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을 제대로 전하기 위해서

잠깐 by 션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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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밀조밀님 표지입니다

“아키라” 시절 현자의 마법사가 많은 희생을 동반해서 거대한 재액을 멸하고.

거대한 재액을 멸한 뒤, 은거한 오즈가 죽은 현자의 마법사들이 살아있는 세계선에 흘러들어간 이야기입니다.

 <마법사의 약속> 본편 완결 이후 시점으로 날조 투성이입니다.

사망 네타 주의해주세요. 죽는 장면이 적나라하게 묘사 되지 않습니다만, 죽었다는 언급은 나옵니다.

세계선은 마호야쿠 만우절 폴몬트 학원을 베이스로 하나 많은 설정이 다릅니다. 

(예시: 아서랑 카인이 동갑이고 소꿉친구)

오즈 관련 중앙 위주지만 히스클리프 시노 피가로 마사키 아키라 비중이 조금 있습니다.

정말 날조 투성이입니다. 뭐든 괜찮으신 분만! 

이하 샘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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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 나이트레이에겐 남에게 말하지 못하는 고민이 있다.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면 눈을 깜박인 건지, 조명이 깜박인 건지 구분 되지 않는 순간이 불현 듯이 찾아왔다. 나도 모르는 사이 세상이 아주 잠깐 동안 어두워졌다 밝아지는 그런 순간이. 시험 기간이 가깝거나 새 영상을 올리고 싶은데, 마땅한 곡조가 떠오르지 않아서 한참 머리를 싸매거나. 운동장에서 오래 햇볕을 쬐고 있으면…. 그런 평범한 일상 속에서 훅 찾아온다.

시야가 온통 새까맣게 물드는 것도 아니고 정말 아주 잠깐, 의식하지 않으면 모를 만큼 짧게 꺼졌다 켜지니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런 현상이 잦아져도 순식간에 해결되니 별로 문제 삼지 않았다. 이런 걸로 병원에 갈 만큼 병원이 친숙한 장소가 아니기도 했고.

그래서 문제가 커졌나? 가볍게 여기면 안 됐나?

긴 시간 햇볕을 쬐고 나면. 새 영상을 올리고 싶은데 마땅한 게 떠오르지 않아 몸이 근질근질 해지면. 시험 기간이 가까워지면. 하교 시간이 되면, 등교 시간이 되면. 뭐 하나 이렇다 할 조건도 없이 카인의 시야가 일그러졌다. 앞에 있는 창문 유리가 휘거나. 직선이 완만한 곡선으로 보이거나 하는 그런 일그러짐이 아니라…….

쓸데없는 부분만 자른 사진 같아. 여기, 초점 이상하네. 누가 나왔네. 다양한 이유로 일부분만 가공한 사진처럼 시야가 왜곡됐다.

카드가 인식 되는 소리. 차례대로 열리는 문. 통행을 알리는 신호는 보이는데. 개찰구에서 카드를 찍고 나오는 사람은 보이지 않아. 책을 넘기는 소리. 작게 장난치는 소리. 불규칙 적으로 볼펜을 딸깍 거리는 소리는 들리는데 정작 볼펜을 들고 있는 사람도. 거슬리지 않게 수다를 떨고 있는 앞자리 친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정신 차리면 사람만 잘린 풍경만이 보인다. 이런 병도 있는 건가? 이런 건, 어디서 검사를 받아야 하지? 가서 뭐라고 말해야 하나. 눈이 안 좋아요. 잘 안 보여요. 다른 건 다 잘 보이는데 사람만 안 보여요. 이런 증상도 있나요? 있을까? 그런 게 정말 있을까?

이런 증상을 가진 병이 있는지 모르지만 고민해서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도움을 받을 때지. 작은 머리로 열심히 굴려 봤자 해결 되는 건 없으니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요즘 눈이 안 좋아서. 침침한 건 아닌데……. 막 눈이 뻑뻑하거나 이물감 들지는 않고요? 그다지. 그런 건 없었어요. 턱 대세요. 쭉 대셔야해요. 카인은 영문 모른 채로 까만 상자 속에 보이는 열기구를 바라봤다가 그러다 눈 감지 마세요. 경고문과 함께 강한 바람을 맞았다.

이러면 뭘 알아낼 수 있는 거지. 정해진 공식을 넣으면 풀리는 문제처럼. 전혀 상관없는 코드처럼 보이지만 이으면 매끄러운 곡조가 되는 것처럼. 무슨 연관이 있어 하는 검사겠지? 머리론 아는데 열기구는 그렇다 쳐도 바람은 왜 쏘는지 모르겠어서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아까까지 친절하게 검사하던 의사는 보이지 않는데. 바로 옆에 있는 시트지에 글자가 적히는 소리가 났다. 큰 이상은 없어 보이시는데. 요즘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시나요? 자는 시간이 늦거나, 아님 뭐 새로운 일을 시작했거나 그러시나요? 펜이 공중에 떠올랐다.

마법처럼 느껴지는 이 낯설고 익숙한 광경을 보고 카인은 애써 웃었다. 아뇨 근데 조금 피곤한 거, 같아. 어떤 병이라도 반드시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분 원인을 알 수 없으면 피로와 스트레스가 원인으로 붙는다. 이번에도 그랬다. 피로와 스트레스 때문에 생긴 일시적인 현상일 수 있으니 잘 먹고 잘 쉬고 잘 지내세요. 혹시 모르니 인공 눈물 처방해드리겠습니다.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난 처방전을 보고 카인은 잠깐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마법이 풀린 것처럼 새하얀 가운과 함께 검사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 인공 눈물은 하루에 네 번 이상 넣으시면 안 됩니다. 아, 정말 스트레스가 심해서 이러는 건가? 잘 될 거라고 생각하면 되나? 뭐든 마음먹기 마련이고? 그런 건가?

병원에 가면 다 될 줄 알았는데. 다 되지 않아도 무슨 실마리라도 잡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더 미궁에 빠질 줄은 몰랐어. 곤란한데. 갑자기 사람이 없어졌다가 어느 순간 다시 나타난다고, 아까도 그랬다고 털어놓고 얘기 했어야 했나?

하지만 검사는 다 받았고 이젠 보이는데. 문제가 없으니까 저쪽에서도 문제가 없다고 한 걸 텐데. 다시 검사해달라고 요구해봤자 추가 되는 건 영수증에 찍힌 금액이지. 이 기묘한 시야를 해결 할 단서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아니라 거의 확신이다. 검사 안내를 받을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보였던 사람이 검사 도중 없어졌으니까. 그럼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하지. 처방 받은 안약을 넣다보니 자연스럽게 해결 되면 좋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스트레스의 일부인가? 이거 생각보다 쉽지 않네. 스트레스 관리 어렵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아까도 처방 받으니까. 일단 보였잖아?

뭐 아예 안 보이는 것도 아니고. 병원에서 눈에 무슨 문제는 없다잖아. 조금 지나면 다시 괜찮아지겠지. 없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병원 처방전을 근거로 삼고. 카인은 일단 이 일을 묻어두기로 했다.

알약은 삼키면 되고. 물약도 마시면 되고. 연고는 바르는 거지? 살면서 약을 바르면서 고생한 적이 없었는데. 안약은 넣는데 한참 걸렸다. 그냥 뚝 하면 딱 될 줄 알았는데. 검사용 바람에도 감기는 눈이 약이라 해도 물인데 안 감길 리가. 잠수하면서 눈을 뜨는 요령과는 또 달라서, 생각보다 잘 되지 않았다. 흘린 양이 넣은 양보다 많은 거 같지만. 뭐 넣었으면 됐지. 이미 흡수 된 수분이 보일 리 없지만, 왠지 모르게 보일 듯 해 카인은 세면대 위에서 눈을 살폈다. 화장실 조명 탓인지 눈동자가 유독 새빨갛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바닐라만 사면 시동이 멈추는데. 이 회사의 자동차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싫어하나요?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싫어하는 자동차 사건처럼. 어떤 엉뚱한 사건이라도 연속되면 해결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듯이. 느닷없이 시야에서 사람만 잘리는 이 현상도 반복되다 보니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해결의 실마리로 봐도 좋을지는 아직 모르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것 보단 낫지.

시야에서 사람만 잘리기 직전, 카인의 눈동자는 새빨갛게 타들어간다. 아침 햇살처럼 청량한 색이 이상과 함께 저무는 노을이 된다. 왜?

왜 그런 걸까? 사람만 보이지 않는 현상 자체가 비상식적이라 이유를 생각하기 어려웠다. 색깔이 타는 것처럼, 눈 자체에도 타들어가는 통증이 함께 하면 또 모를까. 카인의 눈동자는 아무런 전조도 없이 붉게 변했다 원래대로 돌아오다 보니 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눈동자 색이 갑자기 달라질 수 있는 건가? 그것도 항상 그런 것도 아니고. 아주 잠깐 동안만, 이상이 생겼을 때만 잠깐 반짝이고 다시 돌아오고? 처음 병원에 갔을 때 들은 이상이 없다는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아른거렸다. 이상 없는 게 맞나. 이게.

내 눈에 문제가 없다면 이런 현상이 자연스럽다는 거야? 속으로 한 번 질문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분명한 이상 상황인데. 어떻게 대처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질 않았다. 아직 학생이다 보니 지식도 돈도 쓸 시간조차 모자라, 감을 잡으려고 해도 잡을 만한 게 없었다. 시간이 많으면 고민이라도 많이 하고. 지식이 많으면 어떻게든 좁혀서 조사하고. 돈이 많았으면 돈으로 해결했을 텐데.

항상 변하는 것도 아니고 어쩌다가 한 번, 전조도 없이 변하는 걸 가린다고 컬러 렌즈를 사는 건 좀 그래서. 붉게 변하는 눈을 가리기 위해 한 쪽 앞머리를 내렸다. 그렇게 바뀐 머리가지고 뭐라 하는 애들도 없었고. 무슨 일 있었어? 물어보면 기분 전환이니 뭐라니. 그냥 해본 건데 이상해? 그러면 다들 그러려니 하고 지나갔다.

처음 간 병원보다 더 큰 곳으로 가야하나. 작은 데 말고. 접수하면 진료 할 때까지 몇 시간은 걸리는 그런 데.

변하는 눈 색은 앞머리로 가릴 수 있어도 보이지 않는 현상은 불편했다. 아니지 불편하다기보다는…….

무서웠다. 카인은 인정하기로 했다.

무서워.

아까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 친구가 안 보여. 개찰구를 넘어가는 소리. 이동하는 발소리. 기기가 작동하는 소리는 들리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는 풍경은 스산했다. 수업하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울리고 칠판엔 글씨가 적히는데. 반 안에는 나만 앉아 있는 광경이란. 나를 부르는 소리만 들리고, 그 상대는 보이지 않는 복도라는 게 참. 차암…….

몇 번 불렀는데 왜 이제 돌아봐. 귀 먹었어? 장난스럽게 웃는 친구한테 제대로 웃으며 답했는지. 수업 내용을 제대로 필기하고 들었는지. 지하철역에서 혼자 새파랗게 질리진 않았는지. 아까까지만 해도 당연하게 누리고 산 세계였는데. 순식간에 이방인이 된 기분은 썩 좋은 게 아니었다. 아니,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야. 무서워.

큰 병원에 가도 해결 되는 게 없다면? 거기서도 시력엔 문제없다고. 별 이상 없으니 스트레스랑 피로를 조심하라고만 한다면?

그러면 어쩌지? 덜컥 떠오른 생각에 카인이 뒷걸음질 하자,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정갈한 목소리가 귀에 닿자마자 뒤를 돌아봤지만 여전히 형체를 확인할 수가 없다. 이 목소리는 분명 친구인 아서인데. 정말 저기에 아서가 있는 걸까.

“카인, 괜찮아?”

괜찮아.

아니, 반사적으로 올라온 대답을 삼켰다. 친구인 아서에게 걱정 끼치고 싶지 않지만. 괜찮다고 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제대로 마주보고 있나? 지금 제대로 뒤 돌아 본 거지? 생각이 자꾸 무서운 쪽으로 끌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어 카인은 심호흡을 한 번 내쉬었다. 진정하자. 진정해. 지금 내 상태는 정상이 아니야. 이건 눈도 있지만, 그 외의 것도 영향을 주고 있어.

