銀魂

긴히지, 절체절명

2016.06.25.

UND by 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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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히지 트친오락관

- 하나하키 소재

 


  세상은 바야흐로 사랑을 앓고 있었다. 관념적인 의미가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남모르게 품고 있던 감정은 어느 순간 구체적이고도 생동적인 형태를 얻어 피어났다. 둥근 봉오리로 웅크린 그것이 한껏 만개하는 순간, 사람들은 꽃잎을 토했다. 붉고 푸르고 노랗고 흰 연약한 이파리들이 하늘하늘 에도의 거리를 수놓았다. 혀끝에 엉기는 쌉싸래함은 그 향취만큼이나 짙어, 제 안에 뿌리내린 감정을 직시하기에는 끔찍하도록 효과적이었다. 아무도 이 병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발원지가 어디인지를 알지 못했다. 다만 터미널을 흘끗 곁눈질하고는, 또 우주에서나 온 거겠지─ 하고 여상히 중얼거리는 것이다. 추후 수많은 학자들이 이 꽃이 우주 식물임을 증명하면서 그들의 지레짐작은 그대로 적중하였다.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을 품고 있는 자들의 체내에서는 꽃이 피어난다. 케케묵은 사랑의 꽃잎을 토해내는 질병, 이름하여 하나하키 병(花吐き病)이었다.

  그리고 그 빌어먹을 병의 피해자 중 하나는 현재 질겅질겅 꽃잎을 씹어 삼키고 있었다. 사랑이 꽃으로 피어난다니, 퍽도 로맨틱한 이야기다. 숙주의 몸에 기생하여 영양분을 빨아먹는다는 점에서 보면 기실 기생충이나 진배없지 않은가. 사카타 긴토키, 서른을 목전에 두고 있는 백수 사무라이는 제 사랑의 표상에 대해 신랄한 평가를 내렸다. 그도 그럴 것이, 지구의 이산화탄소 흡수에 아주 약간 기여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개인에게는 뭐 하나 득 될 점이 없었다. 하나하키의 꽃은 숙주의 목숨을 위협할 만큼은 아니어도 몸이 노곤해질 정도로는 기력을 앗아갔고, 휘날리는 꽃가루로 인한 눈물콧물과 재채기는 부차적인 피해였다. 마른기침과 함께 튀어나오는 꽃잎도 성가시기 짝이 없었다.

  “……슬슬 치료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

  코가 새빨갛게 부어오른 채로 살아온 지도 무려 세 달째였다. 쓰레기통에 꽃부리를 퉤 뱉어내고 소파에 엎어지면서 긴토키가 중얼거렸다. 바닥에 널린 꽃잎들을 쓸어 담던 신파치가 반색하며 고개를 들었다.

  “드디어 그럴 마음이 든 거예요? 잘 생각했어요, 긴토키 씨! 저도 매일같이 이거 치우는 거 정말로 고역이었다고요. 이젠 죽도보다도 빗자루가 더 손에 익을 지경이에요, 나 원.”
  “나도 꽃가루 알레르기는 이제 지겹다, 엣취! 으으… 긴쨩 때문에 어미가 자꾸 재채기로 바뀌잖아. 내 코도 내 아이덴티티도 슬슬 한계다, 해.”

  신파치와 카구라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모아 아우성쳤다. 쏟아지는 불평불만을 등지고 긴토키는 말없이 TV에 시선을 고정했다. 가리가리 별 대사의 입국을 환영한다느니 뭐니 열심히 떠들어대는 하나노 아나운서의 뒤편 한구석에 히지카타 토시로, 그가 있다. 일렬로 늘어선 검은 제복들 사이에서도 히지카타의 모습만은 유독 도드라지게 시야에 박혔다. 잘 보이지도 않는 흐릿한 화면에서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는 것이 과연 사랑병자다웠다. 사랑병자라, 젠장. 제 상태를 표현하는 데 이보다 적합한 칭호가 또 있을까. 긴토키는 내심 쓴웃음 지었다. 언제까지 이 기가 막힌 네이밍을 달고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길게 한숨을 불어내며 TV를 껐다. 히지카타 토시로의 잔상을 대체하듯이 신파치와 카구라의 반짝반짝한 눈동자가 눈앞에 드리웠다.

  집안에 넘쳐흐르는 꽃잎으로 고통 받은 것은 비단 긴토키만은 아니었다. 긴토키의 동거인들에게도 그 피해는 고스란히 넘어왔으니, 기실 그의 무사쾌유를 누구보다도 간절히 소망한 것은 오히려 신파치와 카구라일지도 몰랐다. 세 달 가까이를 꽃잎에 파묻혀있다 보니 아이들은 이젠 푸른색 비슷한 것만 보아도 노이로제를 호소했더랬다. 지체 없이 긴토키의 질병을 치유하고 싶다는 염원으로 신파치와 카구라가 두런두런 머리를 모았다.

  “그럼 이제 토시 찾아갈 거냐, 해?”
  “하나하키는 고백해야 낫는 병이라면서요.”

  하나하키의 가장 정석적인 치료법은 사랑의 성취이나, 역으로 사랑을 포기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사람의 심부에서 서식하는 강력한 생명력에 비해 하나하키의 꽃은 의외로 섬세했다. 감정을 자양분으로 자라는 만큼 그것의 활력은 숙주의 심리상태에 크게 좌우되었고, 때문에 마음이 정면으로 거부당할 때면 그 상처로 인해 쉽사리 시들고 마는 것이다. 하나하키의 보편적인 치료법이 고백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이 때문이었다. 대답이 승낙이든 거절이든, 결과적으로 꽃은 수그러들 터이니.

