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hes, and again 6 (完)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행복을 가지고 싶었습니다.
혼자 남은 에잇의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죽은 몸이 또 한 번 죽은 것 같았다. 아무런 감흥이 없고,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 나날. 곁에 말을 걸 수 있는 상대가 없어졌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에잇은 괴로웠다. 역시 집에 들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인간이 숲에 엎어져 있던 말던, 그날 그냥 못 들은 척, 못 본 척 두고 갔었어야 했는데. 지나치지 못했으면 차라리, 죽였어야 했는데. 하지만 어떻게? 지금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에잇은 그럴 수 없을 거였다. 아무 의미 없는 후회인 것쯤은 알고 있었다. 알고 있지만.
준의 방을 없애지 못했다. 준이 내버려 둔 인간의 시체도 한동안은 손도 대지 못했다. 구더기가 생기기 시작할 때쯤 에잇은 그걸 침대 위에서 끄집어낼 수 있었다. 시체에서 배어 나온 체액 탓에 침대 매트리스가 엉망이었지만 그것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결과적으로는 준의 방에는 불쾌한 냄새만이 남았다. 에잇이 맞춰 준 의복 몇 개와 그가 읽던 책 몇 권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는 방이었기에, 준의 체향도 잃어버린 그 방은 더 이상 ‘준의 방’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에잇은 그 방을 없앨 수 없었다. 없애는 순간, 준이 자신의 곁에 존재했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것만 같아서였다. 하루 온종일 준을 생각하고 있었으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에잇의 불안감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준이 아주 그리운 날에는 그날 준이 읽던 그 책,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책등을 괜히 손끝으로 쓸었다. 그러면 에잇은 편지를 쓰고 싶어졌다. 그렇게 보낼 수도 없는 편지를 여러 장 썼다. 종이의 끝까지 정성스레 내용을 채우고 나면 언제나 종이 끄트머리에 눈물 자국이 남게 되었다.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봉투에 편지를 깔끔히 접어 넣고, 왁스로 봉인하면서 에잇은 생각했다. 베르테르의 처지가 차라리 자신보다는 낫다고.
한동안 꾼 적이 없던 꿈들에 짓눌리는 나날이 이어졌다. 언제나 시작은 준에게서 위선자라는 말을 듣던 그때였다. 그날의 모습이 정성스럽게도 재연되어 있었다. 에잇은 여전히 준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준은 에잇의 손에 닿지 않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닿을 일은 없었던 거라고, 처음부터 갖지 못할 것을 갖고 싶어 했던 거라는 생각을 하면 자꾸만 몸이 가라앉았다. 가라앉고, 가라앉아서 끝내 어두컴컴한 방에 혼자만 남았다. 문도, 창문도 없는 방. 에잇은 거기 가만히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움직임을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공기가 몸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그러면 어디선가 준이 나타났다. 에잇에게 다가와 그 빨간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봤다. 준, 이라고 소리 내 부르는 건 허락되지 않았다. 준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그 시선을 사형 선고처럼 감내하고 있으면 어느 순간 준이 입을 열었다. 위선자. 그 차가운 단어에,
준.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눈을 뜨는 것까지가 악몽의 끝이었다.
에잇의 시간이 느리고 느리게 흐르는 동안 두 번의 전쟁이 지나갔고, 세상은 빠르게 변화해 갔다. 에잇은 여전히 적극적으로 인간들의 사회에 끼어드는 법이 없었다. 그만큼 에잇의 변화 또한 느렸다. 눈대중으로 격변을 따랐고 어디에도 진심을 담을 수가 없었다. 준의 방이 남아있던 집은 허물어졌고 그 자리에는 넓은 농장이 자리 잡았다. 에잇은 떠밀리듯 사람들 사이에 섞여야 했다. 그러다 에잇도 대양을 건너게 되었다. 이제 대양을 건너는 데에는 2주라는 시간은 필요 없었다. 아홉 시간이면 충분했다. 그렇게 도착한 시끄럽고 활기찬 도시 속에서 에잇의 존재는 그림자와 같았다. 그의 파란 눈은 여전히 무심했다.
에잇은 기나긴 삶의 경력을 살려 학자가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학자를 돕는 사람이었다. 한 재즈 바에서 어쩌다가 말을 섞은 사람이 진짜 학자였다. 안경을 쓴 그는 재즈 바에서 술 대신 코크 플로트를 마시는 사람이었다. 어쩌다가 주문하는 걸 들은 적이 있었는데, 코크는 꼭 제로 콜라로 변경했다. 에잇은 속으로 아이스크림이 올라가는 코크 플로트를 굳이 마시는 이유가 무얼까 궁금해했다. 그 옆에서 와인을 주문한 에잇은 마시는 둥 아닌 둥 하며 혀만 적시고 있을 때였다. 그 남자가 다른 사람과 열심히 몇 세기 전 유럽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에잇은 듣고만 있다가,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화제가 나와 한마디 거들었을 뿐이었다. 그게 다였다. 하지만 학자인 그 남자는 에잇에게 아주 큰 흥미를 보였다. 에잇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생생한 기억들(물론 그의 눈에는 그저 역사에 빠삭한 사람으로 보였겠지만) 훌륭한 사료였고 키가 작은 그 학자는 안경 너머의 눈을 반짝이며 에잇의 말을 경청했다. 그러다가 문학 얘기를 나누기도 했으며,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이따금 음악 얘기도 했다. 재즈 바에서 다섯 번쯤 마주친 뒤에야 지훈, 이라며 자신의 이름을 소개한 그는 에잇의 이름을 듣고는 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런 이름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에잇에겐 다행스럽게도.
종내에 에잇은 그의 집에 초대받았다. 초대받은 이상 에잇이 거절할 방법은 없었다. 그 한 번이 어려웠던 건지 지훈은 첫 초대 이후 꽤 자주 에잇을 초대했고 에잇은 해가 떠오기 직전까지 그의 논문을 돕거나 그에게 옛날이야기를 해 주다가 황급히 돌아가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말로는 알겠다고 했지만 항상 아쉬운 얼굴을 했다. 미안하긴 했으나 인간이 아님을 들키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우스갯소리로 한 신데렐라라는 말에 그가 웃어준 게 다행이었다. 그는 에잇이 오랜만에 찾은 세상으로의 동아줄이었다.
그런 시간을 보내다가 돌아오는 에잇의 거처는 황량한 공간이었다. 평범하고 오래된 아파트의 4층에 자리 잡은 곳이었다. 명분으로 놓인 텅 빈 것에 가까운 냉장고와 식기라고는 없는 밋밋한 부엌, 단 한 번도 켜 본 적 없는 티비, 그 옆에는 그래도 조금 사용감이 있는 레코드플레이어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거실 한쪽 벽을 몽땅 차지한 책장이었다. 거기 가득한 책들은 대양을 건너오면서 챙겨온 것들이었다. 그리고 책장 한 구석에 놓인 상자에는 준에게 보내지 못한 편지들이 담겨 있었다. 그 상자 곁에는 책등이 이상하리만치 닳아 버린,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초판본이 자리 잡고 있었다. 에잇은 여전히 부치지 못하는 편지를 썼다. 왁스로 봉투를 봉인하는 것도 여전했다. 편지를 쓰며 우는 횟수는 확연히 줄었지만 악몽을 꾸는 빈도는 과거나 지금이나 같았다. 오히려 더 늘어난 것 같기도 했다. 그 탓에 잠에 드는 게 싫어 억지로 눈을 뜨고 있는 날이 많아졌다.
