봉인이 해제된 후 제일 먼저 돌아온 기억 또한 시부야에 나타난 게토, 그의 가장 커다란 실패였다. 고죠가 드물게 입을 다물자, 주인을 대변하듯 그의 핸드폰이 날카로운 벨소리를 토해냈다.

그 시간, 이타도리는 평소보다 이르게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간밤에는 제대로 잠을 설쳤다. 새벽에 목이 말라 깨어나 보니 고죠가 옆에 잠들어있었다. 잠은 홀딱 깨버렸고 이타도리는 뜬 눈으로 밤을 새우다 출근했다. 간만에 출근한 사장은 숙취와 수면 부족에 초췌해진 이타도리가 마음 쓰였는지 오늘은 일찍 퇴근하라 일렀다. 이타도리는 얼른 가서 쉬라는 사장에게 꾸벅 인사하고 빵집을 나섰다. 

맑은 공기를 들이 쉬자 묵직하던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이타도리는 잠시간 멈춰 서서 눈을 깜박이다, 스프링이 튀어나가듯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오늘은 일찍 나왔으니 니쿠자가를 만들어볼까. 달게 만들면 고죠가 좋아하겠지. 단 거 너무 좋아하는 습관 고쳐줘야 한다고 다짐하면서도 이타도리는 어느 새 자신의 요리가 점점 달아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육점이 어디더라? 발을 멈춘 이타도리는 슥 몸을 돌려 날아든 칼을 피했다.

눈이 번들거리는 남자가 커다란 대도를 휘둘러 어깨에 걸쳤다. 그 칼엔 주력이 타오르고 있었다.

빵집을 나설 때부터 따라붙는 사람이 있다는 건 알고있었다. 혼자 처리할 수 있겠다 싶어 빵집에서 되도록 떨어지려고 했는데 이타도리가 생각하는 안전 거리에 채 닿기 전에 남자가 달려들었다. 이건 별론데. 이타도리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서자 겁먹었다고 생각했는지 광기 어린 얼굴에 웃음이 걸렸다.

“바로 기절시키려고 했는데, 운동을 좀 하나 봐?”

“당신 뭐야?”

“이타도리 유지, 맞지? 너 찾으러 왔어. 나랑 같이 가줄 데가 있거든.”

주술을 사용하고, 일반인을 납치하려 드는 사람. 주저사다. 그들의 목표는 고죠일 것이다. 이타도리는 고죠와 살고 있다는 걸 제외하면 노려질 이유가 없으니까. 이타도리를 납치해다 고죠를 협박할 생각일까.

고죠가 붙인 사람이 있었다면 지금 당장 무슨 조치가 취해졌을 테니, 사람 붙이지 않겠다는 말은 진짜였나보다. 이타도리는 한가로운 생각을 했다.

“순순히 따라오면 목숨은 살려줄게.”

“미안, 어릴 때 아무나 따라가지 말라고 배웠거든.”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 보지?”

“그건 아니지만···”

이타도리는 주변에 사람이 없나 살피며 공격 자세를 취했다. 얼른 기절시키는 게 최선이었다. 그때 하필, 시로하토 베이커리의 뒷문을 여는 사장이 눈에 들어왔다. 한 손에 핸드폰을 들고 통화하고 있는 그의 다른 손에는 식빵이 들려있었다. 그러고 보니 밤식빵을 새로 만들었다며, 가져가서 시식해보라고 말했었는데 이타도리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이타도리를 잡아 식빵을 주려고 나온건가. 다행히 사장은 전화 통화에 정신이 팔려 이쪽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네가 날 죽일 수 있을 것 같진 않네.”

빠르게 끝내면 돼, 빠르게. 이타도리는 속으로 되뇌었다. 주저사는 이타도리의 여유로운 태도에 화가 치밀어 오른 것 같았다.

“그럼 죽기 직전까지는 어쩌든 상관없는 거겠지? 나도 널 생포해서 끌고 가기로 했고?”

주력이 벌겋게 타오르는 대도가 크게 휘둘러지는 동시에, 이타도리는 자세를 낮추며 하체 쪽으로 발을 날렸다. 주저사는 간신히 뒤로 넘어지다시피 하며 공격을 피했다. 스쿠나와 분리되며 주력은 없어졌지만 피지컬로는 어딜 가서 져본 적 없는 몸은 그대로였다. 예상보다 지나치게 빠른 속도와 파워에 상대는 놀란 동시에 분개하는 표정으로 칼을 고쳐쥐었다.

