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크리스마스 합작

겨우살이

* 과거 연성 백업본입니다.

* 영문 번역본: https://docs.google.com/document/d/1cHGh-f2oXtgucTmuDDvl1jZUzrEtaKGEixuMRTUutRk/edit?usp=drivesdk

‘사랑하기에 너무 늦은 나이란 없다.’ 스티븐슨 부부의 사이를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바로 이 문장일 것이다. 미들시 병원에서의 짧은 이별은 서로에 대한 사랑을 강하게 해줄 뿐이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노부부는 재회했고, 둘은 같은 병실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감동적인 재회 이후로 맞는 첫 크리스마스 이브의 늦은 저녁이었다. 눈은 오지 않았고 12월이라기엔 온난한 날씨였지만, 한때 검은 색이었던 스테이시 스티븐슨의 머리에는 세월이 쌓아온 눈이 하얗게 덮여 있었다. ‘예산 절감’의 이유로 평소와 별로 달라진 게 없는 병원 내부와는 달리, 창 밖은 온통 크리스마스 조명이 내는 색색의 불빛으로 가득했다. 스티븐슨 부부가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즐기기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조명이 예쁜데. 한번 봐봐. 눈은 안 오지만, 풍경이 참 아름다워.”

스티븐슨 여사가 그렇게 말하며 스티븐슨 씨가 풍경을 볼 수 있도록 도왔다. 여사는 베개를 높게 해서 스티븐슨 씨가 상반신을 일으켜 앉기 쉽게 했고, 스티븐슨 씨의 주름진 손이 감사의 의미로 아내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고마워. 정말로 아름다운데. 당신만큼은 아니지만.”

스티븐슨 여사가 웃었다.

“또 그 소리 한다. 50년씩이나 멘트가 바뀌지를 않네.”

“안 바뀌는 게 당연하지.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 당신은 여전히 나한텐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고.”

스티븐슨 여사는 웃으며 스티븐슨 씨 옆에 앉았다. 노부부는 서로에게 기대어 창 밖의 풍경을 한동안 바라보며 즐겼다.

둘이서 한창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페이지가 두 명의 상태를 진단하러 들어왔다. 그 날의 마지막 회진이었다.

“또 왔어요, 스티븐슨 씨, 그리고 스티븐슨 여사님. 좋은 저녁이에요. 평소대로 몸 상태가 어떤지 확인하려고 왔는데 좀 봐도 괜찮나요?”

“그렇고말고요.”

남편의 베개를 원래대로 해서 다시 누울 수 있게 하며 스티븐슨 여사가 대답했다. 진단을 마치고 난 페이지가 둘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 됐어요. 그리고 내일 가족분이 전화하시는 거 잊지 않으셨죠? 자식 분하고 손주 분 모두랑 충분히 통화하실 수 있도록 시간을 최대한 오래 잡아 드릴게요.”

“정말로 고마워요, 의사 선생님.”

“제 일일 뿐인 걸요. 아, 그리고 오늘은 이만 쉬시는 걸 권해드려요.”

“그럴게요. 고마워요! 메리 크리스마스!”

“두 분도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문이 조용히 닫혔다. 스티븐슨 여사가 조용히 한숨지었다.

“직접 볼 수 있다면 더 좋을 텐데.”

“그러게. 하지만 사정이 있으니 어쩔 수 없잖아. 나중에 또 만나면 되는 걸.”

“그랬으면 좋겠다… 손주들이 보고 싶어.”

“손주들도 우리 보고 싶어 할거야.”

원래 스티븐슨 부부의 가족들은 크리스마스 날 면회를 올 예정이었지만, 자식들이 며칠 전 갑작스럽게 일이 바빠져서 병원에 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가족들은 직접 오지는 못하는 대신 전화하기로 약속했다. 조금 아쉽긴 했지만, 노부부는 자식들을 이해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스티븐슨 부부는 한동안 가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지만, 곧 피곤함이 밀려왔다.

“스테이시, 이제 슬슬 자야 할 것 같은데. 의사 선생님도 그러라고 했고. 조느라고 전화 못 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스티븐슨 씨가 하품했다.

“그래야겠다. 우리 아가들도 졸린 거 같고.”

스티븐슨 여사는 횃대와 새장 위에서 조는 새들을 힐끔 보며 대답했다.

“그럼 잘 자.”

“당신도.”

노부부는 서로 이마에 입을 맞추고 잠에 들었다.

다음 날인 크리스마스 아침에도 어김없이 페이지가 스티븐슨 부부를 회진하러 왔다. 페이지는 조금 피곤해 보였지만 애써 둘에게 미소지어 보였다.

“메리 크리스마스, 스티븐슨 씨! 여사님도요! 오늘 컨디션은 어때요?”

스티븐슨 여사가 미소로 화답했다.

“아주 좋아요! 휴일인데도 수고가 많으시네요.”

“별 거 아닌 걸요, 뭐.”

페이지가 둘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며 대답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진단을 마친 페이지는 돌아가려다가 문 앞에서 멈춰섰다.

