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hes, and again

Ashes, and again 4


“다시.”

“아, 이젠 어차피 먹지도 못하는데.”

준이 불평했다. 에잇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아아, 조금 더 애교 섞인 목소리를 내봤지만 오히려 역효과였다. 에잇이 대꾸 없이 테이블 위에서 손가락들로 토도독, 소리를 냈다. 준은 잠깐 눈치를 보다가, 다시 나이프를 들었다. 쓱, 쓰으으윽. 그릇 위 고기를 최대한 천천히 썰었다. 에잇의 얼굴을 흘금 봤다.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이게 아닌가. 속도가 문제가 아닌가? 뭐였더라… 눈을 꽉 감고 에잇의 수업을 떠올리려 애썼다. 그러니까, 테이블이 흔들리지 않게. 식기와 그릇의 마찰음이 나지 않게. 써는 크기는 한입 크기…로?

눈을 감은 채 감으로 고기를 썰다 말고 한쪽 눈을 슬그머니 떠 에잇을 바라봤다. 에잇이 티 나게 한숨을 후, 쉬었다.

“한 번에 다 썰어 버리면 안돼. 아니, 애초에 눈 감고 썰지 마.”

“이건 그냥….”

에잇의 눈이 한층 더 서늘해졌다. 준이 입을 다물었다.

“나이프 내려놔.”

준이 잠자코 식기를 내려놨다. 손을 자연스럽게 냅킨 위로 옮기며 허리를 좀 더 바르게 세웠다. 그러면서도 에잇의 눈치를 봤다. 다행스럽게도 불호령은 떨어지지 않았다.

“와인 마실 때는 어떻게 한다고.”

속으로 안심하기가 무섭게 질문 아닌 질문이 날아들었다. 어어, 와인. 손부터 움직이자 에잇이 테이블 위에서 손바닥을 한 번 들어, 탁, 소리가 나게 두드렸다.

“아니지.”

준은 에잇을 흘끗거리느라 가자미눈이 될 판이었다. 왜 하필 또 대각선에 앉아있어서, 저 사람은. 그런 투정을 삼키며 준이 천천히 손을 거뒀다. 그러니까, 와인을 마시기 전에는 먼저 냅킨으로 입을 닦고. 아, 입을 닦고. 버벅대는 동작으로 냅킨을 들어 올렸다. 입술을 조심스레 닦은 뒤 와인 잔으로 손을 뻗은 그때였다. 에잇이 한 번 더 테이블을 탁 쳤다. 준은 무심한 표정으로 턱을 괸 에잇의 얼굴에 약간 주눅 들었다. 이유가 뭔지 몰라 멈춘 손을 다시 움직였다. 테이블을 치는 소리가 또 한 번 났다. 눈을 질끈 감으며 차라리 말로 해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랐다. 와인, 와인 잔을 잡을 때는. 아무리 끙끙대도 도저히 생각나지 않았다.

“좀 더 아래.”

갑자기 목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준이 눈을 떴다. 준을 의자 뒤에서부터 감싸듯 선 에잇이 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와인은 온도에 민감하니까, 거길 잡으면 안돼.”

준이 에잇의 옆모습을 훔쳐봤다. 사실 훔쳐봤다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대놓고 봤다. 이렇게 에잇이 거리감 없이 있을 때마다 준은 자꾸만 넋을 놓았다. 얼굴도 얼굴이겠지만 에잇에게서 나는 향기도 거기 한몫했다.

“집중.”

단호한 말과 함께, 와인 잔의 스템 부분에 준의 손을 두고서 에잇의 손이 멀어졌다. 에잇의 고개는 여전히 앞을 향해 있었고 준도 에잇에게서 겨우 시선을 뗐다.

“피는 사실 따뜻해야 좋지. 혼자 있을 때엔 스템을 잡지 않아도 좋아. 하지만 나는 지금 사람들과 함께일 때를 대비해 가르쳐 주는 거니까 한동안은 버릇을 들여. 알겠어?”

“…네.”

“…지금 수업에 질렸지.”

“네. 네?”

아뇨? 반사적으로 대답했던 준이 뒤늦게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에잇의 눈은 이미 준을 재단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진짜 아닌데? 양심이 살짝 아려왔지만 그래도 꿋꿋이 아니라고 했다. 에잇은 알겠다는 말도 없이 옷걸이에 걸린 코트를 걸쳐 입었다.

