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툭죽 재록본 사 초 이야기

[ㅎㅌㅈ/드라로나] 하늘 아래 새로움

초봄의 이야기

해 뜨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고 하지. 정말 그런지는 잘 모르겠고, 그냥 춥다. 뜨끈한 담배 연기를 마시며 로널드가 생각했다.

이렇게 담배를 찾은 것도 별일이다. 평소에는 거의 끊기 일보 직전의 상태고, 정말 긴장하거나 피곤할 때만 피우는데. 알게 모르게 피로가 쌓였나. 무탈한 며칠을 보낸 로널드가 스스로를 진단했다. 음, 역시 멀쩡한 상태서 피우니 몸이 조금 안 받는다. 오기로 열기를 들이마시고 흡 머금었다. 잠시 뒤 구름보다 짙은 연기가 입에서 나왔다. 여전히 으슬으슬하다. 들어가고 싶지만 지금 가면 잔소리 확정이겠지. 담배를 다 핀 로널드는 이제 냄새도 뺄 겸 새벽하늘이나 구경했다. 오늘은 공기도 맑아서 별이 잘 보인다.

옥상은 기분이 묘해지는 장소다. 밖인 건 똑같은데 옥상에서 보는 하늘은 뭔가 다르다. 건물에 있으면서 천장이 없는 게 어색하다. 꾸준히 부는 바람은 그를 다른 세계로 데려가려는 손짓 같았다. 뭐, 그대로 끌려가기엔 가볍지 않은 그지만. 정면으로 한기에 맞서기 힘들어져 반바퀴 몸을 돌렸다. 목덜미에 닿은 바람이 머리카락을 파고들어 모자를 건드렸다. 모자는 멀리 떠나는가 싶더니 옥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로널드는 터벅터벅 걸어 모자를 주웠다. 먼지를 털고 도로 쓰자 문득 짙은 그늘이 시야에 드리워졌다. 일출이다.

오늘 밤도 무사히 지켰구나. 금색 창날이 도시의 어둠을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검은 장막은 거두어져 무대의 전환을 알렸다. 이제 잠시 퇴장이다. 낮의 일은 낮을 지키는 사람에게 맡기자. 그들은 로널드가 했던 것처럼, 로널드는 그들이 했던 것처럼 이 마을을 수호할 것이다. 로널드는 마음속으로 낮의 사람과 바통터치를 했다. 잘 부탁합니다. 그쯤에서 생각을 끝맺은 로널드는 미련 없이 출입문으로 향했다. 햇살이 따뜻하긴 했지만 공기를 데워주기엔 아직 모자랐다. 온기는 그의 발아래, 토끼우리라고 불리는 작은 집에 있다.

조심스레 집 안으로 들어가자 앓는 소리가 작게 나왔다. 그가 느꼈던 것보다 더 그의 몸은 추위에 시달렸나 보다. 로널드는 부츠를 벗고 부엌으로 갔다. 랩에 싸인 아침이 식탁에 올려져 있었다. 이를 만들어준 흡혈귀는 이미 꿈나라에 들어섰다. 햇살 조각 하나가 관 위에 들러붙었다. 이따 커튼 제대로 쳐야겠네. 랩 너머를 확인하려던 로널드는 문득 음식 이외의 것에 시선을 빼앗겼다. 하얗고 네모난 편지봉투가 아침과 함께 놓여 있었다. 봉인은 이미 뜯겨 있다.

로널드는 손을 뻗어 봉투를 집었다. 종이를 꺼내고 천천히 내용을 읽어내려 갔다.

 

 

밤의 열차를 타면 무심코 기대하게 된다. 차창 너머 반짝이는 빛무리를 볼 수 있을 거라고.

실제로는 밝은 실내와 어두운 실외의 조합으로 유리는 거울처럼 그들을 비출 뿐이었다. 물론 유심히 노려보다 보면 바깥 경치야 얼마든지 볼 수 있지만, 그 시점에서부터 살짝 김이 샌단 말이지. 로널드는 자신의 얼굴 구경을 그만두고 다시 한번 편지봉투를 꺼내들었다.

“흡혈귀 전용 식물원이라.”

“정확히는 야간 식물원이지만.”

옆에 앉아있던 드라루크가 정정했다. 나뭇가지 같은 손가락이 광고지의 문구를 가리켰다. 흡혈귀를 위한 야간 식물원 개장. 인간, 동물, 그 외의 존재 출입 가능.

태양을 가장 유사하게 재현한 인공조명 보유. 로널드는 이 문구에 주목했다. 좋지, 요즘 피곤한 건 광합성 부족 때문일지 모른다. 이참에 일광욕이나 제대로 하자. 광고지의 접힌 틈에 낀 초대권을 꺼냈다. 로널드와 드라루크의 몫이다. 존 같은 소동물은 동반 입장이 가능하다고 했다. 가만히 초대권을 내려다보고 있자 우쭐한 드라루크가 코를 치켜들었다.

“마음껏 존경을 표하게, 애송이. 이 드라루크 님의 명성이 널리 퍼졌으니 그대가 덕을 보는 게 아닌가.”

“뭐래. 애초에 이건 리뷰 쓰라고 어텀 출판사에서 보내준 거잖아. 네가 쓰레기 게임 외의 글을 쓰는 날이 오다니, 여기 사실 엄청 수상한 곳일지도 모르겠네.”

“질투를 부정하는 방법이 참 뻔하군.”

“좋아. 도착하면 네놈을 거기 흙과 섞어버려야지.”