“이까짓게···!”

다음 순간, 단단한 손목이 주저사의 손목을 가격했다. 그는 간신히 대도를 떨어뜨리진 않았으나 손목은 잠시 간 움직일 수 없었다. 그 틈을 노려 치명타를 꽂으려던 이타도리의 주먹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멈칫했다.

“이타도리 군?”

사장이었다. 그는 무기를 휘두르는 낯선 사람에 놀라 눈을 부릅뜨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이타도리가 주저사와 사장 사이의 거리를 계산하는 동시에 주저사도 사장과 이타도리를 번갈아보며 히죽 웃었다.

“일반인은 건드릴 생각 없었지만, 뭐 상관은 없겠지.”

이타도리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사장이 다가오고 있었다. 도망가라고 말할 틈도 없었다. 이타도리는 주저사가 휘두른 대도를 가까스로 피하고, 힘을 실어 발차기를 날렸다. 이번엔 제대로 먹혔다. 복부에 꽂힌 타격에 상대는 안색이 변했다. 간신히 뒤로 물러난 주저사가 안주머니에서 부적을 꺼내 휘둘렀다. 부적에서 솟아난 건 식신이었다. 독수리의 형태를 한 식신이 날아올라 사장에게 달려들었다. 

독수리가 그리 강하지 않더라도, 건강이 좋지 않은 노인이 한 번이라도 공격을 받는다면 무사할지의 여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식신을 보고 놀라 그 자리에 주저앉은 사장의 앞을 가로막은 건 이타도리였다. 이타도리와 부딪친 반동으로 식신은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 사이 주저사가 달려들었다. 이타도리는 덜덜 떨며 핸드폰을 누르는 사장에게 입을 열려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단검이 옆구리에 꽂혀있었다. 이타도리는 칼을 쥔 그의 두 손목을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움직이지 못하게 된 주저사가 놀란 눈을 떴다. 이타도리는 남은 한 손으로, 그대로 주저사의 얼굴을 후려쳤다. 그 타격음만 듣는다면 누가 피해자고 누가 가해자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주저사가 쓰러지자 이타도리는 사장을 돌아보며, 핏기가 빠져나간 입술을 달싹였다.

“신고하지 마시라니까···”

*

주저사 집단 W. 그들은 주술고전을 중심으로 한 주술계의 기존 질서에 반감을 품은 주저사들로 구성된 조직이다. 그들은 주술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억제력인 고죠 사토루를 쓰러뜨려야 한다는 데는 뜻을 모았지만 그에게 정면으로 대항할 힘은 없었기에 뒷조사를 해 고죠의 동거인을 이용할 계획을 세웠다. 본래 그 계획은 나름대로 치밀했으며 이타도리의 주변을 맴돌며 여러 달 동안 준비해온 일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 고죠를 필두로 한 주술사들이 대대적인 소탕 작전을 벌이면서 조직의 대부분이 와해당했고, 도망친 잔당은 너덜너덜해진 계획을 허술하게 실행하고 말았다.

이 계획에 휘말린 건 동네 경찰들도 포함되었다. 웬 괴한이 자기네 직원을 공격한다는 빵집 사장의 신고를 받은 경찰들이 출동해 기절한 범인을 잡았다. 구급차가 달려와 옆구리에 칼이 박힌 피해자를 병원으로 옮겼고 현행범은 정신을 차린 뒤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이 사건을 맡은 타카시 경부보는 범인의 소지품에서 괴상한 부적과 주구 따위를 발견했다. 그는 주술에 대해서는 개뿔도 아는 게 없었지만 이게 잊을 만 하면 나타나는 주술인지 마술인지를 쓰는 비밀 집단과 관계된 사건이란 걸 깨달을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 주술계와 관련 있는 형사 사건이 일어날 때 사용하는 경시청 내부 직통 라인이 연결되었다.

그 시간, 테이쿄 대학 병원 응급 센터에 자상 환자가 들어왔다. 상처는 작았지만 깊어 내출혈을 일으켰고 이미 피를 많이 흘렸다. 감염 위험이 크고 내부 상태가 좋지 않아 개복 수술이 결정되었다. 