그러면 이런 상태를 숨기는 건 좋은 일이 아니야. 다른 사람과 상의하고, 함께 해결하는 게 맞아. 말도 안 되는 이상, 상식이 통하지 않는 현상을 경험하면 평범한 사고가 묶여, 몸도 생각도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다른 이와 뭉칠 수 없도록. 해결하게 두지 않겠다는 듯이.

카인은 입 안에서 여러 번 말을 고르고 조심스럽게 도움을 청했다.

“…별로 안 괜찮아. 아서. 도와줄래?”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면, 당연하지.”

흔쾌히 받아들인 아서는 잠자코 카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카인은 어물쩍 거리거나 뜸을 들이지 않고 정확하게 자신의 상태를 설명했다. 정확한 진단을 받기 위해 의사한테 말한 설명과는 달랐다. 그때보다 더 친근하고 조잡했으니까.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해졌어. 이거 보여? 색이 이상하지? 카인은 앞머리를 넘겨 빨갛게 변한 눈을 아서에게 내밀었다.

분명 짝짝이 눈인데. 노을과 아침 햇살을 닮은 색이 섞여서 그런가. 불균형한데도 기묘한 안정감이 있었다. 원래부터 짝이었다는 마냥, 색이 다른 눈동자는 카인에게 잘 어울렸다. 밝고 뜨거운 정오의 햇살과 한 꺼풀 열기가 물러난 노을이 참 근사해서. 아서는 카인이 사정을 말해주지 않았다면 신곡에 맞춰서 새 시도를 했구나! 잘 어울려. 하지만 카인, 컬러 렌즈는 교칙으로 금지되어 있어. 학교에선 빼는 게 좋을 거야. 아무렇지 않게 받아 들였을 거 같았다.

“내가 안 보인댔지, 어떻게 안 보이는 거야?”

“기다려봐, 사진 한 장 괜찮지?”

“응.”

휴대폰을 꺼낸 카인은 주저 없이 바로 한 장 찍더니 초점이 흔들린 사진을 가공했다.

“나는 안 보이는데 사진은 보여?”

“어 이건 보이더라. 아서도 잘 보여. 이상하지? 눈에 있는 렌즈를 뭐라 하더라? 병원에서 교체할 수 있으면 교체하고 싶어.”

“눈에 있는 렌즈……, 각막이 비슷할텐데, 각막은 바꿀 수 없어.”

“아서 눈에 대해서 잘 아네.”

“생물 선생님이 자주 퀴즈를 내셔. 이번에는 신체 구조였어.”

“정말? 우리도 곧 보려나.”

사소한 잡담을 하면서 카인은 멀쩡한 사진을 보이는 대로 조립했다.

“이렇게 안 보이는 거야? 책상도 의자도 다 보이는데. 사람만?”

“응. 아서 나, 제대로 너 보고 있지?”

“카인은 제대로…… 가끔 더 아래를 보거나, 좀 더 위를 보긴 해도 일단 날 보고 있어.”

“제대로 못 보네.”

“제대로 보고 있어. 전체적인 시선은 맞잖아.”

그게 뭐야, 카인이 대답하기도 전에 어깨에 무언가가 가볍게 올라왔다. 단추까지 잘 잠근 교복을 확인하고 나서 고개를 더 들자 코앞까지 다가온 아서와 시선이 맞았다.

“생각보다 위에 있구나. 아서.”

“날 너무 어린 아이로 보네.”

다음에 또 그러면 삐질 거야. 하하, 온화한 웃음이 퍼져 서로 살포시 웃었다. 카인의 머리색과 비슷했던 왼쪽 눈동자도 어느새 원래 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래서, 이런 상황이야. 이렇게 갑자기 돌아와. 그리고 또 없어져. 병원에 가야 할 거 같은데 좋은 곳 알아?”

말하고 나서야 카인만큼 아서도 건강한 청소년이라서. 여태까지 살면서 아파서 빠지거나 중간에 조퇴한 적이 없다는 걸 생각해냈다. 알고 있는 병원이 있을까. 뭐, 없어도 괜찮지만. 아서한테 도와달라고 하니 그 다음은 더 쉽게 느껴졌다. 다른 친구들한테도 이렇게 물어보고 찾아보고. 그래도 안 되면 선생님이나 부모님께 말씀 드리면 되는 거지. 근처에 갈 수 있는 병원이란 병원은 다 모조리 가보고. 모조리는 힘들겠지만 추려서 몇 군데 정도는 더 갈 수 있을 거 같았다.

“…좋은, 곳…….”

“일단 아무 병원이나 가볼까? 전에 가본 데 말고. 다른데.”

좋은 곳이라…. 턱을 괴고 잠깐 생각에 잠긴 아서에게 그렇게 묻자. 아서는 한 박자 늦게 고개를 저었다. 같은 병원에 가는 게 더 낫나? 전에 했을 때 안 나왔으니까. 다시 가면 여러 가지 검사를 해서 그때 잡지 못한 걸 잡아줄지도 모르니까? 하긴 그렇겠다. 새로운 병원을 가면 또 기초 검사만 하고 올지도. 카인이 혼자 속으로 자문자답하는 사이 아서는 뭔가를 결심한 모양인지 주먹을 쥐었다.

“카인.”

아서가 카인을 비장하게 불러서, 카인은 아서의 말에 진중하게 귀를 기울였다.

“언제부터 그랬다고 했지?”

“이제 한 달쯤 됐나?”

“한 달…… 한 달이면, 기네.”

“그런가?”

“그럼 분명…….”

대화하고 있지만, 대화하는 게 아니네. 생각에 빠진 아서를 보고 카인은 작게 웃으면서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

“좋은 곳이라면 알아. 하지만 병원은 아니야.”

“그럼 어디야? 의원? 안경원?”

“…이 현상과 관련된 조언을 들을 수 있는 분을 알아.”

허락을 받는 게 가장 좋겠지만. 벌써 한 달이나 지났잖아. 아서는 아주 조금 뜸을 들이고 카인에게 물었다.

“오늘 시간 있어?”

“내가 도와달라고 했잖아, 당연히 있지.”

호쾌한 대답이 돌아오자 아서도 같이 웃었다.

“그래서 누군데? 나도 아는 사람이야?”

“카인한텐 처음으로 소개……, 아니다 오즈님을 다른 사람한테 소개하는 건 처음이야.”

“오즈?”

“응. 갑작스럽게 방문해서 정말 놀라시겠지만, 언제든지 와도 좋다고 하셨으니까 괜찮을 거야.”

가방 안 쪽에서 아서는 휴대폰이 아니라 한 손에 꽉 들어오는 책을 꺼내더니 멋들어지게 잡았다.

“이런 식으로 소개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카인, 들어봐. 오즈님은 내 은사님이시고.”

어릴 적부터 아서는 어른들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자랐다. 카인도 마찬가지로 어른들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자랐지만. 동네 어르신들이 카인을 신경 쓰는 것과 친척인 드라몬드가 아서를 신경 쓰는 건 범위가 다른 거 같았다. 어른의 사랑과 관심으로 지켜보고 있긴 한데. 카인과 아서를 향한 사랑은 같아도 관심은 종류가 달랐다. 나중에 좀 크고 나서야 그 차이를 표현할 단어를 알았지. 카인에게 드라몬드는 친근한 이웃이고 아서에게 드라몬드는 은사에 가까웠다.

아서가 소개해주겠다는,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도 은사라고 했으니 ‘오즈’도 드라몬드와 비슷할까. 덩치에 비해서 걱정이 많고. 예의를 까다롭게 보지만 다가가면 친근한 사람이고. 괜찮을 때는 항상 한 수 물러나주는데. 안 될 때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대하고 잔소리가 많은 그런 사람? 카인 머릿속에서 ‘오즈’란 단어가 상상으로 부풀어, 어떤 이미지로 형상화되기 바로 전에 아서가 책을 폈다.

“마법사시니까. 이번 일을 도와주실 수 있을 거야.”

카인은 이 이상을 마법 같다고 여겼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불가사의한 현상이니까. 그 이야기를 듣고 문제를 직접 본 아서가 이 상황을 마법이라 여기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겠지.

하지만 카인과 아서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카인에게 있어 마법이라는 건 불가사의한 현상이고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일이다.

그런데 아서에게 있어서 마법이라는 건 조금 특이하지만 평범한 일상 중 하나라서.

“파르녹턴 닉스지오!”

노래 가사처럼 들리기도 하고. 책의 제목 같기도 한 단어가 방 안에서 울리자 아서가 들고 있는 책이 빛나더니 문이 되었다.

아서는 충분한 설명 없이 카인한테 마법을 보여주고 말았다.

있는 힘껏 달리던 소년이 속도를 늦추지 않고 그대로 벽돌로 막힌 벽을 통과하고 지나가는 걸 지켜본 사람처럼. 카인은 바로 앞에 나타난 문을 보자마자 다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문고리에 손을 댔다. 촘촘하게 쌓인 벽돌이 정말 단단한지, 무슨 장치가 되어 있는 건 아닌지 살피듯이 문을 열어볼 것도 아닌데 쥐어보고 떼고. 노크하듯이 가볍게 두드리려다가 멈췄다. 노크하면 안쪽에서 반응이 오겠지.

“여기에 그 오즈란 사람이 살아?”

아. 카인이 답지 않게 당황한 반응을 보이자 그제야 알아차렸는지 아서는 쑥스럽게 웃었다. 모든 일에는 다 순서가 있고 적절한 시기가 있는데. 시기도 순서도 고려하지 않고 일단 저질렀다.

“카인한테 오즈님을 소개할 수 있어서… 나도 참 들떴나봐.”

아서에게 카인은 소중한 친구고 오즈님은 소중한 은사였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소중한 사람을 소개하는 건, 소중한 사람한테 좋아하는 사람을 알려주는 건 왜 이렇게 마음을 들뜨게 하는 걸까. 아서는 잠깐 들뜬 마음을 진정 시키는 시간을 가졌다.

“이 문은 오즈님이 살고 계시는 성과 이어지는 문이야.”

“성?”

“응. 엄청 커다랗고 밤하늘이 예쁜 성이야. 항상 눈이 내리는데 춥지 않아. 신기하지? 나중에 기회가 되면 성 안도 안내할게. …아차, 오즈님은 말이야.”

어렸을 때 우연히 만난 마법사셔.

아서가 마법사와 마술사를 착각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카인은 허공에 나타난 문을 바라보고, 조금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불현 듯이 시야에서 사람만 사라지는 불가사의한 현상, 친구가 만났다고 하는 마법사. 비현실적인 상황을 이미 알고 있는데 거기서 하나 더 늘어난 게 큰일일까? 그건 아니지. 혼란은 금방 사그라졌다.

듣자하니 카인과 만나기도 전에 오즈를 만난 모양이다. 너무 어렸을 적이라 어떻게 만나게 된 건지는 모르지만. 정신 차리니 오즈의 성에 있었고 성주인 오즈의 도움으로 무사히 귀가했다. 이게 한 번의 만남이면 단순한 사건으로 끝났을 텐데. 어린 아서는 그 이후로도 종종 오즈의 성에 들어온 미아가 되었고, 오즈는 자기 성에 들어온 미아를 보호했다. 그런 부정기적인 만남을 이어가다 보니 특별한 인연이 생겼다

나는 항상 여기에 있으니 도움이 필요하면 찾아와라. 제 집처럼 찾아오는 이웃 아이에게 열쇠를 쥐어주듯, 오즈의 성으로 아서가 자주 흘러들어오자 오즈는 책을 한 권 건넸다. 겉보기에는 평범하지만 알려준 주문을 외우면 성으로 이어지는 문이 되는 책을.

그리고 아서는 오즈 말대로 필요한 순간마다 주문을 외웠다. 과자를 선물 받았는데 양이 너무 많아요 같이 먹어요. 왜 계절은 바뀌는 걸까요? 무슨 규칙이 있는 걸까요? 궁금해요. 사소하고 다양하지만 꼭 필요한 이유를 가지고 찾아왔다. 오즈는 그런 아서를 내보내지 않았다.

