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장면 반고정틀 커미션

아픈 고정틀 샘플 09

감기몸살, 실 작업물, 4000자 내외

분명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텐데도 괜히 세상이 빙 돌았다. 강의실 한켠에 몸을 구기고 앉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벽에 머리를 슬며시 기대었다. 잠시라도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어느샌가 무거운 눈꺼풀이 감기고 고개가 책상을 향해 곤두박질했다. E는 정신없이 꾸벅 졸다가 불현듯 흩어진 의식을 수습했다. 으… 무릎 위에 다소곳이 놓았던 손으로 얼굴 한 쪽을 문질렀다. 손바닥에 닿는 체온이 평소보다 제법 뜨거웠다.

아침에 깨어날 때부터 으슬으슬하더라니 그저 기숙사의 높지 않은 온도 때문일 것으로 치부하고 넘어가지 말았어야 했나 보다.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부스스한 갈색의 머리카락이 손가락 틈새로 흩어졌다.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수업은 여전히 끝이 나려면 멀었다. 그나마 택한 구석 자리가 교수의 날카로운 시선에서 조금은 벗어나 있는 것이 약간의 위안이었다. 자칫하다가는 졸다가 큰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면박을 당하고 강의실의 인원 전부가 자신을 돌아보게 될지도 몰랐다.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침을 삼킬 때마다 느껴지는 편도의 꺼끌거림. 간헐적으로 작게 터지는 마른기침. 이마를 짚으면 식은땀 같은 것이 배어나왔다. 그는 몸을 조금 더 구기며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알 수 없고, 교수가 점점 고조된 말투로 중요한 내용을 역설하는데 머리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강의실에서 혼자 동떨어져 부유하는 기분은 아마 그림자를 닮은 그의 삶보다는 그저 열이 올랐기 때문이리라. 아마도.

그래, 열이 나서 그런 거야. E는 잠시 눈을 감으며 지금으로서는 다만 거기에 안주하기로 했다. 찰나이자 영원토록 가슴 한 군데 품었던 욕심은 당장에는 충족될 수 없다. 평생 갖지 못했던 애정을 갈구하면서도 거기에 쉬이 이름을 붙이는 일은 어려웠다. 뜨거운 숨이 입가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E의 낯이 파리했다. 콜록, 콜록. 얼마나 눈을 감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적당한 강의실의 온도에도 오한이 들어 움츠렸다. 눈으로 보기만 했던 잡히지 않는 애정을 동경한다.

무슨 정신으로 수업의 종료까지 거기에 앉아 있었을까, 학생들이 웅성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날 때가 되어서야 E는 시간을 알아차리고 가방을 챙겼다. 조금 전엔 정신이 붕 뜨는 것 같더니 이번에는 육체가 밑으로 가라앉는 듯하다. 그저 따듯한 모닥불 앞에서 졸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복도로 나서던 찰나 누군가가 E의 손목을 붙잡기 전까지는 고작 그 정도만을 바랬다.

“E.”

시야 끝에 존재감을 자랑하는 붉은색 머리카락이 불현듯 들어온다. 열이 나는 탓에 현실과 반쯤 해리되어 있었던 E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온기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E가 밭은숨을 내쉬자 U리어스의 단단한 손바닥이 그의 이마를 감쌌다.

몸이 떨릴 만큼 지독하게 춥다고 생각했는데 제 체온보다 제법 낮은 U의 손이 이리도 기꺼운 것을 보면 온도라는 것은 정말 상대적인지. 또는 그저 나의 마음이 그렇게 받아들이고 싶은 건지… 괜찮아? 하는 질문에 고개를 주억거리려다가도 저도 모르게 몸이 그에게 기울었다. 비틀거리는 E의 어깨를 붙들어 부축하며 U가 당황했다. 혹여 넘어질세라 어어, 하며 중심을 잡아주곤 눈썹이 대번에 쳐진다. 흑색 눈동자에 명백한 걱정이 차올랐다.

“…”

흔들리던 E의 시선이 건네어진 애정을 어느 순간부터 면면히 곱씹었다. 자꾸 제 말을 듣지 않고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몸을 지탱하려 애쓰면서도 저도 모르게 그랬다. 그것이 퍽 좋아서, 나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누군가의 걱정과 애정이 문득 참 소중하게 느껴져서…

고열에 몸도 못 가누고 앓는 친구를 복도에 이대로 세워 둘 순 없다. 괜찮으냐는 질문에 재깍 대답도 못 하는 상태라면 더욱 급하다. U는 그를 부축해 가장 가까운 데에 있는 벤치로 이끌었다. 인적이 드문 복도의 끝이었으니 지나가는 학생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지는 않아도 될 것이다. 자꾸만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지 않기 위해 노력하던 E는 그제야 몸에 힘을 조금 풀었다. 자연스레 그의 머리가 U의 어깨에 툭 닿았다.

