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툭죽 재록본 사 초 이야기

[ㅎㅌㅈ/드라로나] 다친 인간, 기다리는 흡혈귀, 울부짖는 아르마딜로

초가을의 이야기

“…면회 시간이 안 맞는다고?”

드라루크가 어리둥절히 되물었다. 히나이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괜스레 미안함을 내비쳤다.

“응. 로널드가 입원한 병원이 낮에만 면회객을 받거든. 원래는 저녁도 받아줬지만 최근에 하급 흡혈귀가 그 주변에 늘어나서 낮으로 제한됐어.”

흐음― 그런가. 드라루크는 가볍게 숨을 뱉었다. 요란법석한 사고가 어젯밤 일. 어중이떠중이 흡혈귀를 퇴치하다 방심을 한 로널드는 그만 건물에서 추락했다. 타고난 운동신경으로 완벽한 착지를 선보였다만, 때마침 아저씨 다리 타조 떼가 그 길목을 질주하고 있어서, 그대로 깔려 쥐포가 된 게 사고의 전말이다.

경이로운 체력으로 스스로 일어난 로널드는 흡혈귀를 마저 해치웠다. 그러고는 드라루크에게 날이 밝아지니 존과 먼저 집에 들어가라고 일렀다. 자신은 병원에 들렀다 갈 거라고 덧붙였다. 사고라기에는 상당히 슬랩스틱에 가까웠고, 그 말을 한 로널드도 멀쩡히 두 발로 서있었으니 이미 돌아왔을 거라 짐작했는데. 눈을 떠보니 집안은 캄캄했고 출근을 한 히나이치가 그의 소식을 대신 전해줬다.

“히나이치 군은 로널드를 봤는가? 상태는 어때 보였나.”

“부상보다는 병원에 갇힌 것에 더 고통받고 있어.”

“역시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

그 고릴라와 걱정이라니. 정말 안 어울리는 단어끼리 모였다. 자신의 소감과는 다르게 품속의 존은 어쩐지 서글픈 울음소리를 내었지만. 드라루크는 존을 더 둥글게 안고 등을 토닥였다. 그래도 뭐, 예의상 쿠키라도 구워야겠지.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서 전달하면 될 거다. 드라루크는 로널드의 책상 위 달력에 시선을 돌렸다. 오늘부터 사 주간 뉴 드라루크 성의 구성원 하나가 자리를 비운다. 가장 떠들썩하고, 가장 존재감이 큰 인간이. 달력 뒤 창문 너머로 휘영청 떠오른 달이 드라루크를 응시하고 있었다.

“사 주….”

홀로 하늘을 빛내는 달. 외빛을 바라보며 드라루크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꽤나 쓸쓸한 시간이 되겠어….”

 

 

로널드가 입원한 지 일 일차

드라루크는 눈빔이로 프로젝터를 쏘며 빵빵한 서라운드 스피커가 곁들여진 qs4 게임을 즐겼다.

 

 

로널드가 입원한 지 이 일차

말 그대로 꿀잠을 잔 드라루크는 일어나자마자 휴대폰을 집었다. 라○ 앱 옆에 어마 무시한 숫자가 적혀있어 움찔 몸을 떨었다.

 

꼴좋구나, 로널드여. 드라루크는 코웃음 치며 로널드의 절규를 정독했다. 시간대를 보니 식사 때마다 바로 타자를 연타한 듯했다. 이 몸의 소중함을 이제야 깨닫다니. 역시 미욱한 종족이로다. 이 기회에 자신에게 빌빌거리는 목소리나 들으려고 전화를 걸자, 신호음이 한 번 가나 싶더니 바로 끊어졌다. 그 대신 새로운 라○이 득달같이 쏟아졌다.

이 고릴라가…! 대화창 상단에 가득한 굽신거림은 금세 잊었는지, 로널드는 이중인격자 마냥 이번에는 옹졸한 힐난을 무더기로 보냈다. 해보자는 건가. 열의가 불타올랐다. 드라루크는 조용히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식탁 위에 어제 구운 쿠키, 존에게 줄 케이크, 새로운 레시피로 만든 머핀을 차례차례 늘어놨다. 깔끔한 각도로 사진을 찍고 단 한 글자의 사족도 없이 로널드에게 전송했다. 그 뒤 잽싸게 알람을 무음으로 바꾸고 식탁에 내려뒀다.

뭔가 화면이 번쩍이는 것 같지만 제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 드라루크는 산뜻한 맘으로 케이크를 잘라 존에게 건넸다.

 

 

어디서 듣고 온 건지 별난동물이 사무소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집주인도 없는데 흡혈귀끼리 뜨거운 문학의 장을 열자며 온갖 잡지와 DVD를 와르르 흩뿌렸다. 그러나 이 자리엔 흡혈귀 대책과 히나이치가 있었고, 매서운 법의 철퇴에 별난동물은 눈물과 함께 도망쳤다. 히나이치가 쫓아간 사이, 드라루크는 떨어진 잡지 한 권을 슬쩍 망토 안에 숨겼다.

 

 

로널드가 입원한 지 오 일차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네, 한다 씨.”

