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문의 사내

토우나오 귀문의 사내 (8)

새벽이 밝다

툇마루 by 담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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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오야의 심리 변화를 위해 원작을 어느 정도 왜곡하고 있습니다

 * 사망 소재가 있습니다

 * 사투리가 어설픕니다

8. 귀향

“-단, 고죠 사토루가 사망 또는 재기불능의 상태가 되었을 시 후시구로 메구미가 젠인의 당주가 되어 전 재산을 물려받는다. 이상입니다.”

후루다테는 그렇게 유언의 전달을 끝맺으며 젠인 나오비토의 인이 찍힌 유언장을 다다미 바닥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자마자 맞은 편에 앉은 남성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자가 그것을 곧바로 가져갔다. 젠인 오우기는 그 종잇장 위에 적힌 글을 몇 번이나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한숨을 쉬며 그것을 다시 내려놓았다.

“…… 시부야사변 직전에 유언장의 내용이 바뀐건가?”

“젠인 나오비토님의 유언은 몇 년 전부터 동일한 내용이었습니다.”

그 말에 오우기의 주름이 깊어졌다. 진이치는 오우기만큼 격한 반응은 아니었지만 미간에 골을 만들고 있었고, 나오비토의 아들들도 그닥 좋은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다. 오로지 나오야만이 준비된 찻물을 천천히 비우며 느긋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젠인 나오비토가 죽었다.

시부야 사변 당일, 왼쪽 팔을 잃고 전신에 화상을 입은 채 돌아온 나오비토는 의식불명의 중태에 빠졌다. 그는 골격이 다부지고 뭇 젊은이보다 강인한 노인이었지만,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그대로 명을 달리했다.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온 26대 당주가 불의의 사고로 이승을 떠났지만 장례절차는 곧바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제대로 된 절차를 밟아 장례를 치르기에는 주술계의 혼란이 너무나도 컸다.

고죠 사토루의 봉인, 그가 공동 정범이라며 봉인 해제를 중죄로 지정한 주술총감부의 공문, 양면 스쿠나의 현현과 이타도리 유지의 사형 집행, 도쿄 23구의 황폐화 등등 단기간에 해결할 수 없는 큰 일이 연이어 일어난 탓에, 고삼가 중 가장 많은 인적 자원을 배출하는 젠인 또한 눈코뜰새 없이 바삐 움직여야 했다. 나오야가 없는 시간을 쪼개 진이치와 함께 병원에서 아버지의 간단한 사망 확인 절차를 밟고 돌아왔을 때, 젠인가에는 고문 변호사인 후루다테가 도착해 있었다. 

나오야도 본인이 아니라 메구미에게 당주 자리가 넘어갈 줄은 예상치 못했지만, 분하다거나 하는 감정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어차피 나오야에게는 이제 여명이 많이 남지 않았다. 당주 자리를 이어받는다 해도 몇 해를 넘기지 못할 것이다. 나오야가 이어받지 못할 자리라면, 차라리 토우지의 아들이자 훗날 젠인의 그 어떤 주술사보다 강해질 후시구로 메구미가 당주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나았다. 나오야가 직접 당주가 되어 토우지가 옳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지만, 토우지와 똑닮은 메구미가 당주가 된다면, 젠인의 녀석들은 그 아이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토우지를 떠올리고 속이 쓰리게 될 것이다. 나오야는 속으로 조용히 웃음을 삼켰다.

이 집안에서 귀신으로 업신여김을 당하던 사내의 핏줄이 이 가문의 정점에 앉는다. 어찌보면 참으로 유쾌한 결말이 아니던가. 그것은 마치 이 집을 반쯤 쳐부수고 떠난 사내가 남긴 하나의 복수처럼 보이기도 했다. 젠인 나오야가 굳이 용을 쓰지 않았어도 자연스레 이루어졌을 복수였다.

“…… 후시구로 메구미의 반응은?”

몇 번이나 유언장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던 오우기가 입을 열었다.

“후시구로님은 이를 받아들이셨습니다.”

후루다테가 대답했다. 그 뒤로 장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긍정적인 의미의 고요는 아니었다. 나오야를 제외한 치들의 얼굴은 그 정도가 제각기 다르긴 했지만 굳어져 있었다.

오우기를 제외하고선 당주 자리에 크게 연연하는 이들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젠인의 재산이 몽땅 메구미에게 넘어간다는 데에 있었다. 젠인의 재산은 현물에서부터 부동산까지 그 종류와 규모가 남달랐다. 당주가 사의로 10억을 운용해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 집안이다. 그런 재산이 고등학교 1학년, 그것도 가문의 손길 밖에서 자라난 아이가 통째로 물려받게 생긴 것이다. 오우기에 비해 비교적 온건파인 진이치도 그것과 관련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인지 험상궂게 생긴 얼굴을 약간 구기고 있었다.

“…… 어째서 그 녀석이 당주 자리를 받아들였지?”

“당주 자리를 원했다면 진작에 젠인에 들어왔어야 하지 않았나? 고죠의 손에 화초처럼 길러진 녀석이 젠인에서 버틸 수 있을 리도 없고.”

