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고정틀 샘플 10
감기몸살, 실 작업물, 약 7000자
일상에 균열이 생긴다.
간헐적으로 울리는 민원 전화벨, 전화를 받는 옆 파티션 동료의 나직한 음성, 프린터가 돌아가는 소음과 마우스 클릭 소리. 교통집행과는 평소와 다를 것 하나 없이 그대로였다. 퇴근 시간을 얼마 남기지 않고 작성하던 표에서 문제를 발견한 동료의 볼멘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 I는 잠시 그쪽으로 시선을 두었다가 몇 차례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안개가 낀 듯 시야가 흐려와 자칫하다간 그 역시 같은 실수를 하게 될 것 같았다.
I는 무거운 눈꺼풀에 힘을 주어 좀 전까지 느릿한 손길로 입력하던 숫자들을 더블체크했다. 낮부터 감각이 둔하니 반응이 느리고 조금씩 현기증이 난다 싶던 것이 이 정도까지 악화할 줄은 몰랐다. 옅은 홍조가 도는 눈가를 손가락 끝으로 쓸어내리며 생각했다. 미리 알았더라도 무엇이 크게 달라졌겠느냐마는. 애석하게도 그는 남의 일이면 모를까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해 꼼꼼히 확인하고 혹시 모를 병세를 미연에 방지하는 사람까지는 못 되었다.
침을 삼킬 때 까끌거리는 목구멍,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면 부은 편도와 평소보다 높은 체온으로 무거운 머리가 신경을 거슬렀다. 손끝에 닿는 얼굴의 온도가 생각보다 높은 듯하다. 모니터 우측 하단에 찍혀 있는 시간은 퇴근 직전을 가리켰고, 그 말인즉 근처의 병원이나 또한 곧 영업을 종료한다는 말이었다.
오늘은 특별한 일정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러나 집에 약을 가져다 두었던가. 아무리 제 일에 둔감한 자였기로서니 열이 펄펄 끓어 명일 예정에 없던 결근으로 모든 일이 산더미처럼 밀리게 되는 상황은 사절이었다. 또한, 저녁을 먹지 않았으면 같이 먹자고 연락하는 누군가의 친근하고 천연한 문자 메시지에 컨디션 난조를 이유로 거절의 답신을 전송하고 싶지도 않았다.
자연스럽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머리를 쓸어넘긴다. 갈색의 머리카락이 손 틈새로 흘러내려 흩어졌다. 내쉬는 숨결의 온도가 높고 평소보다 괜스레 추운 것을 보니 열이 나고 있음은 확실한 것 같고, 다만 자가 진단으로서의 판단은 체온계에 찍히는 숫자보다 정확도가 낮다. 숫자를 틀리지 않게 입력했음을 확인한 I는 퇴근 전에 딱 한 가지만 더 마무리해 둘 요량으로 자료를 가지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I 씨. 좋은 저녁입니다.”
“네, 좋은 저녁이요.”
느릿한 발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가며 가방을 챙겨 일찍 퇴근하는 사람들에게 목례했다. 안면이 있는 동료들은 I에게 날씨가 춥다느니, 월초라 일이 바쁘다느니 하는 잡담을 건넸고, 그는 적당히 그러게요, 하고 대답해주었다. 남들이 그에게 관심이 없다기보다는 평소처럼 얌전한 인상에는 딱히 다른 점이 떠올라 있지 않아 타인의 시선으로 I의 컨디션 난조를 알아채기 어려웠던 탓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복도 한복판에서 그다지 친하지 않은 이들의 걱정을 사는 것은 내키지 않고, 애당초 그 정도라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따끈하게 달아오른 손바닥으로는 제 상태를 가늠할 수 없었으며, 정말로 아팠다면 이 일까지 끝내야겠다는 생각조차 안 들지 않았을까. 서류 파일을 끌어안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던 I는 막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K를 그때 정면에서 맞닥트렸다.
“엇, I 쨩이네.”
“K.”
“퇴근 시간인데, 아직 일하는 거야?”
I는 주변을 의식하여 어깨를 감싸는 그의 큰 손을 가볍게 곁눈질했다. 세지 않은 충돌이었으나 혹여 중심을 잃기라도 할까 하여 무의식적으로 그의 어깨를 잡았던 K는, 무언가 평소와 다름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K가 ‘여상한 타인’과 다른 지점. 자꾸 밀어내고 싶어지는 이유. 으응? I 쨩, 뭔가… 엘리베이터 바로 앞보다는 인적이 드문 복도 안쪽으로 이끌린 I가 되려 갸웃하며 조금 전의 물음에 느릿하게 대답을 내놓는다.
