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라이 멀어지는

[화산귀환] 종언(終焉)

오른팔을 다쳐 왼팔로 검 쓰는 연습하는 청명

* 트위터 썰 백업

종언(終焉)

: 1. 없어지거나 죽어서 존재가 사라짐.

  2. 계속하던 일이 끝장이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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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가 하나도 아닌 둘. 거기다 잔챙이들까지 어림잡아 적어도 열 대여섯 명이었다.  쯧. 이거 정말 혼자 왔으면 등 한번 내줬어야 했겠네. 당보 녀석이 있었을때도 주교 서너 명은 힘들었는데 그 실력에 미치지 못하는 지금은 분하지만 주교 둘이라도 등 한번 내줘야 할지도 모른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조걸이랑 윤종이 있다는 정도일까.

포위 하듯이 둥글게 막아선 놈들을 보다 암향매화검을 다시 고쳐 쥐었다. 참고로 사숙과 사고, 소소는 땡중이랑 다른 곳을 정찰하러 갔다. 찢어지길 기다렸다는 듯이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난 꼴이 우스웠다. 우리가 둘이든 셋이든 나뉜다 한들 약해지는건 아닐진데.  윤종 사형이나 조걸 사형도 심상치 않음을 인지 했는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우선 빠르게 처리하고 네 사람이랑 합류하는게 우선이었다. 저쪽도 상황이 어떨지 모르니.

생각을 마치기 무섭게 달려드는 놈들을 바라보다 검결지(劍結指)에 이어 100년 전 이 놈들이 그리 무서워 하던 매화를 피워냈다. 전에 무서워하던 것이 무안해지게도 겁도 없이 검을 휘둘러 오고 마기를 흩뿌려오는 놈들을 매화가 베어내고 또 베어내어 저보다도 붉은 실선을 만들더니 이내 붉은 물을 터뜨려낸다. 개화(開花)는 느릴지언정 낙화(落花)는 그 시간이 야속하게도 빨랐다. 낙화로 인해 생긴 붉은 물은 적군의 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개중에는 주교를 상대하는 청명의 피가 섞여있었다. 독이 퍼지기 전 베어낸 탓에, 미처 막지 못한 칼에 베이고 뚫린 상처를 제대로 지혈하지 못 하는터라 붉은 물을 토해내고 있었다. 팔과 단전을 집요하게도 노려온다. 쯧. 

마지막 놈의 목도 떨어지고 나서야 돌아보니 둘다 무사했다. 무사한걸 보고 안심하기도 잠시, 들려오는 검 부딪히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며 커지는 것으로 보아 저 놈들이 밀리고 있는 듯 했다. 욱신거리다 못 해 저리기까지 하는 오른팔을 무시한 채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렸다.

주교로 보이는 놈이 안 보이는 것으로 보아 우리 쪽으로 전력을 집중 했던건지 이쪽은 머릿수로 밀어붙인 것처럼 보인다. 꽤 귀찮은 상황이었다. 

“내가 어떻게 가르쳤는데 이 정도 밖에 처리 못 했어? 어? 그러게 내가 놀지 말라고 했지? 얼씨구? 동룡이는 다리에 칼을 꽂고 있네? 저런 잔챙이들 상대 하느라 다 죽었네 다 죽었어. 쯧쯔.”

“내가 네 사숙이다, 이 망둥이 녀석아… 팔은 또 왜 그러느냐?”

“주교가 이쪽으로 두 명이나 왔더라고. 내가 이 정도에서 끝났으면 어? 인원도 더 많이 있었으면서 다치지는 말아야 할거 아냐!”

  마치 오늘 아침은 고기반찬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별거 아닌듯 툭 내뱉는 것 치곤 상처가 꽤 깊어보이는 것이 당장 떨어져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너덜거리는 청명의 오른팔을 보던 백천이 와락 인상을 찌푸리곤 제 다리에 붕대 감는 것이 끝나자마자 소소에게 가보라고 하려는 순간, 다 처리한 줄 알았던 마교도가 어느새 또 온 것이 보였다.

“쯧. 질리지도 않나. 그래도 자기들 대장 즈음 되는 놈 두 명이 죽은걸 봤을텐데도 덤비네 무모한건지 무식한건지. 사숙은 여기 있어. 다리가 그렇게 되어선 아무런 도움도 안 되니까.”

