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타마키 - 아침의 온도
“마키, 우리 졸업하고 동거할까?”
풉, 마키는 마시던 음료수를 그대로 뿜어버렸다. 잔뜩 구겨진 얼굴로 날 한번 보더니 곧바로 고개를 돌려 생각에 잠겼다. 너무 일렀나,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손에 들고 있던 페트병을 기울여 타는 목을 축였다. 앞으로 1년 후엔 졸업한다. 동거는 늘 생각해 왔던 것이었다. 학년이 올라가며 장기 출장은 줄어들었지만, 대신 출장을 가는 간격이 좁아졌다. 오랫동안 얼굴을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줄었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참으로 간사하게도 마키와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조금 더, 더 오래 같이 있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기숙사에 같이 살기에 이렇게 얼굴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던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출장에서 복귀하는 요일과 시간대는 들쑥날쑥했고, 마키는 졸업 이후에도 고전에 남아 선생님을 할 예정이었기에 평일에도 집에 없을 가능성이 높았다. 즉, 동거해야 얼굴을 볼 확률이 조금이라도 높았다.
“뭐, 그렇게 해.”
마키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나는 마키의 볼이 빨개져 있단 것을 알 수 있었다. 너무 기뻐서 마키를 껴안고 싶었지만 마키는 반동이 커서 그렇게 했다간 도망갈 것이 분명했다. 날 공중에 내던지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땐 이미 하늘을 나는 기분이어서 그렇게 돼도 좋다고 생각해 마키를 덥석 끌어안았다.
“정말 기뻐, 마키.”
마키는 ‘바보야, 놔!’라고 외치면서도 내 품 안에 얌전히 있어 주었다.
졸업을 석 달 정도 남겨준 시점이었다. 이제 슬슬 집을 구해야 했는데 영 시간이 나지 않아 곤란하던 때였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일 또는 일 때문에 밀린 공부를 해야 했고, 마키 역시 일을 나가지 않으면 교원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공부를 해야 했다. 웬만해선 같이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너 나랑 있으면 집중 못 하잖아. 나도 신경 쓰이거든. 할 거 다 하면 집 보러 갈 시간은 낼 수 있잖아.’라는 마키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어 눈물을 머금고 떨어져 공부하던 참이었다. 나는 교실에 남아 밀린 공부를 하던 중이었는데 마키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내가 앉은 책상 옆에 걸터앉은 마키는 한참을 말없이 공부하는 나를 바라봤다. 일종의 시험인가, 싶어 자꾸만 옆으로 돌아가는 고개를 애써 책에 고정했다.
“유타. 동거 말인데.”
“어? 하기 싫어? 왜?”
나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마키에게로 달려갔다. 마키는 놀랐는지 고개를 뒤로 젖히며 내 가슴을 살짝 밀어냈다.
“그런 게 아니라, 좀 들어.”
“응. 마키.”
“차라리 결혼하자.”
마키는 그렇게 말하며 명쾌하게 웃었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는, 한참을 헤매고 싶은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 순간, 그날이 생각났다. 마키의 꿈을 알게 된 날. 마침 그날과 마찬가지로 하늘은 지독히도 새빨갰다. 노을로 물든 하늘이 잔뜩 상기된 얼굴을 충분히 숨겨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이 드는 그런 하늘 아래서 평생을 약속하자는 말하는 연인을 누가 사랑하지 않겠는가. 물론 하늘 따위는 들뜬 마음을 숨겨줄 수 없었다. 나도, 마키도 잔뜩 새빨개진 얼굴로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마키는 그 자리에 멈춰 멍하게 서 있는 나에게 다가왔다. 멀뚱히 달린 내 팔 사이를 헤집어 자기 손을 넣었다. 나에게만 간신히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사랑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마키, 사랑한다는 말보단 결혼하자는 말이 더 부끄러운 거 아니야?”
“시끄러워!”
마키는 내 가슴팍에 주먹을 꽂았다. 솔직히 안 아팠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평소보단 아프지 않았다. 눈에 눈물이 찔끔 고였다. 마키는 칠칠찮다며 내 눈물을 닦아 주었지만, 마키의 코끝도 빨개져 있었다. 그리고 그 주 주말에 집을 보러 함께 외출했다. 집은 처음 구하는 것이었기에 우리 둘 다 잔뜩 긴장했었다. 고죠 선생님께 여쭤볼지 싶었지만, 왠지 그런 쪽으론 신뢰가 안 가서 인터넷으로 단단히 사전 조사를 마쳤다. 한 번의 외출론 끝낼 수 없어서 그 뒤로 몇 번이고 집을 보러 다녔다. 집 근처의 지하철역이나 버스 정거장이 적어도 도보 15분 이내의 거리에 있을 것이 가장 큰 조건이었다. 그 외의 자잘한 조건은 만족하면 그만, 안 돼도 그만이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좋은 집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다.