  좋아한다는 한 마디로 충분했다. 딱 한 마디면 끈질기게 목구멍으로 치미는 꽃에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러나 사카타 긴토키는 그 간단한 해결법에 결코 손을 대는 법이 없었다. 신파치가 수북이 쌓인 꽃잎들을 제 키만한 자루에 꾹꾹 눌러 담을 때도, 카구라가 죽어라고 기침하며 새빨개진 흰자위로 괴로워할 때도, 심지어 아이들의 유도신문에 넘어가 짝사랑 상대를 토로해버린 때마저도 마냥 고집스레 고개를 가로젓던 긴토키였다.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는 몰라도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긴토키가 내놓은 해답은 또 뜻밖의 것이었다.

  “고백 안 해.”
  “뭐?”
  “네?”

  아이들이 무심코 되물었다. 긴토키는 다시 한 번 진중하게 선언하였다.

  “안 한다고. 제초제 먹을 거야.”
  “저기, 미쳤어요?”
  “완전히 돌았다, 해.”
  “그라목손 같은 걸 들이키고 뒈져버리겠다는 뜻이 아니야, 요 녀석들아. 저기 헤도로네 꽃집 옆에 새로 생긴 병원 있지? 거기서 하나하키 전용 제초제를 판매한다지 뭐냐.”
  “그 폐가 같은 허름한 건물이 병원이었어요?”
  “차라리 그라목손이 더 안전할 것 같다, 해.”

  어째 입을 여는 족족 면박만 들어오는 것 같다. 그러나 제 눈에도 병원이 미덥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기에 긴토키는 반박하지 못하고 말을 줄였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고, 아이들은 은근슬쩍 엇나가는 긴토키의 시선으로부터 어렵지 않게 그의 진의를 읽어낼 수 있었다. 이쯤 되자 그저 측은할 따름이었다. 신파치와 카구라는 한심함과 안쓰러움이 반반씩 뒤섞인 오묘한 눈길로 긴토키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동정 어린 눈동자가 긴토키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카구라가 한숨을 폭 내쉬며 긴토키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렇게까지 고백할 자신이 없냐, 해? 손잡고 같이 가줄까?”
  “네가 내 엄마냐?!”

  짜증스레 손을 쳐낸 긴토키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니들이 뭐라 해도 이미 사버렸으니까 무를 수도 없거든? 방식이야 어찌 됐든 꽃만 없애면 되잖아. 물이나 좀 가져와봐.”

  뭐, 그야 그렇지만요……. 말끝을 흐리던 신파치가 이내 순순히 물 한 잔을 떠왔다. 그 어떤 말로도 긴토키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 와서 설득될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이 성가신 병을 삼 개월이나 질질 끌어오지는 않았겠지. 옷소매에서 약봉투를 끄집어낸 긴토키가 알약 서너 알을 손바닥 위에 털어냈다. 사랑의 절멸을 선언하는 순간이었다. 조금 안타까워졌는지 카구라가 “긴쨩, 지금이라도 그라목손으로 바꾸지?” 하며 그를 만류하였으나―만류라고 믿고 싶었다― 이 또한 묵살 당했다. 긴토키는 보란 듯이 단번에 약을 집어삼킨다. 식도를 타넘는 쓰디쓴 맛에 그가 진저리쳤다.

  이것으로 마지막이다. 이 지긋지긋한 꽃도, 역류하는 미련도.

  하나하키의 치유가 사랑의 종언을 판정하는 것은 아니다. 흐무러지는 것은 그저 표면적인 현상에 불과했다. 그 증거로 긴토키는 약을 넘기는 순간, 가장 먼저 이제는 히지카타를 만나러 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으니까. 시도 때도 없이 울컥울컥 올라오는 꽃을 품고서는 히지카타를 만날 수 없다. 짝사랑 상대가 눈앞에 있는데 이 역동적인 식물이 얌전히 있을 턱이 만무하지 않은가. 긴토키는 자력으로 꽃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오랜 기간 응어리진 꽃뭉치를 끄집어내 히지카타에게 건네줄 수도 없었다. 무엇 하나 확실하게 잘라내지 못했던 그는 약물의 힘을 빌려 모르는 체 흙을 덮어버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약이 목구멍으로 넘어간 이상 되돌리는 것도 불가능하다. 남모르게 지속될 긴토키의 짝사랑을 염려하기보단 차라리 병의 쾌차를 축하하기로 마음먹고 아이들이 종알종알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괜찮아요, 긴토키 씨? 상태는 좀 어때요?”
  “꽃이 막 죽어가는 느낌이 드냐, 해?”
  “잘 모르겠는데……. 욱, 왠지 메스꺼워.”

  약효가 돌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연차 물을 들이키고는 긴토키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의사는 30분만 있으면 완벽하게 꽃을 죽일 수 있을 것이라며 호언장담하였다. 그러니 이 30분간의 속앓이는 제 안에 터를 잡은 식물의 마지막 발버둥인 셈이다. 간헐적으로 치미는 구역질을 애써 내리누르며 긴토키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신파치와 카구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엥, 갑자기 어디 가세요?”
  “그 뭐냐… 약을 먹었으니 효과가 있는지 확인하고 와야 할 거 아냐.”

