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hes, and again

Ashes, and again 5


에잇은 말 그대로, 우당탕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머리는 형편없이 헝클어지고 숨도 거칠었다. 침대에 누워있던 준이 이상함을 느끼고 상체를 일으켰을 때는 이미 에잇이 준의 방문을 연 후였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한참을, 둘은 서로를 바라봤다.

“뭐… 무슨 일이에요?”

“지금 무슨 생각해?”

“…저요?”

준이 묻자마자 숨도 돌리지 않고 한달음에 나온 질문이었다. 갑자기 무슨 생각을 하냐니. 준이 눈을 끔벅댔다. 에잇은 다시 묻지 않고 문 사이에서 양손을 짚고 서 있었다. 서 있기만 했다. 이런저런 설명은 없었다. 그러니 대답해야 했다. 준은 차마 당신을 생각했다고는 할 수 없어서, 그냥 얼버무리기로 했다.

“아, 무것도….”

“진짜로?”

아무 말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도 에잇은 또 한 번 물었다.

“확실해?”

“……저 무서워요.”

“…미안.”

어쩐지 맥 빠지는 사과와 함께 에잇의 양팔이 벽을 따라 쭈욱, 힘없이 미끄러졌다. 여전히 준은 영문을 몰랐다. 분명 사흘이나 여기 묵겠다던 손님들은 어디 가고 에잇만 헐레벌떡 뛰어와서는 뚱딴지 같은 질문과 사과를 하는 걸까? 다른 사람의 행방을 물어보려던 차였다.

“저기요, 집주인.”

아래에서 말소리가 났다. 조슈아였다. 에잇은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뜨더니 자신이 열어젖힌 문고리를 잡았다.

“갑자기 미안해. 쉬어.”

그리고는 조용히 문이 닫혔다. 준은 닫힌 문을 보며 침대 위에 앉아 에잇의 질문을 곱씹었다. 밑에서 말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왔다. 그렇게 급하게 먼저 간 이유가 뭐야? 신경 꺼. 에잇은 조슈아에게 그렇게 답했다. 준도, 거기서 신경을 꺼야 할 것 같았다. 침대에 풀썩 누워 이불을 머리 끝까지 올렸다. 최대한 다른 것을 생각했다. 에잇이 아닌, 무엇이든지를.


조슈아와 찰스의 능력은 에잇, 준과는 달랐다. 둘은 생각을 읽을 줄 알았다. 어쩌면 기억 일부도. 에잇처럼 의식적으로 손이 닿았던 물건에 집중하지 않아도 그런 게 가능한 것 같았다. 이 사실도 둘과 함께한 첫날이 지나도록 모르는 준을 위해 찰스가 살짝 귀띔해 준 것이었다. 말이 좋아 귀띔이지 사실은,

있지, 내가 신기한 거 알려 줄까.

뭔데요?

준은 에잇을 좋아하지? 엄청?

……어떻게 알았어요? 그렇게 티 나요? 에잇한테 말하면 안 돼요. 절대요, 네?

…아니 티 난다기보다, 아는 방법이 있어.

뭐, 뭔데요.

난 생각을 읽거든.

…………안 믿어요.

그래? 그럼 어디 보자. 큼큼. 어떻게 에잇을 좋아하는 걸 아셨지 내 얼굴에서 티가 많이 나나? 어떻게 숨겨야 하지? 에잇만 보면 가슴이―

악! 믿을게요! 제발 그만! 들리겠어요!

같은, 바보 같은 대화를 통해서 알게 됐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찰스는 준이 듣고 싶어 하든 아니든 사흘 내내 준을 쫓아다니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조슈아는 가끔 참 이상한 사람이다, 자기는 귀찮음이 많은 사람이다, 에잇은 참 재미 없는 사람 같다, 그리고.

“준은 어떤 사람이야?”

찰스가 대뜸 이런 질문을 했을 때 준은 어벙하게 눈만 끔벅일 수밖에 없었다. 저요? 뜸 들이다 겨우 되물은 말에 찰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너.”

준은 한참이나 그의 빨간 눈을 쳐다봤다. 찰스는 참을성 있게 대답을 기다려줬지만, 그 시선을 먼저 피한 건 준이었다.

“모르겠어요.”

웅얼거림에 가까운 그 대답에도 찰스는 고개를 끄덕여 줬다. 그래, 그럴 수 있지, 라는 심심한 위로인지 이해인지 모를 말을 해 주면서.

집은 조슈아와 찰스가 있는 사흘 동안 조금 시끌벅적했다. 그러니까 에잇과 준, 둘만 있을 때보다는 시끄러웠다. 찰스는 에잇과 대화하다가도 툭하면 ‘있지, 그런 말 하면 준이 싫어해.’라고 했다. 그 옆에 준이 있든 없든 그랬다. 준이 있을 때면, 준은 화들짝 놀라며 그런 적 없다고 말했고 찰스는 있다고 했다. 에잇은 대충 어떤 맥락으로 둘이 그러는지 짐작할 수 있었지만 준이 놀라는 게 재밌어 잠자코 있었다. 아마 찰스도 이 두 사람의 생각을 읽으며 즐겼을 거였다.