확실히 그건 그렇다. 나오비토는 늘 술을 달고 다니며 느긋한 일상을 영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많은 것을 책임지고 있었다. 정치적인 것부터 가문 내부의 문제까지, 당주라는 자리에 따르는 책임은 꽤 무거웠다. 게다가 후시구로 메구미는 어린 아이 답지 않은 진중함을 가진 소년이었으므로, 아무 생각 없이 당주 자리를 덥썩 받아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녀석은 고죠에게 신세를 크게 지고 있지 않았습니까. 고죠 사토루의 봉인을 풀기 위해 젠인의 세력을 이용할 셈이겠죠.”

진이치가 미간을 크게 찌푸린 채 유언장을 노려보는 오우기에게 말했다. 

고죠는 옥문강에 봉인되었다고 들었다. 또한 그 옥문강은 사멸회유를 일으킨 장본인의 손에 있을 것이므로, 고죠의 봉인을 풀기 위해서는 그 수단과 사멸회유에서 버틸 힘이 필요했다. 젠인에는 예로부터 축적해온 수많은 주구와 주술에 대한 정보가 있고, 인적자원은 물론이요 주술총감부의 동향 또한 쉽게 알아낼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아마 메구미가 노린 것은 단순 재산과 권력이 아닌 그쪽일 것이다.

그러나 젠인은 고죠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젠인이 후시구로 메구미를 달갑게 맞이하지 않을 것임은 둘째 치더라도, 고죠 사토루가 봉인되어 주술총감부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 젠인 내부에는 그를 반가워 하는 이들도 제법 있었다. 더군다나 젠인은 보수파가 우세인 가문이었다. 고죠를 돕는 것도, 그를 돕다 공동정범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것도 사양이었다.

후루다테는 얼마있지 않아 모든 서류를 전달하고 방을 빠져나갔다. 주술계에 오래 몸을 담아 그 어두운 일면을 확실히 알고 있는 남자는 자신이 끼고 빠질 데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가 나가자 마자 오우기가 입을 열었다.

“…… 그렇다면 주술총감부의 지시를 이용하면 되지 않겠나? 후시구로 메구미를 정범으로서 처리했다고 한다면 대외적인 명문과 체면도 설 테니까.”

“거 큰일 날 소릴 허네. 메구미군을 그래 죽이삐믄 그 내막을 모른 척 해줄 놈들이 을매나 될 것 같나?”

후루다테가 나갈 때까지 조용히 찻잔을 비우던 나오야가 끼어들었다. 후시구로 메구미보다 재능도 술식도 뒤떨어지는 늙은이가 토우지의 핏줄을 끊겠다는 소리를 하고 있으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나오야는 입꼬리를 일그러뜨리며 탁 소리가 나도록 찻잔을 내려놓았다.

“안 그래도 상층부 놈들은 젠인보다는 카모를 이뻐라 하는디, 주목 받는 신예인 메구미군을 죽이믄 그걸 껀덕지 삼아 머라칼지 모린다 아이가?”

“마키와 마이도 함께 없애면 되겠지.” 오우기가 말했다.

“하?”

“메구미와 같은 고전 소속인 친딸 또한 정범으로서 같이 처리했다고 하면, 후시구로 메구미의 주살에도 당위성이 선다. 주술총감부는 고전의 세력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니 설령 알아챈다 하더라도 눈을 감아 줄 테고.”

“오우기 아재, 제정신이가?”

어이가 없었다. 설령 메구미와 나오야가 없었다 하더라도 진이치에게 밀려 당주가 되지 못했을 늙은이가 표독스럽게 권력에 대한 탐욕을 드러내고 있으니 그 꼴이 아주 사납기 그지없었다. 그를 위해 젠인에서 가장 유망한 주술사가 될 메구미를 죽이는 것은 물론, 두 딸까지 길동무로 삼아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전의 나오야였다면 아마 그의 의견에 찬동하여 당주 자리를 차지하고자 했을 수도 있었다. 본인의 한계를 모르고, 체념과 분수를 모르고, 후시구로 메구미를 몰랐다면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나오야는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는 것을 없앨 수는 없고, 현실을 부정한다 해도 나오야에게는 없는 의미가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나오야는 토우지가 남긴 흔적이자 그에겐 의미가 있을 후시구로 메구미를 죽게 놓아두고 싶지 않았다. 메구미가 젠인의 당주 자리를 차지해서, 토우지를 닮은 얼굴로 젠인의 정점에 서서 웃어주었으면 했다.

“너야말로 제정신이냐? 차기 당주로 지명을 받았던 놈이 이런 소식을 듣고도 계집처럼 순종하기나 하지를 않나, 고죠와 정범으로 엮이면 가문이 무너질 수도 있는데 이를 묵인하려 들어?”

“하, 가망도 없던 당주 자리 땀시 지 기집아를 싸그리 갖다 바치겠다는 애비보단 낫제!”

