銀魂

긴히지, 개척적 운명론

2016.03.24. #Cherry65x64

UND by 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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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 중첩되면 운명이라고 하던가. 낭만이라고는 쥐꼬리만큼도 없는 카부키쵸의 거주민들이었으나, 사카타 긴토키와 히지카타 토시로의 ‘자칭’ 우연한 조우는 주변 사람들로서는 영 납득하기 어려운 횟수를 쌓아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운명 같은 비상식적인 개념이 아니고서는 그들의 은밀한 고의로밖에 해석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어느 쪽이든 간질간질하기 짝이 없는 어감이었기에 당사자들이 몸서리쳤음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사람들이 농을 섞어 둘의 만남에 의도성을 부여하려 들 때마다 그들은 진저리치며 인상을 일그러뜨리곤 했다.

  그렇기 때문에 운명이나 필연 따위에 한정하여, 사카타 긴토키와 히지카타 토시로의 대화 패턴은 퍽 정형화되어 있었다. 관련 화두를 입에 올리기가 무섭게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누가?!” 하고 소리를 빽 질렀다. 그 합창이 어찌나 정겨운지, ‘자칭’ 우연한 조우를 수백 번씩 지켜봐온 사람들은 “거 봐요, 이 자식들 역시 친하다니까?” 하며 끌끌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둘은 “어이가 없어서, 내가 왜 이딴 자식이랑…….” 투덜거리면서도 결국 슬그머니 의자를 끌어다가 합석하고야 마는 것이다. 이미 카부키쵸의 그 누구도 그들이 진짜 원수지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드잡이를 해대면서도 끝끝내 술잔을 부딪히고야 마는 꼬락서니를 너무나도 자주 봐왔기 때문이었다.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긴토키가 먼저 마시고 있던 선술집에 히지카타가 발걸음을 들인 것을 시작으로, 둘은 눈이 마주치자마자 겍, 하는 괴상한 탄성을 흘리며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거참 환장하겠네. 넌 어떻게 내가 가는 데마다 잘도 알고 쫓아온다, 진짜. 너까지 스토커 대열에 합승하는 거냐? 경찰의 본분은 역시 스토킹이지? 아예 이름을 바꾸지 그래, 스토킹구미로!”
  “미쳤냐?! 내가 할 게 없어서 네 녀석 따위를 스토킹하고 있게! 멋대로 남의 조직명이나 바꾸고 있을 시간에 네놈이나 무능사로 간판 갈아치우지 그래? 말이 좋아 해결사지 어차피 백수잖아? 사회의 기생충이잖아?”
  “사회의 바퀴벌레가 누구더러 기생충이래? 거무죽죽한 것들이 맨날 떼거리로 몰려다녀서는 세금이나 축내고 말야! 내가 피땀 흘려 낸 세금은 어디다 쓰셨나~? 오타에네 고릴라 발매트? 할망구네 단팥빵 입간판?”
  “제대로 세금도 안 내는 게 말 다했냐?! 하다못해 인간 발매트랑 인간 입간판으로 바꿔, 짜샤!!”