“아니, 괜찮다. 흡혈귀가 인간 병원 때문에 겪는 곤혹은 나도 잘 안다.”

한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의 앞에는 로널드에게 보낼 몇 가지 과자가 놓여있었다. 건방진 라○에 국물도 없는 한 달을 보내게 하고 싶었다만, 이후에 만족할 만큼 납작 엎드리길래 아량을 베풀기로 마음먹었다. 한다는 대접받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내가 어릴 적 우리 아버지도 잠시 병원 신세를 진 적이 있었지. 어머니는 보호자라 시간 제약 같은 건 없었지만, 역시 체질 때문에 말이야. 낮에는 내가 아버지 곁에 있었다. 해가 떨어지고 한 시간 정도 기다리면 언제나 어머니가 급히 병실에 들어오셨다. 일어나자마자 바로 달려온 거였어. 흡혈귀인 티를 내지 않으려 모자까지 눌러쓰고. 날도 따뜻했으니 분명 더웠겠지.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권해도 어머니는 장소가 장소라며 끝까지 모자를 고수하셨어.”

눈썹 사이로 주름이 졌다. 한다가 끙 소리를 내면서 소파에 등을 기댔다.

“…아무래도 병원은 흡혈귀에 민감하니까. 건물 전체에 아픈 인간이 가득하고, 수혈 팩도 한가득 쌓아두니. 대책과 못지않은 인재가 그곳의 보안을 담당하지. 그러니 너 같은 약골은 얼씬거리지 않는 게 좋다. 분명 눈에 띄자마자 바로 퇴치당할 테니까.”

“새겨듣도록 하지.”

벌써 한 귀로 흘려들은 드라루크가 대꾸했다. 아무튼 이건 로널드에게 전달하겠다. 한다가 과자상자를 집어 종이가방에 넣었다. 가는 건가 싶어서 드라루크가 일어나자, 한다는 의견을 묻고 싶은 게 있다며 한 손을 들었다. 다른 손으로는 품 안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디에 넣어 온 건지 알 수 없는 물건 두 개가 한다의 품에서 튀어나왔다.

“셀러리 꽃다발과 셀러리 과일 바구니. 둘 중 뭐가 그놈에게 타격이 클까!”

…‘꽃’도 아니고 ‘과일’도 아니다. 지적하려면 끝도 없지만 드라루크는 아무 말 않았다. 어떻게 그러겠는가. 이 친절한 담피르는 드라루크의 부탁으로 여기 당도한 건데. 안 좋은 소리를 하면 쓰나. 드라루크는 조용히 그 몫의 우유 잔을 들었다. 순백의 바다가 잔 안을 넘실거렸다. 로널드여, 그대도 이해하겠지?

“그러지 말고 하나는 내 몫으로 보내주게.”

“그것참 마음에 드는 소리군!”

한다가 호탕하게 웃었다. 드라루크도 미소 지으며 잔을 기울였다.

 

 

그 뒤로는 무한한 감사의 말이 반복되었다. 어쩐지 입원한 이후로 더 단순해졌는데. 병원밥이 그 정도로 형편없나. 로널드와의 대화창에서 벗어나 이번엔 한다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아주 만족스러운 반응이었다며 그 생생했던 현장을 친히 공유해 주었다. 사진 속에서 로널드는 흡사 엑소시즘 영화를 재현하려는 듯 누운 자세 그대로 침대에 붕 떠올랐다. 옆에서는 한다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꽃다발과 바구니를 끌어안고 있었다. 사진을 찍은 사람은 카메야겠다. 내일쯤 기사가 올라오려나. 어쩌면 이미 나왔을 수도.

“이것 좀 봐, 존.”

드라루크가 부드럽게 존을 끌어당겼다. 이 꼴사나운 장면을 혼자 보기 아까웠다. 그러나 사진을 본 존은 구슬프게 울며 화면에 머리를 비볐다. 쌀알만 한 눈물이 존의 눈가에 맺혔다.

“이런, 존.”

조금 당황한 드라루크가 얼른 존을 안았다.

“역시 존은 착하다니까. 고릴라가 보고 싶었던 거야? 말하지 그랬어. 내일 다녀와.”

누― 존의 울음이 방금 보다 밝아졌다. 혼자 가서 미안하다는 기색이 섞여있었다. 뭘 그런 걸 신경 써주는지. 자신은 전혀 상관없는데. 존의 머리를 잠시간 쓰다듬은 드라루크는 이제 집안일을 위해 청소기를 찾았다. 오늘은 대청소의 날이다.

 

 

오랜만의 산책이다. 그동안 너무 집에 틀어박혔다. 쓰레기 게임도 실컷 하고 청소도 반짝반짝 해치우고 잡지도 완독하니 다음 할 일이 생각나지 않았다. 뭐든 재밌는 일이 일어나면 좋겠다 싶어서 길드로 향했다.

역시 길드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드라루크는 흥겨운 발걸음으로 바 좌석에 가 앉았다. 마스터가 오랜만이라며 인사했다. 마주 인사하며 드라루크가 따뜻한 우유를 주문했다.

“어이, 드라루크!”