과거와 확실히 달라진 것은 먹을 걸 구하는 방식이었다. 에잇은 여전히 사람의 피를 먹지 않기를 고수했기에 구태여 어려운 길을 걸었다. 결국 정착한 방식은 스테이크 하우스에 가서 레어 스테이크를 주문하는 거였다. 거의 익히지 않은 수준의 레어가 좋다고 하면 많은 서버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럴 때마다 에잇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날 것에 가까운 스테이크를 주는 곳은 합격, 아닌 곳은 불합격인 식으로 식사가 가능한 식당의 수를 좁혀 나갔다. 서버가 과하게 에잇을 이상하게 보는 곳도 피하고. 식사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면 항상 억지로 씹어 삼킨 고기를 게워 내야 했고 당연히 그런 식으로 얻는 피는 뱀파이어에게 있어 간식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과거에 비하면 항상 피가 모자란 채로 살고 있었지만 에잇은 아직 사람의 피를 탐내진 않았다.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였다. 적어도, 의식적으로 피해 온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구나, 하는 작은 만족감이 에잇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재즈 바에도 가지 않고, 지훈을 만나지도 않고, 식당으로 향하지도 않는 날이면 에잇은 곧잘 도시를 배회했다. 주로 도심 속 공원에서 새벽까지 멍하니 앉아 있다 집으로 향하는 식이었다. 에잇에게는 평화가 필요했다. 준을 생각하지 않을, 그 몇 달간의 기억을 잠재울 만한 평화가. 해가 진 후는 소음이 적어져서 그나마 공원이 가장 평화로운 공간이었다. 눈을 감고 백색 소음에 집중하고 있으면 에잇의 슬픔은 어느 정도 잠잠해지고는 했다.
어느 날은 적당한 시간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 횡단보도에서 낯익은 얼굴을 마주했다. 준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자기가 죽어도 괜찮다던 소년이 에잇의 옆에 멈춰 선 것이다. 물론 직감적으로 같은 소년이 아닌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얼굴만큼은 바로 어제 봤던 것처럼 생생히 에잇의 눈앞에 있어서 잠깐 예의도 잊고 그 얼굴을 계속해서 바라봤던 것 같다. 헤드셋을 쓰고 있던 그가 에잇의 시선을 눈치챘다. 헤드셋을 내리고서 할 말이 있냐고 물어왔다. 목소리도 똑같아서, 에잇은 잠깐 반가움을 느꼈지만 그냥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죄송해요, 사람을 잘못 봤네요. 정중한 사과에 정중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 네. 저도 죄송합니다. 소년은 그 말을 하면서도 ‘내가 왜 죄송한 거지.’ 같은 얼굴을 했다. 어쩐지 친구가 되고 싶어지는 순간이었지만 에잇은 그게 욕심임을 알았다. 길을 건너 성큼성큼 사라지는 그를 보며 언젠가는 다시 만나고 싶다고 바랐다.
딱 죽고 싶을 만큼만, 살 만한 나날이었다.
헤드셋을 썼던 그 소년을 다시 우연히 만났다. 지훈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단골인 스테이크 하우스에 자리 잡고 앉았을 때였다. 서버 유니폼을 입은 소년이 둘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메뉴판을 건네다 말고, 소년은 에잇의 얼굴을 빤히 봤다. 여기에 드나든 지 오래됐는데도 처음 봤다. 전혀 짐작하지도 못한 만남이라 에잇도 살짝 놀란 눈으로 소년의 얼굴을 바라봤다. 서버로 일하는데 머리를 세팅하지도 않았구나. 짧아서 상관 없는 건가? 아주 먼 옛날 그때에도 이런 머리였던가? 소년과 눈을 마주한 에잇이 세상과 유리되려 하던 그때였다. 지훈이 테이블 건너편에서 크흠, 헛기침을 했다. 소년도 에잇도 정신을 차렸다. 메뉴, 결정하시면 불러주세요, 서버인 소년은 그렇게 말하며 어물쩍 사라졌고 에잇은 멍하니 메뉴판을 들었다.
“아는 사이야?”
지훈이 그렇게 물어왔지만 에잇은 메뉴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답했다.
“아는 사이라면, 뭐 알긴 하는데. 일방적이라고 해야 하나.”
“여기서 본 거야?”
“여기서는 처음 봐.”
“뭐…, 그럼 스토킹했어?”
에잇이 메뉴판을 내렸다. 지훈의 얼굴이 징그럽다는 듯 살짝 구겨져 있었다. 에잇이 옅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메뉴판을 들었다.
“아니야.”
“그럼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지훈이 비꼬듯 말했다. 어차피 에잇이 먹을 건 정해져 있었으니 그에게 메뉴판을 넘겼다. 땡큐-. 스토커 취급할 때는 언제고 여상한 말투로 지훈이 인사했다.
“추천할 만한 메뉴 있어?”
“스테이크.”
“그건 당연하겠지. 말고 뭐 있냐고.”
“없어.”
“그래.”
지훈이 손을 살짝 들었다. 서버 소년이 테이블로 슬그머니 다가왔다. 대식가인 지훈의 주문이 길게 이어졌다. 턱을 괴고 무심히 앉아있던 에잇에게 주문을 묻는 말이 나왔다. 내밀어진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서로인, 레어.’라고 답했다. 그리고 소년과 다시 한번 눈을 마주했다.
“와인도 글래스로 한 잔. 피노 누아.”
소년이 또 멀뚱히 에잇을 쳐다봤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짧은 시간이 지났다. 소년이 주문을 확인했다. 에잇이 고개를 끄덕이자 소년은 어색하게 사라졌다. 자신의 존재도 존재지만 아무래도 일한 지 얼마 안 된 거겠지. 에잇이 그렇게 결론 내렸다.
“역시 스토커 아냐?”
둘을 잠자코 지켜보던 지훈이 그렇게 중얼댔다. 에잇이 더없이 싸늘한 눈빛으로 지훈을 쳐다봤다.
“아니라니까.”
“알겠어. 그만 놀릴게.”
지훈이 웃었다. 에잇도 웃고 말았다. 곧이어 영수증을 들고 소년이 다시 테이블로 왔다가 금세 사라졌다. 종이에는 Server: Vernon, 이라는 문장이 선명히 적혀 있었다. 에잇의 웃고 있던 입꼬리가 살짝 내려갔다. 지훈은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지만, 그만 놀리기로 했으니까. 사연이 있겠거니 생각하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중요한 건 에잇이 진짜 스토커냐 아니냐가 아니었다. 오늘도 들어야 할 얘기가 있었다.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할까? 에잇은 20세기보다 19세기에 더 빠삭했었지. 그럼 역시 근대부터 시작해야 좋을까? 저 울적한 얼굴을 보니 환기를 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지훈이 입을 떼려던 때였다. 에잇이 혼잣말처럼 나직이 말했다.
“지훈은, 전생 같은 거 믿어?”
“전생? 뭐, 환생이나 윤회 말이야?”
“응.”
지훈이 대답 대신 음, 소리를 내며 식전 빵으로 나온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환생? 개인적으로는 믿지 않았지만 그 개념이 주는 희망은 좋아하는 편이었다. 어쩐지 낭만이 느껴지기도 하고. 지훈은 빵을 우물거리다가 답했다.
“믿는 듯도 아닌 듯도.”
“안 믿는다는 말이네.”
“그렇게는 말 안 했는데.”
“네가 그렇게 말할 때는 아닐 때가 많았어.”
“그런가.”
“그렇지.”
에잇도 식전 빵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버터를 발라 먹는 에잇의 몸짓이 유난히 우아하다는 생각을 했다. 첫 만남 때도 느꼈지만 에잇은 어쩐지 만화나 소설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사람이었다. 별것 하지 않아도 고상하고 세련된 움직임과 조곤조곤한 말씨, 가끔 튀어나오는, 이제는 사어가 되어버린 단어라던지. 제법 생생한 역사 이야기라던가. 그리고 저 새카만 머리칼과 대조되는 새파란 눈까지. 빵을 대충 씹다가 지훈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저 소년과는 전생의 인연이다?”
“아직도 그게 궁금해?”
“아무래도. 넌 타인에 대해서 그렇게 궁금해하지 않으니까.”
에잇의 동작이 우뚝 멈췄다. 지훈은 자신을 쳐다보는 얼굴의 기색을 살폈다. 화난 얼굴은 아니었다, 아마도. 그럼 실례되는 발언? 그것도 아닐 텐데. 그런 말이었더라면 에잇은 진즉 관두라고 말했을 거였다. 지훈이 물을 괜히 홀짝였다. 저런 반응이면 진짜 같잖아.
“뭐어. 거기다 아는 사이라고도 했잖아.”