연락을 받은 이지치는 사건을 듣고 긴장했다가, 피해자의 신상을 알고 난 뒤 대경실색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 경찰이 주저사를 상대하도록 내버려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지치는 바로 경찰서로 이동하며 고죠에게 연락을 넣었다. 고죠가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이타도리는 수술실로 옮겨지고 있었고, 그가 환자를 찾았을 땐 이미 수술이 시작된 후였다. 

어차피 혼자 왔으니 가능하면 제자들에게는 알리지 말까, 고죠는 잠시 간 고민했다. 이타도리가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숨길 수도 없는 일이었다. 

후시구로와 쿠기사키가 바람같이 달려왔다. 아까 전화 받고 튀어나가더라니 이런 일이었다면 미리 말해줬어야 할 거 아니냐고, 후시구로가 욱해서 따지고 드는 걸 쿠기사키가 당장은 이타도리가 더 중요하다며 말렸다. 그래놓고는, 상황 설명을 듣고 난 쿠기사키는 주저사를 잡아 족쳐야겠다며 경찰서로 뛰어갔다. 이번엔 후시구로가 말릴 새도 없었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쿠기사키의 뒷모습을 후시구로와 고죠는 황망하게 쳐다보았다. 

수술은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했는데, 대기실에 앉아있는 시간은 누군가 붙잡아놓은 듯 도통 흐르질 않았다. 찝찝하게 끝나버린 말싸움 이후, 꼭 필요한 말 이외에 두 사람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러게 내가 뭐랬어요, 라고 언제 말할까. 고죠는 누구를 비꼬고 싶은 건지 알 수 없는 심정으로 후시구로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후시구로는 고죠를 의식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는 한참 침묵을 지키다 곰곰히 생각에 잠긴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타도리는 고전에 오는 거 안 좋아해요.”

“무슨 말이야?”

“안 그러길 잘했다고요. 수술이 이미 시작되지만 않았으면, 이타도리를 고전으로 데려갈 생각이었잖아요.”

맞는 말이었다. 병원에 오는 내내 고전으로 데려갈 빠른 루트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미 수술을 시작했다는 말에 어쩌질 못하고 한숨만 쉬었었다. 왜 고전으로 오기 싫다는 건지 고죠는 알지 못한다. 읽었던 기록을 떠올리며 짐작만 할 뿐이었다. 애초에 일반인이 주저사와 싸울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황당했다.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너의 과거가 너를 만들었겠지. 나는 그걸 모르는데.

수술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타도리는 회복실로 옮겨졌다. 당장 면회는 되지 않았고 깨어나지 않은 창백한 얼굴만 유리창 너머로 볼 수 있었다. 고죠는 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후시구로를 아침에 다시 오라고 달래 집으로 보냈다. 이제 그 애도 성인인 걸 알면서도, 선생으로서 제자가 병원에서 밤을 지새우게 내버려두면 안 될 것 같았다. 후시구로를 배웅하고 다시 회복실 앞으로 돌아온 고죠는, 스스로는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는 채 복도를 서성거렸다. 여기서 이러고 있어봤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데.

이른 아침, 이타도리는 1인실로 옮겨졌다. 면회가 된다고 해서 고죠는 병실로 들어갔다. 이타도리는 여전히 죽은 것처럼 자고 있었다. 침대 옆에 앉아서 아침 햇살을 받는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이타도리가 다친 건 고죠의 실수였다. 착한 너는 내 탓을 하지 않겠지만. 그런 너를 내가 견딜 수 있을까.

얼마나 오랫동안 그러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고죠는 깜박 잠들었다.

다시 한 번 머릿속 영사기가 돌아갔다. 키쿠후쿠 봉지를 손목에 걸고, 스기사와 고등학교에서 스쿠나의 그릇을 처음 봤을 때부터···

*

이번엔 정말 죽겠구나. 스쿠나를 죽이고 자신도 쓰러졌을 때, 이타도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죽지 않았다. 혼곤한 정신으로 눈을 떴을 땐 고전이었다. 저승 문턱까지 갔던 걸 간신히 살려냈다고 했다. 온몸이 으스러지다시피해 반전술식으로 치료했음에도 한동안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제대로 의식이 돌아왔을 땐 후시구로가 와있었다. 다 괜찮다고 말해줬다. 다 끝났다고, 안심해도 된다고.

