銀魂

긴히지, 외로운 현대인과 현대묘를 위한 위로의 레시피

2016.05.05.

UND by 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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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유 님께 드립니다.

- 현대 AU

- 긴토키 고양이화



  어쩌면 변덕이었을지도 모른다. 저녁 식사로 해치우려 했던 참치 통조림에 불현듯 손이 가지 않게 된, 꼭 그 정도의 변덕. 현관문 앞에서 나직하게 울고 있는 고양이를 실내로 들이며 히지카타 토시로는 그런 생각을 했다. 동물을 향해 이렇다 할 애호심을 품어본 적은 이제껏 없었으나 그날은 유난히 빗줄기가 거셌다. 물에 빠진 솜뭉치 같은 고양이에게 베풀어줄 측은지심마저 없지는 않았다. 팔뚝에 얹히는 생명의 무게는 생각보다 훨씬 가벼웠기에, 히지카타는 제 변덕이 고양이를 한 주먹이나마 묵직하게 만들어주기를 바랐다. 우습게도, 고작 변덕 주제에, 그랬다.

  동물을 길러보기는커녕 잠깐 놀아준 경험조차 전무한 히지카타였다. 그가 건네줄 수 있는 거라고는 겨우 보드라운 담요와 참치 통조림 한 캔, 그리고 마요네즈뿐이었다. 수북이 쌓이는 마요네즈를 피해 끊임없이 버둥거리던 고양이는 통조림이 목전에 놓이자 순순히 담요에 파묻혔다. 당초에는 참치에 섞어줄 요량이었으나, 마요네즈 한 스푼이 참치와 뒤섞이려던 찰나 고양이가 하악거리며 털을 곧추세웠기에 별 수 없이 단념하였다. 고양이라는 생물은 천성이 마요네즈와 맞지 않는 건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동안 맞닥뜨렸던 모든 길고양이들이 마요네즈를 거부하던 기억을 회상하며 히지카타는 턱을 괴었다. 다소 실망스럽기는 했지만 뭐, 싫어한다면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저는 신경 쓰지 말고 편히 먹으라는 의미에서 살짝 거리를 벌려주자 흘끔흘끔 히지카타를 곁눈질하던 고양이는 이내 통조림을 싹싹 핥아 비웠다. 갸르릉, 담요 위로 몸을 굴리며 고양이가 울었다. 단조롭기 짝이 없는 울음소리인데도 이상하리만치 뚜렷한 만족감이 묻어났다.

  어느 정도 물기가 마른 고양이는 상상 이상으로 복슬복슬한 형상이었다. 새하얀 털뭉치가 날렵하게 히지카타의 허벅지를 타넘었다. 스치듯이 허벅지에 닿던 자그마한 두상의 감촉은, 지금 생각해보면 고양이 나름의 애착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히지카타가 미처 그 진의를 파악하기도 전에 고양이는 재빠르게 몸을 물렸다. 동물답지 않게 맹한 눈동자가 물끄러미 저를 담더니, 곧이어 순식간에 꼬리를 가로저으며 모습을 감췄다. 아, 잠깐……! 황망히 뻗은 손이 타이밍을 놓치고는 도로 내려앉았다.

  “……우유 정도는 더 꺼내줄 수 있는데.”

  냉장고에 굴러다니는 우유팩 몇 개인가를 머릿속으로 헤아렸을 때는 이미 고양이가 창문을 뛰어넘은 뒤였다. 뒤늦은 아쉬움이 한숨으로 터져 나왔다. 어지럽혀진 집안을 한 바퀴 둘러보고는, 히지카타는 미련 가득한 손길로 바람처럼 사라진 방문객의 흔적을 정리했다.

  반추해보면 기이하게도 시기가 꼭 맞물렸다. 이 또한 한 달쯤 전의 일이었다. 고양이가 훌쩍 떠나간 지 하루도 채 못 가, 이번에는 히지카타가 초청하지 않은 방문객이 집에 발을 들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목적은… 글쎄, 가정부? 거진 한 달을 겪어오고 있는 일이지만 아직도 명확한 저의는 읽을 수 없었다. 히지카타는 그―혹은 그녀―의 얼굴은커녕 대화 한 번 제대로 섞어보지 못했으니까. 상대는 매차 은밀히 침입하여 마치 제 것인 양 능숙하게 부엌과 냉장고를 헤집었다. 표면상으로는 흡사 도둑고양이었으나 그 여백에는 도리어 깜짝 선물처럼 저를 위한 무언가가 남겨져 있었다. 그러니까, 불법가택침입자가 자행하는 행위란 바로 히지카타의 식탁을 솜씨 좋게 차려놓는 것이었다. 이 불가사의한 식사는 심지어 현재진행형이었다.

  문제의 첫 밥상은 곳곳에 난무하던 시커먼 고양이 발자국들을 공들여 닦은 그 다음날이었다.

  혼자 살게 된 이후로 히지카타의 아침식사는 우유 한 잔으로 고정되었다. 때때로 빵이나 사과 따위가 더해질 때도 있었지만, 보통은 귀찮다는 핑계로 우유팩만 비우고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그런 만큼, 난데없이 따뜻한 김이 오르는 가정식을 목도해버린 히지카타가 한순간 제가 잠이 덜 깼는지 하는 허무맹랑한 의구심을 품는 것도 아주 비상식적인 사고는 아니었다. 히지카타는 잠시간 미간을 구겼고, 거세게 눈을 비비고는, 고개를 휘휘 저어 저희 집이 맞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경악했다. 꿈이라는 속 편한 몽상으로 마냥 도피해 있기에는 현실이 녹록치 못했다. 이성이 돌아오자마자 그는 허둥지둥 서랍부터 살폈다. 지갑과 통장을 비롯한 금품들은 누가 손을 댄 흔적도 없었다. 그때서야 히지카타는 겨우 안도했다.

  실내에는 더 이상 인기척은 남아 있지 않다. 반찬거리로 형태를 뒤바꾼 식재료들의 흔적과, 부엌에 남은 희미한 따스함만이 낯선 이의 방문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였다. 식탁 앞을 맴돌며 히지카타가 입매를 비틀었다. 그래서 이건… 뭘 의미하는 거지? 그보다 대체 누가? 멋대로 남의 집에 잠입해서는 밥만 차려주고 사라진다니,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무슨 집요정도 아니고. 머릿속으로 가까운 지인들을 하나하나 헤아려보아도 이렇다 할 사람은 짚어낼 수 없었다.

  일단 타메고로 형은 아니다. 외국으로 출장을 간 지가 몇 년째였다. 일이 바빠져서 올해는 귀국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불과 일주일 전에 통화했던 기억이 있다. 집주인 아줌마는 단연 논외고, 곤도 씨나 소고……도 아닐 것이다. 몰래 이런 일을 벌일 성격들이 아닌 것은 차치하더라도 그들은 요리를 못 했다. 더군다나 집 열쇠도 없고 말이지. 오키타가 열쇠수리공을 동원하여 겉보기만 그럴싸한 포이즌 쿠킹을 남겨놓았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도 고려는 해보았지만, 고작 이런 번거로운 과정을 위해 아침잠을 포기할 성실한 녀석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역시 면식 없는 범죄자의 소행이라는 건데. 조금씩 식어가는 밥상을 흘끗 곁눈질하자, 히지카타는 난처해진다. 집에 어떠한 손실도 없다는 점이 신고를 망설이게 했다. 저 스스로도 현실감이 없는 만큼 경찰들도 딱히 믿어줄 것 같지 않았다. 시계를 살피자 아직 10분쯤은 여유가 있다. 망설이다가, 의자를 빼내어 앉았다.

