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타마키- 어느 날, 마음을 전하다.
윽-, 괴로워하는 듯한 신음 소리가 운동장에 울렸다. 숨을 고르는 소리가 뒤따라 왔다. 리카의 해주 이후 유타는 완전히 강해졌다. 4급으로 격하되었으나 곧 특급으로 복귀했으니 부연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제 마키가 유타의 대련 상대가 되지 않았다. 유타는 고죠의 지시로 곧 긴 출장을 간다. 시간상 오늘이 넷이 모일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다. 유타가 돌아올 즈음엔 2학년이 되어 선배가 될 그들이었다. 후배 얼굴도 모르고 선배가 되는 유타를 미리 놀릴 겸 출장 격려 겸 피자를 먹으며 영화를 보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유타 승!"
"이걸로 오늘은 내가 전부 이긴 건가..?"
"우쭐해지지마!"
"아얏!"
마키는 여운에 젖어있는 듯한 유타의 이마를 내리쳤다. 옷에 묻은 흙을 털고 땅에 떨어진 안경을 주웠다. 목을 가볍게 꺾더니 먼저 들어간다,고 판다네 쪽으로 손을 흔들었다. 유타와 눈을 마추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마키는 어느 순간부터 유타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처음엔 나약하기 짝이 없던 유타였다. 그렇게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주제에 살아갈 자신감이 필요하다니. 마키에게 결핍은 태어났을 때부터 가진 것이었다. 존재 자체가 희미해져갈 때 유타가 나타났다. 유타는 마키에게 결핍을 상기하게 했다. 나였다면-, 마키는 그때 진심으로 유타에게 화를 냈다. 그런데 지금은 이토록 훌륭한 남자가 되다니, 최악이다. 최악, 최악, 최악 그 자체다. 멀어지는 마키를 보며 멍해있던 유타가 외쳤다.
"마키! 다친 곳은? 치료해줄까?"
"필요 없어! 애초에 다치지 않았고!"
마키는 일부러 보폭을 크게 했다. 지금 이곳에서, 유타 앞에서 1초라도 빨리 멀어지고 싶었다. 눈치채게 하고 싶지 않았다. 마키가 유타를 좋아한단 사실을 누구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누마키라면 괜찮을지 모른다. 하지만 판다가 알게 된 순간 그걸로 10년은 놀려먹을 것이었다. 그리고 유타가 알게 되면.. 그 아인 뭐라고 할까?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순식간에 얼굴이 빨개졌다. 차가운 바람이 볼을 스쳤지만 열기를 식히기엔 부족했다.
젠장, 빌어먹을, 비실이 같은 남자를 좋아하게 되다니. 더군다나 그 남자는 이미 장래를 약속한 여자아이가 있다. 정신 차려, 마키. 겨우 그런 여자가 되고 싶은 것인가?
마키는 수도꼭지를 틀고 물줄기 아래로 머리를 가져다 댔다. 찬 기운이 머리부터 몸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후끈해진 몸은 식을 줄을 몰랐다. 젠장, 짜증나. 허공에 욕을 뱉고 헛발짓을 해도 이 감정은 도저히 소모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샤워를 마치고 돌아와 베개를 얼굴에 올리고 생각을 비우고 있던 마키의 방문을 유타가 두드렸다.
"저기, 마키?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닌가 싶어서.."
얼굴을 굳이 보지 않아도 알았다. 지금 유타는 마키를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뒷목을 긁적이며 어떤 말을 덧붙여야 할지 고민하고 있겠지. 마키는 쯧, 혀를 찼다. 유타는 단순히 신체적으로, 주술적으로 성장한 것 뿐만 아니라 이런 부분에서도 대단한 성장을 보였다. 안타깝게도 유타의 감이 발달함과 동시에 마키는 자신의 마음을 자각하고 말았다. 유타는 분명 눈치챘을 것이었다. 유타가 더이상 예전의 유타가 아니듯이 마키 역시 예전의 마키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물론 유타는 아직 마키에게서 느껴지는 이물감이 무엇인지까진 몰랐다. 하지만 좋아하는 마음을 마키는 도저히 숨길 수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오늘만 넘기면 당분간 유타를 보지 않는다. 그동안 이 마음을 어떻게든 해결하면 된다. 어쩌면 유타와 계속 붙어있어서 이 감정이 심화되는 것일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을 어떻게 넘겨야 할까. 아프다는 핑계로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유타는 걱정을 할 것이었다. 안 그래도 바쁜 애한테 그런 걱정으로 시간을 보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언젠간 마주해야할 감정이었다. 마키는 숨을 고르고 방문을 열었다.
"마키, 괜찮아? 아까부터 몸상태 안 좋을 것 같은데."
