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타마키 - 해야 하는 말
*유타의 여동생이 등장합니다. 여동생 설정을 임의로 조작하고 있습니다.
* 여러 날조가 판을 치니 주의해주세요.
오빠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은 건 한 달 전의 일이었다. 나는 지금 오빠의 여자친구를 만나러 가고 있다. 오빠가 내가 있는 곳으로 오겠다고 했지만 간만에 도쿄를 구경하고 싶어 내가 가겠다고 했다. 오빠가 역으로 마중 나가겠다고 했지만 천천히 구경하며 가겠다고 거절했다. 오빠는 가게 주소를 보내주며 그리로 오라고 했다. 고등학생인 내가 가기엔 고급진 레스토랑 같았지만 오빠나 오빠 여자친구는 성인이니까 그 편이 어울릴지도 몰랐다.
오빠는 원래 다니던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지금의 학교로 전학을 가 올해로 4학년이 되었다. 곧 졸업을 앞두었다. 전학 간 학교는 특수 목적의 기숙 고등학교였다. 보통의 학교와 다른 학년제도 그 때문인 듯 했다. 오빠가 멀리 떨어진 도쿄로 전학을 갔지만 오빠와 연락은 평범하게 주고받고 있다.
사실 오빠가 전학을 간다고 했을 때, 그곳에서 지내는 게 오빠에게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오빠에게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한 무렵부터 우리 집은 행복하지 않았다. 부모님과 오빠의 사이가 틀어 졌기 때문이었다. 오빠를 탓하는 건 아니다. 오빠가 전학을 가게 된 일도 그 일의 연장선이었다. 오빠가 전학을 간 지 1년을 좀 넘었었나, 갑자기 나에게 이쪽에서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었다. 이쪽, 이 뭘까. 아무리 물어도 오빠는 웃기만 하고 도무지 얘기해주질 않아서 나 혼자 여전히 끙끙 앓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오빠는 그쪽에서 바쁘게 지내고 있는 모양이다. 가끔 연락이 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고 얼굴을 못 본 지는 2년을 넘어 가물가물해질 정도로 꽤 되었다. 게다가 해외에 다녀왔다며 종종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도대체 고등학생이 뭘 하고 다니는 건가 싶었지만 특수학교에 다니니까 그럴 수 있다고 넘겼다. 물어봤자 대답 해주지 않을 거고. 그럼에도 오빠가 행복하다는 것 정돈 동생으로서 알 수 있었다. 오빠는 내가 하는 몇몇 질문에 대답을 안 해줄 뿐이지 이런 저런 얘기는 많이 했다. 좋은 친구들도 많이 만난 모양이고 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오빠의 적성에 맞는 모양이었다. 오빠에게 말은 못했지만 오빠가 행복해서 진심으로 기뻤다. 가족끼린 유난히 그런 말을 하기 꺼려진단 말이지.
오빠의 여자친구는 어떤 사람일까. 오빠를 만나러 가는 신칸센에서 내내 생각을 했다. 오빠는 어렸을 적에 여자친구가 있었다. 지금의 나보다도 어렸지만 꽤나 미인이었을 뿐더러 내게 친언니처럼 살갑게 대해주곤 했다. 오빠와 지극히 평범한 남매처럼 지내긴 했지만 오빠의 여자 취향 따위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 언니도 그쪽 사람일까? 어떤 느낌의 사람일까? 누가 먼저 고백 했을까? 지금으로썬 아무 의미 없는 질문을 머릿속에 동동 나열했다.
오빠는 친구들과 재밌게 지내고 있다는 얘기는 자주 했지만 –실은 나누었던 대화의 90%는 친구들 얘기지만- 그 친구들이 정확히 어떤 사람들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다들 상냥하고 소중한 친구들이라고 말할 뿐이었다. 이름만 알고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른다. 사진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누마키, 마키, 판다. 판다는 이름이 아니라 별명인 것 같고 마키씨만 여자다. 혹시 마키씨가 여자 친구인가? 오빠가 유독 마키씨 얘기를 많이 하긴 했다.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라며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고 했다.
[나 사귀는 사람이 생겼어. 너랑 만나게 하고 싶은데, 시간 괜찮아?]