  마치 서로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긴토키와 히지카타가 왁왁 언성을 높였다. 주인장은 이 시점에서 이미 히지카타 몫의 술잔을 긴토키의 옆에 밀어두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 조직이 더 하잘것없는 해충인지’로 시작된 언쟁은 슬금슬금 주량 대결로 이어지려 하고 있었다. 저 유치한 말싸움이 자연스럽게 대작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일견 신비스럽기까지 했다. 이 자식 저 자식 하며 멱살을 잡다가도 어느 순간 보면 그새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는 것이다. 수백 번을 보았음에도 당최 어떤 맥락으로 흘러가는 사고회로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긴토키와 히지카타는 언제나 술내기를 빙자하여 호기롭게 술잔을 가득 채웠고, 그때마다 오래지 않아 곧장 진화되었다. 누가 이겼다고 판정하기에도 미묘한 차이로 두 주정뱅이는 얼굴을 시뻘겋게 붉힌 채 테이블에 철퍽 엎어졌다. 하여간 술은 그렇게 세지도 않은 양반들이 목소리는 더 커요. 아예 전화기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주인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양 여상히 수화기를 들었다. 이 역시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오늘, 고주망태가 된 한심한 어른 둘을 데리러 나오는 역할로 낙찰된 사람은 다름 아닌 카구라였다. 계속 번호를 헛누르다가 기어이 휴대폰 자판을 고장내버린 히지카타까지 들쳐 업고 그녀는 씩씩하게 가게를 빠져나왔다. 그러나 몇 걸음 못 가 카구라는 그들을 도로 내려놓아야만 했다. 만취하여 자꾸만 뒤척이는 어른 둘을 한꺼번에 옮기기에는 아무리 야토족이라도 제법 무리가 따르는 법이다…… 라기보다는, 사실상 귀찮았다는 쪽이 정확할 것이다. 카구라는 금세 뻐근해진 어깨를 붕붕 돌리며 긴토키와 히지카타를 대충 사다하루의 등에 던져두었다. 그녀의 영특한 애완동물은 배웅쯤은 어렵지 않게 성사할 수 있을 터였다.

  “사다하루, 토시 데려다주고 이따가 긴쨩 데려오라, 해.”

  애당초 어린이가 돌아다니기엔 너무 늦은 시각이었다. 졸음기가 담뿍 담긴 소녀의 목소리 끝자락에 하품이 매달렸다. 긴토키는 잠결에 사다하루의 털을 이불처럼 그러안았다. 술기운과 더불어 애완견의 익숙한 촉감이 바깥이란 인식을 모호하게 휘발시켰다. 카구라가 이미 멀찍이 사라진 것도 모르고 긴토키는 불 끄고 가라며 웅얼거렸다. 당연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으나, 때마침 다음 모퉁이서부터는 가로등이 없었다. 거대 개의 등은 여간한 침대보다도 더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취객들이 마음 놓고 잠들기에는 안성맞춤이 아닐 수 없었다. 긴토키와 히지카타는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그리고 한참 뒤에 그들이 눈을 뜬 장소는 해결사 사무소도, 신센구미 둔영도, 사다하루의 폭신폭신한 등 위도 아닌 어느 인적 없는 뒷골목이었다. 별안간 몰아치는 칼바람에 긴토키가 소스라치며 파드득 깨어났다. 그 기척에 덩달아 일어난 히지카타도 멍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비틀거리며 몸을 바로 세우자 으슬으슬한 기온이 등줄기를 쓸어내렸다. 어느덧 어스름이 가까워오는 새벽이었다. 봄이라고는 해도 아직 새벽바람은 쌀쌀했다. 어깨를 움츠리며 단 숨을 불어내자 미약하게나마 잔존하던 술기운이 단번에 날아갔다. 기억은 사다하루의 등짝에 엎어진 곳에서부터 끊겨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상황을 유추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사다하루 이 자식, 내일 아침밥은 쌀알 한 톨일 줄 알아라. 긴토키가 배신감에 사무친 목소리를 내었다. 히지카타는 망가진 휴대폰 자판을 신경질적으로 꾹꾹 눌러대고 있었다. 자칫하다간 아예 으스러뜨릴 기세였다. 닿을 곳도 없는 분노를 엉뚱한 데에 표출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으랴. 밤이 추운 만큼 단념도 빨랐다. 긴토키와 히지카타는 옷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어냈고, 말없이 걷기 시작했다.

  “……야, 너네 개는 도대체 뭐 하는 정신머리냐? 주인을 데리러 왔으면 둔영으로는 못 가도 최소한 해결사 사무소로 가야 하는 게 아니냐고.”

  히지카타가 불쑥 말을 꺼냈다. 긴토키는 불퉁하게 대꾸했다.