특이하게도 조슈아는 그 소란에 끼지 않았다. 대놓고 찰스가 끼겠냐고 물어봐도 조슈아는 고개를 저었다. 준에게 그는 좀 더 많이 웃고 말수가 조금 더 많은 걸 빼면, 에잇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사람이었다.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훨씬 더 컸다. 저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이런 궁금증을 머릿속에 품은 채로 조슈아를 멍하니 보고 있으면 조슈아는 준을 돌아보며 슬며시 웃었다. 그러고는 비밀이라는 듯 자기 입술에 검지를 올렸다. 그러면 준도 어버버, 하다가 도망가듯 자리를 옮겼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발가벗겨지는 기분이었다. 에잇이 왜 그렇게까지 조슈아에게 박한지를 알 수 있었다. 생각을 읽는 뱀파이어라는 건 최악이었다.

최악이긴 해도 도움이 될 때도 있었다. 에잇은 사흘 내내 혼자서 사냥을 나갔다. 그 시간은 손님 둘과는 다른 시간이었고 준에겐 다시금 집에서 기다리라는 말이 떨어졌다. 그러면 준은 찰스와 조슈아와 함께 집에 있어야 했다. 에잇이 현관을 나서는 그 순간부터 둘은 준을 빤히 보면서 웃었다. 사실 뭐 때문에 웃는지, 준으로서는 알 수 없어서 더 무서웠다. 무서워하고 있으면 무서워하지 말라는 말이 나왔고, 속으로 안 무서워할 수 있다고 자신을 응원하고 있으면 귀엽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 굴레 속에서 준은 어쩔 수 없이 생각을 돌릴 만한 화젯거리를 생각해야 했다. 그래서 꺼낸 게, 뱀파이어의 특성이었다. 의외로 찰스도 조슈아도 그 화제는 진중히 다루었다.

거두절미하고 아는 게 하나도 없다고 했을 때, 찰스는 묘한 얼굴로 ‘그렇구나. 그렇단 말이지.’라고 중얼거리더니 입을 닫았다. 그러고는 담배를 꺼내 물고서는 불도 붙이지 않고 무언갈 골똘히 생각했다. 방금 그 말에는 어떤 깊은 의미도 없었는데. 설명이 필요한 눈으로 조슈아를 봤지만 조슈아는 그저 저러다 말 거라고만 했다. 설명 대신 수업이 이어졌다. 뱀파이어는 죽지 않는다. 약점은 역시 햇빛 뿐이다. 하지만 인간 중엔 지독한 부류가 있다. (준이 자기 마을 사람들을 떠올렸다. 조슈아는 ‘경우가 다르지만 그런 것도 포함이지’라고 짚어줬다.) 그리고 눈 색. 눈 색에 대한 설명은 듣지 못했지만, 준은 몇 달 전과 달라진 에잇의 눈 색으로 이미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사람의 피를 흡혈하면 눈이 빨개졌다. 동물의 피라면, 눈은 파랗게 되었다. 또 뱀파이어는 초대받기 전까지 타인의 집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도.

그 사실을 들은 준이 눈을 깜빡였다. 진짜요? 확인받는 듯한 말투에 조슈아가 약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준과 눈이 마주친 이내 아, 했다.

“이미 들은 적 있구나. 그때는 이미…. 에잇도 참 대책 없는 사람이네.”

조슈아의 입에서 가볍게 에잇에 대한 평가가 내려졌다. 자신이 아닌, 동족이 보는 그는 대책 없는 사람인 걸까? 작은 의문을 품고 준이 갸웃거리든 말든 조슈아는 설명을 이어갔다. 대부는 대자를 만들기 위해서 일단 대자가 될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것도. 대자를 직접 만드는 건 여러모로 귀찮은 일이라 대부분 안 한다고도 했다. 그때 처음으로 찰스가 입을 열었다.

“대자로 삼을 만큼 의미가 있는 사람을, 직접 죽이는 걸 달가워 하는 자는 없으니까.”

그제야 찰스는 자기가 문 담배에 불을 붙이려 했다. 착 그어진 성냥에서 불이 훅 타올랐다. 미안, 좀 피울게. 무미건조한 사과와 함께 찰스의 볼이 잠깐 패였다. 곧 담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준은 침을 삼켰다. 그러니까 내가, 에잇에게 있어… 의미 있는 사람?

“그러고는 대부의 피를 일부 주는 거야. 네가 살아가는 것도 널 아끼는 에잇의 피 덕분인 거지, 준. 사랑받는구나.”

그러면서 조슈아는 씩, 웃었다. 준이 잠깐 가만있다 귀를 붉혔다.