방 3개에 화장실 한 개, 버스 정거장이 걸어서 12분 안에 있는 깔끔한 외관의 맨션을 구했다. 외곽 지역에 있었지만, 우리에겐 크게 신경 쓸 부분은 아니었다. 집을 샀으니 집을 채워 넣을 것들도 사야 했다. 할 일이 끊임없이 쏟아졌지만 어째선지 계속 웃음이 났다. 텅 빈 집이 차곡차곡 채워질 때마다 설레서 밤새 뒤척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 함께 산 지 1년을 조금 넘겼다. 성은 부부 별성으로 결정했다. 아직 당주가 되겠다는 꿈은 잊지 않았다는 마키였다. 나는 마키와 같은 호적에 올라간다는 것만으로 좋았고, 애초에 마키의 꿈을 동경해 그녀를 사랑하게 됐기에 할 수 있는 한 지켜주고 싶었다. 결혼 소식을 전할 때 반응은 모두 똑같았다. 그럴 줄 알았다고 입을 모아 말해서 조금 놀랐지만, 기쁜 마음도 들었다. 주변 사람들에게까지도 우리의 마음이 전해졌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결혼식은 장소를 빌려 가까운 지인들을 초대해 일종의 파티처럼 올렸다. 웨딩드레스를 고를 때 쿠기사키랑만 간다는 말에 울 뻔했고 나중에 드레스를 입은 마키를 처음 봤을 땐 역시 좀 맞더라도 따라갔어야 했다는 후회로 울컥했었다. 쿠기사키가 사진을 보내줬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신혼여행은 따로 가지 않았다. 그전보단 평화로워진 세상이었지만 두 사람이나 장기간 일을 나가지 않아도 될 만큼 평화로운 시대는 아니었다. 어쩌면 장래의 우리 아이가 살 세상을 진정한 평화의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초석을 다지는 시대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더 힘이 났다.
방 하나를 침실로 삼고 나머지 방을 각자의 짐을 보관한다거나 사적인 일을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쓰기로 했다. 결혼 후 얼마간은 나는 거실에서 잤다. 마키는 아직 자격증을 취득하지 못해서 정식 교사가 아닌 강사로서 고전에서 일을 했다. 그래서 매일 집으로 퇴근했기에 내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마키가 자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가뜩이나 예민한 마키의 잠을 깨우고 싶지 않아 소파에서 자는 선택지를 골랐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늦게 퇴근한 나는 자는 마키를 확인한 후 옷을 갈아입고 소파에 누웠다. 그때 마키가 졸린 눈을 비비며 방에서 나왔다.
“마키. 깼어? 미안, 조용히 한다고 했는데..”
“신경 쓰지 마. 애초에 안 잤어.”
“응?”
“너 얼굴 보려고 안 자고 있었어. 오래 못 봤잖아.”
“응. 그랬지.”
나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마키는 내 옆에 앉아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나는 마키의 허리춤을 감싸 안고 마키의 머리 위에 내 턱을 올렸다. 마키 냄새 난다, 분명 같은 샴푸에 비누를 쓰는데 마키는 왜 나보다 더 좋은 냄새가 날까. 한가한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그 뒤로 이어지는 마키의 말에 사정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소파에서 자면 불편하잖아. 애초에 난 네가 내는 소리는 하나도 안 시끄럽고, 오히려 네가 내는 소리에 깨서 얼굴이라도 보고 싶은 심정이니까, 그러니까.. 집에 돌아오면 나 꼭 깨우라는 말이야.”
마키, 정말 귀여워. 입 밖으로 내면 도망가겠지. 나는 마키를 안고 있던 팔에 힘을 더 꽉 주었다. 예전부터 느낀 사실이지만 마키는 내가 안고 있는 자세에선 유독 힘을 못 썼다. 하도 대련을 많이 해서 스킨십 자체엔 거부감이 없었지만 -마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간질간질하고 오글거리는 상황 자체에 약해서 견딜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예전에 ‘네가 그렇게 꼭 안으면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 같아, 몸 안팎으로.’라고 말했다.- 이외의 상황에선 나는 마키를 체술로 이길 수 없었다. 가끔 마키를 이긴 적은 있지만 대체로 이길 수 없었다. 평소의 자신감 넘치고 당찬 표정으로 멋짐, 그 자체인 마키가 정말 좋지만 이렇게 나만 볼 수 있는 귀여운 마키도-멋진 마키도 물론 귀엽지만- 아주 좋아한다.
그 뒤로 나는 집에 돌아올 때마다 꼬박꼬박 다녀왔다고 마키에게 보고하고 있다. 티비를 보고 있는 마키의 뒤에서 마키를 쏙 안고 말할 때도 있고, 자는 마키의 볼에 뽀뽀하며 다녀왔다고 할 때도 있었다. 그리고 마키도 나에게 다녀왔다고 말해준다. 내 등 뒤에 얼굴을 기대거나 때때로 백허그를 해줬었다. 그러나 요즘은 엉덩이를 때리는 경우가 잦았다. 달달한 스킨십이 줄고 친구 같은 스킨십이 느는 것은 신혼이 저물어 간다는 표시라는 말을 어느 잡지에서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변화가 나쁘지 않았다. 우린 원래 그렇게 지내던 사이여서 그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이유인 듯했다.
