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수여운

첫사랑

동수여운


* 여운이 영화관에서 무사히 초립 및 동수와 화해한 IF엔딩 이후 시점


쪽, 쪼옥…….

컴컴한 밤, 장용위의 훈련생들은 물론이거니와 장대포 스승님과 장미 이모까지 잠들었을 시간. 웬 끈적이는 소리에 깬 초립이 반쯤 뜨인 눈을 비볐다. 졸지에 동수 놈과 운이의 몇 백 번은 되어가는 대련에서 심판 역을 떠맡은 탓에 깊은 새벽에도 쉽게 눈이 떠졌으니 꼭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 꼴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왠지 평소와 다른 날이다. 거칠게 일으키는 백동수의 손길도, 여운의 작은 한숨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쪽, 쪽쪽…

그 대신 이상야릇한 소리만 방 안에 소곤소곤 들어차고 있었다. 으아아악! 뒤늦게 상황 파악을 한 초립이 속으로 비명을 삼키며 눈을 땡그랗게 떴다. 아무리 한창 성장기인 사내 놈들만 득시글득시글 몰렸다지만 다 같이 자는 방에서 이 무슨 해괴한 짓이란 말이야? 저도 모르게 손을 파닥이며 바로 옆자리 동수 놈을 깨워보려 했으나 웬걸 곤히 자고 있어야 할 백동수는 온 데 간 데 없이 텅 빈 이부자리만 있는 게 아닌가. 이 놈이 또 운이를 데리고 대련하러 나갔나? 아니, 그럼 날 깨우지 않았을 리가… 순간 아주 불길한 생각이 초립의 등줄기를 싹 훑고 지나갔다. 

초립은 아주 천천히, 삐걱거리는 고개를 느릿느릿 돌려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을 뜬 채로 잠시 기절해야 했다. 초립의 옆 옆자리, 그러니까 여운의 이부자리 위…… 곤히 누워 자는 여운의 위에 백동수가 올라 타 엎드려 있었다. 


백동수의 첫사랑은 여운이었다.

12살, 죽동이라 불리던 코흘리개 외톨이 시절. 굳은 사지가 겨우 풀려가기 시작했을 즈음 판자촌에 나타난 아이는 누가 봐도 계집으로 착각할 만치 고운 사내아이였더랬다. 흑사모의 뒤에 얌전히 서서 꼴사납게 두 팔을 치켜 들고 벌을 서던 저를 내려다보던 그 애의 눈은 시리도록 차가웠음에도 반짝반짝 아름다운 것이 꼭 밤하늘 중 환하게 뜬 만월 같았다나. 초립은 의리도 정도 많아 여기저기 쉽게도 어깨동무하는 놈 태반인 그 백동수가 외톨이로 불렸었다는 사실을 쉽게 믿을 수 없어 동수 이 놈이 또 허세 가득한 무용담을 늘어놓으려나 싶었으나 금세 생각을 고쳐먹었다. 처음에는 예쁜 계집아이에게 반해 졸졸 쫓아다니던 젖먹이 얘기를 들려주나 했더니 그것이 여운의 얘기였던 것이다. 여운이 계집으로 오해받을 만큼 고운 것은 장용위 누구나, 어쩌면 조선 팔도 모두에게 물어보아도 부정하는 이 하나 없을 사실이었다. 양초립은 삐딱하던 자세를 고쳐 앉고 다시 백동수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그날처럼 모두가 잠든 어둑한 밤, 다림방의 평상에 앉아 술을 기울이는 둘은 이미 번듯이 자란 인물들이었음에도 저들끼리랍시고 예전 스무 살의 치기 어린 모습을 풀풀 풍겼다. 동수는 잔에 담긴 술을 멍하니 바라보다 푼수처럼 헤헤 웃었다. 

- 동무는 개뿔, 기생 오래비처럼 생겨갖고.

 백동수가 그 고운 사내아이에게 처음으로 한 말은 고작 그거란다. 차라리 정말 계집애였으면 모를까, 저와 같은 사내놈이 곱상하게 생겨서는 살살 웃어대니 열이 받았다고 했다. 눈도 코도 입도 모든 게 부리부리 큼직한 자신과는 정반대로 눈은 얄쌍하니 야릇하게 매서운데다 코도 오똑했으며 입술은 올망졸망 귀엽기까지. 그런 주제에 저보다 키가 한 뼘은 더 커서 그것도 재수가 없었더랬다. 

“지금은 네가 운이보다 훨씬 더 크잖냐.”