평소라면 그러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좀 아팠다. 괜찮다며 아무렇지 않은 듯 걸어갈 수도 없었거니와 마음 한켠에서 그러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지럽냐, 머리가 아프냐, 감기에 걸렸냐… 하는 질문에는 착실히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걸을 수 있겠냐는 질문엔 슬며시 도리질쳤다. E는 뻗어오는 손을 거절치 않고 잡아 허벅지 위에 올렸다. 깍지를 낄 듯 얽어들어간 손가락들은 제법 체온 차이가 났다.

그의 넓은 어깨에 기대어, 열에 달뜬 숨을 내뱉으며 시원한 바람이 이마에 와 닿도록 두었다. U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러지도 않았을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다리 뻗을 자리를 보아 둔 셈이었다. 하지만 형이라고 불러도 괜찮다고 했잖아, 네가 그랬잖아…

내내 느꼈던 실체없는 그리움은 여기를 가리켰다. 좀처럼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던 어린 동생, 달이 지고 해가 뜨도록 곁을 지켜주던 부모의 애정. 마른기침을 내뱉으며 여지껏 이름 붙이지 못했던 하나의 욕심을 떠올렸다. 내가 바랬던 것은 그저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나를 바라보는 너의 눈에 가득 담긴 걱정, 열을 재어 주고 식은땀을 닦아 주는 손길… 걱정하는 네게는 미안한 마음이 없다면 거짓이겠으나 한 번쯤은 이래도 괜찮지 않을까. E는 U의 어깨에 얼굴을 푹 묻는다. 머리칼이 녹색의 옷자락 위에서 흩어진다.

“많이 아파?”

E는 별다른 대답 않고 계속 그렇게 기대어 있었다. 가까운 거리, 겨울 냄새 가운데 서로의 체향마저 느껴졌다. 조용히 놓인 뒤통수를 U의 손이 가볍게 쓰다듬었다. 이런 것으로 어쩔 줄 모르며 난처해하지는 않았다. 네가 애타게 갈구하는 것이 해묵은 애정이라면 그것 하나 건네는 일이 내게 그리 어렵지는 않다. 특히 네겐 유독 그렇다. 손윗형제만 셋인 U에게 E는 또 하나의 충족이고 욕심이 되었다.

“추워……”

U의 유한 목소리에 E는 조금 더 욕심을 냈다. 코를 훌쩍이는 다 쉰 목소리가 겨울바람 속에 흩어졌다. 추워? 발화를 한 번 반복한 U가 입고 있던 망토를 벗었다. 그의 온기를 가득 담은 망토자락이 떠는 이의 어깨 위로 내려앉는다. 얄쌍한 어깨를 붙잡고 제 쪽으로 조금 당겼다. 더 붙어도 괜찮아. 온기와 애정이라면 내게 많이 있으니까.

“E. 그래도 약은 먹어야지.”

“… 응?”

그 상황이 귀찮다거나 달갑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자꾸 열이 오르고 표정이 안 좋아지는 E를 더 두고 보는 것도 안 될 일이다. U는 부드러운 어조로 그를 달래어 일으켰다. 추운 날 창밖에는 눈이 내리는데 자신은 교복 와이셔츠와 조끼만을 달랑 걸친 채, 비틀거리는 몸을 망토로 감싸 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목도리까지 꼼꼼하게 여며 준다. 높이 묶은 적색 머리칼이 찬바람에 흩날렸다.

눈을 찌르는 앞머리를 걷어내고 식은땀을 닦아 주는 다정한 손길, 몸무게를 실어 기대어도 더 다가와도 좋다는 듯 끌어당기는 몸짓. 더 의지해도 돼, 우린 기억도 나지 않는 옛날 언젠가 약속했잖아. 우린 늘 그랬잖아, 그렇지?

눈발이 자꾸 흩날린다. 현기증 탓도 있었다마는 U의 발걸음이 기숙사로 향하는 것을 알고 있으니 자꾸 걸음이 늦춰졌다. 딱딱한 벤치보다야 포근한 침대가, 추운 복도보다야 포근한 기숙사 안이 여러모로 낫다지만 질질 끌리는 발걸음이 투명히 증명하듯 E는 지금 상대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E가 턱도 없는 어리광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U도 아마 눈치 챈 지 오래일 것이었지만, 굳이 밀어내려는 시도는 없다.

“그래도 병동으로 가는 것이 나으려나.”

어지러운 시야, 물 먹은 듯 몽롱한 감각들 틈에서도 U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리고 몸을 감싸주는 따듯한 다정함이 느껴졌다. E는 인적 드문 그 복도의 찰나에 기대어 서서 오랜 결핍이 해소된 듯한 허황된 착각에 빠졌다. 입꼬리가 희미하게 호선을 그린다. 기꺼이 어르고 달래어 비틀거리는 몸을 지탱해주던 이가 별다른 대꾸 없이도 병동 쪽으로 걸음하는 것을 알아차린다. 네가 출입할 수 없는 따스한 쉼터보다는 그곳이 나을지도…. 너는 옆에 있어 달라고 한다면 그래 주겠지. 묘한 확신이 들어 자꾸만 더 기대고 싶어졌다.

현기증에 기대어 마음껏 온기를 갈구할 수 있는 지금이 좋았다. 응, 약을 먹고 열이 내려 온전히 회복하고 난 다음이 아쉬워질 만큼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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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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