“나오야.” 진이치가 끼어들었다.

“아, 새끄럽다. 우쨌든 낸 메구미군을 죽이삐는 건 반대여. 그리고, 사토루군이 당할 정도믄 이 집안의 머스마들을 한 트럭 갖다바치도 택도 안될 턴디, 점마들 눈치 본다꼬 사토루군을 그대로 두는 건 멍청한 짓이다.” 나오야는 더 이상 말을 듣지 않겠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라리 사토루군헌티 빚을 지워두는 기 낫지 않긋나.”

나오야는 방 바깥으로 걸음을 옮기며, 흰 버선으로 감싸인 발 끝으로 오우기 앞의 찻잔을 툭 쳤다. 찻물이 바닥으로 쏟아지며 오우기와 진이치가 나오야의 이름을 외치는 것이 들렸지만, 나오야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단단히 못을 박아두긴 했지만, 젠인가는 나오야의 말과는 다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었다. 나오야는 젠인 내에서 인적 기반이 거의 없다시피 한데다, 유언장에 따르면 나오야는 이제 차기 당주가 아닌 젠인의 일개 일원일 뿐이었다. 나오야는 여전히 병의 필두이긴 했지만 병과 구구류대는 대부분 진이치의 편이다. 그 진이치도 일단은 오우기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 같으니, 젠인이 메구미를 비롯한 친 고죠파를 주살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은 나오야도 어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오야는 메구미를 죽게 놓아둘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나오야에게는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다. 메구미의 옆을 감싸돌며 호위 역할을 자처한다 한들 오래 지켜줄 수는 없을 것이고, 애초에 메구미가 나오야의 호위를 받아들일 지도 미지수였다. 그렇다면 가장 좋은 방안은 역시 메구미의 후견인인 고죠 사토루를 옥문강에서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고죠 사토루가 있다면 젠인이 메구미를 주살하려는 것을 전면에서 막아줄 수 있을 테고, 젠인 내에서 입지가 불안한 메구미의 든든한 우방이 되어줄 것이다.

다만, 주술총감부의 공문에 의하면 그러한 행위를 하는 자들은 전부 사형 대상이 된다. 젠인 나오야는 총감부 녀석들에게 발목을 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후시구로 메구미는 다르다. 아무리 은밀하게 움직인다고 한들 그는 고전에 갓 입학한 어린애일 뿐이고, 고죠를 후견인으로 둔 그 움직임은 눈에 띄게 될 것이다. 도쿄교의 학장조차 사형이 보류된 채 감금되어 있는 실정이다. 그를 감싸주거나 도와줄 어른은 없다. 오히려 젠인의 녀석들에게 발목을 잡혀 죽게 될 것이 뻔했다.

그렇다면, 후시구로 메구미가 고죠 사토루의 봉인 해제와는 관계 없는 인물임을 상층부에 어필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나오야는 이를 위해 오우기가 꾸미는 주살 계획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오우기는 본인의 관리 하에 있는 기고의 주구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있었다. 메구미, 그리고 아마 메구미와 함께일 마키가 우선은 주구를 필요로 할 것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젠인의 기고에는 여러 고등급의 주구가 보관되어 있었다. 그 중에 옥문강의 봉인을 해제할 수 있는 게 있으면 당첨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주구사인 마키에겐 큰 전력이 될 수 있었다. 오우기는 텅 빈 기고로 그들을 유인하여 단번에 해치울 작정인 듯 싶었다.

아마 마키가 가장 먼저 기고를 찾아올 것이라 나오야는 예상했다. 마키는 주구사이니 주구를 감별해내고 쓸만한 것을 골라낼 안목이 있었다. 또한 아무리 젠인의 당주가 되었다 한들 젠인의 사정에 밝지 않은 메구미를 젠인에 보낼 리도 없고, 마키는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경향이 있으니 혈혈단신으로 쳐들어올 가능성이 꽤 높았다.

그렇게 오우기가 젠인 마키를 주살하는 것을 방치한다. 그리고 그 시신을 빼돌려 상층부로 인도시킨 뒤, 후시구로 메구미가 당주가 된 젠인가에서 정범의 싹을 잘라냈다고 보고한다. 후시구로 메구미는 젠인가의 당주로서 친 고죠파이자 절친한 선배를 죽일만큼의 각오가 된 인물임을 알려, 당주 자리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리하면 젠인가는 쉽사리 메구미에게 손을 댈 수 없을 것이고, 상층부의 경계도 한 풀 꺾이게 될 것이다. 만약 당장 사용해야 하는 주구가 있다면 나오야가 몰래 전해주면 그만이다. 나오야의 남은 시간 동안 그 정도는 해낼 수 있었다.

메구미는 마키와 친밀한 사이인 듯 했으니, 이런 식으로 본인을 지키려고 든다면 분명 화를 낼 것이다. 하지만 나오야에게는 그런 사정을 봐줄 만한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얼마 남지 않은 생명력의 몸을 반전술식과 주력으로 억지로 일으켜 세운 것은 이 몸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토우지에게 바치기 위함이었고, 그 이외의 것을 신경쓰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약자는 애초에 모든 것을 고려하며 품을 수 있는 선택지를 고를 수 없었다. 모든 것을 이룰 수 없으므로, 우선순위에 따라 목표를 취사선택해야 했다.

