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상어의 이가 녹으면

다정한 상어의 이가 녹으면 1

여운명하

우리를 위해 by 실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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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69P2dpbv3oA?si=r2KrnhldBvLQGJHr

"차여운! 차여운! 뛰어!"

뜨겁게 작열하는 태양. 몇명인지도 알 수 없는 수많은 관중 속에서 홀로 객석 앞까지 뛰쳐나와있는 나. 차여운을 향해 소리치는 나. 멍하니 서있던 여운은 내 목소리에 고개를 든다. 씩 웃는 표정에는 생기가 돈다. 그의 발엔 내가 선물해준 바다를 닮은 파란색 육상화. 단발마의 총소리와 함께 달리기 시작하는 여운.

여운이 달릴 때면 그가 앞을 향해 뛰는 게 아니라 온 세상이 여운의 뒤로 밀려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직 하나만이 내게 다가오는 것처럼.

여운의 주위에 있는 건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1등을 한 사람도 그의 배경 같이 느껴졌다. 나는 여운에게로 달려간다. 그의 동그란 머리를 쓰담으면 여운은 운다. 아, 또 내가 울렸다. 여운을.

"3등밖에 못했는데요."

"3등이나 한 거지."

아무리 달래보아도 여운은 계속해서 운다. 훌쩍훌쩍. 아무리 닦아도 쏟아내리는 눈물이 발목까지 찼다. 나는 여운을 안았다. 여운은 내게 안긴채로 훌쩍훌쩍 운다. 여운의 눈물이 지나치게 뜨겁다. 열이 나나? 여운의 이마에 손을 짚어본다. 열은 안 나는데.

"괜찮아. 여운아."

"선배. 선배가,"

"괜찮아. 잘했어."

"선배가 녹아요."

여운의 말에 멍해진 채 나를 내려다본다. 줄줄 녹아내리고 있는 몸. 뜨거운 건 여운이 아니라 나였을까? 이미 다리는 물 안에 녹아들었다. 녹아내려 점점 아래로 가라앉는 나는 여전히 울고 있는 여운을 올려다본다.

"울지 마. 괜찮아."

"안 괜찮으면서. 내가 잘못해서, 선배는 또 나를 두고 가네요."

"아니야. 아니야. 내 잘못이야. 여운아!"

전기장판 6도. 개꿈이다.


아침부터 이상한 꿈을 꿔서 영 기분이 아니었다. 내가 녹는 꿈이니 악몽인가 싶다가 여운이 나왔으니 길몽인가 싶었다. 여운이 울었던 날. 나는 그날을 자주 생각했다. 너무 좋아하면 울고 싶어지기도 한다는 걸 어른이 되고서야 알았다. 여운이 날 보면서 자주 눈시울을 적시던 날들을 매일 떠올렸다. 내게 여운은 그렇게...

비가 온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만 같다. 부술듯이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을 멍하니 바라보다 일어났다. 우산을 챙겨 나갈까 하다 그냥 나왔다. 비를 무진장 맞고 지독한 독감에 걸려서 쉬어버리고 싶다. 때리듯이 내리는 비에 몸이 식어갈수록 아득했던 정신이 돌아온다. 길을 생각하지 않아도 걸음이 절로 가려던 곳으로 움직인다. 내 집만큼 익숙한 곳.

초인종을 누르고 얼굴을 비추자 말없이 현관이 열린다. 대충 주워입은 니트와 바지가 비를 잔뜩 머금어 무겁다. 밖에서 물을 대충 짜내고 들어서자 현관으로 나온 그가 놀라 우뚝 멈춰섰다.

"명하? 꼴이 왜 그래?"

"그냥 이러고 싶은 기분이라서요."

갑작스러운 내 말에 태강은 알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욕실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곧장 욕실로 들어가 물을 먹어 축 늘어진 옷을 벗어냈다. 볼품없이 마른 몸. 추위에 덜덜 떨고있는 것마저 꼴사납다. 거울에 비친 눈동자는 생동감도 없이 죽은 것 같아보인다. 따뜻한 물을 틀고 아래 한참을 서 있었다. 차가운 비를 맞았다가 김이 모락모락 날 정도로 뜨거운 물을 맞았다가. 정신 못차리게 나를 괴롭힐수록 생각이 또렷해진다.

"그 첫사랑 꿈꿨어?"

"네."