  아무도 물은 적 없는 변명이 서투르게 입 안에서 뭉그러졌다. 괜스레 큼큼 헛기침이 터졌다. 신파치와 카구라는 일순 조용해졌다가, 곧이어 파삭 인상을 구겼다. 이제는 징글징글하다는 양 카구라가 친히 엉덩이를 걷어차 그를 집 밖으로 내쫓아주었다. 부츠도 제대로 못 신고 긴토키가 계단 아래로 벌렁 나자빠졌다.

  “역시 그라목손을 먹였어야 했는데.”
  “댁 진짜 병이에요, 병.”

  귀청이 떨어져라 문이 닫혔다. 잔류하는 목소리만이 매정하게 메아리쳤다. 멍하니 위층을 올려다보던 긴토키는 뒤늦게 욱신거리는 허리를 부여잡았다. 으그그극, 신음성이 절로 샜다. 간신히 난간을 붙들고 무릎을 피며 긴토키가 툴툴거렸다. 아니, 병이라는 걸 알면 좀 더 상냥하게 대해달라고. 누구는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어쩔 수 없는 거야, 불가항력이라고! 그러나 아무리 자기위안해도 솔직히 굉장히 우스운 꼬락서니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짝사랑 때문에 걸린 병을 치료하겠답시고 약까지 받아놓고는, 복용하자마자 가는 데가 그가 있는 곳이라니. 제 감정이지만 참 노골적인 직진뿐이었다.

  병도 이 정도면 중증이라며 긴토키는 스쿠터에 올라탔다. 도리 없이, 목적지는 터미널이었다.



  푸확, 도시 한가운데에서 꽃무리가 드높게 치솟았다.
  시야가 푸르게 흩어졌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 건지.’

  히지카타 토시로, 현재 젖 먹던 힘을 다해 전력질주 중인 신센구미의 귀신부장은 문득 회의하였다. 매일같이 온갖 사건사고가 터지는 에도라지만 살다살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타성他星의 대사를 경호하러 왔다가 꽃에 쫓겨 달아나는 중입니다, 라니. 개연성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터무니없는 문장이었다. 물론 가장 터무니없는 점은 이 문장에 터럭만큼의 거짓도 없다는 점이다. 흙 한 줌 없는 터미널 내부에 해일처럼 꽃이 밀려들어오는 광경은 일평생 잊지 못할 장관이리라. 그리하여 신센구미는 저희들을 집어삼킬 기세로 무섭게 번져드는 꽃들을 피해 꽁무니 빠지게 내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공권력이란 실로 무상하였다. 높으신 분들은 진즉에 헬기 타고 빠져나갔는데 이쪽만 죽어라 발로 뛰고 있고. 일반시민들을 전부 대피시키고 나니 터미널에 남은 자는 어언 신센구미뿐이었다. 그나마 터미널 중심부에서 대기하고 있던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자그마한 위안이 되었다.

  공격적으로 뿌리를 뻗는 꽃을 뛰어넘으며 직각으로 경로를 꺾었다. 조금씩 출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희들의 도주를 인식하였는지 식물 줄기가 출구를 틀어막으려는 양 스물거리며 움직였다. 히지카타는 욕설을 짓씹었다. 하나하나 번거롭게 하기는! 그가 단번에 발도하여 커다랗게 십자를 그렸다. 우글우글 몰려든 식물들을 사방으로 베어내자 빠듯하게나마 틈새가 생겼다. 조그마한 구멍을 억지로 밟아 넓히는 것으로 신센구미도 가까스로 터미널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바깥 공기가 탁 트였다. 온갖 잡음들이 시끄러이 밀려들었다.

  “……이쪽은 현장, 현장의 하나노 아나운서입니다! 현재 터미널은 걷잡을 수 없이 증식하고 있는 의문의 식물에 의해 점령되어…….”

  털털거리는 헬리콥터 소리, 사람들의 비명 소리, 카메라의 셔터음, 아나운서의 방송 멘트가 뒤섞여 쟁쟁하게 귀를 울렸다. 가장 먼저 맞닥뜨린 자는 아까 전까지 터미널 안에서 대사들의 입국 장면을 방송하고 있던 하나노 아나운서였다. 언론인답게 탈출한 직후에도 자리를 피하지 않고 마이크를 쥔 모양이었다. 그녀가 호들갑스럽게 터미널을 손가락질했다.

  “봐 주십시오, 여러분! 저 기이한 광경을! 마치 하나의 생명체인 것처럼 꽃의 무리가 터미널을 두르고 있습니다. 저것은 정말로 식물이 맞는 걸까요? 저것의 정체는 과연…… 앗, 신센구미입니다! 특수경찰 신센구미가 드디어 전면적으로 나섰습니다!!”