“읽지 말라니까요! 제발!”

준이 담배 연기를 흩뜨리며 도망가 버려서, 수업은 거기서 끝났다. 뿌연 담배 연기와 웃음소리를 남기고.

하루의 절반을 쓸 수 없는 네 사람에게 사흘은 금방 지나가는 시간이었다. 두 손님이 떠나기로 한 날. 해가 완전히 지기도 전인 초저녁부터 조슈아와 찰스는 서둘렀다. 그럴싸하게 짐을 싸고, 며칠 동안 착실히 모아 온 주머니를 그 사이사이에 숨겼다. 모자를 푹 눌러쓴 두 사람을 마주한 준은, 그 모습에 어쩐지 웃음이 났다. 하지만 대놓고 꺄르르 웃는 대신 준은 현관까지 짐을 옮겨주었다. 그 모습을 가만 보던 찰스는 대뜸 준에게 항구까지 같이 갈래? 라고 물었다. 내심 항구와 크루즈를 구경하고 싶었던 준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로 보아하니 조슈아와 상의한 일은 아닌 듯했는데, 조슈아는 딱히 반대하지 않았다. 남은 건 에잇의 허락이었다. 준이 휙 뒤돌았고 약속이나 한 듯 에잇은 거기 서 있었다.

“그래. 가자.”

그렇게 특이한 조합의 네 명이 항구로 향하게 되었다. 짐이 제법 되고 인원도 있으니 결국은 클래식하게 마차를 타기로 했다. 누가 마부의 옆자리에 앉을 것인가, 잠깐의 눈치싸움이 벌어졌는데 결국 앉게 된 건 에잇이었다. 에잇이 조슈아와 찰스에게만 들리게 무어라 구시렁거렸으나 통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찰스가 허허, 웃으면서 에잇의 등을 슬쩍 밀었다. 에잇은 얌전히 밀렸다. 앞자리에 오르며 잠깐 준과 눈이 마주쳤다. 준이 손을 슬쩍 흔들었다. 에잇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그래서 준의 입꼬리도 조금 올라갔다.

마차가 목적지로 향하는 동안 의외로 둘은 조용했다. 어색한 침묵에 준은 괜히 창밖을 뚫어져라 봤다. 돌이 깔린 바닥에 말굽이 부딪히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났다. 마차를 따라 양쪽으로 흔들리며 가로등이 보이는 길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햇빛이 그리워졌다. 가짜가 아닌 진짜 주황빛 빛이. 그 생각을 하자 연달아 기억이 끌어올려졌다. 햇빛 아래의 초원, 일광욕, 파란 하늘, 아침 공기, 가족, 가족의 웃음소리, 버논과 놀던 기억. 삽시간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필요 이상으로. 그래서 고갤 살짝 흔들었다. 이제 그런 거 없이도 살아야 한다고. 돌아갈 곳도 없다고. 대신에 에잇이 있으니 다행이라고. 엄청나게 큰 위안이 되는 것 같진 않았지만 그렇게 곱씹었다. 이제 나에겐 에잇이 있다고. 끝내는 준의 집에 있던 비와 피에 젖은 에잇을 떠올리기까지 했다. 그의 검은 머리칼 속 언뜻 보이던 붉은 눈까지. 눈을 감는다고 머릿속 이미지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는데, 준은 눈을 꽉 감았다. 필사적으로 다른 생각을 해야 했다.

그러다 준은 찰스가 며칠 전에 한 질문이 떠올랐다. 난 어떤 사람이지. 뭐라도 생각해 보려 했다. 나는 뭘 좋아하더라. 그래, 춤 추는 걸 좋아했던 거 같은데. 최근엔 음악을 들어 볼 기회도 없었네. 손을 꼼질거렸다. 그리고 또 책도 읽어보고 싶고. 아니, 하고 싶은 걸 떠올리는 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걸 떠올려야 하는데. 나는 무슨 사람인지를. 나에게서 에잇과 가족과 고향을, 뱀파이어를 떼어 놓으면 뭐가 남는지를, 생각해야 하는데.

“준.”

맞은편에서 찰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준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마주한 붉은 눈은 언제나 그렇듯 힘없는 듯 보였지만 동시에 차분해 보였다.

“괜찮아.”

“……뭐가요?”

“지금 네가 생각하던 거. 아직 몰라도 괜찮다고. 너무… 애쓰지 마.”

준은 대답하기까지 한참 뜸을 들였다. 손도 여전히 꼼질댔고, 눈도 내리깔았다.

“네.”

준이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며 한 대답이었다. 찰스는 대답을 듣고서야 준에게서 눈을 뗐다. 조슈아는 그제야 흘긋, 준을 한 번 봤다. 그러고는 금세 고개를 돌렸다. 그런 고민은 오롯이 혼자만의 것이라고, 조슈아도 찰스도 그렇게 생각했다.

