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백업
1. 밤
텐은 몰래 리쿠의 병실을 찾았다. 태어날 때부터 약한 기관지를 가진 제 반쪽은 호흡마저 얕아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 호흡을 알아채기 어려웠다. 조용히 닫은 문을 뒤로하고 침대 앞으로 다가간 텐은 상체를 기울였다. 낮게, 아주 낮게 들썩이는 심장께에 귀를 갖다 붙였다. 물고기의 꼬리짓과 같은 작은 박동. 텐은 숨을 들이켰다. 제가 지키고 싶은 작은 세계를 온신경에 새겼다. 두근. 두근. 두근. 심박을 따라 느리게 눈을 꿈뻑이던 텐은 몸을 일으켰다. 리쿠. 내가 너를 지켜줄게.
2. 하트를 주세요
노골적인 호의와 함께 다가온 이들에 텐은 손가락을 벌려 눈 옆으로 가져갔다. 웃고 있는 얼굴을 지나 시선은 심장께에서 멈췄다. 주황색 보석과 눈이 마주쳤다. 스냅핑 한 번에 허공을 지나 손안으로 들어온 보석을 헤아리던 텐은 저를 향한 시선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시선의 끝엔 소년이 서있었다. 두 개의 손을 서로 엇갈려 손가락을 얽어 만든 마름모 사이로 보이는 새빨간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천천히 손이 내려갔다. 그리운 얼굴이 텐을 똑바로 응시했다.
“헉, 사람인가?”
소년은 그리 말하며 돌아섰다. 텐은 손안의 오렌지색 하트를 움켜쥐었다.
3. 별
떨어지는 별을 반으로 나눈 조각. 그것이 나와 리쿠. 불완전한 우리는 함께해야만 온전한 하나가 될 수 있다.
조각난 반쪽짜리 별을 다 삼키지 못한 어여쁜 동생. 곱게 감긴 눈을, 얼굴을 눈에 담았다.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사랑스러운 이 존재를 지키겠다고 마음 먹은 건, 벌써 아득한 기억의 저편이었다.
어둠을 가르고 손을 뻗었다. 별빛을 받아 반짝이는 뺨 위로 조심스럽게 얹자, 손의 방향을 따라 고개가 기울었다. 호선을 그리는 얼굴을 따라 텐은 웃었다. 잘자. 나의 별님.
4. 작은 성
쿠죠 텐은 조막만한 손으로 소중한 물건들을 끌어 모았다. 낡은 장난감, 모서리가 닳은 동화책, 작아진 옷. 그것들오 쌓아올린 작은 성 안에 텐은 웅크려 앉았다. 작은 성 안에선 그리운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리쿠. 작은 성의 중심인 이름을 조심스레 꺼냈다. 곧 노랫소리가 멈추고 텐형아. 끝이 늘어지는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느릿하게 깜빡인 눈에선 포르르 별의 조각이 쏟아졌다.
4-1. 작은 성의 손님
눈보라가 몰아치는 나라의 끝엔 새하얀 성이 있었다. 불을 품은 심장과 함께 끝없는 겨울의 나라를 찾은 리쿠는 눈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한치 앞도 살필 수 없는 날씨. 이정표도 없는 길이었지만, 리쿠는 마음이 이끄는 곳으로 향했다.
이쪽이야. 리쿠. 나는 여기에 있어.
눈발을 타고 날아온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발이 멈췄다. 기억의 끝에 남아있는 목소리를 닮은 소리였다.
텐형아. 벌어진 입과 함께 새하얀 숨이 터져나왔다. 순식간이 허공으로 떠올라 사라지는 숨을 바라보다, 입술을 다물었다. 새빨간 눈동자 속에선 불꽃이 일렁였다. 눈보라가 멈추고 새하얀 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리쿠는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5. 고양이 탈
고양이인형탈을 마주한 텐은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화가 났냐고 묻는다면 no. 다만 이 더운 날에, 보기만 해도 더운 걸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이 불편할 뿐이었다. 코앞에 있는 고양이인형탈에 텐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용무가 있어?”