“나가자.”

준이 어정쩡하게 섰다.

“어디로요?”

에잇이 거침없이 걸어 나가며 대답했다.

“사냥하러.”

준은 에잇에게 몇 달째 강습을 받고 있었다. 준은 여전히 받지 않아도 될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에잇은 완강했다. 우리도 인간이었음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에잇의 눈에는 평소보다 많은 감정이 들어 있어 준은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그 뒤로 준은 식사 예절, 신사가 가져야 할 몸가짐, 대화 예절, 파티 예절 등등 온갖 예의를 배워야만 했다. 사람과 섞여 사는 이상 사람보다 더 사람다워야 한다는 말과 함께. 준은 정수리에 책을 두세 권 얹은 채로 그 말을 들었다. 그 사실을 잊고 고개를 끄덕여 책을 와르르 쏟아버렸고 에잇의 한숨 소리는 날이 갈수록 커졌다.

준의 마을을 떠난 뒤, 거처를 이곳으로 옮긴 후(이제는 거의 반년 가까이 지난 일이었다)로 준은 정말 열심히 살았다. 에잇의 수업 덕분에 살아 있었을 때보다도 더 부지런히 살아야 했고, 해 때문에 하루의 절반을 못 쓰게 된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래도 아직도 믿기지 않아 매번 송곳니를 확인하는 건 여전했다. 직접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물어 본다면 실감이 좀 날 텐데. 에잇은 준에게 좀처럼 기회를 주지 않았다. 항상 어딘가에서 잡은 동물을 어깨에 둘러업어 와서는 준에게도 피를 나눠주기만 했다. 에잇의 배려 덕분에 심한 갈증은 느끼지 못했지만 준은 못내 아쉬웠다. 바뀐 삶을 좀 더 적극적으로 향유하고 싶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리고 지금, 준이 그토록 고대하던 순간이었다. 에잇의 품에서 목을 축 늘어뜨린 사슴을 보자마자 갈증이 느껴졌다. 허락을 구하듯 에잇을 쳐다봤다. 그 초롱초롱한 파란 눈을 마주하면서 에잇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준이 목덜미를 문 건 순식간이었다. 준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열심히 움직였다. 사슴의 몸이 서서히 뻣뻣해지는 걸 느끼며 에잇은 준의 몸에 살짝 손을 댔다. 준은 입을 떼는 대신 사슴의 목을 더 파고들었다. 잠시 텀을 둔 뒤, 에잇이 준의 이름을 불렀다.

“준.”

준이 고개를 쳐들었다. 나무 틈새로 들어온 달빛이 준의 눈을 비췄다. 그 파란 눈의 동공이 확장되어 있었다. 에잇과 눈이 마주친 준이 옷으로 입을 닦았다. 입가로 피가 아무렇게나 번졌다. 에잇이 움직였고, 준도 사슴에서 멀어졌다. 사슴이 맥없이 바닥으로 엎어졌다. 준은 사슴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숨을 몰아쉬었다. 에잇이 준의 손을 잡았다. 준이 놀라며 에잇을 쳐다봤다. 그 차분한 얼굴을 보면서 준은, 그제야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에잇은 자신이 흡혈하는 장면을, 준이 보지 못하게 했다. 준은 ‘알몸을 보는 것도 아닌데 왜?’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에잇은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니 딴지는 걸지 않았다. 에잇이 흡혈할 동안 준은 뒤돌아 기다렸다. 밤공기가 좋았다. 에잇이 자신에게 이런 기회를 생각보다 빨리 준 것도. 다만 아까부터 진정할 수가 없었다. 아편이라는 걸 하면 기분이 이상해진다던데 그게 딱,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더 이상 심장은 뛰지 않았지만 준은 괜히 제 가슴에 손을 얹었다. 당연히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무언가 자꾸 두근거리는 기분이었다. 따뜻한 피가 식도를 넘어갈 때의 느낌을 자꾸만 곱씹었다. 가슴에 얹었던 손을 목에 가져다 댔다. 마시고 싶었다, 여전히. 그 생각을 걷잡지 못하자 머리가 웅웅 울리는 것만 같았다. 울리다 못해 핑, 도는 것 같다고 느끼는 순간 귀에 날카롭게 산짐승들의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귀를 막아 봐도 소용 없었다. 쿵, 쿵, 쿵. 헤아릴 수도 없는 소리들이 제 심장 소리처럼 들렸다.

