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브님
중도하차
그 무엇보다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이를 시험하고자 직접 나선 하이델린을 넘어서고 희망을 손에 넣을 힘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라! 보이지 않는 문구가 머릿속을 떠다녔다. 희망을 증명해라! 시험을 통과해라! 증명이니 시험이니 듣기만 해도 이노테라의 머리가 지끈 아파오는 주제지만 물러날 수 없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물러날 수 없고 도망갈 수 없는 일이 늘어난 걸까?
평범한 모험가였던 이노테라는 자주 물러나고 틈만 나면 도망쳤다. 불안과 공포가 조금이라도 신호를 보내면, 꼬리와 손톱을 다 물어 뜯고. 후드를 눌러 쓰고 괜히 가면을 만졌다. 자연스럽게 어떤 무리에 속하고 있을 곳을 만드는 이들을 부러워하면서. 한 발자국 내딛기보다는 뒤로 도망치는 걸 택하면서 살았다. 내가, 스스로 살펴봐도 하자가 많은데 남이 보면 얼마나 많을까? 부정적인 감정에서 허우덕거려서 정착할 수 없었으니까.
그랬는데 정말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이노테라는 자기가 후드와 가면을 벗을 날이 올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현자가 각력만으로 하늘을 날듯이 뛰는 걸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용기사가 정령의 흐름을 느껴 교감하는 걸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정말 당연하게도 포기했는데, 도대체 언제부터.
언제부터겠어. 이노테라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창을 고쳐잡았다. 내가 여기에 있다는 실감이 든 순간부터. 앞으로도 쭉 함께 하고 싶다는 욕망이 일었을 때부터. 버티는 것 말고 다른 삶이 있다는 걸 안 순간부터.
나 여기에, 계속 있고 싶어.
욕심이 생긴 그 때부터 이노테라는 항상 강한 의지로 희망을 증명했다. 그러니까, 상대가 설령 길잡이가 된 하이델린이라고 해도. 계기 그 자체인 베네스라고 해도. 이노테라는 할 수 있었다.
아직, 여기 있고 싶으니까.
매일이 새로운 발견이고 시도였던 새벽 시절, 그러니까 돌의 집이 아니라 모래의 집에서 임무를 받고 다양한 곳에서 온 의뢰를 해결 했던 시절에도. 큰 임무가 끝나면 몸을 채찍질 한 만큼 풀어지고 놀았다. 술을 마시거나 맛있는 걸 먹고. 신기한 이야기나 좋았던 걸 끝없이 화제로 올리면서 다 같이 들뜬 상태로 하루를 보내면서 마무리를 했다. 좋은 기억으로 마무리 하면, 이 일 전체가 좋아지니까. 그걸 노리고 이러는 거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수고한 만큼 보상이 있어야 할 맛이 나니 이게 맞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고. 아직 긴장이 덜 풀려 뻣뻣한 이노테라는 수많은 의견을 들으면서 어색하게 이 분위기를 누렸다. 앞으로도 쭉 이러나? 누군가가 건넨 잔을 받고 어찌할 줄을 모르던 모험가가 이노테라였는데.
“건배!”
“건배!”
증명을 성공한 뒤에는 뭐가 기다리지? 뭐가 기다리기는! 지금은 산크레드의 신호에 맞춰서 분위기에 들뜰 줄 아는 일원이 되었다. 앞으로 할 일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으니, 술을 마시고 즐길 수는 없지만. 술이 없어도 취하고 축하할 수 있는 게 분위기 아닌가. 마더 크리스탈, 세상의 종말을 가져오는 파란 새. 미지의 곳으로 가는 향해. 남은 과제가 산더미같았지만.
- 카테고리
-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