“야. 그때는 그랬다는 거지, 그때는. 지금 여운이 그 놈 쪼만한 거 누가 몰라?”

“그렇다고 운이가 또 쪼만하긴 뭘 쪼만해. 걔가 나보다 크다, 어? 동수 너같이 말만 한 놈이랑 비해서 그렇지. 내 식견으로는 말이야, 넌 여전히 문제가 많다.”

“양초립, 너는 그래도 이 살, 살이 듬뿍 올랐잖아. 운이는 삐쩍 마르기까지 해서 아직도 계집애 티를 못 벗었다니까.”  

 그래서 칭찬을 하는 건지 욕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동수놈의 말을 들으며 초립은 저 역시 운이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동수 저 자신은 부리부리 큼직큼직 어쩌고 했지만 실은 초롱초롱하니 시원하게 멋진 눈을 한 동수에 비했을 때 확연히 다른 외모기는 했다. 날카로운 눈은 두터운 애교살에 섞여 마냥 사납다기보다는 퍽 사랑스러워 보이는 매력이 있었고, 어린 나이에도 기다란 속눈썹들이 팔랑거리는 게 또 마냥 귀엽지는 않은데 멍하니 보고 있자면 속이 다 간질거리는…, 그게 운이었다. 백동수가 시골 똥강아지라면 여운은 한양 귀한 댁의 여우 같다고나 할까. 오죽했으면 장용위 첫날 대포 스승님이 자리를 비우기가 무섭게 다들 득달같이 여운에게 달려들었다. 물론 그 비정할 정도로 차가운 시선이나 십여 명을 한 번에 때려눕히는 오싹한 실력 때문에 한 바탕 두들겨 맞은 이후로는 모두가 알아서 운의 눈치를 보았지. 헉 소리가 날 정도로 고운 놈에게 곱다는 말 한 마디 쉽게 할 수 있는 놈이 없었다는 거다. 근데도 백동수 이 놈은 그런 여운에게 대뜸 기생 오래비 어쩌고 하고서도 사지 멀쩡히 계속 시비를 걸었단 말이지? 초립은 헛웃음을 뱉었다. 저 싸가지 없는 놈, 알고는 있었다만 어릴 적부터 정말 배포 하나는 죽이는 놈이다. 

- 안녕?

인품도 얼굴을 따라가나, 싸가지 없던 동수 놈한테 여운은 웃으며 인사를 했다나. 여우 같은 게 입꼬리 비죽 올리니 꼭 자신을 비웃는 꼴이라 그러잖아도 단단히 꼬여 있던 백동수의 속을 더욱 긁었다고. 더군다나 그리 만나 며칠 함께 먹고 자고 하다 보니 이 놈이 정말 계집인가 싶어 벗겨볼 마음이 들 정도로 얌전하기 짝이 없었댔다. 잘 때도 고이 손을 모으고 누워 작게 색색거리고, 밥을 먹을 때도 입가에 묻히기는 커녕 조금씩 떠 오물오물 씹었고, 걸을 때도 사뿐사뿐 영 거친 구석 없이 다소곳한 계집 꼴이었다는 게 아닌가. 초립은 자신이 직접 보지 못한 시절의 이야기였음에도 동수의 이야기에 쉽게 공감했다. 크게 떠들지도 호탕하게 웃지도 않는 운은 모든 행동거지가 얌전하기 짝이 없었으므로. 거기서 끝이었음 차라리 다행이었나, 백동수는 꼭 한탄하는 말투로 중얼거렸으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초립은 고개를 기웃거리며 어느새 텅 빈 술잔을 다시 채워주었다. 

여운의 무예를 처음 본 날, 백동수는 사지를 제 마음껏 움직이게 된 이래로 처음 가슴이 뛰었다고 했다. 군더더기 없는 몸짓, 한 치의 낭비도 없는 발도. 베고 뛰어넘는 것에 망설임 하나 없어 보이던 강인함. 인제야 동수는 그때의 운이가 얼마나 어떻게 어째서 강했는지 알았더랬지만, 그때 당시에는 그저 눈에 불을 켜고 저 재수 없고 멋있는 놈을 당장 끌어다 한 판 제대로 뜨고 싶었댔다. 심장이 크게 뛰고 호흡이 빨라져 참을 수도 없었다고 했다. 천하의 백동수가 타인을 보고 처음으로 흥분했던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래, 여운이 그 놈이 무예를 할 때만큼은 얌전한 계집과 판이하지. 그마저 바람 나는 새처럼 아름답다면 아름다웠지만.