샷이 바로 그의 옆자리를 꿰찼다.

“소식 들었어. 로널드 입원했다며? 지금은 좀 어때?”

“으음, 글쎄. 다섯 살 애처럼 반찬 투정하고 있다는 것 외에는 나도 잘 모르네. ”

“어째서?”

“지금 밤 면회는 안 받고 있거든.”

어느새 다른 옆자리에 앉은 사테츠가 대신 답했다.

“내가 오늘 낮에 갔을 때는 안색이 괜찮았어. 회복도 잘 되어가고 있대.”

“형씨도 간 건가. 역시 상냥하군.”

“별로 그렇지도 않아. 길드의 상당수가 병문안을 갔거나 갈 예정인걸.”

“뭐?”

사테츠가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신요코하마 길드는 서로를 살핀다는 느낌이 강하니까. 누군가 다치면 자연스레 뒤를 봐줘. 바모네 씨와 시냐 씨는 이미 다녀왔고, 마리아랑 타창은 이번 주에 갈 계획이라고 알고 있어.”

“이런, 다들 빨리 가는군. 어이, 타창! 마리아! 나도 병문안 갈 때 끼워줄래?”

맘이 급해진 샷이 판초를 펄럭이며 자리를 떴다. 사테츠는 그 밖에도 여러 사냥꾼이 병원을 방문했음을 알려줬고, 그들이 본 로널드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야기 속 로널드는 의젓하기도, 투덜거리기도, 드물게 곤히 잠든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둘의 대화를 주워들은 몇 사냥꾼이 자연스레 한마디씩 보태자 어느새 길드의 모든 입에서 로널드가 오르내렸다.

퇴원하면 길드에서 파티라도 열까? 누군가 제안했다. 사실은 그냥 로널드를 빌미로 놀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호응이 제법 따랐다. 날짜는 언제가 좋을까, 주말로 할까, 아니면 퇴원하자마자 바로 여기 데려올까. 하지만 퇴원 당일은 조용히 쉬고 싶어 할지 모른다. 동거인의 생각은 어떤지 의견을 구하려 고개를 돌리자,

흡혈귀는 어느새 사라졌다.

 

 

“아아― 지루하게도. 기껏 놀러 간 건데 고릴라 얘기만 실컷 듣다니.”

쯧 혀 차는 소리가 나왔다. 아직 그의 무료함은 달래지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다. 밤은 기니까. 드라루크는 달이 이 도시를 지배하는 동안 유유자적이 골목을 쏘다녔다. 발걸음 닿는 대로 걷다가 문득 보이는 건물에 다리가 천천히 멈췄다.

여기까지 와버렸군. 거대한 벽돌 같은 병원이 도로 건너 서있었다. 뉴 드라루크 성에서 꽤 먼 거리인데. 산책에 제법 몰입했나 보다. 드라루크는 흥미롭게 건물을 관찰했다. 과연 한다가 말한 대로 무장한 경비원이 군데군데 배치되었고, 가로등마다 흡혈귀 퇴치제가 설치되어 있었다. 경비원 두 명이 그를 발견하고 서로 속닥거렸다. 병원 지대에 들어온 건 아니니 딱히 이렇다 할 행동은 보이지 않았다.

그에 드라루크가 보란 듯이 알짱거리며 병원 외관을 살폈다. 저곳 어딘가에서 로널드가 잠들어 있을 터다. 입원하는 동안 다른 환자와 맞춰 생활하느라 밤낮이 바뀌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같은 병실의 환자가 로널드의 팬이어서 아들처럼 챙겨준다는 말도 들었다. 또 씻는 것도 대충해서 수염이 까끌까끌 나왔으며, 마감이 미뤄져서 눈에 띄게 안심하고, 아직까지는 화장실에 갈 때에나 겨우 움직인다거나, 병원 관계자의 찬사 세례에 휘말려 덜컥 사인회를 약속해버린 것도 드라루크는 알고 있었다.

“…아, 이런.”

의식치 못한 탄식이 나왔다. 저 수많은 창문 중 새까만 창 너머에 로널드가 있다. 그러나 그것만 추려도 여전히 많았다.

“나는 그의 병실 호도 모르는군….”

하늘이 맑았다. 가려진 것 없는 달이 지상을 환하게 비췄다. 빛이 닿지 못한 곳의 그늘은 평소보다 더 짙었다.

로널드의 퇴원까지 앞으로 십 칠일

 

 

똑똑. 노크 소리에 드라루크가 문을 열었다. 단정한 정장 차림에 살벌한 도끼를 든 남자가 그 자리에 있었다. 후쿠마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잘 지내셨나요, 드라루크 씨.”

“좋은 밤입니다, 후쿠마 씨.”

들어오시죠. 드라루크가 문을 마저 열어 후쿠마를 안으로 들였다. 오늘 저녁, 갑자기 찾아오겠다는 연락에 의아함과 긴장감을 느꼈다. 무슨 일이지. 게임 리뷰는 다 끝냈는데. 아마도. 여차하면 어디선가 아이언 메이든이 튀어나올지도 모를 상황이지만, 일단 겉보기에는 평화로운 분위기라 드라루크가 정중히 차를 권했다. 그러자 후쿠마가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아, 괜찮습니다. 금방 돌아갈 거라서요. 로널드 씨의 노트북을 가지러 왔는데 어디 있는지 알려주시겠나요?”