제대로, 어디에 간다고 이야기를 하고 온 건가?

나를…… 누군가에게 이야기 했나?

다른 사람이 걱정하니 반드시 언질을 두라는 충고와 자신에 대한 건 비밀로 해달라는 듯한 모순적인 질문을 하고. 아서가 잠깐 다녀온다고 말 했으니 걱정 마세요! 오즈님이라고는 말하지 않았어요. 저희는 친밀한 비밀… 친구, 제자 사이잖아요! 만족스러운 대답을 하면 아이를 반겼다. 다들 한 번쯤은 남한테 말할 수 없지만 소중한 비밀 친구가 생기긴 하지. 상상 속에만 존재하기도 하고. 아끼던 인형의 모습을 하기도 하고. 어릴 적에 산 검이 되기도 하고. 마당에서 키운 오렌지 나무가 되기도 하는 그런 비밀 친구. 아서의 비밀친구는 마법사인 오즈였다.

그렇게 오즈와 지내면서 아서는 자연스럽게 마법에 대해 배웠다. 정확한 작동 원리나 그에 따라 오는 이치나 순리에 대한 건 모르지만. 마법이라고 하는 상식과 과학으로는 설명 되지 않는 현상이 실존한다는 걸 학습했다.

그래서 카인의 상황을 알게 된 순간 가장 먼저 가능성이 떠올랐다. 카인은 지금 마법에 걸린 게 아닐까?

“나한테 소개해줘도 되는 사람이야?”

아서의 설명을 들은 카인은 품은 의문을 바로 보였다. 비밀로 해달라고 했다면서? 이야기 속 오즈는 아서한테 호의적이지만, 타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내보이는 걸 꺼려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질문을 들은 아서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스태프 전용 문을 열고만 어린아이처럼.

“……전부터 오즈님을 소개하고 싶었어. 정말 대단하시고 상냥한 마법사신걸. 하지만 그걸 원치 않으셔서. 자기와 연관된 걸 알려봤자 좋은 일이 없을 거라고. 항상 말하지 말라고 하셔서…. 건방지고 예의 없다는 거 알아. 하지만 카인한테 오즈님을 소개할 수 있고. 카인이 가진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몰라. 이렇게 좋은 기회는, 카인은 힘들어하는데 기회라고 해서 미안해. 하지만 이런 기회는 더 없을지도 모르니까.”

제멋대로 행동했으니 실망하실 지도 모르고. 화를 내실지도 모르지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와도 된다고 하셨고. 장난감을 가지고 싶어서 진열대에서 멋대로 들고 나오는 어린아이처럼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아서를 보고 카인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아서가 어리광을 부리네.

“아서가 그렇게 까지 말하다니 기대되네. 그렇게 좋은 사람이야?”

“내가 아는 한, 세계 최고의 마법사셔.”

자랑스럽게 장담했으면서, 문고리를 돌리지 못하는 아서 옆에 카인이 섰다. 아서는 항상 늠름하고 멋진 친구인데. 어리광을 부리는 걸 봐서 그런가. 혼날까봐 무서워하는 동생처럼 느껴져서 저절로 입이 열렸다.

“그 오즈가 화를 내면 사과하자. 사과하고 제대로 사정을 얘기하면 이해해줄 거야. 내 일 때문에 가는 거니까 나도 도와줄게. 너무 걱정 하지 마. 무슨 일 있겠어?”

무슨 일이 있어도 진심으로 사과하고 얘기하면 괜찮을 거야. 카인의 진솔한 태도가 닿아 아서는 금방 제 모습을 되찾았다. 응 분명 그러실 거야. 아서는 힘차게 문을 열었다.

영화 속에서만 볼 법한 웅장한 성이 오로라를 등지고 서있었다. 굵은 싸라기눈인지 얇은 눈보라인지 구분이 안 되는 애매한 눈 줄기가 내리는데 아서의 말대로 춥지 않았다. 쌓인 눈을 밟아도 무게에 따라 발자국 모양으로 푹 들어가지 않고 일정 깊이만큼만 들어갔다가 굳는 게 참.

자랑은 아니지만 카인도 아서도 어른들의 속을 꽤 썩인 장난꾸러기였다. 천진난만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아이 둘이 함께 돌아다녔으니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는 훤하지. 드라몬드는 이러다간 제 명에 못 살겠다고 자주 뒷목을 붙잡았다. 그래서 웬만한 안전용품은 경험해 알고 있는데. 이 눈길의 감촉은 보호용 쿠션 위였다.

눈이 이렇게 쌓였는데 얼어 있는 곳 없이 균등하게 쿠션처럼 깔려있고. 뛰다 넘어지기 좋은 경사면도 침대 시트처럼 푹신하다. 오로라를 비롯한 모든 풍경이 설경인데 입김조차 나오지 않다니, 거기다 적당하게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따뜻한 온기가 올라와 발을 디딘 곳이 마법사의 성 안이라는 걸 실감했다.

하지만 여기가 마법사의 성이라도. 마법사 오즈는 드라몬드랑 비슷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어깨에서 긴장이 풀렸다. 마법사의 성인데도 신비로움 다음으로 찾아오는 건 어린아이를 대하는 배려, 어른들의 마음이니. 자꾸만 친숙함이 생겨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카인은 아서의 뒤를 따라갈 수 있었다.

“오즈님 아서입니다. 급한 용건이 있어 부득이하게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안에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

“네. 오늘은 혼자가 아닙니다. 제 친구가 지금 기이한 상황에 처해 지혜를 빌리고 싶어요.”

중심으로 들어가도록 자연스럽게 유도되는 복도를 지나서 열리지 않는 문에 도착하자. 아서는 그 문을 두드리지 않고 가까이 다가가더니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대답도 목소리도 건너편에서 돌아오지 않는데도. 틈새 사이에서 흐르는 침묵이 모종의 신호란 생각이 들었다.

듣고 있으니까 사정을 얘기해라고. 무슨 일이 있는지 들려달라고.

카인은 옷을 단정하게 다듬고 아서 옆에 섰다.

“소개 받은 아서의 친구 카인 나이트레이야. 얼마 전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서 너한테 도움을 구하고 싶어.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 도와주지 않을래? 오즈.”

이번에는 침묵 대신 여태까지 받은 안내처럼 당연하다는 듯이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이건 무슨 신호일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카인은 아서를 확인했다.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진 게 맞는지 아서의 표정이 유달리 밝았다.

이 안에 오즈가 있는 건가. 드라몬드와 비슷한 아서의 은사님 오즈가. 위대한 마법사인 오즈가. 동화책에서나 볼 법한 마법사…… 정확히는 요정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린 뒤, 드라몬드적인 요소를 곁들어 이미지를 완성한 카인은 눈앞에 나타난 실물을 보고 놀랐다.

오즈는 겨울바람과도 같았다. 뼛속 깊이 스며드는 한기를 두르고 있는 마법사였다.

“……저주 받았군.”

“내가?”

“그래 저주받았다.”

흔한 자기소개나 인사말 없이 오즈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저주 받았다. 저주 받은 거구나. 이름 없이 떠돌아다니던 현상이 익숙한 개념으로 변하니 불길한 징조라고 해도 한결 편해져서. 카인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역시 원인을 모르는 것보다는 뭐라도 아는 게 나아. 아서는 그 이야기를 듣고 역시 그렇군요, 가볍게 맞장구 친 뒤에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오즈를 보고 있었다.

어? 카인은 오늘 처음 만났으니 오즈에 대한 건 잘 모르지만 아서는 어린 시절부터 잘 알았다. “역시 그렇군요.” 담담한 반응 하나로 끝날 아서가 아닌데. “저주라니 어떤 저주인가요?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없나요? 도대체 누가 카인한테 그런 짓을 한 건가요? 해결할 방법이 있나요?”수없이 물음표를 던져야했다.

비행기 탈 때 비행기가 뜨는 원리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아도 되고.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데 작동 원리를 하나부터 열까지 알 필요도 없지만. 아서는 전부를 알고 싶어 했다. 전부가 아니라면 일부라도 듣고 싶어 했다. 지식과 의견 사이에 벽이 있다면 그 벽을 허물 방법을 고민하며 찾는 적극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오즈와의 대화에서는 그런 적극성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거리를 두고 있다. 어차피 이해하지 못할 테니 전적으로 전문가에게 맡기는 걸까.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아서는, 아서라면 일단 물어볼텐데. 카인이 더 의아해하기 전에 오즈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마도.

“…너를, 타인과 동일시하고 있다.”

“나를 타인과…? 그, 인형에 이름 적고 못 박는 그런 거야?”

“매개는 인형이 아닌 혼이다. 너와 비슷한 성질을 가진 영혼과 널 동일시하고 있군.”

영혼이 비슷하다는 건 무슨 소리지. 성격 유형 테스트처럼 영혼 유형 테스트가 따로 있는 게 아닐 텐데. 영혼이라는 게 형태를 가지고 있으면 색이나 모양을 보고 분류 할 수 있겠지만. 색도 모양도 확인할 수 없는 영역이다 보니 카인은 오즈의 설명을 듣고도 아리송했다. 무슨 기준으로 분류하는 건가요? 그건 무슨 소리인가요? 옆에서 아서가 몇 마디 거들어야 하는데. 그 아서도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낯선 한편… 아 그래서인가? 떠오른 게 있다.

마법과 저주 영혼의 성질이니 혼의 형태니. 그런 곳에 흥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카인은 흥얼거린 몇 마디를 다듬어 그럴싸한 곡으로 바꾸는 게 더 즐거워서 여기에 집중하고 싶듯이. 아서도 지금은 학교생활이 즐거워서 상식 바깥에 있는 지식보다는 현실에 더 비중을 두기로 한 게 아닐까.

“소용없는 짓이지. 타인은 네가 될 수 없고 너도 그 자가 되지 못해. 영혼의 화합도 조화도 되지 않을 거다. 그런데도…….”

더 이어질 줄 알았는데. 오즈는 그대로 입을 닫았다.

“그럼 가만히 두면 없어진다는 거야? 그럼 다행인데. 이거 꽤 불편하거든. 당장 없앨 순 없어?”

“……카인 나이트레이.”

“응?”

“지금부터 부정해라. 얘기할…….”

뭘? 자세한 걸 묻기 위해 입을 연 순간, 느닷없이 카메라 셔터를 누른 것도 아닌데 시야가 하얗게 점멸되더니, 눈을 몇 번 깜박이자 교실로 돌아왔다. 당황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카인과 달리 아서는 돌아온 걸 확인하고는 아! 크게 소리를 냈다.

“시간이 벌써 다 됐구나.”

시간? 카인이 무심코 되묻자 아서는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게 어렸을 적에 내가 하도…… 오즈님 성에서 나갈 생각을 안 해서 시간제한을 두셨거든. 일정 시간이 되면 이렇게 돌아와. 벌써 시간이 지날 줄 몰랐어…….”

아하하. 아하하하! 진실을 알게 된 카인은 크게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아서의 뺨이 불만으로 불룩하게 부풀어 올라도, 카인 너무 웃어. 카인. 삐진 목소리로 말을 걸어도 조절 할 수 없는 웃음이 터졌다. 왠지 아서가 유독 얌전하더라! 오즈에게 느낀 겨울 한기도 웃음과 함께 싹 날아갔다. 드라몬드랑 똑같네.

어린 카인이 빨갛고 멋있다는 이유로 소방차가 되고 싶다고 하자마자 카인 너는! 말렸던 드라몬드랑, 오즈의 성에서 나가지 않는 어린 아서를 강제 귀가 시킨 오즈랑 뭐가 다르지?

어릴 시절 한 번쯤 꾸게 되는 허무맹랑함을 똑같이 잡아주는데. 나도 빨간데 왜 소방차가 될 수 없냐고 진지하게 따지고 물은 어린 카인처럼. 저도 오즈님처럼 마법사가 되고 싶어요. 저는 마법을 배울 수 없나요? 주문을 가질 수 없나요? 아서도 진지하게 묻고 다녔겠지. 카인이 소방차가 될 수 없던 것처럼 아서도 마법사가 될 수 없었나보다.