아무튼 간에 알고 보니 참으로 질기게 엮인 인연인 것이, 백동수 여운 서로의 부친이 피를 나눈 의형제였다는 게 아닌가. 본 적도 없는 아비가 뜻과 마음을 함께 하기로 맹세한 지기의 자식이라니, 항상 악에 받쳐 살았던 동수는 그때 참으로 묘한 기분이었다고 했다. 넓은 세상에 꼭 혼자 남겨진 것 같아 이 빌어먹을 인생 끝내버리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는 데다가 사지가 멀쩡해진 후로도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불안감에 허구한 날 시달렸는데, 이상하게도 지기란 말 한 마디에 가슴 한쪽이 시원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라나. 심지어는 운이 먼저 이리 말했다고 했다.

- 우리도, 동무할까?

지기의 어린 시절 수줍음 어린 한 마디가 퍽 깜찍해 초립은 몇 번 소리 내 웃었다. 그러나 백동수는 그런 초립의 앞에서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로 부끄러웠다고 했다. 기다렸다는 듯 쿵쿵 뛰는 심음이 긴장감인지, 기쁨인지 알 수조차 없었다고. 그래서 대답 한마디 못했단다. 때마침 놀러 온 진주의 시답잖은 소리를 받아주느라 그때 운이 어떤 표정이었는지 돌아볼 생각조차 못했다고. 그게 그리 후회된다고, 백동수는 말했다. 동수의 목소리에는 그야말로 미련과 후회, 죄책감과 그리움이 듬뿍 묻어나고 있었다. 기가 막힌다, 고작 열둘도 안 먹었을 나이에 잠깐 부끄럼 좀 탔기로서니 무어가 그리 마음이 쓰인다고. 예전 같았음 초립은 그리 동수를 질책했겠지만, 지금은 입을 꾹 다물었다. 둘은 이제야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운, 말은 없음서 생각은 줄줄 많은 그 놈이 혼자 몇 십번은 고민하여 뱉은 한 마디였을지.

그 이후로는 초립이 알고 있는 둘의 장용위 시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백동수는 틈만 나면 여운에게 대련을 요구했고, 운은 군말 없이 그것을 다 받아주었다. 몇 초가 채 흐르기도 전에 끝난 대련이 수백 번, 백동수가 질퍽한 땅에 뒹굴며 눈물을 흘렸던 대련이 또 수백 번이다. 초립이 생각하기에도 백동수는 집념이 강한 놈이었으나 운에게는 그 정도가 더했다. 보통 놈이라면 먼저 질려 넌더리를 낼 텐데 운은 어째서 어떻게 왜 그것을 다 받아주고 있었는지 초립은 항상 의문이었다. 아무튼 간에, 그리 엉망으로 당하면서도 백동수는 끝내 운에게 맞서기를 포기하지 않았고 그게 둘 사이의 정을 만든 것인지 혹은 정말 부친들의 피를 타고났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것인지 둘은 걷잡을 수 없이 부지불식간에 가까워졌다. 어느 순간부터 동수는 운을 졸졸 쫓아다니며 야, 여운! 하고 퉁명스레 부르기보다 운아! 하고 다정히 부르며 호쾌하게 웃었고, 이를 박박 갈며 운에게 목검을 겨누던 손은 이제 쉽사리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매사 서늘한 눈빛이던 운은 입꼬리만 비죽 올리는 조소가 아닌 눈꼬리를 곱게 휘어 자그마하게 소리 내 웃고는 했으며 더 이상 백동수와의 대련에서 그를 땅바닥에 처박고 유유히 떠나기는커녕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우고 등을 토닥였다. 백동수는 여전히 칠칠맞고 싸가지도 없었으나 그럼에도 웃음이 많아졌으며 여운 역시 예전의 냉랭한 기색은 무뎌지고 한층 살가워진 인상을 하고서 동기들의 순정에 더욱 불을 지폈다.