“노트북요?”

“예. 로널드 씨가 이제 다시 집필할 수 있다 해서요. 앞서 쓴 글을 노트북에 저장했다기에 제가 전달해 드리기로 했습니다.”

“로널드 군이 많이 나아졌나 보군요.”

별로 감흥 없는 목소리로 드라루크가 말했다. 이렇게 또 남의 입에서 그가 나온다. 로널드 병문안이 최신 유행이라도 된 것 같다. 그런 세상이 존재하다니 참으로 끔찍하다. 말세로구나. 그의 마음을 모르는 후쿠마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다시 예의 바르게 떠났다.

긴장이 풀려 스르르 소파에 앉았다. 다리 위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괴었다. 오늘따라 적막마저 거슬렸다. 오늘은 또 뭘 해야 할는지. 일단 장을 먼저 봐야겠지. 존이 머핀을 먹고 싶어 했으니 재료를 사야 한다. 냉장고에 달걀이 충분히 남았던가 떠올리려 할 때, 휴대폰이 울려 상념을 방해했다.

후쿠마 씨인가. 드라루크가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발신자를 본 순간, 그는 멍청하게도 수신 버튼 누르는 걸 잠시 잊었다.

“로널드 군?”

받는 거 느려! 전화 너머 로널드가 투덜거렸다. 밤에 전화는 민폐라고 했으면서, 이 야심한 시간에 그에게 연락을 한 것이다. 중요한 일이라도 생긴 걸까.

“무슨 일인가. 그보다 이렇게 대화해도 되나?”

‘어. 나 이제 좀 움직일 만해서, 잠시 병실 밖으로 나왔어. 지금 비상계단이야.’

아. 후쿠마 씨가 말한 대로구나. 곧바로 이해가 갔다.

‘나 없는 동안 사무소에 별일 없었나 해서. 사고 친 거 없지? 있으면 알아서 수습 잘 해라.’

“어이없는 소릴. 여긴 오히려 그대가 있기 전보다 훨씬 쾌적하다네. 존의 껍데기도 호박처럼 반들반들하다고.”

‘존? 존 지금 근처에 있냐? 좀 바꿔봐. 존― 조오오온―!’

환자치고는 아주 팔팔한 성량으로 존을 불러재꼈다. 소리를 들은 존이 휴대폰 옆으로 꾸물꾸물 다가왔다. 작은 울음을 용케도 들었는지 외침이 더 우렁우렁해졌다. 계속 듣다간 귀쪽에서부터 모래가 될 거 같았다. 드라루크가 휴대폰을 멀리 떨어뜨리고 목소리 좀 줄이라며 타박하자, 그래도 이성은 남았는지 한결 얌전해졌다.

그러고는 몇 분 남짓 통화가 이어졌다. 별로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없었다. 이미 주변에게서 다 들어 알고 있는 일상의 잡담이었다. 통화의 끝은 미적지근했고, 드라루크도 전화를 끊은 후 예정대로 장을 보러 나섰다.

어지간히 심심했는지 로널드는 다음날에도 전화를 걸었다. 그 다음날도. 또 그다음의 날도. 길게 통화해 봐야 십 분, 존이 끼어들면 이십 분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어쨌거나 전화는 그가 퇴원할 때까지 끊이지 않았다.

로널드의 퇴원까지 앞으로 십 사일

 

 

“그렇게 쳐다보다 목 빠지겠어.”

익숙한 목소리다. 고개를 돌리자 낯익은 파란 눈이 그를 반겼다.

“로널드 군의 형님.”

“요 근래 고위 흡혈귀 한 명이 이 주변을 서성인다는 신고가 들어와서 말이야. 동생이 입원한 병원이기도 하니 내가 출동했네.”

자리를 옮길까? 히요시가 고갯짓했다. 안내에 따르자 우유 아이스크림 전문점에 다다랐다. 뭔가 경찰이 데려가는 가게면 어두침침한 곳일 줄 알았는데… 여긴… 굉장히 하얗고 빛났다. 동생의 동거인이라는 요소가 영향을 끼친 걸까.

아니나 다를까, 히요시는 아이스크림을 건네면서 ‘로널드에게도 사줬는데 좋아하더라’ 알려 줬다.

“퇴원도 이제 일주일 남았지― 사 주라, 꽤 길었어. 그 애 성격에 이만큼 버틴 건 기적이지. 그렇지 않나?”

“맞는 말이죠. 얌전히 버티지는 않았지만.”

그간의 불평불만을 떠올리며 드라루크가 말했다. 아이스크림을 한 수저 퍼서 입에 넣자 달짝지근한 우유맛이 입을 채웠다. 괜찮은 맛이다. 히요시가 말이 없어 슬쩍 쳐다보니, 은은한 호선이 그의 입술 끝에 걸려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마냥 기분이 좋다기보다는 어쩐지 씁쓸하고, 그리운 무언가를 떠올리는 얼굴이었다. 드라루크의 시선에 그가 상념을 털어내듯 머리를 저었다.