오즈가 이런 강경 수단을 내세운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카인도 고집이 강해서 주변 어른들이 고생했지만 아서만큼은 아니니까. 아서가 이런 생각을 하면 더 삐지겠지만 사실인 걸 어떡해. 카인은 상황에 따라서 굽히기라도 하는데. 아서는 일단 직진하고 보는 성향이 있다. 고등학생인데도 이 강제 수단이 없어지지 않은 건, 여전히 너는 어린 아이다. 그런 시선에서 지켜봐서 그런 걸까.

아니면 아서가 마법사의 꿈을 버리지 못해서 그런 걸까. 벽을 허물지 않고 일정 거리에서 지켜보고 있던 아서를 돌이켜보면 답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불만으로 올라오는 뺨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전에 카인은 웃음을 뒤로 밀어냈다.

“미안해 미안해. 그럼 오즈의 성으로 더 못 가?”

“오늘은 닫혔지만. 내일은 열리니까 갈 수 있어. …카인, 괜찮겠어?”

“나? 나야 뭐 괜찮지. 심각한 거면 몰라도. 심각했으면 진지하게 봐줬을 거 같은데. 이렇게 돌아왔고. 오즈도 소용없다니 뭐라니 그랬잖아. 아니면 오즈는 어떤 상황이라도 규칙은 규칙이고 약속은 약속이라면서 깐깐하게 구는 사람이야?”

“그러네…. 오즈님은 약속은 중요하게 여기시지만, 그런 깐깐한 분은 아니셔.”

“그럼 심각한 건 아닌가보네. 내일 또 가보자. 시간 언제가 좋아? 방과후?”

“그때 괜찮아.”

“그럼 방과 후에……, 아서 네 집에서?”

또 갑자기 사라졌다 나타날지도 모르니까. 더 놀리면 삐지겠지. 아침부터 아니 그 전부터 카인을 갉아먹던 조바심과 공포는 없어진지 오래였다. 다른 사람한테 상담하면서 무게를 나누고. 영문을 모르던 현상의 이름을 알았다. 해결 방법까지는 모르겠지만 – 지금부터 부정하라니 무슨 소리지? - 실마리는 잡았다. 다 해결 된 건 아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갉아 먹히던 때와 비교하면 한결 개운해졌다. 고칠 수 있을 거 같기도 하고. 여유를 되찾은 카인이 주위를 한 번 두리번거리고 웃자 뜻을 알아차린 아서가 멋쩍게 웃었다.

소개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들떠 아서가 카인에게 마법을 보여준 곳은 교실이고. 시간제한을 잊어버려 돌아오게 된 곳도 교실이었다. 오늘은 운이 좋아 둘밖에 없지만 내일도 그럴지는 모르니까.

“응. 우리 집에서 보자.”

영문을 알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이 누군가가 건 저주라는 것도 알앗고. 아서가 보증하는 최강의 마법사와도 만났고 다음 약속까지 잡았지. 일이 잘 풀려도 너무 잘 풀리다보니 카인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정도면 됐지. 한시름 놨다고 의자에서 일어나기 무섭게, 역시 안무는 다른 게 좋아. 파트 배분 다시 해줘. 히스가 좀 더 독보이게 바꿔줘. 시노가 찾아와 수정 사항을 들이미는 일이 흔하듯이 순풍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사건이 찾아온다는 걸 잊었다. 이럴 때 제일 조심해야하는데.

카인은 가로등 아래에 서있는 새빨간 그림자를 확인하고 잠깐 고개를 돌렸다. 시간이 늦어,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지만……. 앞머리를 정리하는 척 하면서 왼쪽 눈을 어루만진다. 눈가가 조금 뜨겁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안다. 새빨개졌을 거야.

이 눈이 새빨개지면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가로등 아래에 있는 인영은 뚜렷이 보인다. 이런 상태에서 확실하게 보이는 상대라면 가능성은 두 가지. 하나, 사람이 아니거나. 둘, 오웬이거나.

사람이 아니거나, 그 다음은 뭐지?

카인은 불쑥 든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스스로 떠올린 건데 이질감이 들었다. 아 그게 뭐더라, 할 일 있어서 휴대폰을 켰는데 뭔지 생각이 안 나서 의미 없이 자판을 두드리거나. 아 그게 뭐였지. 생각 안 나는 개념을 궁리하며 시험지를 봤을 때랑은 느낌이 다르다. 생경한 감각에 당황하고 있으니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중……의, 카인 나이트레이.”

카인은 교복에 붙은 명찰을 가리려다가 멈췄다. 저 거리에서 이 작은 게 보이나? 지금보다 달이 열 배쯤 더 커서 태양처럼 빛난다면 또 모르지만. 달빛을 의지하며 읽기엔 너무 작았다.

“우리, 전에 만난 적 있어? 미안한데 여기선 잘 안 보이거든.”

나는 모르지만 나를 알고 있는 낯선 누군가를 만났을 때 어떻게 대처할지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카인은 똑바로 응하는 편이었다. 정말 아는 사람일 수도 있고, 모르는 사람이라도 부딪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게 더 많으니까. 저쪽에서 내 이름을 안다면, 나도 저 사람의 이름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어?

“……기사.”

“기사? 미안한데 사람 잘못 본 거 같아.”

가사라면 쓰지만 기사는 써본 적 없거든. 넉살 좋게 웃으며 카인은 뒤로 물러나 거리를 확보한 뒤에, 상대를 응시했다. 깔끔하고 화려한 인상인데…… 어딘가 이질적이다. 혈색이 도는 뺨도 우아하고 고상한 분위기도 배우처럼 멋있지만 왠지 이상했다.

앞뒤를 바꿔 입은 티셔츠. 두 번째에 넣어야 했는데 세 번째 자리에 넣은 단추. 신어보면 어딘가 넓고 좁아서 내 신발이 아니게 되는 걸 알게 되는 실내화처럼. 아.

오즈와 비슷해. 만나서 짧게 말 나눈 게 다인데. 마법사인 오즈와 이 사람은 비슷한데 어딘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즈가 겨울바람이면 이 사람은 변덕스러운 봄바람과 닮았다. 과묵하고 신중해 보이는 오즈와 달리 가볍고 스스럼없는 태도로 다가오지만 닮았어. 거기까지 생각하니 저절로 카인의 입이 열렸다.

“폴몬트 고등학교 2학년 카인 나이트레이야. 일단 뮤지션을 목표로 하고 있어.”

“폴…몬트.”

“알아? 영광 거리에 있는 고등학교야. 일반 고등학교인데 예체능을 굉장히 우대해주거든. 거길 다니고 있어. 무슨 중…… 출신은 아니야.”

아 이거, 2번인가 3번인가. 고민하고 있으면 불현 듯이 머리에 번개가 쳐서 2번이구나. 감이 팍 오듯이 이번에도 카인에게 감이 왔다. 지금부터 부정해라. 오즈의 말대로 상대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정체는 중요하지 않고 지금부터 부정해야한다는 감이 확하고 꽂혔다.

“자작곡을 불러서 투고하기도 하고. 요즘엔 친구 부탁을 받아서, 걔네들 노래나 방향성을 잡는 경우가 많아. 소소하게 화제가 됐다고 하니까, 너도 알지도 모르겠네. 레몬파이… 아니다, 싸워서 이름 바꿨던가? 시노랑 히스클리프 둘이 하는 아이돌 그룹이 있어. 혹시 알아?”

“시노랑 히스클리프…….”

“그래. 그러니까 난 음악이면 모를까 기사랑은 상관이 없어. 연예부 기자한테 언젠가 취재 받고 싶지만.”

이러면 되나? 감대로 했는데. 막상 내뱉고 나니 이게 맞는지 아리송해 카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는?”

“뭐?”

“아서 ……자는.”

“아서…?”

카인의 말을 잠자코 듣던 상대가 부채로 입을 가리는 시늉을 하더니 그리 물었다.

“마법사인 아서 왕자님은 구하러 가지 않아도 돼?”

너는, 그의 기사잖아. 왼쪽 눈동자가 뜨겁게 달궈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서를 알아?

카인이 되묻기도 전에 맑은 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그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여 하늘을 우러른즉 빛이 없자 하느님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으니. 성경 문구처럼 낮은 목소리가 들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번개가 내리쳐, 바로 앞까지 다가온 인영을 강타했다. 나무 타는 냄새와 뒤늦게 울린 소리에 놀랄 틈도 없이 한기가 느껴져 카인이 뒤를 돌아보자, 기다란 지팡이를 든 남자가 서있었다.

“카인 나이트레이.”

처음, 은 아니지만. 오래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닌데. 신기하게도 오즈가 왔다는 사실에 안심한 카인은 어깨에 들어간 힘을 풀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고. 소개해준 사람이 다름 아닌 아서니까. 안심하게 되나. 영문 모를 것과 조우해 당황하고 있는데. 딱 맞춰 상식에서 벗어난 마법사가 왔으니까 안심하게 된 걸까?

“고등학교 2학년이면 몇 살이지?”

“어……?”

“……고등학교 2학년이면 지금 몇 살인거지?”

상황이 카인을 기다리지 않고 끌고 가려고 하니 어느 쪽인지 깊게 고민하는 건 관두고. 페이스를 유지하기 위해, 평소처럼 차근차근 닥쳐온 일을 해결하기로 했다.

“어… 열, 일곱?”

“아서와 동갑이군.”

“그렇지?”

“현재 동갑인 건가?”

“그렇지?”

“어째서?”

“……어째서?”

같은 반 친구와 왜 동갑이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하지? 아서와 동갑인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진 적 없냐는 태도로 묻는 오즈가 당황스러웠다. 보통 학년이 같으면 나이도 같지?

“아. 아서가 삼월 생이니까 나보다 동생이라면 동생이긴 한데….”

이게 오즈가 바란 대답이 아니란 것쯤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무예에 손을 댄 적은.”

“무예?”

“무력을 배운 적 있나? 검술이나 체술 같은 것을.”

“검도는 어릴 때 좀 했는데… 체술? 가끔 운동부 도와주러 가. 권유도 자주 받긴 해. 근데 지금은 집중하고 싶은 게 있어서.”

“집중하고 싶은 것이라면?”

“음악. 나중에 들어볼래?”

오즈는 대답 없이 물끄러미 카인을 바라봤다. 카인은 그 의중을 생각하려다가, 찾아온 침묵을 틈 타 상황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오즈를 소개 받고 아서랑 다음 약속을 잡고 집에 가는데. 집 근처 사거리 가로등 아래에서 이상한 것을 목격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눈이 이상하게 변한 것과 그 이상한 것이 연관되어 있다는 감이 와서. 사람을 잘못 보셨어요. 대응하다보니…… 번개와 함께 오즈가 나타났지.

상황은 대충 그렇지? 가로등 아래에 있다 다가온 그것은 사람의 형태를 한 인형 같았다. 오즈가 번개로 내리치자 나무 타는 냄새와 함께 사라졌다. 그 전에, 뭐라고 했더라.

마법사인 아서 왕자님은 구하러 가지 않아도 돼? 너는 그의…….

“너의 이름은.”

“응?”

“…네, 이름은.”

“카인 나이트레이. 폴몬트 고등학교 2학년이고 아서의 친구야.”

이제 내가 질문해도 돼? 방금 있던 건 뭐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마법사인 아서 왕자님은 구하러 가지 않아도 되냐는 소리를 했어. 무슨 소리인지 알아? 넌 마법사잖아. 아까. 그거랑 있었을 때 눈이 뜨거워졌는데 뭐 아는 거 있어? 카인은 반사적으로 쏟아질 뻔한 질문을 삼켰다.

오즈는 대화하는 속도가 느리니까. 질문을 많이 하면 사람 말을 듣지 않고, 멍하게 서있는 것처럼 보여요. 그렇지? 오즈는 리케 말대로 대화하는 속도가 다른 사람에 비해서 느리니까. 그래도 제대로 이야기는 듣고 있고. 적절하게 알맞은 반응을 해줘. 사람마다 템포가 다르니까. 기다리면 돼. 분명 오늘 처음 만났는데, 카인은 오즈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감이 아닌 경험으로 확실한 지식이 있다.