로널드는 방금 편지봉투에 들어간 모래를 비우고 초대권을 도로 집어넣었다. 앞으로 일주일 뒤에 개장하는 야간 식물원. 낮의 정원을 즐길 수 없는 흡혈귀를 대상으로 만들어졌다는 건물이다. 체험단으로 선정된 드라루크는 정식 개장 전 이곳을 방문하고, 보고 느낀 바를 적어내면 된다. 물론 식물원에서 홍보용으로 섭외한 거니 되도록 호의적인 시선으로 써야겠지만.

“흡혈귀가 그렇게 식물을 좋아했던가?”

거창하게 건물까지 지으면서 정원을 즐기러 오라니. 어딘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잘은 몰라도 고성에는 정원이 꼭 있지 않나. 영화 같은 데서 유리온실도 자주 나오던데. 도시 흡혈귀도 선인장 정도는 키울 수 있을 테고. 식물을 엄청 못 키우는 종특이성이라도 있나? 로널드의 의문에 드라루크가 쯧쯧 혀를 차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틀렸네요, 문해력 빵점 고릴라~ 광고지를 제대로 읽긴 한 건가. 이건 식물이 아니라 낮 체험에 의의가 있는 걸세. 나 같이 섬세한 흡혈귀는 햇볕에 닿으면 죽으니까, 그런 이를 위해 만든 안전한 낮이라는 거지. 식물원이라는 이름은 그냥 장식이라고 봐도 되네. 어차피 제일 중요한 건 그 인공조명이니.”

그러니 리뷰는 그곳이 얼마나 낮을 충실하게 재현했는가를 위주로 써야겠지. 이름 깨나 날린 리뷰어답게 드라루크는 벌써 글의 뼈대를 잡았다. 휴대폰의 타자를 두드리며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을 정리했다.

“낮을 아는 사람으로서 그대도 느낀 바를 상세히 알려주게. 다섯 살의 어휘를 최대한 고풍스럽게 살려보지.”

그동안 먹은 밥값을 해야 하지 않겠나. 낯가죽 두꺼운 소리에 로널드는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무언의 주먹으로 대신했다. 때마침 목적지 역에 도착해서, 로널드는 소풍 바구니와 존을 들고 열차에 내렸다. 풀썩이는 먼지구름이 특수효과처럼 그들을 쫓았다.

 

 

오래 산 흡혈귀는 대개 재산도 그만큼 쌓았다. 식물원 앞에 선 로널드는 이 건물은 지은 이가 그런 흡혈귀인지, 아님 그런 흡혈귀의 지갑을 노린 이인지 궁금해졌다. 그만큼 건물에는 돈 냄새가 났다.

“이 정도로 클 줄이야….”

규모가 거의 축구장이다. 새장이 축구장만큼 커지면 저런 모습일 거 같다. 건물을 뒤덮은 불투명한 외벽이 한치의 햇볕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학생 시절 소풍으로 식물원에 간 적 있지만, 지금 눈앞의 건물을 아무리 살펴본들 그때의 향수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거 오늘 안에 다 돌 수 있을까.

본격적으로 식물원에 들어가기 전 짧은 복도가 그들을 맞이했다. 로널드는 복도 벽면에 붙여진 주의문구를 읽었다. 낮의 빛을 처음 보는 경우 눈이 강하게 부실 수 있습니다. 그 옆의 매점에서는 양산에 선글라스에 햇살을 막아줄 도구가 쌓여있었다. 그가 항상 쓰는 것과 비슷하게 생긴 모자도 있었다. 모자를 슬쩍 구경하며 로널드가 말했다.

“어이, 드라루크. 너 여기서 뭐라도 사는 건 어때?”

시건방진 코웃음이 뒤에서 들렸다.

“하! 우습게 보지 말게, 인간. 진짜 태양도 아닌 빛에 내가 죽을 성싶은가. 저 정도야 이 드라드라 님에겐 익숙한 스포트라이트―”

파삭. 식물원에 한 발. 드라루크의 죽음에는 그 정도로 충분했다. 으에엥― 로널드여, 얼른 불 좀 꺼주게― 얼토당토않은 요구가 모래 언덕에서 흘러나왔다. 사역마가 제 한 몸 바쳐 주인의 몸을 덮으려 들었지만 역부족이었다. 너무나 예상했던 전개. 촌극을 지켜보는 로널드의 눈은 더없이 평온했다. 저기요, 이 양산 계산 부탁드립니다.

 

 

“확실히 고품질의 조명이긴 하군. 두통이라든가 피부 발진이라든가 전혀 나타나지 않아.”

양산 밖으로 손을 빼낸 드라루크가 평했다.

“들어가자마자 죽은 흡혈귀가 말하니 신뢰가 안 가네.”

“나야 원래 툭하면 죽지 않는가.”

아닌 척해도 드라루크는 이 상황이 제법 신기했는지 손바닥을 이리저리 뒤집으며 빛을 만져댔다. 따뜻하군. 내리쬐는 온기가 영 낯선지 금세 손을 거뒀다. 감상은 잊기 전에 기록해야 한다며 휴대폰으로 무언갈 메모했다. 광고 처음 받았다고 되게 열심이네. 로널드는 마찬가지로 매점에서 산 모자를 고쳐 썼다. 평범한 야구모자다. 존에게는 귀여운 밀짚모자를 사줬다.

“어쨌든 적응했으면 슬슬 움직이자고. 약도대로라면 시계 방향대로 움직이는 게 낫겠어. 모노레일도 재밌을 거 같으니 나중에 타자.”