그렇게 나오야는 매일 밤 옅어지는 생령을 태우며 때를 기다렸다. 나오야의 생명력은 마치 다 써가는 치약 튜브에 남은 것처럼, 끊길 것 같으면서도 끊어지지 않은 채 나오야를 숨 쉬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곧이다. 몇 걸음 남지 않았다. 몇 달? 몇 주? 며칠……? 토우지에게 전부를 바치게 되어 만약 나오야의 바람대로 이루어진다면, 토우지는 메구미의 힘이 되어주지 않을까. 아니면 자유롭게 살아가려나. 아무래도 좋았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텅 빈 채 아가리를 벌린 기고에 첫 손님이 찾아왔다. 한 밤 중에 젠인의 대문을 향해 다가온 그 여자는 젠인 마키가 아닌 젠인 마이였다.

제 언니와 똑같은 짙은 녹빛의 머리카락을 굴곡진 단발로 다듬은 여자가 나오야의 맞은 편에 서 있었다. 마이는 대문에 서 있는 나오야를 보더니, 당황한 듯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그러다가도 곧 결의를 다진 듯 재차 문지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오우기 아재가 기고를 비워뒀다. 가도 원하는 건 없을 기다.”

무심코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마이는 그렇게 말하는 나오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의외라는 듯 그 녹색의 눈이 살짝 동그랗게 뜨여 있었다.

나오야에겐 마이 또한 마키만큼 별 볼일 없는 존재였다. 마키와 같은 제법 괜찮은 외모에 몸매를 가진데다 순종적이고 편리한 성격이라 조금 더 마음에 들어했을 뿐이었다. 어차피 잡어 술식, 주력의 양도 적어 주술사로서 가치도 적었다. 마키를 따라 고전에 입학하기야 했지만 보수파의 입김이 닿는 교토교로 진학했고, 고전과 마키의 정보를 넘겨주는 끄나풀 역할을 얌전히 수행했던 여자였다.

유순한 여자. 반항하지 않고 복종하는 여자. 젠인의 풍습에 스스로를 끼워맞춘 여자. 젠인의 여자답게 스스로를 길들인, 겁이 많고 순종적인 여자였다. 젠인 마이는 그런 여자였다.

“아, …… 그런가요.”

그런데 마이는 이렇게 말하고는 발걸음을 돌리지 않고 대문을 넘었다. 

젠인 오우기는 부정(父情)을 기대할 수 있을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기엔 마키와 마이는 자식 취급은커녕 있어서는 안되는 것 취급을 받았다. 젠인 오우기에게 자신의 쌍둥이 여식은 떼어버려야 할 혹이었고, 본인의 앞길을 가로막은 장애물이었다. 아마 오우기가 메구미의 주살에 정당성을 얻기 위해 쌍둥이를 죽이기로 한 것에는, 그의 두 딸을 향한 혐오의 감정 또한 한 몫 했으리라.

그런 자가 파놓은 함정으로 마이는 기꺼이 걸어가려 하는 것이었다. 당주의 허가를 받았다지만 메구미는 아직 실질적인 힘이 없었다. 더군다나 주술총감부의 명령에 위배되는 행위를 하러 가는 것이니, 가문 내에서 숙청을 당해도 어찌 변명할 수도 없었다.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 그런데 겁이 많고 아픈 것을 두려워하는 마이가 스스로 이렇게 움직이고 있었다.

젠인 마이가 젠인의 여자가 아니게 되어가고 있었다.

누가 이 녀석을 젠인이 아니게 만든 것일까. 나오야는 이미 그 원흉을 알고 있었다.

“나오야씨, 마키가 이곳에 오면 그 녀석에게는 돌아가라고 말해주세요. 아마 아버지는 분명 마키를 죽이려고 들 테니까.”

마이의 하얀 얼굴에 옅은 미소가 올라와 있었다. 눈매는 버드나무 이파리처럼 살짝 휘어지며, 그 사이의 눈에 솔잎색의 이채를 담아냈다. 그 눈동자에 고인 안광이 익숙했다. 나오야는 저러한 눈을 알고 있었다. 매일 아침 샤워실의 거울에 맺인 상으로 보는 눈이었다.

귀신에게 홀리고 만 눈이었다.

“니도 참 미쳐뿟구마.”