마차는 느리다면 느리고 빠르다면 빠를 만큼의 속도로 항구에 다다랐다. 짐까지 내리고서 삯을 냈다. 에잇이 내민 돈을 보고 마부는 모자를 벗고 인사했다. 그러고는 금방 사라졌다. 준은 그가 어디로 갈지가 궁금했다. 다그닥다그닥. 경쾌하게 멀어져 가는 마차의 뒷모습을 보는데 옆에서 찰스가 불쑥 말을 붙였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 안 궁금해?”

“그다지요.”

“너무한데.”

“물어봐도 안 말해 줄 거니까.”

준의 말에 찰스가 오, 하고 짐짓 놀라는 얼굴을 했다. 그 얼굴을 살짝 원망스럽달까, 토라진 듯이 쳐다봤다. 그래도 찰스는 하하 웃으면서 준의 등을 툭 치기만 했다. 그래서 진짜 안 말해 준다는 거구나. 이렇게 생각하니 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안 말할 거야.”

그렇게 말하며 찰스는 짐을 들었다. 그때 불어온 저녁 바람에서 바다 내음이 났다. 짜디짠 냄새. 준이 손가락으로 코끝을 비볐다.

“진짜 최악이에요, 생각을 읽는 뱀파이어라는 거.”

준의 말에 찰스가 또 한 번 웃었다. 그런 시시한 대화가 마지막 대화였다. 준은 평생 상상도 못 해본 큼지막한 크루즈에 조슈아와 찰스가 함께 올랐다. 살짝 손을 흔드는 둘에게 준은 크게 손을 흔들어줬고, 에잇은 그 옆에서 팔짱을 끼고 잠자코 있었다. 크루즈가 저 멀리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둘은 그렇게 서 있었다.

“바다에 2주 동안이나 떠 있으면 무슨 느낌일까요?”

에잇은 대답도 미동도 없었다. 두 사람의 간극은 파도 소리가 메웠다. 준은 말을 이었다.

“두 사람이 구하던 거, 사람 피죠.”

에잇이 고개를 돌렸다. 준도 에잇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그 무심해 보이는 파란 눈을 뚫어져라 보며 간절히 빌었다. 나도 에잇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제발. 물론 준이 바라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게 다였다. 에잇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먼저 시선을 피한 건 준이었다. 한숨을 푹 내쉬고 어깨도 늘어뜨리면서. 에잇은 그런 준에게 무어라 말하려다 말았다. 역시 알았구나, 그걸― 같은 말은 목에 걸려 나오지 못했다. 대신 에잇의 입에서 나온 건 ‘가자, 집에.’ 같은 무미건조한 말뿐이었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준이 테이블 매너를 완전히 몸에 익히고 이제는 어엿한 신사라고 해도 괜찮아졌을 무렵에, 준의 생활 패턴은 에잇과 달라졌다. 사냥 시간이 그 시작이었다. 조슈아와 찰스를 만난 뒤 에잇과 준이 함께 한 사냥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지만 어느 순간 준은 앞으로 사냥을 혼자서만 다녀오겠다고 했다. 에잇은 걱정됐지만, 찰스의 말이 떠올라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들어줘. 코트 자락을 날리며 나가는 준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그 말을 곱씹었다. 바깥에서 조금 긴 시간을 보낸 준이 돌아오면 에잇은 가장 먼저 준의 눈을 확인했다. 그 색이 파란색일 때마다 에잇은 안도했다.

그런 식의 긴장 속 줄타기는 에잇에게만 있는 일이었다. 준은 에잇의 심정이 어떻든 상관없이 천천히 변화하고 있었다. 몸가짐이 완벽해질수록 준의 말수는 줄어 갔다. 에잇이 물어보는 말에만 대답을 해 준다고 해야 할까. 에잇은 거기에 묘한 아쉬움, 그러니까 서운함을 느꼈다. 준의 나이를 계산해 보고는 어렴풋하게 사춘기일 거라고 짐작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엄청나게 가까웠던 적도 없으면서, 에잇은 준이 말 한마디도 없이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는 날에는 형용할 수 없이 쓸쓸했다. 자신이 그렇게나 오랜 시간 피했던 감정을 이제야 마주하는 건 더없이 힘든 일이었다. 솔직해지자면 이게 무슨 감정인지 정의 내리기도 어려웠다. 캄캄한 창문 밖을 내다보면서 감정이 그저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고 있으면, 또 찰스의 말이 떠오르고는 했다. 그 아이 좋아하지?