저 문자가 다였으니 나로선 정보가 없다. 오빠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내게 말하지 않았다. 이쪽은 꼬박꼬박 보고하는데도 말이다. -연예인일 때도 있고 자주 가는 카페 알바생일 때도, 버스에서 몇 번 마주친 사람일 때도 있다. 대게 금방 식는다.- 하지만 오빠 성격에 좋아하지 않는 여자가 고백했다고 사귈 것 같지는 않고 나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짝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여자 친구가 생겼다고 말하는 오빠의 목소리가 크리스마스에 갖고 싶던 선물을 받았을 때처럼 격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도쿄는 여름 방학에 친구들과 왔던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래봤자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았다. 약속 장소는 친구들과 저번에 갔던 카페 근처라 어렵지 않게 갈 수 있었다. 가을 날씨의 선선함을 실컷 느끼며 지도와 풍경을 번갈아 보며 걷다보니 오빠에게서 먼저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우리 먼저 왔는데 천천히 와. 일부러 일찍 온 거니까!]
아직 약속시간이 15분이나 남았는데도 부지런했다. 나도 앞으로 5분 후면 도착이었기에 굳이 걸음을 재촉하진 않았다.
들어선 식당에서 오빠를 찾는 건 의외로 어려웠다. 영상 통화로 종종 얼굴을 보긴 했을 때도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생각은 했지만, 실제로 보니 훨씬 더 어른스러웠다. 내가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영 갈피를 못 잡자 오빠가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손을 흔들며 나를 불렀다.
"인사해. 내 여자 친구야.“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얘기 많이 들었어요. 젠인 마키라고 합니다. 저는 성보다 이름이 편해서요.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아, 네.”
오빠의 옆에 앉아있던 마키씨는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손을 잡으며 인사했다. 고개를 들어 마키씨를 제대로 보게 되었을 때 나도 모르게 헉 소리가 날 뻔했다. 마키씨의 얼굴엔 화상 자국이 진하게 남아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이쪽을 흘끔대며 수근 거리는 것도 같았다. 단순히 소란해서 그런 거라 생각했는데 우리가 자리에 앉아 간단히 안부를 주고받는 동안에도 그러는 걸 보니 마키씨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익숙한 듯 무시하고 있었다.
"식사는 뭘로 할래. 새우 필라프, 괜찮아? 좋아하잖아."
"응. 그걸로 할래. 고마워."
오빠는 웨이터를 불러 주문을 넣었다. 나와 마키씨 사이에서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이 돼서 망설였더니 마키씨가 먼저 대화를 시작했다.
"화상 자국, 신경 쓰이죠? 사고를 당해서요. 오래전 일이에요."
"아, 그러셨구나. 헉, 근데 전혀 신경 안 쓰였어요!“
마키씨는 은근히 옆 테이블 대화에 신경이 쏠려있는 나를 눈치챘던 것 같다. 나는 손사레를 치며 마키씨 말을 부정했다. 내 앞에 있건 물을 한 잔 들이키니 이제야 머리가 돌았다. 젠인 마키, 마키. 그 마키씬가? 성까진 기억이 안 나서 결단은 일렀다.
“마키랑은 같이 학교에 다니고 있어. 내가 자주 말했었지?”
“아, 응. 기억나. 오빠가 옛날부터 마키씨 칭찬 엄청 많이 했어요. 닮고 싶은 사람이라고요.”
“유타, 넌 사람 부끄럽게 그런 말을 하고.”
“하지만 마키씨는 그럴 만한 사람이잖아.”
투닥투닥 다투는 두 사람을 보고 있으니 절로 가슴 한 구석에서 열기가 퍼졌다. 누가 먼저 좋아했는진 안 물어봐도 될 것 같았다. 찬찬히 마키씨를 보면 화상 외에도 눈에 띄진 않지만 이런 저런 상처가 많았다. 그건 오빠도 마찬가지였고. 그쪽 일이라는 건 다 그런 건가 싶었다. 나는 큼큼, 목을 가다듬고 두 사람에게 하고 싶었던 질문을 하나씩 꺼냈다.
“음, 혹시 뭐 좀 물어봐도 될까요?”
“네. 뭐든 물어봐요.”
“그건 좋지만 그래도 곤란한 질문은 안 돼.”
“오빠는 내가 그럴 사람 같아? 걱정 마.”
“상관없어. 질문 공세는 이미 한바탕 받아서 대답도 깔끔해.”
