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타마키 - 스킨십
마키가 날 피한다. 확실해. 마키는 지금 나를 피하고 있어.
유타는 기숙사 방 안에 덩그러니 앉아 사색에 잠겼다. 방금 막 씻고 나온 머리에선 물기가 뚝뚝 흐르고 있었다. 목에 얹은 수건 위로 물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몇몇 물방울은 유타의 볼을 타고 목을 지나 티셔츠를 적셨다. 그게 마치 우는 것 같아서 지나가는 사람이 본다면 유타에게 대단히 슬픈 일이라도 있나 생각할 것 같았다. 맞는 말이었다. 마키와 판다, 이누마키는 유타에게 아주 소중한 친구였다. 셋이 있었기에 유타는 이만큼 변할 수 있었다. 셋 중 단 하나라도 잃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라니. 물기에 목에 붙어버린 머리카락 때문인지 목이 가려웠다. 답답했다. 겨울이라 머리를 안 말리면 감기에 걸릴 수 있단 걸 알았지만 머리를 말릴 힘이 없었다. 있는 힘은 이미 다른 쪽에 쓰고 있었다.
지난 4일간 유타는 마키와 단둘이 수업을 받았다. 이누마키는 출장을 갔다 걸려온 감기로 목이 상해 치료를 받느라 수업을 빠졌고, 판다는 학장과 함께 출장을 가느라 학교에 없었다. 그리고 마키는 3일전부터 유타를 노골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유타는 도무지 현재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첫째 날과 둘째 날은 마키의 행동을 단순 컨디션 난조로 이해할 수 있었다. 두 날 모두 마키는 오전에 임무를 갔다 왔으니 그럴만했다. 아무리 말을 걸어도 대화가 겉돌아서 복잡한 생각이 들었지만 괜히 꼬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실력과 관련 없이 일을 한다는 건 그 자체로 힘이 드니까. 유타도 일을 끝내고 돌아오면 피로감 때문에 누가 말을 걸어도 대꾸하기 귀찮고 몸이라도 부딪치면 짜증이 난다는 걸 몸소 체험한 바가 있어 마키의 피로가 빨리 풀리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셋째 날부터는 무언가 단단히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 일이 없으면 함께 하는 아침 식사에 마키는 오지 않았다. 많이 피곤한가 싶어 연락을 하려 핸드폰을 켰는데 마키에게서 문자가 와있었다.
[눈이 일찍 떠져서 먼저 먹었어. 먹고 교실로 와.]
있지, 그런 날. 유난히 눈도 일찍 떠지고 배고픈 날. 유타는 마구 떠오르는 불길한 생각과 의문을 밥과 함께 씹어 넘겼다. 점심엔 같이 먹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마키는 몸이 안 좋아 점심은 건너뛰고 싶다며 유타에게 양해를 구했다.
“괜찮아? 약 갖다 줄까?”
“아니, 괜찮아. 일찍 일어나서 잠이 부족한 것 같아. 오후에 봐.”
열이라도 있나 싶어 마키의 이마에 손을 대려 했는데 마키는 고개를 뒤로 빼 유타의 손길을 피했다. 머쓱해진 유타는 갈 곳 잃은 손을 뒷목에 얹었다가 마키를 배웅할 때 흔들었다. 혼자 먹을 생각을 하니 아침에 먹은 게 얹히는 기분이라 유타도 점심을 걸렀다. 저녁은 같이 먹었는데 마키의 기분이 영 좋지 않아 보여서 어제처럼 아무 주제나 막 던지기도 눈치가 보인 유타였다. 이거 맛있네. 응, 그렇지? 같은 짧은 대화만 오고 갔다. 물을 마시고 있는데도 목이 바짝바짝 타서 죽을 지경이었다. 마키와 한 번도 이런 사이가 된 적은 없는데, 유타는 머리를 긁적였다. 처음 만났을 때도 이러지 않았다. 차라리 싫은 티를 팍팍 내는 마키였기에 유타도 마키를 대하는 것이 편했다. 하지만 분명 얼마 전까지 잘 지냈는데 이런 사태라니, 유타는 영문을 모르겠어서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누군가에게 미움 받는 감각엔 익숙할뿐더러 아무 타격도 없었다. 하지만 마키에게 미움 받는 건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밥을 삼키는 게 아니라 돌을 삼키는 것 같았다. 마키는 상당히 감정이 표정에 드러나는 사람이라 지금 어떤 기분인지 알아차리는 게 쉬웠다. 지금은 그게 문제였다. 분명 기분이 엄청 나빠 보이는데 유타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일을 하다가 기분 나쁜 일이 있었다면 지금 씹고 있는 대신 그 일을 잘근잘근 씹어대며 짜증을 냈을 마키였고, 그 외의 기분 나쁜 일도 다 털어놨을 마키였다. 지하철에서 어떤 버러지 같은 남자가 추근거렸다든지, 편의점에서 사려던 음식을 눈앞에서 뺏겼다든지 같은 사소한 일도 공유하는 사이였다. 그런 마키가 입을 다물고 있단 뜻은 유타에게 말 못할 이유, 아마 유타와 관련된 이유라고 생각이 되는 건 유타에게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다. 먼저 식사를 마친 마키는 유타를 기다려주었지만 몸을 유타에게서 살짝 돌린 채로 창밖을 응시했다. 평소대로라면 먹는 게 느리다, 골고루 먹어라 등 말을 걸어왔을 마키가 그러지 않으니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마키, 저녁 먹고 할 일 없으면 같이 연습하자!”
