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화초를 다루는 법
텐렌 添練
* 18TRIP(에이트리) 2차 창작, 구 트위터에 올렸던 버젼의 가필수정본
* 아침조 메인스토리, 무라쿠모 텐 구장 노벨 스포 약간, 텐 SR 카드 스토리 내용 포함
* 상/하 구성의 단문 2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 이미지 버젼(포이피쿠) > https://poipiku.com/10265650/10518879.html
당신의 화초를 다루는 법 (上)
손가락 마디를 그 부드럽고 부슬부슬한 사이로 들이밀어 아주 조금 파헤치듯 쓸고 살짝 빼어내면, 물기 없는 마디에서 흙 부스러기가 약간 흩어져 떨어졌다. 엊그제, 아니 며칠 전 즈음엔 분명 아직 축축했었는데. 텐은 그녀의 곁에 두었던 물뿌리개를 들고 제 자리인 3층 침대에서 내려와 부엌으로 향했다. 물을 받으려고 싱크대 쪽에 갔을 때, 텐의 눈에 부엌의 창가 옆, 적당히 ‘원예용 ’—안타깝게도 원園자는 번져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었고, 그 밑에 다른 필체로 가드닝, 이라고 쓰여있었다—이라 적힌 메모지가 붙여진 페트병이 눈에 들어 왔다. 스쳐 지나가는 한 사람, 아니 두 사람.
쓴다고 해서 별탈은 없겠지. 텐은 그렇게 결론짓고 볕에서 미지근해진 물을 물뿌리개에 담았다. 정확히는 원예용 소형 압축 분무기였는데, 언젠가 식물 가꾸기가 취미라는 듯했던 옛 연인—필요에 의해 결혼을 전제로 교제했던, 꽤나 상대에게만 일방적으로 달콤한 관계였다—이 알려주었던 브랜드의 물건이었다. 용량은 작지만 가볍고, 한 손에 쥐기 쉽고, 물이 많이 필요한 화초만 아니라면야 딱 적당한 양이 들어가서, 헤어지고 나서도—마찬가지로 텐 자신 또한 일방적으로 청산한 어떤 거짓된 신분의 인간관계를 일컫는 것이다—, 텐은 그 분무기를 꽤 애용愛用 했다. 얼굴도 이름도 성격도 죄 잊은 지 오래인, 뭣하면 이제는 알려준 브랜드의 이름에 달라붙은 찌꺼기가 된 어떤 사람보다는, 훨씬 더.
텐은 그녀의 옆으로 돌아와 잠시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토라진 듯 숙인 고개처럼 쳐진 그 잎사귀를 밑에서부터 살짝, 쓰다듬듯 들어 올린다. 평소라면 조금 꼿꼿하고 탄성 있게 흔들렸을 그것은 그날따라 유난히 축 처져 있어, 텐을 책망이라도 하듯 제 손에 몸을 맡기듯 늘어진다. 미안해, 요새 좀 많이 바빴거든. 여느 때처럼, 그렇지만 아주 오랜만에 그 자신을 새겨넣듯이 텐은 말을 잇는다.
그러고 보면, 그해 시즌은 리뉴얼 투어코스를 시범운행 했었다. 많이는 아니지만 늘어난 정원, 조금 더 알차진 라이브. 그간 노련해진 실력이 무색해질 정도로 무리한 양은 아니었지만, 동시에 추가분의 라이브 연습, 그리고 어쩐지—사실 어렴풋이, 보복 혹은 경고처럼—늘어난 ‘일’이 겹쳐 최근, 관심이 소홀했던 건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혹여나 짓이겨질까 조심스럽게 힘을 빼어 텐은 그녀에게서 손을 뗀다. 그리고 그녀가 뿌리내린 흙더미에 몇 번 힘주어 물을 뿌렸다. 흙이 흠뻑 젖어 더욱 짙어지고 나서야 텐은 분무기를 제자리에 두고서 잠깐 창밖을 보았다. 날이 저무는 탓인지 실내로 들어오는 빛은 그렇게까지 강하지 않다. 그렇지만 저물기 직전 강렬한 일몰은, 손을 많이 타지않을 만큼 굳세지만 묘하게 섬세한 그녀의 몸을 상하게 하기엔 무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흠, 텐은 짐짓 목울대를 울리며 제 침대 쪽의 커텐을 쳤다.
“할 얘기는 더 있는데, 오늘 다 해주기인 무리일 것 같아.”
텐은 이 뒤에 있는 일정을 생각했다. 일이 얼추 끝나기 무섭게 무사히 투어의 성공을 기념해서 약속을 잡은 개 하나를 떠올린다. 변명이라도 할 걸 그랬나 뒤늦게 후회하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 거절할 생각도 없었다. 가볍게 몇 번 추켜세우고 나면 잔을 들이마실 테고, 얼마 안 가 곯아떨어질 테니 그때 느긋하게 쉬면 된다. 뭐, 개가 좋은 술을 준비했다고 얘기 들었으니, 그 몫은 즐겨줘야 할 테고.
약속 시간까지 두어 시간은 남았음을 깨달은 텐은 베개에 기대어 간만에 몸에서 긴장을 쫓아낸다. 두어 번, 눈을 깜박이고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본다. 그리고 다시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잎끝을 매만지면 아까까지의 갈증과는 달리 촉촉하고 매끈해서, 그것이 못내 맘에 들어 그녀를 만끽한다. 맑게 생기가 도는듯한 그 쾌청한 녹빛, 자신에게는 하등 상관없는 독성, 그것만이 무기인 가냘픈 위태로움, 묘한 충만감.