  새로운 방송 표적을 발견한 하나노 아나운서가 발 빠르게 신센구미에게 달라붙었다. 현 상황의 타개책 따위를 말해주길 기대하는 것 같았으나, 실상 이쪽도 노 플랜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그저 경호원으로 왔다가 사건에 말려든 것뿐이니 말이다. 뭐라도 한 마디만 해달라며 마이크를 들이대는 그녀를 무시하고 히지카타가 고개를 들었다. 육안으로 살펴본 터미널은 더더욱 가관이었다. 그 높다란 건물이 자그마한 꽃들에게 점차 점령당해가는 모습은 흡사 첨단문명의 몰락을 조감하는 듯했다. 순식간에 터미널을 전부 집어삼킨 푸른 빛깔이 꿈틀거리며 에도 전역으로 발을 뻗치려 들고 있었다. 현장에 있는 전 대원들이 조금씩 근접해오는 꽃의 무리를 에워쌌다. 때마침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오키타에게의 연락이었다.

  [오~ 히지카타 씨. 상황은 좀 어떻습니까?]
  “눈이 삐었냐! 척 보기에도 아포칼립스잖아!!”

  긴급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느긋한 목소리였다. 대번에 속이 뒤집혀 히지카타는 목에 핏대를 세웠다. 오키타를 필두로 한 1번대는 오늘 둔영의 경비를 맡아 출동하지 않았는데, 제아무리 둔영이 멀다한들 터미널에서 벌어진 커다란 괴이 현상이 보이지 않을 리는 없었다. “뭐, 괜찮지 않나요. 지구도 슬슬 망할 때가 됐는데 이런 파국이라면 양반이죠.” 빙글거리는 웃음으로 농인지 진심인지 모를 말을 던지고 나서야 오키타는 본론으로 되돌아왔다. 사건이 터지자마자 곧바로 조사 작업에 착수했던 1번대는 제법 많은 부분을 규명해낸 상태였다.

  [원인은 대강 파악했습니다. 아무래도 하나하키 병이 문제가 된 것 같아요.]
  “하나하키? 그게 언제부터 이렇게 파괴적인 질병이 됐냐?”
  [물론 그 자체로는 딱히 위험하지 않죠. 그런데 최근에 개발된 하나하키 치료제가 하나 있어서요. 이게 작용하는 방식이 조금 골치 아프거든요.]

  하나하키의 꽃은 워낙 명이 질겨서 정공법, 그러니까 고백하지 않는 이상은 잘 제거되지 않잖아요? 더군다나 자가수분으로 체내에서 번식하기까지 하죠. 처리하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둔다면 평생토록 꽃과 공생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개발된 게 이 치료제입니다. 이 약은 꽃을 제거하기 위해 역으로 하나하키의 성장을 촉진해버려요. 열 배, 스무 배의 속도로 자라나게 해서 번식하기도 전에 시들어버리게 만드는 것, 그게 핵심이죠. 평소보다 빠른 어조로 설명을 이어나가던 오키타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런데 여기서 그만 일이 터진 겁니다. 알다시피 하나하키의 꽃은 우주식물이잖아요?]
  “……설마 복용자가?”
  [네, 공교롭게도 터미널로 간 거예요. 하필이면 에도의 전 에너지가 응축되는 이곳으로요. 그래서 본디라면 순식간에 시들고 죽었어야 했을 꽃들이 전부 회생해서 이 사달이 났다, 이겁니다.]

  마침내 모든 전말을 파악하고는 히지카타가 이마를 짚었다. 일찍이 그는 우주 생물체가 터미널의 에너지를 잘못 흡수하면 얼마나 폭력적으로 변이하는지 목도한 적이 있었다. 한때는 거대 에일리언이 터미널을 잠식하더니 이번에는 우주식물이란다. 미관상으로는 이전보다야 낫겠지만, 그 위험성은 에일리언과 하등 다를 바 없었다. 하나하키의 꽃은 근본적으로 기생식물이다. 터미널의 에너지와 촉진제의 힘을 받아 폭발적인 번식력을 지니게 된 저 식물이 에도 전체를 뒤덮는다면? 그리고 부족한 생명력을 빨아들이기 시작한다면?

  “빌어먹을! 저놈의 터미널을 때려부수든지 해야지.”
  [웬일로 그런 훌륭한 생각을 했어요? 잠깐만 기다려요, 지금 바로 전역 절차를 밟아드릴 테니 그 다음에 포탄이든 뭐든 실컷 쏘시면 됩니다. 유서도 같이 써드릴까요?]
  “시끄러워, 누가 혼자 죽을까보냐. 달리 해결방법은 없나?”
  [역시 정공법이 가장 간편하겠죠. 현재 카미야마가 CCTV 조사 중입니다. 복용자 신원부터 밝혀내고 다시 보고 드릴게요.]
  “그래. 끊는다.”

  무거운 한숨과 함께 통화가 종료되었다. 그 짧은 시간 사이에 꽃은 벌써 코앞까지 당도해 있었다. 탐욕스럽게 곳곳을 집어삼키며 기어이 여기까지 발을 넓히고야 만 꽃들이 신센구미와 정면으로 맞부딪혔다. 전 대원이 나서서 화기와 도검류를 동원하고는 있었지만 눈에 띄는 효과는 보이지 않았다. 하나를 불태우면 둘이 새로이 피어나고, 하나를 잘라내면 셋이 봉오리를 틔운다. 마치 불사신이라도 상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손을 멈출 수 없는 것은, 이런 무용한 전투로나마 꽃을 저지하고 있는 덕에 보더라인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테츠노스케가 뿌린 기름 위로 히지카타가 라이터를 던졌다. 화악 열기가 피어오르면서 꽃들의 기세가 잠시나마 주춤거렸다.