기쁘다기보다는 멍했던 것 같다.

천천히 감각이 돌아오면서 이타도리는 그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고죠가 보고 싶었다. 옥문강의 봉인도 해제되었다고 했다. 만나러 와주지 않을까, 바랐다.

하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하루에 한 번씩 번갈아가며 와주는 후시구로와 쿠기사키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고죠 선생님은? 하지만 입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나를 보기 싫다고 했다면? 그들의 어딘가 찜찜해보이는, 말 못할 것이 있어 보이는 표정이 그런 의심을 배가 되게 했다. 역시 나를 경멸하는 걸까.

자신을 믿고 목숨을 구해준 그의 기대를 배반했다. 스쿠나를 제어하지 못했고, 대학살을 막지 못했다. 이타도리는 여전히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자신을 용서해줄 거란 기대는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다.

그가 나를 보기 싫다고 했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인정하면서도 가슴에 찬바람이 불었다.

몸은 회복되어 가는데 이타도리의 컨디션은 좋아지기는커녕 갈수록 악화되었다. 보다 못해 나선 건 이에이리였다. 고죠가 기억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이타도리의 가라앉았던 눈에도 심지가 돌아왔다. 충격요법도 치료법의 하나라는 게 증명된 셈이었다. 막상 당사자인 이타도리는 그저 어안이 벙벙했다. 잊었다니.

그때의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처음엔 당연히 걱정이 됐다. 기억을 잃었다는 게 무슨 일인지, 어딘가 더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그 다음엔 끔찍하게도, 기뻤다. 내가 미워서, 내가 싫어져서, 날 경멸해서 오지 않는 게 아니구나. 기쁨을 느끼기 무섭게 그런 생각을 했다는 데 죽도록 미안해졌다. 그리고 밤에 혼자 침대에 누운 이타도리는 몸을 웅크렸다.

차라리 고죠를 몰랐었다면 나았을까. 지하실에서 그에게 손을 뻗지 말걸 그랬나. 처음으로 이제 외롭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이제는 이타도리만이 기억하는, 그가 자신을 채워주었던 시간들이 더없이 공허했다. 따뜻했던 기억들을 더듬을수록 몸은 추워졌다. 지독하게 외로웠다.

고죠는 천천히 기억을 찾아가고 있다 했지만 이타도리에 대해서는 기억해내지 못했다. 이타도리는 사랑은 왜곡된 저주라던 그의 지론을 자주 떠올리곤 했다. 나는 결국 저주가 되어버렸나. 나를 미워할 바에야, 나를 잊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저주를 걸었나.

하지만 얼굴을 마주할 용기는 없었다. 무서웠다. 혹시라도 그가 제 얼굴을 보고 기억을 떠올려낼까봐, 아니면 제가 그를 붙잡고 울어버릴까봐.

‘이 집은 무슨 빵이 맛있어?’

하지만 우려했던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우연히 찾아온 그는 자신을 보고도 기억을 떠올리지 못했고, 자신은 멍하니 굳어서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그···’

어쩌면 예감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당신은 나를 더 외롭게 할지도 몰라.

‘손님은 이런 거···’

그런데도 포기할 수 없었어.

‘좋아하실 것 같은데요.’

사랑이 뭐라고.

*

 

몇 년 전 온몸의 뼈가 부러진 채 눈을 떴을 때 보이길 바랐던 사람이 지금 병원 침대에 엎드려 있었다. 깁스가 감기지 않은 곳이 없어 미라나 다름없던 그때와 달리 배에 감긴 붕대 하나뿐이라는 사실이 지금이 꿈이 아니란 걸 일깨웠다. 이타도리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뻐근하고 머리가 묵직하게 아팠지만 그럭저럭 견딜 만 했다. 엎드려 잠든 고죠가 뒤척였다. 제대로 자라고 해야 할텐데, 옆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해서, 이타도리는 그를 깨우려 뻗은 손으로 차마 어깨를 흔들지 못하고 부드러운 머리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찌푸려졌던 미간이 조금 풀어지는 것이 신기했다. 하얀 머리카락이 손 끝에 감겨오는 감각이 기분 좋았다. 언제까지고 그러라고 해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 내 머리 닳겠는데.”

잠긴 목소리에 이타도리는 아, 하고 손을 뗐다.