준은 감정의 파도 속에 놓인 에잇의 심경을 몰랐다. 자신을 찾는 일에 몰두하기를 원했고, 그렇게 했다. 준은 에잇이 다시금 꾸려놓은 서재에 들어가 뭐든 닥치는 대로 탐독했다. 그러다 때가 되면 혼자 사냥을 다녀왔고 자신을 어쩐지 애타고 쓸쓸한 얼굴로 바라보는 에잇을 지나쳐, 방에 들어와 곧장 침대 위에 콕 박혔다. 해가 떠오는 새벽, 잠이 들면 준은 이따금 조슈아와 찰스가 탔던 대형 크루즈에 오르는 꿈을 꿨다. 그런 꿈을 꾸다가 눈을 떠보면 새카만 밤이었다. 밤인 걸 자각하면 갈증과 허기가 몰려왔다. 그 굴레에 준은 종종 불쾌함을 느꼈다. 무엇보다도 그 꿈이 싫었다. 그 꿈이야말로 자신이 몰래, 아직도 자유를 선망한다는 걸 보여주는 방증이라는 사실보다, 그 속에는 배에 탄 자신을 항구에 서서 바라보는 에잇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꿈속 그가 보인 슬픈 파란 눈은 언젠가 자신을 한 번 죽였었던 에잇이 보였던 눈이었다. 허기와 갈증 속에서 준은 그 눈빛에 대해 계속 고민했다. 그건 자신이 떠나는 게 슬펐던 눈인 걸까, 아니면 자신의 어떤 행동이 그를 슬프게 만든 걸까. 결론은 물론 꿈은 꿈일 뿐이라는 생각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에잇에 대한 준의 감정이 식었거나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한동안 준은 에잇의 서재에서 마주한 관능적인 소설 때문에 속앓이를 심하게 했다. 에잇의 입술을 보면, 입을 너무나도 맞추고 싶었고 어쩌다 에잇의 손이 준의 몸에 닿으면 준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싸늘한 손이 새삼스레 너무 생경해서기도 했지만 이 감각은 그 이상이었다. 척추 안쪽에서부터 올라오는 전율, 간지러운 그 느낌. 그래서 준은 그때 필사적으로 에잇을 피했다. 에잇의 목에 송곳니를 들이댔던 그날처럼, 자신이 또 에잇에게 달려들까 봐. 사랑해달라는 말을 뱉게 될까 봐. 그 손에 자신의 모든 걸 내던지고 싶어질까 봐.

준은 그 충동을 흡혈을 통해 해소했다. 웃기게 들리는 말이겠지만 그럴 때에야 준은 자신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실감했다. 사슴 같은 동물 하나를 지칠 때까지 몰고 다니다, 지치면 그 뜨거운 피를 죄다 빨아먹고 남은 사체 옆에 드러누워 귀를 기울였다. 그러면 여러 심장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 왔다. 준은 그 두근거림을 마치 자기 것처럼 여겼다. 눈을 감고 제각기 다른 박동에 맞춰 심호흡을 하고 있노라면 다시금 심장이 뛰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러고 나면 어쩐지 개운했다. 에잇에 대한 감정도, 해서는 안 되는 생각도 잠시 잊히는 기분이어서.

그러면 준은 점점 뱀파이어라는 것을 자신과 떼어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흡혈귀. 그 글자 그대로가 되어가는 것 같아서 무섭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게 준은 흡혈에 딸려오는 개운한 기분이 아니더라도 그 행위가 좋았다. 바르작거리는 동물을 붙잡고 힘으로 누르는 그 감각이.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숲을 뛰어다닐 때, 바람을 가르는 그 감각이. 마셔서는 안 되는 것을 마신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자유로웠다.

가끔은 자신의 배에 있었던 상처가 상흔으로 영원히 남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같은 생각도 했다. 그게 있으면 본인이 사람이었던 걸 잊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거울에 비치는 파란 눈과 송곳니가 너무 선연했다. 난 뭘까. 준은 입꼬리를 손으로 당겨 올려 삐져나온 송곳니를 보며 그 생각을 자주 했다. 그리고 그 생각의 종착지는 언제나 사람의 피를 먹어 보고 싶다는 위험한 발상이었다. 어떤 맛일까. 사슴의 피보다 달콤할까. 조슈아와 찰스에게 물어봤더라면 좋았을 텐데. 어쩌면 대답을 해 주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럼 에잇은, 에잇은 사람의 피를 먹어 본 적이 있을까. 사람보다 사람다워야 해. 에잇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이었다. 어쩌면. 준의 머리에서는 한 가지 가설이 세워졌다. 확인해 보려면 한 가지 방법 뿐이었다.

“사람 피 먹어 본 적 있어요?”

식사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에잇이 준에게 들은 말이었다. 왔냐는 인사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이런 질문 또한 에잇이 바란 적 없는 일이었다. 문을 닫다 말고 에잇은 준을 바라봤다. 준의 고개는 현관을 향해 있지도 않았다. 거실에 놓인 탁자에 앉아 딱히 필요도 없는데 불을 붙여 놓은 벽난로만 보고 있었다. 며칠 만에 듣는 목소리인지 가늠하며 에잇이 대답했다.

“…그런 건 왜 물어봐?”

“궁금해서요.”