“이것만 처리하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어라, 잠깐.”
I가 안고 있는 두툼한 서류뭉치에 K의 시선이 머물렀던 것도 잠시.
“지금, 얼굴이 완전히 분홍색이잖아.”
I의 손목을 잡아 이끌던 그의 손이 이번엔 이마에 짤막하게 닿았다가 떨어진다. 따듯한 편이던 K의 손바닥임에도 어쩐지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에게 난데없는 수족냉증이 생긴 것이 아니라면 제 피부 온도가 그만큼 높아진 것일 터. 잠깐만, 하며 그가 I의 품에서 무거운 서류 더미를 빼 갈 때 그 정도의 무게중심 변화로도 몸이 균형을 잃었다. 순간의 현기증으로 I가 비틀하자 이미 걱정으로 가득하던 K의 눈이 더 크게 뜨였다.
“지금 아프네, 그것도 엄청.”
“…괜찮은데.”
“무슨, 열이 대체 몇 도야?”
늘 웃는 낯에 호선을 그리던 K의 눈썹이 드물게도 조금 좁혀들었다. 흐릿한 시선하며 잔뜩 높은 체온, 창백한 얼굴과 힘없는 어투. 타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과거부터 이어져 온 면면한 애정의 창으로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것들… 숨기려 애쓴 적은 없대도 티를 낸 적도 없는데, 단박에 알아차리고 이렇게나 걱정하는 K의 모습은 다소 놀라웠고 동시에, 괜시리 열오른 볼이 더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I의 배로 놀란 그는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믿기지 않는 양 I의 이마를 한 번 더 짚었다. 제 이마와 번갈아 확인하여도 의심할 여지 없이 열이 높았다. 이렇게 휘청거리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몇 도인지는 몰라. 괜찮다니까, 이것만 하려는 거니까…”
“무슨 소리야, 안 되지. 약도 안 먹었잖아.”
“…음.”
부정할 수 없어 I가 말끝을 흐렸다. 그러니까, 이렇게까지 열이 오를지 몰랐고 – 심지어는 직전까지도 그는 자신의 상태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 생각보다 많이 아픈 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퇴근이 가까웠다는 해명을 입 밖으로 내기에는, 이미 자신을 잘 알고 있는 사람 앞에서 어쩐지 변명처럼 들릴 듯했다. 그가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 K는 제 손바닥이 헤집어놓아 흩어진 I의 앞머리를 세심한 손끝으로 다시 정리해주었다. 실은 처음부터 책망하거나 탓할 마음 같은 것은 없었다.
하지만 모로 봐도 일을 할 상태는 아닌데 당사자가 고집을 부리니 제법 난처하게 되어, 어깨를 으쓱인 K는 서류를 여전히 뺏어 든 그대로 능청스레 I를 앞세우듯 하여 그의 부서 안쪽으로 들어갔다. 한 손으로 파일을 안고 나머지 손으로는 I의 등을 감싸며 방향을 정했다. 서류를 I의 책상에 내려놓더니 웃는 얼굴로 지그시 바라보는 모양은 어서 가방을 챙기라는 무언의 압박이었고, 옆에서 일하는 동료들이 여럿 있는 가운데 그다지 관심을 끌고 싶지 않았던 I는 승낙하듯 가방을 집어 들었다.
사실 괜찮다는 말로 고집을 부리긴 했지만 이렇게 K의 걱정 가득한 얼굴을 마주하고 난 뒤에는 그제야 제 상태를 자각하여 제법 괜찮지 않은 것을 인정하게 됐다. 아프다고 어리광을 부릴 너스레까지는 없었으니 K가 이끄는 대로 얼떨결에 퇴근한 뒤 얌전히 그의 뒤를 따라 주차장으로 향할 뿐이었다. 그다지 무겁지도 않은 가방까지 제 것인 양 자연스레 가져간 K는, 조수석에 I를 태우고 직접 문까지 닫아 주었다.