  낯익은 인기척을 감지한 것은 그때였다. 쿵쿵거리는 발울림에 히지카타가 뒤를 돌아보았다. 면식 있는 얼굴들이 거대 개에 올라탄 채 달려오고 있었다. 빠르게 가까워지는 사람들 중 동태눈깔 하나가 부족한 것을 알고 히지카타는 눈살을 찌푸렸다.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감지한 탓이었다. 이윽고 사다하루의 등에서 뛰어내린 신파치와 카구라가 다급하게 히지카타를 붙잡았다.

  “마요라! 한참 찾았다, 해!!”
  “어이, 민간인은 출입금지다. 얼른 돌아가.”
  “그,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잖아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긴토키 씨는요?”
  “해결사 녀석을 왜 나한테 와서 찾아?”
  “엑! 설마 긴토키 씨랑 못 만나셨어요?”

  그렇다면 저건……. 아이들이 얼빠진 얼굴로 터미널을 올려보았다. 인간들의 공격에 분개하는 것처럼, 그 잠깐 사이에 터미널 표면의 꽃들은 더더욱 부피를 부풀려 위협적으로 너울거리고 있었다. 이미 꽃들의 무리라기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괴물이었다. 급한 대로 꽃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까지 아이들을 잡아끌고 히지카타가 설명했다.

  “지금 저 터미널 안에는 아마도 하나하키 발병자가 있다. 환자가 복용한 치료제와 터미널의 에너지가 뭔가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고 있는 모양이라, 하나하키 꽃이 엄청난 번식력을 지니게 돼버렸어. 상황이 제법 위험해. 이대로 계속 분별없이 뿌리를 내린다면 종국에는 에도 전체의 생명력을 빨아들이게 될 거다.”
  “그, 그럴 수가…….”
  “혹시 해서 묻는다만… 설마 지금 터미널 안에는 해결사가 있는 거냐?”

  찰나 망설이다가, 신파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 꽃은 긴토키 씨의 꽃이 맞아요.”
  “집 나가기 전에 수상쩍은 하나하키 제초제도 먹었다, 해.”
  “좋아, 잘하면 금방 해결되겠군. 상대는?”
  “네?”
  “그 녀석의 짝사랑 상대 말이다. 이 난리판을 멈추려면 그 사람이 필요해.”
  “아, 저 그게…….”

  한순간 신파치와 카구라의 낯빛에 난처한 기색이 감돌았다. 그때 전방이 소란스러워지더니, 잠시간 수그러들었던 식물들의 움직임이 재개되었다. 이전까지의 고착 상태를 앙갚음하려는 양 그들은 매섭게 기세를 올리며 뿌리를 뻗쳤다.

  하나하키의 꽃은 아직 뿌리를 심고 씨를 퍼트리는 데에만 몰두하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그저 저희들의 영역만 넓힐 뿐이기에 이렇다 싶을 심각한 위해까지는 없었다. 그러나 약효가 가시거나 터미널의 영향력에서 멀어지는 순간, 이들이 어디서부터 영양분을 끌어오게 될지는 자명한 일이었다.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드는 무리를 이런 소규모로 막아내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조금씩 뒤로 밀리면서 터미널이 멀어져가고 있었다. 히지카타가 급박하게 재촉했다.

  “시간이 없어, 빨리!!”
  “노, 놀라지 말고 잘 들으라, 해. 사실 긴쨩은……!!”

  그 순간, 히지카타의 발목에 무언가가 휘감겼다. 급작스레 발을 당기는 감각에 히지카타가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여러 갈래가 두텁게 꼬인 줄기였다. 신경질적으로 혀를 찬 그가 바닥을 박차며 줄기를 도려냈지만, 차후를 대응할 틈도 없이 새로운 가닥들이 팔뚝에 매달렸다. 이상하리만치 히지카타에게만 집중적인 공세였다. 어깨와 허리가 붙들리기까지는 한순간이었다. 전신을 칭칭 동여맨 줄기가 히지카타를 강하게 옥죄었다. 큭……! 손가락 끝에서 검자루가 미끄러졌다. 카구라가 힘껏 도약하여 줄기를 찍어 눌렀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팽팽하게 구속된 몸이 또 다시 잡아끌렸다. 그 근원은 터미널 내부까지 이어져 있었다. “부, 부장님!” “토시!!” “히지카타 씨!!” 당혹해하는 사람들의 비명이 바람소리에 뒤섞여 아스라이 멀어졌다.

  초고속 에스컬레이터에 탑승하면 이런 감각일까. 꽃줄기는 그를 동여매고 순식간에 인파의 경계선을 뛰어넘었다. 날붙이가 부딪히는 소요가 멀어지면 그 너머는 온전한 꽃의 세계이다. 땅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무성하게 자란 꽃들은 그동안 살아온 사람들의 자취를 완벽하게 지워내고 있었다. 휙휙 스쳐 지나가는 배경이 눈부시게 푸르렀다. 터미널 입구가 점차 가까워졌다. 마치 그를 초대하는 양 입구를 막던 줄기들이 길을 열었다. 장막처럼 얇게 드리운 꽃의 결계를 통과하면서, 히지카타는 그대로 새파란 세상에 빠져들었다. 꽃향기가 어지럽게 온몸을 감싸 안았다.

  “……윽.”