유타는 뭐라도 하고 싶었다. 이대로라면 또다시 각자 기숙사 방으로 돌아가 오늘과 같은 레퍼토리가 반복되고 종국엔 학년이 올라가 반이 바뀌며 데면데면한 사이가 된 같은 반 친구가 되어버릴 것 같았다. 고전 내에서 마키가 주구로 대련할 수 있는 유일한 상대였다. 마키가 때문에 유타와 하는 대련을 좋아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약해서 상대가 안 되니 시시하다고 하긴 했지만, 늘 즐겁게 응해주었다.
“으응..”
마키는 달갑지 않은 눈치였지만 유타는 몰아붙이기로 결심했다. 마키, 부탁이야. 마키는 유타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지 못하고 옷을 갈아입고 만나자고 했다. 유타는 가슴이 콩닥거림을 느꼈다. 옷을 갈아입고 운동장으로 나온 마키는 유타와 눈을 마주치려하지 않았다. 인사라든지 말이라든지 전부 받아주고 있지만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거니와 평소처럼 유타를 이긴 후 깔고 앉으려고 하지 않았다. 가타부타 첨언하지 않고 유타가 떨군 목도를 던져주며 일어나라고 할 뿐이었다. 마키는 유타와 불필요한 신체 접촉을 안간힘을 다해 피하고 있었다. 그래도 유타는 지금이 좋았다. 적어도 마키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 좋았다. 4번쯤 했나, 마키가 넘어진 유타의 이마를 목도로 가볍게 때리며 이제 그만하자고 말했다. 그만하자는 말은 마키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늘 한계까지 시달리는 사람은 유타였다. 유타는 입술을 앙 다물고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키는 입을 옴싹달싹하더니 작게 한숨을 쉬고 이내 감기 걸리니까 빨리 씻고 자라는 말을 덧붙인 채 멀어져갔다.
“내가 마키에게 무슨 잘못을 한 걸까..”
기숙사 방으로 돌아온 유타는 혼자 중얼거렸다. 허공을 바라보던 유타는 머리를 끙끙대며 지난 4일 간의 일을 차례대로 펼쳐보았다. 대련 상대도 되지 않는 내가 참을 수 없이 답답한 걸까? 도움도 안 되는데 그동안 같이 일을 나간 게 짜증난 건 아닐까? 하지만 마키는 이런 이유로 유타를 피할 사람이 아니었다. 불만이 있다면 바로 얘기했을 것이었다. 실제로도 대련 중에 유타에게 한 눈 팔지 말라거나 반응이 늦다거나 여유가 없다 같은 피드백을 마구마구 해주는 마키였다. 함께 임무를 맡았을 때도 똑같았다. 잔챙이는 한 번에 해치워야 귀찮지 않으니 똑바로 하라거나 주령의 급이 올라갈수록 함정이 없는지 살펴보라는 등 조언을 해주었다. 마키가 없었다면 유타가 지금까지 오는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거라고 누구나 동의하는 바였다.
“마키는 내게 정말 고마운 사람인데.”
유타는 가슴을 꽉 쥐었다. 마키와 이렇게 멀어지고 싶진 않다. 자신의 잘못이라면 바로잡아야 했다. 유타는 마키의 방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달이 유난히 밝아 그림자조차 질 것 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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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상황은 이건 빌어먹을 드라마 때문이다. 마키는 베개를 터뜨릴 기세로 두드리는 중이었다. 판다가 그런 드라마를 어디서 알아오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젠장, 젠장, 젠장! 아마 유타도 내가 유타를 피하고 있단 것을 알아챘겠지. 마키는 유타와의 스킨십을 한 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손을 잡는다거나 유타의 위에 앉는다거나 같은 신체 접촉은 같이 훈련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이성 간의 신체 접촉이 특별한 일인지 의문을 갖는 마키였다. 젠인가를 나오고 주술고전에 입학하기 전까지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녀서 여타 또래들처럼 학창시절의 기억은 없었다. 그날 봤던 드라마의 풍경은 마키에겐 충격 그 자체였다.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이 드라마는 매화 등장하는 커플이 바뀌며 여러 아이들의 사랑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마키가 보게 된 에피소드는 소꿉친구로 오랜 시간 아웅다웅하며 지내던 두 사람이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자신들의 관계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이야기였다.
어릴 적 검도장에서 만난 두 사람은 함께 검도 연습을 하는 사이로 자랐다. 중학교는 따로 다녔지만 매일 방과후에 만나 검도 연습을 했기에 같은 고등학교에 올라온 둘은 스스럼없이 어깨동무를 한다. 그 모습을 본 주변 친구들이 두 사람을 연인 사이로 몰아가고 칠판에 두 사람의 이름 사이에 하트를 그려 적는 등의 장난을 하자 두 사람은 전과 같은 관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실수로 손이 스치면 그걸 가지고 지독하게 놀려대는 통에 같은 반인데도 말을 잘 나누지 않았고 검도장에서도 함께 연습하는 것을 꺼리게 된다. 어느 날, 이 상황을 더는 참을 수 없던 남학생은 여학생의 손을 잡아 구석에 몰아넣더니 ‘너 나랑 이러고 있으면 불편해?’라고 묻는다. 이에 여학생을 그렇지 않다고 답하고 그 뒤로 남학생은 전처럼 여학생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온다. 그러나 여학생은 남학생의 스킨십에서 알 수 없는 기분을 느끼고 이것이 사랑임을 깨달으며 남학생에게 고백을 한다.
