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수여운

닿을 수 없는 꿈 1

동수여운


* 초립이가 막판에 초를 치지 않았다는 IF 엔딩 이후 시점


백동수는 기뻐했다. 

몇 번이고 아이처럼 소리 내 웃는 모습에 다림방 식구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뜰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고작 3년 하고도 조금의 시간 그 뿐이었음에도 백동수는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없을 만치 변했었다. 시답잖은 장난을 치지도 버릇 없는 말투로 시시덕대지도 않고 단단한 철갑을 두른 군사처럼 묵묵했으며 또한 무심하도록 냉정했다. 악인에게도 자비를 베풀며 제 책임을 다하되 절대로 그 이상 관여치 않는 사내, 선뜻 지켜주겠다 맹세하나 그 품이 바다처럼 광활하여 그의 유일이 되기란 불가능한 사내. 누군가의 곁에 오래 머물지 않고 금세 바람처럼 떠도는, 조선제일검 백동수란 그런 사내였다. 

허나 그 이름 높은 사내가 지금은 웬 팔푼이처럼 헤헤 히히 거리는 게 아닌가. 

그 이유로 화홍 김 씨는 오랜 싸움에서 마침내 승리하여 악인들이 정당히 죗값을 치르게 하였음을 들었고, 대상단주 유 씨는 그가 승하하신 사도세자의 염원을 풀어드리기 시작했음을 말했으며, 의적 황 씨는 그의 백부 김광택의 <무예신보>를 잇는 <무예도보통지> 편찬을 내세웠다. 백정 흑사모와 황진주는 그저 그의 기쁨이 달가워 함께 웃기나 했다. 그러나 그의 오랜 지기, 양초립만은 입을 딱 다물고 있었다. 바보처럼 웃던 백동수가 종일 하늘만 바라보며 시간을 재다 밤이 되기가 무섭게 말도 없이 다림방을 나설 때까지도 그랬다.

그리고 그가 하루를 꼬박 지나 그다음 날 밤이 되어서야 다림방에 돌아왔을 때, 모두는 탄식을 금치 못했다.

“운아!” 

백동수의 옆에는 그의 커다란 팔을 어깨에 두른 여운이 있었다. 그제야 합죽이였던 양초립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버선발로 문 앞까지 뛰쳐나갔다.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장미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동무, 그들의 가족이 드디어 제집으로 돌아온 순간이었다.

“초립아. …미소야.”

 어렵사리 시선을 들어 희미하게 웃는 운의 낯에는 여전히 죄책감이 서려 있었는데, 초립은 그것이 너무도 마음이 아파 운을 덥석 끌어안은 채 울음을 삼켰고, 미소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함께 그를 안았다. 어벙한 얼굴로 구경만 하던 흑사모와 장미도 헐레벌떡 정신을 차리고 운에게 팔을 벌리며 아이들을 단 번에 껴안았다. 잘 왔다. 왜 이제야 왔어, 왜. 지금이라도 왔으니 됐다. 다 됐다…. 숨이 막힐 정도로 다닥다닥 달라붙어 끈질긴 포옹을 하는 이들의 머릿속에는 더 이상 병판이니 도보통지니 하는 것들은 깡그리 사라지고, 오로지 여운만이 가득 들어찼다. 

그래. 침잠해 있던 백동수를 그리 기쁘게 할 수 있는 건, 다림방 식구 모두를 눈물 지새우게 할 수 있는 건 오직 그 존재 뿐이었던 것을. 백동수는 하하 환하게도 웃으며 팔을 널찍이 뻗어 제 가족들을 힘껏 당겨 안았다. 곡소리와 웃음소리가 한데 모여 우스꽝스러운 광경 속, 그토록 그립던 품에 짓눌린 여운은 그제야 소리 내 웃었다. 


눈물 겨운 재회, 그로부터 두 달 후. 초립은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운이는 다림방으로 돌아온 이후 몇 주간 미안하다 죄송하다를 입에 달고 살았다. 그리 고고하던 사내가 이제는 그 미색의 얼굴을 함부로 들지도 못 하는 데다 바닥에 처박힌 시선은 더더욱 그런 것에 다들 마음이 미어지곤 했다. 그가 원하지 않았던 일이라 한들 그의 죄가 씻기는 것은 아니었으나, 다림방의 식구들에게 있어 여운은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소중한 가족이었다. 그러니 모두가 성심껏 그를 북돋고 함께 일하고 밥을 먹으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운이 녀석도 차츰 기운을 차려가는 듯했다. 요즘은 종종 예전처럼 조용히 웃곤 하여 초립 역시 뭉클할 정도로 흐뭇했다. 