  “…….”

  자취생의 단촐한 냉장고에서 이렇게까지 다양한 먹을거리들을 끄집어낼 수 있다니. 요리 문외한의 눈에는 가히 기적적이었다. 고소한 향이 오르는 꽁치 소금구이가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았고, 사이드에 놓인 우엉조림과 감자 샐러드도 그 모양새가 정갈했다. 된장국에 담겨 있는 미역은 대체 어디서 찾아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우리 집에 미역 같은 게 있었던가?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고 히지카타는 낯선 집에 초대받은 손님처럼 두리번거렸다. 저는 몇 번씩 망치기 십상이라 프라이로 만족하곤 했던 계란말이도 이 자가 만든 것은 삐져나온 구석 하나 없었다. 자연히 젓가락은 거기부터 향했다.

  독 같은 건 없겠지. 계란말이를 집어 들고 히지카타가 미심쩍은 눈초리를 한다. 신선한 노란빛을 품은 계란말이는 적당히 부드러웠고, 또 적당히 폭신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설마 죽기야 할까, 그런 안일한 마음으로 히지카타는 계란말이를 베어 물었다. 계란 특유의 담백함과 달착지근한 미감이 혓바닥 위로 매끄럽게 녹아내렸다. 신중하게 입술을 오물거리던 히지카타의 눈이 무심코 동그래졌다. 이번에는 된장국을 한 입 마셨다. 살짝 달달한 감은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맛있었다.

  형언하자면 한없이 감격에 가까운 마음을 안고 히지카타는 도리 없이 냉장고를 열었다. 맛있는 음식을 보다 완벽하게 즐기기 위해서는 마요네즈가 빠져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러나 묘하게도 마요네즈가 놓여 있던 자리만이 텅 비어 있었다. 히지카타가 살풋 눈살을 찡그린다. 제 기억으로는 꽤 넉넉히 남아 있었을 텐데. 감자 샐러드에라도 넣은 모양이라고 흘러 넘기며 하는 수 없이 찬장을 열었다. 논 콜레스테롤이 끌리는 날이었지만 찬장에 보관해둔 ½하프마요로 만족하기로 한다. 노릇노릇하게 청색 비늘을 그슬린 꽁치 위로 한가득 마요네즈를 쏟아 붓자 재차 허기가 밀려들었다.

  이런 제대로 된 식사는 요 근래에는 정말 간만이었다. 곤도나 오키타와 마찬가지로 히지카타도 요리에는 영 재능이 없었다. 그런 만큼 집에서 해먹는 밥이라면 어디까지나 인스턴트, 또는 레토르트 식품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타인이 ―아마도― 저를 위해 차려준 음식은 그 온기만으로도 충분한 포만감을 선사했다. 소담하게 담겨 있던 그릇들이 비워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부른 배를 안고 만족스럽게 젓가락을 내려놓은 순간, 히지카타는 본래 나가야 할 시간을 훨씬 넘겼다는 것을 깨닫고는 튕기듯이 일어났다. 식사를 만끽하는 사이에 벌써 20분이나 늦어버렸다. 허둥지둥 그릇들을 개수대에 던져두고 외투를 걸쳤다. 급하게 뛰쳐나가는 와중에도 특유의 달착지근한 감미는 혀끝에 오래토록 감돌고 있었다.

  당시에는 단 하루뿐인 이변이라고 생각했던 그날의 식사는 다음날에도, 또 그 다음날에도 줄기차게 이어졌다. 히지카타의 아침식사는 두부와 함께 조린 소고기일 때도 있고, 잘 뭉친 오니기리일 때도 있었으며, 심지어는 가라아게가 올라온 적도 있었다. 비록 냉동식품이라지만 번거롭다는 점은 매한가지였다. 식사는 언제나 만족스러웠지만 꼭 그만큼의 부담감이 더불어 위장에 얹혔다. 요리의 대가로 적당히 사심을 챙기는 것도, 딱히 요구하는 것도 없다. 하물며 히지카타는 누군가에게 동정 받을 만큼 불우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원래부터 이래왔다는 양, 이해할 수 없는 당위성으로 상대는 매번 맛깔스러운 온기를 수놓았다.

  아무리 식사가 맛있다 한들 언제까지고 마냥 불법침입자의 존재를 묵인해줄 수는 없는 법이다. 상대는 언제나 흔적이 전무하여 솔직히 타인이 제 집에 들락거리고 있다는 실감조차 없었지만, 어쨌든 도의상의 껄끄러움이었다.

  밤잠이 얕은 편이었지만 히지카타는 한 번도 누군가가 부엌을 헤집는 기척을 느껴본 적이 없다. 아침상을 그렇게 거나하게 차리는데도 덜컹거리는 소리 한 번 못 들었다니 실로 어불성설이었다. 꼬리를 잡아볼 마음까지는 먹었으나 기실 전혀 절실하지는 않았다. 범죄자를 붙잡겠다는 취지에 비해 상당히 여유로운 태도로 히지카타는 아마추어적인 처사들을 시도했다. 한번은 죽도 하나를 쥐고 밤을 새웠고, 또 언제는 디지털카메라를 적당히 위장하여 촬영을 돌려보기도 했다. 손속이 어설픈 만큼 당연히 범인의 윤곽은 새끼손톱만큼도 뚜렷해지지 않았다. 상대는 히지카타가 잠복해 있는 시간대를 피해 방문하거나 카메라를 간단히 꺼버리는 둥 어렵지 않게 사각지대를 찾아냈다. 집주인 아주머니께 부탁해서 살펴본 근방 CCTV에서마저 수상한 인기척은 포착되지 않았더랬다.

  이따금씩 진지하게 신고를 염두에 둔 적도 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생각일 뿐, 끝끝내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사실 범인을 붙잡으려 드는 게 민망할 정도로 히지카타는 상대가 차려주는 아침밥을 꼬박꼬박 잘 챙겨 먹고 있었다. 그로서는 불가항력이었다. 오랜만에 맞이하는 가정식은 정말로 따뜻했고, 또 지나치게 맛있었으니까. 매번 남김없이 밥그릇을 싹싹 비우는 주제에 그 조리사를 감방에 처넣으려니 이래저래 양심이 쿡쿡 찔렸다. 마요네즈만 자꾸 어디론가 사라질 뿐이지, 이제까지 도난품도 없었고……. 애당초 혼자 사는 학생 신분에 금품이 있어봐야 뭐가 있겠는가. 이렇게 결론은 또 다시 단념으로 귀결되었다.

  불법가택침입자는 여전히 밥을 차렸고, 히지카타의 식비는 나날이 불어났다. 보다 다양한 요리를 맛보고 싶은 마음에 장을 볼 때마다 자꾸 이것저것 집어넣게 되는 까닭이었다. 언제나 단출하기 짝이 없던 영수증이 조금씩 그 길이를 늘여 갔다. 식재료가 다양할수록 그의 식탁은 이에 비례하듯이 풍족해졌다. 굴 소스와 함께 볶은 새우볶음밥 위로 마요네즈를 가득 뿌리면서―냉장고에 넣어두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곤 해서 아예 방 안에 챙겨두고 있다― 히지카타는 여태 없는 행복을 느꼈다. 인간의 3대 욕망을 식욕, 성욕, 수면욕이라고 일컫던가. 수면욕만 간간이 채워가던 삶에 별안간 끼어든 새로운 쾌락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달았다.