지훈은 어쩐지 변명 같은 말을 허공에다 뱉었다. 에잇이 옅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귀신 같은 타이밍에 음식이 나왔다. 아까의 소년이 그릇들을 들고 다가왔다. 식사를 내려놓았다. 에잇은 고맙다고 인사하고는 다시 그 소년을 보지 않았다. 그래서 지훈이 소년을 관찰했다. 그릇을 내려놓는 얼굴엔 긴장감이 역력했다. 일순 에잇의 존재 때문인가 했는데, 그게 아니라 아무래도 지훈이 시킨 음식의 양 때문인 것 같았다. 분명 엎지를까 봐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어쩐지 미안해진 지훈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얼핏 지훈과 그의 눈이 마주쳤다. 아하하. 어색한 웃음소리가 흘러가고 소년이 맛있게 먹으라며 인사하고 자리를 떠났다.
“귀엽네.”
지훈이 적막 속에서 그런 말을 꺼낼 때 에잇은 조용히 핏물이 나오는 스테이크를 썰고 있었다. 전혀 익히지 않은 것 같은 꼴의 음식인 건 차치하고서라도 식기를 사용하고 있는데 저렇게 아무런 소리도 안 나는 게 신기했다. 왜인지 자신도 거기 맞춰야만 할 것 같아서, 지훈은 최대한 조심히 스테이크를 잘랐다. 그래도 소리가 나는 걸 피할 수는 없었다. 진짜 어떻게 하는 거래? 곁눈질로 에잇의 동작을 살폈다. 에잇은 먹기 좋게 잘린 스테이크를 입으로 가져가며 무심히 말했다.
“전생의 인연 맞아.”
지훈도 스테이크 한 조각을 입에 넣으려던 찰나였다. 입을 열고 어정쩡하게 에잇을 보다가, 포크를 내려놓고 대꾸했다.
“정말이야?”
“어떨 것 같아?”
“거짓말 같은데.”
“내가 거짓말 한 적 있던가.”
지훈이 고개를 기울였다. 뭐, 아직 없긴 했다. 에잇이 말해 주는 이야기는 실제 사료로 남아있던 경우가 많았다. 에잇과 ‘친구’가 되려고 마음 먹은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그가 드물게 젠체하지 않는 사람이어서였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지식이 많으면 그 풍요로움을 뽐내느라 바빴고 지훈은 그런 사람은 딱 질색이었기 때문에. 아까 먹으려다 만 스테이크를 입에 쏙 넣었다. 뭘 먹으면서 말하는 것을, 에잇이 싫어하는 걸 알았지만 지훈은 음식을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그래 뭐. 믿을게.”
에잇이 웃음을 흘렸다. 그걸로 그 이야기는 끝이었다. 지훈과 에잇은 일상대로의 대화를 해 나갔고, 즐거운 저녁 시간이 흘러갔다. 계산은 에잇이 하는 걸로 했고 에잇과 그 서버 소년은 다시 마주해야 했다. 지훈은 뒤에서 그 둘을 흥미롭게 쳐다봤다. 전생에 아는 사이였다면 둘은 대체 어떤 사이였을까? 그런 의문을 가지고서.
지훈의 기대와는 달리 평범한 대화가 오갔다. 전체 얼마, 얼마 받았습니다, 잔돈 여기요. 식사 괜찮으셨나요? 매뉴얼대로인 듯한 말을 뱉는 소년의 모습은 여전히 어색해 보였지만, 에잇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네, 맛있었네요. 흐릿한 웃음과 함께 에잇이 짧게 묵례했다. 별거 없었네. 어쩐지 실망한 것 같은 지훈의 말에 에잇은 웃으며 지훈을 툭 쳤다. 소년은 둘이 출입문을 미는 걸 보다가, 외쳤다.
“아, 저, 저기!”
에잇의 고개가 돌아갔다. 지훈은 속으로 드디어, 라고 생각했다. 눈치껏 먼저 나가 있겠다고 했다. 그럴 필요는 없는데? 에잇이 그런 말을 하든 말든 지훈은 빵긋 웃으며 나갔다. 그 뒷모습을 잠깐 어이없게 쳐다본 다음 다시 소년을, 그러니까, 버논을 바라봤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얼굴임에는 분명했다. 에잇이 실내로 몇 발자국 걸어 들어갔다. 버논이 뒷머리를 매만졌다.
“무슨 일….”
“아, 별 건 아닌데…….”
“계산이 잘못됐어요?”
“아니, 아니에요. 멀쩡했어요. 멀쩡? 아니, 계산 문제는 아니에요.”
버논이 손사래를 쳤다. 재빠르게 휙휙휙 손을 내젓던 그는 에잇과 시선을 마주하지 않고 머쓱하게 말했다.
“그, 다음에도… 또 와주세요.”
어쩌면 매뉴얼대로의 대사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에잇은 그 말에 눈썹을 들어 올렸다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럴게요.”
조금 어색하긴 해도, 버논이 마주 웃었다. 그 웃음을 보고 나서야, 에잇은 문을 열고 나갈 수 있었다.
에잇은 조금 전 버논과 나눈 대화가 자신에게 기분 좋은,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일이 있어 이만 가 봐야 한다는 지훈을 배웅하고 혼자가 되자마자 에잇은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가 않았다. 황량한 공간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마주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혼자가 되고 싶지 않은 걸지도. 도시의 소란 속에 묻혀 없는 사람으로 존재하고 싶었다. 길가에 한동안 멀거니 서 있던 에잇은, 공원으로 향했다. 느리게 걷는 탓에 인파가 에잇을 밀치듯 지나갔다. 이대로 떠밀릴 수 있다면 어디까지든지 떠밀리고 싶었다. 에잇은 발끝의 힘을 살짝 풀었다. 뒤에서 누군가가 에잇을 가볍게 툭, 치고서 지나갔다. 비틀, 하고 발이 한 번 꼬였다. 그 순간 토기가 올라왔다. 난기류 속 비행기의 울렁거림 같은 것이 에잇을 덮쳤다. 눈을 굴렸다.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화장실로 찾아가 방금 먹은 것들을 토해 냈다. 생리적인 눈물이 눈 끝에 맺혔다. 거기 다른 감정이 섞였을 리는 없다고 되뇌었다. 그래. 당연히.
다시 인도로 나섰을 때는 온전한 밤이었다. 봄 특유의 미적지근한 밤공기가 에잇을 감쌌다. 그 온도에 다시 한번 속이 울렁였지만 이번은 구역질이 아니었다. 단순히 시간이 흐른다는 걸 체감해서 느껴지는 현기증이었다. 멈추지 않고 끝없이 흘러간다는 건, 에잇을 항상 울렁이게 만들었다. 에잇이 표류하는 세상이 느릿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에잇은 발길에 힘을 빼고 싶은 욕망을 참아야 했다. 일단 공원에 도착하고 싶었다. 그 벤치에 몸을 앉히면 진정되겠지. 앉아서는 세상의 흔들림에 익숙해지면 되는 일이었다. 준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방금 전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마주친 버논과의 대화와 그 얼굴을 곱씹고, 언젠가의 저녁에 다시 마주할 지훈의 얼굴을 생각하면 된다. 변화는 빠르고 에잇의 발걸음은 느렸지만 에잇은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그래, 죽지 않았으니까.
상념을 멈추었다. 어느새 공원이었다. 고개를 드니 머리 위에는 가로등이 환했다. 눈부심을 참고서 계속해서 그 빛을 노려봤다.
고개를 숙이고 눈을 꾹 감았다. 이번에도 눈물이 나왔다. 이것도 생리적인 눈물이다. 에잇은 알았다.
자리 잡고 앉은 벤치는 분수 근처였다. 한밤중이 아니라 관광지인 이 공원을 오가는 사람들은 아직도 많았다. 그 소음 사이로 물소리가 잔잔히 울렸다. 에잇이 가만히 눈을 감고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물소리에 맞추어 오랫동안 숨을 골랐다. 울렁거림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눈을 뜨고 잠깐 눈앞의 사람들을 관찰했다. 바쁘게 움직이며 공원의 사진을 찍고, 자기들끼리 즐겁게 떠드는 사람들. 세상의 흐름과는 동떨어진 듯 보이는 그들이 부러웠다. 그들이 만드는 소음과 행동, 그 모습들을 오랜만에 눈에 담았다. 그 사람들의 심장 소리를 포함한 모든 게, 에잇의 곁으로 흘러갔다. 미지근한 바람이 에잇의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준은 항상 달렸다. 달리고 싶을 때도, 그렇지 않을 때도 준은 달렸다. 언제나.