늘 있는 익숙한 감각. 나른한 안심감.
당신의 화초를 다루는 법 (下)
손가락 마디를 그 부드럽고 살랑거리는 사이로 들이밀어 아주 조금 파헤치듯 쓸고 살짝 빼어내면, 그는 간지러운지 우헤헤, 하고 바보같이 웃음을 흘리더니 파르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가 다시 힘없이 닫았다. 이번에도 보기좋게 곯아떨어졌군. 텐은 크게 숨을 몰아쉬고나가떨어진 거대한 개를 뒤로 한 채 패키지째 서빙되어 온 일본주를 잠깐 쳐다본다. 멋들어진 필체. 꽤 유명한 브랜드의 신상 라인이었다. 눈에 익은걸 보니 언젠가 한번 같이 마셔보았던 것 같기도.
흐응, 텐은 짐짓 소리를 내곤 다시 자기 몫의 잔을 들어 제 입에 기울였다. 좋은 술이었다. 만족스러웠다. 그때도 다른 술보다는 좀 더 좋은 반응을 했었지. 이 바보 같은 개는 아마 그것을 기억했던 모양이다. 따지자면 한번, 일본주라면 좋지만 와인은 그다지, 라고 한 이래로——렌가는 좋은 일본주를 받아 올 때면 종종 텐과 함께 마시곤 했었다. 텐이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게 됐을 때에도—니시조노 렌가의 내밀內密을 술기운을 빌려 파헤쳐낸 이후부터, 그날 밤 렌가가 제 가상한 노력이 무색하게 풀릴 리 없던 보따리를 풀어 선뜻 제 속내를 내보였을 때부터—, 그의 ‘일‘이 끝난 이후로도 둘은 자주 같이 술을 마셨다. 텐에게 있어 평소 귀찮은 뒤치다꺼리의 보상이라기엔 뭣하지만, 횡재라면 횡재였다.
텐은 술로 목을 축이고서 렌가를 들여다보았다. 엎드려 팔에 반쯤 묻힌 그 턱을 밑에서부터 살짝, 쓰다듬듯 들어 올린다. 놀란건지, 아니면 간지러운건지. 그는 와중에도 끙, 앓는 소리를 내고선 웃더니, 몰려오는 술기운을 이기지 못한 듯 제 손길에도 아랑곳 않고 늘어진다.
바보 같은 얼굴. 여느 때처럼, 목소리가 되지 못한 생각의 실을 텐은 잇는다. 투어의 성공이 보람찼는지 유난히 잔을 비우는 속도가 빨랐던 것을 기억한다. 이 기쁨을 자신과 나누고 싶다느니—하던 목소리도 그 웃는 낯짝도 기억한다. 그러고 보면, 적당히라는 단어가 아마 머릿속에 박히지 않은 이 개는, 셀러브리티이자 모델로서, HAMA 3구장으로서, 최근 모든 일에 지나치게 열심이긴 했다. ‘친구’의 말— 순전히, 자긴 적당히 하고싶으니 렌가가 너무 열을 올려도 곤란하다는 속내였지만—조차 결국에는 그래도, 라며 넘어가 주지 않았으니, 이제는 고집불통이라 불려도 할 말이 없을 터였다.
혹여나 깨버리면 술주정을 받아주어야 할까 싶어 조심스럽게 텐은 손을 뗐다. 한 숨 돌리고자 둘러본 얼뜨기 같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언뜻 보아도 고급스러운 2인실. 실상은 제법 검소—분위기에 말려드는 경향 탓에 가끔 너무 호쾌한 구석이 있단것만 빼면—한 렌가치고는 상당히 의외인 공간. 느릿한 재즈, 어둑한, 그러나 강렬한 실내조명. 방 안을 훑던 텐은 눈부심에 약간 눈을 찡그리고 잔을 제자리에 두었다. 조명의 반대편, 전구색 빛을 받아 평소보다 좀 더 온화한 색을 한 머리카락. 저물기 직전 강렬한 해질녘의 빛. 또는, 한순간에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일출.
“역시, 렌가 씨는 가끔————”
정말, 기분 나빠. 텐은 이게 진심인지 아닌지를 잠깐 생각했다. 늘 뱉는 거짓말 사이에서 이것만큼은 진심일지도 모른다. 그래, 좋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 번도 좋다고 생각하지 않고, 좋아지고 싶지도 않다. 겨우 찾은 혼자만의 휴식 시간을 불쾌하게 만든 앙갚음겸 텐은 렌가의 잔을 들어 주인 잃은 술을 제 목 너머로 들이붓는다. 이대로 버려질 바에야 자신이 즐기는것이, 술도 좋은 일일 것이라.
거칠게 짚은 것과는 대조되게 소리 나지 않게 잔을 내려놓으며 텐은 두어 번, 눈을 깜박이고 시선을 돌려 렌가를 바라본다. 깊이 잠들어 깰 기색이 보이지않는 얼굴. 저도 모르게 뻗었던 손으로 입 끝을 매만지면 술로 축여졌던 그것은 촉촉하고 잘 관리되어 부드러워, 그것이 못내 불쾌하면서도 감탄하며 만끽한다. 맑게 생기가 도는 뺨의 주홍빛, 신기할 정도의 무방비함, 그에 따른 질릴듯한 위태로움, 묘한 충만감.
늘 있던 낯선 기시감. 익숙한 위화감. 생각, 가늠, 비교——————
아,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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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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