나오야가 말했다. 마이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텅 빈 기고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점점 작아지는 뒤통수를 바라보며, 나오야는 어째서 자신이 그 날 마이가 고전에 가도록 부추긴 것인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 

 


쿵, 빠득, 쾅, 하고 무언가가 요란하게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비명소리, 고함소리가 간간이 섞여 가만히 귀만 기울이면 지옥이라도 세상에 나타난 듯 싶었다. 나오야는 건반 뚜껑 위로 팔꿈치를 기댄 채 창가 너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오야는 마이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마키가 저 멀리서 걸어오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이 집에서 유일하게 서양식으로 지어진 방으로 들어갔다. 마이는 아마 죽었을 테지만, 마이는 교토교의 학생이라 친 고죠파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나오야가 상층부에 메구미의 정당성을 확실하게 호소하기 위해서는 도쿄교의 학생이며 메구미와 친밀한 사이인 젠인 마키의 시체가 필요했다. 그래서 방관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그 날처럼 사방이 소란스러워졌다. 남녀할 것 없이 비명소리가 얽여 하늘을 찔렀다. 피 냄새와 먼지 냄새가 났다. 도망가는 하인들의 발소리가 시끄러웠다. 나오야는 눈을 감고는 피아노에 몸을 기댔다. 이리하고 있으니, 토우지가 젠인에서 떠나가던 날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사람을 찰흙 인형처럼 뭉개고 종이처럼 베고 찌르며 귀기어리게 웃고 있던 그 사내의 모습이 생각났다.

곧 사방이 조용해졌다. 그 와중에 터벅, 터벅, 무게 있는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끼익, 문이 열리자 나오야는 몸을 돌려 그 방향을 바라보았다. 전신에 화상흉터를 불꽃처럼 두르고,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 여자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얼굴에서부터 발끝까지 채 식지 않은 피와 살점이 튀어 있었고, 홍채 사이의 검은 동공은 권총의 총구처럼 나오야를 일직선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 무기질함이 참, 사람 같지 않았다. 

……여자? ……사람?

저승사자라고 해야 할까. 하긴, 이제 이 집의 사내란 사내는 아마 이 녀석이 거의 다 죽였을 테니 저승사자라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나오야는 손에 턱을 괸 채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지독한 꼴이잖여, 마키짱.”

 


“인간의 마음이라든가 있는 기가?”

“없어. 그 녀석이 전부 가져가버렸으니까.”

 

마이짱, 해냈구나.

내보다 먼저 귀신을 세상에 온전히 현현시켜부렸잖여. 


쵸쥬로가 만들어낸 병의 훈련시설에는 그 어느 때보다 짙은 쇳비린내가 진동했다. 그 냄새에 코가 찡하게 아리다 못해 마비될 정도였다. 나오야는 코끝을 문지르며 익숙한 지면을 밟았다. 어렸을 때가 생각났다. 이곳에 허수아비를 여러 개 늘어놓고, 그것을 주먹으로 파괴하는 훈련을 했었다. 그것을 해낸 것만으로 칭찬을 받고, 허황된 미래를 상상했던 꼬맹이는 이제 이곳에 없다. 다 타 녹은 촛불 같은 형상을 한 채, 제 동생의 생명을 땔감 삼아 귀신으로 화한 여자를 마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먼저 달려든 쪽은 나오야였다. 수 없이 그래왔던 것처럼 프레임을 그려내며 나오야는 그 사이를 질주했다. 늘씬하지만 단단하게 단련된 몸으로 속도로 인한 풍압을 견뎌내며, 나오야는 쏜살 같이 마키에게 주먹과 팔다리를 내질렀다. 나무토막이라도 패는 것 같았다. 이전 같으면 그 아래 근육과 뼈가 어긋나는 것이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그런 감각이 들지 않았다.

속도와 무게를 곱해 힘을 만든다. 가속도를 붙인 발차기는 마키의 가드에 막힌다. 하지만 그 속도로 인해 마키의 몸은 절벽으로 된 면에 처박혔고, 그 주변으로 먼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연기가 걷힌 그 자리에는 생채기조차 나지 않은 마키가 있었다. 하, 나오야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다시 처음부터. 속도와 무게를 곱한다. 그 곱은 곧 힘이 된다. 가속도를 붙인 팔에 주력을 실타래처럼 둘러, 꽈악 조였다. 그대로 휘두른다. 퍽, 마키가 내민 팔뚝에 주먹이 막혔다. 자연스레 열린 상체에 마키가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 보였다. 무릎과 정강이에 주력의 실을 묶는다. 1초. 나오야는 지면을 박차고 거리를 벌린 뒤 다시 뛰어들었다. 그 사이에 눈이 점점 적응하고 있는 것인지, 마키의 주먹이 나오야의 뺨을 스쳤다. 무쇠로 된 금속덩이가 스친 줄로만 알았다. 그것이 옅게 지나친 살갗이 뜨거워진다 싶더니 곧 비린내나는 액체로 젖는 것이 느껴졌다.

점점 사지가 삐걱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주력으로 보강한다 한들 그것으로 신체에 가해지는 모든 부하를 없는 것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투사주법이 주력의 소모가 적은 술식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매번 온 몸에 주력을 두르고 죄이면서도 여유를 부릴 수는 없었다. 생령이 거의 마모된 몸이 어딘가에서 무너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 부위에 반전술식까지 쓰면서 시간을 끌 수는 없었다.