  그러면서도 히지카타는 종종 게릴라적으로 기습을 준비했다. 신고의 의향은 더 이상 없다지만 그래도 익명성의 이면은 여전히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제껏 단 한 번도 성공해본 적이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무익한 발버둥이었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면대면의 대체 수단으로 히지카타는 서면을 택했다. 편지글과는 조금 거리가 멀고, 실상 짤막한 메모에 가까웠다. 반쯤은 장난이었지만 나머지 절반은 진심이었다. 덜미가 전혀 잡히지 않는 범인에 대한 짜증도 어느 정도는 섞여 있을 것이고, 의도하는 바가 따로 있던 것도 맞았다. 요컨대 그가 시도한 것은 식단의 리퀘스트였다.

  「카레, 당근 빼고.」

  그렇게 다음날 아침식사는 히지카타의 요청이 십분 반영된 카레라이스가 되었다. 스스로도 뻔뻔하다는 자각은 있었으므로 히지카타는 사뭇 당황하였다. 들어줄 거라는 예상도 있었기에 메모를 쓴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무시하거나 아예 관둬버릴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고 있었던 탓이었다. 상대에게는 제 식탁을 차려줘야 할 의무가 추호도 없었다. 더군다나 히지카타가 남긴 쪽지는 명령조이기까지 했다. 당근이 빠진, 항상 그러하듯이 살짝 달착지근한 카레를 한 술 뜨며 히지카타는 기묘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마냥 일방적이던 행위에 소극적이나마 첫 교류가 오갔다. 무엇이든지 일단 반응을 이끌어내는 것이 목적이었던 만큼 히지카타는 고무되었다.

  약간의 변화를 유도하고자 했던 의도에 슬그머니 사리사욕도 얹어, 이후 히지카타는 다발적으로 요구사항을 쏟아내었다. 히지카타가 남기는 메모가 길어질수록 늘 가지런하게 놓이던 수저는 꼭 상대의 불만을 표출하는 수단인 양 마구 흐트러지곤 했다. 누가 고의적으로 탁 소리 나게 수저를 내려놓았을 때의 그 꼴이었다. 답장 한 줄 남기지 않는 주제에 실로 소심하기 짝이 없는 반항이다. 그러면서도 히지카타가 부탁한 사항들은 어떻게든 전부 접시에 담아내는 것이 가장 아이러니한 점이었다. 이런 소소한 반응들을 포착해내는 것이 제법 즐거워서, 종내에는 신메뉴의 개발을 종용하기까지 했다. 마요네즈 세 통을 전부 짜내어 수북이 쌓는 특색 넘치는 덮밥, 일명 히지카타 스페셜이었다. 그 어떤 갑작스러운 주문에도 재료만 있다면 잠자코 만들어주던 그(녀)였으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그리하여 마침내, 히지카타 토시로가 처음으로 돌려받은 답신은 이러했다.

  「넌 뭔 애가 그러냐?」



  이 대목에서 곤도와 오키타는 참다못해 배를 붙잡고 나뒹굴었다. 문자 그대로 포복절도하는 그들을 면전에 두고 히지카타가 머쓱하게 투덜거렸다.

  “……나도 지나쳤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그만 좀 웃지? 슬슬 쪽팔리거든? 다들 보잖아.”
  “아니,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푸흐, 너무 웃기잖아! 가택침입범한테 역으로 주문을 하질 않나, 심지어 그걸 퇴짜까지 맞고. 아무리 밥을 챙겨준다고는 해도 보통은 그래도 신고하잖아?”
  “뭐, 어지간히 식사가 맛있었나보죠. 혼자 살다 보니 목숨보다 밥이 귀해졌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몰래 밥 좀 차려놓고 독이라도 탈 걸 그랬네요. 청산가리부터 테트로도톡신까지 영양밸런스에 맞춰서 골고루 넣어줄 수 있는데.”

  어째 오키타는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투였다. 흘끔흘끔 히지카타 몫의 콜라를 들여다보는 것이 꼭 당장에라도 독을 탈 것만 같은 기세였다. 오키타의 눈길이 수상쩍어지기 전에 히지카타는 얼른 제 컵을 끌어당겼다. 원천봉쇄를 위해 얼마 남지도 않은 콜라를 깔끔하게 들이키고는 히지카타가 투덜거렸다.

  “퇴짜 안 맞았어. 이러니저러니 해도 만들어주던데, 히지카타 스페셜.”
  “신개념 츤데레입니까? 좋겠네요, 히지카타 씨는. 청산가리 스페셜 만들어주는 범죄자도 있고.”
  “뭐가 청산가리 스페셜이냐. 내 음식에 독 탈 만한 녀석은 세상에 너 하나뿐이거든?”

  눌러 쓴 글자 하나하나에 신경질이 묻어나는 주제에, 정작 그 메모가 놓여 있던 곳은 히지카타 스페셜의 바로 옆자리였다. 싱크대 근처에 널브러져 있던 텅 빈 마요네즈 통 세 개가 상대가 얼마나 성실하게 히지카타의 요청에 부응했는지를 방증하고 있었다. 히지카타는 더 이상 냉장고에 마요네즈를 보관하지 않았으므로 그동안 마요네즈를 어디론가 내버렸던 것도 필시 그 녀석의 소행이었을 것이다. 히지카타는 재차 기가 차서는 헛웃음을 흘렸다. 아니, 하기 싫으면 그냥 안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제게 강요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줄곧 제멋대로만 굴고 있으면서. 심지어 그는―말투를 보아하니 아마도 남자이다― 히지카타 스페셜 이후로도 끊임없이 식탁을 메워주고 있었다.

  한참을 열성적으로 폭소하던 곤도는 비로소 웃음기를 거두고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나저나 정말 괜찮겠어, 토시? 그 범인 아직도 못 잡은 거잖아. 지금까진 괜찮았다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혼자 살고 있는 만큼 더 조심해야지.”

  이제는 여차하더라도 우리가 달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의 말미에 야트막한 죄책감이 맺혔다. 그 이유를 아주 모르는 바가 아니었기에, 히지카타는 잠자코 고개를 가로저었다.

  타메고로가 외국으로 떠난 뒤, 혼자 살게 된 히지카타를 염려하여 제 신변을 돌봐주겠노라고 스스로 자청했던 곤도 이사오였다. 미츠바를 잃고 함께 상경한 오키타를 비롯하여 셋이서 생활한 지도 이제는 제법 세월이 길었다. 곤도도 오키타도 그다지 성실한 성격은 못 되었기에 솔직히 제가 그들을 돌보는 기분밖에 못 느껴본 것 같지만, 그래도 북적북적하니 즐거운 생활이었다. 그러나 근래에 집 계약이 끝나면서 상황이 일변하였다. 새 계약을 찾아 한동안 곳곳을 돌아다니던 곤도는 결국 비슷한 조건 하에 남자 셋이 생활할 만한 집을 찾는 데 실패했다. 난처해하는 곤도에게 먼저 나서서 집을 나가겠다고 선언한 것은 히지카타 본인이었다.