그리고 누군가가 귀를 막은 준의 손을 잡아 당겼다. 에잇이겠지만, 당연했지만, 준은 이빨을 세웠다. 서로의 몸이 부딪혔고, 준의 송곳니는 에잇의 목을 뚫어버리기 직전에 멈췄다.

정작 에잇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준이 화들짝 놀라 멀어지다가 발이 꼬여 넘어졌다. 에잇이 그런 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일어날 동안 준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 같았다.

식사가 끝나고 둘은 말 없이 숲길을 걸어갔다. 차라리 왜 그랬냐고 물어봐 주고 탓하면 좋을 텐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앞장서서 걸어가는 에잇의 뒤를 따르며 준은 양손으로 입을 막고 있었다. 막아야 할 것 같았다. 또 에잇의 목에 덤벼들지도 몰라서였다. 그러지 않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가 않았다. 본능적으로. 준은 입을 더욱 꽉 틀어막았다. 정 안 되면 제 손을 깨물 생각이었다. 뱀파이어의 상처가 빨리 낫는다면, 스스로가 만든 상처도 금방 낫겠지.

왔을 때와는 반대로, 에잇은 번화가 쪽으로 향했다. 준은 입 위에 손을 얹은 채로 에잇에게 물었다.

“어디 가요?”

“너에게 옷을 맞춰 주려고.”

“…저요?”

“응. 그리고 시계도. 어떤 게 좋을지는 가서 골라 봐.”

“…왜요?”

에잇이 걸음을 뚝 멈추고 준을 뒤돌아봤다. 준도 흠칫하며 멈춰 섰다. 왜 주냐는 물음이었는데, 못 할 말이었나? 준이 어리둥절하게 서 있을 동안, 준을 한참이고 바라보던 에잇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준도 따랐다.

“계속 그렇게 입 막고 있을 거야?”

드디어 그 질문이었다. 준은 에잇의 걸음을 빨리 해 에잇과 나란히 섰다. 그리고 눈에 띄게 고개를 끄덕, 끄덕했다. 곁눈질로 그걸 본 에잇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입마개 사서 채우기 전에 관둬.”

농담인지 진담인지, 준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에잇이라면 진짜로 그럴 사람일 것 같아서 얌전히 두 손을 내렸다. 도시로 향하는 내내 준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만 같은 기분으로 에잇을 따라다녔다.

처음, 해 보는 것이었다. 맞춤복을 만들기 위해 몸의 치수를 재는 것도, 평소에 들고 다닐 회중시계를 고르는 것도. 에잇의 몸짓과 말투, 옷가지를 본 사람들을 그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상인들은 누구든지 에잇이 품에서 금화나 은화를 꺼내면 더 좋아했다. 준은 에잇에게서 어색한 몸동작을 지적받다가도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 즐거워 짓는 웃음 또한 지적받았다(송곳니를 의식하지 못해서였다). 에잇은 확실히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미소만을 보여주었지, 웃음은 아니었다. 그 은근한 미소를 지은 옆얼굴을 훔쳐보며 준은 자주 넋을 놓았다. 함께 많은 일을 겪었는데도 준에게 에잇은 매번 처음 보는 사람 같았다. 익숙해지지 않는 사람. 아니, 익숙해질 틈을 주지 않는 사람.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 한 번도 오롯한 자신을 내놓아 주지 않는 사람.

사색은 사색이었고. 준은 다른 의미로 그 외출이 힘들었다. 갈증이 심각하진 않았지만 자꾸만 사람들의 목덜미만 보였다. 거기에 숲에서 물었던 사슴의 목이 자꾸만 겹쳤다. 두근거리는, 살아있는 사람의 뜨거운 맥박 같은 게 자꾸만 거슬렸다. 인간의 뜨거운 피는 무슨 맛일까. 이 생각에 다다르면 숲에서 느꼈던 감각이 다시 몸을 타고 오르려 했다. 억지로 참을수록 감각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치수를 재느라 자꾸만 가까이 다가오는 재단사가 가장 참기 어려웠다. 입맛을 다시느라 침을 꾹 삼킬 때마다 에잇의 차가운 시선이 날아들었다. 그 따가운 눈길 속에서 준은 인생에서 가장 어렵고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차라리 에잇에게 입마개를 채워 달라고 하고 싶을 만큼.