그래, 운이는 잘 지냈다. 잘. 문제는……… 

“야아, 술이나 한잔 하자!”

백동수, 저 놈이다. 또 운의 어깨를 끌어안은 채 히죽거리는 그를 바라보며 초립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백동수는 정9품 부사용 직에 등용되어 <무예신보>의 계보를 잇는 <무예도보통지> 편찬이 한창이었다. 해가 뜨기도 전에 입궐하여 해가 다 지고 나서야 퇴궐하는 일이 잦았는데, 그럴 때마다 그는 초립과 운을 붙들고 술을 걸치며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자유롭게 살 거야. 무예서가 완성되면 관직도 내려놓을 거다.”

“그래, 네가 언제는 뭐 묶여 살았냐? 운이 오기 전까지 허구한 날 가출만 했잖아, 동수야. 내 식견으론 말이다, 넌…”

“야, 시끄러워. 암튼 늙어 죽을 때까지 궐에만 있을 생각은 없어. 응? 셋이서 오순도순 모여 사는 거야. 예전처럼 같이 말도 타고, 수영도 하고, 새도 잡고. 운아, 알았냐?”

“어? ……어, 뭐. 그래.” 

애꿎은 운이만 빤히 들여다보는 백동수의 낯짝 앞에 초립이 훠이 훠이 손을 저으며 물렀던 게 벌써 몇 번일까. 사실 그 입버릇만 놓고 보면 문제 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셋이서 오순도순 어쩌고는 한데 모인 동무들이 반가운 마음에 그냥 하는 말일 테고, 동수 놈이 한 곳에 뿌리 내리는 것과는 먼 성정임을 그 누구보다 그의 오랜 지기, 초립과 운이 더 잘 알았으니까. 그뿐인가, 물론 다림방 식구들도 예상한 바였다. 그러니 그들의 시선이 백동수의 연인, 유지선에게 향한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백동수도 지선도 혼기가 꽉 찼겠다, <무예도보통지>의 편찬을 마치는 날이 둘의 혼례 날이 될 것임을 모두가 짐작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동수의 스승이자 백부, 검선 김광택이 평생을 소원했던 것처럼 사랑하는 여인과 평생을 자유로이 유랑하며 함께하는 일이 그대로 그의 소망이 되었구나. 모두 그리 생각했을 뿐이다. 하다못해 양초립 본인도 미소와 혼인을 기약했고, 홍도 또한 진주에게 청혼을 했다. 흑사모는 벌써 장미에게 장가를 든 지 한참이었다. 동수도 지선도 대놓고 표현을 하지는 않았으나 젊은 남녀가 그리 유별한데, 이를 것도 없지. 아니, 진작 늦었지. 

허나 마땅히 새신랑이 되어야 할 백동수 이 놈의 생각은 다른지, 양초립은 그에게서 풀풀 풍기는 이상한 기류를 최근에서야 알아차렸다.

“그럼 들어가라. 궐에서 보자.”

“오냐. 운아, 내 다음에 또 올 테니 그때 봐.”

“응, 가라.”