망설이는 기색 없이 나오는 대답이었다. 준은 탁자에 한쪽 팔을 올리더니, 그 위에 고개를 얹으며 엎드렸다. 

“대답 안 해 줄 거죠?”

불만스러운 목소리였다. 체념하는 듯한 말이었지만 어쩐지 채근하는 듯도 했다. 에잇은 잠깐 망설이다가, 준의 고개가 향하는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답했다.

“응.”

준이 팔과 고개를 반대로 놓았다. 그 뒤통수를 가만 보면서 에잇은 또 한 번 슬퍼졌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에잇이 말을 이었다.

“준, 말했잖아. 우리는,”

“알아요.”

준이 에잇의 말을 끊었다. 그러더니 상체를 일으키고는 에잇을 쳐다봤다. 화가 난 건지, 짜증이 난 건지. 에잇으로서는 분간할 수 없는 준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한 번은 괜찮지 않아요? 먹는다고 미치는 것도 아니고. 그 두 사람처럼 멀쩡한 사람들도 봤잖아요. 도대체 뭐 때문에 먹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

에잇은 입을 다물고 준을 보고만 있었다. 준은 에잇의 파란 눈이, 그 눈이 보내는 시선이 답답했다. 대답하지 않는 그 입도 미웠다. 미간을 구겼다. 

“모두가 궁금한 걸 다 해소하면서 살 수는 없어.”

“먹어 본 거잖아요.”

준이 에잇의 말을 무시했다. 에잇의 눈이 가늘어졌다. 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한 번일지 여러 번일지는 몰라도. 먹어 본 거잖아요.”

“준.”

“그러니까 사람과 섞여 사는 이상 사람다워야 한다고 말하는 거잖아요. 당신이 그것만을 좇은 적이 있을 테니까.”

당신, 이라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호칭. 에잇은 준이 하는 말의 내용보다도 그런 게 신경 쓰였다.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에잇이 준의 눈을 피했다. 준이 좀 더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애 취급 마세요.”

“그런 적 없어.”

“지금 이게 애 취급이잖아요.”

“아니야.”

“그럼 내 말이 틀린 거예요?”

“…….”

“그런 적 있냐고요.”

에잇은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다. 준의 얼굴이 보란 듯이 구겨졌다.

“알겠어요. 말 안 해 줘도 그렇게 생각할 거니까.”

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잇도 일어나려 했다. 준은 에잇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쳐 갔다. 에잇이 무어라 입을 떼려는데, 준의 말에 가로막혔다.

“위선자.”

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으로 향했다. 에잇의 머리 위에서 문이 꽝, 닫혔다. 에잇은 그런 준의 뒷모습을 보다가, 꽝 소리가 들린 후에도 한참을 서 있었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는지도 알 수 없을 때, 에잇은 다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었다. 매도하는 듯한 준의 눈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 뒤로 준은 에잇에게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주치는 일도 없었다. 어쩌다가 한 번 실내에서 동선이 겹치면 준은 에잇을 아예 없는 사람 취급했다. 에잇은 요근래 바뀐 준의 태도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냥 말을 걸지 않는 것과, 공기 취급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었다. 적어도 준에게는 그런 것 같았다. 에잇이 제때 잠에 들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새가 울고 해가 떠올라 중천에 다다를 때까지 에잇은 눈을 감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는 게 다였다. 밤이 찾아와서 눈꺼풀에 힘이 생겨도 별다른 활동을 하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준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발소리가 들렸다. 가끔, 어쩌다가 에잇의 방문 앞에서 그 발길이 멈췄는데, 이내 멀리 사라져 버렸다. 에잇은 눈을 감은 채 생각했다. 기대하면 실망할 뿐이니까 기대하지 말자고. 그 생각을 되새길 때마다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집에서 오가는 대화가 없어진 지도, 에잇이 식음을 전폐한 지도 며칠이 지난 때였다. 언제나와 같은 시간에, 준은 서재의 문을 열었다. 어째서인지 에잇도 서재에 있었다. 서재로 들어오던 준이 주춤했지만 에잇은 준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준도 에잇에게 신경을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전이었으면 어색하게 움직여 에잇이 뭐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텐데, 이제 준은 속내를 그렇게 간단히 보이지 않았다. 에잇은 지나쳐 가는 준의 뒷모습을 좇다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준도 책장에서 책을 꺼냈다. 에잇을 등진 채 책장에 기대 책을 펴는데 문득 에잇은 무얼 읽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물어보기로 했다.

“뭐 읽어요?”

“아무거나 읽어.”

오랜만의 대화였는데. 참 성의 없고 시시한 대답이었다. 준이 슬쩍 고개를 뒤로 돌렸다. 에잇은 눈을 내리 깐 채 책을 읽고 있었다. 방금은 눈을 마주치고 싶었는데. 아쉬움을 삼키고 준도 다시 책을 봤다.

“너는.”