로널드가 매표소에서 받은 안내문을 보며 의견을 냈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볼거리는 아열대 식물이다. 정글에 가까운 수풀을 지나면 사막의 선인장이 나온다고 한다. 다른 구역에는 큼지막한 연못과, 느긋하게 누울 수 있는 광장도 있다. 매점은 멀리 있지만 자그만 가판대가 군데군데 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파노라마 룸이란 곳도 있다. 경치를 달리 보고 싶으면 이 층의 산책로를 이용하면 된다.

고개를 들자 철제 구조의 산책로가 공중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 보이는 천장. 마찬가지로 금속 뼈대가 보이는 천장 한가운데에는 원형의 거대한 전등이 부착되어 있었다. 천장의 저것과 식물원 구석구석에 배치된 보조전등의 힘으로 이 식물원은 낮의 모습으로 변모했다.

“진짜 하늘까지 흉내 낼 줄 알았는데.”

“거기까지는 구현하기 힘들었겠지. 아니면 효율성이 떨어지거나. …우린 천장에 가득한 구름 그림을 너무 오래 보아왔다네. 내 기준에는 저 편이 훨씬 나아.”

자, 그럼 움직입시다. 드라루크가 양산을 빙그르르 돌리며 앞장섰다. 로널드는 한 번 더 전등을 응시한 뒤 터덜터덜 뒤를 따랐다.

 

 

체험단은 드라루크뿐만이 아니었다. 개장 시간에서 조금 지나자 이제 식물원에는 극장을 채울 만큼의 흡혈귀가 활보했다. 거기에 로널드와 같은 일행까지 더해져 수는 배가 되었다. 어떤 흡혈귀는 가족 단위로 등장했다. 어린아이 둘이 웃으며 로널드를 스쳐 지나갔다. 천천히 걸으라는 외침이 당연하게 따라왔다. 이런 광경은 또 그 옛날의 소풍 같다. 로널드의 기분이 점차 들떠졌다. 습한 흙 내음이 정겹게 느껴졌다.

“이 꽃은 남미에서 왔대. 어때, 존. 너도 본 적 있는 꽃이야?”

존을 들어 꽃에 가까워지도록 했다. 손안의 존은 반갑게 꽃향기를 킁킁거렸다. 그러고는 손발을 휘저으며 로널드에게 남미에서 살던 시절 이 꽃을 본 장소, 그 근처에 어린 추억, 다른 동글 가족은 어떤 꽃을 좋아했는지 들려줬다. 빠른 속도의 누누누를 듣는 로널드의 만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그건 존도 마찬가지였다.

이 순간을 사진으로 남겨야지. 로널드는 휴대폰 카메라를 전면으로 설정하고 존과 사진 찍었다. 둘의 모습은 잘 나왔으나 배경의 꽃이 살짝 가려진 게 아쉬웠다. 모래 녀석한테 찍어달라고 부탁하려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드라루크는 어느새 저 앞까지 가버렸다. 언제 저만큼 간 거야? 로널드는 다음 사진을 기약하고 얼른 뒤쫓았다. 한달음에 달려온 로널드에게 드라루크는 무신경하게 시선 한 번 줄 뿐이었다.

“너무 빠른 거 아냐?”

“그대가 느린 거야. 세 걸음 걷고 삼 분 머무르는 식이면 오늘 안에 다 못 돈다고.”

“주변을 살펴야 글 쓸 거리가 나오지.”

“그렇게 얻은 글감을 튀김기 앞에서 완성하고?”

윽. 로널드는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그렇게 나오면 할 말이 없다. 분위기에 취한 건 맞긴 하지. 조금 집중할 필요는 있… 근데 어차피 글 쓰는 건 저놈이니 난 놀아도 되지 않나.

“그래서, 빨리 가서 빨리 감상한 소감은?”

“뭐, 제법 괜찮군. 식물 구성도 감각 있고 산책로도 널찍하고. 동선을 잘 짜뒀어. 가판대의 피 품질도 훌륭해.”

드라루크가 한 손에 든 플라스틱 컵을 흔들었다. 흡혈귀가 주 고객이니 당연히 피도 판다. 드라루크는 빨대를 입에 문 채 로널드에게 약도를 보여달라 손짓했다.

“여긴 충분히 구경했으니 이제 모노레일을 탈까. 연못으로 바로 가지. 그대가 늦장을 부리기도 했고.”

모노레일은 삼 층에서 탄다. 식물원 벽면에 엘리베이터가 있으니 계단을 오를 필요는 없다. 창문으로 식물원의 정경이 한눈에 다 들어왔다. 누군가가 만든 비눗방울이 이곳까지 올라왔다. 흥분한 로널드가 유리창을 두 손으로 짚었다. 제발 여기서 봉인해둔 고릴라를 꺼내지 말라고, 드라루크가 신신당부했다.

연못은 고전적으로 꾸며졌다. 아치형의 다리와 고즈넉한 정자. 연못가에 늘어선 붓꽃, 그 위에 드리운 버드나무 가지. 수면 아래 알록달록한 무언가가 꾸물거리는가 싶더니 잉어였다. 운치 있네― 다리 난간에 기댄 로널드가 탄성을 뱉었다. 드라루크도 그 의견에 동의하는지 말없이 사진을 찍었다. 물이 맑아 바닥이 훤히 보였다. 어디선가 물줄기가 졸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 여행하는 것 같네.”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이 건물의 외관은 엄청 미래스러웠다. 내부도 전체적으로 세련됐지만 가판대 따위는 그가 아는 모습과 똑같았고, 그랬기에 그 속에서 옛 추억이 되살아났다. 그 후 또다시 미래적인 모노레일을 타고 이번에는 먼 과거의 파편 같은 연못에 도달했다. 이다음에 볼 건 미래일까, 과거일까. 괜스레 궁금해졌다.