초립은 다림방의 문가에 서서 저를 배웅하는 두 친우를 힐끗였다. 밤중 셋이서 술을 기울인다 해도 더는 예전처럼 평상에 널브러져 잠드는 일은 없었다. 어쨌거나 양반 도령 홍 설서는 본가로 돌아가야 했고, 동수도 더는 취할 때까지 퍼마시지 않았으니까. 다만…. 초립은 걸음을 옮기다가도 멀리 가지 않고 다시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자신을 등지고 문 안으로 들어가는 백동수는 운의 허리에 팔을 감은 채 히죽히죽 무언가 떠들고 있었고, 운은 이따금씩 고개를 주억거리며 웃는 듯했다. 그 이후는 구태여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 두 놈, 오늘도 같이 잘 심산이군. 초립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백동수는 운이 다림방으로 돌아온 그날부터 매번 당연하다는 듯 그를 제 옆에 끼고 잠들기 일쑤였다. 그 좁디좁은 다림방에서 사치스럽게 각방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니 스무살 적 함께 썼던 방을 고대로 쓰는 것 뿐이라지만, 초립이 보기에 둘은 그 정도가 심했다. 장용위 동문들이 오랜만에 다림방을 찾았을 때도, 진기와 진주가 잠깐 한 밤 신세를 질 때도 백동수는 꿋꿋이 그들을 흑사모의 신혼 방이나 주막의 남는 방에 밀어 넣고 운과 단 둘이서만 방에 틀어박혀 잠을 청했다. 동수와 함께 입궐하기 위해 홍도와 초립이 동트기가 무섭게 다림방을 찾았을 때, 백동수 그 덩치 큰 놈이 좁은 방 안에서 운의 옆에 딱 달라붙어 그의 몸 위에 팔다리를 올리고 쿨쿨 자는 꼴을 목도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게다가 백동수가 여운을 제 옆에 두지 못해 좀이 쑤신 것처럼 구는 일은 비단 잘 때 뿐이 아니었으니, 구태여 해가 아직 중천인데도 서둘러 퇴궐하여 하릴없이 운이만 졸졸 쫓아다니거나 허구한 날 그에게 침이며 호패술이며 대련 백 판을 졸랐다. 하다못해 저잣거리를 나설 때도 괜히 운을 동행시켜 뺑뺑 돌며 운이 좋아하는 간식거리나 줄창 사댔다.

워낙 둘 사이 시름이 많았는 데다가 그 고난을 전부 딛고 운이 돌아왔으니 동수가 껌뻑 죽는 걸 물론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당장 초립만 해도 운에게 무어라도 해주고 싶어 안달이 날 지경이었으니까. 하지만 백동수는 그보다 훨씬 더 별나게 굴었다. 다림방 식구를 포함하여 누군가 운이를 찾기라도 하면 바로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보초 서는 똥개처럼 부라리질 않나, 운이 혼자서는 다림방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하는 걸로 모자라 장미와 미소에게 캐물어 가면서까지 저가 보지 못한 운의 일과를 집요히 알아내었다. 함께 저자를 구경할 때면 늘상 그랬듯 여인네들이 운이를 힐끗거릴 때마다 은근슬쩍 제 몸으로 그를 가려 숨기기까지 했다. 

아무리 오랜 시간 생이별을 했던 지기라지만… 여운, 그가 어떤 사내인가. 백동수보다 언제나 한 수는 더 앞서있던, 동수가 조선제일검이라면 여운은 천하제일검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실력자였다. 게다가 그 최정예 암살 집단 흑사초롱의 수장, 천주였던 자¹가 아닌가. 운을 아끼는 다림방의 식구들이 보기에도 백동수의 태도는 영락없는 과보호였다. 

특히나 동수 놈은 제 연인 지선에게도 그리 유별나게 굴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의 방랑벽 때문에 둘은 그러잖아도 함께 있는 시간보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었는데, 운이 돌아오고 나서는 둘만의 시간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 정도로 그치면 다행이지, 지선과는 길에서 만나도 고개나 조신히 숙이는 게 다인 놈이 운이는 아예 업고 다니겠다 혼자 난리가 났다. 치기 어린 스무 살 적 마냥 냅다 지선의 방에 덜컥 들이닥치는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무리 철이 들었기로서니 어떤 사내가 제 동무를 챙긴답시고 혼기 꽉 찬 여인과 그리 내외를 하느냔 말이다. 

“야 이 놈아, 운이 녀석 좀 내비 둬! 너나 잘 하라고, 너나아!”

그 꼴이 여간 별 꼴이 아니라 오랜만에 흑사모도 한 마디 했으나 백동수의 반응은 당연하게도 시큰둥했다. 운이 녀석 드디어 돌아왔으니 이제 저가 곁에서 더욱 힘쓸 거란 말이나 늘어놓았던가. 여운은 그런 동수를 밀어내지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매번 곤란한 듯 구는데, 그러다가도 조금씩은 웃음을 터트리는 게 또 아예 싫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지선 역시도 별 말 않고 그저 유별난 둘에게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뗄 뿐이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동수야…. 초립은 요상하게 굴러가는 상황을 어떻게든 바로잡고 싶었다.  

“어서 와라, 운아.”

“초립아.”

