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증 上

by 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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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적 소재를 담고 있습니다. 민감한 종교적 소재에 유의에 주세요. 또한 고증을 거치지 않은 부분이 다소 존재합니다.

창공에 찬란한 빛이 가득한 녹음의 계절이었다. 바다가 있는 아름다운 마을. 지방에 있는 한가한 교구. 작고 고풍스러운 성당. 뒷마당에는 검은 사제복들이 햇볕에 걸려 펄럭였다. 에델바이스는 이 자그만 성당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그 성당의 성가대 지도를 맡고 있었으며 신자 상담 또한 담당하고 있었다. 그 일들은 에델바이스에게 그럭저럭 맞았다. 그리고 그럭저럭 괜찮은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부마자요?”

그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말이다. 주임 신부는 꽤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에델바이스는 구마 예식이니 사탄이니 뭐니 하는 그런 것들이 단순히 두려웠다. 이것은 에델바이스의 깊은 신앙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래요, 부마자. 우리 성당에서 운영하는 성 아네모네 병원에서 나왔습니다. 부마자는 9세 소녀예요. 평범하더군.”

“저, 저는… 고해 사제인데… 그 이야기를 왜 저에게…?”

주임 신부가 에델바이스의 말을 듣고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에델바이스는 그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한참을 웃은 뒤에야 주임 신부는 말을 덧붙였다.

“하하하, 이시도르… 겁먹은 건가요?”

“단순히… 그… 신앙심에서 비롯한……”

“괜찮습니다. 구마 사제는 리베르타 성당에서 오시니까요. 이시도르, 당신에게 구마를 맡기거나 그런 터무니 없는 짓은 하지 않으니 한시름 놓으세요.”

“그렇다면…?”

“당연히 고해성사를 부탁하려는 것입니다. 구마 사제는 구마 예식에 들어가기 전에 고해성사를 받아야 합니다. 악령의 공격을 받지 않기 위해서죠. 그것쯤은 아리라고 믿습니다.”

“네, 그럼요… 주임 신부님… 그럼, 구마 사제님들은 언제 오시나요?”

“아마 내일 오후쯤 올 겁니다.”

그렇게 갑자기……. 주임 신부는 그렇게 말을 하며 복도에 난 커다란 창을 바라보았다. 예스러운 문양의 창살에 먹구름이 걸려 있었다. 에델바이스 또한 시선을 따라 옮겼다. 높으신 분이 그러시니 시선을 따라 옮기는 것이 예의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곧 비가 오겠네요. 장마철이라고 그러니, 원……. 베드로 신부와 함께 신부복을 걷도록 하세요. 뭐, 이 정도는 알아서 하겠지만요.”

주임 신부가 다시 한번 호탕한 소리를 내며 웃었고, 에델바이스 또한 어색하게 그를 따라 웃었다. 한참을 웃고 나서야 에델바이스는 작별 인사를 건넬 수 있었다.

“하하하, 주임 신부님,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에델바이스는 주임 신부에게 인사를 드리고 복도의 모퉁이를 돌아 나온 뒤 한숨을 푹 쉬었다. 내심 자신에게 구마 예식을 맡기면 어쩌나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구마 사제가 내려온다니 다행이 아닐 수가 없었다.

*

비가 억수와 같이 쏟아져 내렸다. 일기예보에서는 아마 이례적인 폭우라고 그랬을 거다. 에델바이스와 주임 신부는 성당의 정문에서 그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빗방울이 검은 우산 한 쌍을 두드리는 소리가 꽤 묵직했다. 곧 택시 한 대가 빗길을 헤드라이트로 가로지르며 이쪽으로 왔다. 매끄럽게 멈춘 택시에서 신부복을 입고 여행 가방을 든 사제 두 명이 내렸다. 그 둘은 주임 신부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러자 주임 신부가 에델바이스에게 그들을 소개해 주었다.

“이쪽은 리베르타 성당 수석 구마 사제 토마스, 보조 사제인 발테르. 여기는 사제 이시도르입니다.”