그래서 에잇이 이제 돌아가자고 했을 때 준은 오히려 기뻤다. 이 뜨끈하고 건강히 심장이 뛰는 사람들 사이에서 빨리 도망가고 싶었다. 차라리 그 채광이 없는 눅진눅진한 집 속에서 에잇의 수업을 받으며 숨 막혀 하고 싶었다. 준의 티 나게 안도하는 얼굴을 본 에잇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다만 그 얼굴을 준에게 보여주지는 않았다. 그저 ‘잘 참았어.’라는 무미건조한 칭찬을 던지기만 했다. 준의 안도하는 입이 더 크게 옆으로 벌어졌지만, 에잇은 보지 못했다. 그래도 그 얼굴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도시를 거의 다 빠져나왔을 때였다. 원래의 걸음 속도였더라면 진즉에 빠져나가 도착하고도 남았을 테지만 아직은 인간들이 활동하고 있었기에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그 일은 인간의 걸음 속도로 걸어가는 게 아니었다면 피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에잇이 먼저 뒤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멈춰 섰다. 준도 뒤따라 섰다. 처음엔 알아채지 못했지만, 멈추니 느껴졌다. 누군가가. 둘 정도. 에잇이 준에게 손짓했다. 준이 에잇에게 바짝 붙었다.

“대자인가 봐? 그렇게 소중히 대하고. 처음에는 인간인 줄 알았어.”

이렇게 붙었는데도 모르고 말이야. 뒷말을 덧붙인 자가 그림자 속에서 한 걸음 나섰다. 올라간 입꼬리가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적어도 준이 느끼기엔 그랬다. 그 남자는 몇 걸음 더 다가오더니, 에잇처럼 우아한 동작으로 예법에 맞춘 인사를 했다. 에잇도 마주 인사했다. 그 동작을 보다가 반 박자 늦게 준도 인사했다. 준이 뒤늦게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그 남자가 웃었다. 에잇은 웃지 않았다. 준도 웃지 않았다. 둘 사이의 눈치를 보기만 했다. 휙휙 움직이는 준의 고개를 보고 에잇은 옅은 한숨을 쉬었고, 반대편에 서있던 남자의 웃음소리는 좀 더 커졌다. 준은 그 원인이 본인일 거라 생각하지 못하고 마냥 당혹스러워 했다.

“그러는 그쪽도, 누굴 숨기고 있는 것 같은데. 대자를 애지중지하는 건 그쪽이 아닌가?”

에잇이 되받아쳤다. 아직 다른 한 사람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상대는 웃는 낯을 유지한 채 대답했다.

“이쪽은 내 애인인데.”

에잇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준도 비슷한 얼굴을 했다. 남자는 ‘너희 참으로 어울리는 한 쌍이네’, 이런 생각을 했지만 말하진 않았다. 대신 다른 말을 했다.

“그래서 말인데 도와줬으면 해. 우리를.”

에잇과 남자의 시선 교환이 오래도록 이어졌다. 준은 그 사이에 무슨 대화라도 오가는 걸까 싶어 열심히 남자를 쳐다봤지만 아무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한참 후에야 에잇이 입을 열었다.

“이름이.”

남자는 대답을 미루고 에잇과 준에게로 걸어왔다. 긴 코트 속 러플 셔츠를 입고서 얇은 리본을 옷깃 부분에 맨 그는 에잇에게 손을 척 내밀었다. 그의 눈은 빨간색이었다. 살포시 눈을 접어 웃는 얼굴을 했지만 그 시선은 에잇의 파란 눈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조슈아야. 잘 부탁해.”

에잇은 천천히 그 손을 맞잡으며 생각했다. 뱀파이어 이름이 조슈아라니, 웃지도 못하겠다고.