“깼으면 깼다고 말을 하지···”

“그냥···”

좋아서. 고죠는 제 스스로도 알아듣기 어려울 작은 소리로 웅얼거렸다.

스기사와 고등학교에서 처음 만났을 적의 기억이 났다. 당장의 사형은 막았지만, 이타도리는 손가락을 다 먹으면 죽어야 할 운명이 됐다. 그런데 그 애는 환하게 웃다가, 소년원에서 심장이 뽑힌 시신으로 돌아왔다. 고죠는 기록을 읽는다고 떠올릴 수 없는, 이타도리의 시신을 보호하고 있던 후시구로의 창백한 얼굴과 죽은 제자의 손을 잡았을 때 느낀 식은 감촉을, 가슴을 뻐근하게 만들었던 분노를 기억해냈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은 마치 그런 기억은 잊어버리라는 듯 다정하고 애틋했다.

몸을 일으키자 눈이 멀어버릴 듯 강한 햇살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고죠가 인상을 찡그리자 이타도리는 단번에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배가 찢어져서 수술 받은 환자는 그쪽인데.

“몸은 어때, 유지.”

“나는 괜찮아.”

아직도 얼굴이 창백하고 입술이 부르터서 사람 몰골이 아닌데 괜찮긴 뭐가 괜찮아. 고죠는 튀어 오르는 말을 삼켰다. 대신 나온 건 스스로도 생각지 못한 말이었다.

“··· 미안해.”

“뭐가?”

나 때문에 네가 다친 거. 주저사 일에 휘말리게 한 거. 지켜주지 못한 거. 너를 잊어버리면 안 됐다. 내가 너를 지켜줬어야 했는데. 하나하나 말하자니 끝이 없었다.

“··· 다.”

“···”

“내가 한 것도··· 내가 못한 것도··· 전부 다.”

“··· 뭔가 기억났어?”

“전부는 아니고··· 조금.”

이타도리는 입을 벌리다가, 다물었다. 기억을 찾길 바랐다. 아니, 영원히 잊어버리길 바랐다. 너무 오래 품어와서 이제는 무엇이 진심인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이타도리는 고죠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무거운 침묵만이 내려앉았다. 숨이 막혔다. 고죠는, 자신은 언제나 남들을 숨 막히게 하는 사람이었는데.

잠시 후 간호사가 상태를 체크하기 위해 찾아온 후에야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적막이 깨졌다. 후시구로와 쿠기사키가 찾아왔을 때 고죠는 조용히 병실을 나왔다.

집으로 돌아간 고죠는 이타도리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지치를 시킬 수도 있었지만 집에 타인을 들이는 게 내키지 않아서 직접 챙겨줄 생각이었는데, 막상 가방을 펼쳐 놓으니 뭘 꺼내야 할지 막막했다. 입원 수속을 밟을 때 병원 직원이 입원 준비물 이야기를 했던 것 같지만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듣지 않았고 떠올려보려 해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고죠 자신은 일반 병원에 가본 적도 없었고 병문안을 갔던 것도 전부 고전 안이었던 것이다. 그는 급한 대로 인터넷에 입원 준비물을 검색해가며 하나하나 물건들을 꺼내 커다란 보스턴 백에 던져넣었다. 방은 순식간에 어수선하게 변했다. 뭐가 더 필요할까 싶어 침대 옆 서랍장을 열어보던 고죠의 시선에 낯선 물건이 걸렸다.

엎어져있는 액자였다. 이 방에 자주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액자가 세워져 있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고죠가 꺼내본 액자 속 사진은 낯익은 배경이었다. 아마 고전의 운동장 한 구석, 훈련 도중 쉬는 시간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이들을 누군가 찍어준 것 같았다. 환하게 웃는 이타도리와 브이를 그리고 있는 쿠기사키, 언제나 그렇듯 별 관심 없다는 듯한 표정이면서도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는 후시구로. 그리고 그 아이들의 곁에 고죠가 웃고 있었다.