달리는 일은 준의 숙명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에잇에게서 벗어났던 일을, 그 달음박질을 설명할 수 없었다. 다행스러운 점은 준의 달리기 속도가 세상과 같았다는 점이었다. 준은 흐름과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파도는 항상 준을 밀어내 버리려 했지만 밀리지 않았다. 준은 심지 있게 버텼다. 그 심지가 되어 준 것은 에잇과 함께했던 짧은 기억들이었다. 그게 없었더라면 준은 그저 달리기만 했을 것이다. 물을 가로지르겠다는 억지스러운 각오로, 허공에다가 발을 휘젓다가 이내 급류에 휩쓸려 사라졌으리라. 뭐 결과적으로 급류에 휩쓸린 게 맞긴 했다. 준은 몇 달 더 길을 헤매다가 대양을 건너는 배에 올랐으니까. 좁은 곳에 갇혀 망망대해 위를 건넜던 그 2주라는 시간은 준에게는 여러모로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고, 하고 싶지도 않은 경험이었다.
그렇대도 준은 인간들이 불러일으키는 파란이 즐거웠다. 가장 즐거웠던 건 처음 영화라는 걸 봤을 때였다. 알고 보니 생긴 지는 꽤 된 것이었지만 그런 역사 같은 건 준의 알 바가 아니었다. 그 존재를 알고 나서는 책을 읽는 걸 관두었다. 아예 관둔 건 아니었고 독서 횟수가 평범해졌다고 할까. 준은 허구한 날 영화관으로 갔다. 영화관 직원이 준을 알아보기 시작하면 다른 영화관으로 옮겨갔다. 항상 영화관 로비 한편에 존재하는 유리 상자 속 팝콘을 먹어보고 싶었지만 냄새를 맡는 걸로만 만족했다. 인간의 음식을 딱히 먹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인간이 무얼 먹고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스크린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생생한 사랑 이야기도, 말도 안 되는 활극도, 슬픈 참극과 무서운 악령 이야기도 전부 즐거웠다. 그러다가 정말로 말도 안 되는 뱀파이어 사랑 이야기가 담긴 영화를 봤을 때는 실소를 감추지 못했다. 그 속에 담긴 일부가 진짜였던 점만 빼면 황당한 영화였다. 그렇지만 준은 그 시리즈를 전부 봤다. 그냥. 한번 시작했으니 끝을 봐야 할 것 같아서. 다 보고도 황당했던 건 여전했는데 준은, 어쩐지 에잇이 그리워졌다. 거기 에잇 같은 인물은 하나도 없었는데도. 그와 함께 이 영화를 보면 어떨까, 같은 생각을 했다. 아마 별로 좋아하지 않겠지. 그날, 준은 에잇의 싫어하는 얼굴을 상상하며 영화관을 나섰다.
하지만 모든 변화가 달갑지는 않았다. 준이 지내는 지역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인간들이 숲을 마구잡이로 개간하기 시작했을 때 준은 불만스러웠으며, 더 이상 야생 동물의 서식지를 망가뜨리지 말라는 시위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인간들의 발전은 멈추지 않았다. 남은 것은 예의상의 보호 구역들뿐이었다. 그 발전 덕분에 준은 편리했지만 어쩐지 야생 동물의 개체 수가 줄어든다는 소식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게 에잇의 존재 때문이라는 건 나중에야 깨달았다. 그는 어떻게 흡혈을 해결하고 있을까. 그는 여전히, 사람의 피를 먹지 않을까. 정말로 여전할까. 아주 오래전 일이 되어버린 그날을, 빨간 눈의 에잇을 떠올렸다. 에잇과 빨간색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았다. 그냥, 준의 기준에서는 그랬다. 그날 에잇이 자신에게 보여주지 않은 광경을 다시 상상했다. 이미 몇십 번이고 상상해 본 광경이었다. 마을 사람 모두가 진흙 속에 얼굴을 파묻고 여기저기서 피를 흘리는 모습. 이젠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뜯긴 팔과 다리가 여기 하나, 저기 둘 놓인 광경. 목에서 피가 끓고 물린 곳으로 새어 나오는 꼴. 그리고 그 사이에서 자신의 피가 아닌, 남의 피를 뚝뚝 흘리고 서 있는 에잇의 모습. 하나도 즐겁지 않았을 그 얼굴을, 준은 자주 곱씹었다.
어디까지나 준이 놓치지 않은 건 변화뿐이었다. 준은 어영부영 살았다. 옷도 돈도 책도 신발도, 아무것도 챙겨 나오지 못한 준은 혈혈단신이라는 게 무엇인지 뼈저리게 체험할 수 있었다. 준이 격랑 속에서도 지금까지 살 수 있었던 건 입에 풀칠만 하고 살면 되는 거 아닌가, 이런 낙천적인 생각 덕분일 수도 있었다. 한동안은 그날 벌어 그날을 버티는 식이었다. 일하다 마주치는 사람들은 금발에 빨간 눈을 한 준을 대충 펑크족 같은 걸로 여겼고 준은 이 눈이 컬러 렌즈가 맞다고 둘러댔다. 버는 돈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애초에 식비가 들지 않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언제나 으슥한 길을 가는 사람들을 무전취식하고 다니며 조금씩 모은 돈으로 단칸방을 얻었다. 그전까지는 아무 건물의 옥상, 혹은 빈 집에 몰래몰래 숨어드는 식으로 낮의 해를 피했다. 그 단칸방은 쥐 같은 생활 방식에 이골이 날 때쯤 생긴 자신만의 공간이었다. 비록 진짜로 쥐가 나오고 바퀴벌레도 나오는 곳이었지만(보이면 비명을 지르며 나갔다가 돌아왔다) 여긴 그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는 공간이었다. 오롯한, 자신만의 공간.
의식주 중 주를 해결했다고 해서 준은 씀씀이를 키우거나 다른 목표를 세우지는 않았다. 그냥 이대로 살고 싶었다. 읽고 싶은 책을 사고 보고 싶은 영화를 보고, 그러다가 조금 욕심이 나면 여러 옷도 사 봤다. 그러다가 깨달은 건 책을 소장하는 게 부동산의 문제라는 점이었다. 더는 책을 끼울 공간이 남지 않은, 벽에도 겨우 끼워 넣은 책장에 책을 꾸역꾸역 꽂다 말고 한숨을 쉬었다. 에잇이 왜 그렇게 넓은 집을 고집했는지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런 불편함 말고는 큰 불만 없는 나날이 이어졌다. 자유로웠고, 외로웠다.
준의 눈은 여전히 빨간색이었다.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 세상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늦게까지 열려 있는 가게란 뻔했다. 밤새 시간을 죽일만한 장소도 뻔하다는 뜻이었다. 패스트푸드를 파는 식당이나 바, 술집, 편의점, 그리고 장사가 더럽게 안 되는 레코드 가게. 심야까지 문을 연 그 동네 레코드 가게가 특이했던 건지도 몰랐다. 준이 여느 때처럼 영화관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항상 무심하게 지나치던 그곳을 들어가 보기로 마음먹은 건 순전히 방금 보고 나온 영화의 OST가 좋아서였다. 운이 좋으면 CD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CD 플레이어는 아직 갖고 있지 않았지만. 사면 될 일이니까. 얼마나 할 지가 유일한 걱정거리였다.
레코드 가게면서 음악 하나 흘러나오지 않는 가게 안으로 발을 내딛자 카운터에 앉아있던 사람이 고개를 살짝 들어서 준을 흘끗 봤다. 주인인지 직원인지 모를 그 사람은 어서 오라는 인사도 없이 다시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을 만졌다. 여기 앉아있는 것조차 귀찮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저러면 훔쳐 가도 모르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CD가 가득한 진열장을 향해 고개를 딱 돌렸을 때였다. 안 보고 있는 거 아님. CCTV 작동 중. 아. 진열장 중턱에 떡하니 걸린 경고문에 준이 혼자서 웃었다. 훔칠 생각은 안 하는 게 좋겠구나. 여전히 미소 지은 얼굴로, 가득한 CD들을 향해 다가섰다. 오래된 먼지 냄새가 났다. 어쩐지 익숙한 듯도 한. 준의 집에서도 이런 냄새가 나긴 했지만 그보다 좀 더 향수를 자극하는 냄새였다. 그래, 따지자면 에잇의 집에서 나던 냄새가 가장 비슷할 거였다. 준은 에잇이 죽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종종 잘살고 있는지가 궁금해지는 때가 있었다. 그게 지금이었다. 살아있다면, 지금쯤 에잇의 취미는 무엇일까. 무슨 음악을 들을까. 그때처럼 파티를 열까? 그때는 왜 파티를 열었을까.