  우뚝 줄기가 멈췄다. 갑작스레 사라진 속도감에 일순 현기증이 일었다. 휘청거리는 발이 느릿느릿 바닥에 닿았다. 대뜸 납치해온 것치곤 뜻밖에도 정중한 해방이었다. 줄기가 얌전히 바닥에 몸을 뉘인 후에도 여전히 날선 긴장감으로 히지카타는 걸음을 디뎠다. 걸음걸음마다 발밑이 푹신하게 내려앉았다. 바닥은 물론 벽부터 천장까지 온통 푸른색 일색이다. 여기는… 어디지? 핑 도는 관자놀이를 짚으며 히지카타가 두리번거렸다. 내부 시설물을 분간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터미널 중심부인 것 같았다. 공격적으로 하느작거리던 바깥과는 달리 이곳의 꽃들은 몽환적인 고요로 고즈넉이 가라앉아 있다. 그리고 푸른빛이 가장 청량한 그 한가운데에, 사카타 긴토키는 주저앉아 있었다. 쿨럭, 기침과 함께 뱉어낸 꽃부리가 순식간에 뿌리를 내어 기둥을 타올랐다. 이윽고 단단히 모양새를 잡는 줄기와 꽃받침. 만발해가는 하나하키의 꽃이 숙주를 보호하듯이 그의 주변을 에워쌌다.

  “히지카타……?”

  긴토키가 깜빡 눈꺼풀을 올리며 중얼거렸다. 비로소 히지카타의 존재를 인지한 모양이었다.

  “으… 왜 네가, 여기에…….”
  “모르는 척이냐? 네 녀석이 잡아왔잖아.”
  “내가……?”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낯빛이었다. 기생체를 조종하는 능력은 없는 건가? 혹은 자각 없이 꽃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조금 전의 줄기는 끝까지 위해를 끼치지 않았다지만, 그래도 만약을 대비하여 경계해두는 쪽이 좋을 것 같았다. 그래봐야 어차피 검도 없지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차에 긴토키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던 그가 한숨을 뱉었다.

  “기억이 안 나. 여긴 터미널인가?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설명하자면 좀 긴데. 대충 네가 먹은 약에 촉진제 성분이 들어 있던 거라고 이해해둬라. 덕분에 터미널은 이 꼴이고.”

  제 몸이니만큼 과연 이해가 빨랐다. 잠시간 생각에 잠겨 있던 긴토키는 곧 짜증스럽게 꽃 한 송이를 씹어뱉었다. 느슨하게 이완시킨 몸을 기둥에 기대며 그가 투덜거렸다.

  “이런 젠장, 어쩐지 돌팔이처럼 생겼다 싶었어. 촉진제를 넣었으면 터미널에 가지 말라고 말을 했어야 할 거 아냐, 왜 선량한 시민을 에도를 멸망시키려는 위험분자로 만들어? 내가 에도 멸망시킬 뻔한 게 벌써 몇 번째냐고. 차라리 점프 주인공 때려치우고 대마왕이나 할까보다.”
  “전례가 있다는 점에서 이미 선량한 시민은 글러먹은 것 같다만?”
  “시꺼, 인마. 자꾸 태클 걸면 진짜로 세기의 대마왕이 되어버리는 수가 있어.”
  “사랑으로 에도 멸망이라니 퍽이나 로맨틱한 대마왕이시군.”

  히지카타가 피식 웃으며 대꾸하자, 긴토키는 순간 말을 멈춘다. 여태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하던 말미에 언뜻 씁쓸함이 내비쳤다.

  “뭘. 원래부터 그런 병이었잖아? 이 삭막한 시대에 사랑으로 꽃 피우는 게 가당키나 하냐고. 로맨틱은 무슨 얼어죽을.”
  “해결사?”
  “비약과 비현실도 이쯤이면 환상적이지. 프로포즈도 이딴 식으로 하면 뺨 맞을 텐데 이 망할 기생식물들은 당최 숙주의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고려할 줄을 몰라요. 에도 전체에다 나 짝사랑 중이라고 소리소리를 지르고 말이야. 뭔 사랑이 이렇게 기구한지…… 미치겠어, 진짜.”

  긴토키가 몇 번 더 기침을 토했다. 해쓱해져 있는 긴토키의 낯빛과는 대조되게도 바닥에 내려앉는 꽃은 하나같이 생기가 넘쳐흘렀다. 그는 힘없이 미소했다.

  “히지카타, 날 멈추게 하러 온 거지? 근데 어쩌냐. 멈춰질 리가 없는데.”

  오밀조밀하게 모인 꽃잎들이 시리도록 푸른 색채로 약동하고 있었다. 순간 뇌리에 스치는 것이 있어, 히지카타는 난처하게 목을 울렸다. 그것들이 발산하는 푸르스름한 활기는 분명 하나하키 치료제에 의한 것도, 터미널의 에너지도 아니다. 촉진제나 터미널 따위는 그저 씨를 퍼트리는 과정을 가속할 뿐이었다. 근원은 어디까지나 긴토키에게 있었다. 이파리 하나하나에서부터 잔뿌리 한 가닥까지 모조리 그의 것이었다. 사카타 긴토키의 감정이었다. 터미널을 점거하고도 그의 사랑은 아직 멈추지 않았다.

  “하나하키 제초제가 갓 나왔을 때부터 사람들이 수군거리더군. 고백 한 번이면 끝날 일을 어느 미친놈이 돈 주고 사겠느냐고. 근데 내가 바로 그 미친놈이더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고백 한 번으로 끝날 것 같지가 않았거든.”