커다란 머리가 끄덕였다.
“나한테?”
다시 한 번 끄덕.
무슨 일인데? 그 물음엔 커다란 머리가 좌우로 움직였다. 그리곤 뭔가 생각이라도 난 듯, 박수를 치더니 제자리에서 빙글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춤을 추자고? 커다란 머리가 끄덕였다. 표정변화 없는 얼굴이지만 어쩐지 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엇 하나 계획되어있지 않고, 갑작스러움만 가득한 이 상황 속에서 텐은 이성적 사고를 내려놓기로 했다.
어울려주겠단 의미로 손을 내밀자, 고양이인형탈은 기쁘게 마주잡아왔다. 복슬복슬 털이 가득한 손을 맞잡고 텐은 춤을 췄다. 꼭 어린아이의 몸짓과 같은 춤이 이어졌다. 미지근한 여름 저녁 공기가 뺨을 간질였다. 노을빛을 받은 얼굴에 옅은 웃음이 번져갔다. 낮고 평평한 평지 무대에 조명이 켜졌다.
하나 둘 밝혀지는 가로등 불빛에 텐과 고양이인형탈은 천천히 움직임을 멈추며 손을 풀어냈다. 텐은 새빨간 고양이 얼굴에서 익숙한 얼굴을 겹쳐 봤다. 설마,
“…아, 더 못 참겠다!”
복슬복슬한 털이 가득한 손이 고양이 머리를 붙잡아 기울였다. 그 안에서 빠져나온 건, 땀투성이의 동생이었다. 손에 쥐고 있는 고양이 머리만큼 새빨간 얼굴에 텐은 다급하게 앞으로 다가갔다.
“리쿠! 이게 무슨 짓이야! 더운데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날카로운 목소리와 달리 젖은 얼굴을 닦아주는 손길은 다정하고 조심스러워서 리쿠는 웃었다.
“텐형아아.”
“…왜.”
“생일 축하해.”
머리카락을 넘겨주던 손이 멈췄다. 천천히, 마주친 시선에 리쿠는 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환히 웃어보였다. 텐은 그 얼굴을 한참동안 들여다보다, 팔을 뻗었다. 나 축축한데. …괜찮아. 뜨끈뜨끈 여름의 온기가 가득한 몸을 끌어 안았다. 텐은 숨을 들이켰다. 들이켜진 열기가 심장을 녹여갔다.
6. 돌아오는 밤
10월 마지막 밤에는 그리운 사람이 돌아온다고 하잖아. 혹시 텐도 보고 싶거나 그리운 사람이 있어?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넘겼을 이야기가 좀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운 사람.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지만 텐은 그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지 못했다.
아직은 안 돼.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기다려줘.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이름을 삼키며 텐은 눈을 감았다.
텐형아. 앳된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텐형아. 옷자락을 붙잡아 당기는 손길에 텐은 눈꺼풀을 떠올렸다. 새빨간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기억의 끝에 남아있는 얼굴이었다.
“리쿠.”
순식간에 터져 나온 이름에 동그란 눈이 곱게 접혔다. 말랑한 볼이 봉긋하게 올라가며 작은 입이 호선을 그렸다.
텐형아 잘 잤어? 텐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중이란 걸 자각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제 손을 잡아끌어 뺨을 감싸는, 작은 동생을 마주한 텐은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응. 잘 잤어.
7. 공유
엣취!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리자 사방을 둘러싼 걱정 어린 시선에 리쿠는 다급히 손을 저었다. 단순한 재채기야. 정말? 따라 붙는 추궁과 같은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리쿠는 얼굴 옆으로 두 손을 펼쳐보였다. 결백함을 주장했지만 이오리의 의심어린 시선은 연습이 끝날 때까지 따라 붙었다.