동급생 4명 중 2명이 사귀면 아무래도 많이들 관심을 갖겠지. 게다가 서로 만난 지 3년이 넘어서 이어진 거니까. 나였어도 3박 4일을 취조했을 거다. 같은 학교 친구끼린 두 사람이 어떻게 지내왔는지도 알고 있을 테니 더 흥미진진했으리라. 나는 침을 한 번 삼키고 입을 열었다.
“누가 먼저 고백했어요?”
“그렇게까지 긴장하고 물어볼 만 한 건 아닌데. 내가 먼저 했어요.”
“와, 정말요? 오빠가 아니라?”
“어? 의외야?”
“아니, 보통 먼저 좋아하는 쪽이 할 텐데 싶어서. 오빠가 먼저 좋아한 거 아니야?”
“아니에요. 먼저 좋아한 쪽은 나예요.”
“헉, 정말요?”
“뭐, 정확히는 고백을 한 게 아니라 고백을 들켰다고 해야 되지 않나. 안 그래, 유타?”
“그렇지만 그렇게 안 했으면 평생 말 안 할 생각이었잖아.”
“평생까진 아니고 언젠가 했겠지.”
“뭐야~ 둘만 아는 얘기하지 말고 나한테도 말 좀 해줘요!”
"음, 그게..”
-
“어이, 유타! 아침 훈련하자!”
마키는 유타의 기숙사 방문을 두드렸다. 4학년이 된 두 사람은 함께 아침 연습을 하고 수업을 듣고 또 연습을 하는 1학년 시절의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다른 점은 그런 생활은 가뭄에 비 오는 것처럼 드문 일이란 것이었다. 4학년은 실질적으로 사회인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예전보다 일을 자주 맡게 되었다. 특급인 유타와 1급인 마키는 주술계의 핵심 인력이었다. 그런 두 사람을 상층부에서 가만 놔둘 리 없었다. 학교는 예의상 다니는 수준으로 머물렀다.
이렇게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주술사들은 모처럼 일이 없는 날엔 느긋하게 휴식을 즐기곤 한다. 그 말은 훈련이 휴식인 마키에겐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유타는 마키가 하잔 일이면 무엇이든 좋았기에 순순히 마키의 제안을 따랐다. 이 학교에서 마키와 어울릴 만한 사람은 유타가 유일한 것도 한몫했다.
"좋은 아침, 마키."
"응, 너도. 준비 다 했어?"
“응. 그럼 갈까?”
유타는 이미 채비를 다 하고 마키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계는 아직 6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기에 단잠에 빠져있을 후배들을 배려하여 기숙사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훈련을 시작했다. 칼집끼리 부딪히는 소리와 몸이 부딪히는 소리 사이에서 이따금씩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 한쪽이 지칠 때까지라기 보단 후배들이 슬금슬금 일어나 웅성이는 사람 소리가 들릴 때까지 이어지는 훈련이었다. 그간 있었던 일들도 얘기하는, 두 사람 만의 특별한 교류 시간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미친 사람들로 보일 수 있겠지만. 그리고 훈련을 마치면 꼭 같이 아침을 먹었다. 이른 시간이다보니 단둘이 먹을 때도 있고, 판다와 이누마키를 불러 같이 먹을 때도 있었다. 오늘처럼 후배들이 식당에 있는 날도 있었다.
“선배, 안녕하세요!”
“어, 안녕.”
유타보다 학교에 체류하는 시간이 긴 마키가 후배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두 사람 모두에게 인사를 하는 후배들이었지만, 후배들이 말을 더 붙이는 쪽은 마키였다. 호쾌한 성격의 마키를 남몰래 흠모하는 후배들도 많았다. 어째선지 마키를 좋아하는 후배들은 전원 여자여서 그런 후배들을 쿠기사키가 주도해 마키의 팬클럽을 만들었단 소문이 돌 정도였다.
“그럼 나중에 꼭 부탁드려요!”
후배들에게 알음알음 체술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이를 눈여겨 본 고죠의 제안으로 교사가 되기로 했다. 이례적으로 진지하게 제안을 해서 깜짝 놀랐던 마키였다. 처음으로 선생다운 면보를 봤다며 선생은 선생이라고 했다. 방금도 후배와 함께 체술 연습을 하기로 약속한 참이었다.