"오늘 무슨 날인가? 나돈데. 별로다 진짜."

그렇게 말하는 얼굴이 밝다. 태강은 이럴때 종종 웃었다. 너무 힘들거나 슬플 때 도리어 웃는 사람이었다. 나는 맥주를 들이키고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태강은 굳이 내 표정을 살피지 않는다. 보지 않아도 우울한 표정임을 알테니까.

"그렇게 보고싶어 했으면서, 무섭다고 하면 웃긴가?"

태강은 말없이 빗소리와 어울리는 클래식 음악을 튼다. 취향의 음악은 아니다. 여운의 이야기를 늘어놓기 위한 배경음일 뿐.

"이런 내가 너무 지겨워요."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다 거짓말 아닐까."

태강은 여운을 닮았다. 차가운 인상이지만 웃으면 해사해지는 얼굴, 분위기나 가끔 낮아지는 목소리나 까칠한 듯하지만 알고보면 따뜻한 점 같은 것이. 그의 말로는 나도 그의 첫사랑을 닮았다고 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렇게 대충 연애라도 할 수 있겠지만 대체제로 만족하는 족속도 못되었다.

태강과 나는 하나의 공통점으로 뭉친 사이였다. 우리는 만나선 누구에게도 다시 말할 수 없는 사랑했던 이와 행복했던 시간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리 긴 시간도 아니었던 시절의 이야기를 몇번이고 반복해서 말해도 짜증내지 않고 들어주었다. 나는 이 사람의 앞에서만 여운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그를 통해서 나를 본다. 깨져버린 거울처럼. 태강을 만나기 전엔 나 스스로도 내가 얼마나 엉망이었는지조차 몰랐다. 그와 나는 우습게도그 기억을 잊을까 두려워서,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하기 위해서 애를 썼다.

내가 나를 안아줄 수 없어서 사랑하는 사람을 안을 수도 없어서 우리는 울었다.


셔터 소리에 맞춰 포즈를 취하는 여운을 멀리서 바라본다. 그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아서 여타 스탭들 뒤로 물러섰다. 여운의 성숙해진 얼굴이 이전보다 더 날카롭다. 모니터 안의 여운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게 생경해질 즈음 고개를 들어 바라보면, 언제나 그랬듯 그 눈이 나를 보고 있다. 검은 눈동자가 심장을 꿰뚫는 것만 같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저 눈은 내게 뭐라고 말하고 있을까. 너무 오래 그를 마음에만 담아두고 있어서 알아채지 못한 것이었을까. 여운의 눈빛에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차라리 마주친 시선이 착각이길 빌었다.

“달릴 때 무슨 생각을 하고 달리시나요?”

리포터의 질문에 여운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게 웃으며 대답하길 바랐는데 금세 굳은 표정의 여운이 카메라 너머 나를 응시한다. 불가항력처럼 눈을 피할 수가 없다.

“도망가는 누군가를 따라 뛰어가는 상상이요. 전 계속 그 사람 등을 보면서 달리는거에요. 아무리 달려가도 멀어지거든요.”

여운은 그날 밤 얼마나 오래 서 있었을까. 물어보지도 못할 질문을 곱씹었다. 내 손바닥에선 식은 땀이 배어나왔다. 울지 못한 눈 대신 손이라도 울고 있는걸까. 손을 허벅지에 문질러 닦으며 자꾸만 불규칙해지는 숨을 골랐다.

“예전엔 누가 끝에서 기다리는 상상을 했어요. 잠시였지만.”

결국 여운이 먼저 시선을 돌렸다. 눈꼬리가 축 쳐진 슬퍼보이는 눈. 그건 나만 알아볼 수 있었다. 사소한 습관까지 기억한다는 걸 여운은 알까. 알아봐야 아무 소용도 없겠지만.

누가 끝에서 기다리는 상상…. 여운의 말이 어지럽게 귀에서 맴돌았다. 고개를 치켜들어야 비로소 마주볼 수 있을만큼 큰 여운도 작아보이던 넓디 넓은 운동장에서 여운을 얼마나 기다리게 했을까. 아무도 없이 홀로 텅 빈 집이 싫었던 여운에게 내가 없던 운동장마저 그렇게 다가왔을까.

인터뷰를 하던 여운은 내내 여유로워 보였지만 나는 알았다. 무엇때문인지 불안정한 상태였다는걸.