오늘 그런 일이 있었어! 억울함을 담은 투정과 같은 말을 핸드폰 너머로 전하며 리쿠는 발을 동동 굴렀다.
중간중간 들려오던 작은 웃음소리가 그치는 가 싶더니, 반대편에서 들리는 이름에 리쿠는 고개를 기울였다.
“리쿠.”
“응?”
“덥다고 몸 차게 하지 말고.”
“이제 그런 거 쯤은 나도 알아.”
볼멘소리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텐의 걱정이 싫은 건 아니었지만, 언제까지고 걱정을 끼치는 동생이곤 싶지 않았다.
“리쿠는 환절기에 감기가 잘 걸리잖아. 조심하도록 해.”
돌아온 건 다정한 걱정이었다. 리쿠는 눈썹을 늘어뜨리며 한 박자 늦은 대답을 전했다.
“…네에. 텐형아도 감기 얼른 나아. 그럼 잘 자!”
뭐라 말할 틈도 없이 끊긴 전화에 텐은 핸드폰 화면을 내려 봤다. 무슨 일이 있냐는 가쿠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아무 일도 없다기엔 좀처럼 풀리지 않는 미간에 가쿠는 눈썹을 들썩였다.
“아닌 거 같은데.”
“…감기 걸린 거, 티가 나?”
“텐, 감기 걸렸어?”
목 안쪽이 아주 조금 거슬리는 정도였다. 하루 종일을 붙어 지내는 멤버들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경미한 증상인데, 어떻게 전화 통화만으로 알아챈 거지.
“혹시 그런 거 아닐까? 떨어져 있어도 한 명이 아프면, 다른 한 명이 느낀다고 하잖아.”
류노스케가 건네는 컵을 받아들며 텐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건 말도 안 돼. 정말로 그렇다면,
8. 글자
텐은 글을 읽는 법을 빨리 깨우쳤다. 영특하네. 어른들의 칭찬이 싫은 건 아니었지만, 글을 읽을 수 있게 되면서 텐에겐 좋은 일이 늘어났다.
텐니, 다음엔 이거 읽어줘. 앞으로 내밀어진 동화책을 받아 들며 텐은 고개를 주억였다.
따끈따끈. 리쿠의 체온이 그대로 묻어나는 책 표지에 텐은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얼마나 소중히 품에 안고 기다릴 걸까. 표지를 넘기자 엉덩이를 당겨 앉으며 바짝 붙어오는 리쿠에 병원 냄새가 풍겨왔다.
텐니? 저를 돌아보는, 저와 똑닮은 얼굴에 텐은 고개를 저으며 입을 뗐다.
옛날 옛날에, 공주님이 살고 있었어요.
능숙하진 않지만 천천히 이어지는 이야기에 리쿠는 귀를 기울였다. 세상 그 어떤 동화보다도 재밌는 이야기가 펼쳐졌다.
9. 심박
고르게 오르내리는 가슴 위로 손을 얹었다. 느리게 타오른 온기가 손바닥을 미지근하게 데웠다. 텐은 손을 천천히 내렸다. 가슴을, 배를 따라 내린 손은 말려 올라간 티셔츠 아래를 파고들었다. 낯선 손길에 얌전히 누워있던 몸이 뒤척였다. 옆으로 넘어가는 몸에, 텐은 어린 아이를 어르듯 속삭였다.
“쉬이, 괜찮아.”
기울어지는 가 싶던 눈썹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이어지는 숨소리에 텐은 밀어 넣었던 손을 움직였다. 마른 배를 쓸고 올라가자, 손바닥을 두드리는 감각이, 리쿠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감각이, 느껴졌다.
텐은 이 감각을 잊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두근, 두근, 두근, 일정한 심박이 심장을 간질여왔다.