물론 그뿐만은 아니었다. 상체를 기울이고 손을 뻗어 손수 안전벨트를 매 줄 때 두 사람의 거리는 퍽 가까웠다. 이럴 때마다 K는 지척에서 부러 씩 웃어 보이는 식의 수작성 행동을 하고는 I의 구겨지는 미간을 구경하며 밀어내는 손길을 즐기곤 했는데, 오늘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거니와 이번 것은 수작보다는 애정에서 기인한 걱정 쪽에 기울어져 있었다.
I는 다가왔다 멀어지는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차 곳곳의 서랍과 수납공간을 뒤적이며 상비약으로 구비한 해열진통제가 없는지 찾느라고 애쓰는 K를 응시한다.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난 그의 짤막한 한숨까지. 너무 걱정하게 만든 것 같아 I가 나직하게 “괜찮아.” 하고 안심시켰다.
“그래도, 열이 높잖아.”
“집에는 아마 약이 있을걸.”
“확실해?”
“…없으면 편의점에서 사면 되니까.”
그래, 알겠어, 하고 대답한 K는 차를 출발시키기 전에 제 외투를 벗어 덮으라며 건네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 주차장에 세워두었던 차에 이제 막 난방을 가동한 탓에 내부 공기가 제법 찼다. 저 근무복 하나 입고 있으면 춥지 않으려나. 운전대를 잡은 K의 왼 얼굴을 바라보며 외투를 만지작거렸다. 평소라면 됐어, K나 입어, 하며 막무가내로 되돌려주었겠으나 부단하고 세심한 그의 다정 앞에는 조용히 시트에 몸을 묻으며 외투를 몸 위로 끌어올리게 될 뿐이었다.
후끈하게 달아오르는 차 안의 온도와 편한 곳에 기대어 있다는 자각 때문인가 I의 정신이 혼곤하게 떠오르며 열 오른 의식이 몽롱하게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운전하며 건네는 몇 마디들에 짤막하게 대답하던 그의 목소리가 느릿해지자, K는 졸리면 자도 좋다며 한 손으로 흘러내린 외투 자락을 고쳐 덮어주었다.
K는 I가 조수석에서 잠에 든 동안 혹여 급히 밟은 브레이크가 휴식을 방해할까 하여 평소보다 배로 운전에 신경을 썼다. 고속도로 위에서 곡예주행을 하며 갈고닦은 운전 실력을 여자를 깨우지 않기 위한 부드러운 운전을 하는 데에 사용하고 있는 것이 웃기긴 해도. 하여튼 체온계가 없는 것은 K로서도 마찬가지이니 부디 늦은 저녁이나 새벽에 응급실에 가야 할 만큼 상태가 나빠지지 않기를 속으로 빌면서, 발갛게 달아오른 두 볼과 파리한 안색으로도 서류 더미를 들고 몇 번이나 괜찮다고 말하던 좀전의 I를 떠올려냈다.
그 애는 어릴 때부터 한결같이 그랬으므로 그것이 특별히 당황스럽거나 답답할 일은 아니었고, 그저 자신이 제때 – 좀 더 빨랐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 알아차려 자차로 데리고 올 수 있음에 다행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또한 평소 그렇게 투덜거리다가도 제 걱정하는 모양새에 마음이라도 약해졌는지, 끝까지 고집을 부리지 않고 순순히 서류를 내려놓더니 조수석에 올라타 주는 것이 꽤 기껍고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K는 신호에 걸려 차가 정차했을 때 잠든 I를 곁눈질하며 때때로 그런 생각을 하였다.
I의 집 주차장에 차를 대는 일은 익숙했다. 주차장이 어디인지 구태여 물어볼 필요가 없고, 여전히 잠에 빠진 그를 안아 들어 집 앞으로 올라가면서도 헤매지 않는 것은 여러 번 이미 와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 머뭇거려야 했던 것은 K에게 집 열쇠 복사본 따위가 없었던 점이었으며, 문 앞까지 다 와서는 자리에 선 채 잠든 이를 깨우는 상황에 혼자 웃으며 I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불렀다.
“네코 쨩. I, 일어나 봐.”
“… 응?”
“열쇠가 없어.”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던 I는, 열쇠가 없다는 말을 듣고 몇 초가 지난 뒤에야 K가 지금 자신을 안아든 채 제 집 현관문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헉. 놀라 눈이 커지는 I를 끝까지 즐겁다는 듯 바라보던 K는 I의 주머니에서 나온 열쇠를 받아 들더니 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실례하겠습니다-.”