양초립이 운을 주막으로 불러낸 것은 그 때문이었다. 백동수가 퇴궐하기 전, 흐린 달이 떴으나 아직 캄캄하지 않은 시간을 신중히 골라 겨우 지금이다. 어릴 적 동수 놈이 여기저기 쏘다니며 사고를 치면 운과 초립은 그 뒤를 쫓아 따르기 일쑤였고, 운이 돌아온 후에는 백동수가 껌딱지처럼 그의 곁에 들러붙어 있던 탓에 이제야 겨우 단 둘이 남겨진 상황이었다. 허나 어색하기는 커녕 제 둘도 없는 지기가 반갑기만 하여 초립은 마음의 시름을 한결 덜어내었다. 운은 바로 엊그제 본 지기가 무어가 그리 반가운지 얌전하던 걸음을 서둘러 초립에게 다가갔고, 그것은 초립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둘은 평상 위에 마주 앉아 그간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술 한 병을 금세 비웠다. 

결심했던 얘기를 꺼내기까지 수 번 망설였던 것이 무색하도록 초립은 술이 들어가기 무섭게 술술 제 걱정거리를 뱉어냈다. 그리고 그것은 여운 역시도 예상했던 내용이었음에 둘은 조곤조곤 대화를 이어갔다. 소란스러운 백동수가 자리에 없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있었다면 진작에 시작도 못 했을 이야깃거리기도 했다. 

“…그래서 운이 너도 갑갑할 게 아니냐. 동수 그놈이 어찌 그리 유난을 하는지, 참.”

“또 병이 도진 거지. 그냥 둬라.”

근심이 가득한 초립과는 달리 운은 특유의 덤덤한 말투로 말했다. 간간히 초립의 팔을 두드리며 살풋 웃어주기나 했다. 이리 보니 셋은 어릴 적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도 같았다. 백동수는 사고를 치고 초립은 안달복달 못 하며 운은 태평히 구경하거나 이따금 상상도 못한 방식으로 동수의 사고에 합세했다. 그럼 그 꼴을 보다 못한 초립도 합류하고는 했다. 초립은 한숨을 푹 내쉬며 잔에 담긴 술을 입 안에 전부 털어 넣었다.

“나 진짜 오래 못 살 것 같어. 이 웬수같은 놈, 빨리 장가나 들게 해야지.”

술을 따라주던 운의 손이 우뚝 멈췄다. 의아한 시선으로 올려다본 초립의 눈에 여운의 딱딱히 굳은 입꼬리가 들어왔다. 결국 술이 술잔 밖으로 줄줄 넘치는 꼴에 초립은 아우, 넌덜머리가 난다는 신음과 함께 다른 손으로 운의 손을 움켜쥐어 물렸다.  

“야, 운아. 너까지 왜 그러냐, 정말.”

“아, 어, 미안.”

“내 식견으로는 너네 둘 다 문제가 많다. 그것도 아~주, 아주 많아.”

초립은 손에 묻은 술을 소매로 대강 문질러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운은 여전히 어딘가 멍한 얼굴로 술잔 안에 동동 띄워진 술을 가만 바라볼 뿐이었다.

“아무튼. 그래, 장가다. 동수도 지 색시와 아이가 생기면 더는 너한테 별나게 굴지 않겠지. 듣기로는 무예도보통지도 완성까지 얼마 안 남은 듯 하던데, 운이 네가 말이나 한 번 꺼내 봐.”

“내가?”

“네가 아님 누구 말을 듣겠냐, 그게. 지선 아씨도 말은 않으시지만 요즘 동수 때문에 마음고생 하실 게 분명한데… 우리라도 나서야지.”  

초립의 말을 잠자코 듣던 운은 이내 고개를 숙였다. 응, 그렇네. 어물쩍한 대답만이 이어졌을까, 초립은 굴하지 않고 계속 한탄 섞인 근심을 늘어놓았다. 내려 뜨인 운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으나 초립이 알아챌 만치 눈에 띄는 것은 아니었다. 

한 시진 후.

어느새 새카매진 하늘에 둥둥 뜬 만월만이 유달리 환했다. 퇴궐하여 다림방으로 성큼성큼 걷던 백동수는 몇 번 걸음을 멈추고 달을 올려다보았다. 고작 몇 달 전만 해도 저 달을 보며 슬픔에 잠겼던 때가 있었는데. 훤칠한 낯이 입꼬리를 가득 끌어올려 시원스레 웃었다. 누가 보아도 기쁨이 가득한 낯이었다. 그때와 똑같은 사람을 떠올리고 있음에도 이리 다른 기분이라니, 새삼 저가 되찾은 것이 무엇인지 몇 번을 되뇌어도 부족했다. 