“너도 팔이 너덜거리면서 어떻게 싸운다는 말이냐!”

“나? 저런 놈들은 왼손으로도 이겨.”

  백천이 버럭 외친 걱정을 청명은 능청스럽게 들리기까지 하는 말로 넘기며 씨익 웃고는 다른 이들을 도우러 자리를 떴다. 사실 청명의 무위 정도면 맞는 말이기에 반박할 거리도, 붙잡지도 못한 8백천이 어휴… 한숨을 쉬고는 전력이 비는 곳이 있을세라 당장 지원을 나갈 태세로 대기하는데, 변수가 생겼다. 분명… 청명이가 금방 처리하고 넘어 갈거라고 생각했건만 청명이 평소보다 더 다치고 있다는 점이었다.

청명의 말대로 그는 왼손으로도 마교를 이기고 있었지만 주로 쓰는 손이 아니다보니 자꾸 빈틈이 보이는지 베이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심지어 비교적 굳은살이 적은 왼손으로 휘두르니 까지는건 기본이요, 손까지도 피를 흘려 왼팔 어느 곳 하나 피 안 흘리는 곳이 없었다. 전쟁에서도 겨우 익숙해졌던 좌수검(左手劍)이었건만 초삼 몸으로 깨어나 몇년동안 다시 오른손으로 쓰기 시작했는데 좌수검이 어찌 익숙 하겠는가. 머리는 기억하고 있으되, 몸이 안 따라주는 상황인 것이다. 먼저 자기 몫을 해치운 조걸까지 합세하고서야 청명을 끈질기게 노렸던 마교도 놈이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검을 바로 한 청명이 검집에 칼을 넣는다. 

매화검존 때 좌수검으로 천마 목도 베어냈기에 그깟 마교놈들 주교도 아니고 잔챙이들이라면 식은 죽 먹기일 줄 알았기에 청명은 무위가 예전 같지 않은건 이 몸으로 깼을때부터 알았다지만 이토록 죄다 까먹고 빈틈을 보여 이 정도 부상을 당한 것이 꽤나 충격이었다.

“왼팔로도 이긴다더니 꼴이 이게 뭐냐! 소소야!!!”

“네! 사숙ㅡ 아니 사형, 이 몸으로 쉬고 있지 무슨 사형이 불사신이에요?! 몸을 자꾸 굴리게?!”

“아니 이 정도는…”

“기합으로 이겨낸다는 소리 하기만 해봐요 어디!”

이미 다 꿰고 있다는 듯이 야차 같은 표정으로 외친 소소가 우선 임시로나마 챙겨온 지혈초를 환부에 뿌린 뒤, 청명의 소매를 찢어 지혈을 해주었으나 이미 질리기 시작한 얼굴과 중간중간 손을 쥐었다 폈다 하는것만으로도 피를 꽤 흘렸음을 알 수 있었다. 암만 청명이한테 먼저 돌아가라 말한다 한들 적을 다 쓰러트리기 전까지 최전방에서 싸우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 가장 마지막에 안전을 확인하고 내려가는 청명이니 말을 안 들을것을 알기에 오검인권은 속히 귀환하는 것을 목표로 잡았다.


의원에 들려 치료 할 수도 있었지만 청명이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화산까지 오고서야 제대로 된 처방을 받게 되었다. 화산에 바로 귀환 했으면 모를까, 그나마 상처가 덜한 조걸, 윤종, 이설, 소소, 혜연이 있었음에도 성치 않은 몸으로 양민이 도와달라 했다고 다친 팔로 둑도 쌓다 왔으니 오검일권이 얼마나 답답해 하고 화났을지는 말 안 해도 뻔한 일이었다.

“아! 살살 좀 해!”

“지금 그런 말이 나와요? 다친 팔로 양민들 돕겠다고 그 큰 모래주머니를 왜 들어요? 다른 사람들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진짜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그걸 알기에 청명은 괜히 불평 한번 내뱉었다가 본전도 못 찾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어째 다시 풀고 꽉 조여매는 소소에 잠깐 미간을 찌푸린 청명이 팔을 들어올리려다 말고 당황하며 입을 열었다.

