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lce Espressivo

클레식au... 바이올리니스트 저희집애랑 오케스트라 소속의 아르

‘그’의 공간은 그리스의 집과는 달리 다소 난잡했다. 호텔리어는 분명 그의 짐 무더기를 건들지 않고 최대한 방을 깔끔하게 청소하느라 갖은 노력을 다 했을 것이다. 아를은 슈퍼마켓에서 사온 와인 두 병과 치즈를 둥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정리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정리하는 걸 잊었는지 모를 짐들이 캐리어 위에 가득 쌓여 있었다. 여러모로 마나난 답지 않은 방이었다.

편하게 앉아있으라고 말한 사내는 제 바이올린을 침대 위에다가 -분명 그는 스트라디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름난 명장의 바이올린을 사용하고 있었다.- 대충 팽개쳐 놓은 다음, 세탁한 옷이 산처럼 쌓여있는 두번째 캐리어에서 편한 옷을 가져 욕실로 홀라당 들어갔다. 아를은 그가 사라진 자리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정리해줄까 싶지만 그럴만한 관계는 아닌 성 싶어 아를은 손을 꼼질거리면서 의자에 앉았다. 드레스룸 의자는 생각보다 쿠션감이 좋지 않았다.

그리스에서 보낸 밤은 대부분 청량한 하늘과 탁트인 바다의 정경이 인상적이었다. 산토리니의 절벽 위에 위치한 마나난의 집은 바람이 잘 통하고, 바다가 한 눈에 보이며, 아래 지대에 있는 집들이 켜놓은 작은 전구가 별빛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커튼을 굳게 닫은 비엔나의 호텔엔 인위적인 바람만이 기계적으로 흐르고 있었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가만히 앉아 있던 아를은 괜히 테이블을 닦고 플라스틱 유리잔을 씻어왔다. 유리를 흉내낸 얇은 잔에 방울진 물기를 닦으면서 아를은 이 호텔이 생각보다 공간과 공간 사이의 방음이 잘 안됨을 깨달았다.

샤워하는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한참 물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더니, 이내 머리카락을 팡팡 터는 소리가 이어졌다. 손님을 초대했다기보다는 가족과 함께 방에 들어온 모양새처럼 편해 보였다. 마나난은 평온한 표정으로 잠옷 바지와 반팔 티셔츠를 입은 채로 설렁설렁 걸었다. 그는 테이블 가까이에 있는 싱글 침대에 걸터 앉았다.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말아 위로 올렸고, 아를은 그의 모습에 조금 벙찐 기분이 들었다. 말랑말랑한 관계라 어떻게 될지 모를 사람을 초대해놓고서는 너무나 편한 꼴이었다.

무어라 정의해야할지 모르겠는 침묵이 몇초간 이어졌고, 마나난은 그것이 어색한 듯 괜히 눈을 마주쳐오다가 시원하게 웃었다. 호텔의 조명은 묘하게 어둑어둑했다. 마나난은 열쇠고리 뒤에 달린 오프너를 사용해 와인 병을 열었다. 머리카락 일부가 삐져나온 채로, 샤워한 사람 특유의 훈훈한 따듯함이 모자람 없이 느껴졌다. 마나난은 안주거리로 사온 치즈 플레터의 포장을 뜯었다. 일회용기의 뚜껑을 열고 좁은 테이블 위에 가득 올려놓았다. 미남이 해준 것 보단 당연히 맛없겠지만- 이라고 서두를 열어, 제법 연회의 주최자처럼 굴던 마나난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아를을 바라보며 질문했다.

“마시기 전에 씻을 거야?”

“아니?”

“깔끔떠는 타입인 줄 알았는데.”

마나난은 플라스틱 와인잔에 와인을 가득 담았다. 붉은색 와인이 수위를 높여갔다. 표면이 찰랑거리는 걸 보다가 그는 아를에게 건배를 종용했고, 아를은 자신이 그에게 술을 하지 못한다 말했던 일이 비엔나의 추억인지 그리스의 기억인 지를 골똘히 생각했다. 혀를 축이는 듯 마는 둥 하는 아를과 다르게, 마나난은 와인을 값싼 증류주 마냥 들이켰다. 그는 치즈 조각을 입에 털어 넣었고, 호쾌하다는 감상에도 어깰 으쓱일 뿐이었다. 그는 한 쪽 다리를 반절 접은 채로 앉아 있었다. 그의 무게중심은 뒤로 쏠려 있었다. 늘어진 티셔츠 목을 힐끔 보다가, 아를은 시선을 돌렸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마나난이 질문했다. 아를은 고개를 저었다. 다른 화제가 필요했다. 잔을 쥔 반대 손을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다가 아를은 입을 열었다. 마나난은 그새 와인을 홀짝홀짝 하더니 역시 그리스의 포도주가 맛있다는 양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떫은 와인은 싫어해? 라는 물음에 그는 경쾌하게 웃으면서 살짝 단 게 좋아- 지금은 생선이 없으니까. 라고 말했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삿대질을 하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싸우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헤실헤실하게 풀어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와인에 대해 말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은 꼭 그리스를 그리워하는 것 같아 아를은 괜히 마음이 쓰렸다.