흉터라고는 이타도리의 눈 밑에 새겨진 자국 뿐인 앳되고 말간 얼굴들을 고죠는 한참 응시했다. 기억을 모두 되찾는다고 해도, 이 액자를 버리지도 못하고 눈에 잘 띄는 곳에 세워둘 수도 없었던 이타도리를,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은 채 아무것도 모르는 고죠와 지냈던 이타도리를 그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

고죠는 그 날 이후 병원을 찾지 않았다. 첫날 짐을 가져다준 이지치가 며칠 후 병문안 차 잠깐 들리자, 이타도리는 그에게 슬쩍 고죠의 행방을 물었다. 주저사 잔당을 잡아 들이고 심문하느라 바쁘다는 말에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곁에서 쿠기사키가 신경질적으로 과자 봉지를 뜯고 있었다.

쿠기사키와 후시구로는 번갈아가며 병실에 들렀다. 후시구로가 음료수와 과일, 과자 따위를 사다가 냉장고를 채워 놓으면 쿠기사키와 이타도리가 열심히 까먹었다. 과자 한 봉지를 순식간에 비워내고 이타도리가 난 괜찮으니 가보라 운을 띄우면 쿠기사키는 이것만 보고 갈 거라며 텔레비전을 가리켰다.

“쿠기사키가 그러니까 어색하잖아. 텔레비전은 내 전문인데.”

“전문은 무슨, 너는 그냥··· 뇌를 잠깐 텔레비전에 맡기는 거고.”

“방금 되게 심한 욕하지 않았어?”

“사실 적시거든, 멍청아. 너 외로움 많이 타니까.”

쿠기사키는 후시구로가 사다 둔 병 주스를 뜯었다. 이타도리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포도 맛이라 하나 더 꺼내 건네는 손에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그래 보여?”

“나는 외롭지 않은 너를 본 적이 없어.”

“뭐야, 그게···”

이타도리는 뒷목을 긁적였다. 쿠기사키는 주스를 홀짝였다. 텔레비전 속에서 떠드는 연예인들의 웃음소리가 적막을 채웠다.

“쿠기사키.”

“어.”

“집에 가고 싶어.”

“그렇겠지.”

“병원 냄새··· 진짜 싫다.”

할아버지도 생각나고. 얼른 퇴원하고 싶어, 이타도리가 중얼거렸다. 고죠는 오늘도 오지 않을 것이다. 먼저 연락해볼 용기가 없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지만.

*

입원 일주일 차, 의사는 슬슬 퇴원해도 좋을 것 같다는 말을 건넸다. 아침 식사를 마친 이타도리는 이지치에게 전화를 걸었다. 퇴원 소식을 전하자 그는 내일 집으로 데려다줄 테니 병실에서 기다리라고 말했다. 이타도리는 한참 망설이다 겨우 입을 뗐다.

“이지치 씨, 고죠 씨한테···”

-네.

“그러니까···”

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지치는 더 묻지 않고 알겠습니다, 하며 끊었다. 뭘 알겠다는 건지 이쪽은 모르는데.

뭐가 됐든 이지치가 말을 전했을 텐데도 고죠는 오지 않았다. 저녁 노을이 지는 병실에서, 아마 마지막일 병원 밥을 먹으면서 이타도리는 차라리 그가 나타나지 않길 바랐던 후련함과 정말 오지 않는 그에 대한 분노를 꼭꼭 씹었다. 식사를 마치고는 가벼운 운동 삼아 병원 뒤뜰을 한 바퀴 돌고, 지하의 매점으로 향했다. 간식 거리나 하나 사 먹을 요량이었다. 음료 코너를 죽 훑다가 이타도리는 저도 모르게 카라멜 마끼아또로 손을 뻗었고, 그 옆에 있던 아메리카노를 꺼내던 커다란 손과 손등이 스쳤다.

고개를 들면 고죠가 서있었다.

다시 만나면 어색할 것 같았는데 꼭 그렇지도 않았다. 둘 다 말이 워낙 많은가. 몸은 어때, 로 시작된 대화를 나누면서 커피를 바꿔 들고 병원 근처를 한 바퀴 돌았다. 퇴원하고 집에 오면 휴직계를 내고 푹 쉬라는 고죠에게 이타도리가 바로 출근해도 괜찮다고 반박하면서 언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일주일만 더 쉬고 출근하기로 합의했을 땐 이미 하늘이 어둑해져 있었다. 

고죠는 병원 입구까지 이타도리를 데려다주었다. 내일 데리러올 테니까, 말을 잘 했는데 돌아서는 건 영 쉽지 않았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미처 옮기기도 전에 고죠의 소매를 붙잡는 손이 있었다.