  자조적으로 웃으며 그가 속삭였다.

  “히지카타, 난 말이지……. 한 번도 내 사랑이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 기대는 고사하고 상상조차 불가능했지. 그 녀석에게 빠지는 내가, 내게 빠지는 그 녀석이 내 손에는 너무 버거웠거든. 그냥 이대로 변하지 않았으면 했어.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그 정도의 거리감이면 족하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자멸하기만을 기다렸어. 그런데도… 멈추지 않는 거야.”
  “…….”
  “결국은 이 지경이다. 에도 전체를 뒤덮으려 하고 있어. 이런 마음이 고작 몇 번 차인다고 나자빠질 리가 없잖아. 애당초 나는 거절밖에 상정하고 있지도 않았으니! 진짜 뻔뻔스러운 것들 아냐? 이 녀석들은 날 죽일 생각조차 없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할 정도로만 아슬아슬하게 기력을 빼앗고는 저 좋을 대로 자생하고 있다고. 순순히 뒈져주지는 않겠다 이거지. 나로서는 이제 더 이상, 어떻게 컨트롤이 안 된단 말이야. 아아, 진짜…….”

  등신 같아. 긴토키가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의 감정에 동요하듯이 꽃의 파도가 고요히 일렁였다. 짙푸른 향이 히지카타의 발목을 붙들었다. 마음을 죽이려 드는 사카타 긴토키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그의 감정. 실로 필사적인 존재 증명이다. 이것이 정말 단순한 번식 욕구일까?

  히지카타는 돌연 주변을 둘러보았다. 꽃에 일말의 관심조차 없는 그조차도 눈길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찬란함이었다. 히지카타의 시선이 스칠 때마다 꽃들이 유순하게 숨을 죽였다. 그들이 진정으로 생을 유지하고 싶었다면 가장 먼저 히지카타 토시로를 제거했어야만 했을 터였다. 아니, 굳이 죽이기까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긴토키와의 접근을 허용해서는 안 됐다. 혹여나 마음이 통하기라도 한다면 그들은 즉각 먼지로 화할 테니까. 그렇다면 긴토키의 꽃은 왜 저를 이곳에 데려왔는가? 그렇게나 폭압적으로 이곳까지 끌고 와놓고 왜 끝끝내 어떠한 상해도 입히지 않고 사라졌는가?

  새파란 꽃잎의 물결 속, 긴토키의 눈동자가 지친 듯이 젖어들었다. 그런 눈으로 오롯이 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하물며 제 마음을 멈춰달라고 부르짖고 있는 지금까지도! 하나하키 병은 억눌려 있던 사랑의 표출이다. 그렇다면 에도 가득 물결치는 이 푸른 꽃밭은, 사실상 나를 봐 달라는 외침이 아니겠는가. 그 애처로운 단말마를 오직 본인만이 귀를 틀어막고 외면하고 있었다.

  마침내, 이 넘실거리는 감정이 누구에게 향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만개한 꽃길을 밟고 히지카타가 성큼 다가섰다. 보드랍게 부스러지는 꽃잎이 발뒤축을 떠밀었다.

  “내게 할 말이 있을 텐데, 해결사.”

  사카타 긴토키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늘 아무 말이나 지껄여대는 주제에 중요한 순간에는 지나치게 말이 없다. 별 수 없이, 이제는 제가 오랫동안 닫고 있던 입을 열어야 할 때였다.

  “지금까지 실컷 떠벌렸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해.”
  “필요하고말고. 네 녀석은 아직 나한테는 한 마디도 안 했으니까.”
  “…….”
  “네가 뭔데 멋대로 내 대답을 정하는데?”

  역시 알고 있었구나. 긴토키는 소리 없이 실소했다. 간헐적으로 꽃을 토해내며 긴토키가 힘없이 되물었다. 자포자기한 듯한 어조였다.

  “그러면 어쩔 건데? 거짓말로 날 받아들일 셈이라면 관둬. 이래봬도 제법 예민한 애들이라서, 기만 따위에 순순히 죽어줄 만큼 순진한 것들은 못 되거든.”
  “제멋대로인 것도 모자라 남의 말까지 안 들어먹기냐? 몇 번을 말하게 할 거야, 왜 내 대답을 네가 결정하냐고.”
  “…….”
  “왜 내가 널 거절해야 하는데?”

  한순간, 꽃들이 술렁였다. 야트막한 파동이 공간을 엷게 울렸다. 아까보다도 격정적으로 동요하며 천장의 꽃 하나가 살랑거리며 잎 하나를 떨궜다. 히지카타는 계속 걸음을 디뎠다. 어느덧 그 녀석의 목전이다. 멍하니 저를 올려다보는 넋 나간 낯짝이 썩 볼만했다.

  “뻐, 뻥치지 마. 네가 왜 날……? 말도 안 돼, 한 번도 그런 티 낸 적 없었잖아!”
  “내가 할 소리거든? 네 녀석은 심지어 세 달 내내 날 피해다니기까지 했잖아. 여태 잘도 버틴다 싶더니 결국 범죄자의 길로 들어선 줄 알았다고.”
  “…….”
  “뭐, 결국은 이렇게 터미널을 불법점거해버렸으니 틀린 말은 아니지.”