촬영이 끝나고, 곧장 촬영장을 나서는 여운의 뒤를 따라나선다. 먼저 말을 걸려는 생각은 아니었는데 몸이 의지와는 다르게 반사적으로 먼저 움직였다. 감기에 걸려서 제정신이 아닌 듯 했다. 기민한 여운은 내가 쫓아감을 알면서도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대기실로 들어간 여운의 등을 바라본다. 프로필을 보니 조금 더 키가 컸던데 그게 사실인지 더 훤칠해졌다. 널찍한 어깨만 보아도 여운이 평범한 사람은 아님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열린 대기실 문 앞에서 제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는 내가 거슬렸는지, 여운이 한숨쉬며 뒤돌아섰다. 할 말이 있으면 얼른 하고 가라는 듯 귀찮아보이는 얼굴. 서운해해서는 안되는데 서운해진다. 그럴 자격따위 없는데도.

“금메달 축하해. 오랜만이야. 벌써 10년이네…. 잘지냈니?”

“못 지냈어요. 누구 때문에.”

“그래….”

날선 말이 심장을 푹 찌른다. 여운의 눈길이 차다. 처음 만난 그때처럼. 차마 다시 말을 걸 용기도 없어서 그저 어딘가 변해버린 여운만 눈에 담았다. 바래진 기억 속의 여운은 한없이 따스하기만 해서 화가 난 얼굴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아프게 느껴지는 거겠지. 달가워하지 않을거란 걸 알면서도 다가간 벌은 무겁다.

“아는 척하지 말라면서요.”

“여운아.”

“다정하게 이름 부르지 마요. 우리 그럴만한 사이 아니잖아요.”

“그렇지….”

여운을 보내기 위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받았다. 아직도 그 말을 기억하고 있구나. 여운이 인사도 없이 내 곁을 스쳐지난다. 코 끝을 간질이는 몸이 기억하고 있는 여운의 냄새. 어른이 된 여운은 어떨지 늘 궁금했는데, 여전히 짠 바다냄새가 났다. 입 안에서 소금기가 느껴지는 것만 같다. 바다에 가지 못하던 이유를 상기시키며 멀어지는 등을 잠시 바라보다가 달려가 여운의 손목을 붙잡았다.

“미안해.”

“이제와서요? 하지마세요. 안 받을거에요.”

여운의 눈 끝이 붉다. 울기 전엔 꼭 눈가가 빨개졌었는데. 잊고 있었다. 나는 이 아이를 울게 만든다는걸. 그래서 미안한 기억만 남았다는걸. 나때문에 울 때면 이름의 운-자가 눈물과 연관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많이 웃게 해주고 싶었는데 아무것도 아닌 나는 웃긴 농담조차 못하는 사람이었다.


비를 맞고 감기에 독하게 걸렸지만 K직장인답게 출근은 여전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까끌거리는 목에 따뜻한 물을 들이켜봤지만 한껏 부은 목이 아파왔다. 목이 잠겨 출근하는 내내 물을 들이켰다. 목소리가 형편없다.

여운의 에이전시로 갈 일이 생겼다. 내심 반가웠지만 회사에서는 여운을 전혀 모르는 체 했다. 그저 업무만 수행하러 가듯이 굴었지만 어쩌면 그를 볼 수도 있다는 기대에 설레어 쓰지 않던 향수까지 뿌렸다. 우연히 뒷모습이라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혹 여운을 마주치더라도 말은 하지 않아야겠다 생각한다.

“연락 한번 주세요. 다음엔 저희가 회사 찾아뵐게요.”

“아뇨! 괜찮아요!”

오바스럽다고 할 만큼 양손을 거세게 흔들었다. 이렇게가 아니면 여운을 조금이라도 볼 일이 없을지도 모르니까 최소한의 기회라도 있어야 했다.

“저희가 가야죠. 오는 길에 선수님들 사인도 좀 받고. 하하.”

조금 더 말을 꾸며낼 줄 알게된 후부터는 모든 게 편했다. 둘러댈 말 따위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입이 먼저 뱉고 있었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차여운 어디 있나요? 지만 서류를 챙겨들고 일어서며 만나서 반가웠다는, 아까 했던 말을 또 했다.