대충 눈으로만 CD들의 이름을 훑고 있을 때였다. 읽고 있긴 했지만 머릿속에 들어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준이 머리를 살짝 흔들었다. 며칠 전에 봤던 영화에서 그런 장면이 있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누군가를 다시 마주하고 서로에게 실망하는 장면이. 어쩌면 자신도 그렇게 될지도 모르니까 에잇의 생각은 의식해서 멈추어야 했다. 준은 언젠가 에잇을 만나고 싶었지만, 동시에 만나고 싶지 않았다. 무엇에 실망할까 두려워 그런 건지는 본인도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의 눈 색을 다시 보는 게 두려워서일까? 그 색이, 바뀌었을지도 모르니까? 마주하는 순간 그가 나의 추억 속 그가 아니게 될지도 모르니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직도 이런 걱정을 하는 자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 감정이 애정인 게 맞을까?
“어?”
몇 세기 동안 유지되는 애정도 있단 말이야? 내가 그런 걸, 그런 무거운 일을, 하고 있다고?
“저기요.”
말도 안 되지 않아? 그런 건 진짜 영화 같은 이야기잖아.
“거기, 영화 같은 사랑 생각하시는 분?”
“으에?”
얼빠진 소리를 내며 뒤를 돌아본 준은 반가운 얼굴을 마주했다.
“어.”
“역시 맞네. 안녕?”
머리가 조금 길어지긴 했지만 분명했다. 찰스였다. 어어, 준이 삿대질했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카운터의 사람이 다시 이쪽을 흘긋거렸다. 찰스가 입술 위에 검지를 대고 쉬-잇, 소리를 냈다. 준이 입을 연 채 멈춰 버렸다. 다시 못 볼 거라도 생각했던 건 찰스도 조슈아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러고 보니 조슈아는? 준이 찰스의 뒤를 보려고 기웃거렸다.
“걔는 없어, 나 혼자야.”
“왜 없, 으응?”
“헤어졌냐고? 그건 아니고.”
“응?”
“아, 너 이 자식. 생각 조심해.”
찰스가 농담조로 말하며 픽 웃었다. 준이 입을 약간 비죽였다. 아직도 안 헤어진 게 의외라는 생각은 반은 진담이었는데. 특별한 이유는 없이 반사적으로 나온 생각이었다. 왜 둘이 잘 못 지낼 줄 알았던 걸까? 판단의 근거를 되짚으려는데 찰스가 어느새 준의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러는 넌… 아.”
찰스가 준더러 고개를 살짝 들어보라고 했다. 준은 오랜만에 찰스와 눈을 마주했다. 그의 눈은 여전한 붉은색이었다. 준은 그 사실에 어쩐지 안도했다.
“그랬구나.”
“뭐가요?”
“네 눈. 그리고 에잇.”
“아.”
준이 제 눈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내리 깐 눈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찰스는 그 모습을 흘금 보고는 진열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뭘 찾는 듯 이리저리 고개를 열심히 돌리면서 말했다.
“어땠어?”
“…그거요?”
“엉.”
“뭐… 맛있던데요. 충격적으로.”
불퉁한 목소리로 한 대답에 쿡, 웃는 소리가 났다. 준이 왜 웃냐며 작게 타박했다.
“맛있던데요. 아하하, 웃기다.”
타박하든지 말든지. 찰스는 진열장을 살피는 걸 관두면서까지 준의 말투를 따라 하며 웃었다. 준이 카운터를 곁눈질했다. 그 사람은 여기에 아예 관심을 끈 듯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려는데, 그 사람의 손이 갑자기 움직였다. 리모컨을 들더니 무언가를 틀었다. 그제야 매장에는 음악이 흘렀다. 가게의 스피커에서 나오는 건 소란스러운 스윙 재즈였다. 그 소리에 더더욱 머쓱해진 준이 자기 머리를 부여잡았다.
“좀, 그만 웃어요.”
“어떻게 안 웃어. 준은 여전하구나. 안심이야.”
마지막 말에 준이 휙 고개를 돌렸다. 찰스는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제가 여전해요?”
“응, 여전하지.”
찰스가 진열장에서 CD 한 장을 쑥 빼냈다. 손에 든 걸 요리조리 훑어보는 찰스에게 준이 중얼거렸다.
“눈이 이런 데도요.”
“색 같은 건 아무 상관 없지-”
찰스가 말끝을 늘리며 카운터로 걸어갔다. 준이 허겁지겁 따라갔다.
“어떻게 상관이 없어요? 전 여전하지 않다니까요.”
“그래? 그것도 안심이네. 얼마예요?”
카운터의 사람이 핸드폰을 내려놓고 귀찮다는 얼굴로 찰스가 내민 CD를 뒤집어 봤다.
“할인해서 10달러에요.”
“오, 괜찮은데? 잠깐만요.”
찰스가 외투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꼬깃꼬깃 접힌 지폐들이 튀어나왔다. 거기서 10달러를 추린 찰스가 5달러 두 장을 내밀었다. 그 뒤에서 끼어들지 못한 준이 발을 동동 굴렀다. 카운터의 그 사람이 슬쩍 뒤를 봤다가 다시 찰스를 봤다. 둘 다 눈이 빨개서였을까.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심드렁한 얼굴에 잠깐 의문이 서렸다. 그래도 그 기색은 금방 사라져 버렸다. 계산이 끝나자마자 그는 다시 핸드폰을 만졌고, 찰스도 대충 고맙다고 인사하며 CD를 집어 들고 가게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준이 또 허둥지둥 그 뒤를 쫓았다. 찰스는 뚜벅뚜벅 거침없이 걸어갔다.
“뭐, 뭐가 안심이냐니까요.”
따라오면서 애타게 묻는 준의 말에 찰스가 휙 뒤돌았다. 그리고는 방금 산 CD를 삿대질하듯 준의 코앞에 내밀었다. 그 플라스틱 모서리를 빤히 보다가, 준이 이해 안 된다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찰스가 팔을 축 늘어뜨렸다.
“네가 지금 이러는 게 안심이야. 변했다고 하지만,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말장난하지 말고요.”
“그래, 알겠어. 네가 너답다고. 비록 눈 색은 바뀐 데다 내 생각과는 달리 네 곁에 에잇은 없지만, 여전히 네가 너다워서 다행이야. 됐지?”
찰스는 산뜻하게 말을 끝내고는 휙 뒤돌아섰다. 그러고는 뚜벅뚜벅 걸어가는 찰스의 뒤통수에 대고 외쳤다.
“끄, 끝이에요?”
응-. 찰스는 뒤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준은 또 그 뒤를 따라가려다가 그 자리에 가만히 있기로 했다. 대신 크게 외쳤다.
“고마워요! 조슈아한테 안부 전해 줘요!”
그 말을 듣고는 찰스가 걸음을 딱 멈췄다. 준이 의아하게 생각하는데, 찰스가 뒤돌았다.
“맞아. 나, 내 이름 기억해 냈어. 윤정한. 발음하기 어렵겠지만 그냥 알아둬-”
윤… 뭐? 찰스가 가던 길을 마저 가면서 허공에다 손을 흔들었고, 준은 그래봤자 찰스가 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뒷모습에다 대고 멍하니 손을 흔들었다. 아니, 찰스가 아니지. 윤, 뭐? 그가 말해 준 이름을 들렸던 발음대로 몇 번 말해봤다. 자기 입에 붙지는 않았지만 찰스보다는 그에게 어울리는, 그다운 이름 같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네가 너다워서 다행이야. 그가 한 말을 곱씹으면서.