정자 근처에서 잉어 밥을 팔았다. 그들은 정자에 잠시 머무르며 구입한 잉어 밥을 뿌렸다. 투명한 물거품이 부글거렸다.

 

 

고성을 흉내 낸 전망대에서 그들은 옛 추억을 회상했다.

“어디에 사는 누군가가 박살 낸 내 성이 떠오르는걸.”

“내 사무실 아니었으면 바로 거리의 모래가 됐을 조무래기가 떠오르는걸.”

“애초에 그대가 성을 박살 냈잖나.”

“애초부터 문단속만 잘했으면 그 꼴이 안 났지.”

“남의 집에 무단 침입한 놈이 잘못―”

“세상에, 저기에 엄청 멋진 대왕 셀러리가 있네.”

마지막 말의 주인은 로널드가 아니었다. 당연하다. 어떻게 그가 맨정신으로 그런 말을 하는가. 로널드는 척수반사급으로 펄쩍 뛰어올랐다. 다리가 제대로 굳어 낙법이고 뭐고 그냥 철퍼덕 떨어졌다. 혼란스러운 와중, 시야 정면으로 반짝임이 꽂혔다. 동그란 유리가 그들에게 겨눠졌다. 렌즈 너머로 익숙한 얼굴이 등장했다.

“멋진 도약이었네요, 로널드 씨!”

“카메야!”

벌떡 일어나 동창에게 다가갔다. 이런 곳에 아는 얼굴을 볼 줄이야. 반가움에 목소리가 높아졌다.

“취재하러 온 거야?”

“응. 이 식물원 제법 화제거든. 그러는 너도? 다음 로널드 전기에 뭔가 반영이 되나?”

“아니. 취재는 나 말고 이쪽.”

로널드가 엄지손가락으로 곁의 흡혈귀를 가리켰다. 드라루크가 자랑스레 손가락으로 브이를 만들었다.

“광고 받아서 신난 아저씨야.”

“애송이보다 일억 배 유능한 드라드라입니다~”

나부끼는 모래바람에 카메야가 얼른 카메라를 숨겼다. 역시 프로인지라 장비를 지키려는 자세가 몸에 배어있다. 재생하는 드라루크를 내버려 두고 로널드는 카메야와 대화를 이어갔다. 경쾌한 피아노 선율이 근처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식물원 관계자랑 인터뷰는 끝났어. 지금은 시민하고 진행 중인데 신요코하마 밖이라 그런지 평소랑 느낌이 다르더라.”

카메야가 전망대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로널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변태 아닌 흡혈귀가 이렇게 많다니, 되려 어색하지.”

“어쩐지 심심하단 생각도 들고.”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업종은 조금씩 달라도, 신요코하마라는 장소에서 흡혈귀를 상대하다 보면 자연히 유대감이 쌓인다. 카메야가 숨을 한 번 골랐다.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 눈치다. 또 다른 유대로, 로널드는 카메야의 다음 말을 짐작했다.

“한다도 여기 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가 먼저 선수쳤다. 카메야가 그러게― 라며 카메라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사실상 우리 중에 제일 여길 와보고 싶어 할 텐데… 그래도 다음 주에 개장하니까. 뭔가 좋은 구경거리가 있으면 정리해서 말해주자.”

로널드도 동의했다. 카메야는 슬슬 동료가 기다리고 있으니 가봐야겠다고 말했다. 일터로 돌아갈 시간이다. 신요코하마에서 만나자는 인사를 나누고, 로널드는 떠나는 카메야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어느샌가 재생 완료한 드라루크가 물었다. 한다가 식물을 좋아하느냐고.

로널드는 그를 흘깃 본 뒤 간결하게 말했다. 어머니가 흡혈귀잖아. 아하. 드라루크는 그 말에 납득한 듯 더 이상의 질문을 하지 않았다. 로널드도 구태여 더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피아노 소리만이 그들 사이를 채웠다.

 

 

파노라마 룸의 정체는 반구체의 영상실이었다. 드라루크는 그것이 무엇인지 처음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내가 어린 시절 인간 사이에서는 원통형의 벽에 그림을 그려 감상하는 게 유행했다네. 주로 풍경 그림이었는데, 그 공간 안에 있으면 그림이 진짜라는 착각이 들었지. 그 시대의 가상 현실이었어. 이 파노라마 룸은 거기서 더 발전된 형태인듯해.”

아닌 게 아니라 이곳의 가상 현실은 그림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깨끗하고 선명한 영상이 시선이 닿는 모든 곳을 뒤덮었다. 벽 자체에서 나오는 영상인 모양인지, 뿜어져 나오는 빛은 그들이 서있는 바닥까지 환하게 밝히고도 남았다. 로널드는 주홍빛 영상을 넋을 잃고 바라봤다. 저 멀리서 붉디붉은 원 하나가 지평선 바로 위에 있다. 원은 점차 일그러져 세상을 어둠으로 채우고 사라졌다. 곧이어 은은한 달과 별이 얼굴을 비추고, 그 상태가 몇 분 지속되더니 해가 사라진 정반대 방향에서 다시 붉은빛이 터져 나왔다.