“아서는 여기 없는 건가?”

“없어. 먼저 돌아갔어.”

오늘 밤은 나와 너 둘 뿐이야. 아서는 오지 않아. 확실하게 못 박자 오즈의 입이 느리게 열렸다.

“……아까는 아서가 있어서 얘기하지 못했다만.”

아서가 있어서 말을 못했다니, 그럼 그 갑작스러운 이탈은 마법에 흥미를 가질까봐 아서를 내보내는 자동 귀가 시스템이 아니라. 오즈가 직접 눌러버린 수동 귀가 시스템이라는 건가? 무슨 원리야? 마법이야? 카인은 여기에 대해서도 더 묻고 싶었지만 얌전히 오즈를 기다렸다.

“카인 나이트레이. 옆에 앉아도…… 아니지, 오늘 시간 있나?”

“무슨 시간?”

“나의 모든 걸 알 시간.”

“있어.”

계절과 맞지 않은 찬바람이 카인의 뺨을 스쳐지나갔다.

 1

절대적인 건 없어. 세상은 언제나 변하니까! 상식도 지식도 기준도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달라져. 모든 생물은 주변을 관찰하면서 차이를 알고 모르는 것에 이름을 붙이고. 그러면서 절대적인 걸 상대적으로 바꾸거든. 그 점이 재밌고 사랑스러워. 장난스럽게 세계의 진리를 말한 무르 하트의 말대로 이 세상엔 절대적인 게 없었다.

마법과학이 오즈를 이길 날이 올까요? 이 세상에 나보다 위인 건 없다. 존재하지 않아. 호기심으로 싹튼 질문에 대한 대답도 언젠가는 부정 되겠지. 마법사가 마음으로 마법을 쓰듯이, 인간은 마음으로 시대를 뛰어넘는 무언가를 남기기로 한 거니까. 마법사는 일개 개인이고 마법 과학은 무수한 마음이 모인 단체니 언젠가는 반드시 그런 날이 온다. 마법사의 막이 내리는 때가 온다.

그리고 그 때는 오즈가 죽은 이후겠지. 본인은 넌더리가 나겠지만. 오즈는 마법사의 대표이자 상징이었다. 누구도 손 댈 수 없는 세계 최강의 마법사. 운명도 숙명조차 비튼 존재. 살아있는 것 중에서 가장 신에 가까운 생물이니까!

그렇기에 수천 년 동안 자리를 지킨 거대한 재액이 그 힘을 잃고 평범한 위성으로 전락했을 때도 사람들은 수긍할 수 있었다. 다른 이들이 거대한 재액을 토벌했다하면, 사실이라도 믿기지 않는 허풍이 되어 온 세상을 떠돌아다녔을 테지만. 오즈가 있는 현자의 마법사가 거대한 재액을 토벌했다 하니 사람들은 그들의 업적을 영웅담으로 받아들였다.

그럴 당위성이 있는 마법사였다. 그런데도 그 당위성을 납득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을까봐, 세계가 필연성을 더 넣기로 한 건지. 아니면 거대한 재액이라는 위대한 것이 사라지니, 균형을 맞춰 그만큼 마법사의 목숨을 가져가기로 한 건지. 몇몇 현자의 마법사들은 거대한 재액을 맞다 순직했다. 적당한 희생과 막대한 존재 덕분에 현자의 마법사의 공적은 빠짐없이 역사에 남을 수 있었다.

뭐가 떨어지고 무슨 일이 벌어질까. 벼락? 폭우? 눈보라? 그 모든 게 숨 돌릴 틈도 없이 빠르게 밀려올지도 모르니 다른 마법사라면 망설였을 아서의 돌을, 현자는 발견하자마자 바로 오즈를 찾아 건넸다. 상실을 알게 된 오즈가 어떤 후폭풍을 만들 게 될지는 무섭지 않았다. 이 상실을 알지 못하는 게 더 걱정됐다.

어리고 무모한 장난꾸러기 같다가도 어른스럽고. 여러 의미로 심장을 철렁이고 들썩이게 만들었던 왕자님이 한 손에 들리는 무게가 된 걸 현자인 자신도 믿을 수가 없는데. 오즈는 얼마나 더 그럴까.

전 현자는 재액과 싸우던 도중 갑작스럽게 원래 세계로 돌아갔다는데. 그럼 나는 얼마나 더 있을 수 있을까? 조급해하며 현자는 달렸다. 한 마법사의 돌인데도 몹시 작고 가벼워, 달리는 속도가 빨라졌다. 평생 본 보석 중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났지만. 도저히 사람 한 명이 들어갔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영혼의 무게는 이십일 그램이라 하던데, 아서의 영혼은 그보다 더 가벼운 거 같아. 마법사는 인간보다 영혼의 무게가 덜 나가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애써 다리를 움직인 현자는 오즈에게 아서의 돌을 건네고 역할을 다했다는 듯이 사라졌다.

그렇게 재액이 추락한 자리에 아서의 죽음을 든 오즈가 남았다.

혼란을 수습하고 돌아다니던 피가로는 그 모습을 발견하고 찰나에 많은 생각을 했다. 현자의 마법사 중에서 제일 먼저 오즈를 발견했지만 이미 그 손에 아서의 죽음이 들려있으니 늦었다. 거대한 재액이 추락한 자리에 새로운 재액이 부상하려고 하고 있으니 원.

오즈의 슬픔으로 기어코 세상은 멸망하고 마는가? 오즈와 내가 세계를 정복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쌍둥이 선생님도 비슷한 걸 생각했을까. 오즈가 기어코 세상을 멸망시키고 마는가? 생각했겠네. 그리고 이것도 또한 운명이고 숙명이라고 받아들였겠지.

세계 정복을 막은 수단은 쓸 수 없고. 오즈를 이길 상대도 없는데 어쩌면 좋을까. 피가로는 머리를 굴렸다. 오웬은 지금 싸울만한 상태가 아니었고 미스라는 루틸과 미틸을 보고 있으니까. 합류가 늦어. 재액이 영혼에 남긴 상처는 평범한 달 아래에서도 유효할까. 그러지 않으면 위험한데. 하루 이틀 정도의 짧은 이상 현상은 버틸 수 있다. 아마 한두 달 정도 되는 중단기적인 이상도 괜찮을 거야. 더 길어지면 안 돼. 위험하지. 적응할 기후가 아닐 테니까.

우선 처음에 뭐가 발생하는지 볼까. 혹독한 북쪽에서도 사람은 살아갈 수 있으니 눈이 내리면 좋겠네. 물론 많이 죽겠지만. 폭우와 함께 벼락이 내리친다면 손쓰기 어려웠다. 혹한기는 경험해 본 적 있으니 대처할 수 있을 거야. 아마도, 확실하진 않지만.

피가로가 오기 전에 던져진, 운명을 건 동전이 내려오는 걸 확인하기 위해 그는 오즈 곁으로 다가갔다. 반드시 앞면이나 뒷면, 어느 한 쪽으로 기울 동전이고. 세상의 존명이 걸린 사랑의 코인 토스였다.

서로 없이는 못 살던 쌍둥이가 그렇게 싸워 죽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설마 그 오즈가 그런 싸움에 감정이 흔들려 세계 정복을 멈추게 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돌이켜보면 항상 그랬다.

“……오즈.”

오즈는 역시나 기어코는 엇나가지만 설마는 잘 이뤘다. 키워서 돌로 만들겠다고 한 아이도 잘 키웠고. 현자의 마법사를 대신한다는 운명도 받았고 거대한 재액을 추락 시키는 것도 성공했으니까.

설마 오즈가 평범하게 슬퍼하겠어? 처음으로 상실을 알게 된 오즈는 남들처럼 평범하게 슬퍼하고 울었다. 우렁찬 번개 소리도, 땅을 떠내려 보낼 폭우도 동반하지 않았다. 오즈의 감정을 세계가 따라잡지 못한 걸까. 거대한 재액이 없어진 것과 동시에, 세상과 흐름에 변화가 생겨서 영향을 받지 않게 된 걸까.

“울지 마.”

미틸이 넘어지면 바로 달려가 괜찮냐고 묻는 루틸처럼 피가로는 처음으로 생각을 거치지 않고 오즈에게 손을 뻗었다. 울지 마 오즈. 고생 많았어. 수고했어. 등을 두어 번 두드리자, 세상에 나온 어린아이처럼 오즈는 울음을 토했다.

세상과 개인을 저울에 달면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어떤 결과가 나와도 좀 더 흥미롭고 가슴이 설레는 쪽을 택하겠다 하는 사람이 있으면, 둘 다 저울에서 내릴 방법을 찾아보는 사람도 있을 테고. 주저 없이 이 세계를 고르기도 하겠지. 사람마다 성향에 따라서 답이 갈리지만 나라마다 대부분 답이 같았다. 특히 북쪽은 누구나 할 것 없이 통하는 구석이 있어 답이 비슷했다.

내일 세계가 멸망한다 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고, 한 명이라도 더 많이 구하는 마법사가 있다면. 내일 세계가 멸망한다고 해도 가지고 싶은 걸 탐하면서 자신의 욕구를 우선시 하는 마법사가 있어야 균형이 맞겠지. 균형을 맞추는 무거운 추가 북쪽 나라의 마법사였다. 세계가 멸망해도 살아남아 자신의 것을 취하는 성미가 있으니까.

피가로 가르시아는 그런 북쪽 태생이지만, 세상과 개인이 저울에 올라가면 세상을 택하는 마법사였다. 뭐 한 번은 개인의 편을 들기는 했지만. 그게 잘 되지 않고 나서는 쭉 세상을 택했다.

누가 저울에 올라가도 그게 자기 자신이 되어도 변하지 않는 선택이다. 행복하길 바라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사랑스러운 아이들도 세계의 위협이 된다면 그 위협이 되기 전에 자기 손으로 자를 수 있었다. 다수를 위해서라면 소수의 희생은 어쩔 수 없는 거야. 자기 입에 넣을 과일을 마을을 위해 나누는 걸 보고 자랐다. 한 개인보다 절대적인 무언가를 위해서, 좀 더 가치가 있는 선택을 하며 살았다.

그러다보니 절대적인 아가페가 아닌 다른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다. 후일을 고려하지 않았지. 더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게 될 거야. 그런 게 어떻게 사랑이 될 수 있지. 혼자였다면 계속 그렇게 부정하면서 지냈을 테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피가로는 항상 누군가가 있었다. 절대적인 신도 어느 한 마법사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에서 성가신 쌍둥이에게 주워지고. 그보다 더 골치 아픈 형제 제자가 들어오고. 제자를 들이게 되고. 오래 알아온 지인이 결혼한다고 연락을 하고. 상상도 못한 사건의 중심과 외곽에 서있으면서 피가로는 많은 걸 배웠다.

사랑으로 보이지 않았는데 사랑일지도 몰라. 사랑이라고 여겼는데 아무것도 아닐지도 몰라. 아는 게 많아질수록 이해할 수 없는 게 점점 늘어나고 자신이 없어졌다. 현명하게 잘 처신했다고 생각했는데 날 선 반응이 돌아오고. 최선을 다하고 싶은데 그 마음을 전할 수가 없고. 행복해지기 위해선 불행을 피하는 게 맞는데 이렇게 피해도 되는 게 맞는지 확신할 수가 없다. 남의 입장은 하나부터 열까지 나열할 수 있는데 스스로의 입장은 알 수가 없어.

수천 년을 살았는데도 제대로 일어서는 법 하나를 모른다는 걸 깨닫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제대로 일어서기 위해서는 크게 넘어지고, 아랑곳하지 않고 일어서면 되는데. 그럼 반듯하게 다닐 수 있는데. 확실하게 입 밖에 내던져 형태를 가지는 게 무서웠던 말을 하고.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보이고. 이러쿵저러쿵 하면 되는 건데. 그게 뭐가 어렵다고 넘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는지. 넘어지지 않았다고 고집을 부렸는지.

피가로는 울고 있는 오즈를 가볍게 살펴보고 손을 쥐었다 폈다. 아직 사랑에 대한 건 잘 모르겠지만. 세상도 벅차 따라오지 못하는 오즈의 감정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그걸 보고 느끼는 이 감정 또한 어떤 형태의 사랑일지도 모른다는 것도. 이제는 알 수 있었다.