그로부터 며칠 후, 준은 또 뛰고 있었다. 지하철을 놓친 탓에 어쩔 수 없었다. 사람들 눈에 보이는 길을 써야 하니 마음껏 달릴 수도 없었다. 느리게 뛰는 건 제 속도로 뛰는 것보다 훨씬 힘들고 지치는 일이었다. 차라리 인도가 아니라 건물들 옥상을 내달릴 걸. 뒤늦은 후회를 했지만 소용 없었다. 영화 상영 시간에 늦을 것 같았다. 아니, 늦을 게 확실했다. 속이 터져라 느리게 내달리면서 준은 짜증을 삼켰다. 오늘따라 길에 사람은 또 왜 이렇게 많으냔 말이야. 아까 전 실수로 감기에 걸린 사람을 흡혈한 터라 짜증이 더했다. 입에서는 자꾸만 감기약이 섞인 쓴 맛이 감돌았다. 영화관에 도착하면 음수대로 입이나 싹싹 헹궈야지. 아니, 음수대가 있긴 했던가. 그 맛없는 콜라를 다시 사야 하나? 어차피 마시지도 못하는 거. 돈 아까운데. 아, 이젠 정말로 그만 뛰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느라 준은 코너에서 돌아 나오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어깨와 어깨가 부딪히는 건 순간이었다. 어깨의 충격을 느끼고도 몇 발자국 더 뛰어간 준은 팔다리를 볼썽사납게 휘적이고서야 뜀박질을 멈출 수 있었다. 아프다, 라는 생각에 앞서 뒤돌아 섰다. 이 정도로 세게 부딪혔으니 당연히 사과를 해야 했다. 다행히 부딪힌 사람도 어깨를 부여잡고 서 있을, 줄 알았는데. 서 있는 게 아니고 넘어져 있었다. 큰일 났다, 크게 다친 건 아니겠지. 자기 몸이 가진 강도를 생각 못하고 열심히 달린 게 죄라면 죄였다. 준이 잔뜩 긴장한 채 넘어진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아, 그, 정말 죄송해요. 차마 못 봤어요. 괜찮으세요?”
준이 그 사람의 상태를 확인하려고 쪼그려 앉았다. 그 사람이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 너머로 익숙한, 아주 새파란 눈이 보였다. 눈과 눈이 마주친 순간. 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커질 대로 커진 빨간 눈과 파란 눈이 오랫동안 서로를 바라봤다.
에잇이었다. 귀에 링 귀걸이가 자리 잡은 것만 빼면, 예전과 같은 얼굴이 거기 있었다.
준이었다. 귀에 걸린 작은 귀걸이와 여전히 붉은 눈을 빼면, 예전과 같은 얼굴이 거기 있었다.
둘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 마주 앉아서 서로의 얼굴에 구멍이 꼭 생기길 바라는 것처럼, 그 얼굴을 뚫어져라 봤다. 서로의 앞에는 맹물이 담긴 컵이 덩그러니 있었다. 컵 표면에 맺힌 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길에서 눈이 마주친 뒤, 서로 아무 말도 못 하는 사이 신기하게도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어떻게 하자는 말도 나누지 않고서 둘은 근처의 다이너로 뛰어들었다. 입구에 들어가기 직전 차양 아래에서도 둘은 서로를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쳐다보기만 했고,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간 준이 창가에 자리 잡고 앉을 때도, 에잇이 뒤따라 마주 앉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입을 다물고 놀란 고양이 같은 눈을 하고서 서로를 쳐다봤다. 여태까지.
수상할 정도로 조용한 이 테이블에 서버가 다가왔다. 이제 주문하겠느냐고 물어보는데, 에잇이 좀 있다가 하겠다고 했다. 붐비지 않아서인지 서버는 천천히 하라며 물러났다. 그걸 가만 보고 있던 준이 갑자기 물컵을 들고 물을 확 들이켰다. 그대로 마시는 줄 알고 에잇이 흠칫했다. 예상과는 달리 준은 입을 헹구기만 하고 컵에 도로 물을 뱉었다. 그러면서 에잇에게 미안하다는 듯 눈인사를 했다. 에잇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아니, 그. 음… 아까 감기 걸린 사람을 좀.”
부끄러운 듯 말하는 준의 목소리는 여전했다. 거기다 달라진 것 없는, 쑥스러운 몸짓. 이곳에 온 지는 꽤 오래됐는지 옛날 같은 억양은 아니었어도 말투는 엇비슷했다. 감기 걸린 사람이라. 약 때문일까. 입이 쓰겠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에잇은 고개를 위아래로 작게 움직였다. 그 어색한 끄덕임을 서서히 멈춘 뒤, 에잇이 말했다.
“오랜… 만이야.”
에잇의 목소리도 여전했다. 방금 지은, 그 희미하고 옅은 미소도. 고개를 움직여 비 내리는 창밖을 보는 그 옆모습도, 여전했다. 오랜만이라는 인사를 해 놓고도 에잇은 준의 눈을 피했다. 그가 자신의 얼굴을 피하는 건 역시 이 빨간 눈 때문일까. 준은 그런 생각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고는 다시 침묵이었다. 다이너 안의 소음과 바깥의 빗소리가 섞였다. 서버가 다시금 다가왔다. 에잇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커피 한 잔을 시켰다. 준에게 뭘 먹겠느냐고 물었다. 준은 메뉴판을 한참 동안 보다가, 레몬 머랭 파이를 가리켰다. 다시 에잇과 준만 남게 되었다. 에잇은 턱을 괴고 창밖을 봤고 준도 똑같이 턱을 괴고서는 다이너 안쪽을 봤다.
“먹을 수 있어?”
“아니, 그냥 시켰죠. 맛이나 보려고.”
에잇에게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준은 그 웃는 옆모습을 훔쳐보다가, 따라 웃었다.
“피어싱, 어울려요.”
“응. 고마워.”
잠깐의 정적. 그러다 에잇이 턱을 괸 손을 내리고서 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움직임을 눈치챈 준도 에잇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에잇과 준이 또 조용히 서로를 바라봤다. 에잇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준.”
“네?”
“잠깐, 손 좀 줄래?”
뜬금없는 소리에 준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에잇이 더없이 진지하게 자기 손을 내밀고 있는 걸로 봐서는 농담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준은 순순히 에잇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에잇은 잠깐 가만히 있더니, 준의 손을 살짝씩 쥐었다가 풀었다가 했다. 눈을 내리뜨고 손을 바라보는 에잇의 얼굴은 어딘지 슬퍼 보여서, 준은 왜 그러냐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몇 번을 더 그러고 난 뒤 에잇은 반대편 손으로 아예 준의 손등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준은 간지럽기도 하고, 왜인지 낯간지러워서 손을 빼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이 손길을 아주 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손가락을 조금만 꼼질거렸다. 에잇에게서 희미하게 웃는 소리가 났다. 슬며시, 에잇의 손이 준의 손을 놓아주었다. 준이 얼떨떨하게 손을 가져왔고 에잇은 자기의 텅 빈 손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꿈이 아니구나.”
꿈이 아닐 줄은 알았다. 여긴 지금 과거, 에잇과 준이 함께 살던 집이 아니었으며 준이 자신에게 위선자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비도 내리고 에잇을 바닥으로 완전히 가라앉힐 듯한 공기의 무거움도 없는 데다가 폐가 조이는 느낌도 없었다. 그러니까 꿈이 아니긴 했는데. 그 붉은 눈 탓에 자꾸만 의심이 들었다. 그래서 손을 달라고 했다. 만져졌다. 차가워도 그곳에 단단히 존재하고 있었다. 제 손에 얹어지기도 했다. 쓰다듬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에잇의 눈에서 눈물이 톡, 떨어졌다.
“어어.”
테이블의 건너편에서 준이 허둥거렸다. 정작 에잇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손으로 대충 눈가를 비볐다. 아, 눈물의 느낌도 너무 생생했다. 진짜구나. 정말로 진짜구나.
준은 허둥이는 손으로 휴지를 한 움큼 가져다 에잇에게 내밀었다. 에잇이 고개를 숙인 채 휴지를 받았다. 그러는 중에도 눈물은 투두둑, 자꾸만 떨어졌다. 때마침 서버가 파이와 커피를 들고 왔다. 쾌활하게 그릇을 내려놓으려다 말고 우는 에잇을 발견하고는 의아하게 준을 쳐다봤다. 준은 손사래를 치며 자기 때문이 아니라는 몸짓을 했다. 아니, 나 때문이 맞나? 준의 눈이 대각선 위로 향했다. 이거 나 때문인가? 그런 고민을 하기 시작한 준을 본 서버는 어깨를 한 번 들썩이고는 파이와 커피를 내려 두고 사라졌다. 어쩔 줄 모르는 준의 마음처럼 바깥에서 들리는 빗소리가 시끄러웠다.