마키는 처음부터 끝까지의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이성 친구끼리 어깨동무를 하는 게 평범한 일이 아니라는 거야? 그럼 나는 뭐야? 마키는 종종 유타의 어깨에 팔을 올리곤 했다. 가끔 아예 팔을 둘러버리기도 했다. 별 아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고 단지 편해서였다. 손을 잡거나 안는 게 뭐가 어때서? 검도한다며? 그런 시답지 않은 이유로 검도를 포기하는 거야? 마키가 유타와 대련을 하다보면 둘 다 목도가 날아가거나 의도적으로 순수 체술로 맞붙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상대를 넘기려면 상대 허리를 안아 엎어 치거나 손을 잡고 던져 버려야 했다. -물론 대부분 마키가 유타에게 한다.-
판다는 마키의 반응을 보며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일부러 그런 거지! 마키는 판다를 한 대 쥐어박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판다도 전투태세를 취하는 바람에 한바탕 소동이 났었다. 한밤중에 소란이었기에 둘을 말리기 위해 방에 있던 유타와 이누마키가 나왔다. 이누마키가 마키의 앞을 막아섰고 유타가 뒤에서 마키를 잡았다. 그 순간 마키는 굳어버렸다.
의식하면 어색해지는 행동들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 숨을 어떻게 쉬는지, 가만히 서있을 때 팔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혀는 어디다 두어야 하는지, 눈을 제대로 깜빡이고 있는지 등이 있다.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아야 원래대로 돌아오는데 이미 의식을 한 상태에서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참 힘들었다. 시간이 지나면 다른 할 일 때문에 돌아오긴 한다만, 마키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다행히 아무도 이상한 점을 눈치 채지 못하고 단순히 진정이 됐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마키는 소파에 널부러져 있던 외투를 어깨에 걸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가능한 빠른 발걸음으로 돌아갔다. 새빨개진 얼굴을 들키면 한달은 무슨 종신 놀잇감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 다음날은 이누마키와 판다는 출장으로 수업에 참여하지 못했고 교실엔 두 사람뿐이었다. 고죠는 두 사람뿐이니 이론 수업보단 대련을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는지 두 사람을 운동장으로 나가게 했다. 두 사람에게 목도를 던져준 고죠는 특유의 호쾌한 웃음으로 운을 띄웠다.
“어쩌지~ 이 최강님이 일이 생겼는데. 둘이 사이좋게 지내고 있어! 그럼 돌아올 땐 맛있는 거라도 사올게~”
그러더니 이렇다 하는 말도 못 붙일 만큼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두 사람은 다소 황당했지만 평소에도 고죠는 이런저런 일로 자리를 비우는 일이 잦았다. 애초에 한가하게 선생님을 하고 있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마키는 한숨을 푹 내쉬고 자세를 취했다. 마키는 고죠의 일 때문에 아침까지 남아있던 잡념이 달아났다. 정확히는 달아났었다. 이렇게 유타를 보니 또 어제 본 드라마가 생각이 나고 또..
그때였다. 마키의 생각보다 유타가 가까이 있었다. 유타에게 잡생각을 하지 말라고 잔소리를 실컷 해놓고 정작 본인이 한 눈을 팔고 있었다니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미처 피하지 못해 마키는 유타와 부딪혔다. 마키의 입술에 유타의 입술 촉감이 말랑하게 느껴졌다. 1초 남짓 하는 시간이었는데 마키에겐 영원 같았다. 유난 떨 접촉이 아니었다. 입술도 결국 신체의 일부일 뿐이다. 어깨끼리 부딪치고 실수로 발을 밟은 정도의 접촉일 뿐인데 유독 사람들이 입술끼리 부딪치는 행위에 이상한 의미를 부여해서, 어제 본 드라마가 하필 그런 내용이라서, 거센 칼바람에 차게 식은 얼굴에 어째선지 따뜻한 입술이 닿아서, 오늘따라 둘만 있어서 그런 것뿐이었다. 이런 생각을 할 시간에 방어를 하거나 받아칠 자세를 취했어야 했는데 오늘따라 그렇고 그런 바람에 정신을 차려보니 유타를 올려보고 있었다.
“앗, 내가 이겼다..”
마키는 멍하니 유타를 바라보았고 유타는 가볍게 목도를 휘둘러 마키의 머리를 쳤다. 마키도 유타도 턱 끝까지 찬 숨을 내쉬고 있을 뿐 그 외 별다른 말은 오고가지 않았다. 마키는 오늘따라 숨이 더 차는 기분이었다.
“미안, 한 번 해보고 싶었어.”