사람의 등과 오금 아래쪽을 받쳐 안아 든 상태로는 두 팔이 모두 자유롭지 않아 열쇠로 문을 여는 일에 상당히 제약이 있었겠다마는, K는 그날따라 I가 땅을 딛지 않게 하겠다는 이상한 집념이 들어 고집을 부렸다. 다소 힘겹게 문을 열면서 I의 내려달라는 항변에 ‘안 된다’고 장난 반, 단호함 반으로 대답하면서 말이다.
“걸을 수 있어…”
“이렇게 에스코트 받을 기회도 많이 없을걸.”
그는 끝내 I를 그의 침대에 내려주었다. 다리를 뻗어 보라더니 신발까지 손수 벗겨주었다. 이미 가득 떠오른 안면의 홍조였으나 민망함에 귀 끝까지 붉어져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신발장에 신발을 정리해 놓고 다시 돌아오면서 씩 웃는 K의 얼굴을 흘긴다. 침대에 걸터앉은 채 K의 겉옷을 개켜 옆에 내려놓으며.
K는 춥다, 춥다… 아무렇지 않게 중얼거리며 자연스럽게 I가 상비약을 정리해 두는 서랍을 열었다. 자주 쓰는 무엇이 어디 있는지 정도는 자연스럽게 알고 있는 그를 곁눈질하면서 새삼 세월의 깊이를 실감했다. 아무리 에스코트니 하며 장난스럽게 굴었다고 해도 걱정하는 마음은 여실히 그대로라, 혹시나 약이 없으면 당장 나가 편의점에서라도 약을 사 올 생각을 하며 미미하게 좁혔던 미간이 감기약 박스를 발견하고 다시 펴진다.
“아, 있네.”
“…사 뒀나 보네.”
“다행이다. 뭐, 사 왔어도 됐지만, 추우니까.”
조금 전까지 한겨울 추위에 근무복 한 장 달랑 걸치고 I를 안고 들어온 사람은 누구인지. 그러고 보면 늘 K는 겨울이 되면 춥다며 은근슬쩍 I의 주머니를 노렸다. 쉽게 내어주지 않았음에도 핫팩을 들고 다니는 추가 조치는 하지 않고 늘상 한결같이 굴어서는 I의 원성을 사곤 했었다. 제 외투에 얌전히 달려 있는 주머니는 보이지도 않는지 이미 I의 손이 들어가 있는 곳을 자꾸 노리는 모양새에 정말 짜증난다며 걸음을 재촉했던 때가 왜 지금 떠오르는지. 그동안 봐 왔던 한결같은 엄살과, I가 아프다는 말에 제 외투까지 벗어 주고서 별다른 생색도 없던 조금 전이 병치되어 I의 귀 끝이 다시 미미하게 달아올랐다.
…짜증 나. 그때나 지금이나 K와 있으면 늘 짜증이 났다. 언제 데워 왔는지 미지근한 물이 담긴 컵과 감기약이 손에 쥐어질 때까지, I는 K가 앉혀 준 대로 침대에 가만히 앉아 아랫입술을 괴롭혔다. 약을 먹었으니 곧 열이 내릴 테지만 아직은 잔류한 열기가 시야를 조금 몽롱하고 흐리게 만들었다.
“죽 좀 사 올까?”
그 정도는 먹을 수 있겠냐는 말에 I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까지 춥다고 했으면서. 당연한 듯 다가서는 다정에 얼굴이 홧홧해지며 익숙한 불편함이 몰려들었다. 이래서 네가 싫어.
마음에 없는 소리.
약을 먹는 것을 봤고, 체온계에 38도 초반의 숫자가 찍히는 것도 봤다. K는 외투를 챙겨입으며 잠시 죽을 사 올 준비를 했다.
“옷 갈아입어야 하지 않아?”
“응…갈아입고 있을게.”
“도와줄까?”
별다른 대답 없이, K의 얼굴로 베개가 날아들었다.
하하, 미안해! 호탕하게 웃으며 탁자 위에 올려진 현관 열쇠를 찾아 쥔 K가 도망하듯 후다닥 문을 열고 나섰다. 바닥에 덩그러니 떨어진 베개와 닫힌 문을 쏘아보던 I가 흐트러진 호흡을 고르며, 다시 한번 더 되새겨 뇌까렸다.
…진짜 싫어!
최악이라고!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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