이렇듯 동수의 목소리에 잔뜩 어린 죄책감이 무용하다 싶을 만치 백동수와 여운은 모두가 인정하는 둘도 없는 지기였다. 저를 포함해 셋이서 다니기는 했으나 둘은 저가 결코 끼어들 수 없는 무언가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초립은 애초부터 짐작했다. 어렸을 적엔 그것이 못내 섭섭한 적도 있더랬지만…… 어느 날 못 볼 꼴을 마주한 이후로 그런 생각도 쏙 들어갔다는 걸 동수 놈은 과연 알는지. 그래, 네놈이 애꿎은 운이한테 허구한 날 으르렁대더니 뒤에서는 그런 무뢰배 같은 짓을 했다 이거지. 초립은 텅 빈 술병을 상 아래로 내리며 혀를 쯧쯧 찼다. 혼자서 술 몇 병을 쭉쭉 들이킨 탓에 상에 이마를 박고 헬렐레 엎드려 있는 동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 광경을 본의 아니게 곱씹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백동수의 첫사랑은 여운이었다. 비단 동수 뿐만 아니라 장용위의 사내 녀석들 모두 한 번씩은 여운을 보고 가슴 설레어 잠 못 이룬 적이 있었다. 한창 혈기 왕성할 청소년기를 꼬장꼬장한 사내놈들과 동고동락하며 보내야 했던 그 힘겨운 시기에 웬만한 계집애보다 고운 놈이 떡하니 저들 틈바구니에 앉아 있는데 어느 누가 눈길 한 번 던지지 않을 수 있으랴. 초립 역시 말을 타는 운이를 힐끗여 훔쳐본 적이 많았다. 빠르게 달리는 말 위에 앉아 곱게 묶은 머리를 찰랑이며 조금의 빈틈 없이 활을 쏘는 모습은 꼭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여운은 예쁘장한 얼굴 못지않게 가히 백 년에 한 번 날 천재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만큼 으뜸인 무인이었으니 동기들의 철없는 순정은 고작 시선 몇 번으로 만족해야 했음에 더욱 애가 탔다. 그런 벗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동수는 쪼끄마한 게 고집만 우락부락할 시절에도 운이 옆에 달라붙어서 용을 쓰더니, 해가 갈수록 쑥쑥 커져 어느새 장대포 스승님을 훌쩍 넘어선 훤칠한 모습이 되어 더욱이 여운의 지기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섰다.

 - 백동수 저거 아닌 척 하더니 결국 저도 운이가 좋은 거야. 

저들끼리 쑥덕대는 동기들의 말을 웃어 넘겼던 초립은 그 말을 저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될 줄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지기가 웬 도둑놈마냥 남의 품에 숨어들어 자는 사내 놈 입술을 쭉쭉 빨아대는 광경 따위를 마주하게 될 줄은 더욱이 예상하지 못한 바였다. 그것도 그 도둑은 백동수에 가엾은 희생양은 여운이라니. 처음에는 워낙 호기심 많은데다 장난기도 심한 놈이니 운이를 골탕 먹여주려나 보다 합리화 했지만, 운의 위에 엎드린 백동수는 좀처럼 웃지도 물러나지도 않았다. 두 손을 고이 모아 눈을 감고 있는 운의 얼굴을 코 앞에서 한참 응시하고, 코 끝을 서로 맞대어 조금씩 비비다 급기야 혀를 내어 그 매초롬한 입술을 죽 핥았다. 몰래 하는 주제에 행동은 전혀 조심스러운 기색이 없다. 입을 벌려 운의 아랫입술을 살며시 물더니 몇 번이고 빨아대느라 쪽쪽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대체 저런 건 어디서 배워온 거냐, 저 미친 놈. 춘화만 보더니 저 놈 저거 진짜로 안될 놈이 됐구나. 초립은 눈을 질끈 감고 싶었으나 충격에 눈꺼풀 하나 움직일 수도 없었다. 말려야 하나? 아니, 그러다 정말로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 정말로 아작이 날 거다. 그래도 말려야 하나? 우리 운이가 알면 동수는 진짜 죽은 목숨인데. 백동수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쏟아져 운의 뺨을 간질였으나 그럼에도 동수는 연신 대담하게 입술을 맞붙였다. 완전히 서로 포개어 쩝쩝 소리가 나도록 문지르기도 하고 맞댄 채 살며시 벌려 입술 틈새에 혀를 살짝 집어넣었다가 빼기도 했다. 그 행위가 너무도 당당하여 오히려 초립이 더 운이 깨진 않을까 눈치를 살폈다. 그리 천 년 같은 시간이 흘렀을까, 한참 쪽쪽 대던 입술을 떼어내고서 동수는 못내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는 듯 운의 자는 얼굴을 또 하염없이 내려다 보았다. 일어나 있을 땐 그리 망아지처럼 해맑던 놈이 저런 파렴치한 짓을 하는 것도 모자라 조강지처 잃은 서방 마냥 낑낑대는 꼴에 초립은 구역질을 삼켜야 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도둑질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 순간의 치기 어린 불장난이라 여겼으나 도둑놈이 도둑질에 맛을 들였는지 그도 아니면 초립이 깨지 않았던 시절부터 이미 숱하게 해온 짓이었는지 백동수는 꼭 삼 일에 한 번은 뻔뻔스레 여운의 위로 올라 탔다. 분명 처음에는 입술만 몇 번 쭉쭉 빨고 핥던 것이 어느새 혀도 쑤욱 집어넣어 여운의 볼이 불룩 튀어나올 정도로 깊게 접문했다. 그 탓에 꿀꺽꿀꺽 목구멍 울렁이는 소리가 나던 것도 모자라 입술 틈새로 침이 뚝뚝 새어도 입을 떼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운이 자다가도 숨이 갑갑한지 몇 번 어깨를 뒤척거리거나 눈썹을 찌푸렸으나 그럴 때마다 백동수는 더욱 집요하게 운에게 입을 맞췄다. 고개도 여러 번 틀어가며 아주 잡아 먹을 듯 굴었다. 얌전히 운의 몸 바로 옆 바닥을 짚어 큰 몸을 지탱하던 솥뚜껑만 한 손은 이제 곱게 모인 여운의 손등을 조심히 쥐고 주물럭거리거나 냅다 운의 이불 속으로 집어 넣어 허리를 쓰다듬는 지경에 이르렀다. 미친 짓을 미칠 정도로 자주 하는데도 그리 기민하던 여운이 꿋꿋이 깨지 않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각시에게 해도 뺨 맞을 짓을 저 놈은 운이한테…. 어느새 동수의 도둑질에 익숙해진 초립은 그저 혀 섞는 소리만으로도 남몰래 한숨을 쉬며 눈을 굳게 감고 저가 빨리 잠들기만을 기다렸다. 이대로 계속 모른 척 하는 것은 운이 놈한테도 동수 놈한테도 못 할 짓이니 날이 밝으면 꼭 동수를 잘 달래어 도둑질을 그치게 하리라 일곱 번 째 다짐을 했었다. 