  히지카타는 긴토키의 앞에 무릎을 굽히며 한숨지었다. 짐짓 가볍게 농담을 던지고는 있었지만 긴토키 못지않게 자조적인 얼굴이었다.

  “돌고 돌아 결국은 이 자리로군. 지금까지 대체 뭘 해온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어……. 그래, 네가 이 지경까지 오지만 않았어도 나도 이런 식으로 내 마음을 일러주지는 않았을 거다. 하지만 그건 네놈도 마찬가지잖아?”

  에도가 발칵 뒤집어지기 전까지 꿋꿋하게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는 점에서 결국은 히지카타도 긴토키와 같았다. 어느 쪽이나 지독한 고집불통이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긴토키의 사랑만이 가시적으로 드러났다는 점이겠지. 히지카타 토시로는 말없이 쓴웃음 지었다. 기실 히지카타는 긴토키를 책망할 자격이 없었다. 만약 히지카타가 그의 입장에 처했더라도 저 역시 망설임 없이 제초제를 집어삼켰을 것이기에.

  사카타 긴토키가 그러했듯이, 히지카타도 제 짝사랑을 표할 의향이 전무했다. 지금까지 줄곧 침묵해온 것은 그런 연유에서였다. 히지카타는 제가 긴토키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없었다. 직업 특성상 히지카타는 언제 어디서든 죽음과 맞닿아 있었고, 사카타 긴토키는 누구 하나 잃는 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곁에 있어달라는 말의 무게를 뼈저리도록 잘 알고 있는 만큼 더더욱 손을 뻗는 것이 망설여졌다. 서로를 마음에 들이는 순간, 지금까지의 관계는 격변한다. 한층 더 긴밀해질 인연을 제가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사카타 긴토키도 필시 이와 비슷한 이유로 고백을 꺼리고 있었을 터.

  그렇게 수없이 많은 시간을 흘려보내며 감정을 삭여온 만큼, 언젠가 지금 이 순간을 후회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난 자리는 언제나 든 자리보다 큰 법이었기에. 그러나 아직 도래하지도 않은 만약을 생각하기에는 당장 눈앞의 그가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히지카타가 긴토키의 머리로 손을 뻗었다. 하나둘씩 꽃잎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증명해줄 테니까, 말해봐. 에도를 멸망시킬 만큼 나를 좋아한다고.”

  어느덧 긴토키는 더 이상 꽃을 토하지 않고 있었다. 사락거리는 꽃잎소리만 고요히 낙화하는 가운데,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가 떨리는 숨을 불어냈다.

  “……내가, 내가 널 좋아해도 될까?”

  그것은 저를 향한 고백이라기보다는 사실상 자문에 가까웠다. 그런 어울리지 않게 서투른 면모까지, 히지카타는 좋아하고 있었다. 빌어먹게도 그랬다. 에도의 명운 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없을 정도로 이 녀석이 좋았다. 병도 이 정도면 실로 중증이 아니겠는가. 사랑 하나만으로 에도를 꽃밭으로 변모시켜버린 터무니없는 남자의 이마에 키스를 떨어뜨리며 히지카타가 속삭였다.

  “너 같은 녀석을 감당할 사람이 나밖에 더 있겠냐.”

  고집불통을 이해하는 것은 결국 똑같은 고집불통뿐이다. 느리게 입술을 떼어내며 히지카타가 웃었다. 이건 미처 예상치 못했는지 맞닿아 있던 몸이 흠칫 굳어졌다. 한참을 멍한 시선이 따라붙더니, 긴토키는 별안간 제 뒷목을 휘감고 힘껏 끌어당긴다. 꽃향기가 훅 번지며 입술이 다급하게 맞부딪혔다. 씁쓰레한 꽃잎이, 갈구하는 듯한 짙푸른 감정이 제 안에 녹아내리듯이 스며들었다. 혀끝에 엉겨드는 그 모든 솔직한 것들을 히지카타는 망설임 없이 삼켜냈다. 그 순간, 터미널을 빽빽이 둘러싸고 있던 줄기들이 무너져내리며 먼지처럼 스러졌다.

  오랫동안 얽매던 매듭이 풀렸다. 꽃받침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꽃잎이 파삭, 한꺼번에 부유했다. 머리 위로, 등 뒤로, 입술 사이로 어지러이 꽃잎들이 쏟아졌다. 푸른 세계가 천천히 붕괴하고 있었다. 덧칠을 벗어낸 터미널은 차츰 몸체를 드러내며 활개를 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몸을 실은 꽃비가 점점이 휘몰아쳤다. 세상에서 가장 황홀한 죽음이 창공에 흐드러지고 있었다. 오늘도 무사히 살아남은 에도를 축복하는 양 아찔하도록 찬연한 절경이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까마득하게 귀를 간질였다.

  이 밖을 나서면, 터미널 운행의 일시적 중단에 대한 문책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대사들의 입국 행사도 완벽하게 말아먹었으니 이쪽으로도 대판 깨지게 될 터. 하지만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정말로,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이 꽃비가 그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전부 괜찮을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필시 꽃향기에 취해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탄식하며, 히지카타는 달착지근하게 뭉그러지는 감각 속에서 오래토록 유영하고 있었다.

  푸르게 만개한 감정이 온 세상을 뒤덮었다.
  이대로 영원히 푸르를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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