“아, 말씀드리는 걸 깜빡할 뻔했네요. 혼드로네로 씨가 오늘 외출하기로 하셔서 물리치료실이 오전에 비게 됐어요. 그래서 그런데 혹시 일정을 앞당겨서 물리 치료를 조금 일찍 받으셔도 괜찮으신가요? 그러니까 두 분 다 괜찮으시면요. 그럼 가족분들한테 전화할 시간도 좀 더 생길 거고요.”

“아, 그거 좋네요. 좀 더 일찍 가도 상관없고요.”

“저도요. 감사해요!”

스티븐슨 씨는 최근 이 병원에 입원한 지역 야구팀 유명 투수의 팬으로서, 그가 재활에 집중할 수 있게 하기로 결심했다. 스티븐슨 씨는 럭키 혼드로네로 선수가 물리치료실에 있는 시간과 자신이 물리치료실을 이용하는 시간이 서로 겹치지 않게 하기로 스스로 약속했고, 페이지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럭키 역시 타인의, 특히 팬들의 동정을 원하는 것 같지 않아보이기도 했고 말이다. 스티븐슨 씨는 페이지의 배려에 감사했다.

스티븐슨 씨는 아내의 도움을 받아,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장식 하나 없이 밋밋한 복도를 따라 물리치료실로 들어갔다. 시간만 조금 이를 뿐, 노부부는 평소의 루틴대로 물리치료를 받았다. 평소에 물리치료실에 있을 땐 주로 혼드로네로 선수를 봐 주던 인턴이 오늘은 스티븐슨 부부를 도와주었다. 평소의 의사 두 명보다는 조금 느린 편이긴 했지만, 두 명 다 그 점에 대해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어쨌든 저 원격 조종되는 기계 팔로 정교한 동작을 행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 날 분의 물리치료가 끝나자 스티븐슨 여사가 인턴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손가락 의사 선생님. 이제 저희 방으로 돌아가도록 할게요. 가족들이 저희 전화를 기다릴 거예요.”

인턴은 대답 대신으로 엄지를 치켜올렸다. 그리고선 뭔가 뜻을 전달하려고 몇 가지 손짓을 했지만, 둘 중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다. 노부부는 인턴이 그저 크리스마스 잘 보내라고 말하려고 한 걸로 넘겨짚고, 진짜 인턴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을 카메라를 향해 웃어보였다.

“선생님도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스티븐슨 부부는 곧 있을 통화를 기대하며 물리치료실을 걸어나왔다. 하지만 인턴이 계속 이상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인턴은 둘을 계속 따라오다가 결국엔 앞질러가서는, 무슨 이유에선지 노부부의 앞을 계속 막으며 뭔가를 계속 전달하려고 했다.

“스테이시, 저 분이 왜 저러는 건지 알아?”

여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전혀 모르겠는데.”

스티븐슨 부부가 계속 복도를 걸어가는 와중에도 인턴은 계속 따라왔다.

“선생님, 도대체 뭐라고 말하시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희는 이만 병실로 돌아가봐야 해요. 저희는 곧 가족들이랑 전화 통화도 할 거고, 우리 아가들도 기다리고 있어요. 나중에 봬요!”

스티븐슨 여사가 좀 더 서두르며 손을 흔들었다. 인턴은 노부부를 멈추려 하듯 팔을 뻗어 봤지만 곧 포기해 버렸다. 인턴은 아까 전보다 훨씬 느린 속도로, 기운 없는 듯 기계 팔을 축 늘어뜨린 채로 둘을 따라갔다.

병실까지 거의 다 와 갈때, 노부부는 병실 문이 열려 있고 안쪽이 약간 소란스러운 것을 눈치챘다.

“무슨 일이지? 분명히 문을 닫아 놨는데…”

둘은 병실 안을 들여다보고는 놀라움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분명 못 온다던 가족들이 모두 모여 병실을 온통 장식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트리, 가랜드, 전구, 그말고도 많은 장식이 수수했던 병실을 화려하게 바꾸어 놓았다. 아직 덜 된게 흠이었지만 말이다. 노부부의 예상보다 이른 도착에 가족들은 다들 당황했고, 몇몇은 장식을 하고 있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 분명 그 기계팔 쓰시는 분한테 시간 좀 벌어달라고 했었는데. 그게 그러니까… 아 모르겠다. 놀랐죠?”

스티븐슨 부부의 자식 중 한 명이 이렇게 말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인턴이 뒤이어 병실로 들어오며 모두에게 사과하려 애썼다.

“괜찮아요. 어쨌든 당신은 최선을 다한 거죠?”

스티븐슨 씨가 인턴의 기계 팔을 사람의 어깨에 하듯 살짝 두들기며 말했다. 그리고는 가족에게 돌아서서 모두를 한꺼번에 안아 주었다. 스티븐슨 여사 역시 거기에 끼어들었다.

“얼굴 보니까 좋구나! 그리웠었어!”