네 명은 거실에 놓인 원형 테이블에 둘러 앉아 있었다. 당연히 테이블 위에는 아무 음식도 없었다. 준은 어색하게 냅킨을 손에 쥐고 만졌고, 조슈아는 에잇과 대화했으며, 조슈아의 동행자, 그러니까 조슈아의 애인은 자꾸만 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에는 담배가 들린 채였다. 물론 에잇에게 양해를 구하고 피고 있긴 했지만 준은 신경 쓰여 죽을 것 같았다. 테이블보 위로 자꾸만 담뱃재가 떨어졌다. 그런 사소한 것도 신경 쓰였지만 역시 눈이었다, 눈. 자기를 뚫어져라 보는 저 붉은 눈. 그가 입에서 후, 담배 연기를 뿜었다. 그 사이에서 나른하게 반쯤 감긴 눈이 저를 보고 있었다. 준은 옆을 흘끗거리다 그 눈과 마주쳐 눈을 꾹 감아 버렸다. 픽, 하고 웃는 소리가 났다.

“이름이 뭐야?”

좀 맹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준이 눈을 슬쩍 떴다. 그 남자에게서 나는 목소리였다. 준은 말할까 말까 조금 망설였다. 때마침 에잇이 준에게 시선을 던졌다. 준이 허락을 구하는 듯한 눈빛을 보냈고, 에잇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준은 다시 담배 연기 사이에 놓인 남자를 보았다.

“준, 이요.”

“준? 귀여운 이름이네.”

후, 다시 담배 연기가 뿜어졌다. 준이 한 번 마른기침을 했다. 미안. 전혀 미안해 보이지는 않는 목소리로 사과한 그는, 에잇이 내민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잠깐 묵례를 나눈 두 사람은 다시 각자의 관심사로 돌아갔다.

“준은 역시 뱀파이어 된 지 얼마 안 됐겠구나?”

“네, 뭐, 조금.”

준이 소심하게 대꾸했다. 흐응. 남자도 미적지근한 반응이었다. 이제 담배를 들고 있지 않아서인지 손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의 왼편에 있는 준을 보기 위해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왼손으로는 테이블을 검지로 톡, 톡 두드려 댔다. 준이 흥미로워 못살겠다는 얼굴이었다. 준의 얼굴을 샅샅이 훑는 그 모습을 본, 그의 맞은편에 앉은 조슈아가 끼어들었다.

“손님 집에서 그러면 안 되지.”

“아, 그치만. 여기 있는 애가 내 담배 때문에 기침하잖아. 손이 심심하다구. 네 손이 곁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관둬. 그 아이 놀리는 것도 관두고.”

“이름 밖에 안 물어봤는데.”

조슈 치사해. 조슈, 라니. 준이 그런 애칭에 소름 돋아 할 동안 조슈아는 그냥 웃어버리고 말았다. 치사하다며 덧붙여진 푸념이 무색했다. 남자는 과장되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준은 그런 남자를 빤히 보다가, 말을 붙였다.

“그, 저, 미스터는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데요?”

“아? 나?”

남자의 붉은 눈이 잠시 반짝였다. 하지만 잠시였다. 잠깐 들어갔던 힘이 쭉 빠지더니 다시 반쯤 감은 듯한 눈으로 바뀌었다.

“그러게, 뭐였을까.”

“네?”

이건 또 새로운 패턴이었다. 아니, 물론. 준이 여태까지 만나 본 뱀파이어라고는 에잇 뿐이었으니까 새로운 게 당연했지만. 에잇의 이름도 본명이 아닌 게 뻔했다. 그러니 준은 사실, 이 남자도 그럭저럭 지어낸 이름을 말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지어낸 거라도 모르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그런데 뭐였을까? 준이 남자를 보며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렇게 쳐다봐도 잊어버린 건 안 나와.”

“그, 무례한 건 아는데요, 어떻게 자기 이름을 잊어버려요?”

결국 준이 물어봤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남자도, 에잇도 조슈아도 입을 다물었다. 침묵 속에서 여섯 개의 눈이 준을 바라봤다. 준은 그 셋을 차례로 봤다. 왜요, 이런 것도 하면 안 되는 질문이에요? 혼잣말처럼 내뱉은 말에 조슈아가 후후, 웃었다. 이름을 잊어버렸다는 남자도 웃음 같은 숨을 뱉었고, 에잇은 그냥 준을 보던 시선을 거뒀다.

“준, 이랬나?”

“네.”

“너도 조만간 이해할 날이 올 거야.”

조슈아가 말했다. 뒤이어 재떨이에 괜히 손을 대던 남자도 입을 열었다.

“뭐 굳이 알고 싶다면야. 찰스, 그런 이름이었던 거 같아. 정 불러야겠다면 찰스라고 해. 준.”