그들은 서로의 세례명을 대며 악수를 나누었다. 에델바이스는 토마스 신부와 악수를 나누고 그의 보조 사제인 발테르와 악수를 나누기 위해 바라보았다. 순간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저 독특한 제비꽃 같은 눈동자 때문일까…. 에델바이스는 그와 손을 마주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빗물이 몇 방울 손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에델바이스 밀런, 이시도르 사제입니다.”

“비올라 알피나, 발테르 사제입니다.”

악수를 끝낸 뒤 에델바이스는 괜히 자신의 손을 꼼지락거렸다. 빗방울이 피부밑으로 스며들었다. 들어가자는 주임 신부의 말과 함께 네 사람은 성당으로 향했다.

*

에델바이스는 신자 상담을 마친 뒤 성당 근처를 거닐던 참이었다. 비가 그친 지 얼마 되지 않아 잎사귀와 가지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에델바이스는 찢어진 하늘의 틈 사이로 흘러내리는 빛을 받았다. 신자들이 에델바이스를 불러 세운 건 그때였다.

“신부님, 그 부마자 얘기 정말이에요?”

“네?”

“그럼, 가짜겠어? 그 저기 어디서 구마 사제인가 뭔가 오셨다며? 그쵸?”

“아뇨, 저도 잘……”

“그렇게 물으면 신부님이 옳다구나 그렇다 하시겠다!”

그들은 성당에 자주 나오시는 신자들이었는데 항상 셋이서 몰려다녔다. 다른 신자들에게는 도미솔 정도로 불리는 것 같았다. 키가 그 정도 차이 났기 때문이다. 말을 먼저 거는 쪽은 도였으며, 그다음은 미, 마지막이 솔이었다. 누구보다 빠르게 성당 내의 소문을 알아내고 에델바이스에게 물어보기 일쑤였다.

“근데 맞다던데? 못 보던 분들이 보이잖아. 머리가 조금 벗겨진 분이랑 엄청 무섭고 날카롭게 생긴 젊은 분.”

“저기 신자님들 곧 오후 미사 시작해요~?”

“아, 참 그렇네. 그런데… 그래서 진짜예요?”

“그으게……”

솔이 끈질기게 물어왔다. 에델바이스는 말꼬리를 늘리며 시선을 피했다. 대답해 주기 곤란했다. 본래 구마 예식이라는 것이 비밀리에 진행되는 경우가 많아 함부로 발설하면 안 됐기 때문이다. 에델바이스가 과하게 곤란해하자 미가 말을 거두었다.

“이시도르 신부님 곤란하게 하지 말어. 신부님도 사정이 있겠지. 그런데 그 새로 온 사람 성격이 막무가내라던데. 그 성당 다니는 지인이 말해줬어. 그 신부님한테는 무서워서 고해성사 못 받겠다더라.”

“그래~ 맞아, 성격 드세 보이잖아. 눈빛이 얼마나 께름칙한지 몰라!”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신자 도미솔 삼인방은 떠나갔다. 에델바이스는 괜히 부마자가 있는 게 사실이라고 떠벌린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죄스러웠다. 묵주를 주머니에서 꺼내 한 손에 들고 성호를 그었다.

“이야, 소문 정말 빨라. 그쵸?”

뒤에서 누군가가 에델바이스의 어깨에 팔을 둘러왔다. 에델바이스는 기도를 드리다 말고 화들짝 놀라 뒤돌아봤다. 구마 보조 사제가 옆에 서 있었다. 신자들의 이야기는 이미 다 들은 듯했다.

“아, 발테르 신부님….”

“…….”

비올라는 한참이고 아무 말 없이 에델바이스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에델바이스는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그의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동공으로 한 떨기 제비꽃 같은 그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비올라는 돌연 에델바이스의 눈꺼풀에 손을 올렸다.

“영이 맑네. 영성 기도를 자주 드리나 봐?”

“그, 너무 가깝……”

에델바이스는 비올라를 밀어냈다. 그러면서 진지하게 이단은 아닌지 고민했다. 다짜고짜 영이 맑다니? 에델바이스는 어수선하게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비올라는 그런 에델바이스는 빤히 보다가 문득 말했다.