받아가는 자료까지 품에 끌어안고 긴 복도를 걸었다. 걸어도 걸어도 먼 듯한 아득한 느낌. 언제나 혼자였지만 이렇게 어른이 되어도 소란한 곳에서 순식간에 고요해진 순간을 맞이하면 여전히 지구에 혼자 남겨진 듯 느껴졌다.

퍽. 멍하니 서 있다 누군가와 부딪힌 어깨에 서류와 함께 와르르 앞으로 엎어졌다. 여운의 사진들이 바닥에 여기저기 흩날렸다. 바쁜 사람이었는지 사과 후에 급히 사라졌다. 그 걸음에 여운의 사진들이 혹여나 누군가한테 밟힐새라 손에 집히는대로 주워 모았다. 순서도 분류도 엉망이 되어버린 종이들이 눈 앞에 아무렇게나 쌓여있었다.

여운과 나의 시간처럼.

"태명하?"

서류를 정리하는데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돌아보니 태강이다. 에이전시를 옮긴다는 말은 얼핏 들었던 것도 같은데 서로 사생활에 대해 얘기하는 일은 거의 없어서 기억이 희미했다. 잠시 생각이 멍해져 멈춰있자 태강이 서류를 차곡차곡 정리했다.

"괜찮아?"

"괜찮아요."

"감기인가보네. 반차라도 써."

"네, 형. 안 그래도 그러려구요."

고개를 끄덕이고 서류를 정리하는데 문득 고개를 든 태강이 미소지으며 일어섰다.

"차여운씨 맞죠? 팬이에요."

기척없던 걸음이 그제야 소리가 들려온다. 일어서지도 앉지도 못한채로 얼어붙어있다 태강의 눈짓에 뒤돌아섰다. 여운은 놀라지도 않고 꾸벅 인사해왔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망했다. 감기때문에 갈라지는 목소리가 형편없다. 완전히 듣기 싫은 목소리.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데 이 애 앞에선 늘 최악의 모습만 보여주는 것 같다. 눈부시도록 빛나는 사람 앞에서 점점 초라해지는 기분이란. 한낮에 켜진 가로등처럼 의미없이 미미한 빛조차 보이지 않는다.

"왜 왔어요?"

"계약서 때문에."

너 보고싶어서. 니가 만나주진 않을테니까.

"여운씨랑 아는 사이야?"

태강이 의외라는 듯 여운과 나를 돌아봤다.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름칠을 못한 기계처럼 삐그덕 나조차 어색한 몸짓이었다. 뒤늦게야 아는 사이라해도 되는건지 여운의 눈치를 살폈다. 언짢은 듯 표정이 좋지 못해서 얼른 입을 열었다. 처음과 똑같은 표정. 차라리 모르는 사람보듯 보는 게 나을까. 미워하는 게 나을까.

"그냥 동문이에요. 고등학교."

"오 좋겠다. 전설의 선수랑."

"그렇죠. 하하. 여운아. 어... 이 사람은... 어..."

첫사랑 얘기만 하는 사이? 뭐라고 해야하지. 누가 나를 쥐고 흔드는 듯 머리가 어지럽다. 감기 기운때문인지 제대로 서있기조차 힘들다. 어느날부턴가 여운의 앞에서는 할 말을 고르기가 어렵다.

"애인이야."

태강이 놀란 눈으로 나를 돌아본다. 내 말에 부정하지는 못한 채다. 태강은 머뭇거리다 떨리는 내 손을 붙잡았다. 세 사람만이 복도에는 우리의 말소리보다 여전히 내리는 빗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너 진짜 괜찮아?"

나는 고개를 애써 끄덕인다. 끄덕이는대로 육체와 정신이 분리되는 듯 어지럽긴 하지만. 여운의 얼굴을 봐야하는데 잘 보이지 않는다. 태강과 잡은 손을 내려다본다. 나 지금 뭐하고 있는거지?

어떡하지?

또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바보같은 일의 반복. 되돌리지도 못할 일들로 망치고는 한다. 나는 늘 이런 식이다. 보기 앞에서 갈팡질팡하다 결국 최악의 선택지를 고르게 된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나은 보기가 있었을까. 모르겠다. 내 앞에는 늘 나쁜 선택지만 주어지는 것 같다.

점점 아득해지는 시야에는 표정을 잔뜩 구기고 선 여운 뿐이다. 흐려진 시야가 무너진다. 아 정말, 오늘은 최악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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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상상하는 알파카

    잘봤습니다🥹🥹 기다릴게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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