찰스. 이 남자에게는 전혀 안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적당히 둘러댔을 게 분명했다. 찰스라니, 안 부르느니만 못한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계속 미스터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알겠어요 그럼, 찰스라고 부를게요.”

“응, 잘 부탁해. 그리고 말인데 역시 담배 피워도 될까? 따-악 한 개비만 더 필게.”

해사하게 웃는 얼굴로 찰스가 검지를 한 개 펴 보였다. 떨떠름하긴 해도 준에게서 그러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찰스는 고맙다며 성냥을 그었다. 에잇이 빌려준 성냥갑이었다. 나무 타는 냄새에 이어 담배에 불이 붙었다. 다시금 독한 냄새가 실내에 퍼졌다.

그때쯤 에잇은 조슈아에게 이런저런 말을 듣고 있었다. 반은 정말 육성으로 들리고 있었고 반은 에잇의 뇌리에 직접 꽂히고 있었다. 웃는 낯으로 시답잖은 얘기만을 풀어놓는 것처럼 보였지만 조슈아는 계속해서 에잇의 정신을 침범하려 했다. 다행일지 불행일지, 파편적인 단어만이 자꾸만 끼어드는 정도가 다였다. 요약하자면 조슈아와 저 남자는 돈이 필요했다. 그 정도는 아까 도시의 외곽에서 마주쳤을 때도 알 수 있었다. 악수하느라 맞잡은 손, 그리고 자신을 마주 보는 붉은 눈 덕분에 더 확실히 에잇의 뇌리에 전달된 것이리라. 돈이 필요해, 라는 조슈아의 말이.

사실 대화 속에서 에잇은 조슈아의 의중을 알고 있다는 식의 표현을 여러 번 했다. 아예 은화를 꺼내 손에서 굴려 보기도 하고, 여유가 없더라도 친구를 봤다면 도와야지, 같은 말과 재정적 어려움을 겪는다면 그냥 말로 하지, 같은 생각도 부러 해 봤다. 어차피 그에게도 전달될 테니까. 하지만 조슈아는 낯빛을 바꾸지 않았다. 예의 바른 태도도 여전했다. 에잇은 그 속내를 알 수가 없어서 답답했다.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했다면 볼일도, 에잇이 그에게 줄 도움도 진즉 끝났을 것이다. 조슈아와 저 남자는 벌써 갈 길을 마저 가고도 남았을 텐데.

“그러니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야.”

조슈아가 대뜸 말했다. 에잇은 그제야 대화다운 대화를 할 타이밍임을 직감했다. 삐딱해지던 자세를 바로잡아 앉았다.

“그 말은?”

“나랑 애인은 지금 대양을 건널 생각이야.”

그 말에 준이 관심을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찰스는 여전히 준을 관찰하고 있었다. 에잇이 미간을 좁혔다.

“대양을?”

“응. 고향으로 갈 거거든.”

또 한 번 이상한 소리. 에잇의 미간이 더욱 좁혀졌고 준이 관심을 크게 보였다.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지. 바다를 건너 내 고향으로 간다. 여러 사정이 있지만 그것까지는 말해 줄 필요가 없으니까. 안 그래?”

서글서글한 눈웃음을 보이며 조슈아는 선을 그었다. 더 이상 캐묻지 말라는 듯이. 에잇은 잠깐 생각에 빠졌다. 준은 그의 사연을 물어보고 싶어 죽겠다는, 애타는 눈빛으로 조슈아를 바라봤지만 조슈아에게서 반응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그 옆에서 찰스가 말없이 조슈아를 쳐다봤다. 오가는 말이 없었는데도 조슈아는 그를 보더니 고개를 살짝 저었다. 에잇이 입을 열었다.

“위험이 크다는 건 알지?”

“알지. 그래서 도움을 부탁하는 거야.”

“…이제는 내용을 말해 줄 건가?”

“물론이지.”

조슈아가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에잇은 이제 슬슬, 그가 빈정거린다고 느껴졌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이 생각도 읽을 거라고 생각하면 기분이 더 나빴다. 그 순간 조슈아가 눈을 더 크게 접었다. 에잇은 살짝 질려 버렸다.