그리고 이건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이다. 처음엔 마키가 핸드폰을 찾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마키는 나를 찾고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마키도 그런 행동을 하고 있었다는 게 놀라웠다. 우리는 새벽에 종종 급한 연락을 받곤 한다. 그런 상황이 오면 문자를 남겨두기로 약속했었지만, 남겨진 사람 입장에선 상대가 없는 아침은 평소와 온도가 다르다. 분명 따뜻한 여름인데도 어쩐지 코끝이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팔을 휘저어 옆을 더듬으면 역시나 그곳엔 마키가 없었다. 그대로 일어나 거실부터 찬찬히 둘러보다가 기척을 찾지 못하고 나서야 핸드폰을 확인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바보 같지만 그러고 싶었다. 없는 줄 알았던 상대가 집에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온몸으로 번지는 온기가 그 어떤 것보다 따뜻하다는 걸 마키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곧장 마키의 옆에 누워 마키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마키는 순간 움찔했지만 곧 나라는 걸 깨달았는지 내 손을 잡았다. 마키의 손에서 내 손으로 퍼져가는 따뜻함이 기분 좋았다. 이러고 있으니 처음 손을 잡았던 날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조심히 마키의 손 위로 내 손을 올렸었는데, 마키가 손을 뒤집어 깍지를 꼈었다.
“유타.”
“응. 마키.”
“오늘은 쉬는 거지?”
“응. 그동안 계속 바빴으니까 한동안 쉬라는 얘길 들었어.”
“그럼, 오늘 뭐 할까?”
마키는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는 헝클어진 마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키는 오른쪽 눈을 감으며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마키는 어제 나보다 늦게 들어와서 아직 잠이 부족할 것 같았다.
“일단 마키는 좀 더 자는 게 어때? 어제 늦게 들어왔잖아.”
“그렇게 졸리지 않아.”
“졸려 보이는데.”
“안 졸려.”
그렇게 말한 마키는 양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그러나 여전히 일어날 생각 없이 미적거리는 중이었다. 둘이 함께 맞는 아침은 유난히 포근해서 절로 나른한 기분이 들었다. 필요한 잠을 다 잤는데도 더 누워있고 싶은 생각이 눈꺼풀을 무겁게 눌렀다.
“난 졸린데."
“더 잘 거야?”
“응~.. 그건 아니고. 더 누워있고 싶어.”
“굼벵이.”
“그러는 마키도 누워있잖아.”
“굼벵이 아내가 굼벵이지 뭐겠어.”
씩-, 웃는 마키가 마키다웠다. 마키는 내 발 사이로 자기 발을 들이밀었다. 내 발을 가볍게 툭툭 건드리며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나도 마키의 장난에 장단을 맞춰주었다.
“마키, 하고 싶은 거 있어?”
“떠오르는 건 없는데. 아, 장 봐야 해. 집에 먹을 거 없더라. 휴지도 다 떨어지고.”
“그럼 장 보러 간 김에 외식하고 올까?”
“판다가 너 보고 싶다고 했는데.”
“음, 그러면 저녁엔 이누마키까지 만나서 한잔할까?”
“시간이 될지 모르겠네. 일단 연락해 보자.”
“응. 아, 이참에 아예 동창회 해버릴까? 되는 사람들만 오라고 해서.”
“그것도 나쁘지 않네. 한 번에 다 모이긴 힘들겠지?”
“응. 한두 명은 안 온다는 생각을 해야 하지 않을까? 어디서 만나야 하려나~”
핸드폰을 들어 고전 후배들에게 연락을 하는 마키를 보고 나도 핸드폰을 들어 모일 만한 장소를 찾았다. 문득 이런 시간을 보내는 내가 낯설었다. 과거의 나라면 절대 꿀 수 없었던 미래. 두려움만 가득했던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이제 없다. 더는 외롭지 않고, 지켜야 할 것이 잔뜩 생긴 세상에서 그것들을 거뜬히 지켜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살고 있으니까. 단지 마키와 겨우 1년 남짓을 함께 했는데 하루하루가 행복한 것 때문에 앞으로의 삶이 얼마나 더 행복해질지 기대될 뿐이었다.
우리가 맞는 아침의 온도는 오늘처럼 늘 다정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때론 시리고 때론 미지근하겠지. 그러나 우리가 변함없이 사랑하면 아침의 온도는 얼마든지 따뜻해질 거야. 그러니 마키, 정말 사랑해. 나는 마키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마키는 갑작스런 나의 행동에도 놀라지 않았다. 역으로 멀어지는 나의 어깨를 잡는 마키였다. 내 어깨를 가볍게 누르며 일어나 내가 했던 것처럼 이마에 입을 맞추는 마키를 보며 아무래도 장은 내일 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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