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약속
이건 그러한 ‘약속’이란다.
예람 - 바다넘어
‘그래, 거기서 만났어. 토벌은 끝났는데…, 상태가 말이 아닐걸.’
찰박, 찰박. 무너져내린 외벽과 다 스러져가는 가구, 내려오다 만 철제 셔터 사이로 군홧발이 스친다. 내려앉은 천장에 반절이나 끼어 삐걱거리는 셔터와 작은 틈새로 고갤 숙여 지나면 한바탕 소란이 일고 지나간 자리는 비리고 끔찍한 악취가 풍겼다. 깨진 수도관에서 터져나온 수돗물이 한참 쏟아낸 소나기처럼 콘크리트 사이로 고여든 바닥. 그 물결 따라 가시고기마냥 모여든 것은 누구인지 모를 피륙 덩어리였다. 딱딱하게 굳은, 혹은 물 먹어 푸르딩딩하게 부푼 시체를 사이사이를 밟아 다시 한 걸음.
지친 걸음걸이가 얕은 웅덩이를 찰박거리며 눈조차 감지 못한 망자를 스친다. 불행하게도 지원군이 도달하기 전에 유명을 달리 한 이들이었다. 둥둥 떠다니는 살점과 물웅덩이의 저항감을 발목으로 밀어내며 얼마나 걸었을까. 지루하기 짝이 없던 눈가에 문득 희미한 이채가 어린다.
‘정말이야. 네가 몇 번째 자식이냐고 묻더라고.’
칼날을 쇠꼬챙이 삼아 목부터 관통 당한 뱀파이어의 시체. 두개골이 함몰되어 머리통의 반이나 날아가버린 놈은 힘없는 늘어진 채 물길 따라 투욱, 툭 나부낄 뿐이었다. 목구멍부터 졸졸 샌 핏줄기가 여전히 남아있는지 주변 물가는 희끗한 붉음으로 얼룩져있었다. 그러니까… 이 녀석이란 말이지. 습관이 되어버린 한숨을 내쉰 기도에선 이젠 지겹기만 한 피비린내가 피어올랐다. 찰박, 물 소리를 거둬내고 다가가 자리에 쭈그려 앉는다. 피로감 젖은 손길은 퍽 익숙한 듯 너덜너덜한 살점을 붙들어 벌려내다 …멈칫, 움직임이 멎는다. 끝내 위에서부터 울렁인 구역감이 구렁이마냥 움찔거려서, 사람으로서 해선 안 되는 이 행위가 너무나 끔찍했던 탓이다. 수십 번은 반복한 일련의 과정이었음에도. 제 어미의 살을 끌어안았던 그날의 붉음이 손아귀 안에서 겹쳐진다. 이 또한 지겨운 환상이다. 다시금 뻗은 팔이 피가 굳어 딱딱해진 머리칼 사이까지 더듬거리며 무언가를 찾으려 애썼다.
날 찾아내려 하는구나. ‘단서’라도 주련?
관절 도드라진 손가락이 빠진 턱뼈를 튿어냈고 수분이 죄 빠져 음푹 눌러 앉은 안와 사이를 비집었다. 단단하기보다 무르게 변모한 뼈는 쉬이 나가떨어지며 오염된 물가로 나뒹굴었다. 그렇게 개복된 복부가 불어터진 내장을 쏟아낼지언정 아집 비스무리한 집착은 불거져갔다. 점차 다 썩어가던 점액질이 손톱 밑에 엉겨붙고 꿉꿉한 냄새에 후각이 마비되어갈 무렵. 어김없이 생리적인 역치에 다달은 몸이 욱, 하는 헛구역질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묽게 묻어나는 타액을 손등으로 아무렇게나 훑어내면 쩍쩍 말라붙은 핏덩이가 부서지며 달라붙었다. ―지긋지긋해. 쉼없이 이어진 전투와 구역질 나는 시야, 발목을 어지럽히는 살덩이. 모든 것에 지친 이가 파편더미 위로 나앉았다. 사지의 감각이 사라지는 느낌도, 원수를 찾으려 ‘단서’를 찾아내는 나날도 전부 지겹기만 하다. 결국엔 이 뱀파이어 또한 ‘단서’가 없는 미끼에 불과했다.
그만할까. 이 덧없는 짓을 얼마나 반복해야만 저 위로 닿을 수 있을지. 하지만 여전히 눈을 감으면 그날의 흔적이 선명했다. 목제 창문 너머 구름 한 점 없이 어둑하던 밤하늘, 봄 소풍이라도 떠난 듯 창가 너머로 흩날리던 꽃잎의 향은 비리고 시큼했다. 세차게 울리던 사이렌의 굉음. 창문을 넘나들던 붉은 조명과 칼날처럼 반짝이던 실. 제 가족의 피를 머금어 흔들리던 카펫에 주저앉아 무릎 가득 젖어가는지도 모르고 울부짖던 하루. 머릿속엔 항상 빗줄기처럼 울리는 소리가 있었다.
찾아보려무나. 곧고 질기게 일어나서, 나와 내 권속을 멸해보거라.
네 멀고도 먼 조상이 그러했듯이.
여유롭고도 대견하단 듯이, 또는 웃겨 죽겠다는 듯이 이죽거리던 목소리. ―찾아야 해. 저 자신에게 세뇌하듯 중얼거리는 목소리. 더러운 피로 얼룩진 손을 꽉 주먹쥐었고, 이내 그의 권속으로 짠 은사를 거칠게 내던졌다. 그날의 기억은 마치 낚싯바늘 같아서, 현실에 지쳐 가라앉으려 할 때마다 억지로 몸을 꿰어내 분노과 증오란 미끼를 끼워맞췄다. 기어이 주인의 손에 상처를 남긴 은사. 그 벌어진 사이로 빨간 핏방울이 송골송골 배어들던 때, 자리에서 비틀비틀 일어나 먼지를 털어낸다. 일어나자. 견뎌내고 결말을 내 손으로 맞이해야만 한다. 우선은 ‘사인’을. 자연스럽게 품 속에서 짧은 나이프를 꺼내 들고서 마구잡이로 망가져버린 시체로 다가간다.
하지만 이건 알아두렴.
“이번에도 아니야.”
문드러진 이마에 제 이니셜을 새긴 사인을 그려넣는다. 그것은 일종의 깃발이자 봉화에 가까웠다. 내가 여기 있노라고, 이리 와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라네아의 마지막 자식을 구경해보라며. 이젠 피조차 배지 않는 시체의 이마에 누군가의 집착이 새겨진다. 반밖에 남지 않은 두개골 끝까지 날이 박히도록, 힘을 줘 꾹꾹 새겨넣는 사인. 썩은 살점이 날붙이의 평평한 면에 달라붙으며 떨어져나가면, 이가 상한 칼날은 쓸모를 다한 채 내던져졌다. 그렇게 무딘 날과 아집, 생을 다한 시체로 완성된 꼴은 초라하고 볼품없는 처형대처럼 보였다. 찾아내라 했으니 끝까지 쫓을 것이다. 이건, 그의 권능으로 시작된 ‘약속’이므로.
다시금 찰박거리며 멀어지는 물 소리가 회한 가득한 뭍을 타고 울려퍼졌다.
네가 몇 번째 아라네아인지 알아내는 날, 네 혈족 또한 멸족하리란 걸.
이건 그러한 ‘약속’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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