뺨에 난 생채기에 반전술식을 쓰며 여유로움을 연기하기엔, 아마 마키의 눈에는 훤히 들여다보일 것이다. 나오야가 얼마나 미련하게 이런 곳에 서 있는지, 얼마나 하찮은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는 것인지 말이다.

마키는 나오야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두 발의 간격을 벌리고 섰다. 자세를 낮추고 두 팔을 나오야에게 내밀었다. 그리고는 웃었다. 생기어리게, 모순적이게도 귀기어리게 웃었다.

“안아줄게, 나오야.”

“하, 니 같은 기집은 내 취향이 아이라.”

그렇게 맞받아쳤지만, 나오야는 마키를 이길 수 있는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나오야는 죽게 될 것이다. 이 자리에서, 그토록 무시했던 가짜에게 죽게 될 것이다.

그 날 이후로부터 늘 죽음을 곁에 두고 살아왔지만, 여기서 저런 가짜에게 죽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오야는 토우지에게 본인의 모든 것을 건네주리라 다짐했다. 그 날 토우지는 나오야의 말을 막아섰지만, 매일 밤 귀접을 이어가게 된다면 언젠가는 이루어질 일이었다. 그 끝이 얼마 남지 않았었다. 조금의 시간이 더 있었더라면 나오야는 자신의 모든 생령을 토우지에게 쏟아부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나오야의 저승길에 토우지가 있지 않더라도, 지옥에 홀로 남게 되더라도, 토우지가 이승에서 살아숨쉬는 그 근원이 나오야에게 있다는 것에서 나오야는 자신의 의미를 찾아내려 했다.

하지만 나오야는 이곳에서 죽는다. 토우지의 가짜에게 죽는다. 나오야가 아직 끝내지 못한 생령의 공양은 마이가 먼저 해내버렸고, 마키는 그로 인해 귀신의 형상으로 이곳에 현현했다. 가짜일텐데, 가짜가 분명했을 텐데. 젠인 마키는 토우지의 열화판일 뿐이고, 잡어에 불과한 약자였을 텐데. 나오야의 눈 밖에 머물며, 몇 번이나 현실을 직시하게 했음에도 그 몽상을 끝끝내 놓지 않았던 건방진 가짜였을 텐데.

아니, 사실은 나오야가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주술계는 불합리하다. 태어나서부터 몸에 새겨진 술식과 주력의 양으로 주술사로서의 9할이 결정되고, 후천적인 노력에 의해 엎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개인의 노력과 근성이 그것에 끼치는 영향은 미미하다. 어떤 이가 단숨에 껑충 성장해버리는 것은 그가 뼈를 깎는 노력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애당초 그 만큼 할 수 있는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고죠 사토루도, 후시구로 토우지도, 후시구로 메구미도, 눈 앞의 젠인 마키도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나오야가 어찌 닿을 수 없는 영역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나오야는 영영 닿을 수 없는, 넘볼 수 없는, 꼴사납게 발버둥치고 사력을 다해도 넘어서지 못하고 좌절하고 체념할 수 밖에 없었던 그곳에 마키가 서 있었다. 그토록 멸시했던 가짜가 서 있었다.

2등의 천여주박 피지컬 기프티드라고 생각했던 그 여자가 서 있었다.

나오야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살아왔던 것일까?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좌절하고, 체념하고, 그럼에도 그 밑바닥에서 목표를 점점 타협해가며 악착 같이 살았다. 강자들이 저만치 앞으로 단숨에 나아갈 때, 한 걸음 두 걸음을 겨우 걸어내다, 결국에는 그 마저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이룬 것이 무엇 하나 있기는 했나?

나오야는 저편에 서는 강자가 될 수 없었다. 토우지의 옆에 설 수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살아생전 토우지의 무언가가 되지도 못했다. 당주가 되는 것도 포기했다. 그러면서도 토우지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멋대로 건네주는 일조차도 제대로 해내지 못한 채 나오야는 이곳에서 죽는다. 평생 멸시했던 여자에게, 본인의 분수를 알라며 이죽였던 여자에게, 사실 제 분수를 제대로 알지 못했던 녀석은 자신 뿐이었다는 것을 상기하면서 죽는다.

나오야는 품에서 주구를 꺼냈다. 그것은 평소에 나오야가 사용하던 나무 칼집의 단도형 주구가 아니었다. 그것을 감싼 맨들맨들한 비단 보자기를 풀어내자, 그 안에서 은장도의 형태를 닮은 물건이 드러났다. 반질반질하게 잘 닦여 빛나는 칼집을 벗기자 그 아래 반짝이는 날이 모습을 보였다.

“어디 한 번 막아보라, 마키짱.”

노리는 것은 급소. 해내야 하는 것은 달려들고, 찔러내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속도, 사지를 묶을 주력, 그 때까지 숨을 쉴 생령이다. 기교는 부릴 수 없다. 나오야가 가진 것은 24개의 프레임과 아음속에 이르는 속도 뿐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압도하는 기술 같은 것은 나오야에게 없었다. 영역 전개와 같은 주술의 극치 따위는 꿈도 꾸지 못하고, 그저.