“너 지금……”

“발테르!”

수석 구마 사제가 숨을 헐떡이며 이리로 오고 있었다. 비올라는 에델바이스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 뒤 수석 구마 사제에게로 향했다. 에델바이스는 자리를 비켜주는 게 좋겠다 싶어 슬그머니 그곳을 빠져나와 성당으로 향했다. 어제 주임 신부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곳에서 다시 주임 신부와 우연히 마주쳤다. 에델바이스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주임 신부는 잠시 에델바이스는 불러세웠다.

“이시도르, 오늘 오후에 고해성사가 있을 겁니다. 이 이야기를 알려주려 했는데 마침 잘 되었네요. 긴장하는 건 아니겠지요?”

“하하하… 달리 긴장할 이유가 있나요… 평소처럼 잘 베풀어드릴 생각입니다.”

“그럼 잘 부탁합니다.”

그렇게 짧은 대화를 나누고 에델바이스는 신자들의 고해성사를 위해 고해소로 향했다. 마지막 신자까지 성심성의껏 고해성사를 베푼 에델바이스는 고해소를 정리하고 밖으로 나왔다. 비올라와 다시 마주쳤다. 비올라는 에델바이스에게 고개를 숙여 가볍게 인사한 후 말했다.

“고해성사 받으러 왔습니다.”

“아, 그런가요. 오후에 고해성사가 있을 거라 했는데 지금인가 보네요. 안으로 들어오세요, 발테르 신부님.”

에델바이스와 비올라는 다시 인사를 나눈 후 에델바이스는 사제석으로 비올라는 신자 측 고해소로 들어갔다. 두 사람 벽을 놓고 서로 등진 채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잠시간 침묵이 지속되었다. 비올라가 고해성사 전 자기성찰 기도를 드리고 있을 터였다. 고해성사는 비올라의 성찰 기도를 끝맺는 음성으로 나긋하게 시작되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어 주시니 하느님의 자비를 굳게 믿으며 그동안 지은 죄를 사실대로 고백하시오.”

“아멘. …고해한 지 일주일 됩니다.”

그리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기간이었다. 에델바이스는 묵묵히 묵주를 쥔 채 비올라의 말에 귀 기울였다. 벽 건너편에서는 오랫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묵주를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가 알게 된 죄는 회의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구마 보조 사제로 있는 것에 회의감이 듭니다. 제 믿음에 의심이 가기 시작합니다…. 이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도 모두 용서하여 주십시오.”

“…….”

에델바이스는 어떤 훈계를 내려야 할 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발테르 신부님… 의심이라함은 어떤 것에 대한 의심이지요?”

“…….”

건너편에서는 정곡을 찔린 것처럼 한참이고 말이 없었다. 에델바이스는 대답을 재촉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한참이고 흘렀다.

“허망하게 느껴집니다. 구마 보조 사제로 있는 일이요. 그래서 제 신앙심에 의심이 가고 제가 구마 보조 사제가 아니라 이시도르 신부님처럼 고해 사제가 되었으면 어땠을까… 하고 이곳에 온 후로 더 자주 생각합니다. 목전에 닥치니 그런 생각이 더 드는 것 같습니다.”

“…….”

에델바이스는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묵주를 만지작거렸다. 나무 구슬끼리 부딪치는 딱딱한 소리가 고해소 안을 울렸다.

“구마 예식이 두렵습니까? 혹은 특별한 계기가 있는 것은 아닙니까?”

“…….”

두 사람은 또다시 침묵을 주고받았다. 고해소 안은 광대한 고요에 짓눌렸다. 에델바이스는 비올라의 침묵을 묵묵히 들었다. 이젠 그것이 그들의 언어인 듯했다. 연이은 침묵이 익숙해져 갈 즈음 비올라가 입을 열었다.