  제 쪽에서는 본래 생활해야 했던 양상으로 돌아가는 것뿐이기에 별반 망설임은 없었다. 그러나 곤도는 생각이 달랐던 모양이다. 타메고로에게 히지카타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직접 들었기 때문일까, 제가 충분히 자립할 만한 나이를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히지카타에게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괜찮다니까, 이래봬도 제법 오랫동안 검을 잡아온 몸이다. 여간한 장정 몇쯤은 어렵지 않게 때려눕힐 수 있어. 무엇보다 신고를 하고 싶어도 도통 물증이 없어서 말이지.”

  달리 말하자면 제게는 여전히 신고의 의향이 없다는 뜻이었다. 어려서부터 함께해온 만큼 그는 히지카타 토시로의 고집을 아주 잘 체득하고 있었다. 에둘러 표현한 거절의 의사를 재확인한 곤도는 이것으로 깔끔하게 설득을 포기했다. 대신에 몇 달간 주구장창 들어온 염려의 언어들이 또 다시 정수리 위로 내려앉았다.

  “……위험할 것 같으면 언제든지 말해. 죽도 챙겨들고 언제라도 찾아갈 테니까.”
  “맞아요. 걱정되니까 꼭 불러요, 히지카타 씨. 정 아침밥을 포기 못 하겠다면 차라리 제가 대신 차려드릴게요.”
  “네 녀석이 제일 걱정이다, 진짜.”

  물론 오키타 쪽은 염려와는 전혀 거리가 멀다. 식사만 차려주고 사라지는 불법가택침입범과 독을 차려주겠다며 기웃거리는 오키타 소고를 비교하자면 단연코 위험한 것은 후자 쪽이었다. “곤도 씨, 죽도보다는 은수저를 가져오는 게 내 안전에 더 도움이 될 것 같은데?” 히지카타가 농을 섞어 한탄하자, 곤도는 짐짓 오키타의 머리를 꾹 누르는 시늉을 하며 유쾌하게 파안하였다.

  “그러면 올해 생일선물은 자동으로 결정된 건가? 은수저 세트라니 이거 잔고가 텅 비겠는데. 소고, 한동안은 라면으로 연명해야겠다.”
  “뭐? 내 선물로 줄 거였어?”
  “진짜요? 저 라면은 싫은데… 어쩔 수 없네. 히지카타 씨, 자라나는 청소년의 건강을 위해 지금 당장 죽어주면 안 될까요?”
  “네놈이 독살시도를 관두면 해결될 일이잖아!!”

  욱하고 오르는 성질에 대뜸 손을 뻗자, 눈치 빠르게도 오키타는 날렵하게 트레이를 들고 몸을 빼냈다. 혀를 낼름 빼물고는 후다닥 쓰레기통 쪽으로 사라지는 다갈색 뒤통수가 얄밉기 그지없었다. 중학교에 진학하자 가뜩이나 속을 잘 뒤집어대던 오키타는 이제는 마치 제 성질을 긁기 위해 태어난 양 말발이 일취월장하였다. 저보다 한참 어린애를 상대로 매번 화를 내기도 영 민망했고, 사실 혼낸다고 제대로 들어먹는 녀석도 아니었다. 별 수 없이 오늘도 한숨만 푹푹 내쉬고는 히지카타도 주섬주섬 트레이를 정리했다.

  자리를 정리하고 가게 밖으로 빠져나오자, 오키타는 슬슬 학교로 돌아가야겠다며―그는 종종 점심시간에 몰래 빠져나와 곤도나 히지카타에게 점심을 얻어먹곤 한다― 교복 자켓을 걸쳤다. 한쪽 귀에 이어폰을 꽂고 선 오키타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히지카타 씨, 모처럼 생일인데 그 범죄자는 뭐 안 해준답니까? 왜 있잖아요, 케이크라던가.”
  “필담도 딱 한 번밖에 못 나눠봤는데 생일은 무슨……. 게다가 매번 얻어먹는 처지에 염치없게 어떻게 그러냐.”
  “범죄자한테 퍽도 예의가 바르시네요.”

  어처구니없는 양 실소하던 오키타가 불현듯 묘한 미소를 그려냈다.

  “뭐어… 그쪽도 히지카타 씨한테 뭐라도 받은 게 있으니까 그만큼 해주는 게 아니겠어요? 개다래나무라도 하나 놓아두면 이번에는 케이크와 마요네즈의 기적적인 개밥 콜라보레이션을 보여줄지도 모르는 일이죠.”
  “……거기서 개다래나무가 왜 나오냐?”

  반문은 사고회로를 채 거치지 않고 불쑥 튀어나왔다. 제 입맛에 대한 적나라한 폄하보다도 그 앞 대목이 신경 쓰였던 탓이었다. 오키타의 입매가 한층 더 깊게 팼다.

  “맥락상 생각해보면 제법 그럴듯하잖아요. 히지카타 씨 덕분에 구사일생한 고양이가 은혜를 갚기 위해 매일 아침 찾아오는…… 어디서 많이 본 스토리 아닙니까. <고양이의 보은> 같은 거요.”
  “넌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그런 소리를 하냐. 얼토당토않기는…….”
  “하지만 히지카타 씨도 조금쯤은 염두에 두고 있었잖아요? 그렇지 않고서야 밥 차려주는 의문의 불법가택침입자를 얘기하면서 구태여 고양이 얘기를 먼저 꺼낼 이유는 없겠죠.”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정곡을 찔린 탓에 히지카타는 움찔 입을 다물었다. 사실, 타이밍이 타이밍인지라 아주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집안 청소를 하면서 고양이 털이라던가 발자국 따위를 찾기 위해 눈에 불을 켜봤던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실내에는 고양이는커녕 들짐승이 출입한 흔적조차 전무했다. 깨닫는 동시에 허무해져서, 그는 빠르게 상식을 되찾고는 먼지떨이로 이 허무맹랑한 몽상을 떨쳐내곤 했더랬다.

  반박은 기어이 한 박자를 놓쳐버렸다. 뒤늦게 고개를 가로저으려 할 때는 벌써 오키타가 으흐흐 웃고 있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일견 소악마스러운 낯짝이었다. 이제껏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곤도도 이에 합류하여 음흉한 미소를 띠웠다.

  “토시, 그 나이에 꽤 순진하구나~.”
  “순진하네요, 히지카타 씨~.”
  “먼저 말 꺼낸 건 저 녀석인데 왜 내가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해?!”

  히지카타의 항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둘은 히죽거리는 면면을 유지했다. 특히나 오키타는 오랜만에 잡은 히지카타의 약점이 즐거워서 참을 수 없다는 것처럼 걸음걸이까지 한층 가벼워졌다. 통통 튀는 발걸음으로 횡단보도로 달려나가며 오키타가 손을 흔들었다.

  “어쨌든 히지카타 씨, 개다래나무든 강아지풀이든 잘 좀 꼬셔서 케이크 좀 받아오세요. 이어폰이 자꾸만 지직거리는 게 조만간 망가질 것 같거든요.”