말소리에 준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둑한 실내에서 파란 눈이 자신을 바라봤다. 그 올곧은 시선에 어쩐지 낯 뜨거움을 느끼며 고개를 금방 돌렸다.

“몰라요.”

결국 준도 성의 없고 시시한 대답을 해 버렸다. 대답인지 한숨 소리인지 모를 숨소리가 뒤에서 났다. 준은 제목을 알고 있었다. 무슨 책인지도. 그 장렬한 마지막이 인상 깊어 벌써 몇 번이고 읽은 책이었다. 지금이라도 사과할까. 사실대로 말할까. 그것도 생각뿐이었다. 준은 말을 삼키고 글자를 마저 읽어 나가려 했다.

“사랑하는 로테, 당신에게 편지를 쓰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준이 뒤돌아봤다. 에잇의 고개는 책을 향해 있었다.

“이 서재는 내 서재야. 잊었어?”

준이 책을 덮었다. 에잇도 책을 덮었다. 항구에서처럼, 둘의 시선이 얽혔다.

“지금 무슨 생각해.”

에잇이 또 그 질문을 했다. 준은 대답 대신 성큼성큼 걸었다. 문고리에 손을 뻗은 순간 에잇이 준의 손을 낚아챘다. 싸늘한 감촉이 준의 손목을 감쌌다. 준이 손을 빼려고 했지만, 에잇의 힘이 더 셌다. 인간이었을 때 자신의 손목을 잡았던 에잇의 힘과 비교되는 탓에 기분이 언짢아졌다. 준은 미간을 좁히고 에잇을 노려봤다. 에잇은, 그래도 손을 놓지 않았다.

“준, 난 너를 아껴.”

“……이거 놔요.”

“날 밀어내지 말아 줘.”

손을 잡아 빼려 하던 준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애처로운 표정을 지은 에잇의 얼굴을 마주한 준은, 그 얼굴 위로 꿈에서 본 그의 얼굴을 겹쳐 보았다. 준의 얼굴이 다른 식으로 일그러졌다. 울기 직전의 얼굴일지도 몰랐다. 자신이 없는 이유는 왜 눈물이 나려 하는지, 그 이유를 본인조차 몰랐기 때문이었다. 준의 얼굴을 본 에잇이 손에서 힘을 살짝 뺐다. 널 슬프게 할 바엔 그냥 놓아주겠다는 신호였으리라. 하지만 준은 잠자코 있었다. 화끈해진 눈시울에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고 울지 않으려 최대한 애썼다. 에잇이 준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왔다. 부드러운 손길이 아래로 향한 준의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못 본 새 유난히 핼쑥해진 그 얼굴이 준의 앞에 있었다.

눈을 마주한 것도 잠시였다. 준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에잇은 더 붙잡지 않았다. 에잇의 손이 준의 손목에서 힘없이 떨어졌다. 준은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문을 열고 나갔다. 에잇의 각오와는 달리 문은 세차게 닫히지 않았다. 정중할 정도로 조용히 닫힌 문 앞에 남겨진 에잇은 준의 손목을 잡았던 자신의 손을 빤히 내려다봤다. 아까까지 이 손아귀에 남아있던 준의 살, 그 감촉이 생경했다. 반대편 손으로 손바닥을 살짝 쓸었다. 그곳에 남은 온기는, 당연하게도 없었다. 사랑하는 로테, 당신에게 편지를 쓰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에잇은 그 문장을 다시 한번 되뇌었다.


그래서 그게 슬프게 자신을 바라보던 에잇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던 건지, 준은 아직도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 꿈을 꾼 날이었다. 파도를 따라 출렁이는 크루즈에 오르는 꿈. 다른 탑승객들의 웅성거림은 귀에 들어오지 않고, 시야에도 오로지 항구에 선 에잇밖에 보이지 않는 꿈. 그 슬픈 얼굴, 그 까만 옷차림. 어째서인지 자신의 곁에 없고 저 멀리 작은 점으로 보이는 그. 준의 첫사랑. 이뤄지지 않는 꿈. 꿈에서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아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을 때, 준의 베갯잇은 눈물로 축축했다. 그것만으로도 바다에 떠 있는 기분이었다. 저 먼 곳으로 출발하려는 크루즈에서 기어코 떨어져 버린 기분. 그리고 자연스레 파도 대신 갈증이 밀려왔다. 따끔거리는 눈가를 옷소매로 문질렀다. 나가고 싶었다.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방을 나섰더니 어디에도 에잇이 보이지 않았다. 준은 그때야 회중시계를 확인했다. 에잇의 식사 시간이었다. 오늘은 나갔구나. 소중히 다룬 탓에 아직도 새것처럼 반질거리는 회중시계를 잠깐 손으로 매만지다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갈증이 더욱 강해졌다.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발이 움직이는 대로 걸었다. 그랬더니 준이 도착한 곳은 숲이 아니라 번화가였다. 가로등의 주황빛 불 밑에서 준은 한참을 서 있었다. 도로 위로 마차와 자동차가 섞여 다녔고, 길에 우두커니 선 준을 행인들이 흘긋거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맥박 소리가 선명했다. 두근, 두근. 아. 큰일이네. 준이 작게 중얼거렸다. 파란 눈으로 사람들의 옷자락을 쫓았다. 에잇의 슬퍼하는 얼굴이 일순 떠올랐지만 잠깐이었다. 준이 눈동자를 열심히 움직였다. 다시 발을 옮기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에잇은 의아했다. 실내에 광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현관문을 조용히 닫으며 에잇은 사위를 경계했다. 인기척이 있었다. 준 혼자일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에잇은 조심스럽게 2층으로 향했다.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옮길 수록, 에잇은 자신이 가장 보기 싫은 광경을 보게 될 것만 같다는 불안에 휩싸였다. 준의 방문 앞에서 에잇은 심호흡을 했다. 두 번째로 숨을 들이쉬었을 때 방문을 열었다. 방 안도 어두웠다. 준의 향기가 언뜻 났다. 이불이 불룩한 걸로 봐서는 준은 침대 안에 있는 것 같았다. 보통 이 시간이라면 서재에 있는데.