마나난의 음악은 여전히 자유로웠다. 그는 때로는 작곡가에게 깊게 공감하는 듯 풍부한 감정으로 움직이다가, 때로는 ‘작곡가 양반, 그대 뭘 모르시네!’ 라면서 자신의 음을 전개해나갔다. 활을 긋는 모습은 대범하지만 동시에 섬세했다. 연쇄적으로 피어오르는 음의 나열은 꼭 파도가 밀려오는 그리스의 바닷가 같았다. 그 자유로움에 고삐를 매기 위해서 지휘자는 꽤나 애를 먹고 있었다. 마나난은 자신이 타협할 수 있는 부분에는 능숙하게 숙이고 들어갔으나, 자신이 납득하지 못하는 부분은 납득할 때 까지 물어뜯고 싸웠다. 파도에 목줄을 채울 수 없다는 걸 이제 좀 이해해요! 마나난의 그 말이 도시 속 연주자인 아를에게는 꽤나 인상적이었다.

“서핑시즌이 끝나서야 일을 시작하다니 조금은 이솝우화의 베짱이 같을지도 모르겠어.”

“오, 그런가? 베짱이도 바이올리니스트니까 비슷할지도.”

“그러는 이유라도 있나?”

“별거 아닌데. 그냥- 뭐어-"

마나난은 수건의 풀린 틈 사이로 풀려나온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그의 맨발이 꼼지락거리고, 속눈썹이 풍부한 눈은 두어 번 깜빡이다가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그는 머리 끝을 검지 손가락으로 베베 꼬다가, 와인의 향을 맡고 한 모금을 들이켰다. 탄닌의 풍부한 맛을 즐기는 듯 잠시 미간을 좁혔다. 할 말을 어떻게 나열해야할지 고민하는 듯, 그는 눈썹뼈에 힘을 가득 주고 있었다. 언제 봐도 표정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마나난은 와인잔을 테이블에 잠시 내려놓았다. 그의 목소리는 꽤나 장황하게 이어졌다.

난 있지. 현대사회에는 특히 이미지 소모가 심하다고 생각해. 뜬금없는 소리 같지만 말야아-. 바이올리니스트, 아니. 솔리스트는 어느정도 환상과 카리스마도 팔아줘야하는데 소모가 너무 심하면 롱런할수가 없잖아. 대중의 속성이 쉽게 질리는 거라면 말야. 마나난은 꽤나 진지하게 속살거렸다. 그 논리가 옳은 지 아닌지는 뒤로 하고서, 아를은 요즈음의 대중음악이 꽤나 빠르게 소모되는 것을 퍽 안타깝게 여기곤 하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이런 화두에는 동의할 수 밖에 없다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어. 라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마나난은 그렇지? 라면서 건배를 청해왔다.

플라스틱 잔 안의 수위가 찰랑거리고, 마나난은 다시 와인 한 모금을 마셨다. 그는 여전히 궤변같은 말들을 줄줄 늘어놓았다.


“그러니까, 이미지메이킹을 하는거야. 마침 내가 천재고- 인터뷰도 잘 안하는 신비주의잖아. 날이 추워질때만 활동하는 걸로 묘한 환상을 심어주고 있는 거지. 서핑하느라 봄여름초가을에는 놀러다니는 바이올리니스트. 얼마나 자유로운 솔리스트처럼 느껴지니? 자유는 산업화시대에 땔래야 땔 수없는 아젠다야. 모두가 노동법과, 고용주에 대한 예의범절과 규범에 의거해서 성냥갑을 닮은 칙칙한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쳇바퀴 돌리듯 생활하고 있지. 이런 시대에 자유를 구가하는 사람이란 제법 멋있어 보이지.”

“요컨대 너는 이 고도로 산업화된 시대에서 자유와 제멋대로인 이미지에 기대어서 단 4개월만 바짝 일하고… 논다는 말을 어렵게 하고 있는 거로구나”

“맞아. 명쾌하네. 딱 그거야. 난 틀에 박히지 않는 자유요, 길들이지 못한 파도야. 편자를 박지 않은 말일지도 모르지ㅡ 대중이 내게 열광하는건 그 때문일 거고.”


그러니까 나는 이 시대를 잘 타고난거야.내가 생각하기에도 나는 운이 좀 좋은 편이거든. 풍운아나 행운아라고 해도 좋겠어. 마나난은 그렇게 말하면서 어깰 으쓱이며, 반쯤 뒤로 누웠다. 그의 얇은 손가락 사이에는 붉은 레드와인을 가득 담은 와인잔이 들려있었고, 그는 여전히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올린 채 웃고 있었다.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가늘고 흰 목덜미가 여과없이 보이고, 생각보다 많이 늘어난 티셔츠 안의 살결을 호텔 특유의 눅진한 간접조명이 밝히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장난스럽게 대꾸하다가 눈섭 한 쪽을 올리면서 웃었다. 그는 다리 한 쪽을 제 허벅지에 올리며 다리를 꼬았다.

