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송의프리렌/힘멜프리] 피지 못한 경련화

장송의 프리렌 애니 14화까지 스포 있음

은발의 엘프는 손바닥 위의 경련화 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중앙에는 경련화의 꽃봉오리가 뾰족하게 솟아있었고, 양옆은 잎사귀로 장식된 은반지다. 프리렌은 몇 번 눈을 감았다가 떴다.

힘멜이 준 반지다. 80년 가까이 지난 일이지만 근 영생을 사는 프리렌에게는 그리 먼 과거는 아니다.

‘그러고 보니…’

석양이 지던 어느 마을을 힘멜과 나란히 걸었다. 흙빛 벽돌로 지은 건물에 붉은 해가 길게 드리웠다. 별안간 힘멜은 하얀 망토를 펄럭이며 프리렌 앞에 무릎을 꿇었다. 프리렌이 의아하다는 듯 용사를 바라볼 무렵, 힘멜은 프리렌의 손을 가볍게 들었다. 희고 고운 손이지만 지팡이를 쥐느라 군데군데 굳은살이 박인 손이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힘멜은 프리렌의 약지에 경련화 반지를 끼웠다. 때마침 바람이 볼을 살랑였다. 양갈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프리렌.」

힘멜은 살포시 웃었다. 그 순간만큼은 시간이 멈춘 듯 프리렌은 넋 놓고 힘멜을 바라보았다. 용사는 잡고 있던 마법사의 손을 놓았다. 꿇었던 무릎을 일으키자 망토가 다시 펄럭였다.

「가자, 프리렌.」

나긋한 힘멜의 목소리가 울렸다. 마법사는 용사의 옆에 서서 걸음을 재촉했다. 잠시 맞닿은 용사의 손은 꽤 단단하고 컸다.

 

프리렌은 힘멜이 선물한 반지를 가만히 손에 끼워보았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반지는 손가락에 맞춘 듯 꼭 맞았다. 프리렌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은으로 된 반지여선지 시간이 지나도 녹슬지 않고 여전히 반짝였다.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의 반지는 눈부시게 빛났다.

“프리렌 님, 그 반지. 찾은 보람이 있네요.”

옆에 있던 페른이 반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프리렌은 안심이 된다는 듯 눈을 내리깔았고, 페른의 팔찌에 시선이 멈췄다. 꽃이 핀 경련화로 장식된 은팔찌다. 슈타르크와 함께 고른 생일선물이라고 했다. 프리렌이 팔찌를 바라보자 페른은 특유의 눈빛으로 스승을 바라보았다. 슈타르크가 하고 있는 민무늬 은색 팔찌에도 눈길이 닿았다. 프리렌은 고개를 정면으로 돌리고 눈을 감았다.

 

힘멜의 고향에서 핀다는 창월초. 꽃 모양 자체는 수수하지만 푸른빛을 띠면서도 오묘하면서도 보랏빛이 도는 화려한 색의 꽃이다. 힘멜의 동상을 장식하기에 딱 어울렸다. 플람메 스승님께 꽃을 틔우는 마법을 배워두길 잘했다.

한 마을에서 힘멜의 모습을 한 마물을 만났다. 환영이다. 정말이지, 마족이나 마물은 교활하기 짝이 없다. 그들의 언어는 모험가를 향한 현혹이다. 페른은 하이터의 모습을 보고 주춤했다. 프리렌은 예전처럼 플람메 스승님이 나타날 것이라 생각했음에도…

「쏴.」

프리렌은 망설임 없이 힘멜의 환영에 마법을 날렸다. 숲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단 한 순간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사는 엘프지만 고작 10년의 모험으로 시나브로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프리렌은 입꼬리를 올렸다.

마왕을 쓰러뜨리기 위한 모험은 고작 10년이었다. 1,000년 이상의 삶을 살아온 프리렌의 인생에 겨우 1%도 차지하지 못한다. 그 1%가 프리렌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

「프리렌. 나는 너를…」

반지를 건넬 무렵, 힘멜은 입술을 움직여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필사적으로 입 모양을 떠올린다. 분명히…

‘힘멜. 나는 너를…’

아- 이것이 무엇일까? 프리렌은 옴짝달싹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엘프는 연애감정도, 번식욕구도 무척이나 희박한 종족이다. 인간은 엘프에게 그저 스쳐가는 바람과 같은 존재다.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경련화는 꽃피지 못했다. 경련화의 꽃말은 ‘영원한 사랑.’ 프리렌은 꽃말을 뒤늦게 알았다. 엘프에게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어리석은 인간이 어디 있을까?

“프리렌 님! 프리렌 님!”

다급한 페른의 외침에 프리렌은 눈을 뜨고 주변을 살폈다. 기습인가? 적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주변도 고요하다. 마법지팡이를 쥐려던 빈손을 쥐었다가 폈다. 지팡이는 필요 없는 상황이다.

“페른. 왜 그러지?”

“왜 울고 계신가요?”

“아…?”

프리렌은 볼에 제 손을 갖다 댔다. 무언가 뜨끈하고 미지근한 것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물-이었다.

“괜찮으신 건가요?”

“그래. 문제없어.”

페른은 다급하게 손수건을 건넸지만 프리렌은 사양했다. 그럼에도 페른은 무척이나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앞에 있는 슈타르크와 자인 역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톡 한 방울 흘러내린 눈물을 말끔히 닦은 프리렌은 평소와 같은 무표정을 지었다.

인간은 보통 슬플 때 눈물을 흘린다고 했으나 그 감정은 기쁨과 희열도 있다고 했다. 엘프는 인간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노력한다 한들 엘프는 인간이 될 수 없고, 인간은 엘프가 될 수 없다.

프리렌은 경련화를 바라보았다. 봉오리가 맺힌 경련화는 꽃피지 못한 채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경련화는 모티브가 되는 꽃을 모르겠어서 창월초와 가장 비슷한 네모필라 사진을 넣었습니다.

사진 출처 : https://www.flickr.com/photos/ms_gracias/460112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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