천장 한가운데까지 이른 해는 희게 빛나며 새파란 하늘과 어울렸다. 구름 조각이 해를 지나갈 때마다 방의 밝기도 흐려졌다. 헉 숨을 들이켜는 소리에 로널드가 뒤를 돌아봤다. 방금 막 방에 들어온 흡혈귀 하나가 경이에 찬 얼굴로 해를 응시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함께 온 인간의 팔을 잡아 그와 해를 번갈아봤다. 노을이 시작됐을 무렵에는 울음을 터뜨리기까지 했다. 인간이 당황하며 그를 끌어안았다.

실례를 저지른 기분에 로널드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드라루크로 바꿨다. 드라루크는 울지도 웃지도 않은 채 꼿꼿하게 턱을 치켜들며 해를 좇았다. 아침의 빛과 한낮의 빛, 저녁의 빛을 모조리 눈에 담은 그는 또다시 밤이 찾아오자 이만 나가자고 말했다. 밖으로 나오며 로널드가 가볍게 한마디 했다. 넌 반응이 싱겁네. 접은 양산을 도로 피던 드라루크는 그 말에 씩 웃었다.

“익숙하니까. 해며 하늘이며 이미 사진이나 영상으로 얼마든지 만나는 시대잖는가. 보지 못한 풍경이어도 모르는 풍경인 건 아니야.”

그래도 예쁜 하늘이긴 했어. 드라루크가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몇 군데만 더 보면 완주 성공이군. 자, 서두릅시다. 망토 끝자락이 팔락이며 로널드를 지나쳤다. 로널드는 붙박인 듯 서서 멀어져 가는 그를 지켜봤다. 진녹색의 그림자가 양산 위를 유영했다. 구름의 모양으로.

 

 

순정만화에 나올 법한 화원과, 은근슬쩍 드라루크를 첨가해도 티 안 날 모래 정원, 로널드가 ‘엄청 크고 복잡하게 생긴 잔디 인형’이라고 칭한 식물 조형까지. 마침내 식물원의 모든 시설을 돌아본 그들은 광장으로 가 휴식을 취했다. 빨간 격자무늬 천을 펼쳐 바구니에 든 도시락을 꺼냈다. 로널드가 이렇게까지 챙길 필요가 있었나 중얼거렸다. 그러자 드라루크가 혀를 찼다.

“사진의 중요성을 모르는군! 리뷰에 싣는 사진이 회사원 실속 도시락이면 독자가 만족하겠나? 흡혈귀는 심미안도 높은 마당에.”

준비를 마친 드라루크는 존을 모델로 세워 쉬지 않고 사진을 찍어댔다. 존, 조금 더 동그랗게― 이번엔 어깨 펴고― 쿠키 먹어볼래? 그래, 그 미소야, 존! 포즈도 완벽해! 세상에서 가장 귀여워!

…주부 블로거. 로널드는 쿠키 하나를 입에 쏙 집어넣었다. 뇌리를 스친 단어를 굳이 밖으로 표현하진 않았다. 자신도 따라서 존의 사진 찍기를 수 분, 만족한 동거인은 이제 됐다며 로널드에게 샌드위치를 건넸다. 굶주렸던 로널드가 한입에 한 조각을 다 넣었다. 우걱우걱 씹으며 드라루크가 주는 주스를 들이켰다. 한 병 더 없냐고 물어보려던 차, 그의 얼굴이 묘하게 찝찝해 보였다. 무슨 고민 있어? 툭 던져본 질문에 드라루크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고민이라고 해야 할지…. 광고란 생각보다 어렵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야 한다는 점이.”

“뭐?”

로널드가 눈을 껌뻑였다. 드라루크는 한숨 쉬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이 식물원에 회의적이네. 별로 잘 될 것 같지가 않아.”

“왜?”

“낮의 재현율이 떨어져.”

휴대폰을 쥔 손이 화면을 쓱쓱 밀었다. 그동안의 메모를 보는 건지 드라루크는 자신이 느낀 식물원의 단점을 차분히 들려줬다.

“우선 기계음이 계속 들린다는 게 문제겠지. 모터, 환기구, 모노레일… 어디에서든 기계 소리가 들려. 노래로 어떻게든 가리려 하지만, 예민한 흡혈귀라면 금세 눈치챌 거야.”

드라루크의 손가락이 로널드의 뒤편을 가리켰다. 나뭇가지 사이로 몸을 숨긴 스피커에서 활기찬 음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듣다 보면 결국 의식할 수밖에 없어. 이건 진짜 낮이 아니라고. 이 공간의 뼈와 살은 모두 인공적으로 조성됐다고.”

“그건―”

“거기다 각각의 시설은 아름답다고 할 수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서로 조화롭지가 않아. 그대도 아까 말했잖나. 시간 여행을 하는 것 같다며. 너무 뒤죽박죽이야. 한 가지 주제를 정하고 그에 맞춰 시설을 꾸려야지, 되는 대로 담은 뷔페 요리도 아니고. 그대는 전망대와 파노라마 룸이 서로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드라루크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대답은 필요 없어 보였다.

“오롯한 낮을 체험하기엔 이 건물은 허술한 점이 가득해. 초반에는 화려함으로 그럭저럭 인기를 끌겠지만, 머잖아 누군가 지적할 걸세. 그날이 오기 전에 보완을 해야 명맥을 이어갈 수 있겠지. …어쨌든 나의 입장은 이렇지만 리뷰는 다르게 써야겠지. 바로 그것 때문에 고민 좀 해 봤네.”

일장연설을 끝낸 드라루크가 우유로 목을 축였다. 그래도 사진은 정말 잘 나온다며 존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존도 만족스러운 울음을 내었다. 하지만 로널드는….

“…넌 도대체 말이야.”