“··· 안 가면 안 돼?”

“···”

“혼자 있기 싫어.”

고죠는 고개 숙인 이타도리의 분홍색 머리칼을 쳐다보았다. 같이 있고 싶다고 하지 못하고 혼자 있기 싫다고 하지. 우리는 결국 이런 사람들이다.

한구석에 놓인 소파에 누워 자면 되겠지만, 굳이 말을 꺼내지 않고 고죠는 보조 침대를 폈다. 이타도리가 어디 처박혀 있었는지 모를 담요를 꺼내왔다. 후시구로나 쿠기사키가 같이 잔 적도 있었을까. 그럴 일이 아닌데 괜히 신경에 거슬렸다.

고죠는 이타도리가 누운 걸 보고 병실의 불을 껐다. 고죠야 육안이 있으니 어둠 속에서도 움직이는 데 크게 무리가 없다. 보조 침대에 누워 담요를 덮었다. 이타도리가 뒤척이는 기척이 예민하게 들렸다.

“··· 안 자?” 

“고죠 씨도 안 자잖아.”

“유지는 베개에 머리 대면 3초컷 아니야?”

“사람을 뭘로 보는거야?”

“아니라고?”

“십 초는 되거든.”

“내 생각보다 세 배나 길었네, 미안. 십 초 지났나, 혹시? 자?”

“고죠 씨가 말 시켜서 깼잖아.”

“그럼 자장가 불러줄까? 아니면 양 세줄까?”

“애도 아니고···”

이타도리가 낮은 소리로 웃었다.

“좀 싸늘하네.”

“온도 올릴까?”

“···”

잘만 돌아오던 대답이 없었다. 아, 이게 아니구나. 고죠는 눈치 없게 군 제 입을 한 대 때렸다. 

“··· 침대 좁지 않나?”

“싫으면 온도 올려줘.”

“아니, 싫다는 건 아니고 유지가 불편할까봐.”

“상관 없어.”

이타도리가 벽 쪽에 몸을 붙여 공간을 내줬다. 고죠는 얼른 올라가 그 옆자리를 차지했다. 덩치가 작지도 않은 남자 둘이 넉넉하게 누울 만한 공간은 아니라서, 좁았다. 하지만 체온이 바로 닿는 건 나쁘지 않았다.

“··· 유지, 안 자?”

“응.”

“나 때문에?”

“본인부터 자고 얘기해.”

“자는데 어떻게 얘기해···”

자려는 노력을 좀 해 봐, 이타도리는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고죠는 천천히 돌아누워 이타도리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밀어내지 않자 날개 뼈에 얼굴을 묻었다. 옅은 병원 냄새와 부드러운 체취가 코끝을 간질였다.

“··· 유지.”

“응.”

“···”

“···”

“미안해.”

“···”

“늦게 와서.”

이타도리가 허리를 끌어안은 고죠의 손을 감쌌다. 먼저 연락하지 못한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서로를 감당할 시간이 필요했으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기억, 얼마나 났어?”

“전부는 아니고···”

“···”

“지하실에 박혀 있으라고 하면 싫다고 하지 그랬어.”

“싫지 않았어.”

“정말?”

“정말.”

“···”

“지금도··· 싫지 않아, 무슨 일이 있었어도.”

“나도 그렇다고 하면 안 믿어줄 것 같은데.”

“···”

“근데 나는 믿을게.”

믿는 게 먼저인지, 그저 곁에 있고 싶어서 믿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너에게 그렇게 이기적이다. 그런 점까지 모두 미안하지만. 

평생 너에게 미안해 할 거야. 너도 그렇겠지.

“있잖아.”

“응.”

“선생님이라고, 불러도 돼?”

“유지가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

“내 약속이야.”

“···”

“평생 선생님을 믿는다는 거.”

안 믿기면 약속할까. 이타도리가 고죠의 새끼 손가락에 손가락을 걸었다. 고죠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척추 라인을 따라 뭉크러진다.

“오늘 하루만 약속하고··· 내일도 약속해. 그 내일도 하고···”

“응.”

그러다 보면 평생이겠지. 이타도리의 손가락이 고죠의 손등을 가만가만 쓸었다. 고죠는 이타도리를 더 끌어당겨 제 품 안에 가득 채웠다. 지금은 이거면 충분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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