“특별한 계기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투정 같은 것입니다. 구마 예식이라는 것이 비밀리에 진행되지 않습니까? 저는 누군가가 저의 수고를 알아주길 바라나 봅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이 구절이 발테르 신부님께 도움이 될 듯합니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이사야서 49장 4절.’ 모든 수고는 하느님께서 알아주실 겁니다. 결코 허망한, 헛된 길은 아니란 말입니다. 믿음을 단단히 만드시길 바랍니다. 의심은 악령에게 트집잡히기 좋은 사사로운 감정이라 들었습니다. 꼭 갈무리 잘하셔서 무사히 구마 예식 행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통회 기도를 바칩시다.”

“하느님, 제가 죄를 지어 참으로 사랑받으셔야 할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기에 악을 저지르고 선을 멀리한 모든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나이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속죄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으며 죄지을 기회를 피하기로 굳게 다짐하오니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공로를 보시고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인자하신 천주 성부께서는 성자의 죽음과 부활로 세상을 당신과 화해시키시고 죄를 용서하시려고 성령을 보내 주셨으니, 교회의 직무를 통하여 몸소 이 교우에게 용서와 평화를 주소서. 나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교우의 죄를 용서합니다.”

“아멘….”

“주님은 좋으신 분이니 찬미합시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주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평화로이 가십시오.”

“감사합니다.”

곧 신자 측 고해소의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 후로도 에델바이스는 한참이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

“폐렴이요?”

“그래요. 수석 구마 사제님이 편찮으시다는군요.”

에델바이스에게는 날벼락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아니, 누구에게도 날벼락 같은 소식일 테다. 그러면서도 에델바이스는 왜 자신에게 이것을 알려주는지 의아했다.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구마 예식에……

“그래서, 이시도르 당신이… 발테르 보조 사제님과 병자성사를 다녀왔으면 하는데요.”

“아… 네, 그렇군요.”

에델바이스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숙이며 속으로 안도했다. 그러다 곧 번뜩이며 고개를 들어 주임 신부를 바라보았다.

“병자성사요?”

“네. 구마 예식 전에 진짜 부마자가 맞는지 정신질환은 아닌지 징후를 확인하고 오면 됩니다. 별다른 일은 없을 테니 겁먹지 말아요.”

“네… 주임 신부님….”

“지금 준비하면 됩니다. 구마 예식은 내일이니 오늘은 그냥 살펴만 보고 오면 됩니다.”

“네… 설명 감사합니다.”

에델바이스는 그때처럼 한숨을 푹 쉬며 상담실을 빠져나왔다. 얼른 준비를 하고 비올라를 만나러 가야 했다. 본당을 빠져나오니 하늘이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곧 비가 올 모양새였다. 에델바이스는 걸음을 재빨리 옮겨 기숙사로 향했다.

병자성사를 위한 간단한 채비를 마친 후 에델바이스는 기숙사 방 문을 열고 나왔다. 그러다 그 앞에 서 있는 비올라를 보고 놀라 주춤했다.

“뭐, 뭡니까?”

“무슨 죄지은 사람처럼. 얼른 가요.”

비올라는 앞장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에델바이스는 다급하게 비올라의 뒤를 따라 조심조심 걸으며 말했다. 비가 와서 계단이 제법 미끄러웠다.

“제 기숙사 방은 어떻게 알았습니까?”

“마침 기숙사로 들어가던 길에 보이던 걸……. 아, 다 챙긴 거 맞죠?”

“……. 네, 병자성사죠?”

“…그냥 옆에서 징후를 봐주면 돼요. 질문 같은 건 내가 하니까.”

비올라는 그렇게 말하고 우산을 펼친 뒤 빗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에델바이스도 허둥거리며 우산을 펼치고 뒤따라 빗속으로 들어갔다. 비올라는 말투만큼이나 걸음도 매우 불친절했다. 에델바이스가 한참을 부단히 걸어야 비올라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소아병동은 다른 병동보다 최근에 지어져 시설이 깔끔했다. 에델바이스와 비올라는 소아병동에서도 1인 병실 쪽으로 향했다. 1인 병실이 있는 복도는 특히나 사람이 적어 두 사람뿐이었다. 부마자가 있는 병실을 가장 구석진 곳이었다. 비올라는 미닫이문에 노크를 두어 번 정도 한 뒤 매끄럽게 열었다. 새하얀 병실 가운데 있는 어린이용 병상에 작은 체구의 소녀가 앉아 있었다. 소녀는 스케치북에 그림을 열심히 그리고 있었다. 비올라는 그 소녀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갔고 에델바이스는 문을 닫고 병실로 들어갔다.