로널드는 모자를 벗고 머리를 벅벅 긁었다. 단전 깊은 곳에서 한숨이 나왔다. 눈치도 있는 놈이 가끔씩 저렇게 멍청해진다. 탄식만 뱉는 로널드의 모습에 드라루크가 게슴츠레 노려보았다. 또 무슨 소릴 하려고. 속마음이 얼굴에 쓰여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로널드는 멍하니 하늘을 쳐다봤다. 울창한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그늘을 만들어줬다. 그 사이 비치는 흰빛. 로널드는 눈을 살짝 감았다가, 드라루크 쪽으로 눈을 떴다. 하얀 빛과 짙은 그늘, 바닥에서부터 퍼지는 초록 반사광. 그것이 지금 그들을 둘러싸고 있다.

그래, 뭐. 밥값 해준다. 벌떡 일어나 드라루크의 팔을 덥석 잡았다.

“따라와.”

흡혈귀가 당황하건 말건 무작정 질질 끌었다. 어? 뭐야, 뭔데? 로널드여, 잠시만, 나 양산― 아, 하루 종일 돌아다녔으면 이제 적응 좀 해! 로널드가 짜증스레 받아쳤다. 드라루크를 끌고 간 곳은 광장 한가운데. 외곽과 달리 나무도 그늘막도 없어 빛이 곧바로 닿는 곳이다. 두 사람 다 신발을 채 신지 않아 양말 차림이었다.

드라루크가 손으로 급히 그늘을 만들었다. 한 팔은 여전히 로널드에게 잡혔다. 로널드는 드라루크의 손목을 잡고, 나머지 손으로 소매를 쭉 밀어올렸다. 꺅, 이 변태! 드라루크가 팔짝 뛰어올랐다. 가만히 좀 있어! 로널드는 용케 살인 충동을 참아냈다. 이제 빛 아래에 드라루크의 맨팔이 온전히 드러났다. 로널드가 그것을 눈앞에 들이밀었다. 자, 어때 보여.

“뭘 말인가!”

“평소랑 똑같이 보이냐? 뭐가 조금 다르지 않아?”

“혹 내 팔이 다이아몬드처럼 빛나길 바라는 거라면 난 원래부터―”

결국 드라루크를 죽이고 말았다. 재생하는 드라루크 앞에 쭈그려앉았다. 상반신은 얼추 다 만들어졌길래 다시 팔을 잡고 물었다.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이어서, 로널드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런 것까지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네 피부 말이야. 색깔이 달라.”

“뭐?”

“평소에 넌 피부가 포도 주스에 우유를 탄 것처럼 생겼거든. 근데 지금은 우유에 포도 주스를 탄 것 같아.”

“정말 다섯 살 꼬맹이다운 비유군.”

“아무튼 내가 평소에 보는 너랑 지금의 너는 다르다고. 바로 그 점이 식물원의 핵심이야.”

로널드는 드라루크의 팔을 놓아줬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여러 사람이 광장에 둘러앉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도시락을 먹거나, 악기를 연주하거나, 비눗방울을 불거나, 사역마와 함께 뛰어놀며 웃고 있다. 무엇을 하는지는 제각각이었지만 단 하나, 공통점이 있다면―

“여기 있는 사람이 전등이나 나무 구경만 하고 있어? 아니잖아. 서로를 보기 바쁘지. 밤과는 다르게 보이는 서로를. 아까 너도 말했지. 안전한 낮의 체험이라고. 그래, 이 식물원은 낮을 체험하기 위해 만들어졌어. 소중한 이와 함께하는 낮을 말이야.”

드라루크의 시선이 로널드에게 닿았다. 어느 때보다 붉은 눈동자가 그 자리에 있다. 밤이었다면 까만색이라 여겼을 정도로 짙었다. 로널드는 시선을 마주하며 말을 이어갔다. 손으로는 드라루크의 모래를 한 줌 쥐었다.

“너와 내가 햇빛 아래에 서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

모래알이 손 틈새로 떨어졌다. 흡혈귀는 태양 아래서 죽는다. 인간은 밤과 낮 모두가 허용한 존재다. 인간이 흡혈귀를 낮에 초대하고 싶어도, 흡혈귀가 언제나 인간 곁에 있고 싶어도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정해져 있다. 물론 과학은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지만,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기적이 일어날까. 로널드는 비관적이었다.

“하지만 흉내는 낼 수 있지. 지금처럼. 티는 좀 날지언정, 저 빛은 가장 태양을 닮았다는 빛이고, 눈앞의 상대는 진짜인데, 쉽사리 발길이 끊길까? 여긴 오래도록 찾는 사람이 많을 거야. 그리고 평범한 식물원에 가도 기계 소리는 들리거든?”

로널드가 계속해서 쏘아붙였다.

“낮이 무슨 무릉도원도 아니고. 밤에 있던 기계가 낮이면 사라지겠냐. 거기다 네가 말한 뒤죽박죽 주제도 그거겠지. 이 식물원을 만든 흡혈귀가 인간과 같이 가고 싶었던 장소. 이 식물원은 어떤 흡혈귀의 버킷리스트다. 그걸 다 넣으려다 보니까 살짝 과해진 거고. 하지만 싫다는 사람은 없을걸. 뷔페 음식은 종류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잖아.”

그래, 로널드는 이 건물을 지은 이가 흡혈귀라고 짐작했다. 흡혈귀가 아니고서야 느낄 수 없는 열망이다. 조금 전 파노라마 룸에서 본 연인을 떠올렸다. 울먹이던 흡혈귀와 위로하던 인간. 아마 흡혈귀는 인간을 보고 운 것일 테다. 쪽빛 하늘 아래 미소 짓고, 노을빛에 물든 얼굴을. 로널드가 방을 나가던 때에도 그들은 상대를 보는데 여념이 없었다. 얼마나 그 광경을 소망하고 있었을까.