“뭐, 뭐 이렇게 꽉 동여맸어?! 이러면 검을 어떻게 휘두르라고!”

“이 와중에 검 휘두를 생각을 해요?! 절대 오른팔 쓸 생각하지 말아요! 그땐 상처 터지고 진짜 팔 나가 떨어져도 치료 안 해줄테니까!”

“악! 아악! 알겠다고! 의원이 사람 잡네!!!”

찰싹 찰싹 환부를 피해 어깨를 내리치는 소소에 줄행랑 치듯이 의약당을 나온 청명이 궁시렁 대다 문득 든 생각에 멈칫했다. 

‘잠시만. 이거 팔이 반대일 뿐이지 100년 전 때랑 비슷하잖아?’

이번에도 팔이 날아갈지도 모를 일인데다, 전과 같이 왼팔이 날아간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이 상황이 아무런 의심 없이 왼팔로 수련할 기회라고 생각하는 청명이었다. 연습하는 셈 치지, 뭐.

“대침은 왜 빼들었느냐?”

“저 인간 또 헛소리 생각 하는 것 같아서요.”

…물론 소소가 기함할만한 소리였지만 말이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 했다고, 청명은 소소 눈치를 슬슬 보면서도 왼팔로만 육합검부터 다시 시작했다. 기본인 만큼 어렵지는 않았으나 한팔로만 하다 보니 무게가 안 실려 있는게 눈에 띄었다. 그런 청명을 보며 화산 제자들은 어떻게 저렇게까지 다쳐놓고도 수련할 생각을 하냐며 말려야 하지 않냐는 반응이었지만 그 청명을 누가 말리겠는가.

일반 제자들 눈에는 이미 빈틈이 안 보임에도 수련을 반복하다가 비무를 하자고 얘기 해오기도 했다. 청명이 한 팔만 쓴다면 이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 반, 그래도 저녀석 다 안 나았는데 이래도 되나 싶은 마음 반 복잡한 마음으로 비무에 임했지만 이내 그들의 걱정이 무쓸모였음이 드러났다. 비무는 언제나 청명의 승리였고, 그럼에도 청명은 뭐가 마음에 안 드는듯 한번에 그치지 않고 몇번이고 상대를 바꿔가며 비무를 진행했다. 이해할 수 없는 청명의 기이한 수련이 육합검에서 끝나지 않고 칠매검(七梅劍)으로 넘어가 차근차근 빈틈이 보이지 않을때까지 연습을 이어나갔다.

대략 한달 정도 지났을까, 잊을만 하면 나타나던 마교도 놈들이 무언가를 준비 하듯이 모습을 드러내는 빈도가 줄어들었다. 그만큼 개인과 문파 정비 시간이 주어졌다는 소리였다. 그 잠깐의 긴장이 깔린 달콤한 휴식시간에도 빈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청명의 수련은 지속되었다. 

걱정과 불안이 담긴 시선이 조금은 열어지고 남아있던 의아함 마저 또 저런다는 시선만이 남았을때 즈음, 평소와 같이 새벽수련을 간 청명의 흔적을 따라 내려가는 이가 있었다. 백천이었다. 백천은 청명의 수련 방식에 대해 의문을 품는 쪽이었지만 구태여 묻지는 않았다. 가끔씩 떨리는 왼팔, 수련할때마다 가끔 검을 쓰는 왼손이 아닌 꽁꽁 동여매놓은 오른손으로 검결지를 지어도, 악몽이라도 꾼 듯 벌떡 일어나 왼팔 어깻죽지를 미친듯 긁다가 좀 진정된 뒤에 떨쳐내려는 듯이 수련을 격하게 하는 행동 그 어느것 하나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물어보더라도 저녀석은 그랬냐며 너스레를 한번 떨고는 더 숨기려 들테니, 차라리 지금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판단 하였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매화가 보이는가 싶더니 백천이 찾던 사내가 다시 검을 내지르는걸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왼팔로 수련하고 있는 청명을 보던 백천은 한숨을 쉬며 청명에게 다가갔다.

“사숙 왔어? 비무 한번 해볼래?”

“또 왼팔로 할 거냐?”

백천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자, 청명이 미간 주름을 검지로 문질러 피더니 백천 말을 곱씹는 듯 몇번 눈을 깜빡이다 비웃듯이 픽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말을 내뱉는다.