사색에 잠겼던 것도 잠시, 다시 앞을 바라보며 걸음을 바삐 옮겼다. 하염없이 그리워만 하며 후회하던 때는 끝이 났다. 이제는 언제든, 언제나, 얼마든지 함께 할 수 있었다. 오래도록 바라 마지않던 일이었고, 결국에는 해낸 일이다. 백동수는 다림방을 몇 걸음 남기지 않고 멈칫 몸을 세웠다. 그는 문 앞에 서 있는 인영을 보며 저도 모르게 또다시 과거의 기억에 잠겼다. 과거, 햇볕도 잘 들지 않는 판자촌서 유달리 머리 위로 만월 빛이 비추던, 꼭 만월이 그를 찾아 들어온 것만 같았던 사람이 있었다. 제 지기, 제 동무, 제 가족. 여운이 그때와 한치 다름 없이 쏟아지는 만월 빛을 듬뿍 받으며 다림방의 문 앞에 서 있었다.

“운아!”

백동수는 길쭉한 다리로 풀쩍풀쩍 뛰어 순식간에 운을 와락 끌어안았다. 고작 오늘 아침에 보았으면서도 이리 몇 년 못 본 것처럼 구는 것이 동수 운 초립 삼총사의 우정이라면 우정이었다. 여운도 그의 어깨와 목에 두 팔을 둘러 안으며 환하게 웃었다. 둘은 예전에도 뛸 것처럼 기쁜 일이 있거든 곧장 서로 끌어안고는 했기에² 하물며 꿈 같은 지금 시기에 포옹을 아낄 이유는 없었다. 운의 웃음소리가 좋아 동수는 그의 가는 허리에 팔을 휘감은 채 조심히 뒷머리를 쓰담았다. 부드러운 머릿결을 커다란 손으로 부드러이 쓸어내리면 품에 폭 안긴 몸은 몇 차례 손을 움직여 동수의 등을 토닥였다. 

“웬일로 마중을 다 나왔냐, 운아.”

“그냥. 수고했다, 백동수.”

 드디어 딱 달라붙어 있던 몸이 거리를 벌렸다. 그마저 얼마 되지 않는 틈이라 여전히 아랫배를 맞춘 채였으나 표정은 훤히 보일 자세였음에 두 사람은 구태여 더 떨어지지 않고 시선을 마주했다. 운은 입꼬리를 희미하게 올린 채 백동수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는데, 그런 운을 함께 바라보던 백동수의 두 눈이 일순 기민하게 끔벅였다.

“운아.”

“…….”

“운아?”

여운은 새삼스레 제 지기가 많이 변했음을 느꼈다. 예전의 백동수라면 여운 제 기분이 좋든 말든 눈치코치도 없이 헤헤 웃어대며 제 할 말만 늘어놓았을 텐데. 운은 왠지 모를 씁쓸한 기분을 감추며 입술만 우물거렸다. 거의 평생을 그림자에 묻혀 살수로 살아온 것 치고는 표정 하나 감정 하나 제대로 숨길 줄 모르는 제 문제 같기도 했다. 

그래, 언제나 문제는 저였다. 동수가 아니라.

운이 대답이 없자 백동수는 백동수대로 가슴이 바짝 조여 죽을 지경이었다. 쾌활히 웃던 표정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금세 미간을 구기며 여운의 이름만 애타게 불렀다. 무슨 일이 있든 누가 뭐라든 간에 그를 믿었으나 그러므로 불안하고 초조한 것이 있는 법이었다. 그것은 여운이 다른 누구도 아닌 여운이었기에 백동수에게 남길 수 있었던, 결코 씻을 수 없는 흉이었다. 운은 숨을 한 번 들이키고 바닥을 한 번 힐긋인 후에서야 그의 팔을 도닥이던 손을 거두어 그에게서 온전히 물러났다. 백동수가 제 허리를 다시 끌어안을 틈도 주지 않으려면 운은 곧바로 입을 열어야만 했다.

“운아, 너…”

“동수야.”

백동수의 얼굴이 이제는 얼음처럼 창백히 굳었다.

“나, 떠날 거야.”


 ¹ 백동수는 이에 관한 이야기만 나왔다 하면 매서울 정도로 기분이 가라앉았으므로 초립이 직접 입 밖에 낸 적은 없는 말이었다.

² 봉수직 시절, 봉화를 올리는 것에 성공했을 때도 둘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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