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교차] 병아리콩 스튜와 가지 라자냐
애정을 숫자 안에 욱여넣을 수 있을까.
트리스탄은 잘게 한숨을 내쉬었다. 피로를 소화하지 못한 몸이 삐걱였다. 불면은 그에게 있어서 발 끝에 어설프게 매달린 그림자처럼 익숙한 것이었으나, 불면에 체력소모까지 더해진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숨을 고르는데도 몽롱함이 자꾸만, 서툴게 피는 담배연기처럼 폐부를 더럽혔다. 그는 피로한 얼굴로 미간을 꾹꾹 누르며, ‘새벽’의 일을 반추했다.
보고 싶었다. 밤이 너무 길다는 이유는 아니었다. 그냥 제가 만들어준 그의 공간에 얌전히 담겨있는 모습을 빤히 응시하고 싶었을 뿐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음이 이상하게 술렁이고 묘하게 삐죽이던 것을 기억했다. 그래서 트리스탄은 이자에게 갔다. 노크를 하고, 신경질적인 표정을 마주했다. 오늘 아침에 와서야 이 모든 일들은 먼 꿈처럼 느껴졌다. 24시간 하는 자전거 대여점에서 자전거를 빌리고, 피자가게에 가고. 평소라면 하지 않았던 일들은 몽환적이었다.
온 몸을 뒤덮는 피로만 아니었어도, 오늘 새벽의 일을 잊었을지도 모른다. 이자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의 충동에 몸을 맡기고 있다 보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민은 별게 아닌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숨을 들이킬 때 마다 머리가 몽롱해지는 감각은 공중의 요새에서 세계의 모든 일들을 예지하던 때와 비슷한 감각을 주었다.
현실감이 없다. 이런 기분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숨이 텁텁하게 막힌다. 버거워진다. 물 밖에서 폐호흡을 하는 물고기가 된 기분이었다. 그럴 때 마다 현실의 그를 찾게 된다. 이층으로 올라갈까, 올라가지 않을까를 고민하다가 트리스탄은 냉장고를 열었다. 채소로 국물을 우려 스튜를 끓일 셈이었다.
냉장고에 있던 병아리콩을 꺼냈다. 12시간 넘게 꼬박 물에 담가두었기 때문인지 오동통한 알들이 손에 잡혔다. 이자가 깨기 전 까지 모든 걸 마치기 위해서는 손을 바삐 움직여야 했다. 병아리콩은 한시간 정도를 꼬박 삶아야 하니까. 콩을 불에 올리고 그는 채소를 손질했다. 마늘과 양파는 잘게 다지고, 가지를 큼지막하게 썰어 따로 두었다. 소금 밑간을 하고선 파프리카와 감자에 손을 댔다.
트리스탄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요리는 상념을 없앤다. 정확한 재료가 정확한 레시피로 냄비에 들어가 맛을 내는 걸 느끼면 마음이 편해진다. 부유감이 천천히 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자연스럽게 이자의 칭찬을 기대하다가, 고개를 젓는다. 그는 토마토에 손을 댔다. 어떤 행위에 보상이 당연히 자리할 것이라 믿는 것은 세상을 다 알지 못하는 철부지의 이론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는다. 사랑을 수치로 나타낸다면 분명 눈금이 박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떠나지 않는 그에게 안심하면서도, 언젠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가지에서 나오는 물을 벅벅 닦았다. 소금기의 당연한 삼투압 때문이다. 눈물 또한 비슷한 속성임을 생각하며 손을 움직였다. 그는 속이 깊은 냄비를 꺼냈다. 누군가와 헤어지고 새 사람을 들이더라도 부엌의 풍경은 바뀌지 않았다. 손에 익은 도구는 눈이 멀어있고, 가치판단 또한 하지 않는다. 그러니 교체할 필요 또한 없는 것이다.
올리브오일을 깊게 둘렀다. 콩이 삶아지는 시간을 계산하고 오래 볶을 요량으로 양파와 마늘을 볶기 시작했다. 재료 특유의 단맛을 떠올리면서 달달 볶자, 부엌에는 드디어 사람 사는 향이 나기 시작했다. 숫자에 욱여넣지 못하는 마음에 대해서 떠올리다가, 그는 가만 저린 손을 쥐었다. 새벽의 바람을 떠올렸다.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은 채로 발을 움직여 그의 등을 쫓아가는 감각은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사랑 같았다.
제가 품고 있는 마음은 분명 사랑이다. 받는 마음이 애정인지는 모르면서도 트리스탄은 그렇게 규정해냈다. 야채는 볶을 수록 수분을 날렸다. 몸은 피로를 다 소화하지 못한 채 삐걱였고, 익숙하지 않은 피로를 느낀 채로 그는 그를 먹이기 위한 스튜의 다음 단계를 떠올렸다. 콩이 다 익고, 가지에 소금맛이 다 들면 양파와 마늘, 각종 야채들과 함께 깊게 볶을 것이다. 강불로 익히면 수분이 날아가 야채의 맛이 없어진다. 탄 맛이 나는건 바라지 않았다.
토마토 스튜는 은근하고 뭉근하게 익히면서 오래 저어야 한다. 마치 교차하지 않는 평행선이, 제 각도를 포기하고 1도라도 틀어지는 순간 교차점이 생길 가능성이 출현하는 것처럼. 트리스탄은 병아리콩에 토마토의 맛이 들고, 후추와 소금이 제 자리에서 맛을 내고, 수분이 날아가 졸아든 아채들이 단단하고 달달하게 변하는 광경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월계수잎을 올리고, 맛을 보며 간을 가감하겠지. 그는 새벽의 기억을 제 마음에 오래 눌러 담았다. 약하고 은근하게 곱씹다 보면, 분명 이 기억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깊은 냄비에 소리가 나지 않게 주걱을 움직였다. 숨을 들이킬 때 마다 병아리콩을 삶은 냄새가 스며왔다.
뒷목을 쓸었다. 좋아하고 있었다. 명백하게. 그것만으로도 포기하지 않을 이유가 된다. 그의 변덕을 그저 해석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트리스탄은 손을 마저 움직였다. 가지에 든 맛이 다 빠지기 전에 모두 써버려야 한다는 의무감을 우선으로 생각하면서. 그러면서도 그는 이 층 위의 새를 떠올렸다. 아직 그 곳에 있을까. 그 자리에 있을까. 익숙한 의심은 그림자처럼 찾아오고 도마 위의 가지가 덜컥이며 잘리는 소리만이 트리스탄 리하르트의 현실감을 북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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