“오, 동룡이 주제에 나 걱정해주는거야? 다 컸지, 아주? 왼손 소지 하나로도 이길걸? 아니다, 사숙이니 엄지 손가락?”

“내가 네 사숙이다, 이 망둥이 녀석아.”

“눼눼, 그러시겠죠. 차라리 사숙 영웅건이나 배 걱정해라. 맨날 지면서 무슨”

청명이 예의 그 뉘예뉘예 하는 표정으로 놀리자, 백천이 발끈하듯 대꾸하다 맞는 말인지라 저가 포기하는 쪽이 더 이로운 것을 알기에 입을 닫았다. 대신 왼손을 바라보자, 저보다 작은 손이 기존에 있던 굳은살과 더불어 새로 생긴 굳은살들로 가득 했다. 처음처럼 찢어지다 못해 너덜너덜 해지는 일은 적어졌으나 아직도 박힐 굳은살이 있는지 피가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왼팔이느냐.”

“…한쪽 잃을수도 있으니까.”

의아한 말이었다. 천마가 센 것은 알고 있지만, 저번 부상에 의해 걱정할만 하지만 평소의 자신감 넘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가라앉은 모습이었다.

“한쪽을 전투 중에 잃으면 얼마나 당황스럽겠어? 내가 이래뵈도 화산제일검인데 당황해서 이도 저도 못 하는것보단 낫겠지.”

이내 능청스럽게 으쓱이고는 아프지도 않는지 주먹을 쥐었다 핀다. 왜 저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백천은 이해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언제나 그렇듯 더이상 파고들지 않고 그냥 완벽을 추구하는 성격이니 그렇겠지 넘겼다. 예견된 미래마냥 제 끝을 말하는 청명의 말에 말을 얹을 뿐이었다.

“한쪽을 잃더라도 우리가 지켜주면 되지. 항상 우리는 없을 것처럼 말하는구나.”

“사고는 그렇다치고 사숙이랑 사형들이? 사매가?”

“물론 너에 비하면 많이 부족한건 사실이지. 하지만…”

백천이 말을 하다 말고 소매 속에서 언젠가 화음에 내려갔을때 받았던 민무늬 하얀 손수건을 꺼내고는 청명의 왼손을 가져와서는 묶어주었다. 불편하다고 궁시렁대는 청명의 말이 끝날때 즈음 백천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몸을 생각하며 수련 했으면 좋겠구나. 부상 입었으면서 선두에 설 생각 좀 그만하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느냐.”

“…알았어. 것참 소소도 이제 말 안 얹는데 잔소리 참 많네. 아니 그래서, 비무 할거냐고!”

“아니 잠시만 기다려라. 아직 검도… 악!!! 아니 이 놈이 진짜…!”

신경질적으로 외치는 청명에  다급히 검을 고쳐 잡다 말고 검집으로 머리를 보호하다가 어깨를 얻어 맞은 백천이 다시 내려치려는 검을 보고 물러나더니 검을 꺼내 물러난 만큼 달려든다. 이제 웬만해서는 청명 다음으로 제일 가는 백천이라지만 청명의 눈에는 허점 투성이였다. 쯧. 저래가지곤 천마를 어떻게 상대한다는 건지. 대체 마교도는 어떻게 상대한 거야? 하긴 저러니까 다리나 뚫리고 앉았지, 대사형이란 놈이!

빡—!

“머리! 옆구리! 무릎! 다시 머리!!! 내가 몇번을 말하냐!!!”

흐트러진 자세에 허점을 파고들어 신명나게 패는 소리가 몇번이고 울려 퍼지고나서야 제정비 할 시간을 주더니 비무를 시작했다. 그 뒤로도 종종 백천이 새벽 수련을 봐주게 되었고, 날이 갈 수록 한명씩 더 붙더니만 육검일권의 수련 소리로 한동안 화산이 울릴정도 시끄러웠다.  어느날부터 청명은 중심을 한쪽으로 밖에 못 잡을 경우도 수련 하면서 100년 전 대산혈사(大山血事)와 같은 일이 안 벌어지지 않도록 대비를 했다. ‘다른 문파는 어찌되어도 알 바 아니니 적어도 화산에는 그런 피해를 또 입지 않기를’ 같은 이기적인 생각 하며.