“예전 생각이 나서. 철들고 나서부터 로널드는 내게 힘든 일을 숨기거든. 자네에게는 솔직해서 다행이야. 동생에게 좋은 친구인가 봐. 뭐, 걱정돼서 여기까지 온 거 보면 확실히 좋은 친구지.”

윽. 그냥 넘어가면 좋았을 텐데. 마지막 문장에 드라루크는 아이스크림이 목에 걸리는 느낌을 받았다. 뒤늦은 민망함으로 볼이 파스스 무너져내렸다. 그 모습에 히요시가 키득거렸다. 하지만 구태여 짓궂은 말을 더 하진 않았다.

“너무 마음 쓰지 않아도 되네. 회복도 순조롭고, 솔직히 며칠 조기 퇴원할 수 있는 걸 내 욕심으로 더 있게 한 거야.”

“투정 받은 입장에서 말하자면 병원보다는 집이 더 나을 거 같습니다만.”

“그런가? 음….”

히요시가 수저를 입에 물고 팔짱을 꼈다.

“로널드가 자네에게 어떤 소릴 했는지 궁금하군. 내가 보기엔 그럭저럭 적응했는데. 잠도 안 설치지, 시설도 쾌적한데다가 사람도 친절하지, 거기에 삼시 세끼 건강하게 챙겨 먹고 있―”

“잠깐. 뭐라고요?”

드라루크가 고개를 휙 들었다.

“어?”

“마지막 말이요. 뭐라고 하셨죠?”

“잘 먹고 다닌다고.”

히요시는 왜 그러냐는 눈으로 쳐다봤다. 엉뚱한 부분에서 질문을 받았다는 표정이다. 머릿속에 혼란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드라루크가 두 눈으로 직접 본 거냐고 재차 캐묻자, 히요시의 목소리가 살짝 커졌다. 당연하지. 난 걔 보호자야. 시간 날 때마다 방문했다고. 밥 먹는 모습은 엄청 자주 봤어.

“저한테는 환자식이 형편없다고 했는데.”

“엥?”

“흡혈귀 채소 같은 맛이라고….”

…뭐지? 혼란이 히요시에게도 전염됐다. 두 사람이 앉은 자리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드라루크는 전등을 올려다봤다. 하나의 가설이 뇌리를 스쳤다. 가족애가 엄청난 로널드 군, 오로지 형의 걱정을 피하기 위해 그가 올 때마다 흡혈귀 채소 맛이 나는 환자식을 들이켠다…. 와아, 참 대단해… 로널드 전기에서도 보지 못한 감동 스토리….

“투정이 아니라 응석이었나….”

네? 드라루크의 고개가 원위치 됐다. 딴생각에 제대로 듣지 못했다. 갑자기 눈이 마주치자 당황한 히요시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아냐, 아무것도. 히요시는 남은 아이스크림을 박박 긁어먹고는 별일도 없으니 슬슬 복귀해야겠다며 일어났다. 둘은 가게 앞에서 짧게 인사했다.

“자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의미심장한 말. 히요시는 자신만이 이해하는 말을 던지고는 뒤돌아 떠났다. 어쩐지 발걸음이 전보다 더 가벼워진 것 같았다.

 

 

장바구니 두 개를 힘겹게 내려놓았다. 이틀로 나눠 장을 봐온 건데도 그 양이 상당했다. 진짜 고릴라도 이렇게 많이 먹지 않을 거야. 바스락거리는 팔을 주무르며 드라루크가 꿍얼거렸다.

퇴원하면 뭘 먹고 싶은지 물어본 게 화근이었다. 거의 불경을 외듯 끝없이 음식을 나열해서 전부 준비했다간 사무소에 뷔페를 열어야 할 지경이었다. 기겁한 드라루크가 일 할로 줄이라 소리치자, 한참을 심사숙고하더니 몇 가지를 꼽았다. 그 정도면 할만한 거 같아서 알겠다고 했다. 그길로 요리 순서를 정하고, 필요한 재료 목록을 작성하고, 마트로 가 장을 보았다.

퇴원은 내일이지만 재료 손질은 지금부터 해둬야 제시간에 완성될 거다. 드라루크는 가볍게 채소를 씻고, 고기의 밑간을 해뒀다. 디저트는 지금 만들어도 괜찮으니 밀가루 봉투를 뜯었다. 부엌을 크게 쓰는 건 오랜만이라 조금 흥겨워졌다. 콧노래가 흥얼흥얼 나왔다.

다 만든 케이크를 냉장고에 넣어뒀다. 다음 밤에 먹을 때쯤이면 더 맛있어졌겠지. 시계를 보니 벌써 날이 밝기 일보 직전이었다. 드라루크는 얼른 관으로 들어가 뚜껑을 덮었다.