  그럼 그렇게 알고, 전 케이크 안 삽니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선언하고는, 오키타는 순식간에 등을 돌리고 반대편으로 멀어져갔다. 당황한 곤도가 갈라진 목으로 그를 호명했을 때는 이미 신호등이 붉게 바뀐 뒤였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척척 걸어나가는 오키타를 몇 번인가 부르짖다가 곤도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저 녀석, 내가 그렇게나 말했는데……. 이마를 짚으며 곤도가 피곤한 듯이 중얼거렸다.

  “너무 신경 쓰지 마, 토시. 말은 저렇게 해도 분명히 사올 거야. 그렇겠지? 제발 그래야 할 텐데.”
  “대체 어느 쪽이야?”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리는 곤도의 목소리에는 이미 확신이 없었다. 아무래도 곤도가 직접 히지카타의 선물로 케이크를 사오라고 오키타에게 지시했던 모양이었다. 어차피 사오면 사오는 대로 골치만 아팠기에, 히지카타는 외려 안심하였다. 그가 지금껏 겪어온 오키타 소고라면 학교 과학실 비품을 털어서라도 정말 청산가리를 입수해올지 몰랐다. 실제로 한때 오키타는 히지카타의 물병에 설사약을 타려다가 발각된 전적도 있다. 그나마 미수에 그쳐서 망정이지, 심지어 그날은 전공시험일이었다! 히지카타가 경계를 곧추세우는 것도 마냥 과잉반응만은 아닐 것이다. 생일에 이렇다 할 의미를 부여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태어난 날에 장례까지 스트레이트로 뚫어버리는 건 너무 비참하지 않겠는가.

  “별로 선물 같은 건 필요 없어. 생일이 별 거 있나, 오랜만에 만나서 술이나 마시는 데에 의의가 있는 거지. 당신이랑도 한동안 못 마셨잖아?”
  “그래도 양손이 묵직한 쪽이 기분 좋잖아. 휴, 소고 녀석한테는 내가 잘 말해둘게.”
  “정말 괜찮다니까…….”

  걱정 받고 있는 건 분명 저임에도 왜 제가 그를 다독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괜스레 시무룩해진 곤도를 독려하고 있자니 극렬하게 피곤해졌다. 오후 수업이 없는 히지카타도 이쯤에서 얼른 집으로 돌아가는 갈림길에 섰다. 그제야 간신히 기력을 되찾은 곤도도 이내 경쾌한 면면으로 히지카타를 배웅해주었다. 내일 늦지 않게 오라는 곤도에게 설렁설렁 손을 흔들어 보이며 히지카타가 몸을 돌렸다. 쉴 틈 없이 밀려들던 과제도, 묵직한 부교재들도 없는 오래간만의 휴일이었다.

  그리고 악운이란 언제나 평화로운 날에야 드리우곤 했다.



  눈꺼풀을 올리자 묘하게 차가운 공기가 뺨에 닿았다. 히지카타가 천천히 상반신을 일으켰다. 아침 햇빛과 함께 쏟아지던 음식 내음이 오늘은 없었다. 히지카타가 밤을 새면서 보초를 서지 않는 이상은 꼬박꼬박 들르는 사람이었기에 그 이변은 예민하게 감지되었다. 오지 않았구나. 히지카타는 곧바로 직감하였다. 개인공간을 타인에게 내어주면서 생겨났던 이질감이 다시 사라졌을 뿐인데도 도리어 더 생경해져서, 히지카타는 문득 으슬거리는 팔뚝을 감싸 안았다.

  침실을 나오니 아니나 다를까 식탁은 텅 빈 채였다. 처음 나타났을 때 그러했듯이 언젠가 훌쩍 사라질 수도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갑작스러웠다. 차게 식어 있는 집이 낯설어 히지카타는 무심결에 투정을 입에 올렸다.

  “인사 정도는 하고 가지, 끝까지 얼굴 한번 안 비추냐.”

  그래도 한 달이 넘도록 같은 공간을 공유했는데 야속하기 짝이 없는 처사였다. 결국 히지카타는 상대에게 이렇다 할 보답조차 건네지 못했다.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려 그는 재차 식탁을 곁눈질했다.

  약속시간까지는 아직 세 시간 남짓 남아 있었다. 다소 이르지만, 집에 남아 있자니 자꾸만 기분이 어수선해져서 이대로 출발하기로 한다. 우유 한 컵을 들이킨 뒤 히지카타는 곧장 나갈 채비를 갖추었다. 지금은 곯아떨어져 있을 곤도와 오키타도 그가 도착할 때쯤이면 슬슬 이부자리를 정리할 터였다. 열쇠를 챙기다가 히지카타는 찰나 머뭇거렸다. 그 녀석이 볼 거라는 확신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 한 마디만은 꼭 전하고 싶었다. 메모지를 뜯어내고 고심하던 그는 천천히 글자를 새겼다. [그동안 고마웠다.] 받았던 것들에 비하면 한없이 짤막한 글귀였다. 과자나 사탕 따위의 간식들은 가진 바 없었기에 일단 손에 잡히는 대로 딸기 한 주먹이라도 올려두었다.

  어떤 경위로 저희 집까지 흘러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그가 준비하는 요리에 담겨 있는 것은 명백한 호의였다. 매일 아침을 생판 모르는 타인을 위해 소모한다는 게 얼마나 수고로운 과정인지는 히지카타도 알고 있다. 그런 주제에, 그가 오가는 한 달 동안에 단 한 번도 감사를 표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히지카타를 가장 불편하게 했다. ……이제 와서는 후회해봐야 전부 무용한 일이다. 사람의 선심을 무심으로 받아친 만큼 다시 돌아오리라는 기대조차 없었다. 그저 제가 정말로 고마워하고 있었다는 것만은 전해지길 바라며, 히지카타는 느릿느릿 집을 나왔다.

  자취방에서부터 곤도의 새 집까지는 꽤 멀리 떨어져 있다. 버스에 타면서 곤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나 연결이 되지 않았다. 휴일이니만큼 늦잠이라도 잘 거라고 여상히 넘기며 히지카타는 이어폰을 꽂았다. 이후 곤도와 통화가 이어진 것은 히지카타가 두 정거장쯤을 남겨두고 다시 통화를 시도했을 때였다. 수화기 너머의 그는 묘하게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미안. 전화했었어?]
  “괜찮아. 할 일이 없어서 조금 일찍 나왔는데, 아직 집이지?”
  [아, 그게…….]

  곤도가 난처한 듯이 말끝을 흐렸다.

  [지금 소고한테 사고가 났어. 미안하지만 지금은 좀 힘들 것 같은데.]
  “사고?”
  [교통사고야. 소고 녀석이 멋대로 네 오토바이를 끌고 나가서는 사람을 들이받았어.]

  뭐? 히지카타는 반사적으로 주머니를 뒤졌다. 정말로 열쇠 꾸러미 중 오토바이 키만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지금 사는 집에는 주차공간이 마땅치 않아서 히지카타는 곤도네 집 쪽에 오토바이를 두고 다녔는데, 오키타는 예전부터 그걸 드러내놓고 탐을 내곤 했었다. 그렇다고 설마 열쇠를 훔쳐내서는 그걸 냉큼 끌고 나갔을 줄이야. 히지카타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대체 어느 틈에 빼간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 망할 자식이 기어코 일 쳤군. 어떻게 된 거야? 상대는?”
  [초등학생쯤 돼 보이는 여자애야. 오른팔이 부러져서 전치 3주쯤 나올 것 같다던데.]
  “나 참, 3주로 끝났다니 그나마 다행이군. 나이도 어린데 그쯤이면 요행이잖아.”