“마키는 정말 대단해. 후배들이랑 금방 친해지고.”
“그야 당연하지. 너보다 쟤네들이랑 오래 있으니까. 너랑도 나만큼 지내면 잘 따를 거야. 메구미나 유지도 너 잘 따르잖아.”
“그럴까? 마키를 꽤 오래 봤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모르는 부분도 많네. 배우고 싶은 점들도 많아.”
“무슨 그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냐."
"역시 마키다워지고 싶어."
"그만해. 너한테 그런 말 들으면 기분이 이상해.”
마키는 고개를 푹 숙여 식사에 집중했다. 귀가 약간 빨개진 것도 같았다. 마키는 예전부터 유독 유타의 칭찬에 약했다. 아무개 10명에게 칭찬받는 것보다 유타의 말 한마디를 듣는 것이 더 힘이 되었다. 유타의 말은 순수한 진심만이 담겨있기 때문이었다.
'사람 마음 복잡하게 만드는 데로도 따라올 사람이 없다니까, 저 녀석. 네가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이 나뿐이란 걸 아는 이상 널 좋아할 수밖에 없잖아.'
마키는 쑥스러운지 뒷목을 긁적였다. 마키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흐름의 주도권을 잡는 사람이다. 상대가 연하든 연상이든, 강하든 약하든 신경 쓰지 않고 본인답게 행동했다. 하고 싶은 말을 꺼냄에 있어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랬기에 젠인가에 있을 적, 유독 심하게 괴롭힘을 당했을지도 몰랐다. 다른 떨거지들처럼 얌전히 박혀있었다면, 원래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젠인가에 당주가 되겠다니 집안을 뒤엎겠다니 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면 마키는 이곳에 없을 것이었다. 상반신에 화상을 입는 일도, 마음 속에 평생 한 사람을 묻고 살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마키답지 않았다.
나는 마키처럼 되고 싶어. 유타의 이 말을 마키는 여전히 뚜렷히 기억하고 있었다. 바보처럼 인정 받은 기분이 들었던, 생전 처음 느껴보는 토할 것 같이 심장이 간질거리는 그날은 한 폭의 그림이 되어 액자에 걸려있었다. 마키에게 쑥스러움이나 간질거림을 느끼게 하는 사람은 유타가 유일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을 사랑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된 건 불과 몇 개월 전이었다. 마키가 아끼는 후배인 쿠기사키가 동급생인 이타도리와 연애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부터였다.
"노바라, 행복해보이네."
"좀 부끄럽네요."
"난 연애를 해본 적이 없어서. 어떤 느낌이야?"
"저도 연애는 이번이 처음이에요. 중학교엔 멍청이뿐이어서요. 느낌이 어떻냐고 해도.. 음, 같이 있으면 기분이 좋다? 아무 것도 안 해도 재밌고."
"그건 친구랑 있어도 그렇지 않나."
"그거랑 달라요. 선배랑 있는 것도 무척 좋은데요. 가끔씩 재채기 나올 것 같은 간질거림이랄까요, 그런 느낌이 들어요."
그런 느낌? 그런 걸 이성적 호감이라고 한단 말이야? 마키는 쿠기사키에겐 드러내지 않았지만 꽤나 동요했다. 유타를 보면 느끼는 기분이 그런 것이었다. 오랜 밤을 꼬박 세우며 거들떠도 보지 않던 로맨스 영화 따위를 찾아 보았다. 한결같이 쿠기사키와 같은 말을 했다. 그런 느낌은 사랑이라고 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영화를 재생하고 있던 노트북을 덮은 마키는 팔로 얼굴을 가렸다. 이런 감정을 다루는데는 영 익숙해지지가 않아서 마음이 파도가 출렁이는 것처럼 흔들렸다. 식도가 불타는 기분이 들었다. 마키는 유타에게 인정 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던 그날로부터 유타를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키는 하고 싶은 말을 웬만해선 다 하는 편이지만, 해야 할 말들은 마음 한 구석에 묻어두고 있었다. 적당한 시기를 보다가 놓쳐서 단단한 나무가 되어버린 말들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행할 말이 생기면 반드시 전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식도를 뜨겁게 달구는 이 말을 전하는 것은 조금 더 미래의 일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마키가 해야할 말은 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의 것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조금, 미루고 싶은 마키였다.