몇 시간 뒤면 로널드가 돌아온다. 꾀죄죄한 몰골로 들어와 눈빔이에게 제일 먼저 인사할 것이다. 그다음은 금붕어와 죽음의 게임과 존이겠지. 존이 깨어있으면 또 배에 얼굴을 파묻지 않을까. 그거 상당히 변태처럼 보이는 건 본인은 알려나 모르겠다. 저녁 즈음이면 집안의 불을 밝히고 드라루크가 눈 뜨는 걸 기다릴 테다. 보자마자 무슨 소리를 할까. 사실 어제도 통화했으니 새삼 훈훈한 말을 주고받을 이유는 없었다.

그래도 뭐, 고생했다고 한마디 정도는 해줘야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드라루크가 눈을 감았다. 준비 때문에 피곤했는지 수마가 금세 찾아왔다.

 

 

콩콩콩. 관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드라루크가 곧바로 뚜껑을 열어젖혔다.

집안이 온통 컴컴했다.

 

 

깜깜한 방과 멀뚱히 일어난 흡혈귀 한 명. 바로 옆에는 아르마딜로가 있고 바닥에는 죽음의 게임, 수조에는 금붕어가 뻐끔거리고 있다. 인간은 없었다. 드라루크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려 애썼다. 집을 탐색했다. 토끼우리 만한 공간을 돌아보는 건 삼십 초도 안 걸렸다. 그다음에는 달력을 찾았다. 혹시 자신이 퇴원 날짜를 착각한 건 아닐까? 그러나 달력에 그려진 빨간 동그라미는 휴대폰에서 본 날짜와 일치했다. 그럼 휴대폰. 그에게 온 메시지는 없다.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음만 한참 가고 받지 않았다. 그럼… 이제 뭘 확인하지?

불현듯 드라루크는 정말로 이 장소에 인간이 한 명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히나이치 군! 같이 로널드의 복귀를 축하하기로 했는데 그 또한 자리를 비웠다. 드라루크는 연락처 목록에 있는 히나이치의 이름을 눌렀다. 또다시 신호음. 아, 이번엔 제대로 닿았다.

‘드라루크?’

“히나이치 군! 왜 아직 안 왔는가. 지금 집에 고릴라도 그대도 없어서 얼마나 놀랐는데.”

‘윽, 벌써 저녁인 거야? 긴급 출동 때문에 아무것도 몰랐어. 나 지금 병원이야. 로널드가 입원한.’

로널드의 이름이 나오자 드라루크가 잠깐 숨을 멈췄다. 휴대폰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침착한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무슨 사고라도 생긴 건가?”

그게… 히나이치가 머뭇거렸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가늠이 안 잡히는 눈치였다.

‘저번에 하급 흡혈귀가 이쪽에 자주 출몰한다 말한 거 기억나? 사마귀 흡혈귀였는데, 그놈이 병원 내부에 알을 깠어.’

“…알?”

‘응. 며칠 좀 됐나 봐.’

“그 말은 즉….”

‘…알이 부화해서 건물이 온통 사마귀 새끼로 가득 찼었어.

으아악― 소름 끼치는 말에 드라루크가 한순간 재가 됐다가 재생했다. 그가 가진 뛰어난 두뇌가 참사의 현장을 생생히 그려냈다. 히나이치는 그 때문에 출동해서 지금까지 사마귀를 소탕하고 있었다 설명했다. 대낮부터 일어난 일이라 퇴원하려던 로널드도 합류했다는 말과 함께.

‘새끼는 다 잡았고 지금은 침입 경로를 파악 중이야. 그런데 로널드는… 퇴치 중에 넘어졌다나 봐. 응급실에 갔다던데 더 자세한 건 나도 물어봐야 알아. 어쩌면 오늘 내로 못 돌아갈지도.’

…아. 그렇게 된 거구나. 드라루크는 알려줘서 고맙다며 통화를 끝냈다. 그러니까, 별일은 없었다. 퇴원이 하루 늦춰진 것뿐이다. 심각한 사고도 없었고 냉장고 속 재료도 상할 일 없다. 그냥 어제처럼, 그제처럼, 지난 사 주처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다행이네, 존. 드라루크가 존의 등을 토닥였다. 다행이야. 다행이지. 그러나 어쩐지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게임이라도 할까. 드라루크가 끄응 일어났다. qsq를 어디다 뒀는지 당장 기억나지 않았다. 소파 쪽을 확인하려 발을 뗐을 때, 히나이치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여보세―”

‘드라루크! 로널드 거기 없어?’

“갑자기 무슨 소린가?”

병원에 있다던 사람을 왜 여기서 찾을까. 다짜고짜 로널드의 행방을 물으니 당황스러웠다.

‘지금 응급실 왔는데 로널드가 없어서. 듣기로는 대충 진찰받고 바로 뛰쳐나갔대.’

“뛰쳐나갔다고?”

‘응. 직원 말로는―’

드라루크가 히나이치의 말을 자세히 들으려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자 통화음 외의 소음이 이 건물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현관 방향. 드라루크가 몸을 빙글 돌렸다. 하나의 발소리. 무겁지만 그 리듬은 경쾌한. 너무나 잘 알지만 한동안 마주치지 못한 소리가 이쪽으로 점점―

‘―가족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는데.’

“다녀왔습니다!”

