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phis Academy

흑도

엘피스 아카데미 여운님 위주

전투에 쓰지도 않는 무거운 검을 매일 차고 다니고, 매일매일 광나게 닦으며 관리했다. 내가 친구를 잃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고, 잊고 싶지 않았기에.

검을 쓰는 순간 샘솟는 벗과의 추억은 나를 점령하려 들었고, 감정에 잠식당하고 싶지 않아 들고만 다녔다. 쓰지도 못하는 검 미련하게 왜 들고 다니는 거냐며 핀잔도 들었다. 그렇지만, 너무나도 소중한 검이었기에 감히 사용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 * *

열세다. 완벽한 열세다. 예상보다 몇 배는 많은 적군의 공세에 전선은 점차 밀리고 있었고, 스러지는 목숨들이 내지르는 소리가 귀에 얽혀들었다.

전선이 더 밀리면 후방의 라이피어스와 체크메이트가 위험해진다. 현재 위치를 지켜내야 한다.

[루미나인 전력 50% 이상 상실. 인력 증원 및 타 부대의 지원을 요청합니다.]

[인력 증원 요청 승인. 루미나인 인력을 투입하겠습니다. 또한, 더 많은 지원 인력의 투입은 라이피어스에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고 판단되어 이 상태를 유지합니다.]

아군이 오기까지 걸릴 시간은 대략 이십 분. 그 시간동안만 버티면....

“.....!”

칼에 베인 왼쪽 다리가 힘을 잃는다. 적의 칼날이 다가온다.

캉.

백도가 손에서 벗어난다. 날이 사라진 칼자루가 바닥에 나뒹군다. 적을 발로 차 거리를 벌린 다음, 검이 날아간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넓은 평야를 적신 붉은 피. 하나 둘씩 힘을 잃고 쓰러지는 대원들. 그리고 부상당한 부대원에게 향하는 적의 칼날.

* * *

여운은 몸을 돌렸다. 손에 잡히는 검을 뽑아들었다. 손에 감기는 느낌이 어색하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을 할 틈은 없었다.

지켜내야 했다.

살려내야 했다.

적을 베어낸 자리에서 피가 흐른다. 쌓여가는 시체들의 사이에서 여운이 걸어 나온다. 강을 이룬 피를 건너온다.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서로 눈치를 보며 함부로 달려들지 않는다. 여운은 저 너머에 보이는 적들을 바라보았다. 잠시의 시간을 벌었다. 그렇지만 이대로 멈춘다면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 그렇기에 다시 검을 고쳐 잡았다.

* * *

 

하루가 넘는 시간 동안 이어졌던 전투가 막을 내렸다. 넘어가는 해 너머로 후퇴하는 적들이 보인다. 온 몸이 아프다. 벌어진 상처를 누르고 있는 손에 피가 배어나온다.

저 멀리서 루디가 뛰어온다.

“부회장님!”

대답할 기운이 없다. 쓰러질 것 같다.

루디가 날 부축한다. 그러면서 건네는 무언가.

.... 백도다.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건... 흑도.

“오다가 주웠는데....”

루디가 뒷말을 흐린다. 아무래도 내가 지금 손에 들고 있던 흑도를 사용하지 않고 있던 것을 알고 있는 거겠지. 그 이유도 대충은 알고 있을 테고.

“됐어. 얼른 복귀나 하자.”

그제야 루디가 밝은 표정으로 걸음을 옮긴다. 사적인 감정으로 동료에게 영향을 미칠 수는 없지. 손에 들려있는 흑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결국 이 검을 뽑아들고 말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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