“에잇 씨도 알다시피 인간들과 한 배에 탄다는 건 위험한 일이야. 잘 알겠지만 탑승자 사이에서 전염병이 돌아도 곤란해지고, 탑승자 중 하나만 사라져도 큰일이지. 누구도 자유롭게 오갈 수 없는 공간이라는 건 그런 거니까.”

“핵심은?”

“그렇게 넓고 동시에 좁은 공간에서 우리 같은 사람들은 흡혈을 참기가 힘들어 더 곤란하다는 거야.”

에잇은 이 대화의 종착점을 짐작할 수 있었다. 머리를 쓸어올리며 한숨을 쉬는 에잇을 보고 조슈아는 미소 지었다.

“이해가 빨라서 다행이네.”

“항해에 걸리는 시간은?”

“어림잡아 2주. 혹은 더 걸릴 수도.”

“거기에 돈까지 필요하다고?”

“아무래도. 많이 필요하지는 않아도 조금 쪼들리는 건 사실이라서.”

“이건 도움보다 오히려 강도에 가깝지 않나?”

“이야, 그러게. 에잇 씨가 거기 낚여 줘서 다행일 따름이지.”

빈정거림에 빈정거림이 돌아왔다. 에잇은 그제야 돈이 필요하다는 그의 생각 따위는 연막이었음을 깨달았다. 일부러 에잇의 정신에 흘린 것이었겠지. 이미 걸려든 걸 어찌할 수는 없었다. 그의 붉은 눈을 저주하며 혀를 찼다. 그런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는 에잇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준은 방금 조슈아와 에잇이 나눈 대화 속 공백을 메우지 못해 어리둥절했지만, 그 에잇의 모습을 보고 하나는 알아챌 수 있었다. 뭐든 좋은 내용은 아니겠구나. 얼핏 준과 눈을 마주친 찰스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슬쩍 집어 빼고는 ‘준은 몰라도 돼’, 라고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준이 입을 비죽이며 시선을 돌렸다. 어른들의 대화에 끼지 못하는 애가 된 기분이었다. 찰스는 그런 준을 빤히 보다 웃음을 흘렸다. 그 소리가 더 기분 나빠서, 준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출발은 언제쯤으로 생각하지?”

“여기서 가장 가까운 항구에서 출발하는 배편이 딱 3일 뒤에 하나, 있어.”

“준비는.”

“빠를수록 좋지. 가죽 주머니 같은 준비물은 우리가 알아서 챙길 테니 걱정 말고.”

“그럼 오늘 해치우지.”

“그래 준다면 이쪽이야말로 고맙지. 아, 출발하기 전까지는 여기서 잠시 신세 져도 될까?”

“간까지 빼 가지 그래.”

뼈 있는 말을 짓씹으며 에잇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이어 조슈아와 찰스도. 준도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에잇이 손을 뻗었다. 준이 동작을 멈췄다.

“넌 따라오지 마.”

에잇의 그 말에 조슈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는 게 어떨까 싶은데? 난 마음이 급해서.”

그러자 조슈아의 옆에 서 있던 찰스가 팔꿈치로 조슈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 하는 소리와 함께 다리가 휘청거리는 걸 보니 찌른 힘이 세긴 셌나 보다.

“눈치도 없냐.”

찰스가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조슈아는 제 옆구리에 손을 얹은 채로 찰스와 잠깐 눈빛 교환을 했다. 그러더니 한숨을 쉬었다.

“눈치가 없는 게 내 쪽이야?”

그런 말을 뱉더니 휑하니 나가 버렸다. 준은 여전히 대화의 흐름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무슨 눈치? 에잇에게 설명해 달라는 눈빛을 보내 봤지만 에잇은 준이 원하는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냥… 여기 있어. 나중에 설명해 줄게.”

나가는 찰스를 뒤이어, 에잇이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나중, 언제요?”

준이 그렇게 대꾸했다. 문턱을 넘기 직전 에잇의 발이 멈췄다. 슬쩍 돌아보더니, 이렇게만 말하고 나갔다.

“네가 준비됐을 때.”