  수화기 저편이 잠시 조용해지더니, 곤도가 황급히 말을 정정했다.

  [아니, 다친 건 소고 쪽이다. 아이 쪽은 다리만 조금 긁혔을 뿐이지 멀쩡해.]
  “엥? 소고가 쳤다며.”
  [글쎄, 나도 잘은 모르겠어. 소고 말로는 그 애가 달려드는 오토바이를 맨손으로 멈춰 세우고는 오토바이 째로 자기까지 집어 던졌다던데.]
  “……그 녀석 선 채로 꿈 꿨대? 아니면 당신이 취한 거야?”

  히지카타가 기가 찬 어조로 타박했지만 곤도는 어디까지나 진지했다. 애당초 이런 일로 실없는 거짓을 던질 사람도 아니었다. 곤도 역시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라 그저 헛웃음으로 대응하였다.

  [안 그래도 경찰들이 잔뜩 몰려와서는 술렁거리고 있어. CCTV 판독도 증언대로 나왔다니, 세상에 참 별 일도 다 있지.]

  황망해진 히지카타가 일순 말을 잃었다. 대체 신체구조가 어떻게 돼먹어야 오토바이에 치이고도 멀쩡할 수가 있지? 아니, 그것보다도 사람이 오토바이를 집어던지는 게 가능은 한가? 초등학생이라며? 건담 아냐? 순식간에 머리가 복잡해진 히지카타를 아는지 모르는지, 곤도는 어쨌든 아이가 무사한 게 무엇보다도 다행이라며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하여간 속 편한 사람이었다. 히지카타가 슬슬 뻐근해지기 시작한 뒷목을 붙잡았다.

  “하아……, 그래서 지금 어느 병원이야? 내가 갈게. 소고는 일어났어?”
  [아직. 그런데 지금은… 안 오는 게 좋을 것 같아. 상황이 조금 안 좋아서 말이다.]

  곤도가 별안간 목소리를 낮추어 소곤거렸다. 실외에서 듣기에는 다소 힘들 정도로 작은 목소리라서, 히지카타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있는 힘껏 청력을 집중해야만 했다.

  [그게, 아이의 아버지 되시는 분이… 자식 사랑이 많이 지극하신 것 같아. 금지옥엽 키운 자기 딸의 몸에 감히 상처를 냈다면서 아까부터 길길이 날뛰고 있거든.]

  소위 말하는 딸바보라는 얘기였다. 그 금지옥엽 키운 딸이 오토바이와 함께 사람을 집어던졌을 것을 생각하면 조금 어처구니가 없긴 했으나, 어쨌든 과실은 철저하게 오키타에게 있었으므로 히지카타는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보통의 여자아이였다면 틀림없이 중상이었을 테니 이쪽은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입장이었다.

  [어쨌든 합의를 봐야 하는데, 아버지 분께서 자꾸만 흥분하시는 바람에 대화가 도통 이어지지가 않아. 사실 아까도 머리카락을 한 움큼 뜯겼거든… 하하하. 그러니 토시, 넌 오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나야 뭐 이미 고릴라지만 너는 땜빵 같은 게 생기면 면목이 안 서잖아. 너한테까지 폐를 끼칠 수는 없지!]

  ……끼쳐도 되는데. 무심코 뱉어내버린 대꾸는 사고회로를 거치기도 전에 불쑥 튀어나온 것이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지나치게 솔직한 발언이라 히지카타는 제풀에 놀랐다. 그러나 히지카타가 미처 수습을 시도하기도 전에 푸헉! 하는 기괴한 비명이 상념을 단번에 휘발시켰다. 덜그럭거리는 소음이 커다랗게 귓전을 울렸다. 곤도 씨? 뭐야, 왜 그래? 당황한 히지카타가 휴대폰을 고쳐 쥐자, 대답 대신 누군가의 고함이 웅웅 울렸다. ‘네 이놈!! 네가 보호자지? 자, 봐라! 우리 카구라 다리에 흉터가 생긴다잖아!! 오로○인으로도 안 나을 거란다! 이걸 어떻게 책임질 거야!!’ 웬 중년의 쩌렁쩌렁한 일갈에 짓눌려 쩔쩔매는 곤도의 목소리도 어렴풋이 새어나왔다. 히지카타가 눈살을 찡그리며 귓가에 휴대폰을 바짝 가져다댔다.

  “……곤도 씨? 여보세요?”
  [토시, 이따가 다시 전화할게! 어쨌든 지금은 오지 마!!]

  잠시만요, 아버님! 제발 고정해주십시오……!! 가히 절규에 가까운 비명을 마지막으로 통화는 끊겼다. 고막을 찌르는 통화 두절음에 히지카타가 비로소 얼떨떨한 표정을 했다. 워낙 정신없는 국면이었지만,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던 그 중년이 피해자의 아버지라는 사실만은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과연 머리카락을 뜯겼다는 말은 허언은 아닌 듯했다. 박력만으로 보자면 머리카락이 아니라 아예 머리를 뜯어버리고도 남을 듯한 기세였다. 곤도가 저를 병원으로 부르는 것을 꺼리는 것도 이해는 할 수 있었다.

  다만 이성과 감성은 항상 따로 움직이는 법이었으니, 내심 실망해버리는 것은 히지카타의 의지로는 어떻게 조절할 수 없는 감정상의 문제였다. 저런 식으로 끊어버렸으니 다시 전화를 걸 수도 없었다. 본래 내려야 했을 정류장은 벌써 까마득하게 멀어졌지만, 어쩐지 기운이 쭉 빠져서 그냥 그대로 앉아 있었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상심의 역치가 너무 사소했기에 히지카타는 자조했다. 곤도는 자신에 이어 히지카타마저 머리카락이 쥐어뜯기는 상황을 방지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 곤도 나름의 배려였다. 알고 있었다. 그 정도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얼간이는 아니다. 그저, 그들과 저 사이에 선이 그어진 것만 같아 조금 쓸쓸해졌을 뿐이다. 곤도의 집을 나오고서부터 히지카타는 때때로 그런 생각을 했다. 같은 대학에 재학 중이니만큼 곤도와는 예전과 차이가 없을 만큼 자주 대면하고 있고, 오키타도 종종 불쑥불쑥 튀어나와서는 저를 성심성의껏 골려주곤 했다. 이전과 다름없는 빈도로 제게 시간을 내어주고 있는 그들에게는 정말로 감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도려내진 일상의 반절이 너무나도 커, 꼭 그만큼의 허전함이 뭉클거리며 차오르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일축하자면 그저 어리광이었다. 모처럼 생일이고, 직접 말할 것도 아닌데 생각쯤이라면 나쁠 것도 없지 않겠는가. 저도 사람이니만큼 가끔은 외로울 수도 있는 것이다. 아침을 거른 것이 너무 오랜만이기 때문일까, 버스를 세워야 하는데 그럴 기력이 없었다. 히지카타는 가만히 등받이에 머리를 뉘었다. 목적지를 잃은 버스는 시퍼런 무기력을 싣고 하염없이 종점을 찾아 헤맸다.