피가로 가르시아는 북쪽 태생이지만 지금은 남쪽 마법사고 현자의 마법사였다. 그런 그에게 세상과 개인을 저울에 달면 어떤 선택을 할 거냐고 질문한다면. 세상이 멸망할지도 모르는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있는 것이 우리니까. 세상을 택할 테지만…. 이게 세상과 개인까지 가야하는 안건인가? 아니지? 따지자면 다수와 개인을 다는 건데.

구조만 따지자면 마법 생물이 인간보다 마법사에 가까운데 마법 생물이 아닌 인간의 편을 들기로 한 것처럼. 원래부터 이랬던 건지, 아니면 살면서 변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피가로 가르시아는 팔이 안으로 굽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걱정 마 오즈. 아서의 돌은 네 거야.”

귀엽고 사랑하는 형제 제자의 편을 들기로 했다.

중앙 나라는 거대한 재액과 싸우다 순직한 왕자님의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아서 그랑벨의 마나석은 오즈가 가져갔으니까.

마땅한 분배지? 아서는 오즈 네 것이잖아. 돌이 되면 먹기로 했잖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태도로 피가로는 아서의 돌을 중앙 나라가 아닌 오즈에게 건넸다.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받을 유해가 아니라는 걸 오즈도 잘 알았다.

아서 그랑벨은 버려졌어도 중앙에서 다시 찾으러 온 왕자 아닌가. 왕위는 국왕의 동생이 잇는다고 해도 해결해야하는 문제가 있을 텐데. 왕가에 그의 돌을 두지 않으면 따라올 추문과 가십 거리가 있을 텐데.

아서 본인은 원하지 않지만 그의 삶도 죽음도 수많은 이야기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살아있는 아서와 오즈와 연관되어도 달라붙는 게 많은데. 죽은 아서를 오즈가 가져간다면 얼마나 큰 소란이 일어날지 누구라도 금방 상상할 수 있었다.

나라에 버림받은 왕자님이 마왕에게 세뇌 되어 돌아왔다. 폐부를 찌르는 추위를 잊지 않고 원한을 갚으러 온 게 틀림없다. 왕자님은 아직 어리시잖아 모든 건 마왕 오즈가 꾸린 계략이다. 아서님은 중앙 나라를 통째로 삼키려고 한 마왕의 계략을 알고서…….

같은 현자의 마법사로서 거대한 재액과 싸우다 생긴 일이니 규모는 작겠지만. 분명 마음대로 꾸며내겠지.

그런 이야기가 없더라도, 마나석마저 없다면 상실을 어떻게 이겨낸단 말인가?

아서는 호기심이 왕성하고 개구쟁이라 정말 손이 많이 가 힘들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걸 알면서도 일단 시도 해보려고 하니까. 그렇게 서두를 떼면 그래서 간담이 얼마나 서늘했는지 모른다면서, 심장이 몇 번이나 떨어질 뻔 했다면서 맞장구를 친 드라몬드를 떠올렸다. 드라몬드 뿐만 아니라… 그 아이는 제 아이가 맞으니, 넘겨줄 수 없다고 정신을 차린 이 나라의 왕비도 그렇고. 아서 그랑벨은 등에 진 수많은 역할처럼 수많은 이에게 사랑받았다.

그 아이를 사랑한 이들은 어떻게 상실을 이겨낸단 말인가? 타버린 재조차 사랑스럽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먹겠다고 키운 아이의 돌인데도. 상실을 이기지 못했는데도 오즈는 잠시 망설였다.

여기에 두게? 괜찮겠어? 네가 변덕을 부려서 먹겠다고 키운 아이잖아. 아서의 돌을 왕가에 보관하기엔 관리가 까다로워. 치렛타는 내가 도와줄 수 있었지만 이건 좀 벅차. 오즈의 변덕은 비밀로 둘 수 없다. 알음알음 바람을 타고 전 세계를 떠돌아다닐게 분명했다. 그랑벨 왕성에는 엄중하게 보호 받고 있는 마법사 왕자의 마나석이 잠들어있다고.

그 소문을 듣고 노리는 마법사가 과연 없을까? 피가로가 수호 마법을 걸어도 오즈가 수호 마법을 걸어도 문제가 된다. 어려울수록 뜨겁게 타오르고 위험할수록 흥분하는 녀석들은 마법사, 인간 가릴 것 없이 많으니 손을 써도 쓰지 않아도 문제다. 분명 왕가에 둔 아서는 분쟁의 씨앗이 되겠지.

그런 걸 아서가 바랄까? 바라지 않을 일투성이야. 그 아이가 원하는 미래는 오지 않아. 아서가 살아있으면 온 세상의 부당함을 인정하고 좋은 방향으로 개선하려고 노력했을 테지만. 죽은 자는 그럴 수 없으니까. 남은 사람을 위해서 멋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가 죽었다고 하면 그 증거를 가져와달라고 하는데, 마나석을 들이밀어도 인간은 그 가치를 실감하지 못해. 마법사가 죽으면 시체 대신 마나석이 남는데. 인간은 그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피가로는 그 부분을 과거에도 파고 든 적이 있다. 그러니까 산 채로 잡아야해. 죽이면 안 돼. 광장에 돌을 효수해도 이해하지 못할 거야. 이번에도 그 부분을 이용하기로 했다. 세상을 사랑한 왕자님이라고 해도 마법사니까 똑같을 테지.

“마법사가 아닌 인간도 시체가 안 남을 때가 있어. 이따금 그런 일이 생기더라. 자주는 아니지만 좀 봤지. 행방불명으로 몇 년 동안 돌아오지 않거나, 한순간에 훅하고 날아가 버리거나. 찾을 수 없는 곳에 묻히거나. 뭐 다양한데. 그런 상황에서도 장례는 해. 할 수 있어. 죽은 이가 평소에 사랑했던 것들을 담아서, 떠나보내는 이를 생각할 수 있을 물건을 가지고 애도할 수 있어.”

그러니까 괜찮아. 그렇게 하자 오즈. 지금 네가 답지 않게 그럴 걱정 할 때야? 피가로는 오즈를 달래면서 마법사 왕자님은 그의 기사와 함께 거대한 재액에 맞서 용맹하게 싸웠고. 거대한 재액을 물리친 기적을 일으킨 대가로 한 줄기의 빛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포장하는 편이 역사에 아름답게 남을 걸. 떠오른 생각을 삼켰다.

“스노우님과 화이트님도 도와주신다고 했어. 그리고 솔직히… 지금 할 게 많거든? 현자님도 중간에 떠났고. 거대한 재액을 물리친 건 좋은데, 여러모로 일이 많아. 나도 언제까지 뒷바라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레녹스도 있고 파우스트도 있고. 샤일록도 있으니까 아마 괜찮을 거야.”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날씨인데도 피가로는 여전히 오즈가 울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평범한 마법사처럼.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사람처럼 마나석을 쥔 손에서 나오는 떨림이 모두 오즈의 눈물이니까.

“그러니까 괜한 오기 부리지 말고 푹 쉬어. 네 성으로 갈 순 있겠어? 내가 데려다줄까?”

일부러 가볍고 장난스럽게 윙크하자, 투정을 부리는 어린아이처럼 오즈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성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피가로.”

“왜?”

“……아무것도 아니야.”

“이럴 때는 고맙습니다. 라고 말하는 거야 오즈.”

오즈가 질린다는 듯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피가로를 쳐다보는 바람에. 피가로는 언제 또 만날 수 있을지 모르니까. 본심을 꺼내려던 피가로는 본심 대신 나 참 귀엽지 않다니까. 손은 많이 가는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피가로는 무디고 둔한만큼 원래대로 돌아올 때까지 굉장한 시간이 필요한 게 오즈라는 걸 알게 됐다. 쌍둥이 선생님이 그러고 나서, 긴 시간이 필요했듯이. 아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데도 긴 시간이 필요하겠지.

그 시간이 얼마나 길어질지는 알 수 없었다. 자, 이것 보렴 나도 화이트도 있단다! 자자 스노우도 나도 있단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 이제 원래대로지! 쌍둥이 선생님과 달리 아서는 정말 돌이 되었다. 처음으로 겪게 된 진짜 상실은 오즈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을 요구할까.

그 시간이 끝나고도 피가로는 이렇게 있어줄 수 있을까. 성으로 갈 준비를 하는 오즈를 향해 손을 흔들면서 피가로는 속으로 가늠했다. 안 되겠지. 상실을 애도로 채우고 돌아온 오즈에게 새 상실이 기다리고 있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아무렇지 않을지도 몰라. 한 번 이겨냈으니 두 번은 어렵지 않을지도 모르고. 상대도 다르니까. 진눈깨비조차 내리지 않은 화창한 날씨가 계속 되면 좀…… 아니, 아주 많이 그렇지만. 저렇게 슬퍼하는 오즈에게 더 얹어주고 싶지도 않았고.

나 곧 죽을 거야. 마법사는 죽을 시기를 알 수 있다더니 정말 그렇더라. 주문을 외워도 마법진을 그려도 나에게 정령이 반응하지 않았어. 힘을 빌려주지 않는 게 아니야. 나를 아예 무시를 해. 사실대로 이야기해서 나올 오즈의 반응을 피가로는 보고 싶지 않았다.

거대한 재액이 떨어져도 결국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오즈는 축하하지 못했다. 가증스러운 재액이 없어진 세계가 어떤 방식으로 나아가고 변하는지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오즈는 형제 제자의 애정 어린 배려를 통해, 돌이 되어도 여전히 사랑스러운 아이의 흔적을 쥐고 자신의 성으로 돌아가 그대로 자취를 감췄다.

세계 정복을 그만 둔 이후에도 세상은 부지런히 굴러가 혼란 사이에서 질서를 되찾았으니. 거대한 재액이 떨어져도 운명을 바꾸지 못한 마법사 하나가 자취를 감춘다고 해서, 세상에 커다란 이변이 찾아오지는 않았다. 세상은 새로 만들어진 혼란 사이에서 또다시 질서를 되찾기 위해 바쁘게 굴러갔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언제나 그랬듯이. 그 사실이 살아가는 이들에겐 아주 작은 위안이었다.

 

2

“이번엔 어디로 들어온 거지?”

“비밀 통로가 있어요. 동쪽에 있는 세 번째 창문을 네 번 두드리면 저절로 열리거든요.”

“내 성은 그렇게 녹록치 않아.”

“맞아요. 비밀통로는 없는데 세 번째 창문이 헐거운 건 사실이니까. 교체하는 게 좋을 걸요. 다른 곳에 비해서 유독 거기만 헐거워요.”

“…그래서 넌 어디로 들어온 거지.”

“정문으로 들어왔어요. 제가 온 것도 모르다니, 막 일어난 거죠? 제 눈은 숨길 수 없습니다.”

세계를 요동치게 만들 힘이 있으면서 그 누구보다 세상에 무관심하다보니, 오즈가 세계 정복을 그만둔 이후에도 세계는 바쁘게 돌아갔지만 그 과정을 오즈는 잘 알지 못했다. 이따금 스노우와 화이트 피가로가 소식을 들고 오는 것 말고는 거의 알지 못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랬다. 거대한 재액을 물리칠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재액이 평범한 항성으로 바뀐 뒤의 세상을 오즈는 잘 알지 못했다. 정기적으로 기분 내키는 대로 찾아오는 마법사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다였다.

스노우와 화이트, 피가로 그리고 리케에게.

리케는 교단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소중하다면서 따듯한 밥도 안 주는 곳에 돌려보낼 순 없어. 교단이 좋은 곳으로 느껴지질 않아요. 안 가면 안 되나요? 그런 이유로 돌아가지 않은 게 아니라 세상의 혼란을 바로 잡느라 바빴다.

현자의 마법사가 거대한 재액과 싸운다는 건 거의 모두가 알고 있다. 이 세계의 상식이니까. 그렇게 재액을 보내고 나면 올해 온 피해를 정리하고 새 현자님을 맞이한다. 현자의 마법사 중에서 결원이 생기면 새로 온 현자의 힘으로 새 현자의 마법사를 부르고. 어느 정도 수복과 정돈이 끝나면 퍼레이드와 함께 서임식을 연다.