"괜찮아. 피곤해서 그런 거다."
"헉, 정말? 그럼 오늘은 좀 쉬는 게.."
"괜찮다니까. 그 바보는?"
"응. 방금 오셨어."
"제대로 사왔겠지?"
"글쎄. 그런 걸로 장난치는 분은 아니시니까. 마음에 안 들면 같이 편의점이라도 갔다 오자."
"그래, 뭐.."
마키는 속으로 말을 되뇌였다. 진정해. 긴 옷을 입고 있으니까 얼굴 이외의 다른 곳은 다 가려져 있으니 표정만 잘 관리하면 감정을 들키지 않을 거야.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 어색하게 굴지마. 적당히 오늘을 보내는 거야. 할 수 있잖아? 하지만 필연적으로 그 상황이 오면, 받아들이자.
-
최근 들어 유타가 마키에게서 승을 가져오는 횟수는 늘고 있었지만 오늘과 같이 마키에게서 완승을 거둔 일은 없었다. 마키는 운동 신경으론 유타의 위에 있었다. 마키를 상대로 단순히 체술로 이기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마키가 유타를 때리는 강도도 오늘따라 약했다. 유타는 마키가 걱정되었다. 이상해, 뭔가 이상해. 마키가 마키가 아닌 것 같아. 한참을 멍해있다 정신을 차리니 마키가 저멀리 가고 있었다. 꽤 크게 넘어져서 다쳤을 텐데. 걱정이 되어 물어보니 괜찮다는 답이 돌아왔다. 곧 있으면 7시. 7시 반까지 함께 모여 피자를 먹기로 했기에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판다네와 함께 정리를 하고 남자 기숙사로 향하면서, 샤워를 하면서도 마키 생각이 났다.
마키는 유타에게 아주 소중한 사람이다. 살아갈 이유, 의지를 찾게 해준 사람이다. 자신에겐 평생 사랑하는 여자 따위 생기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단순한 동경은 어느 사이 사랑이 되었다. 이제 같은 동경에 서고 싶어졌다. 마키는 유타를 앞으로 걸어가게 하는 사람이다. 계속 강해지고 강해져서 마키의 옆에 당당히 있고 싶었다. 앞으로 꽤 오랜 시간 마키와 만나지 못한다. 이 사실 자체가 벌써부터 스트레스였다. 가능하다면 오늘 둘만 있고 싶을 정도였다. 이 감정을 마키가 알게 된다면 마키는 어떤 반응일까? 부담스럽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하고 싶다. 언젠가 닿길 바란다.
차가운 물이 유타의 얼굴에 더이상 흐르지 않았다. 머리에 수건을 얹고 두 손으로 양볼을 가볍게 때렸다. 마키를 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유타는 마지막에 봤던 마키가 걱정이 되어 참을 수 없었다. 잠시후, 마키의 방 앞에 도착한 유타는 숨을 고르고 방문을 두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이 열렸다. 평소라면 뭐야 따위의 말로 먼저 말을 거는 마키인데 오늘은 아니었다. 대화가 끊기진 않은데 어딘가 어긋나는 것 같았다. 유타는 마키를 계속 바라보았지만 마키는 시선을 되돌려 주지 않았다. 유타는 속이 꽉 막혀오는 기분이 들었다.
-
피자는 마키가 좋아하는 피자였다. 출장을 가는 유타의 취향대로 고르라고 했더니 이런 건 좋아하는 사람이 골라야 된다며 유타는 마키에게 선택권을 양도했었다. 하지만 마키는 피자를 고를 때나 먹고 있는 지금이나 무슨 피자인지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럴 여유 공간이 없었다. 피자를 먹으며 영화를 보는 내내 마키는 영화에 집중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못 했다. 그건 유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의무적으로 화면을 응시하고 있지만, 옆사람을 따라 웃긴 하지만 내용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마키는 유타 생각으로, 유타는 마키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두 사람은 그날 본 영화의 제목을 몰랐다. 영화가 끝나고 잠시 수다를 떨다가 내일 아침 일찍 출발이니 이만 잠에 드는 것이 좋겠다는 고죠의 권유로 모임은 해산됐다. 판다와 이누마키가 유타를 꼭 안아주었다. 멀뚱히 서있는 마키에게 어서 가라며 고죠는 등을 밀어줬고 판다는 팔을 잡아당겼다. 하필이면 남은 자리가 유타의 가슴쪽이었기에 어정쩡한 자세가 되었다.
'이것들, 알고 있는 거 아냐?'