“안녕.”

비올라가 그렇게 인사하자 소녀는 그제야 문 쪽을 돌아보았다. 검은 크레파스를 꼭 쥐고 있던 작은 손이 멈췄다. 새까만 눈동자가 두 사람을 바라봤다. 소녀는 수줍은 성격인지 입을 열려다가 곧 다물었다. 비올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병상 옆에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의자가 하나밖에 없었던 관계로 에델바이스는 그의 뒤에 섰다.

“우린 저기 옆 성당에서 온 신부님이야.”

아이는 조그맣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이의 눈동자가 비올라에게 향하다가 에델바이스에게로 향했다. 에델바이스는 최대한 무해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아이의 시선은 다시 비올라에게로 향했다.

“원래 이름은 안 알려주는데 너한테는 특별히 이름을 알려줄게. 난 비올라.”

비올라가 에델바이스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에델바이스가 비올라의 눈치를 보고 엉기며 말했다.

“난 에델바이스야.”

“너는?”

“…자비에.”

소녀가 입을 열었다. 비올라는 퍽 과장된 말투로 아이에게 맞춰주기 시작했다. 주머니에서 가죽 수첩과 볼펜을 꺼내 들었다.

“잠깐 적을게. 자비에? 좋은 이름이네. 네가 멋진 어린이라 다른 친구들의 본보기로 성당에 소개해 주려고. 몇 가지 물어봐도 되지?”

아이는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델바이스는 비올라가 수첩에 뭘 끄적이는지 기웃대며 훔쳐봤다. 낙서가 있을 거라는 왠지 모를 예상과 달리 꽤 성실히 무언가 기록 중이었다. 자비에. 9세. 수줍은 성격. 낙서 중(검은색 크레파스로 까맣게 칠하고 있다). 안색이 안 좋다.

“가족은 누구누구 있는지 물어봐도 될까?”

자비에는 입을 꾹 다물었다. 에델바이스와 비올라는 가만히 아이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자비에는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낌새를 알아차린 비올라가 말했다.

“괜찮아. 말하기 싫음 안 해도 돼. 그럼 어쩌다 병원에 왔어?”

정적 속에 빗줄기가 세차게 내리는 소리만 들렸다. 그리고 간간이 병원 근처 바닷가의 파도 부서지는 소리만 났다.

“베란다에서 떨어졌어요.”

그리고 아이는 자신의 다리를 콕 찍어 가리켰다. 비올라는 괜스레 호들갑을 떨었다.

“이야~ 아팠겠네. 그럼 어쩌다 떨어진 거야?”

“그건…….”

아이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비올라는 손목을 까딱이며 수첩에 점을 찍었다. 에델바이스는 그 무수한 점들을 바라보았다. 자비에가 말할 생각이 없어 보이자 비올라가 대신 입을 열었다.

“괜찮아. 그럼, 뭘 그리고 있는지 알려줄래?”

“…그냥 색칠.”

“그래?”

비올라는 무언가 고민하는 듯싶다가 에델바이스에게 눈짓하며 수첩과 볼펜을 집어넣었다. 에델바이스는 그의 눈짓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비올라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인터뷰 끝! 우린 이만 가볼게! 내일 보자, 자비에.”

“네….”

“아…….”

비올라는 에델바이스에게 나가라는 뜻으로 툭툭 쳤다. 에델바이스는 그에게 쫓겨나듯 병실을 나섰다. 미닫이문이 닫히자, 비올라가 에델바이스에게 손을 휘두르며 짜증을 냈다.

“정말 가만히 서 있으면 어떡해!”

“아, 아야… 그치만……”

“그치만 같은 소리하네!”

“이, 이상한 점을 발견했어요.”

비올라는 손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고 잠시 가만히 서서 두 손을 모았다가 성호를 긋고 말했다.

“뭔데.”