“마키. 마키?”
"어?"
"무슨 생각해?"
"아, 그냥, 다른 것 좀."
"아침 먹고 약속 있어?"
“노바라랑 시내 나갈 생각인데. 왜?”
“아무 일 없다고 하면 이누마키랑 판다도 오늘 학교에 있으니까 오랜만에 다같이 영화 보자고 하려고 했어.”
"저녁엔 될 지도 몰라. 음, 학교에 있는 전원 모아서 저녁에 보는 건?"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해볼게."
"그래. 그럼 나 준비해야해서 먼저 일어날게."
"응. 재밌게 놀다 와!"
마키는 자신에게 손을 흔드는 유타를 뒤로 하고 쿠기사키와의 약속을 위해 외출 준비를 하러 기숙사로 돌아왔다. 훈련으로 흘린 땀을 씻고 어제 신경 써서 쿠기사키와 함께 골라둔 옷을 입었다. 시밀러룩으로 입어요! 귀여운 후배의 부탁은 뭐든지 들어주고 싶은 마키였다. 늦여름과 초가을 사이에 어울리는 얇은 흰색 골지 니트에 남색 카디건을 걸쳤다. 하의는 검은색 부츠컷 바지에 저번 외출에서 산 벨트를 맸다. 쿠기사키는 남색 롱스커트와 흰색 셔츠, 검은색 재킷을 매치했다. 쿠기사키는 이미 준비를 다 하고 교문에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두 사람의 목적지는 요즘 인터넷에서 인기가 많은 카페였다. 그런 곳을 좋아하는 쿠기사키의 의견에 따라 정한 것이었다. 얼굴에 화상을 입은 여자와 안대를 한 여자가 카페에 들어서니 그 소란하던 카페가 일순간에 조용해졌다. 두 사람에겐 이미 익숙한 풍경이었고, 그런 것에 상처를 받는 사람들이 아니어서 남들과 똑같이 빵을 담고 음료를 골랐다.
"분위기 좋네. 이런 데는 내가 아니라 유지랑 왔어야 되는 거 아니야?"
"저번에 왔었어요. 그래서 선배랑 온 거예요. 음료도 맛있고 빵도 맛있었거든요. 선배 취향일 것 같았어요."
쿠기사키 예상대로 카페는 마키 취향에 부합했다. 테라스 좌석은 갖가지 식물로 둘러싸여 있어 언뜻 보기에 독립된 방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실제론 천장이 뻥 뚫려 있어 선선한 바람을 여유롭게 즐기기 좋았다. 신중히 고른 빵도 전부 입맛에 맞아서 마음에 들었다. 시킨 음료가 어떤 맛인지, 어제 맡은 업무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각 브랜드에서 가을을 맞아 출시한 신상이 어떤지, 요즘 관심사는 무엇인지 등등 수다를 떨다보니 어느새 음료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얼음을 뒤적이던 쿠기사키는 핸드폰을 좀 만지작거리더니 마키의 눈치를 살피고 장난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근데 선배는 좋아하는 사람 없어요?"
"좋아하는 사람?"
"네. 전 걔 좋아할 때 선배한테 상담도 받고 아, 지금도 연애 얘기 줄곧 하잖아요. 좋아하는 사람 없으면 이상형은요?"
"그게 상담인가, 너 얘기 들어준 것뿐이고 도와준 것도 없는데, 뭘. 이상형은 예전에도 말했잖아. 나보다 강한 사람이 취향이라고."
"그러니까 구체적으로요. 선배를 체술 같은 걸로 이길 수 있는 남자인 거예요?"
"응. 그렇지."
"그러면 선배 주위엔 실질적으로 옷코츠 선배밖에 없지 않아요?"
마키는 컵을 입으로 가져가던 손을 잠시 멈칫했다. 얘가 오늘따라 왜 이러지. 마키는 손에 들었던 컵을 다시 탁상에 내려놓고 그 손으로 턱을 괴었다. 누군가에게 답답한 심정을 털어놓고 싶다는 생각을 해오고 있긴 했다. 쿠기사키 상대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유타 이외에 내가 좋아할 만한 사람은 없는 것 같아."