  온종일 거리를 배회하는 것으로 훌륭히 휴일을 낭비하고 나니 어느덧 저녁이었다. 실속 없이 교통비만 왕창 쓰고 돌아온 히지카타가 터덜터덜 집으로 발을 들였다. 텅 빈 집이 뿜어내는 냉기는 아무리 열쇠를 돌려도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다. 어두컴컴하고 차가운 집의 공기는 혼자 생활하는 사람에게는 동반자나 다름없었다. 현관문을 열고 신발을 벗는 그 순간에야말로 히지카타는 혼자라는 사실을 절감하곤 했다. 타인과 생활을 공유할 때는 알 도리가 없는 적막함이 폐부를 타고 한가득 차올랐다. 히지카타는 그 감각을 사무치도록 싫어했더랬다. 정체도 제대로 모르는 자의 침범을 단순히 요리가 맛있다는 이유만으로 끝끝내 용인하고야 만 것도 결국 이러한 맥락이었다. 가뜩이나 미안해하고 있는 곤도에게 더한 죄책감을 얹어주고 싶지는 않으니 입 밖에 낼 일은 결코 없을 테지만 말이다.

  어둠을 가르고 스위치를 찾아 팔을 뻗는 찰나, 묘한 향취가 코끝을 스쳤다. 동시에 우당탕거리며 실내에서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마냥 감상에 젖어있을 때는 아닌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대처는 신속했다. 현관에 세워둔 죽도를 움켜쥐고 히지카타는 곧바로 집안으로 뛰어들었다.

  “어떤 새끼야!!”

  그러나 허무하게도 소음의 장본인은 도둑 따위가 아니라 어디서 많이 본 고양이 한 마리였다. 북슬거리는 새하얀 털은 들고양이 사이에서는 제법 흔한 것일지도 모르나, 저 특유의 맹한 눈동자만은 제가 알고 있는 그 고양이만의 특색이었다. 넘어진 의자 옆에서 고양이가 숨을 헐떡이며―한 번도 고양이가 헐떡이는 모습 따위는 본 적이 없지만 어쩐지 그런 느낌이었다― 저를 올려보았다. 그제야 꼿꼿하게 치켜세웠던 긴장감이 얌전히 가시를 눕혔다. 치켜들었던 죽도를 도로 내려놓으며 히지카타가 눈을 깜빡였다.

  “너는 저번에…….”

  여긴 어떻게 들어왔지? 의문스레 중얼거리며 고양이를 안아 올리자, 고양이는 얌전히 몸을 내어준 채 시선을 회피했다―마찬가지로 고양이가 시선을 피하는 모습도 전혀 본 적은 없다―. 갸르릉거리며 가슴팍에 얼굴을 부비는 것이 퍽 간지러워, 히지카타는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고양이라는 생물은 개에 비해 그다지 애교가 많지는 않다고 들었는데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듯했다. 푹신한 등을 슥슥 어루만져주던 와중 의미 없이 식탁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와는 사뭇 다른 형상이었다. 아, 히지카타가 작게 탄식했다.

  혼자 먹기에는 제법 커다란 케이크가 얌전히 올라앉아 있었다. 멀찍이서도 익숙한 단내가 풀풀 풍기는 것이 삽시간에 후각을 마비시켰다. 케이크시트를 두툼하게 감싸 안고 있는 생크림 위로는 엉뚱하게도 마요네즈로 데코레이션이 되어 있었다. 명실상부 히지카타 토시로를 위한 케이크였다. 메모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나름 선물이라고 남겨둔 딸기만 역으로 케이크의 장식으로 변형되었다. 그것도 만들던 도중에 급히 중단했는지 두 알은 아직 그릇에서 구르고 있었더랬다. 그제야 제가 또 한 발 늦었음을 깨닫고 히지카타가 입술을 깨물었다.

  “젠장, 또 놓쳤잖아.”

  그것은 짜증이나 신경질이라기보다는 안타까움에 가까웠다. 본의는 아니라지만 거의 지척까지 다다랐는데, 바로 코앞에서 놓쳐버렸다. 게다가 고마움의 표시였던 딸기마저 고스란히 제 몫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가 정말 돌아올 줄 알았다면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정성들여 메모를 남겼을 텐데. 아니, 아예 처음부터 좀 더 그럴싸한 무언가를 준비했을 것이다. 뒤늦게 자책하면서 히지카타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넌 냄새 같은 걸로 사람 못 찾냐? 개가 아니라서 안 되나.” 큰 의미 없는 중얼거림이었으나 마치 알아듣기라도 하는 양 고양이가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하다하다 이제는 고양이와 대화까지 시도하는 제 꼬락서니가 못내 우스워 히지카타는 픽 웃고 말았다. 그래도 아예 떠나간 것이 아니라서 안심이다. 다음번에는 반드시 제대로 된 감사를 표해야겠다고 다짐하며 히지카타는 식탁으로 다가갔다.

  어쨌든 오늘 하루 처음으로 받은 축하였다. 제 생일은 용케도 알았다 싶었지만, 생각해보면 거실에 놓여 있는 달력만 흘끗 곁눈질해도 그쯤은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었을 터였다. 5월 5일, 커다랗게 동그라미를 쳐두지 않아도 한눈에 도드라지는 붉은 날이었다. 일부러 방기해둔 새벽 동안 실컷 집안을 쏘다녔을 테니 조금만 눈여겨봐도 선명하게 망막에 각인되었으리라. ……기왕 축하해주는 거라면 슬슬 면식을 트고 이 자리에 함께해도 좋았을 거라고, 히지카타는 문득 생각한다. 이제 와서 제가 신고 따위를 할 리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동시에 지금까지도 꿋꿋이 익명을 고수하는 것도 그답다고 느끼는 자신이 있었다.

  요리라는 것은 식재료와 함께 사람의 혼을 버무리는 과정일까. 그저 손길이 머물렀을 뿐인데도 히지카타는 때때로 식탁에 오른 음식에서 조리자의 성격까지 분명하게 느끼곤 했다. 한 움큼 혀에 담기는 그것은 필시 단맛이나 짠맛처럼 명확하게 분류되는 그런 감각은 아니다. 신중하게 젓가락을 놀리며 히지카타는 식탁에 오른 그를 하나하나 삼켜냈다. 꼼꼼하지는 않지만 다정하면서도, 고집스럽고, 녹아내릴 듯이 달착지근한. 이제껏 히지카타 토시로가 소화해낸 사람은 이런 자였다. 언어로는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그 기묘한 감미는 마치 사람간의 인연 같아서, 히지카타로 하여금 상대를 잘 아는 사람인 양 곧잘 착각하게 만들었다.

  든 자리가 도로 난 것처럼 허전한 것도 아마 그 때문이리라. 고양이를 내려주고 히지카타는 케이크를 탁자로 옮겼다. 청승맞게 홀로 셀프 해피버스데이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촛불까지는 켜지 않았다. 바닥에 앉아 고양이에게 손을 내밀자, 살갑게도 제 무릎 한가운데에 폭 뛰어들어서는 골골거리며 자리를 잡는다. 규칙적으로 호흡하는 따끈따끈한 온기는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위안이었다.