  “시꺼, 인마. 그나마 뒷골목에 드러누워 있던 걸 다행으로 생각해.”
  “다행이겠냐?! 그대로 계속 잠들었으면 얼어 뒈질 뻔했다고!”
  “오, 거봐. 완전 다행이네. 어쨌든 살았잖아? 너 핸드폰도 고장 났겠다, 만약 둔영으로 전화했는데 오키타 군이라도 받았어봐. 넌 100% 죽었어. 지금쯤 콘크리트랑 한 몸 되어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을걸? 자, 이해했다면 얼른 우리 사다하루랑 날 생명의 은인으로 모셔라.”
  “웃기시네, 내가 순순히 죽어줄 것 같아? 죽더라도 그 자식 발목 잡고 같이 뒈질 테다. 그리고 그 도S 왕자별 출신을 너무 얕보는 모양인데, 소고라면 분명 날 공구리하는 김에 네놈까지 한꺼번에 수장시킬걸. 생명의 은인은 이쪽이다, 네놈이야말로 소고랑 내 앞에 머리 박고 감읍해하라고.”

  발끈해서는 내뱉는 말이 실로 어처구니없었다. 물론 일찍이 긴토키가 꺼냈던 주장도 논리성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들 사이의 대화에서 그런 사소한 것들을 일일이 신경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긴토키는 일부러 기가 막힌다는 얼굴을 하고는 히지카타를 마구 비웃어주었다.

  “이 자식 좀 봐라. 네가 한 게 뭐가 있다고 내 생명의 은인인데? 엉? 결과적으로 핸드폰 망가뜨려서 전화 못 했을 뿐이잖아!”
  “네 녀석이 할 소리냐?! 애초에 너네 개도 뭘 했다고……!”

  실컷 싸우다가 넉다운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또 싸움질이었다. 그러나 히지카타가 본격적으로 언쟁을 시작하려던 순간, 그의 입술을 가로막듯이 무언가가 팔랑거리며 얼굴 위를 스쳤다.

  “음?”

  반사적으로 잡아채보니 벚꽃잎이었다. 연분홍빛 색채가 손바닥 속에서 가냘프게 옴짝거리고 있었다. 옆에서 들여다보던 긴토키도 하던 짓을 잊고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폈네, 벚꽃.”
  “……그렇군. 벌써 철인가.”

  히지카타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서서히 동이 터 오는 흐릿한 하늘 아래로 옅은 분홍빛이 점점이 붙박여 있었다. 그나마도 일부뿐이고 대개는 아직 꽃봉오리였다. 듬성듬성 앙상한 가지가 드러난 게 퍽 초라한 몰골이었다. 그래도 소담하게 피어난 한 송이 한 송이의 모양새는 제법 곱다. 저 망울들이 전부 개화한다면 의외로 이 삭막한 경관도 화려해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얼마 안 있으면 만개하겠네. 다들 꽃놀이니 뭐니 시끌시끌하겠어.”
  “뭐, 그렇지. 우리 대원들도 벌써부터 좋다고 들떠서는 술을 사들이고 있던데.”
  “그러고 보니 너넨 매년 한다고 했었지.”

  봄철이 무르익으면 신센구미에서도 단체로 벚꽃놀이를 빙자한 술판을 벌이곤 했다. 개화기가 다가왔으니 슬슬 이쪽도 일정을 조율해야 할 터였다. 조만간 야마자키에게 보고를 올리게 해야겠다고 히지카타가 생각하던 차였다.

  “우리도 올해 벚꽃놀이 할 거야.”

  마치 선언이라도 하는 어조였다. 히지카타가 의아함을 담아 흘끗 눈동자를 옮기자, 긴토키가 제멋대로 말을 이었다.

  “그때랑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자리에서 할 거라고. 특별석인지 뭔지 몰라도 확실히 거기서 보는 벚꽃이 제일이었거든.”

  그제야 짐작 가는 것이 있어 히지카타는 미간을 좁혔다. 요컨대 저희들의 연례행사를 이번에도 방해하겠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히지카타가 못마땅하게 타박했다.

  “뭐야, 지금 시비 거는 거냐?”
  “그러니까!!”

  여명 아래로 그가 입술을 달싹이는 모양새가 흐릿하게 어른거렸다.

  “올 테면 오라고. ……기다릴 테니까.”

  히지카타 토시로는, 잠시간 말을 잃고 긴토키를 오래토록 주시하였다. 그는 고개를 미묘한 각도로 숙이고 있는 탓에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카타 긴토키의 겸연쩍음만은 이상하리만치 똑바르게 제게 부딪혀오고 있었다.