“초립아.”

“허어억! 으악, 악!”

한참 과거의 상념에 빠져있던 초립의 앞에 대뜸 여운이 나타났다. 퍼뜩 놀란 초립은 화들짝 비명을 지르며 뒤로 고꾸라질 뻔했다. 제 반응에 덩달아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끔벅이는 여운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스무 살, 장용위를 막 나왔을 그때와 다름없이 고우나 한층 더 야릇하게 성숙한 분위기를 풍기는 얼굴에는 3년 전 동수가 남겼던 흉터가 선명했다. 놀란 가슴을 겨우 붙잡고 숨을 몰아쉬는 초립을 바라보던 여운의 시선은 금세 동수에게로 향했다. 상에 머리통을 처박고 끙끙댄 덕에 동수의 틀어 올린 머리는 잔머리가 비죽비죽 새어 우스운 꼴이었다. 운이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었다. 동수의 말처럼 꼭 만월 같은 웃음이었다.  

“이만 정리해라. 대장님 곧 깨셔.”

“어, 어어. 그래. 산채에 다녀온다더니 일찍 왔네?”

“일찍은. 해가 지고도 한참은 지났어.”

운의 장난스러운 핀잔에 초립은 머쓱한 듯 볼을 긁적이다 서둘러 빈 술병을 모아 정리했다. 제 몸을 가누지도 못 하는 동수는 늘 그랬듯 평상에서 재울 생각이었는데, 여운은 구태여 그 덩치 큰 놈을 방 안에 눕히려는지 제 어깨에 두꺼운 팔 한짝을 걸치고 동수 놈을 부축했다. 

“야, 백동수. 정신 차려.”

나긋한 목소리는 엄하지도 까칠하지도 않았다. 아무리 조선제일검이라 칭송 받는 사내 두 놈이라지만 인사불성 취해 기대는 놈과 그 놈에 비해 턱없이 가는 몸으로 꾸역꾸역 지탱하는 놈의 뒷모습은 비틀비틀 보잘것없어 초립은 그만 몇 번 웃고야 말았다. 