긴 숨을 내쉬고 헤실헤실 웃는 유타를 보며 마키는 이 마음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느꼈다. 때마침 돌아온 이누마키가 아니었다면 마키는 턱 끝까지 찬 말을 내뱉었을 뻔했다. 마중하러 가도 되냐며 묻는 유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누마키에게 뛰어가는 유타를 보며 마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에 잔뜩 붙은 먼지를 털어냈다. 잡념까지 함께 사라지길 바라며 있는 힘껏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자연스럽게 행동해. 몸을 푼 마키는 이누마키와 유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소처럼 말을 걸었지만 이미 내부는 엉망진창이었다. 그 뒤로 돌아온 고죠가 사온 도넛을 먹고 수업을 진행했다. 나름 고등학교였기에 일반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도 어느 정도 배워야 했다. 칠판에 빼곡히 적히는 수식들이 오늘따라 마키에겐 어지럽고 버거웠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유타와 마키 단둘뿐이었다. 이누마키는 상태가 안 좋아 보이더니 결국 감기에 걸렸고 판다는 출장 중이었다. 다행히도 이틀 동안 마키에게 일이 들어왔고 끝나니 점심시간을 넘겨 유타와 마주치는 시간이 적어 좋았지만 아무리 몸을 혹사시켜도 머리가 터지기 직전까지 공부를 해도 유타 생각을 그만둘 순 없었다. 당일 날보다 못한 상태가 되었다. 꼴랑 이틀을 같이 안 지냈다고 이렇게 될 수 있나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마키. 수고했어. 어제 오늘 아침에 일하고 바로 수업 듣기 힘들겠다.
“어, 응..”
“점심은 먹었어?”
“응.”
“그, 나도 먹었어! 혼자 먹는 건 최근 들어 오랜만이라 기분이 이상했어.”
“그래?”
“응. 음..”
유타는 어색한 분위기를 살려보려 마키에게 계속 할 말을 찾았지만 어떤 대화주제를 꺼내도 마키의 반응이 미적지근하니 이내 포기하고 먼저 들어가겠다며 자리를 피했다. 방으로 돌아가는 유타가 유독 힘이 없어 보이고 생각이 많아 보였지만 그걸 신경 쓸 만한 여유가 마키에겐 없었다. 끊임없이 튀어나오려는 재채기 같은 말을 참느라 고생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유타 알레르기가 있는 것 마냥 유타만 보면 코끝이 간질거리고 가슴이 찡했다. 아까도 유타와 실수로 손이 스쳤는데 화들짝 놀라 손을 떼고 말았다.
마키는 도무지 유타의 얼굴을 제대로 볼 자신이 없었다. 이런 자신이 한심하고 바보 같다는 건 알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지금의 모습은 자신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 고장 난 인형이 된 것 같은 생각, 마키는 있는 힘껏 자신의 뺨을 후려쳤다. 아픈 것도 잠시뿐 잡념이 달아나는 것은 아니었다. 겨우 드라마 하나 때문에 미쳐 날뛰는 감정이 끔찍하게 싫었다. 유타를 보면 그날 스쳤던 입술의 감촉과 그때 했던 생각들이 자꾸 떠올라 쿵쾅쿵쾅 소리를 내며 마구 심장을 헤집는 바람에 유타에게까지 심장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유타가 자신과 달리 그날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혼자 유난 떠는 것이 싫었고 그런 유타의 모습에 실망하고 섭섭함을 느끼는 것도 싫었다. 고백을 하고 싶은 건 또 아니었다. 유타에게 리카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뛰어들 자신감은 없었다.
사랑은 지독한 저주였다. 내 모든 것이 뒤집히고 바뀌는 기분을, 앞뒤 안 재고 마냥 뛰어가고 싶다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싶은 기분을, 아무 이유 없이 기분이 좋다가 나빴다가 화를 냈다가 우울해지는, 그런 미친 기분을 느끼게 하는 저주. 마키는 그 순간에 차라리 판다가 있었다면, 하고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에 화들짝 놀랐다. 유타와 자신의 입술 충돌 장면을 보고 시종일관 놀려댔을 판다였다. 그런 판다에게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는 등 어떤 방식으로든 표출할 수 있었으리라 싶었다. 내일은 또 유타를 어떻게 봐야할지 막막했다. 아침과 점심은 어영부영 넘겼는데 저녁은 피하지 못했다. 분위기를 알아챈 건지 아무 말 없이 밥만 먹는 유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 마키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말을 붙였다. 자기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말이었지만 그 외의 적당한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최선이었다. 먼저 일어나기 머쓱해서 창밖을 바라보던 마키에게 유타가 대련을 하자며 다가왔다. 마키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유타의 새까만 눈에 자신만이 비치고 굳어있던 표정이 마키의 대답에 사르르 풀리는 모습이 거부할 수 없이 좋아서 승낙해버렸다.
오늘따라 유타가 눈을 맞추려 하는 것 같았다. 지금의 유타에겐 자신 밖에 안 보이지 않을까, 하는 묘한 흥분감에 마키의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지난 며칠 중에서 지금이 제일 컨디션이 좋다고 자신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고양된 감정이 추락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어?”
유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마키는 꺼낸 말을 무를 생각이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인 유타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저녁 시간처럼 이상한 말만 할까봐 입술을 꾹 깨물어 입을 닫았다. 겨우 감기 걸리니 씻고 자라는 말을 쥐어 짜냈다. 정말 무슨 말이야, 그건. 감기랑 씻는 거랑 무슨 상관이라고. 남들은 첫사랑이 간질거리고 설레서 어서 전하고 싶어 못 참겠다는데, 마키는 첫사랑이 답답해서 부디 닿지 않길 바라느라 녹초가 될 지경이었다. 탄산음료라도 마셔서 내려 볼까, 단단히 엉켜 꼬여가던 생각의 끝은 의외로 일차원적이었다. 기숙사를 나와 자판가로 향하던 마키의 뒤로 유타의 목소리가 들렸다. 텅 빈 통로에 유타의 목소리가 울렸다.