에잇이 얼마간 조용히,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을 동안 준은 에잇의 눈치만을 살폈고 보다 못한 에잇이 눈가에 휴지를 댄 채로 ‘그냥 파이나 먹어.’라고 말하고서야 준은 포크를 집어 들었다. 레몬 향이 상큼했다.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눈빛의 준이 파이를 한입 와앙, 먹었다. 에잇도 붉어진 눈가를 대충 손으로 누르며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커피와 레몬 머랭 파이의 향은 향기로웠지만 맛은 꽝이었다. 에잇은 삼켰지만 준은 삼키지 못했다. 몇 번 우물거리더니 결국 뱉어냈고, 에잇은 그걸 보며 웃었다.
“맛없어?”
“아니… 맛있는데 못 삼키겠어요.”
준이 혀를 쭉 내밀었다. 그 모습에 에잇은 또 한 번 웃었다. 그런 에잇을 보고 준도 웃었다.
꿈이 아니구나. 둘은 서로를 보며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我们会相见忘记了想念
(I'll know) 我会守护着你
(I'll know) 永远不离不弃
에잇과 준은 서로의 공간을 보고 기겁했다.
어떻게 바퀴벌레가 나오는 곳에서 살아?
어떻게 이렇게 아무것도 없이 살아요?
(아, 레코드플레이어 부럽다. 이거 CD도 재생돼요?)
들어가자마자 한 첫마디가 이거였다. 그 말을 뱉고는 서로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지만 그래도 각자의 이유로 눈시울이 시큰거렸다. 에잇의 경우는 준이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의젓하고 사랑스러워서였고, 준의 경우는 그가 이렇게 (심하게 말해서) 폐인처럼 살았다는 사실이 슬퍼서였다. 둘은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 대신 열정을 쏟았다. 에잇은 준의 단칸방에서 바퀴벌레를 없애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고, 준은 에잇의 공간에 생활감을 불어넣으려 애썼다. 에잇은 바퀴벌레 약과 쥐덫을 여기저기 놓고 여차하면 손으로 잡기도 했는데(그럴 때마다 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대체 여기서 여태 어떻게 살았냐고 물었는데 준은 눈에 안 보이기만 하면 괜찮다고 대답해 에잇의 어이없는 얼굴을 봐야 했다) 준은 러그를 사 오거나 책장에 꼬마전구를 달아놓는 식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고생하는 건 자기 같았지만, 에잇은 개의치 않았다. 그깟 바퀴벌레. 천 마리도 잡아줄 수 있었다. 그리고 준의 호들갑도 천 번 보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준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부활절이라고 계란 모양 옷을 입고 있던 준을 봤을 땐 에잇은 제 눈을 먼저 의심했다. 현관에서 둥그렇고 커다래진 준을 마주하고 잠깐 모든 동작을 멈췄던 에잇은 도로 현관을 나갔다. 준이 미안하다고 다급하게 뛰어왔지만 이미 닫힌 현관문 너머에서 에잇은, 그거 벗기 전까지는 안 들어갈 거라고 했다. 이런 건 함부로 하지 말자는 교훈이 남은 날이었다.
준은 에잇이 에잇다워서 좋았다. 아니 그 이전에, 앞으로 절대로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어서 좋았다. 몇 세기가 지났는데도 여전한 파란 눈과 머리, 그 우아한 몸짓과 예스러운 말투. 모든 게 준의 기억 속 에잇과 똑같았다. 본인이니까 당연하겠지만, 감격스러운 건 변함 없었다. 가끔 믿기지 않아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에잇의 뺨을 만져 보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에잇은 가만히 있어 주었다. 얼마든 만지라는 것처럼. 그럼 준은 몇 분이고 에잇의 뺨에 손을 대고 있었다. 차갑고 부드러운 그 뺨을, 하염없이.
그리고 또 하나, 준이 에잇의 집에 놀러 왔을 때였다. 레코드플레이어에는 쳇 베이커의 레코드가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느긋한 연주와 나지막한 쳇 베이커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준은 에잇의 책장을 구경하다 익숙한 책을 하나 발견했다. 그 책이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책등이 유난히 낡아 있었다. 손끝으로 쓸어내리니 손때가 느껴졌다. 복잡미묘한 감정으로 그 책을 바라보다가 곁에 놓인 상자로 눈이 향했다. 아주 무방비한, 그냥 평범한 종이 상자였다. 곧장 열어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준은 겨우겨우 참을 수 있었다. 대신 소파에 앉아 책을 읽는 에잇에게 물었다.
“저기, 에잇.”
“응. ”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응.”
“이 상자. 뭐예요?”
에잇이 고개를 돌렸다. 준이 눈을 깜빡깜빡, 했다. 에잇은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준의 곁으로 다가와서 상자 뚜껑을 쑥 열었다. 절대 안 보여줄 줄 알고 물어본 거였는데. 의외의 일이 눈앞에서 벌어져서 준은 계속 눈을 깜빡였다. 상자 안을 슬쩍 봤다. 편지가 한가득이었다. 사실 한가득이라는 말로도 모자랄 양이었다. 책등이 유난히 낡아버린 서간체의 책, 그 옆 편지가 가득 담긴 상자. 어떤 가능성이 떠올랐다. 준이 슬그머니, 손가락으로 상자를 가리켰다.
“이거 혹시.”
“맞아.”
“진짜요?”
“…응.”
“…….”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고 자기 목덜미를 매만지는 에잇에게 준은 뭐라고 해 주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 정성스럽게 왁스로 봉인되기까지 한 편지 무더기가… 모두 준에게 쓴 편지라는 건데. 어쩐지 코가 시큰해졌다. 킁, 소리를 내며 괜히 팔짱을 꼈다.
“저기, 괜찮으면 말인데요.”
“응.”
“무슨 내용인지 물어봐도 돼요?”
“…….”
“음, 아니면, 읽어 봐도 돼요?”
“…….”
에잇은 대답이 없었다. 역시 봐도 될 리가 없나. 그쵸, 안 되겠죠. 준이 이렇게 중얼거리며 책장에서 멀어지려 할 때였다. 에잇이 불쑥 말했다.
“하나만, 읽어 줄게.”
앉아 봐. 에잇이 상자를 들고 소파에 다시 앉았다. 준도 얼떨결에 그 곁에 앉았다. 에잇이 편지 중 하나를 집어 들고 봉인을 뜯었다. 바삭거리는 종이를 꺼냈다. 준이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물 같은 게 닿아서 종이 표면이 우그러져 있었다. 단순히 오래되어서 생긴 건 아닌 모양새. 준은 잠깐 시선을 어디에다 둘지 고민하다가 허공을 보기로 했다. 물기 어렸던 종이를 보나 허공을 보며 내용을 들으나, 어차피 결과는 똑같을 것 같았다. 준이 마음의 준비를 하는 사이 에잇이 편지를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3/2, 20XX.
준에게.
몇 주 전 그 소년을 봤어. 버논. 아무래도 같은 사람은 아니겠지, 당연히. 근데 아주 옛날의 그 얼굴 그대로였어. 무심한 듯 강단 있어 보이는 얼굴. 횡단보도에서 마주쳤지. 말을 걸고 싶었어. 걸지 못했지만. 시선을 눈치챈 그 아이가 나한테 먼저 할 말 있냐고 물었어. 사람을 착각했다고 둘러댔지. 그러고는 그대로 헤어졌어. 목소리도 여전하더라.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기로 했어.
그리고 만났어. 얼마 전, 내 하나뿐인 인간 친구와 저녁을 먹으러 간 곳에서. 확신은 없었고, 다른 사람일 게 뻔하니까 최대한 관심을 끄려고 했어. 하지만 영수증에 그 이름이 적혀 있었어. Vernon. 신기한 일이지. 운명이라는 건 질긴 걸지도 몰라. 나갈 때 버논이 자주 오라는 인사를 했어. 어쩌면 예의상 그런 말을 했을지도 몰라. 무례할 정도로 쳐다봤었으니까. 근데 그 얼굴이… 너무, 그때와 같은 얼굴이어서, 기분이. 나도 모르게.