  “생일을 고양이랑 단둘이 보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심지어 한 달 전에 통조림을 준 것 외에는 이렇다 할 인연도 없는 들고양이였다. 곤도와 오키타랑 보내기로 했던 하루가 이렇게 어그러질 줄은 누가 알고, 이 고양이가 이 집을 다시 찾게 될지도 누가 알았으랴! 비틀리고 비틀린 하루의 끝은 고양이와의 케이크 커팅이었다. 본디라면 알코올에 간을 절이고 있었을 테니 그 건전함이 가히 천지차이였다. 히지카타가 케이크 한 조각을 큼지막하게 잘랐다. 너도 한 입 줄까? 특별히 마요네즈가 담뿍 얹힌 부분을 선별하여 코앞으로 내밀자, 고양이가 질색을 하고는 주춤 물러섰다. 하기야 고양이는 케이크 같은 건 못 먹겠지. 포크의 방향을 제 입으로 선회하니 그제야 고양이도 긴장을 풀고 편안하게 늘어졌다.

  본래 계획했던 것들은 모조리 무너졌지만, 이것은 이것대로 나쁘지 않다. 오롯이 혼자여야 했을 밤의 종막을 함께 닫아주는 생물이 있었다. 곁에서 온기를 전해주고 있었다. 달달한 케이크과 마요네즈, 그리고 복슬복슬한 고양이 한 마리. 우울해진 사람을 위로하기에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왜 사람들이 그렇게 반려동물을 찾는지 이제는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야앙, 하품하듯이 길게 우는 고양이를 품에 안으며 히지카타가 속삭였다.

  “……머물 곳이 없다면, 나랑 같이 살래?”

  너 하나 정도는 책임질 수 있어. 다소 충동적인 제안이었지만 기실 히지카타가 무엇보다도 원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에게는 온기가 필요했고, 고양이로부터 받았던 위안을 돌려주고도 싶었다. 품 안에서 비비적대던 고양이가 빼꼼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나 그저 멀뚱히 코끝만 씰룩거릴 뿐 이렇다 할 반응은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애당초 고양이가 인간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제가 쓸쓸하긴 했던 모양이라며 히지카타는 실소했다.

  그러다가 별안간, 묵직한 무게감이 히지카타를 뒤로 나자빠뜨렸다.

  윽, 바닥에 머리를 찧은 탓에 히지카타가 낮게 신음했다. 인상을 찡그리는 그의 가슴팍 위로 고양이가 사뿐히 발을 디뎠다. 이상하리만치 여유작작한 형상으로 고양이는 붉은 안광을 태웠다.

  “네가 날 감당할 수 있겠어?”

  귓가에 닿는 목소리는 틀림없이 사람의 것이었으나, 이 집에서 음성을 낼 수 있는 생물체라고는 저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고양이밖에. 황망해진 히지카타가 입을 쩍 벌리는 사이에 고양이는 순식간에 늘어난 무게만큼 제 부피를 키워갔다. 눈꺼풀이 여닫히는 그 짧은 찰나에 새하얀 고양이는 어느덧 회색빛이 도는 백발의 사내로 변모해 있었다. 썩은 동태 같은 느슨한 눈은 얼핏 보기에도 조금 전의 고양이와 쏙 빼닮은 형상이었다. 히지카타의 위에 올라탄 채로 그는 짓궂은 미소를 매달았다.

  “이야, 친히 거둬주신다면야 나야 감사하지. 그동안 몰래몰래 훔쳐 먹은 것도 꽤 됐겠다, 얻어먹은 것도 있겠다. 게다가 넌 가만 내버려두면 마요네즈만 빨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뒷목 잡고 쓰러질 것 같았으니까. 지금처럼 상부상조하며 잘 살아보자고. 응?”
  “어, 어……?”
  “그래도 넌 진짜 심하더라. 그렇게 마요네즈가 좋냐? 하루 한 번 꼬박꼬박 냉장고에서 빼버리는데도 아주 집안 곳곳에서 튀어나와요. 그리고 뭐? 히지카타 스페셜? 별 희한한 걸 주문하고 앉았어. 그런 건 고양이는커녕 개도 안 먹어, 짜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온갖 투덜거림이 가뜩이나 정신없는 판에 넋을 쏙 빼놓았다. 휘몰아치는 불평의 향연에서 히지카타가 여전히 얼어붙어 있자, 이번에는 붉은 눈을 빙긋이 휘며 그가 말을 툭 뱉어냈다.

  “긴토키.”
  “응?”
  “내 이름. 앞으로 한 집에 살 텐데 이름쯤은 알아두는 게 좋지 않겠어?”

  너는? 별안간 날아든 질문에, 얼떨결에 히지카타도 통성명을 해버렸다. 스스로를 긴토키라고 소개한 사내는 히지카타, 히지카타, 하고 중얼거리며 천천히 제 이름을 곱씹었다. ……히지카타 토시로. 머릿속에 주인의 이름을 단단히 각인하고는 긴토키가 웃었다. 이윽고 그는 대뜸 고개를 숙여 히지카타의 볼을 할짝 핥아올린다. 까슬까슬한 감촉이 생경하게 등줄기를 훑었다. 그제야 어딘가로 빠져나가 있던 이성이 강제적으로 뇌리에 붙박였다. 뒤늦게 소스라치며 히지카타가 그를 걷어찼다.

  “으악!! 뭐, 뭐, 뭐야!”

  유연한 몸놀림으로 긴토키는 쉬이 발길질을 피해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일어서서는 집안 곳곳을 둘러보는 것이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 히지카타 군. 침실은 저기?”
  “어? 어어……. 응?”
  “침대 좀 작네. 이불 한 채 더 있지?”

  히지카타가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이 난데없는 동거인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가 된다는 것을 히지카타가 깨닫기까지는 조금 더 이후의 일이다. 긴토키는 만족스러운 낯으로 이젠 제 집이 된 실내를 배회했고, 그의 등 뒤에서 눈에 익은 꼬리가 살랑거리는 모양새를 목도하고서야 히지카타는 마침내 현실을 인식했다. 그랬다. 그가 집으로 들여버린 고양이는, 불법가택침입자는, 익명의 조리사는 터무니없이 뻔뻔한 작자였던 것이다.

  일생에 다시 없을 유별난 생일선물을 받아버린 것 같다. 이것이 악운의 절정일지 또는 새로운 전환점일지는 아직 지켜봐야 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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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쓸데없이) 내용이 긴데 뭔가... 굉장히 듬성듬성하네요. 그래서 부연을 붙입니다 엉엉엉

1. 히지카타는 아직 모르지만, 사실 히지카타네 베란다 쪽 구석에는 고양이가 간신히 머리를 들이밀 수 있을 만한 개구멍이 하나 있습니다. 긴냥이는 히지카타한테 통조림 얻어먹기 한참 전부터 그곳을 통해 히지카타의 먹을거리를 축내곤 했어요. 근데 히지카타가 냉장고에 별로 신경을 안 써서 젠젠 모름.

2. 고양이는 인간용 음식을 먹으면 해롭다고는 하는데(ex. 통조림, 우유 등) 긴냥이는 변신고양이니까(...) 괜찮은 걸로 치기로 했어요.

3. 오키타는 곤도의 성화에 못 이기고 케이크 사러 갔다가 사고가 났습니다.

4. 타메고로는 두세 시간쯤 후에 히지카타에게 전화로 축하를 건넵니다. 시차 때문에 늦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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