십만대산에서 마교도의 움직임이 보인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고, 천우맹이 급히 모였다. 이 전쟁의 주축인 이들은 저마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일 거라 생각하는 중이었고, 그만큼 결의에 차 있었다. 여태껏 많은 이들이 죽어나갔고, 앞으로도 몇이나 더 죽을지 모를 일인만큼 하나같이 진지한 자세로 임하고 있었다. 각 문파와 세가가 각자의 다짐을 내뱉고, 천우맹 장(長) 현종이 마무리로 내뱉음으로서 끝내려는데 

“화산은 100년 전과 변함없이 선두에 설 겁니다.”

“그 건에 대해서 잠시 할 말이 있습니다.”

웬 일로 회의 내내 가만히 앉아 있던 청명이 입을 열었다. 저 놈 저거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말려야 하는거 아닌지 윤종이 백천을 돌아보며 입을 열기도 전에 청명이 말하는 것이 더 빨랐다.

“화산은 이번엔 오검 중 몇 명을 포함한 제자들 절반은 문파에 남았으면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우리 중 몇 명은 빠졌으면 한다니!”

장내가 일순 시끄러워지고, 백천이 외치는 소리에도 청명은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한 눈빛, 형용할 수 없는 위압감으로 장내 분위기를 잡고 있었다. 저 눈빛을 할때면 무슨 말을 해도 절대 뜻을 꺽지 않는 것을 알기에 오검은 현종을 돌아봤으나 이미 얘기가 된 상황인지 미간만 짚을뿐 말리지는 않았다.

“타협은 않겠습니다. 100년 전 일이 또 안 벌어질 거란 보장이 어딨습니까?”

한 정예부대인 결사대를 화산이 이끌고 마교도 및 천마와 전쟁을 벌였다. 매화검존이 천마의 수급을 베어냈으나 매화검존을 비롯한 화산의 제자들, 심지어 대현검 청문까지도 전멸을 맞이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운자배만 남은 화산에 마교도 잔당들이 쳐들어와 전각을 불태우고 공격 해왔고, 도움을 청 했음에도 종남만이 도와주더니 그마저도 종남에게 검법을 뺏겼다. 화산의 한과 설움이 담긴 그 일을 꺼낸 것이다.

운자배는 돌아오지 않는 장문인과 장로, 사숙조, 사숙들을 기다리며 제대로 슬퍼할 겨를도 없이 수습해보려고 애먹고, 그 뒤에 들어온 화산의 제자들은 다시 피아니지 못하는 매화를 아쉬워하며 언젠가 피워내겠다는 기약없는 다짐을 하며 실망하고 점점 줄어가는 제자들을 보며 자책 하는 나날을 보냈을 이들이 살은 과거를 다시 반복할 수는 없었다.

“그 일을 겪고 나서도 선두에 서겠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겁니다.”

감히 그건 좀 아니라는 반응은 나오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다들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을 하지 못 했다. 이미 관련 일로 비무대회때 법정에게 청명이 보인 분노는 단순히 선조의 한에서 그치지 않았고 결코 가볍지 않음은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이라면, 비무대회에 관심이 일말이라도 있었다면 모를 수 없었기에 반대 하려던 백천 역시도 말을 얹지 않았다.

결국, 회의의 종지부는 화산을 대표하는 5명 중 누가 남을 것인가에 대해 토론으로 끝났다. 청명과 이설, 조걸을 제외한 백천, 소소, 윤종은 남는다. 한곳으로 병력이 쏠리는 것을 막기 위함이 대외적인 명분이었으나, 더 큰 이유는 운검도 참전하는데다, 장문인 대리인을 맡고 있는 놈이라도 남아 있어야 곧 장문인 자리를 받는 이와 차기 장문인이 한날 한시에 전사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를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저 자신 역시 살아 남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백천마저 전사해버리면 그땐 100년 전과 다름 없을 것이었다. 백천은 그걸 듣고 나서는 원망을 담아 청명을 노려 보았지만 이내 시간이 정말 얼마 안 남았기에 수긍했다.