“창가 구석에 성모상이랑, 십자고상… 그런 것들이 그… 처박혀 있었다고 해야 할지……”

비올라는 그 말을 듣고 팔짱을 낀 뒤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러다 먼저 복도를 걸어갔다. 에델바이스가 겨우 따라붙자, 비올라가 목적지를 설명했다.

“보호자를 만나야겠어.”

자비에의 보호자는 신실하고 나이 지긋한 노부부였다. 자비에는 그 노부부의 가정 위탁 아동이었다. 자비에의 부모님은 교통사고로 두 분 다 사망하셨다고 했다. 노부부에게 자비에가 위탁 아동으로 들어온 것은 작년이라고 그랬다. 자비에는 평소에도 과묵하고 수줍음이 많은 성격이라고 말했다.

부인은 자비에가 이상증세를 보인 것은 일주일 전이었다고 회상했다. 도통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으며, 자신의 팔과 다리에 상처가 날 정도로 심하게 긁었다고 한다. 그리고 간혹 스페인어와 독일어로 중얼거리기도 했다는 것이다. 확실한 징후였지만, 증거를 확보해야 했다. 제대로 된 구마 예식을 위해서는 증거를 제출 후에 교회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비올라는 에델바이스에게 이런저런 이유를 들며 상담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내일로 수석 구마 사제님이 완전히 회복하진 못할 거라며 말이다.

다음날 에델바이스와 비올라는 다시 자비에의 병실로 향했다. 자비에는 여전히 검정 크레파스를 들고 스케치북을 새까맣게 색칠 중이었다. 비올라는 어제 에델바이스가 일러준 말을 생각하며 병실 이곳저곳을 눈으로 훑어보았다. 침상 머리맡에는 못이 하나 박혀 있었고 에델바이스의 말대로 창가 구석에 십자가, 성모상, 십자고상 등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방의 한기는 더 심해져 있었으며, 어딘가 악취가 풍겼다. 살아있는 이에게서 전혀 날 수 없는 향이었다.

“안녕?”

비올라는 어제처럼 인사하며 침상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에델바이스도 그를 따라 그의 뒤에 섰다. 아이는 색칠하던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저 계속 스케치북을 바라보며 까맣게 칠할 뿐이었다. 비올라가 다시 아이에게 인사를 건넸고 그제야 아이가 배시시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어제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에델바이스는 잔뜩 긴장한 채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검정 크레파스를 쥔 손의 손날이 까맣게 번져 있었고, 손톱 사이사이에는 까맣게 크레파스 찌꺼기가 끼어 있었다. 비올라는 안주머니에서 수첩과 볼펜을 꺼내 메모하기 시작했다.

“오늘도 그림을 그리고 있구나.”

“네. 십자가를 그리고 있어요.”

“십자가?”

에델바이스가 반문했고 자비에는 자신이 그리던 그림을 보여주었다. 온통 새까맣게 칠해져 있을 뿐이었다. 비올라는 그것을 보고 수첩에 무언가 빠르게 적어 내리기 시작했다. 가장 나약하고 어린 당신의 양을 보호하시고 굶주린 사자와 같은 악으로부터 지켜주소서. 그러자 자비에의 표정이 굳었다.

“신부님. 뭐해요?”

“응? 어제처럼 인터뷰하는 거야.”

“아뇨. 뒤에 있는 신부님 주머니에 그거 뭐예요?”

에델바이스는 몸을 움츠렸다. 주머니를 붙잡고 몸을 뒤로 뺐다. 네모난 녹음기의 윤곽이 손에 잡혔다. 증거 수집을 위해 미리 넣어두고 들어왔었다. 비올라는 자리에 일어서 능청스레 말하며 자신의 주머니를 뒤적여 묵주를 꺼내 들고 손에 쥐었다.

“난 모르겠는데.”

“그거 녹음기 맞죠.”

비올라와 에델바이스는 움직임을 멈추고 자비에를 바라봤다. 자비에는 눈을 치켜뜨며 에델바이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거 저 주세요.”

“이, 이건… 자비에 네 것이 아니잖아…?”

“주세요.”

“자비에, 네 스케치북을 주면……”

“Gib es mir!”