 

결국 초립은 동수에게 일언반구 꺼내지 못했었다. 물론 운이에게도. 혼자 끙끙대던 나날이 금세 지나가 장용위를 나왔고 얼떨떨하던 사이 궐에서 봉수대를 거쳤다. 봉수대에서 궐로 돌아오고 나서는 큰 사건의 연속이었음에 저희 셋에게 도통 좋은 일이라곤 없었어서 동수의 파렴치한 도둑질은 어느새 잊고 살았다. 운이 다시 제 자리를 찾아 돌아와 모든 것이 평온해진 지금에 이르러서야 되뇔 수 있었던 것이다. 백동수는 여운을 마음에 두었던 것일 테지. 초립은 확신에 가까운 추측을 했다. 동수가 아무리 장난기 심한 놈이라고는 하나 가벼운 마음으로 남에게 달라붙는 놈은 아니었다. 오히려 완전히 가까워지기란 운이보다 어려운 놈이 아닌가. 더군다나 술만 들어갔다 하면 줄줄 쏟아내는 운이 타령에 귀가 빠질 지경이니 어린 마음에 여운에게 푹 빠졌던 게 분명했다. 사내 놈들은 술이 들어가면 으레 옛사랑을 추억하고는 하니까. 운이에게는 조금 미안했으나 그래도 지기의 한 철 첫사랑의 비밀을 떠벌릴 만큼 초립은 비정하지 못했다. 뭐, 동수 놈도 머리가 크고 나서는 이불을 걷어차며 창피해 할 과거일지 모른다. 초립은 다 치운 상을 접어 가마솥 옆에 잘 내려놓고 동수와 운이가 들어간 방 안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셋이서 같이 어깨 맞대고 자는 것도 좋을 듯했다.

그러나 초립은 문 앞에서 엉거주춤 멈춰섰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낯설면서도 익숙한 소리가 들렸던 탓이다. 

쪽….

꿈인가? 아님 동수 이 놈이 바늘 도둑 소도둑 된 꼴이라고 술에 취해 운을 덮치기라도 했을까? 삽시간에 파리해진 초립은 황급히, 그러나 살금살금 문틈에 고개를 가까이 했고, 이어진 광경에는 아주 잠깐 또 눈을 뜬 채로 기절했다. 

운이 쿨쿨 자는 동수의 위로 몸을 숙인 채 입을 맞추고 있었다. 술맛만 잔뜩 날 게 분명한 그 큰 입술을 느리게 핥고 쪼옥 입술을 맞대는 행동에는 초립이 다 낯부끄러워질 정도로 짙은 애정이 서려 있었다. 이마가 맞닿을 만치 가까운 거리서 자는 동수의 눈꺼풀을 한참 내려다보고 서로의 코 끝을 마주 부비며 끝에는 혀를 내어 입술 틈새에 묻은 침을 핥아 먹는…… 도둑질하던 스무 살 백동수와 조금도 다르지 않아 초립은 저가 정말로 꿈을 꾸는 것은 아닌지 혹은 취해서 헛것을 보는 것은 아닌지 몇 번이고 자신의 볼을 꼬집어야 했다. 동수 놈보다는 확연히 조심스럽고 보드라운 움직임의 여운은 양초립 저가 다 마음이 애달플 정도로 망설이고 있었다. 운이 모아주었는지 평소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동수의 양손이 얌전히 배 위에 얹어져 있었음에도 운은 그 손등 한 번 만져보지 못하고 몇 번이고 입술만 쪽쪽 느리게 달라붙었다가 떨어지길 반복했다. 기다란 머리카락이 동수의 볼을 간질이지 않게 한 손으로 조심히 잡고 있기까지 했다. 

초립은 그제야 떠올렸다. 백동수의 첫사랑은 아마도 여운이다. 자신의 첫사랑도, 장용위 동기들의 첫사랑도 여운이다. 그럼 여운의 첫사랑은 누구였을까? 잠든 와중에도 기척이 느껴지면 곧바로 살기를 띠고 덤벼들던 운이 동수가 그리 요란하게 쪽쪽 댈 때는 어째서 깨지 못했을까. 초립은 그만 문틈에서 몸을 물려 떨어졌다. 백동수와 여운은 모두가 인정하는 둘도 없는 지기였다. 저를 포함해 셋이서 다니기는 했으나 둘은 저가 결코 끼어들 수 없는 무언가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초립은 애초부터 짐작했다……. 그럼에도 이제서 깨닫는 것이 있었다. 초립은 붉어진 낯을 문지르며 아주 조심스레 걸음을 돌려 다른 방으로 향했다.

초립이가 등을 돌리는 순간, 운이가 놓아준 대로 얌전히 모여 있던 백동수의 손이 슬쩍 운의 허리를 감싸 안은 것은 그와 동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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