찰스는 완강히 조슈아에게 일임하라고 했다. 사냥을 돕기로 한 이상 원하는 대로 해 줄 셈이었는데, 찰스는 의견을 물리지 않았다. 그냥 여기서 자기랑 수다나 떨자나. 에잇이 허락을 구하자 조슈아는 잠깐 조용히 있다가, 그러라고 했다. 가죽 주머니를 조슈아의 손에 넘겨 주면서 에잇은 이 한 쌍의 뱀파이어들에게 기묘함을 느꼈다. 어떻게 이렇게 같지만 달라 보이는 한 쌍일까. 그리고 사기 솜씨도 좋고. 고향이 어딘지는 몰라도 거기 가서도 걱정은 없겠군. 어느 인가의 옥상 난간 위에 걸터앉아, 찰스의 담배 연기 속에서 에잇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 아이 좋아하지?”

대뜸 옆에서 그런 말이 들렸다. 에잇은 앞을 바라본 채 그 말을 소화하는 데 꽤 긴 시간을 썼다. 그리고 옆을 봤다.

“뭐라고?”

“겨우 한다는 말이 뭐라고냐. 이야, 힘들겠다. 준도.”

찰스가 어이없다는 듯 실실 웃었다. 에잇이 가만히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미안, 역시 뭐라고?”

“됐어. 그 정도면.”

겨울 바람이 차게 불어왔다. 찰스는 코를 손으로 한 번 훔치더니 말을 이어 나갔다.

“조슈는 에잇 씨에게 보답 같은 걸 안 줄 셈이야.”

“배은망덕이라는 단어, 알아?”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 봐. 난 보답을 주려고 하거든.”

“뭔데?”

찰스가 후, 마지막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찰스가 옥상에 담배를 비벼 껐다.

“조심해.”

“뭐를?”

“무엇이 아니야. 누구냐는 질문이 더 알맞아.”

“누구를?”

“준을.”

에잇이 당황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준을 조심하라니. 대자를 조심하라는 말을, 대부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에잇의 시선을 한 번도 마주하지 않고 무던히 받아 넘기던 찰스가 이번엔 에잇의 눈을 똑바로 봤다. 찰스의 붉은 눈이 달빛을 받아 번득였다.

“우리처럼 될 애야. 에잇 씨라면 더 설명하지 않아도 알겠지.”

에잇이 금방 고개를 돌렸다. 그 움직임에 찰스가 헤, 웃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걱정하는 것보다 기민한 아이야. 둔하긴 한 것 같은데 그래도. 아~ 이 말을 하면 계속 온실 속의 화초로 키울 것 같아서 망설였는데. 그래도 말 안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나을 거 같아서.”

에잇은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다. 찰스는 그 침묵을 계속 말해도 된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아끼는 마음은 알겠어. 그런데 금기를 깨지 말라고 단단히 단속하면 더더욱 금기를 깨고 싶어지는 법이거든. 옛날이야기들처럼 말이야. 아, 조슈 온다.”

조슈~ 힘 빠지는 목소리로 찰스가 손을 허공에 흔들었다. 에잇이 발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슈아가 잔뜩 부풀어 오른 가죽 주머니 몇 개를 손에 들고 건너편 옥상에서 이쪽으로 넘어왔다. 눈이 좀 더 붉어진 것 같았지만, 에잇은 그 감각이 착각인 걸 알았다. 조슈아가 둘에게 더 가까워지기 전, 찰스가 에잇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애를 너무 억누르지 마. 원하는 게 있으면 들어줘. 궁금해하면 대답해 주고. 이 얘기 해 준 거, 조슈한텐 비밀이다.”

그러고는 에잇을 지나쳐 조슈아에게 다가가는 찰스를 보며 에잇은, 말없이 둘에게서 시선을 뗐다. 대신 난간 아래를 내려다봤다. 가로등 불이 어스름하게 불을 밝힌 길거리를. 그리고 그 위를 걸어 다니는 몇 사람들을. 잠깐의 텀을 두고, 에잇이 먼저 집을 향해 뛰어나가기 시작했다. 조슈아는 주머니를 에잇에게 나눠 들게 하려다가 빠르게 사라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봐야만 했다. 찰스를 돌아봤지만 찰스는 그저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 하기만 했다.


1) 대자(代子): 성세ㆍ견진 성사를 받을 때, 신친(神親) 관계를 맺은 피후견인의 남자.

2) 대부(代父): 영세나 견진 성사를 받을 때에, 신앙의 증인으로 세우는 종교상의 남자 후견인.

위 호칭 설정은 TRPG 룰인 뱀파이어: 더 마스커레이드에서 차용하였습니다. (룰북 소지 인증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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