십만대산에 오르기 전, 참전하기로 한 이들이 청명의 부름에 모였다. 정말 이제 곧이라는걸 느꼈는지 몇몇은 눈이 붉어졌을지언정, 하나같이 진지한 얼굴들이었다. 선조들도 승리를 거머쥐었으나 결국 화산에는 돌아가지 못 하셨던 전투다. 살아 돌아간다 하여도 크나큰 행운이었고, 사지 멀쩡하게 돌아간다면 그것이 천운일 것이다. 그러니 다들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그들을 둘러보며 청명은 이들 중 과연 몇이나 살아서 다시 얼굴을 볼까, 생각 하다 다짐하듯 결연하게 입을 열었다.

“다들 나 센거 알지? 내가 제일 앞장 서서 길을 열어줄거야. 절대 안 뚫릴거야. 뚫려서도 안 되고. 사숙, 사고, 사형은 나만 잘 따라오면 돼.”

“나란히 서서 싸울거야.”

“어휴.. 그래, 사고 빼고. 내 뒤에 있는 사람들은, 적어도 내 사람들은! 반드시 살아서 돌아갈 수 있게 해줄게. 그러니 자신들을 믿고 다들 수련 한대로만 해. 그럼 반은 먹고 가.”

가장 강한 이의 말이었지만 선조도 겨우 이긴 천마와 전투하러 가는 것인만큼 완전히 그 말을 신뢰하는 이는 없어도 뻣뻣하게 굳어있던 이들이 피식 웃으며 조금은 긴장을 풀었다. 저들보다 어리고 작은 청명이지만 여태껏 화산을 이끌어준 이가 누군지, 여기까지 올 수 있게 해준 이가 누군지 알기에 마음이 편하지는 기분이었다. 무엇보다도 청명이 살아서 돌아간다는 말을 하면 부상은 심할지언정 결국엔 다들 살아 귀환하곤 했으니 이번에도 그러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다들 말 한마디씩 얹었다.

“우리도 조심 할테니 너도 무리하지 말거라.”

“무리다 싶으면 신호만 보내. 따라잡느라 조금 늦겠지만 바로 달려갈테니까.”

자식들. 다 컸다고 이제 걱정을 다—

“우우, 너만 싸우냐? 우리도 선두에 설 수 있다!”

“방금 어떤 놈이야. 뭐? 선두우우? 전쟁이 장난이야?! 캬아악!!!”

할말 못 할말 구분 못 하지! 하여간 칭찬을 하려 하면 꼭 정신줄을 놓아요 하여간에. 청명이 범인을 색출 하기도 전에 선두 어쩌고 저쩌고를 입 밖에 내뱉은 제자 양 옆에 있던 제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처리한 덕에 한숨을 내쉬고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전쟁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쏘아 올라지자, 돌아서며 두글자를 내뱉었다.

“가자.”

저 역시 죽어 묘도 만들어 주지 못한 사형들과 사질, 사손들의 대부분이 눈도 못 감은 채 잠들은 이 땅을 밟고 뛰어 올라간다. 그때와 다른 사람들과, 다른 모습으로 다른 결말을 맞이하고자 다시 한번.


천마는 100년 전과 달리 적은 시체 산에  모든 단전과 오장육부가 꿰뚫린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다. 청명 역시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전과 같이 팔 한쪽이 날아가고 배에는 아기 머리보다 더 큰 구멍이 뚫린채 피를 계속 토해내고 있었다. 이번에도 죽는다. 그건 변함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 놈을 길동무 삼아 데려가야지. 

거칠게 입 주변을 훔친 청명이 왼손으로 쥔 검을 다 잡고 결(結)을 맺을 검로를 그려나간다. 아름다움을 뽐내다 지기 직전에는 필사적으로 제 매력을 뽐내다 시드는 꽃처럼 청명의 매화는 전투를 잊고 넋을 놓고 볼 정도로 그 어느때보다 화려하게 피어나고 더 많이 피워낸다. 가뜩이나 화려한 화산의 검법이 종장을 장식하기 위해 빛을 발하고, 마침내 검로의 끝이 천마의 수급을 베어내고 나서야 숨죽인 듯 했던 세상이 함성으로 울려 퍼진다.

“와아아아아아아!!!!!!”

“이겼어, 이겼다고!! 이거 꿈 아니겠지?!”

“선조시여... 저희가 해냈습니다.”