마키가 반사적으로 판다를 쳐다보았다. 역시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때린다. 무조건! 마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유타는 자기의 심장이 사정 없이 요동침을 느꼈다. 하하하, 애써 웃는 사이 마키의 뒤에서 고죠가 브이~를 외쳤다. 말릴 틈도 없이 셔터음이 들렸다.
"제자들끼리 사이 좋은 모습 보기 좋네. GLG와 GLF!"
"재미없어요!"
"마키, 진정해. 역시 마키 너 유타가 좋구나!"
"아니거든! 이 자식, 이리와!"
"기운 넘치네~"
한참을 열을 내고 나니 마키는 기운이 쭉 빠졌다. 뭔가 시원한 것을 들이키고 싶었다. 음료수는 아까 다 마셨기에 자판기로 향해야 했다. 유타에게 배웅 인사를 건네고 가야지 싶었다.
"뭐, 그 잘 갔다와. 다치지 말고. 뭐, 넌 안 다칠 것 같지만."
"응. 잘 다녀올게. 마키도 다치지마."
"응.."
"둥글둥글."
"판다!"
마키는 화를 내려다가 마지막까지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진 않아 삼켰다. 사실 판다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유타를 좋아해서 유타 앞에선 유독 둥글둥글해진다. 하지만 인정하는 순간 지는 것 같았다. 자판기로 향하는 마키를 뒤따라 유타가 뛰어나왔다. 판다와 이누마키완 같은 기숙사니 배웅은 좀 나중에 들어도 됐다. 하지만 지금 마키를 보내면 후회할 것 같았다.
"같이 가. 마키."
"뭣.."
"나도 목이 말라서."
"..그러든다."
아무리 생각해도 밤공기는 특별한 성분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야 마음 속에 묵혀왔던 말들을 꺼낼 용기가 마구마구 생겨날 리가 없었다. 유타는 헛기침을 해 목을 가다듬었다. 이 말을 꺼내는 순간 돌아갈 수 없다. 마키와 전처럼 지낼 수 없다. 하지만 그 전처럼이 뭔데? 이미 마키와의 사이가 예전 같지 않았다. 마키도 분위기가 미묘하게 흘러가는 것을 느꼈다. 침이 절로 넘어갔다. 지금 유타의 말을 듣지 말고 도망갈까? 아니야. 그건 겁쟁이다. 마키는 숨을 들이마셨다. 유타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와도 받아들일 각오를 다졌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언젠가 마주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유타의 출장이 결정된 그날부터 필연적으로 오늘이 디데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정적을 깨고 유타가 입을 열었다.
"마키, 내가 너한테 너처럼 되고 싶다고 했던 거 기억나?"
"기억나지. 내가 얼마나 당황했는 줄 알아? 겨우 비실이한테 인정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다니."
"하하, 마키. 음... 마키 넌 그날부터 내 오래된 꿈이었어."
유타는 걸음을 멈췄다. 마키는 유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은 부정할 수 없는 사랑에 빠진 얼굴이었다. 거울 속에서 수없이 마주쳤던 그 얼굴이 거울도 없는 새까만 밤, 마키의 눈 앞에 선명했다.
"너처럼 강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 그리고, 정말로 강해졌어. 어쩌면 마키보다도 강할 거라고 생각해."
"..오늘 겨우 한 번이야. 우쭐해하지마."
"응. 그렇지. 그래서 증명해보려고. 마키, 나랑 대결하지 않을래?"
"지금 여기에서?"
"마키 이상형은 마키보다 강한 남자니까. 증명하고 싶어. 내가 마키보다 강하다는 걸."
"왜? 네가 내 이상형인 걸 왜 증명하고 싶은데?"
"왜냐하면 이제 그런 꿈으론 안 되거든. 마키가 꾸는 꿈을 같이 꿀 수 있게 해줘. 부탁이야, 마키."
"..프로포즈냐. 그리고 그 꿈은 나 혼자 해야 의미 있는 거라니까."
"응. 알아. 내가 첫꿈을 이룬 것처럼 마키도 그 꿈을 이룬 이후에 새로운 꿈이 생길 거잖아. 그 꿈에 나도 좀 껴줘."
"바보 같아."
"응."
"..이런 널 좋아하는 나도 참 바보 같아. 좋아. 대결하자. 지금 여기에서. 유타, 전력으로 덤벼!"
두 사람은 지금까지 했던 그 어떤 대련보다도 격하게 맞붙었다. 쓰러져도 일어나고 서로를 죽일 듯이 덤벼들었다. 이건 단순한 대련을 넘어선 무언가였다. 자신의 마음을 증명하는 싸움이었다. 유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마키를 이겨야 했다. 마키는 유타에게 순순히 승리를 줘서도, 줄 수도 없었다. 이건 단단히 미쳐버린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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