갑작스레 전등이 깨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창밖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뿐이었다.

“Sono venuto per spegnere la luce del mondo!”

자비에의 찢어지는 듯한 괴이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비올라는 다시 수첩을 펼쳐 자비에의 말을 받아적기 시작했다. 그리고 번역하여 자비에의 말을 따라 했다.

“세상의 빛을 끄러 왔다.”

“Îți cunosc păcatele!”

“네 죄를 안다.”

에델바이스는 뜻밖의 일로 당황스러워 손을 덜덜 떨며 성호를 긋고 나서 묵주를 꼭 쥐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를 보이는 적과 보이지 않는 적으로부터 구하여 주시고 사탄에 미혹되지 않도록 우리의 눈과 귀를 멀게 하소서……”

자비에가 에델바이스에게 달려들려고 하자 비올라는 팔뚝으로 그의 쇄골을 눌러 침대에 눕혔다. 검정 크레파스가 떨어지며 바닥에 얼룩을 남겼다. 비올라는 묵주의 십자가를 자비에의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자비에가 몸을 비틀며 비명을 질렀다.

“Eure Gebete sind nutzlos!”

“네 기도는 쓸모없다.”

“…저희 영혼의 치유가이시며 당신을 찾는 이들의 구원이신 분이시여. 당신께 청하오니 인간들을 속인 적들을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게 하시고 하느님의 능하신 손 아래 굴복하게 하소서.”

자비에의 이마에 올려진 십자가가 타는 냄새를 풍기며 뜨겁게 달궈졌다. 자비에는 고통에 사지를 뒤틀며 비올라의 팔을 할퀴었다. 그러다가 비정상적으로 낮은 목소리를 내며 소리 질렀다.

“사내새끼가 그렇게 좋으면 비역질이나 하러 가!”

에델바이스는 깜짝 놀라 묵주를 놓쳤다. 바닥과 부딪힌 묵주는 산산조각이 났다. 분명 금속으로 만들어졌는데도 말이다. 에델바이스는 겁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야! 뭐해! 듣지 마!”

비올라가 분명 그렇게 소리쳤음에도 에델바이스의 귀에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자비에의 힘이 더 세지자, 비올라는 온몸의 힘을 실어 그를 막았다. 그럴수록 자비에는 에델바이스와 비올라를 비웃을 뿐이었다.

“아하하하하! 우습구나. 우스워! 이시도르!”

“내… 세례명을 어떻게……”

“야!”

에델바이스는 결국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비올라는 벽에 달린 호출 벨을 주먹으로 쳐내려 의료진을 호출했다. 의료진이 자비에에게 안정제를 투여하고 나서야 상황이 일단락되는 듯했다. 비올라는 겨우 한숨을 돌리며 뒤늦게나마 에델바이스를 찾으러 나갔다.

밖은 얄궂게도 비가 퍼붓고 있었다. 빗줄기에 시야마저 가려질 정도였다. 비올라는 한껏 숨을 들이마신 후에 건물 밖으로 나갔다. 손바닥을 펼쳐 눈썹에 받치는 것으로 시야를 겨우 확보했다. 이 무거운 빗방울에 세상이 종말을 맞이할 것만 같았다.

비올라는 그를 찾기 위해 소아병동의 산책로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그 끝에 겨우 에델바이스를 찾을 수 있었다. 에델바이스는 벤치에 상체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비올라는 그의 양 어깨를 붙잡고 일으켜 세웠다.

“여기서 뭐 해? 그리고 갑자기 도망치면 어떡해!”

“…….”

에델바이스는 울먹거리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물속에 잠긴 사람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빗소리의 에델바이스의 목소리가 먹혀갔다.

“뭐라고?”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무슨 소리냐, 그건?”

에델바이스는 다시 한동안 침묵했다. 빗소리가 적막을 가르고 들어찼다. 에델바이스는 한참의 침묵 끝에 고개를 한 차례 내젓고는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지금은 당신을 볼 용기가 없어요…….”

에델바이스는 비올라의 손을 떼어내고 무수한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비올라는 한 번 더 그를 쫓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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