울음과 기쁨으로 가득찬 소리가 청명의 귀에 들어오고 나서야 청명은 칼을 땅에 박고 주저앉았다. 내려다봐서 다 살아 있는지, 아니 화산파 제자들이 살아있는지 확인 하고자 자꾸 감기며 흐려지는 시야에 눈을 부라리려 애쓰며 내려다보았다. 다행이다. 저기 달려오는 이설, 윤종, 조걸을 보고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장문사형, 내가, 아니 우리가 해냈소.

100년 전에는 못 마쳤던 그 일을.

청진 그 못난 놈과 함께 기다려 주세요. 곧 갈게요.

잘 했으니 너무 늦었다고 혼내지는 마세요.

저 아해들이 이제 우리 화산을 이끌게 되었어요. 벼슬도 안 자란 병아리 놈들이 언제 저리 컸는지.

화산은 이제 안전해요.

백천이란 놈이 장문인이 되고, 윤종이 장문인이 되고 명자배도 들여 화산이 건조함을 알리게 되겠죠.

참, 선계의 술은 신이 빚어 환상적이라던데 어때요? 제 몫은 남겨 주셨죠?

실 없다 생각하면서도 듣고 있을지도 모를 청문을 찾는다. 점점 기우는 몸에 힘을 빼고 있자니, 다급히 붙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청명아!!! 정신차리거라, 아직 죽으면 안 된다!!! 살아 돌아가자 하지 않았느냐!”

그 말에 ‘아, 그래. 모두 무사히 돌아가겠다 했지.’ 하고 생각한 청명의 눈에 흐릿하게 초점이 돌아왔다. 급한대로 윤종이 제 옷을 검으로 찢어 붕대로 대신 잘려나간 오른팔을 압박하여 지혈하고, 복부에는 조걸이 도복을 벗어 조금이나마 더 지혈하고자 노력을 기하며 청명을 수레에 실은 뒤, 속히 화산으로 귀환하기로 결정됐다. 부상자는 많았지만 사상자가 없어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쉬지도 않고 계속 달리면서 청명이 잠들려고 하면 깨워서 확인 했다.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게 용한 수준이건만 계속 버텨주어 다행이었다.


한편 현화산은 승리를 알리는 신호탄을 보고는 귀환을 기다리며, 승전연회와 장례식 준비로 바빴다. 물론 그 마저도 현종의 지시가 있어야 하지만 전쟁터에 나가 있는지라 천우맹의 장이 화산이니 화산에서 여는게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화산에 남아있던 제자들은 수고한 사형제와 사매, 사질들 또는 사형제와 사숙, 사고를 어떻게 맞이할지 들뜬 기색도 역력했다.

 

신호탄이 발사된지 한 시진 정도 지났을까, 어디즈음 왔는지 확인하러 나가본 운암이 사색이 되어 산문에서부터 의약당주를 큰 소리로 부르며 들어왔다. 무슨 소란인가 나와본 현종 역시 소식을 전해듣고 마찬가지로 소란을 듣고 나와본 의약당주와 함께 산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참 떠들썩하던 화산이 이 사태에 분위기가 착 가라앉고,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하나 둘 눈치를 보던 이들도 너 나 할 것 없이 걸음을 옮겼다.

산문이 화산의 제자들에 의해 꽉 막혔을때 즈음, 하나 둘 아는 얼굴이 속속 드러냈다. 다 살아 있는거 아닌가? 싶어 좋아하면서 덕담을 날리는 제자도 있는가 하면, 한명이 빠진걸 깨달은 제자도 있었다. 그게 누구인지 깨닫기까지는 각기 다른 시간이 걸렸다. 현종이 떨리는 손을 수레에 뻗으며 다가갔다.

“제 22대 제자 백상이 장문인을 뵙습니다.”

그러자 앞에 있던 백상이 길을 비켜드리며 포권을 한 뒤 인원 보고를 시작했다.

“…까지 중상자 1명 외 무사히 귀환했습니다.”