“마키!”
“윽, 유타?”
“나, 마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어!”
유타는 마키의 손목을 잡았다. 유타는 마키의 방에 마키가 없자 무작정 마키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 돌아다니다 마키를 만나 반가운 마음이 컸다. 유타는 뒤늦게 마키가 자신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치면 어떡할지 생각이 들어 마키를 구석으로 내몰았다. 마키의 오른쪽 손목은 자신의 왼손으로 잡고 자신의 오른팔은 벽 위로 올렸다. 마키는 유타의 갑작스런 행동에 어떤 반응도 할 수가 없었다. 유타가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마키의 눈앞에 저번에 판다와 봤던 그놈의 드라마가 펼쳐졌다. 유타는 그 드라마를 보지 않았다. 자신의 방에서 얌전히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타의 입에서 남학생이 했던 그 대사가 튀어나오는 모습을 보고 마키는 헉, 소리를 내며 굳어버렸다.
“마키는 나랑 이러고 있으면 불편해?”
“..그게 무슨 소리야?”
“요새 마키 자꾸 날 피하잖아. 쉬는 시간이면 곧바로 나가버리고 밥도 같이 안 먹으려 하고. 대련할 때도 나랑 안 부딪치려고 하잖아. 기분 안 좋아 보이는데 왜 그런지 얘기도 안 해주고. 혹시 내가 잘못한 거 있어?”
“..없어.”
마키는 간신히 멈춰버린 사고 회로를 가동했다. 역시 다 알고 있었구나, 그래. 모르면 바보지. 바보. 마키는 유타에게 미안한 마음과 동시에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그렇게 내 기분을 잘 알아채면 내 마음까지 알아줬으면 했다. 유타는 지금도 자신의 눈을 피하고 입을 앙 다문 마키를 보며 가슴 아래에서 무언가 솟구치는 기분이 들었다. 짜증, 인가? 짜증을 낼만한 상황은 맞았다. 친한 친구가 갑자기 자기를 피하고 이유마저 말하지 않는다면 누구라도 짜증을 낼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류의 짜증과 결이 달랐다. 무언가, 좀 더 괜찮은 이름을 붙여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유타는 마키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을 뗐다. 마키의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들이밀었다. 깍지를 낀 손을 들어 마키의 얼굴 가까이로 가져갔다. 마키는 손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드디어 봤다, 유타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마키는 놀란 눈으로 꿈뻑꿈뻑 유타를 바라보았다. 겨울이라 다행이다, 마키는 속으로 생각했다. 안 그랬음 귀와 코가 빨개진 것을 변명할 거리가 없었을 테니까. 입김이 다 나오는 겨울이라 손끼리 닿음에 전해지는 온기가 유타에겐 유독 애틋했다. 오랜만이었다.
“마키. 부탁이야. 혹시 안 좋은 일이 있다면, 내가 도와줄 일이 있다면 얘기해줘. 내가 싫어서 그런 거라면 망설이지 말고 얘기해줘. 나는 마키랑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게 더 싫어.”
마키는 인상을 잔뜩 구긴 채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애원하는 유타를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도망치는 자신도 이젠 내버려둘 수 없었다. 하지만 고백하지 않을 것이다. 백귀야행 때 유타의 말을 잊은 적 없었다. 거짓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적당한 고백과 적당한 생략의 조화는 무적이었다.
“날이 갑자기 추워져서 몸이 안 좋았어.”
마키는 기분이 표정에 다 드러났다. 지금 이건 마키의 생명줄이었다.
“계속 일도 나가고 수업도 받으니까 피로가 쌓이는데 잠을 잘 못 잤어. 피곤하니까 자꾸 짜증이 나서 혹시라도 너한테 짜증낼까봐 일부러 피했는데, 그게 너한테 더 안 좋은 영향을 줬나봐. 미안해.”
“아, 그랬구나.. 난 그것도 모르고..”
“아니야, 그렇게 생각할 만 해.”
“다행이다. 난 정말 마키가 날 싫어하는 줄 알고 겁먹었어.”
마키의 손에서 유타의 손이 서서히 빠져나가 유타의 손가락 중 일부만 마키의 손바닥에 걸렸다. 빈 자리를 아쉬움이 채웠다.
“내가 널 싫어할 리가 없잖아.”
“마키는 내게 소중한 사람이니까.”
“친구니까?”
“응. 친구니까.”
마키의 가슴에 가시가 날아와 박혔다. 알고 있었다고, 젠장. 그런데도 소중한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게 좋아서 어이없게도 미소가 지어졌다. 유타는 친구라고 말한 뒤 목이 따가웠다. 아까 삼킨 돌 같은 쌀들이 목구멍을 다 긁은 모양이었다.
“피곤한데 아까 내가 너무 졸랐지. 미안..”
“신경 쓰지 마. 컨디션 조절도 실력이니까. 애초에 네 잘못도 아니라니까.”
이렇게 말하니까 좀 나아진 것 같은데, 마키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나 여전히 가슴을 꽉 누르는 것이 남아 있었다. 첫사랑을 두려운 것으로 만든 그 감정이 남아 있었다. 유타 역시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유타는 반만 걸쳤던 손가락을 다시 끝까지 넣고 남은 한 손까지 깍지를 꼈다. 사실은 꼬옥 안고 싶었는데, 그렇게 할 수 없어서 찾은 차선책이었다. 그때였다. 유타는 자신의 몸이 허공에 뜨고 있음을 느꼈다. 마키는 그대로 유타를 날려버렸다.