“저희도 할아버지 보고 싶었어요!”

손주 한 명이 대답했다. 모두가 서로 꽤 오랫동안 껴안고 있었고, 포옹을 풀며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또 다른 손주가 말했다.

“불 꺼놓고 숨어서 기다렸다가 다 같이 ‘서프라이즈’ 하고 외치는 거 해 보고 싶었는데. 어짜피 그 의사 선생님이 할머니 심장 건강 때문에 안 된다고 해서 못 했을 거긴 하지만요.”

“놀래 주고 싶은 거였다면 걱정 말거라. 우린 이런 거 없이 모두가 여기 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랐을 거란다.”

스티븐슨 여사가 웃으며 말했다. 아직 깜짝 이벤트를 들킨 줄 모르는 페이지가 병실로 들어왔다.

“혹시 장식하는 거 거의 다 돼… 앗.”

페이지는 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당황해서 말이 곧바로는 안 나왔지만, 페이지는 미소를 지어보이려 노력했다.

“조금… 사정이 있어서 병원을 제대로 장식 못 했는데, 오랜만에 가족분들이 오신다니까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좀 살려 보고 싶어서 이런 깜짝 이벤트를 한 거였어요. 상황이 예상한 거랑 좀 다르게 돌아간 거 같긴 하지만,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메리 크리스마스.”

“아, 괜찮아요, 괜찮아요. 깜짝 이벤트를 열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정말로 멋진걸요!”

스티븐슨 여사가 대답했다.

“아무래도 크리스마스엔 가족이랑 전화만 하는 것보단 같이 시간 보내는 게 낫지. 하지만 그 전에…”

스티븐슨 씨가 하다 만 장식을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저것부터 마저 끝내는 게 좋겠지?”

“당연하죠!”

방에 있던 모두가 서로 도와 가며 장식을 마저 하기 시작했다. 트리에 마저 장식을 걸고, 달다 만 가랜드를 마저 달고, 온갖 장식품을 여기저기 놓아두고… 다 같이 하니 일은 금방 끝났다.

방 장식이 끝나자 페이지와 인턴은 미소 지으며 문 밖으로 나와, 잠시 방 안 풍경을 지켜보았다.

“저희는 일 때문에 이제 슬슬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크리스마스 즐겁게 보내세요!”

페이지는 손을 흔들고는 다른 환자들을 보러 서둘러 갔다. 인턴도 그 뒤를 따랐다.

“정말 고마워요, 선생님들!”

방 안에서 스티븐슨 씨가 외쳤다.

스티븐슨 부부와 가족들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손주들은 캐롤을 부르고, 스티븐슨 여사의 새들과 놀고, 스티븐슨 씨의 깁스에 낙서를 하기도 했다. 깁스에다가 작은 크리스마스 트리를 그려 놓기도 했다. 서로 준비한 선물을 꺼내 뜯어보기도 했는데, 스티븐슨 여사를 위한 선물은 전부 다 새와 관련된 물건인 걸 보며 웃기도 했다. 여사 본인은 선물을 꽤 맘에 들어 했다. 새들도 선물이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면회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손주들은 할아버지 할머니와 마지못해 헤어졌다. 마지막으로 서로를 안아준 뒤 가족들은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났다. 노부부의 병실에는 다시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정말 최고의 크리스마스였어.”

“그렇지?”

둘은 조용한 병실에서 한동안 장식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스티븐슨 씨가 뭔가를 발견했다.

“스테이시, 이것 봐. 겨우살이야.”

“어디?”

스티븐슨 여사가 스티븐슨 씨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말대로 천장에 겨우살이 모양 장식이 매달려 있었다.

“예쁜 장식인걸.”

“그러게. 저걸 보니 생각나는데, 우리가 겨우살이 아래에서 키스해 본 지도 벌써 수십 년이 지났네.”

“나도 그때 기억나. 우리 그땐 진짜 젊었었는데.”

노부부는 서로를 보며 웃었다.

“음… 오랜만에 또 한 번 해 볼까?”

스티븐슨 여사가 얼굴을 붉히며 조심스레 제안했다. 스티븐슨 씨가 그 말에 웃었지만, 그도 역시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다.

“대머리에다 쭈글쭈글한 늙은이한테 키스하고 싶다고? 난 그때처럼 젊지도 멋있지도 않은데.”

“당신은 아직도 충분히 매력적인걸. 모습도 마음도.”

스티븐슨 여사가 주름진 손을 남편의 어깨에 올리며 말했다. 스티븐슨 씨가 웃었다.

“뭐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해보지 뭐.”

스티븐슨 여사는 몸을 기울여 스티븐슨 씨의 메마른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그 순간의 부부는 심장 질환과 골절에 시달리는 70대 노인이 아닌, 한창 서로를 향한 사랑에 불타오르던 20대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겨우살이 아래에서 키스하면 행복해진다는 속설이 있지만, 그들은 이미 그런 행복이 필요 없이도 이 순간을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성탄빛만큼 아름다운 노부부의 사랑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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