   이상하다. 한 명이 없다. 백천은 점점 확신에 가까워지는 가설을 지우려 애썼다. 청명이가, 제일 강한 이가, 제일 앞에 서서 제 사형제들과 장난 칠 것이라 생각했던 놈이 오늘따라 유독 조용하다. 그제서야 수레에 올라타 있는채로 체중을 실어 무언가를 누르고 있는 듯한 윤종과 조걸의 모습이 백천 눈에 들어온다. 못이 박힌 듯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겨 수레에 다가가니 아니나 다를까 힘이라고 전혀 없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 13대제자이자 제 23대제자 청명이 장문인께 인사 올립니다.”

어쩌면 이십여년 전, 그러니까 청명이 비급을 발견했다며 발연기 했던 그때부터 이미 예상은 했지만 누구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던 가정을 인정하는 청명의 말에도 잠시간 아무도 말을 하지 못 했다. 다른 이들도 크고 작은 부상을 달고 있었지만 청명은 팔 한쪽이 뜯기고 복부는 큰 구멍이 뚫린 상태였다. 이미 피를 많이 흘린 탓인지 혈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청명의 몰골에 버티고 있는 것이 용할 지경이었다.

“이런 꼴로 인사드려 죄송합니다. 그래도 약조 해 드렸던 것처럼 모두 무사히 귀환했습니다.”

…아니지 않느냐.

   “100년 전에는 못 했던 일을 지금에서야… 쿨럭, 해냈습니다.”

   너가, 너가 죽어가고 있잖느냐

   “이 말씀은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왜 너 혼자 마지막을 맞고 있는거야.

   “그때 제대로 끝냈더라면 마음 고생 조금이라도 덜 하셨을텐데 죄송합니다.”

   언제를 얘기하는지 알기에 별다른 첨언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것을 마음에 두고 계셨나, 눈시울이 붉어진 현종이 답했다.

“아닙니다. 선조께서 돌아와 주셔서 지금 이 순간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그저, 손을 잡안주고 상처와 한, 자기혐오로 너덜너덜해진 선조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 해주는 것 외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현종은 그저 제 진심이 전해질 수 있도록 진심을 담아 웃었다. 청명 역시 안도의 한숨과 함께 웃어보인다. 그러다 다가온 백천을 본 청명이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내더니 입을 열었다.

“사숙, 울어? 아이고 아직도 울보네.”

청명이 말하고 나서야 우는걸 자각 했는지 이젠 아예 팔에 얼굴을 묻고 우는 백천에 청명은 조금 미안하면서도 안심이 되었다. 좀 마음이 여린게 흠이긴 하지만 밀고 나갈때는 멧돼지가 따로 없으니 잘 하겠지. 청명이 팔을 살짝 들어봤으나 이내 떨어지려 하자 다급히 잡는 백천에 피식 웃음을 흘린 청명이 꺼져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숙은 나 같은 망둥이 없어도 잘 먹고 잘 살고 잘 할거야. 그렇지? 그 잘난 진가니까.” 

“…”

“내 역할은 여기까지야… 앞으로 화산 잘 부탁해. 잘 하나 안 하나… 지켜볼거야. 고마—…”

청명의 말이 끝내 맺어지지 못하고 잦아드니, 상태를 계속 확인하던 의약당주가 희미하게 잡히던 맥 조차도 멎자,  이를 고하고 의약당으로 가 흰 천을 들고왔다.

“우리도, 고마웠다. 청명아”

흰 천을 청명의 얼굴에 덮자, 그제야 청명의 죽음이 실감나는지 숨죽여 우는 이들과 주저 앉아 통곡을 하는 사람, 망연자실하게 흰 천을 바라보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현종이 정신을 차리고는 이미 힘을 잃은 손을 하염없이 붙잡고 눈물을 속으로 삼키는 백천과, 청명을 살려서 데려오려고 온갖 노력을 한 덕에 땀과 눈물로 얼굴이 범벅이 된 조걸과 윤종을 말 없이 안아주는걸로 위로 해줄 수 밖에 없었다.

선계에서 그리워 하던 이들을 만나 회포를 푸시길, 걱정도 분노도 잊고 편히 쉬시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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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제자 매화검존 청명(梅花劍尊 靑明)

23대제자 화산검협 청명(華山劒俠 靑明)

XXX년 X월 X일 천마의 수급을 베어내고

화산의 매화를 곳곳에 떨쳐

천하에 봄이 왔음을,

화산에 더이상 겨울은 없음을 알리고 화산에서

사숙, 사고, 사형제들 품에서 눈을 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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