식당에서 나오고 나서 혼자가 됐어. 그러니 네 생각이 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몰라. 집으로 돌아가기가 싫어서 공원을 배회했어. 오랜만에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니까 좋았어. 네가 그리워지고, 죽고 싶어졌지. 가로등 아래에서 이게 진짜 햇빛이었으면, 하고 바랐어. 당연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 정말 햇볕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그런다고 널 볼 수 있지도 않으니까. 그날은 그냥 그대로 돌아갔어. 아무도 없는 집으로.
네가 그리워.
한 번이라도 네 꿈을 꾸지 않은 날이 없어.
너도 내 꿈을 꿀까.
오늘은 편지를 쓰는 것도 하기 싫었어. 이러면 네 생각이 더 많이 나니까.
근데, 죽지 못하니까 편지를 써.
버논을 만났듯이 널 만나고 싶어. 네가 살아있을 것 같아. 볼 수 있을 것 같아. 막연히, 자꾸만 희망을 품게 돼. 그래서 죽지 못하는 것 같아.
겁쟁이지. 알아.
이만 줄일게. 우는 걸 그만두고 싶어.
안녕, 내 사랑.
바삭. 우그러진 종이가 에잇의 손에서 다시 접혔다. 봉투에 다시 편지를 넣고 상자를 옆으로 치울 때까지, 에잇의 표정은 덤덤했다. 준도 덤덤… 했으면 좋았을 텐데, 표정 관리가 안 됐다. 얼굴이 울상이었다. 에잇이 멋쩍게 헛기침을 했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에잇이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준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묻고 싶은 말도. 그러니까 버논이랑 얼굴이 똑같은 사람을 여기서 만났다고? 아니, 식당을 갔다고? 애당초, 인간 친구가 있다고? …죽고 싶었다고? 날 그리워했다고? 내 꿈을 꾼다고? 아니 그 무엇보다―
사랑. 에잇이 나더러 내 사랑이라고 했다.
준이 입술을 달싹이다가 멈췄다. 에잇은 곁눈질로 준을 살피고 있었다. 울기 시작하면 얼른 달래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에잇의 다짐과는 달리 준은 울지 않았다. 여전히 울 것 같은 얼굴이긴 했지만, 그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대신 그 눈으로 준은 에잇을 쳐다봤다. 에잇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붉은 눈의 준도 계속 보니까 나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준은 그대로였으니까. 이대로 제 곁에 있기만 하면 됐다. 다시는 떠나지 말았으면, 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에잇의 얼굴로 준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에잇은 가만히 있었다. 준이 다가오며 고개를 기울였다. 에잇이 준의 목덜미를 조심스레 잡았다. 둘은 처음으로 입을 맞췄다. 얼마 뒤 맞춘 입 사이로 혀가 오갔다.
끝까지 로맨틱하면 좋았을 텐데. 준의 입술이 살짝 떨어진 틈을 타 에잇이 먼저 웃음을 흘렸다. 준이 발끈했다.
“왜, 왜요. 왜 웃어요.”
“자꾸 부딪혀서.”
“저라고 부딪히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아니거든요?”
“응.”
“좀 못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준이 말을 끝내지 못했다. 이번엔 에잇이 먼저 입술을 맞췄다. 둘의 몸이 점점 한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소파에 준의 등이 완전히 닿을 때까지, 에잇의 손은 여전히 준의 뒷목을 받치고 있었다. 자기가 상상만 해 오던 일이 벌어져 준의 머리가 어찔했지만 그거랑은 별개로 분했다. 두 사람의 긴 송곳니에도 불구하고 키스에 능숙한 에잇에게 분했다. 그렇지만 그 생각도 오래가지 못했다. 준이 에잇을 안았다. 레코드에서 음악이 멈추었다. 몇 번 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다가, 이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잠시 뒤 에잇이 입을 살짝 떼고 이마를 맞댔다. 이제 날 두고 아무 데도 가지 마. 작게 속삭이는 말에 준이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태워요.”
“이거?”
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자를 옆구리에 낀 에잇이, 다시 물었다.
“여기서?”
준이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손에는 성냥이 들려 있었다. 대체 어디서 구해 온 건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라이터도 아니고 성냥이라니. 애초에 준의 집은 좁았다. 여기서 종이를 태우자는 말을 하다니 용감하다고밖엔 할 수 없었다. 그러다 불이라도 나면? 에잇의 염려스러운 얼굴에 준은 괜찮다고 했다.
“그러다 진짜 불 나면 더 좋고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살림 합치게. 아 빨리 상자 주세요.”
어쩐지 이걸 들고 자기 집에 오라고 하더라니. 에잇이 못마땅하다는 듯 입술을 일자로 만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준이 에잇의 손에서 상자를 빼앗듯 가져갔다. 순순히 뺏겨 주었다. 준은 상자를 들고 잠깐 고민하더니 화장실로 향했다. 진심일까? 에잇이 준을 뒤따라가며 물었다.
“화장실?”
준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냅다 바닥의 빈 곳에 상자를 두었다가, 도로 들고는 샤워 부스 안에다가 놓았다.
“진심이야?”
“아, 그만 물어요.”
준이 성냥을 좍, 그었다. 불이 솟았다. 매캐한 냄새가 이어서 났다.
“진짜 태울게요.”
“그래, 해라.”
“진짜로.”
“하라니까.”
준이 불붙은 성냥을 들고 후, 후, 심호흡했다. 에잇은 화장실 문에 기댄 채 그 모양을 잠자코 바라봤다. 저러다 불이 꺼지면 웃기겠다는 생각을 한 찰나 성냥불이 꺼져버렸다. 준의 등 뒤에서 코웃음 소리가 났다. 아, 진짜. 준이 다시 성냥을 그었다.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진짜로 상자 위에다가 성냥을 올렸다. 타다닥, 소리를 내며 종이가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준이 후다닥 샤워 부스에서 멀어져서 에잇의 곁에 섰다.
“이제 필요 없으니까.”
준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에잇이 슬쩍 준을 돌아봤다. 이제 더는 필요 없긴 했지. 이미 썼던 편지들은 과하게 우울했고, 이제는 준을 영영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준과 재회한 뒤로 편지를 안 쓴 지도 벌써 세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에잇이 준에게 손을 내밀었다. 준이 에잇의 손을 잡았다. 상자가 샤워 부스 안에서 활활 탔다.
너무 활활 탔다. 갑자기 시끄러운 경보음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귀를 찢을듯한 소리에 에잇의 눈도 준의 눈도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실내에서 물건이 불에 타고 있으니 어쩌면 당연하긴 했는데, 이 낡아빠지고 쥐와 바퀴벌레가 난무하는 건물에도 화재경보기가 있었구나. 준이 귀를 틀어막고서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 준의 정수리로 물이 똑, 떨어졌다. 응? 에잇도 물을 맞았는지 준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이 아, 하고 스프링클러의 존재를 인식한 순간, 천장에서 물이 미친 듯이 들이붓기 시작했다. 장대비처럼 내리는 물 사이로 둘은 서로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웃었다. 크게 소리 내서 웃었다. 이 상황이 너무 바보 같았다. 애매하게 물이 닿지 않은, 불붙은 편지 상자는 계속해서 탔다. 매캐한 재 냄새가 수돗물 냄새 사이를 비집고 났다.
“아, 내 책!”
웃다 말고 준이 소리쳤다. 어떡해! 비명 같은 말을 남기고 준이 철벅거리며 책장으로 뛰어갔다. 어기적거리는 그 뒷모습에 에잇은 계속 웃었다. 그리고는 샤워 부스 속 상자를 흘긋 봤다. 곧 있으면 알아서 전소될 것 같았다. 관심을 끄고 준에게로 갔다. 저 멀리서 소방차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집에서 뭘 태웠다고 하면 출동한 소방원들이 어이없다는 눈길로 쳐다볼 테지만 신경 쓰이지 않았다. 허둥지둥 책을 끌어안는 준을 따라, 에잇도 책을 닥치는 대로 옷 속에 집어넣었다. 어차피 젖은 건 똑같은데도. 둘은 계속해서 웃었다.
재 냄새가 나도 괜찮은 날이었다. 앞으로도 그럴 거였다.
𝑬𝑵𝑫.
- 카테고리
-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