“아무튼… 이게 내 느낀 바야.”

로널드가 어물거렸다. 할 말은 다 했는데 어떻게 끝맺어야 할지 애매했다. 머쓱하게 목을 긁적였다. 드라루크는 조용했다. 그처럼 할 말을 생각하고 있는 걸까.

“과연, 그랬던 거로군.”

드라루크가 중얼거렸다. 로널드의 이야기를 소화하는 중인 듯 느리게 움직였다. 눈을 끔뻑이고, 주변을 살피며, 멀리 있는 존을 봤다가 다시 로널드를 올려다봤다. 뭔가 아까까지와 다른 눈빛이다. 시선에 멋쩍어진 로널드가 입을 떼려던 차, 드라루크의 손이 로널드 눈앞으로 쑥 다가왔다.

놀란 로널드가 급히 몸을 뒤로 뺐다. 하지만 드라루크는 멈추지 않았다. 모래 더미에서 하반신이 나온다. 쭈그린 자세인 로널드는 중심을 잃고 기우뚱거렸다. 우유와 포도주스가 섞인 손이 그의 이마에 닿았고, 결국 로널드는 속수무책으로 넘어졌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드라루크가 로널드에 앉았다. 그의 앞머리를 힘차게 넘겼다. 몸을 비스듬히 세우고 있는지라 전등의 빛이 로널드의 눈에 직격으로 꽂혔다. 눈부셔! 로널드가 얼굴을 찌푸렸다. 손으로 가리려 했으나 빌어먹을 흡혈귀가 찰싹 때려 막았다. 흡혈귀는 손끝으로 그의 볼을 짚었다. 턱 끝과 눈썹뼈, 인중과 콧대를 제멋대로 누르고 쓸었다. 종횡무진 돌아다니던 거미 다리의 종착지는 눈꺼풀이었고, 드라루크는 그대로 로널드의 눈꺼풀을 억지로 벌렸다. 강한 빛이 망막을 파고들어 불태우는 것 같았다. 너무나도 당황스러운 상황의 연속이라, 로널드는 자신이 드라루크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

하지만 이제는 기억났다. 로널드는 몸통 박치기를 시전하여 드라루크를 흩날리는 모래로 바꿔줬다. 벌떡 일어나서는 모래 더미를 다시 발로 깠다. 갑자기, 무슨, 기행이야, 썩을, 모래! 어절마다 뒤꿈치에 힘을 실었다. 눈앞이 아직도 얼룩덜룩하다. 씨근덕거리며 앞머리를 털자, 모래로 된 손이 가볍게 사죄했다.

“미안하게 됐네. 확인하려던 게 있어서 말이야.”

“뭘 확인한다고 이래?”

로널드가 어이없이 물었다. 드라루크는 물 흐르듯 대답을 피하며 로널드를 칭찬했다.

“낮을 보는 게 아닌 낮이 담은 상대를 본다…. 제법 감상적이지 않은가. 그대에게 이런 섬세함이 있을 줄 몰랐네.”

덕분에 리뷰의 방향을 정했어. 드라루크는 휴대폰으로 새 메모를 기록했다. 화면을 계속 보며 아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조금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아아, 아까워라. 진심으로 아까워.”

로널드는 어깨너머로 드라루크의 휴대폰을 훔쳐봤다. 사진첩에 들어간 그는 식물원에서 찍은 사진을 확인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거쳐온 시설과 존 사진. 시설 사진이 더 많은 게 아쉽다면 아쉽겠지만, 그래도 존 사진도 꽤 많았고 전부 다 잘 찍혔다. 로널드가 그렇게 말하며 위로 비슷한 걸 하자, 드라루크는 딱하다는 듯한 눈으로 로널드를 봤다.

“그대는 눈썰미가 좋지만 눈치가 없군.”

“뭐라 했냐.”

“됐고, 그대는 따로 찍은 사진 없나.”

“아까 존이랑 찍은 게 있긴 한데, 너만큼 잘 찍지는―”

“나중에 보내주게.”

드라루크는 몸을 돌려 성큼성큼 존에게로 향했다. 드라루크를 끌고 간 건 자신인데, 지금은 그가 더 영문을 모르겠다. 로널드는 드라루크의 옆으로 가 발을 맞췄다.

“있잖나, 로널드여. 지금 이 식물원을 처음부터 다시 돌아보긴 어렵겠지?”

로널드가 헛숨을 뱉었다.

“당연한 소릴 하고 있어. 이제 정리하고 집 갈 시간이야. 서두르지 않으면 진짜 해가 뜬다고.”

“역시 그렇겠지.”

그 말을 끝으로 드라루크는 땅만 보며 걸었다. 어지간히 아쉬운가 보다. 동거인의 기분이 가라앉은 거 같아서, 신경 쓰인 로널드가 말을 덧붙였다.

“다음에 또 오면 되지. 우리가 뭐 오늘만 있나.”

구부정했던 드라루크의 어깨가 펴졌다. 목을 휙 돌려 로널드를 똑바로 쳐다봤다. 로널드도 그를 응시했다. 한낮의 광채 아래, 얼굴의 굴곡에 따라 생긴 그림자. 머리카락이 반사하는 광택. 선명한 피부의 질감 같은, 이 식물원에 오고 나서 줄곧 눈에 새긴 모습을. 영원히 알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모습으로, 드라루크가 입을 열었다. 다음에도 올 수 있나? 로널드가 힘주어 말했다. 당연하지.