사무소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로널드가 외쳤다. 눈빔이에게 인사하는 목소리가 건너편에서 들린다. 이어서 빠른 발걸음, 문고리를 잡는 소리, 그것이 부드럽게 돌아가며 벽과 문 사이가 벌어지는 흐름을 만들었다.

“다녀왔어, 드라루크.”

피곤한 안색의 로널드가 말했다. 한쪽 어깨에 멘 가방을 내려놓고 그 위에 외투를 얹었다. 신발을 벗으면서 으으 앓는 소리를 냈다. 그가 지척으로 성큼 다가오는 것까지 보고 나서야 드라루크는 통화 상대를 기다리게 하고 있는 걸 깨달았다.

“응, 히나이치 군, 로널드 군이 왔다네. 응, 그래. 케이크는 남겨 놓지.”

통화 중이었냐? 전화를 끊는 드라루크를 보며 로널드가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대답을 바라지는 않았는지 그를 지나쳐 부엌으로 갔다. 불 좀 켜라. 지금이 몇 신데. 이번에도 혼잣말하며 불을 밝혔다. 이제 좀 사람이 사는 공간 같다. 로널드는 가방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가 주섬주섬 비닐봉지를 꺼내들었다. 그러고는 불쑥 드라루크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드라루크는 봉지를 받아 내용물을 확인했다. 작은 컵에 포장된 아이스크림이 여러 개.

“…이게 뭔가?”

“퇴원 기념 선물. 병원 앞에서 파는 건데 맛있더라. 나중에 애들이랑 나눠 먹든가 해.”

그 뒤 로널드는 존을 안고 서너 바퀴 빙 돌았다가, 진심으로 씻고 싶다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샤워기의 물소리가 집 안에 퍼져나갔다. 폭풍처럼 일어난 일에 드라루크는 얼떨떨하게 서 있었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냉동실에 아이스크림을 넣었다. 냉장칸을 열어 식재료를 꺼냈다. 물을 올리고 채소를 썰었다. 일정한 박자의 칼 소리가 부엌에서부터 들려왔다. 나지막한 흥얼거림이 어느새 함께 했다.

 

 

“다음부터는 VRC에 가든가 해야지. 일반 병원은 못 지내겠어.”

케이크까지 다 해치우고 나서 로널드가 한탄했다. 깨끗이 씻고 배까지 채운 로널드는 제법 윤기가 흘렀다. 그럼에도 아직 정신은 어딘가 붕 떠있었다. 접시를 치우던 드라루크가 그렇게 병원 생활이 힘들었냐고 물었다.

“음, 굳이 따지면 지낼 만은 했지. 그런데 역시 뭐라고 해야 하나… 병원이 아니라 내가 문제라는 느낌. 아무래도 거긴 낮을 중심으로 움직이니까. 이제 내 일상은 전부 밤에 있는데.”

뭘 하고 있든 내가 사는 신요코하마가 아닌 거 같았어― 로널드가 식탁 위로 엎어졌다. 여기 있으니 좋네. 역시 집이 최고야. 웅얼거리는 목소리는 조금 잠겨있었다. 드라루크는 식탁에 손을 올렸다. 로널드의 머리칼이 손끝에 닿을 듯 말 듯 했다. 숨소리가 깊어졌다.

“이보게, 다섯 살 꼬마. 벌써 자려는 건가? 낮 사람 다 되었군그래.”

“뭐래… 아, 다시 밤낮 바꿔야 하는데 큰일 났네.”

“커피라도 내어줄까?”

아니, 괜찮아. 로널드가 홱 상체를 들었다. 찌푸린 눈 속에는 수마와의 치열한 싸움이 엿보였다. 에너지 드링크라도 사 올게. 그리 말하며 로널드가 일어나려 하자, 두 손이 어깨를 내리눌렀다. 그냥 쉬고 있게. 드라루크가 말렸다. 내가 다녀오지.

“어?”

“방금 퇴원하지 않았나. 퇴치까지 했고. 고단했을 텐데 오늘만큼은 특별히 잘해주겠네.”

파란 눈이 깜빡였다. 확실히 평소라면 절대 안 할 짓이지만, 뭐 어떤가. 드라루크는 자신이 눈앞의 인간을 아주 조금, 존의 눈곱만큼 그리워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미운 정이 무섭다. 물론 그 사실을 본인한테 들키는 건 마늘보다 싫으니, 너무 잘해주지는 말고 이 정도로 끝내면 서로 훈훈한 마무리가―

“드라루크, 너….”

로널드가 코밑을 훔쳤다. 하, 녀석. 눈빛이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내가 정말 그리웠구나?”

“…뭐?”