“으윽-.”
“헉, 아니, 왜 갑자기?”
“갑자기? 가끔 이랬잖아?”
“그건 대련 중이었잖아!”
“그게 무슨 상관이야?”
유타가 진심으로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자 마키는 가슴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감정의 조각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구나, 유타는 정말 날 친구로 생각하는 구나. 한순간에 저녁으로 먹은 것들이 실종된 것 마냥 배가 고팠고 그걸 넘어 속이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정신이 바짝 들었다. 쓸데없는 걱정을 해왔구나. 유타가 마키의 마음을 알아챌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오히려 마음대로 좋아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눈물이 막 날 것 같은데 웃음이 났다. 신체 접촉에 특별함을 느끼는 것은 자신뿐이다. 한마디로 어떤 의미를 담아도 유타는 모른다. 이 사실이 마키를 기쁘게 하면서 슬프게 만들었다. 다만 마키가 모르는 사실은 유타 역시 마키와의 신체 접촉에서 어떠한 느낌을 받고 있었단 사실이었다. 하지만 마키와 달리 아직 그런 느낌이 사랑을 뜻한다는 건 알아채지 못해서 미지칭 상태로 간직하고 있었다. 리카를 좋아하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라 –더 특별한, 그런 식의 느낌이라기 보단 아예 다른 종류의 느낌- 당최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어 한참을 헤매는 중이었다.
마키가 드라마를 본 날도 혼자 방에서 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 마키에게 느끼는 감정을 정리하고 있던 중이었다. 유타에게 마키는 꽃보다도 나비보다도 정중하게 대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친구, 라기엔 부족했다. 소중한 친구, 맞는 말이지만 묘하게 어긋났다. 좋아하는 친구. 좋아하는. 좋아한다, 좋아해? 순간 머리를 맞은 듯 소란하던 머릿속이 조용해졌다. 정말로? 어떤 의미로? 왜?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어? 여러 물음표가 곧바로 머릿속을 빼곡하게 채웠다. 좋아하고 있어, 마키를, 강하고 멋지니까. 그러니까 어떤 의미로? 아마, 음, 아마도..
“이번에야말로 죽여주마, 판다!”
유타의 귀에 마키의 목소리가 또렷이 꽂혔다. 유타는 서둘러 방을 나서 티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까 마키랑 판다는 같이 드라마를 보고 있었는데, 거실로 향하자 두 이누마키가 마키와 판다 사이에 껴서 애쓰는 모습이 보였다. 이누마키가 마키를 말리라는 신호를 보내자 유타는 뒤에서 마키를 안았다. 일순간 마키가 조용해지고 숨을 들이쉬는 것이 느껴졌다. 마키와는 체술로 여러 번 붙어서 신체 접촉이 어색하지 않은 사이였다. 분명 그랬다. 마키는 종종유타의 어깨에 팔을 얹기도 했고 훈련을 마치고 쉴 땐 자신을 등받이로 삼기도 했다. 그땐 아무 생각도 안 들었는데 어째선지 오늘따라 기분이 묘했다. 심장이 울렁거리는 기분, 왠지 부끄러운 기분이었다. 마키는 곧 힘을 주어 유타의 품에서 벗어났다. 아무 말 없이 소파에 놓아둔 외투를 챙겨 방으로 사라졌다. 유타는 멀어져가는 마키를 보지 못하고 마키를 안고 있던 자세 그대로 멍하니 서있었다. 이누마키가 유타가 괜찮은지 팔을 툭툭 건드리고 나서야 그 자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날 밤은 내내 마키를 안았을 때 느껴지던 따뜻한 체온과 일렁이던 체향이 맴돌아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런 자신이 변태 같고 기막힐 노릇이었다.