“당장 다음 주도 좋으니 또 오자. 어쩌면 인원이 늘 수도 있겠네. 신요코하마의 친구까지 부르면 더 재밌겠지.”

“아, 재밌고말고. 아주 정신이 쏙 빠질 거야.”

안 봐도 훤히 그려지는 상황에 드라루크가 키득키득 웃었다. 웃음이 로널드에게도 옮았다. 두 사람은 실실 웃으며 친구들이 식물원의 어느 곳을 맘에 들어갈까 추측했다. 어쩐지 산들바람이 부는 것 같다. 광장의 외곽으로 향하는 동안, 빛은 영원처럼 그들을 비췄다.

 

 

피곤해 죽겠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그 말이 입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놈의 흡혈귀 림보댄서 때문에 귀가가 한 시간 더 늦어졌다. 이번 림보는 유달리 힘에 부쳤다. 로널드가 허리를 두드렸다. 요즘 집에 가면 눕기만 해서 그런가. 앞으로 스트레칭 꼬박꼬박 해줘야지. 고생했다는 듯 가로등 불빛이 어깨를 토닥였다.

아차, 아까 의뢰인과 문자 중이었는데. 퇴치하느라 답장을 깜빡했다. 품의 휴대폰을 얼른 꺼내 타자를 두드렸다. 다음 주에 뵙자는 말을 끝으로 오늘 업무는 종료다. 로널드는 걸으면서 크게 기지개를 켰다. 손이 심심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사진첩으로 넘어갔다. 휙휙 넘어가던 손가락은 어느새 식물원 때의 사진에서 멈췄다.

공중부양하고 있는 로널드와 어리둥절 뒤를 돌아보는 드라루크. 그에게 안겨 있는 존. 식물원에서의 만남 이후 신요코하마에 돌아온 카메야는 잊지 않고 사진을 보내줬다. 자신에게만 보내줬으면 좋았을 텐데. 한다한테도 보낸 덕에 그의 추태 모음집이 새롭게 갱신되었지. 마찬가지로 사진을 받은 드라루크는 그게 어지간히 맘에 들었는지 사진관에 맡겨 인화까지 했다. 사진의 행방은 모르지만, 뭐 어딘가의 상자에 셀러리 장난감 따위와 같이 있겠지. 생각만으로 소름이 돋아 양손으로 팔을 문질렀다.

사진을 넘겨 최근 날짜로 올라갔다. 이건 저번 달에 찍은 존 사진이고, 이건 이 주 전에 찍은 고양이 사진이다. 저번 주에는 충치가 생겼나 싶어서 입안을 찍어봤고 그저께는―

발을 멈췄다. 걷다 보니 벌써 사무소 앞이다. 로널드는 이 층을 올려다봤다. 캄캄한 하늘과 대조되는 환한 빛이 있다. 잠시 귀를 기울이면 그 속의 소리도 들린다. 식기가 달그락 부딪히는 소리, 드라루크가 존에게 무어라 건네는 말, 곧바로 들리는 존의 힘찬 대답까지. 로널드는 다시 고개를 숙여 그저께의 사진을 봤다. 식물원에서 다 같이 찍은 사진.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었지.

드라루크는 별 탈 없이 리뷰를 완성했다. 본인이 만족스럽게 쓴 만큼 글은 호평받았다. 그의 리뷰를 읽고 식물원에 갔다는 말도 종종 들었다. 뛰어난 통찰력이라며 추켜세우던 이가 몇 명이던가. 웃기는 일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드라루크는 게임기 스펙 비교하듯 리뷰를 써재꼈을 거다. 그것도 나름의 맛이 있었겠지만 지금처럼 두루두루 공감을 얻긴 어려웠겠지. 리뷰의 가장 큰 공헌자는 자신이었지만, 그래도 드라루크가 받는 칭찬이 딱히 탐 나진 않았다. 그러려니 싶다.

다만 카메야의 기사를 읽었을 때는 놀랐다. 식물원의 제작자라며 등장한 인물은 정말로 흡혈귀였다. 오래전 세상을 떠난 남편을 생각하며 만들었다고, 남편과 함께 하고 싶던 공간과 시간을 정리해 식물원에 담아냈다고 제작 계기를 밝혔다. 짐작은 했지만서도 사실이라고 확인받으면 기분이 또 묘하다. 로널드는 기사에 실린 흡혈귀의 사진을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미련은 없지만 그리움은 남은 눈동자.

그들은 약속을 지켰다. 약속이라고 해야 할까, 다시 놀러 가자는 말을 지켰다. 두 번째 방문 때는 사람이 미어터져서 정신이 없었다. 드라루크의 ‘존 가드!’를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세 번째 방문 때는 열기가 한숨 가라앉아 첫 번째 방문과 비슷한 분위기가 났다. 사진 찍어주는 장소도 생겨서 그들은 무리 없이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신요코하마의 친구 모두 같은 곳에서 사진을 찍었다고 들었다.

사진 감상을 마친 로널드는 휴대폰을 품에 도로 넣었다. 하늘은 여전히 새카맸다. 아침이 오려면 아직 한참 남았다. 지금은 밤의 시간, 낮에는 만날 수 없는 존재가 활개치는 시간이다. 로널드는 그곳에 살아가고 있다. 밤의 존재와 매일을 쌓아나간다. 그럴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건물 입구에 발을 디뎠다. 온기가 기다린다. 머리 위 네모난 빛을 생각하며, 로널드는 천천히 어둠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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