돌연 거대한 재액이 강한 힘을 얻어 현자의 마법사가 절반이나 죽은 저번 싸움도 불안과 걱정으로 어지러웠지만. 어떻게든 바로 잡고 예년대로 퍼레이드도 서임식도 할 수 있었다. 그에 비해서 올해는….

작년과 엇비슷한 피해를 남기고 끝이 보이지 않던 싸움이 끝났는데 동화처럼 “그렇게 행복하게 다들 잘 살았답니다.”로 깔끔하게 마무리 되지 않았다. 거대한 재액을 물리치는 것보다 힘든 뒷수습이 기다리고 있었다. 리케는 그 뒷수습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불안해하는 이들을 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외면할 순 없어요. 혼돈으로 가득한 세상을 빛으로 이끄는 게 저희, 마법사의 역할이잖아요. 꿋꿋하게 얼굴을 비추고 수습을 도왔다.

오즈는 만나러 가지 않았다. 문장을 지우고 현자의 마법사를 관두고 싶다고 했을 때 역할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한 사람도. 숙명은 바꿀 수 없다고 한 사람도 오즈인데. 현자의 마법사가 마땅히 해야 하는 책무를 버리고 틀어박힌 걸 용서할 수 없었으니까. 그렇게 혼자 남은 중앙의 마법사로서 소임을 다 하다 보니 점점 무서워졌다.

세상은 더 올바른 길로 가면 된다. 불안해하는 이들은 그들이 안심할 수 있는 길로 인도하면 된다. 다양한 사람과 의견을 나누다 보면 어떤 것이라도 답이 나오는데. 자기 자신에 대한 건 그렇지 않았다.

문장을 지우고 교단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찾아왔는데. 이제는 소임을 다 하고 교단으로 돌아가도 되는지를 고민하고 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간 현자님을 비롯해서 정말 많은 사람들이, 리케가 원하는 대로 하면 된다고 했지만. 리케는 선뜻 정할 수가 없었다. 이상하다. 원하는 대로 하면 된다는 게 가장 쉽고 편한 말일 텐데.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네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하라는 의견을 들으면 어려워서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교단으로 돌아가는 게 좋아, 어떤 곳이라도 일단 거기가 네 고향 같은 곳이니까. 누가 긍정해줘도 기분이 이상해졌고. 좋은 곳 아니니까 가지 말라고 누가 부정해도 기분이 이상해졌다. 점점 현자의 마법사가 필요 없는 때가 다가오는데 명확한 답을 내릴 수가 없어 초조해졌다.

다들 끝나면 뭘 한건가요? 물어보면 정해진 계획이 있다. 폭풍의 계곡으로 돌아갈 거야. 이번에는 좀 오래 쉬고 싶으니까 한참 안 나올지도 모르겠어.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오도록 해. 다시 가게를 열어야겠죠. 앞으로 바빠지겠어요. 거대한 재액이 없어진 날을 기념하고 싶은 분들도, 애도하고 싶은 분들도 정말 많을 테니까요. 답은 사람마다 사정마다 다르지만 이어지는 물음은 비슷했다. 리케는 교단으로 돌아가? 너는 돌아갈 건가? 모르겠어요. 다들 확고한 게 있는데 혼자 불투명하다는 게 무서웠다. 앞길이 깜깜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갈피를 못 잡고 고민하던 리케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생각을 틀었다. 왜 이런 고민을 하게 됐는지. 답이 없어 보이는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하는지. 의견을 묻고 조언을 받기 위해 몇 번이고 생각을 정리하고 복잡한 감정을 꺼내 넣다가 퍼뜩 깨달았다.

다양한 곳에서 나타난 이변도. 인간이 하늘을 날 수 있던 것도. 거대한 재액이 예년과 달리 강한 힘으로 찾아온 것도. 나라를 건널 수 있는 엘리베이터도 다 어떠한 구조가 있고 타당한 이유가 있다. 답이 없는 문제라는 건 존재하지 않고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는 것도 없다. 어떤 것이라도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이니까.

그런데도 막막하게 느껴진다면 아직 과정을 잘 모르는 거다. 과정을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제대로 끝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현자의 마법사가 된 뒤로 매번 해온 일이고. 현자의 마법사가 아니게 된 앞으로도 하게 될 일이다.

교단으로 돌아갈지 말지 리케는 아직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교단에 대한 것도 세상에 대한 것도 잘 알지 못하니 당연한 일이다. 다른 사람들이 이 주제를 가지고 긍정해도 부정해도 썩 기분 좋지 않았다. 그들도 교단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잘 모르는데 무조건 긍정하고 부정하고 있으니 납득할 수 있을리가 없지. 이건 리케가 답을 찾아야하는 문제였다. 조사하고 결론을 내려야했다.

아직 몰라서 초조하고 무서웠던 거지. 앞으로 알면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루틸은 글씨를 제대로 적지 못하는 리케를 나무라지 않았다. 지금부터 천천히 배우면 된다고 웃었지. 오즈는 말 수는 적지만 리케가 마법에 대한 호기심을 내보이면 정말 느리게 대답해주었다. 언젠가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가끔 선생님다운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고. 처음 종이 공작을 알려주던 미틸도 그랬고. 현자님도 그랬다. 모르는 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아니까.

거침없이 리케는 발을 내딛어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여행자가 됐다. 알기 위한 과정이니 머뭇거릴 필요가 없고. 더러움으로 가득한 세상이라고 겁먹을 이유도 없었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만 있지는 않지만 어떤 곳이라도 누군가의 낙원일 거야. 그런 마음으로 온 세상을 돌아다녔다. 마법관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양한 나라에 가보긴 했지만 직접 세계를 돌아다니니 갔던 곳도 새롭게 보였다. 현자의 마법사로 다 같이 온 것과 리케 오르티스 개인으로 찾아온 건 달랐다.

네로. 동쪽 나라에 지켜야할 규율이나, 규칙이 많은 건 알고 있었지만. 가게마다 허용 되는 게 다른 건 처음 알았어요. 여기는 대화를 해도 괜찮은데. 어디는 책만 읽어야 하고. 서서 기다리고 있어도 괜찮은 가게가 있으면 무조건 대기표를 받고 다른 곳에서 기다려야하는 곳도 있더군요. 같은 나라라도 통용되지 않는 게 이렇게 많다니……. 네로. 전에 그랬잖아요. 소중한 사람에게 따듯한 식사를 주지 않다니 이상하다고. 저는 분명 존경 받고 있었어요. 소중히 여겨주셨어요.

하지만 이건 교단만의 존경이고 소중함이라서 바깥세상에는 통용되지 않는 것이군요. …신도 여러분들도 교주님도 분명 절 존경했어요. 소중하게 대해주셨어요. 올바른 방향은, 아니지만요. 감정은 진짜였을 거라고 생각해요.

세상은 항상 올바르고 곧게 뻗어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요. 뒤틀리고 이상한 부분도 있는 거군요. 꼬일 대로 꼬여서 뭐가 맞는지 모르는 애정도 있었어요. 진실한 가르침도 사람마다 다 달라서, 무엇을 진실한 가르침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지도 다 달라요. 수많은 선택이 있는 게 당연한 거고. 한 가지, 절대적인 게 없는 게 당연한 일이라면 교단에서 잘못된 걸 전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교단에서는 멸망하고 새로운 세상이 태어나는 걸 전제로 진실한 가르침을 얘기하고 있어요. 거대한 재액이 있으니 곧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거대한 재액이 없는데도 이 세상은 멸망하고 새로운 세상이 태어날까요? 현자의 마법사인 저희가 힘을 합쳐 해결했듯이 그런 일이 벌어지면 해결해주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을까요? 조금 더 생각해보고 싶어져요.

절 좋아하는데 교단 이야기를 하면 불편하다고 그랬잖아요. 미틸. 저도 싫었어요. 미틸은 교단에 가본 적도 없고 신도 분들을 만난 적도 없으니까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그런데 싫다고 하니까……. 마법을 쓰지도 않았는데 다리가 붕 떠서 움직일 수 없게 됐어요. 이대로 있으면 빗자루 없이 하늘 위로 올라가서, 그대로 바람에 휘말려 날아다닐까봐 약속해달라고 그랬는데…. 그때 저는 정말 싫어서 그런 기분이 된 걸까요? 약속해달라는 억지를 싫어서 부린 걸까요?

싫다는 말은 참 신기해요. 아뇨 좀 달라요. 말은 참 신기하죠. 한 번 말하면 거기에 생각과 마음이 고정되니까요. 전에 레이타 산맥에 있는 낮은 산에서 캠핑을 했어요. 낮에는 분명 맑았는데 해가 저물자마자 갑자기 비가 내려서. 변덕스러운 날씨에 캠핑 하느라 고생했는데 나쁘지 않았다고. 이 산맥을 도는 어느 양치기 분에게 말하니까 그거 참 재미있는 캠핑이네 웃으셨어요. 그 말을 듣고 보니까 그 날 하루 제가 느낀 모든 게 재미있게 느껴지는 거 있죠. 화도 났고 짜증도 많이 났고 불안하기도 했는데. 다 즐겁게 느껴졌어요.

…들어주세요. 미틸. 그때 저 싫다고만 했지만 엄청 화가 났고 또 무서웠어요. 제가 미틸의 어머님을, 대마녀 치렛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왠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마녀라니 좋은 마녀 같지 않아요. 치렛타에 대한 물건은 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렇게 말하면 어떨 거 같아요? 저도 그래요. 미틸은 대마녀 치렛타를 정말 좋아하고 소중히 여기고 있잖아요. 저도 교단에서 자랐으니까 교단을 좋아해요. 소중히 여기고 있어요. 그래서 그랬어요.

그리고. 또. 미틸은 다른 사람한테 자기소개 할때 항상 대마녀 치렛타의 아들이라고 하잖아요. 저도… 그래요. 저는 교단에서 온 신의 사도니까요. 그래서 그러니까요. 말은 참 어렵네요. 오즈가 왜 우물쭈물 거렸는지 알 거 같아요. 중요하니까 확실하게 전하고 싶고 오해 받고 싶지 않은데. 뭐가 정확한 표현인지 모르겠어서 망설이고 말아요. 제가 느낀 게 고스란히 전해지길 바라는데. 어떻게 해야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어서 주춤하게 돼요.

그러니까, 그게요. 교단에 돌아가지 않는 저는 다음부터 어떻게 절 소개하면 될까요. 신의 사도…라고 말할 수 없게 되는 게 무서웠어요. 그래서 그런 거 같아요.

여전히 교단이 좋은 곳인지 좋지 않은 곳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교리가 틀린 거 같지만 틀렸다고 잘못 된 게 아니라는 건 미틸도 잘 알잖아요? 세상이 멸망하고 나서 나타날 낙원에 사람들을 이끌기 위해 행동하겠다는 건 훌륭한 일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낙원은 어디에나 있었어요. 누군가에게 어떠한 절대적인 낙원을 강제하는 게 훌륭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사람을 돕는 건 멋진 일이지만.

아직 잘 모르겠지만, 제가 확실하게 정하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면 그쪽에 고정될 거 같으니까 조금만 더 알아보고 맞춰보고 싶어요. 그래서 한동안 교단에 돌아가지 않아요. 교단에 대해서 누군가에게 말하지도 않을 거 같아요.

오랜 시간 몸과 마음을 열고 다니면 그만큼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게 된다. 리케 오르티스는 가까이 있어도 와 닿지 않았던 무게를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과거의 리케가 그런 반응을 왜 보인 건지. 주변 사람들이 왜 그렇게 반응한 건지. 그런 것들을 알게 되었다.

아서는 리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힘든 위치에 있었는데 항상 즐겁고 행복하다는 듯이 웃고 계셨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던 걸까. 역시 아서님이라서? 아니야. 아서님은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어떤 게 진실인지를 자기 스스로 판단해서 믿고 계셨으니까. 믿음과 확신으로 가득한 세계에 계셨으니까. 매일이 즐겁고 행복하셨던 거야. 리케도 그런 삶을 살고 싶었다. 기억 속 아서님은 정말 즐겁고 행복하셨고, 아서님과 함께한 나날도 그랬으니까.