그때였다. 마키의 머리 위에 그림자가 졌다. 마키는 나무 그림자가 졌나 싶어 서서히 고개를 올렸다. 마키는 그 자리에서 얼어버릴 뻔했다. 마키는 유타와 눈이 마주쳤던 것이었다. 마키는 고개를 휙 내려 쿠기사키를 쳐다보았다. 쿠기사키는 휘바람을 불며 자신의 눈을 피하고 있었다.
"아, 저기, 저 말이죠. 갑자기 일이 생겨서 먼저 갈게요. 선배, 이따 학교에서 봐요!"
마키는 도망치는 쿠기사키를 잡으려 했지만, 유타가 마키의 팔을 잡아서 그렇게 하지 못했다. 마키, 유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들렸지만 마키는 차마 몸을 돌릴 수 없었다. 마키, 다시 한번 등 뒤에서 유타가 자신의 이름을 읊조리는 소리가 마키에게 선명히 들렸다. 마키는 불가항적으로 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마키. 아까 한 말, 무슨 뜻이야?"
"별 의미 없어."
"나 말곤 좋아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말이 어떻게 의미 없는 말이야. 마키, 나 좋아해?"
"안 좋아해."
마키는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유타의 손을 뿌리쳤다. 자신을 또렷히 바라보는 유타의 눈도 피했다. 이런 반응을 하는 것 자체가 자신의 말과 모순됨을 알지만 딱히 명확한 돌파구를 찾지 못해서 곤혹스러웠다.
"마키, 정말 좋아하지 않으면 날 보고 도망가려고 하지 않아. 나한테 미쳤냐고 욕을 하거나 농담이라며 웃어버렸겠지. 마키, 대답해줄래? 나, 좋아해?"
마키는 긴 한숨을 내뱉고 한쪽 손을 허리에 얹고 남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마키가 생각하던 적당한 시기는 오늘이 아니었다. 조금 더, 나중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일어난 일을 어찌할 순 없었다.
"어. 나 너 좋아해."
유타는 마키의 고백을 듣고서 마키를 자기 품 안에 꼭 안았다. 그 말이 듣고 싶었어, 유타는 마키의 귓가에 속삭였다. 마키는 유타의 팔에 속박된 자신의 팔을 꾸물꾸물 움직여 유타의 등을 감쌌다. 유타의 온기를 온몸으로 느껴졌다. 유타는 마키와 눈을 마주치며 자신도 마키를 좋아해왔다고 말했다. 돌아가는 길에 유타는 마키와 손깍지를 끼고 놔주지 않았다. 스킨십에 익숙지 않아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있던 마키는 문득 정신이 들어 유타가 어째서 그 카페에 있었는지 물었다.
"쿠기사키에게 부탁했어."
"뭐?"
"마키가 날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어서 내가 부탁했어. 마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봐줬으면 좋겠다고."
유타는 마키보단 늦게 설렘을 느끼기 시작했지만 자각은 마키보다 훨씬 빨랐다. 유타는 마키와 함께 있으면 심장이 빨리 뛰었고 어떤 말이든 꺼내서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저 멀리서 마키가 보이면 절로 웃음이 나왔다. 부정할 수 없는 확실한 사랑이었다. 마키를 '닮고 싶다'라는 동경은 마키와 '닿고 싶다'라는 욕구가 되었다. 동경은 사랑의 일부기 때문이었다.
유타는 마키도 자신과 똑같은 마음인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마키의 성격상 자신이 직접적으로 물어본다면 역효과가 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마키의 마음을 알아낼 수 있는 조력자가 유타에게 필요했다. 그 상대로 쿠기사키는 적합했다. 물론 쿠기사키는 유타의 부탁을 처음엔 거절했었다. 하지만 쿠기사키 눈엔 유타가 그런 부탁을 하기까지 어떤 시간을 보냈을지 뻔히 보였고, 판다의 말대로 마키가 유타의 옆에서 유난히 유해진다는 것도 직접 보아서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존경하는 선배인 마키가 혹시라도 유타를 좋아한다면 유타와 이어져 행복한 모습을 보고 싶단 생각도 있었다. 쿠기사키 본인도 오래 좋아하던 이타도리와 이어진 후 매일을 기쁘게 보내고 있으니 말이다
오늘 약속도 두 사람이 짠 판이었다. 카페에 가서 평소처럼 대화를 나누다가 자연스럽게 유타 얘기를 꺼낼 계획이었다. 유타는 두 사람과 시간을 두고 카페에 방문해 쿠기사키가 신호를 주면 두 사람이 있는 곳 근처로 자리를 옮길 예정이었다. 이 작전의 관건은 마키가 눈치채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워낙 감이 좋은 사람이라 여차하면 시도도 못하고 끝날 수도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마키는 어떤 낌새도 눈치채지 못했고, 작전은 성공했다.