밤을 꼬박 새워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다. 평소와 같이 대련을 시작했는데 어째서인지 마키의 주의가 이리저리 흩트러져 있어 군데군데 빈 공간이 보였다. 아픈 건 아닐 까 걱정이 되었지만, 곧 평소의 마키처럼 기개가 넘쳐 기복인가 싶었다. 초반의 우세한 기세를 몰아 뒷걸음질 치는 마키를 따라 가다 거리 조절을 잘못해서 마키의 얼굴과 자신의 얼굴이 너무 가까워졌단 걸 눈치 챘을 땐 이미 늦은 뒤였다. 마키와 입술이 닿았지만 금방 자세를 고쳐 뒤로 피했다. 마키는 아직 흔들린 자세 그대로였다. 다소 주저했지만 주저하지 말라는 마키의 말이 떠올라 그대로 마키를 뒤로 눕혔다. 마키의 얼굴엔 당혹감이 가득했다. 춥고 움직여서 그런지 얼굴이 새빨개져있었다. 춥겠다, 유타는 마키의 얼굴에 손을 뻗으려 했지만 멈칫했다. 내 손도 차가워서 고움은 안 될 것 같은데. 최근엔 마키를 상대로 꽤 승을 거두고 있었지만 대체로 마키가 이겼고, 마키를 이겨도 간신히 이기는 경우가 많아서 오늘처럼 완전한 승은 처음이었다. 마키가 늘 그러했듯 마키의 이마를 목도로 가볍게 쳤다. 마키는 아무 반응 없이 그대로 앉아있었지만 일어나라고 손을 뻗으면 화를 낼 것 같아서 어색하게 서있던 참이었다. 때마침 유타의 시선 안에 돌아온 이누마키가 보여 마키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누마키에게 향했다. 그 후 마키는 평소랑 같아 보여서 걱정을 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마키가 학교에 없는 동안 혼자 남겨져 점심을 먹던 유타는 연쇄 질문의 소용돌이에 다시 들어갔다. 어떤 의미로 마키를 좋아하고 있는 거야? 유타는 쉽게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가령 이성으로서 좋아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지내고 싶은 걸까? 연인이 되고 싶은 건가? 하지만 그건 마키도 날 좋아해야 가능한 거 아니야? 아니, 정말 마키를 이성으로 좋아하는 거야? 폭주하는 유타의 생각을 멈춘 건 마키였다. 유타는 저 멀리 보이는 마키에게로 한 걸음에 향했다. 계속 보고 싶고 생각나고 한 마디 더 걸어보고 싶은 이 마음은 무엇일까. 어제의 충돌은 분명 뽀뽀라고 보는 게 맞겠지. 하지만 마키 역시 그렇게 느끼는가는 유타로선 의문이었다. 혼자 설레발치는 것만큼 꼴사나운 일은 없었다. 앞서서 뽀뽀라고 생각하는 것부터 실례가 아닌가. 유타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가슴 깊이 꾹꾹 눌렀다. 조금 더 생각해보자. 지금 이 감정이 뭔지 더 알아보는 거야.
유타는 마키의 한결 편해진 표정을 보며 말을 걸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말을 걸지 않았다면 처음 추측대로 단순 피로를 오해해 사이가 걷잡을 수 없이 틀어질 뻔했다. 그렇지만 묘한 기시감이 있었다. 피로로 넘어가기에 걸리는 부분이 분명 있었는데, 툭, 유타는 자신의 머리에 닿는 감촉에 고개를 올려다보았다. 마키가 평소처럼 쓰러진 유타의 이마를 한 대 친 것이었다. 목도가 없어서 대신 주먹으로 쳤다. 세게 친 건 아니고 툭 아주 가볍게 쳤다. 그리곤 유타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운 후 오른팔을 유타의 목에 걸었다. 유타는 심장이 덜컹했지만 마키는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서 입 안이 씁쓸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유타, 같이 편의점이라도 갈래?”
“지금? 편의점까지 못해도 1시간인데?”
“8시잖아. 밤 운동이야. 뛰면 30분도 안 걸려!”
그렇게 말한 마키는 몸을 풀더니 곧바로 뛰기 시작했다. 유타는 허둥지둥하다가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고 마키를 쫓았다. 달이 밝아서 길 잃을 걱정은 되지 않았다. 간만에 아주 즐겁고 신나는 시간을 보냈다. 상대가 자신과 같은 마음을 갖고 있단 건 달빛에 사리지고 내쉬는 숨에 섞여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버렸다.
시간이 흘러 3학년이 된 유타와 마키는 이른바 연인 사이가 되었다. 이 간단한 단어로 정리할 수 있던 감정을 참 오래도 되돌아왔다. 겨우 서로의 마음이 통했는데 이제 무슨 걱정이 있겠냐만 두 사람에겐 아주 큰 문제가 남아있었다. 그건 바로 마키가 스킨십을 견디기 힘들어 한다는 사실이었다. 마키는 유타가 스킨십을 시도하면 몸이 바짝 굳거나 유타를 있는 힘껏 날려버렸다.
“왜 그러는 거야?”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애인과 포옹을 하려다 날아가 당황한 유타가 옷에 묻은 먼지를 털며 물었다. 마키는 유타보다 더 당혹스러운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러니까!”
“그러니까?”
“모르겠습니다..”
“뭐?”
마키는 뒷목을 매만지며 허공을 응시했다. 유타는 마키가 뭔가 숨기는 것이 있단 걸 알아챘다. 마키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며 알게 된 시그널이었다. 마키는 거짓말은 못해도 숨기는 건 잘했다. 유타를 좋아한단 사실도 오랫동안 숨겨온 마키였다. 감쪽같이 속여서 여기까지 오는데 애를 먹었다. 유타도 잘한 것은 없었다. 자기감정을 제대로 몰라서 사람 헷갈리게 한 주제에 할 말은 없었다.
“아마도 그, 하..”
“같이 훈련하거나 운동할 때 하는 스킨십은 안 그러잖아. 근데 왜 이럴 때만 그러는 거야?”
“그건 일종의 일이잖아. 공적인 거니까..”
“하지만 쿠기사키랑은 평소에 자연스럽게 포옹하고 손잡잖아?”
“그거야 네가 남자친구니까. 네가 이런 식으로 스킨십을 할 때 내뿜는 간질간질한 분위기가 부끄럽다고!”
“특별대우라니까 기분 무지 좋은데 나만 마키랑 못 안는다는 게 슬퍼!”