나오야는 오른손에 주구를 쥐었다. 금빛의 두 눈을 크게 떠 프레임을 그려냈다. 할 수 있다. 해야만 한다. 해낸다. 그려낸다. 달려든다. 내지른다.

더 이상의 뒤는 기약할 수 없다.

호흡이 멈춘다. 삐걱거리던 전신이 주력으로 단단히 묶여 바짝 긴장한다. 핏줄이 확장된다. 혈류가 빨라지며 근육이 팽창한다. 시야가 넓어졌다. 신경계에서 불꽃이 튀고, 시간이 느려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나오야는 손바닥을 펼쳐 마키의 몸에 대었다. 나오야는 달렸다. 크게 달려 선회하며, 1초의 시간을 늘여 총알처럼 내달렸다.

한 평생을, 토우지에게 무언가가 되고 싶어 달려나가기만 했다.

나는 당신에게 무언가가 되었을까? 나는 당신에게 있어 기억에 남는 무언가일까? 몇 년이 넘도록 귀접을 하고, 그에게 모든 것을 넘기리라 다짐하고 소유권을 넘기었지만 그것은 나오야의 일방적인 감정일 뿐이었다. 나오야에게는 토우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분명 토우지는 자신을 학대하고 무시했던 이 집안에 오기를 원하지 않았으리라. 나오야가 그를 현세에 묶어버린 저주를 풀지 않았고, 매일 밤 허기를 채워주겠다 달려들어 생령을 넘기었으니 어찌할 수 없이 매일 밤 현현했던 것일 수도 있었다.

항상 불안했다. 나오야는 본인의 삶을 이루는 모든 가치를 전심전력으로 토우지에게 부딪쳐보았지만, 그에게 있어서 나오야는 그저 매일밤의 교접 상대 이상이기는 했을까. 없어도 그만인 무언가가 아니었을까.

…… 20, 21, 22, 23 ……

“24번이지?”

분명 마키의 뒤통수를 보고 있었는데, 어째서 이 여자는 보란 듯이 그 눈빛을 나오야와 마주하고 있는 것일까. 나오야의 시야에 그 무쇠와도 같은 경도를 자랑하던 마키의 주먹이 한 가득 담겼다. 그것은 영원과도 같은 찰나였다. 선명하게 전신을 휘감는 죽음의 예감. 아마 수많은 잔챙이들이 맞이했을 불만족스러운 주마등. 그런 것이 나오야의 척추를 꽈악 감싸물고 죄여오고 있었다.

쿵, 빠득, 까드득……. 눈 앞이 검붉게 변한다 싶더니 지척에서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뼈와 장기가 뭉개지는 파괴음이었다. 오른편 얼굴이 쇳물에 데인 것처럼 뜨거웠다. 반전술식을 써야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손 하나 까딱하기도 힘들었다. 억지로 주력을 계속 과하게 운용한 탓에 한계가 온 듯 했다. 의식도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마키가 무어라 하는 것 같은데, 핏물이 고인 고막에 그 소리가 닿지 않았다.

약자들의 죄는 본인의 분수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애초에 나오야가 젠인의 가풍을 올바르게 따랐더라면. 나오비토의 훈육을 받아들여 토우지를 멀리 했더라면. 주력이 없는 원숭이는 원숭이구나, 하고 미루어두며 그를 업신여기던 사람들을 가까이 했더라면. 나오비토와 같은 술식을 타고난 본인의 위치를 인지하며 그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젠인에 헌신했더라면. 귀신과의 일방적인 추억에 젖어 귀문에 가까이 가지 않았더라면. 그 귀신에 홀리지 않았더라면. 귀신에 오갈 데 없는 애정을 품고 간과 쓸개를 모두 내어주지 않았더라면.

젠인 나오야가 그저 젠인의 사내아이이기만 했더라면, 다른 미래가 존재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2등 당첨 복권이더라도 2등 나름으로 귀히 여겨지며, 십종영법술이 제 자리를 꿰찰 때까지 당주로서 살아가는 미래가 기다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젠인 나오야는 이곳에서 죽는 것이다. 젠인 나오야가 젠인의 사내아이이기 이전에, 순수한 힘을 열망하는 인간에 머물렀기 때문에 그는 귀신의 열화판에게 몰살 당한 가문의 홑몸이 되어 죽는다.

그런 것이었다.

 


푸르던 하늘은 마치 잿물을 푼 것처럼 서서히 어두워졌다. 마침내 서쪽 편부터 동쪽 저편까지 모든 면이 타올라 마침내 숯검댕이와 같은 색이 되었을 때에서야, 비로소 달은 그 밝음을 드러냈다. 햇빛을 반사하여 하얗게 빛나는 달이 그 빛줄기로 지면을 비추었다. 교토의 한 구석, 헤이안 시대 때부터 그 위용이 사그라들지 않았던 젠인가의 고택에는 죽음의 기운이 짙게 배여 있었다. 시체가 뒹굴고 뼈와 살점이 밤이슬 대신 맺혀 있는 그 집안에서는 모든 것이 멈추어버린 것 같았다.