"미안해. 하지만 나로선 그게 최선이었어."
마키는 당했다,는 생각이 들어 놀고 있는 손으로 머리를 헝클였다. 유타는 그런 마키의 눈치를 살피고 깍지 낀 손에 힘을 더 주었다. 유타의 떨림이 마키에게까지 느껴졌다. 그때, 쿠기사키로부터 문자가 왔다.
[선배, 죄송해요. 그치만 선배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서..]
마키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에 유타가 놀라 안절부절 못했다. 자신의 감정인데도 주체할 수 없게 만드는 사람은 유타가 유일했다. -물론 좋은 쪽으로.- 본인이 짜고 실행한 작전인데도 자기가 싫어할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까지 좋았다.
"바보야. 뭘 그렇게 떨어. 한 번 뱉은 말 취소 안 해."
"마키.."
"너나 이 손 놓지마. 알겠지?"
"응. 당연하지!"
"지하철이니까 좀 조용히 해!"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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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오빠가 그런 짓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니. 오빠는 못 본 사이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마키씨가 말하는 중간중간 오빠를 째려보자 금방 내가 아는 오빠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뭐, 그게 끝이에요. 그날부터 사귀기 시작했고요."
"남 연애 얘기 듣는 게 원래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걸요? 같은 학교 사람들 엄청 놀랐겠네요?"
"의외로 놀라진 않았어. 그럴 줄 알았다고들 하더라고."
"정말? 아, 왠지 뭔 느낌인지 알 것 같아~"
얘기가 끝남에 맞춰 주문한 음식이 나왔고 식사를 하면서도 우리는 수다를 멈추지 않았다. 내가 요즘 좋아하는 아이돌 얘기, 학교에서 있었던 일, 두 사람이 데이트하다 겪은 재밌는 일 등을 공유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갑자기, 언젠가 오빠가 마키씨를 여자친구가 아니라 아내 될 사람으로 소개하는 장면이 보였다. 그땐 나도 마키씨를 언니라고 부르고 있을 것 같단 생각도 들었다.
"우리 연락처 교환 할래요? 귀찮게 안 할게요! 가끔 연락해요."
"그래요. 핸드폰 줄까요, 아니면 줄래요?"
"핸드폰 주세요!"
오빠가 자리를 비운 사이 우리는 연락처를 교환했다. 오빠에게 비밀로 할 것은 아니었지만 이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오빠가 돌아오자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다.
"나중에 또 봐요!"
"학교 재밌게 다녀요. 또 보면 더 맛있는 거 사줄게요."
"기대해야겠는데요? 다음엔 카페도 가요. 그럼 오빠, 나 갈게."
"조심히 들어가.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걱정하지마. 아직 3시다. 집에 가도 저녁 시간 전이야."
"그래도 혼자선 위험해."
"알았어. 신칸센 탈 때, 내렸을 때, 집에 도착했을 때. 3번 연락할게."
오빠는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와는 방향이 정반대라 식당 앞에서 헤어져야했다. 긴 인사를 마치고 발을 내딛으려다 오빠한테 줄곧 하고 싶은 말이 떠올라서 오빠를 크게 불렀다. 오빠와 함께 살던 시절에 엄마로부터 늦잠을 자는 오빠를 깨우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 말곤 그렇게 불러본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쳐다보든 말든 신경쓰지 않았다.
"오빠! 행복해야 돼!"
"어?"
"꼭! 반드시! 그쪽에서 행복해야 돼!"
오빠는 내 말의 뜻을 이해했는지 크게 웃었다. 내게 크게 팔을 흔들더니 내가 보이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서 그 팔을 내려 마키씨의 손을 잡았다. 내가 크게 외치지 않았어도 오빠는 분명 행복해졌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 말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또 후회했을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신칸센 안에서 나는 오빠와 마키씨를 생각했다. 멋대로 한 추측과는 전혀 맞지 않는 사실들을 둥둥 떠올리며 그들의 무탈과 행복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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