여자친구랑 겨우 손 한번 잡고 포옹 한번 하는 건데 긴장해야하는 상황이 애처로웠다. 악어 이빨 누르기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고 마키가 이번에 손을 잡을 땐 그대로 굳어버릴지 아니면 자신을 날려버릴지 조마조마하는 상황이 어이가 없어 웃음이 절로 나왔다. 굳이 따지자면 전자가 좋았다. 완전한 피지컬 기프티드가 된 마키는 아무리 특급인 유타여도 받아내기 벅찼다. 목숨이 위험하다고 생각된달까. 하지만 전자는 전자대로 기분이 별로였다. 스킨십이라는 게 서로 간의 애정을 바탕으로 친밀함을 느끼는 행위인데 지금 둘은 친밀함을 공유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유타는 마키에게 한 가지 대책을 제안했다.
“마키, 우리 만날 때마다 20분씩 스킨십 연습할래?”
“스킨십 연습?”
“응. 인터넷 찾아보니까 이것도 해봐야 느는 거래.”
“무슨 그런 연습을..”
“응? 제발.. 나도 마키랑 껴안고 싶고 손잡고 싶고 이것저것 하고 싶단 말이야.”
“으음, 그건 나도 그래. 나도 너랑 그러고 싶은 건 똑같다고.”
“지금 껴안으면 또 굳어버릴 거잖아.”
“시도 때도 없이 껴안고 싶은 거야?”
“당연하지! 아니, 게다가 마키가 엄청 귀여운 말을 했는데 어떻게 참으라는 거야?”
“무슨 소리야!”
“일단 하겠다는 거지?”
“..어. 수련한다고 생각하면 되겠지.”
유타는 마키의 눈빛이 변함을 느꼈다. 아니, 그런 태도로 임하는 건 조금 곤란하지, 가 튀어나올 뻔했지만 지금 모습이 마키다워서 내버려두기로 했다. 그 뒤로 두 사람은 시간이 날 때마다 20분 타이머를 맞추고 스킨십 연습을 했다. 처음엔 손바닥끼리 맞댈 뿐이었다. 유타는 마키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있다는 걸 느꼈지만 마키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안정을 되찾았다. 그 뒤로 손깍지 끼기, 어깨에 기대기, 등 맞대고 앉기를 거쳐 드디어 포옹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유타의 눈에 눈이 찔끔 고였다. 6개월이 지난 오늘, 키스를 마지막으로 스킨십 문제는 사라졌다.
첫키스는 레몬 맛이 난다는데, 레몬 맛보다 박하 맛이었다. 첫키스에 긴장해서 양치를 하도 해댄 것이 화근이었다. 아니, 사실 박하 맛보단 박하 향이 났다가 적합한 표현이었다. 그저 따뜻하고 물컹한 게 입안을 마구 헤집었다는 감각만이 두 사람에게 남아있을 뿐이었다. 여운이 남은 채로 상대의 눈을 본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키스라는 게 생각 이상으로 부끄럽고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이었다. 한 번 더 입을 맞춘 두 사람은 앉아있던 침대 위로 쓰러지듯 누웠다.
“앗, 그러고보니 우리 뽀뽀는 건너 뛰었어.”
“그건 예전에 했잖아.”
“어?”
“아?”
“했다고?”
“아니야. 착각했어. 안 했어.”
“뭐야, 언제? 마키, 응?”
“아니라니까!”
“..예전에 대련하다 부딪친 거?”
“어?”
“마키도 그거 뽀뽀라고 생각했어?”
“나도 그렇게 생각했냐니, 너 설마..”
“난 그렇게 생각했어. 그야 뽀뽀는 입술끼리 닿은 걸 말하는 거니까 그런 게 아닐까 싶어서..”
“변태.”
“엑? 마키도 그렇게 생각한 거 아니야?”
“아니야. 변태. 바보.”
“나는 그때 진지했다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난 그날 즈음부터 마키를 좋아했던 것 같아. 그래서 그날 뽀뽀한 거에 잔뜩 의미부여하고 혼자 설레발쳤어.”
유타는 쑥스러운지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마키는 유타의 꾸밈없는 진심이 좋았다. 쟤는 어쩜 저렇게 창피한 말을 내뱉을 수 있을까. 마키는 손을 들어 유타의 눈을 가리고 말을 이었다.
“나도 그랬어. 내가 그때 왜 너 피했는지 알아? 뽀뽀도 아닌 거 가지고 유난 떠는 게 유치하고 너 좋아하는 거 들킬까봐 그랬어.”
유타는 오랜 시간 가져왔던 기시감이 사라짐을 느꼈다. 유타는 자신의 눈을 가린 마키의 손목을 잡고 내렸다. 마키는 손이 내려가지 않게 힘을 썼지만 마키는 유타가 간질간질하는 분위기를 내뿜을 때 유독 약해졌다. 유타가 온 힘을 다하면 마키의 손을 내릴 수 있었다.
“마키, 정말 귀여워.”
“시끄러!”
3학년이 되고 1급 주술사가 된 마키를 존경하고 좋아하는 후배들은 차고 넘쳤다. 언제나 당차고 자신감 넘치는 마키를 좋아하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마키도 자신을 따르는 후배들을 퍽 귀여워했다. 마키의 멋진 모습을 보는 사람은 한 가득이었지만 마키의 무방비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란 것이 정복감이랄까, 고취감이랄까 그런 종류의 감정을 느끼게 했다. 마키의 눈 안에 자신이 담기고 자신의 눈 안에 마키가 담기는 이 순간이 행복했다. 유타는 팔을 뻗어 마키를 꽉 안았다. 마키도 유타의 등 뒤로 손을 넣어 끌어안았다. 상대의 심장소리가 온몸으로 퍼지는 이 순간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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