어떤 게 진실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고 확신과 믿음을 만들어가는 여정은 아득하지만. 리케는 마법사였다. 인간과 달리 리케를 기다려주는 시간이 있었다.

아서님처럼 살고 싶다고 하면 아서님은 영광이라며 웃어주시겠지. 네로에게 조금 더 생각해보고 싶다고 전하면 평소처럼 맥없는데 왠지 편안해지는 웃음을 지으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줄 테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잠이 달아난 밤에 같은 침대에 누워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미틸과 하다가 그때 이야기가 나오면, 사과랑 함께 진솔한 대화를 할 수 있을 텐데. 미틸은 눈 돌리지 않고 진지하게 들어줄 텐데.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는 순간이 현실이 되지 않는다. 돌이 되면 상상할 수 있어도 전할 수 없다. 그 사실을 깨달은 리케는 망설임 없이 하늘을 날았다.

“개문을…… 후, 우우. 북쪽은 역시 춥네요. 오즈 문을 열어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마법을 쓸 겁니다.”

뒷수습 할 때는 너무 바빠서 시간이 나지 않았을 뿐더러. 책무를 뒤로 미룬 오즈를 용서할 수 없었다. 세계를 여행하고 다닐 무렵에는 고민에 빠져서, 세상을 알게 되는 게 즐거워서. 멀쩡히 살아있으면서 여전히 은거하더니 소식도 코빼기도 들리지 않는 게 얄미워서 일부러 찾지 않았지만 평생 그럴 수는 없었다. 마법사 리케의 선생님이자 유일하게 남은 중앙의 마법사 동지였다.

리케가 선전 포고한 대로 마법을 두어 번 내리치자 오로라밖에 없는 설원에 숨겨진 성이 나타났다.

“당신이 책무를 버리고 은거한 걸 용서하겠습니다. 슬픔에 빠져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룬 걸 이해하겠습니다.”

그러니 오즈. 문을 열고 저랑 얘기해주세요.

“손님을 맞이할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건 뭐,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밤에는 불을 켜두세요. 북쪽 나라는 해가 일찍 지니까요. 오즈 당신이 어둠의 자식이 되지 않을까 항상 걱정하고 있습니다.”

“청소는 매번 하고 있는 건가요? 청결을 유지하는 게 중요해요. 마법사는 어느 정도 식사를 하지 않아도 괜찮지만. 그래도 일정한 습관을 유지하는 게 좋다고 하니 챙겨주세요.”

“불필요하다고 하지 마세요. 오즈는 마법으로 뭐든 하려고 하지만. 이런 건 손수 하는 과정이 중요한 거니까요. 이 서랍에 있는 피……가로 소환권이라는 걸 써도 괜찮나요? 혼자서는 다 못할 거 같아서요.”

“내버려둬도 알아서 하겠다니 오즈 알아서 되는 건 없습니다. 부릅니다. 싫으면 일어나세요.”

“…너는, 의외로 막무가내군.”

“맞아요.”

그런 재회를 가진 뒤, 리케는 주기적으로 오즈의 성에 찾아오는 손님이 되었다. 빈손으로 오기도 하고 뭘 들고 오기도 하는 쌍둥이와도 피가로와도 유형이 다른 새로운 범주의 손님이었다.

“서쪽 나라에 다녀왔어요. 처음 갔을 때는 뭐든지 빠르고 화려하고, 눈이 빙빙 돌만큼 유혹과 세속이 가득한 곳이었는데. 지금은 별로 그렇지 않네요. 아뇨 지금도 유혹과 세속이 가득한 곳인데. 예전과 크게 다른 게 없어보였어요. 익숙해진 걸까요? 예전에 현자님이. 현자님 세계에서는 하늘까지 닿는 집이 있다고 하셔서, 저는 서쪽 나라에 금방 그런 게 생길 줄 알았거든요.”

“그에 비해서 남쪽 나라는 많이 달라졌어요. 옛날에는 광활한 풍경 아래에 사람이 있었는데. 지금은 전보다 뭐라고 해야 할까요…. 바글바글 와글와글 활기차고 소란스러워요. 가본 적 있어요? 요즘은 산맥에 양치기도 잘 안 온다고 하더라고요. 듣자하니 보호소라는 게 있어서 그쪽에서 사육한다고 해요.”

“가본 적 없어요? 그럼 다음에 같이 가 봐요. 오즈가 준비 되면 알려주고 싶은 곳이 몇 곳 있어요. 아직도 은하수가 잘 보이는 곳이나, 강물이 맑아서 물벌 떼가 사는 곳. 오즈한테만 알려줄게요.”

“오즈 전에 그랬죠. 말로 꺼내면 안에 있는 감정이나 흐려지니까 말을 많이 안 한다고. 그때는 무슨 소리를 하나 어이가 없었는데. 지금은 뭔지 알 거 같아요. 말로 꺼내면 방향성이 그쪽으로 고정 되니까요. 그게 싫었던 거죠. 말하기 전까지는 다양하게 뭉쳐 있었는데 꺼내면 한 가지로 변해버려요. 그게 저도 가끔은 무섭지만…….”

역시 직접 말하는 게 좋아요. 표현해서 전하는 게 좋습니다. 마법으로 피운 모닥불의 상태를 몇 번이나 확인한 리케가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하지 않으면 전할 수 없는 걸요. 봤던 색이 흐리멍덩하게 변하고. 얻었던 감상이나 느낌이 탁해져도 저는 다른 사람과 공유하면서 살아가고 싶어요. 좋아하니까요.”

그래서 이렇게 찾아와서, 이야기하는 건가. 오즈는 그런 질문 대신 아주 느리게 입을 열었다. 리케도 이야기를 더 이어가거나, 주제를 바꾸지도 않고 얌전히 오즈를 기다렸다.

“무엇을?”

"듣고 보고 경험한 것도 들어주는 사람도요. 다 좋아하니까 자꾸 말하고 싶어져요.”

그래서 자꾸 오게 되나 봐요. 다음에도 또 놀러 와도 될까요? 리케는 항상 오즈의 성에서 떠나기 전에, 다음 방문을 허락 받았다. 일단 여기는 오즈의 성이니까요. 놀러 올 때는 허락을 구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런 태도로 오즈의 대답을 들을 때까지 리케는 꿈쩍도 하지 않으니, 오즈는 네 마음대로 하라면서 허락을 내주었지만 이번에는 침묵이 길었다. 침묵이 조금 길어지면 리케가 듣고 있나요? 새로운 질문을 던지기 마련인데. 리케도 오즈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엔, 내가 없을지도 모른다.”

“왜요?”

조개를 주우러 간다. 과자를 사러간다. 얄팍한 핑계를 댄 과거가 스쳐지나갔다. 리케는 그래도 의심도 하지 않고 자기 요망을 말했다. 가장 크고 아름다운 조개로 해주세요. 제일 예쁜 색을 가진 걸로 가져와주세요. 제가 좋아하는 가게가 있으니 그쪽을 가주세요.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말도 믿는 게 리케였지만. 오즈는 말을 열심히 골랐다. 이제 그런 게 통할 나이가 아닙니다. 어느새 어른스러워진 아이가 그렇게 말했던 것처럼, 리케도 마법관 시절 리케가 아니다. 어쭙잖은 변명이 통할까? 조개를 주우러 간다. 과자를 사러간다. 그런 건 통하지 않을 나이였다.

“여행을.”

“여행을?”

“떠나려고…….”

어디로요? 목적지는 있어요? 어딜 갈 마음이 생긴 건가요? 저도 가도 될까요? 아니 지금 어딜 가요. 집 안도 엉망이면서. 리케의 호기심이 쏟아질 때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어, 의아해하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신기한 표정을 지은 리케와 눈이 마주쳤다. 지금 울고 있는 건가 아니면 웃고 있는 건가. 물어보기 전까지는 의중을 알 수 없는 경계선에 서있었다.

“제 이야기를 듣고 드디어 나갈 마음이 생긴 거군요. 오즈.”

오즈의 여행 이야기도 꼭 들려주세요. 기쁘다고 한 것 치고는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지만, 여전히 의연한 태도를 취하고 있기에, 오즈는 속내를 완전히 알아내지도 못하고 진실을 말하지도 못한 채로 리케를 배웅했다.

거대한 재액이 떨어진 날 재액이 남긴 상처도 사라졌다. 평범한 달이 된 재액은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해서, 오즈는 명실상부한 최강의 마법사가 되었다. 명실상부한 최강의 마법사로 복귀한 그를 비웃듯이 그 아이는 결국 돌이 되었다. 돌이 된 그 아이도 오즈가 직접 찾은 게 아니라 현자가 나서서 쥐어주었고. 다른 마법사들도 마찬가지로 돌이 됐을 뿐더러. 예감이 들었다.

앞으로 남은 날이 얼마 없다. 마법사인 이상 이 얼마 남지 않은 날이 몇십년 후가 될지, 몇 백 년 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확실한 직감이 들었다. 쌍둥이의 예언과도 같았다. 나는 얼마 살지 못한다고 말해야 할까? 오즈는 고민했지만 끝끝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피가로에게는 말해두는 게 좋을까 고민했지만. 중앙 나라의 왕자를 데려갈 수 있도록 손을 써준 그에게 이 이상 신경 쓸 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어쩌다가 이런 응석받이가 됐을까. 너는 몇 년이 지나도 어린애구나. 그런 시선을 받고 싶지 않기도 했고. 리케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중앙의 마법사는 이제 곧 너 하나만 남을 거다. 준비를 해두는 게 좋아.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자기가 죽고 나서 어떻게 세계가 변하는지는 관심 없지만. 죽고 나서 일어날 폭풍은 예측할 수 있었다. 무서워해서, 숭상해서 많은 이들이 간섭하는 게 넌더리가 나 세계 정복을 한 적 있으니 더욱. 죽고 나서는 더 많은 간섭이 들어오겠지. 죽고 나서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건 슬프지만, 또 다시 그런 커다란 간섭을 받는 건 싫었다. 받고 나서 아직 삼키지 못한 아서의 돌도 아직 이 성 안에 남아있기도 하니 대책이 필요했다.

지금보다 더 강력한 결계를 칠까. 그러한 결계가 있으면 더 고양돼서 도전하는 녀석들이 북쪽에 넘쳐흘렀다. 위험할수록 흥분하고 갈망하니 소란을 막기 위한 해결법은 아니지.

사람은 장례식이 끝나면 땅에 매장된다. 대마녀 치렛타도 유족의 뜻을 따라서, 고인의 뜻을 존중해 북쪽 마법사임에도 먹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매장했지만. 오즈는 어딘가에 묻을 수도 없었다. 마법사는 죽으면 돌이 된다. 시체도 남기지 않고, 공중에서 증발하는 것처럼. 그렇기에 묻히고 싶으면 다른 사람의 조력이 필요한데. 오즈는 그 누구한테도 자신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매장하기 위해선 일단 남은 사람이 있어야하는데, 그 사실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부르기 싫어했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면 방치해두다 보면 언젠가는 해결 되기 마련이지만, 오즈의 돌은 그렇게 방치해둘 수는 없었다. 오즈는 단순한 개인이자 어떠한 개념이고 질서와 이치를 만들 존재였으니.

그래서 여러모로 고민한 결과 오즈는 공간 마법을 통해…… 어떠한 곳도 아닌 곳에 자기 자신과 성을 두고 올 계획을 세웠다. 아무도 찾지 못할 곳을 떠돌다가 스러지는 게 가장 이상적이니까. 가시의 고성 탈리아가 유령선처럼 떠돌아다녔듯이, 오즈도 자신의 성을 유령선으로 삼기로 했다. 형체 없이 떠돌아다녀 존재하다 이윽고 사라지고 마는 그런 무덤을 준비하기로 했다.

어디도 아닌 곳에 가는 거긴 하니, 여행이라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그런 생각을 하며 오즈는 주문을 외웠다. 거대한 재액을 멸하고 완전히 운명에서 벗어난 순간인데. 축하보다는 쓸쓸함이 앞섰다. 최후는 그런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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