어깨에 올린 손을 즉각 뗐다. 뒷목이 급격히 뻐근해졌다. 이 고릴라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지? 아니, 무슨 소릴 하는 건지는 안다. 망할 사실이니까. 그런데 저렇게 확신에 차서 말할 수 있나? 그가 아는 로널드는 뻔뻔하기는 해도 이런 류의 자뻑은 없었다. 그런데 저 당당한 태도는 뭔가. 꼭 어디서 뭐라도 듣고 온 듯이―

“형한테 들었어. 나 입원한 동안 병원 앞을 어슬렁거렸다고. 네가 그 정도로 내 빈자리를 느꼈을 줄이야…. ”

완벽한 스트레이트 펀치. 정말로 펀치를 맞은 것처럼 드라루크의 얼굴이 폭삭 무너졌다. 진짜 맞는 게 타격이 덜 하리라는 건 너무나 뻔했다. 이제 로널드는 인자한 미소로 드라루크의 어깨를 잡았다. 드라루크는 저 가증스러운 낯짝을 콱 씹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너무 혈압이 오르면 오히려 몸이 안 움직인다는 말을 지금 체험하고 있다. 몸이 사시나무처럼 부들거렸다.

“걱정시켜서 미안해. 앞으로는 몸조심할게. 네가, 큽, 쓸쓸해하지 않도록 말이야. 크흡.”

저 만개한 미소를 보아라. 밝다 못해 터질 것 같은 미소를. 그래, 어찌 안 웃고 배기겠는가. 지금 이 순간 드라루크에게 유례없는 흑역사가 탄생하고 있는데. 로널드의 형님…! 드라루크는 자신이 아는 모든 시대와 나라의 언어로 그를 저주했다. 빠그작 물어버린 입술에서 모래가 솔솔솔 내렸다.

“―그럼 그대는!”

드라루크가 냅다 소리 질렀다. 이렇게 혼자 죽을 수는 없다. 무슨 궤변을 붙이든 고릴라를 끌어들여야 했다. 물귀신으로 전직한 흡혈귀는 되는 대로 지껄이며 로널드의 흑역사를 강제 창조했다.

“그대도 어지간히 내 손맛이 그리웠던 모양이던데! 멀쩡한 음식을 두고 나에게 반찬 투정을 했던 거 보면! 아니지, 내 손맛을 빌미로 나에게 연락하고 싶던 거 아니었나? 그대 형님이 나더러 내가 그대 곁에 있어서 참 다행이라더군!”

됐다. 이 정도면 꽤 그럴듯한 날조다. 드라루크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뭐라 변명하든 이건 맞받아칠 수 있다. 억지를 부리면 부릴수록 더 힘이 실릴 거다. 짧은 시간에 이리 탄탄한 주장을 생각해낸 스스로가 감탄스러웠다. 정말, 남이 들으면 진짜라고 착각할 법…

어?

…정말?

드라루크가 흘끔 로널드를 쳐다봤다. 입을 뻐끔거린다.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린다. 몸 안의 피가 교통혼잡을 겪기라도 하는지 모조리 머리로 몰렸다. 엄청난 빨간색… 와… 우와… 뭐야 잠깐….

“―뭐라는 거야, 이 바보 모래가!”

또다시 스트레이트 펀치. 이번엔 진짜. 어언 사 주만의 급습에 드라루크는 죽어가는 와중에도 참 그리운 감상이 들었다. 잿더미가 파사삭 부엌 바닥에 떨어지고, 여전히 군고구마처럼 불타는 로널드는 이제 파리채를 집어 들었다. 원시인이 몽둥이를 사용하는 것처럼 크게 한번 휘둘러 보이며 말했다.

“저먼 수플렉스. 지금 걸어주겠어.”

안 돼! 진심으로 두려워진 드라루크가 재빨리 부활했다. 냅다 뛰었지만 역시 상대는 신요코하마의 유명 사냥꾼. 한 번에 잡혀 원샷원킬. 사 주의 시간도 그의 실력을 좀먹지 않았도다. 그 사냥감이 자신만 아니었다면 조금쯤은 감탄했을지 모른다. 어서 돌아와. 섬뜩한 목소리로 로널드가 말했다. 아직 한참 남았다고.

여차하다간 로널드가 일출 구경까지 시켜줄지도. 드라루크는 모래 상태로 로널드의 다리 사이를 휙 빠져나갔다. 열린 창문으로 냅다 몸을 던졌다. 부활은 신속 정확하게. 창문을 올려다보니 로널드도 뛰어내릴 준비를 하고 있다. 밤하늘 아래 그의 눈은 흡사 아마존의 그것 같았다. 질겁한 드라루크가 얼른 달려 최대한 거리를 벌렸다. 그 뒤를 흡혈귀 사냥꾼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추격했다. 거리의 행인이 그들을 힐끔힐끔 돌아봤다.

오늘밤, 신요코하마의 공기는 차갑고 불빛은 현란하다. 가장 드높은 곳에 걸린 달은 은은하지만, 그 아래 세상은 온갖 색채를 터뜨리며 역동 친다. 땅 위를 수놓은 무수한 색깔 중 오늘은 유달리 두 개의 점이 눈에 띈다. 빨간 점 하나와 보라 점 하나. 두 개의 점은 주변에 구애받지 않은 채 그들만의 속도로 어둠을 내달렸다. 행성처럼 서로를 공전하고 춤추듯 흘러갔다.

어딘가의 창문에 작은 보름달이 등장했다. 동그란 아르마딜로는 바깥을 내다보며 길게 울부짖었다. 누우우― 구슬픈 울음이 밤하늘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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