10. 감기
찬바람이 불어올 즈음, 리쿠에겐 어김없이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 집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다시 병원으로 향하는 리쿠를 보며 텐은 마음이 복잡했다. 아버지의 어깨엔 커다란 가방 하나와 반대쪽 어깨엔 새빨간 얼굴이 된 리쿠. 그렇게 아버지와 리쿠가 멀어져가는 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조용해진 집안과 함께 텐은 아침을 맞이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리쿠가 학교 잘 다녀오라며 배웅해줬는데. 깨끗한 현관을 바라보다 텐은 문을 닫고 집을 나섰다.
학교는 소란스러웠다. 각기 다른 소리들이 뒤섞여 교실을 채웠다. 어제 책에서 봤는데 감기는 옮기면 낫는데. 뭐어? 진짜? 시답지 않은 이야기와 함께 번지는 웃음소리에 텐은 느릿하게 눈을 꿈뻑이며 창밖을 바라봤다. 감기는 옮기면 낫는다고.
학교가 끝나자마자 어머니께 리쿠의 상태가 어떤 지 물었다. 다행히 이번 감기는 가벼운 증상으로 면회가 가능하다기에 텐은 곧장 리쿠가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땐, 저녁노을이 창밖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리쿠는 병실 가운데에 있는 침대에 누워있었다. 고르게 오르고 내리는 배와 함께 가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히 병실 문을 닫고 침대 곁으로 다가간 텐은 발갛게, 열기가 남아있는 얼굴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손에 묻어있는 찬기운을 따라 머리가 기울여졌다. 손바닥을 간질이는 뜨끈한 숨에 텐은 몸을 숙였다.
리쿠. 내가 네 감기를 가져가 줄게. 어서 나아.
11. 이카루스
그 아무리 신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 하여도 분수 이상의 것을 탐내어선 안 됐다. 텐은 녹아내리는 날개를 부여잡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끊임없이 내리 쬐어지는 햇살 아래 텐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사랑하는 존재에게 다가가는 것도, 그 품을활공하는 것도, 불가능해진 반쪽짜리 날개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깃이 다 빠진 날개뼈를 붙잡았다. 이를 악물고 곧게 뻗은 단단한 대를 꺾었다. 순식간에 으스러진 뼈와 함께 거친 파열음이 귓가를 울렸다.
텐은 목을 젖혔다. 심장 아래에서부터 울린 비명이 터져나왔다. 반쪽짜리 날개가 퍼드덕 거렸다. 힘없이 축 쳐진 몸 주변으론 하얀 깃털이 나부꼈다. 하얀 머리카락 위론 눈부신 빛이 쏟아졌다.
이 순간에도 저 빛나는 존재를 사랑한다는 사실에 텐은 입꼬리를 당겼다.
12.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이별
어깨를 감싸는 온기에 텐은 눈을 동그랗게 했다. 가볍게 안고 있던 팔에 힘이 더해지며, 맞은 편에 있는 몸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뺨이 맞닿았다. 리쿠의 온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텐은 허공을 젓던 손을 올려 리쿠를 마주 안았다. 맞붙은 가슴 아래로 심박이 느껴졌다. 두근, 두근, 두근, 점차 제 속도를 찾아가는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겹쳐졌다.
“텐니.”
“왜 그래?”
어깨 위로 얹어져 있던 얼굴이 떨어졌다. 마주한 얼굴엔 무대의 열기가 남아있었다. 눈동자 속에 비친 제 얼굴을 보며 텐은 눈썹을 늘어뜨렸다.
“있지, 포옹은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이별이라고 해. 이 이별을 마지막으로, 앞으로는 쭉 함께하자.”
보석같은 눈동자가 접히며 제 모습을 감췄지만, 리쿠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반짝반짝 빛났다. 길게 다문 입술과 함께 텐은 허리를 안고 있던 손을 옮겼다. 리쿠가 그러했듯, 맞은 편에 있는 어깨를 감싸 안으며 텐은 머리를 기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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