그런 집 안의 어딘가, 마룻바닥 위를 비척비척 기듯이 걸어가는 한 인영이 있었다. 다리를 제대로 움직이는 것도 힘든지 그 걸음걸이의 간격이 불규칙했고, 이따금 발바닥이 마루를 긁었다. 몸은 앞으로 굽은 채 휘청거렸고, 팔로 벽면을 짚으며 지탱하기는 했으나 몇 번이나 넘어져 쓰러지는 것을 반복해야 했다. 그 사람의 몸은 군데군데 멍투성이였는데, 특히 얼굴의 오른편은 피딱지로 뒤덮여 있었고, 오른눈은 뜨지도 못하고 있었다. 숨은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촛불처럼 나슬댔다.

쿠당탕. 그 몸이 또 한 번 앞으로 기울어져 지면과 부딪쳤다. 나오야는 손끝으로 지면을 짚고 다시 한 번 일어났다. 그는 가야만 했다. 북동쪽으로 가야만 했다.

어떻게 나오야가 아직 살아있는 지는 알 수 없었다. 마키가 어디 한 번 굴욕을 겪어보라며 놓아두고 간 것일 수도 있고, 나오야가 은연 중에 남은 주력을 전부 짜내 반전술식을 사용한 것일 수도 있었다. 어찌되었든 나오야는 아직 살아있었다. 그렇다면 멈출 수 없었다.

그 때였다. 등 뒤에서 타박, 타박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등의 어드매가 인두로 지진 듯이 뜨거워졌다. 온 몸은 차갑고 서늘하여 생기가 돌지 않는데 오로지 그 부분만이 데인 듯이 그러한 온도로 들끓고 있었다.

“윽, 아…….”

등 뒤에서 밀어붙여지는, 그 가벼운 체중조차 견딜 힘은 나오야에게 없었다. 나오야는 뒤에 있는 것이 미는 대로 앞으로 쓰러졌다. 몇 번이나 바닥에 넘어지고 일어났지만, 이번에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 등의 뼈를 비집고 살을 파고든 날붙이가 나오야의 몸을 헤집고 있었다.

“……-……”

나오야를 찌른 여자가 어떠한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궁금하지 않았다. 나오야는 이 너절한, 마지막의 마지막에서야 겨우 급작스러운 충동을 행하는 여자의 곁에서 생명력을 다하고 싶지 않았다. 나오야는 손끝을 세워 바닥을 긁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몸을 앞으로 움직이기 위해 안간힘을 다 써보았지만,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토우지에게 가고 싶었다. 그가 나타나는 곳에 있고 싶었다.

그를 생각하는 것 만으로도 이 생명력이 다 사그라든 차가운 배에 열이 올랐다. 심장이 뛰었다. 망가진 폐가 어떻게든 살아나려고 숨을 쉬었다. 더 이상 짜낼 수 있는 힘은 없고, 고작 식칼에 찔린 자상에도 반전술식을 사용할 수 없을 만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데도, 토우지가 나오야를 살아있고 싶게 만들었다. 비참하게 만들었다. 발버둥치게 만들었다. 이 하찮은 몸뚱이의 마지막 숨결까지 전부, 모든 것을 바치게 만들고 싶게 만들었다.

이 거부할 수 없는 비이성적인 감정, 팔다리를 밀쳐내는 슬픔과 기쁨, 젠인 나오야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은 전부 토우지가 만들고, 심어놓고, 빼앗아 간 것이었다.

“…… 낳길 잘했어…….”

여자가 말했다. 점점 물에 빠진 듯 멍해지는 귓가에도 그 목소리는 생생하게 들렸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정말이지 무엇을 위해 태어난 것일까…….

그저 유순하게 젠인답게 살아갔다면 평범한 주술사로서 그럭저럭 괜찮은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그랬을 텐데도. 그런데도 나오야에게는 어떠한 예감이 있었다. 이러한 비참한 결말을 알았더라도, 아마 젠인 나오야 자신은 그 귀문을 향해 갔으리라는 예감이 있었다. 설령 과거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나오야는 토우지를 만나러 가기 위해 귀문으로 향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리라고. 그 끝이 불행하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허무한 맺음이라는 것을 안다고 해도 그랬으리라고.

귀신에게 전부를 주기 위해서.

그 귀문에 사는 사내에게 전부 주기 위해서.

아, 그래, 젠인 나오야는,

그 귀문의 사내에게 홀리어 모든 것을 주고 바칠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심장의 맥동이 서서히 멎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사지의 말단조차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고, 나오야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눈을 깜빡이는 것에 불과했다. 천천히, 나오야는 그저 눈꺼풀을 오르내리며 죽음을 기다렸다. 몇 번 눈을 깜빡였을까, 마룻바닥을 보던 시야에 커다란 사내의 발이 불쑥 나타났다.

“나오야.”

아아, 정말이지,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 귀문의 사내는 9편으로 완결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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