“정말 이게 본심이야?” 아를은 문득 물었고

마나난은 제 눈썹 한 쪽만을 올려보이며 깔깔 웃다가, “평론가에게 솔직한 척 할 때 쓰는 레파토리”라고 대답했다.

그는 대답엔 여러가지 버젼이 있다고 말했다. 놀기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적당히 그냥 돈떨어질 때 되면 나온다고 말하고, 천재에 대한 환상을 가진 사람에게는 느낌이 오는 계약만 수락한다 말한다고 했다. 확실한 건 마나난이란 남자는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몇 가지의 거짓말을 꾸며낼 줄 아는 사람이란 거였다. 거짓말쟁이에겐 보통 핍진성이 부족하지만, 그는 모자랄 것 같은 리얼리티를 모조리 무대로 채우는 타입의 연주자였다. 천재의 연주에는 아우라가 있다.

그리고 마나난은 무대 위에서 누구보다도 시선을 끌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활을 내리긋는 순간 모든 회장의 시선은 반드시 그에게 쏠렸다. 지휘자를 보는 걸 잊고 솔리스트를 보다가 들어갈 구간을 놓쳤을 정도로. 마나난이 늘어놓는 여러가지 환상을 듣다가 아를은 문득 질문했다. 그러면 네가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버젼은 뭐야? 별거 아닌 질문이었지만 마나난은 꽤나 오래 고민했다. 아를이 그가 사용하는 바디샴푸의 향이 무화과 향이라는 것을 눈치챌 때 쯔음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잔을 비운 다음 손짓했다. 아를은 그에게로 몸을 가까이 숙였다. 테이블 위의 잔과 플라스틱 플로터가 방해였다.

마나난은 좁혀진 거리임에도 불만족스럽다는 듯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아를은 잔을 놓고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밖에 없었다. 마나난은 여전히 다리를 꼬고 침대 위에 앉은 채로 실실 웃고만 있었다. 서로가 호흡을 위해 내뱉는 이산화탄소를 헤아릴 수 있을 저도로 가까이 밀착하고서야 마나난은 입을 열었다. 의문스러운 웃음 뒤에 섞여있는 목소리는 생각보다 간질간질했다. 이건 네게만 특별히 알려주는 건데, 아르. 그는 아를의 귓가에대고 평소와 다르게 살짝 낮은 목소리로 숨을 내뱉다가


“난 그냥 도시체질이 아닌 거야.”

“이런 말 하려고 여기까지 불렀어?”

“환상을 깨는 일이잖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고, 너와 나만이 느껴지는 거리가 필요하지.”

마나난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는 여전히 아를의 귓가에 대고 말하고 있었다. 그는 와인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흔들다가 웃었다. 그리고 아를의 딱딱한 뺨에 제 부드런 뺨을 부비다가 비쥬를 남기는 것처럼 짧게 쪽, 하는 소리를 냈다. 그리스에서도 비슷한 장난을 쳤던 것 같은데, 라고 한여름밤의 꿈 같은 그때의 추억을 속삭이자 마나난은 짧게 웃었다. 입을 맞추기 위해 가볍게 내는 소리는 꼭 쪼는 듯한 파도가 짧게 물결치는 것 같지 않냐고 말하던, 그리스의 어느 추억이 떠올라, 아를은 괜히 머쓱한 듯 입술을 우물거렸다. 마나난은 여전히 긴장하지 않은 채, 대담하게도 제 행동을 이어갔다. 귀여워. 마나난은 그의 귓가에 똑똑히 속삭이다가 그의 피어싱을 혀 끝으로 건드리다 장난이라 말했다.

그리고서는 와인잔을 잡고 있던 손이 아닌 다른 손으로 아를의 뒷목을 쓸었다. 그가 볼을 부빌 때 마다 머리카락을 고정한 수건의 매듭이 느슨해지고 있었다. 묘한 긴장감이 이어지던 것도 잠시, 마나난은 유쾌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말의 내용과 의도를 쉽게 파악할 수 없는 건 그가 내뱉은 와인 향 짙은 숨 때문일까 싶어 아를은 두어 걸음을 물러나 다시 제자리에 앉으면서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마나난은 방금 귓가에서 속삭였던 말을 다시 반복했다. 그는 묘한 웃음을 띄고 있었다. 마치 ‘예전’부터 이러고 싶었다는 양. 그가 쓰는 바디워시 향이 유난히 짙게 느껴졌다.


“나 좀 그리스에 있던 때 보다 외로워 보이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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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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