“……준?”

안으로 들어서며 조심스럽게 그 이름을 불렀다. 이불은 잠잠했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보기 드물게 에잇의 눈이 흔들렸다. 느껴지는 인기척은 이불 속에 있는 게 아니었다. 이불을 확인할 것인가,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의 정체를 확인할 것인가. 에잇은 망설이지 않았다. 침대로 빠르게 다가가 이불을 확 들어 올렸다. 안에 누워 있던 건 준이 아니라 온기도, 피도 모두 잃은 사람의 시체였다. 에잇은 한참이나 시체를 쳐다봤다. 목덜미에는 선명한 잇자국이, 거기서 흘러나온 피가, 시트를 따라 둥글게 번져 있었다. 기어코. 에잇이 천천히 돌아섰다. 

준이 있었다. 그렇게나 보고 싶지 않았던 빨간 눈의 준이, 에잇의 뒤에 있었다. 에잇은 말을 골라내려 애썼다. 그러는 사이에 준이 선수를 쳤다.

“나,”

준이 한 걸음 다가왔다. 에잇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린 채로 준의 모습을 눈에 담으려 노력했다. 불길한 예감이 에잇의 발밑에서 스멀거렸다.

“나 떠날게요.”

에잇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떠난다고, 왜? 이유를 물어야 할 타이밍이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입술을 달싹이기만 했다. 준은 말을 이어 나갔다. 

“이대로라면 난 에잇을 슬프게만 할 테니까.”

아냐. 생각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에잇이 준에게 다가서려 했지만 준이 뒷걸음질 쳤다. 손이라도 뻗어 봤다. 준이 잡아주지 않을 걸 알았지만, 잡고 싶었다. 그래도 여기 있어, 난 네가 여기 있으면 좋겠어. 말들은 에잇의 입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혀 위에서만 맴도는 그 말에 에잇은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손과 몸이 앞으로 나아갈 수록 준은 멀어지기만 했다. 어두워서 그 붉은 눈도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얼굴이 맞는지 확인하고만 싶었는데. 준은 에잇의 손에 닿지 않았다.

준은 에잇의 얼굴이 서서히 무너지는 걸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인간의 목에 송곳니를 꽂았을 때부터 그의 얼굴을 보는 게 슬프고 두려웠는데. 막상 그걸 마주하자니 슬픔과 두려움 따위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내가 저 사람을 저렇게 만든 거야. 감정이 폐에 가득 들어찬 기분이었다. 무거운 돌이 가슴을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실내가 너무 조용한 탓에 에잇의 힘없는 발소리가 과할 정도로 잘 들렸다. 더없이 작은 소리였지만 준에게는 너무 크게 들렸다. 거기에 밟힐 것만 같았다. 시야가 흐려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제 정말로 안녕.”

오래전 에잇이 준에게 했던 인사말을, 준이 토하듯 뱉어냈다. 에잇이 듣지 못했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준의 몸은 이미 에잇에게서 아주, 아주 멀어지고 있었다. 눈에서 자꾸만 뭐가 흘러나왔다. 훔치지도 않고 전속력으로 뛰었다. 혀끝에는 자꾸만 인간의 피 맛이, 동물보다 훨씬 진하고 달콤한 맛이 느껴졌다. 그 맛을 무시하려 할수록 귀에서는 자꾸만 조슈아의 말이 울렸다. 네가 살아가는 것도 널 아끼는 에잇의 피 덕분인 거지, 준. 사랑받는구나.

자신이 어느 곳으로 향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됐을 무렵이었다. 막 뛰기 시작했을 때 준은 어렴풋이 이 말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가지 마, 라는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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