  글쎄, 이런 것을 과연 우연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 녀석과는 정말 바라지도 않은 곳에서 예상치 못하게 부딪히는 경우도 왕왕 있었으나, 실상 사카타 긴토키와 히지카타 토시로의 ‘우연’은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세간의 소문처럼 적나라하게 약속을 잡아두고 시치미를 떼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늘 넌지시 틈새를 내보이고는 맞물림을 찾는 것이다.

  종종 엇갈릴 때도 있었다. 시그널을 오해한 경우도 있었고, 무시한 적도 있었다. 때로는 의도적으로 아무것도 표하지 않은 채 감출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맞닥뜨려야만 했던 수백 번의 ‘우연’을 넘어, 지금에 와서는 비로소 그들만의 온전한 ‘우연’이 만들어졌다. 긴토키는 히지카타가 오늘 비번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히지카타도 긴토키가 이 선술집의 오뎅을 간간이 찾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 하나 명확한 정보는 없었다.

  히지카타는 지금 긴토키가 흘린 말을 표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혹은 무시할 수도 있고, 일부러 피해갈 수도 있다. 어쩌면 그의 본의를 아주 부드러운 속내까지 파헤쳐 눈앞으로 끄집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카타 긴토키는 그만큼 적나라해져 있었다. 무엇을 고르든지, 선택권은 또 다시 히지카타에게 주어졌다. 하지만 무얼 망설이겠는가? 수없이 겹쳐진 우연들은 어느덧 단 하나의 방향만을 곧게 비추고 있었다. 히지카타 토시로는, 언제나 그랬듯이 그가 기다리고 있을 그 한 마디를 내어주면 되었다.

  우연도 필연도 아닌 이것을 명명한다면 정말 운명일지도 모르지. 이제는 지나치게 노골적인 형태가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히지카타가 픽 웃음 지었다.

  “바보냐? 거긴 우리 신센구미의 지정석이라고 했잖아. 기다려주는 건 이쪽이다.”
  “어느 쪽이든 별로 상관없잖아……. 까탈스럽긴.”

  긴토키가 툴툴거리며 찌뿌둥한 팔을 쭈욱 뻗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하늘하늘 벚꽃잎이 스치는 것만 같았다.

  “서로 양보하는 미덕 따위는 없을 게 분명하고……. 어쩔 수 없군. 이번에는 뭐라도 결착을 낼 때까지 계속하는 수밖에.”

  내용 자체는 담대하였으나 히지카타는 어디까지나 부드러운 면면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긴토키도 어쩔 수 없이 살짝 미소하고야 만다.

  “그거 승부가 나기는 하는 거냐? 얼마나 오래 붙어 있을 심산이야, 벚꽃놀이가 도중에 단풍놀이가 되어버리겠다고.”
  “뭘. 처음부터 그게 바라던 바였잖아?”

  한 번 맞물리면 함께 돌아가는 것이 순리일 터. 저 역시 적나라한 한 마디를 던져주자, 긴토키가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히지카타도 천천히 발걸음을 세우고는 반 바퀴 돌아 그를 마주보았다. 드문드문 피어난 벚꽃나무를 등지고 잠시간 시선이 교차했다. 히지카타가 천천히 손을 뻗자, 긴토키는 살짝 긴장한 듯이 얼굴빛을 굳힌다. 새하얀 머리카락 위로 손가락이 스칠 때까지도 그는 미동도 없이 얌전했다. 이내 히지카타가 그의 머리칼에 내려앉은 벚꽃잎을 떼어내서는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그제야 긴토키는 맥이 탁 풀린 얼굴을 하는 것이다. 히지카타가 짓궂게 웃었다.

  “날짜를 미리 일러줄 의리는 우리 사이에 없겠지? 해결사.”
  “…….”

  어차피 녀석은 제 비번부터 시작해서 신센구미의 여간한 일정은 두루 꿰고 있었다. 히지카타가 말하고자 하는 건 그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긴토키의 대답은 없다. 그의 귓가에도 꽃잎이 한 장 내려앉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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